[참선요지] 허운 저, 박경훈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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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敬勛 譯
                                    虛雲 著
              叅禪要旨
 
 
 
 
 
 
 
 
 
 
 
 
 
 
 
 
 
 
참선요지 / 목차
 
 서 문
 
 Ⅰ, 참선의 선결 요건
 Ⅱ, 선당(禪堂)의 가르침
  
  가、 이끌어 온 말
  나, 참선 수행의 입문 방법
 
    1、도를 이루는 선결조건
     ⓵ 깊이 인과를 믿으라
     ⓶ 계율을 엄격히 지키라
     ⓷ 믿음을 굳게 가지라
     ⓸ 수행의 길을 결정하라
 
    2、참선 방법
     ⓵ 좌선이란?
     ⓶ 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⓷ 화두(話頭)와 의정(疑情)
     ⓸ 조고화두와 반문문자성
     ⓹ 생사심(生死心)과 장원심(長遠心)
     ⓺ 공부할 때의 두 가지 어려움과 쉬움
      ⅰ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 초심자의 어려움
        ㉯ 초심자의 쉬움
      ⅱ 고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 고참자의 어려움
        ㉯ 고참자의 쉬움
 
  
다,결론
 
 Ⅲ, 참선 경어(警語)
 Ⅳ, 섣달 그믐 보다(普茶) 때의 가르침
 Ⅴ, 수행과 불수행
 
 
 
 
 
 
 
 
 
 
 
 
 
 
 
 
 
 
 
 
 
 
 
 
 
  참선요지 서(參禪要旨序)
 
 
禪 極則事也 諸佛正法眼藏也 這事 言語道斷 心行處滅 非思議之所到。 達摩西來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若是箇漢 直下承當 即爲法王寵子。 向去但隨緣銷舊業 更勿作新殃 娘生鼻孔 不欠分毫 自己衣珠 何曾有失 原不需參也。
 
선(禪)이란 최고의 일이며, 모든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다。 이 일은 말로 표현할 수도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생각으로 미칠 수가 없다。 달마(達摩)스님이 인도에서 오셔서 「문자(文字)를 주장하지 않고 곧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 버리면 곧 법왕(法王)의 사랑하는 아들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인연을 따라 과거의 업(業)을 녹이고, 다시 새로운 재앙을 짓지 말라. 타고난 비공(鼻孔)이 털끝만큼도 모자람이 없거니、 자신의 옷속의 구슬을 어찌 일찌기 잃어버림이 있겠는가? 원래 찾을 것이 없다.
 
 
宋代人根漸劣 祖師對症施藥 始開參話頭法門 其實話頭亦妄想之一耳。 爲以毒攻毒 敎將所參話頭 抵敵雜念 刻刻提撕 漸至能所雙忘 截斷現業流識 到偸心死盡時節 遇境逢緣觸著關棙 忽然虛空粉碎 大地平沈 親見本來之性 於此而得大事了辦者代不乏人。 然成就人才 遠不能及唐朝之盛 何以故 人不如古故 法不會宗故。
 
송대(宋代)에 와서 사람들의 바탕이 점점 용하므로 조사(祖師)들께서는 그 증세에 맞는 약을 베풀게 되어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법문을 열었으나 그 실은 화두도 또한 망상의 하나일 뿐이다. 독(毒)을 독으로 공격하기 위하여 화두 참구하는 법을 가르쳤으니 잡념을 상대하여 시시로 이끌어 가면 점점 주관과 객관이 다 없어지는데 이르러, 나타난 업과 흐르는 심식(心識)은 끊어질 것이며、 좋지 않은 마음이 소멸되는 때에 다달으면 객관의 대상을 대하거나 반연을 만나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홀연히 허공이 무너지고 대지가 가라앉는 듯하여 본래의 성품을 볼 것이다。 이것은 큰일(大事)을 판단해 마친 것이며 남들이 얕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성취하는 사람이 멀리 당(唐)대의 왕성함에 미치지 못하니 그 이유는 사
람들이 옛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요, 법은 종취를 회통치 못했기 때문이다.
 
 
往年吾師 虛雲老人 領雲門時 爲救時病 不惜眉毛 拈出參禪要旨 先後提示累萬餘言 已輯載 老人法彙書內 讀之者 始恍然知歸焉。 老人特別指出話頭話尾之分 曰 『話從心起 心是話之頭』 曰 『所謂話頭 卽是一念未生之際 一念才生已成話尾』 曰 『死死握著一片敲門瓦子 念著念佛是誰這箇話頭 成了念話頭 以爲如此 可以起疑情 得開悟 殊不知這是 在話尾上用心 乃是生滅法 終不能到一念無生之地』
 
지난 날, 나의 스승이신 허운(虛雲) 노사(老師)께서 운문산(雲門山)을 통솔 하실 때, 당시의 병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참선의 요지를 염출(拈出)하여 선후를 제시한 것이 수 많은데 이미 허운화상의 어록에 실려 있다. 이를 읽은 사람은 비로소 나아갈 길을 분명히 알 것이다. 허운화상이 특별히 화두(話頭)와 화미(話尾)를 지적해서 분별하여 말하기를 「말이란 마음으로 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은 바로 말의 원천頭]이다」하였다。 또 「이른바 화두란 곧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 한 것이며, 한 생각이 일어나기만 해도 이미 화미(話尾)를 이룬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죽도록 문을 두들기는 한 조각의 개와장을 쥐고 집착하는 것이며,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염(念)할 뿐이니 이러한 화두는 염화두(念話頭)를 이룰 뿐이다. 이와 같이 하면 의정(疑情)이 일어나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화미(話尾)에서 용심(用心)하는 것이므로 이는 곧 생명의 법이며, 마침내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알지 못한다」하였다。
 
 
凡此 皆言前人所未言之寶貴法語也 此外如指出四種境界病 及對治之藥 亦老婆心切 得未曾有。 香港佛經流通處林俠菴居士 讀法彙竟 尤愛此節 因而唱印單行小册 廣渡有情 善哉 善哉。 林公具此擇法眼睛 如探驪龍得其頷珠矣。
 
무릇 이것은 고인들이 말하지 못한 귀중한 말씀이다. 이 외에도 네 가지 경계에 대한 병(四種境界病)과 및 그 병을 대치하는 약을 가르쳤으니, 또한 노파심의 간절함이 일찌기 없었던 일이다. 홍콩의 불경유통처(佛經流通處) 임협암(林俠菴) 거사가 이 법문을 읽고는 더욱 이 구절을 좋아했다。 인하여 단행본 소책자로 만들어 널리 중생들을 제도코자 했다. 좋은 일이며 좋은 일이다. 임선생은 법을 가려내는 안목이 높으므로 용에서 구슬을 찾음과 같다.
 
 
 
前賢瞿汝稷有言 『生於萬物之中而得爲人 人而男 男而知讀書 於書知讀竺墳於竺墳知宗門 是猶毂乳而得雪山之牛 復能得酪於乳 得生酥於酪 而熟酥而醍醐哉』 嘻 人身難得 佛法難聞 中國難生 知識難遇。 吾人幸値 老人出世 盡破四難 林公諸位 聞法信受 擧獻大衆 經云 『諸供養中 法供養最』 如斯功德 豈算數譬喩之所能及耶。 邇者 飛函索吾爲序 數千里外 聲應氣求 五百世前 因晐果海不辤謭陋 强添錦上之花 隨順衆情 竟著佛頭之糞 
- 時 佛歷二千五百年 丙申 初夏 釋融熙 序 于馬來亞 佛學社 導師室
 
옛 성현 구여직(瞿汝稷)은, 「만물 중에 태어나 사람이 되었고、 사람으로서 남자가 되었으며、 남자로서 책을 읽을 줄 알고, 책 중에서도 불경과 삼三황제의 글을 읽을 줄 알고, 불경과 삼三황 오五제의 글(書) 중에도 가장 중심되는 종취를 알았으니, 이것은 마치 설산에서 자란 소의 우유에서 다시 낙(酪)을、낙에서 소(酥)를、 소에서 제호(醍醐)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아아、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고, 불법을 듣기도 어려우며, 중국에 태어나기도 어렵고, 선지식을 만나기도 어렵다. 우리들은 다행하게도 노사의 출세를 만나서 네 가지 어려움을 다 해결했으며 임선생 등 여러 사람은 법을 듣고 믿어 대중에 바쳤고、 이같은 공덕을 경에 이르기를 「여러 가지 공양 중에 법공양이 최고라」고 했으니 어찌 숫자로 비유할 수 있으리오.
 
멀리서 편지를 보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니, 수천리 밖에서 기운을 구함에 소리가 응한 것이다。 5백년 전의 인연의 결과라 천박하고 용렬함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억지로 비단 위의 꽃에 더러움을 더했으며、 여러 사람의 뜻에 따르기 위하여 부처님 머리에 똥칠을 하노라.
 
불기 二五○○년 병신 초여름。
말레지아 불학사(佛學社) 도사실(導師室) 석 융희(釋融熙) 서(序)
 
 
 
 
 
 
 
 
 
 
 
 
 
 
 
 
 
 
 
참선요지(參禪要旨)
 
 
 
Ⅰ, 참선의 선결조건
 
參禪的目的 在明心見性。 去掉自心的汚染 實見自性的面目 汚染就是妄想執著 自性就是如來智慧德相。 如來智慧德相 爲諸佛衆生所同具 無二無別。 若離了妄想執著 就證得自己的如來智慧德相 就是佛 否則就是衆生。 祗爲你我從無量劫來 迷淪生死 染污久了 不能當下頓脫妄想 實見本性 所以要參禪 因此參禪的先決條件 就是 除妄想 妄想如何除法 釋迦牟尼佛說的很多 最簡單的莫如 「歇即菩提」 一箇 「歇」 字。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오염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기 성품의 참 모습을 본다. 오염이란 이 망상과 집착으로 이루어진 것이요、 자기의 성품이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었으므로 둘도 다르지도 않다. 만약 망상과 집착을 버리면、 자신의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증득하여 곧 부처가 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하면 곧 중생이다.
 
다못 그대와 나는 무한한 시간을 오면서 어리석게 삶과 죽음의 사이에 빠져 오염(汚染)된지 오래이므로 능히 그 자리에서 망상을 버리고 참되게 본성(本性)을 보지 못하는 까닭으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참선의 선결 조건은 망상을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망상을 버리는 법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쉬면 곧 깨닫는다」고 하신 이 「쉼」 만 같은 것은 없다.
 
 
禪宗由達摩祖師傳來東土 到六祖後 禪風廣播 震爍古今。 但達摩祖師和六祖開示學人最緊要的話 莫若 「屏息諸緣 一念不生」 屏息諸緣 就是萬緣放下 所以 「萬緣放下 一念不生」。 這兩句話實在是參禪的先決條件 這兩句話如果不做到 參禪不但是說沒有成功 就是入門都不可能。 蓋萬緣纏繞 念念生滅 你還談得上參禪嗎。
 
선종(禪宗)은 달마조사께서 동토(東土)에 오셔서 육六조(祖)에 이른 후에 선풍이 널리 퍼져 고금(古今)에 떨쳤다. 오직 달마대사께서 육六조를 교화하고 학인들을 가르친 가장 긴요한 말씀으로 「모든 반연을 쉬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모든 반연을 쉬라는 말은 모든 반연을 버리라
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반연을 버리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 두 귀절의 말씀은 실로 참선의 선결 조건이며, 이 두 귀절의 말씀과 같은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면 참선은 오직 말 뿐이며, 성공할 수 없어, 그 입문(入門)이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 가지 반면에 얽혀、 생각 생각이 생멸하면, 그대는 말로만 참선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萬緣放下 一念不生」 是參禪的先決條件 我們既然知道了 那末 如何不能做到呢。 上焉者一念永歇 直至無生 頓證菩提 毫無絡索。 其次則以理除事 僚知自性本來淸淨 煩惱菩提 生死涅槃 皆是假名 原不與我自性相于。 事事物物 皆是夢幻泡影。 我此四大色身 與山河大地 在自性中 如海中的浮漚一樣 隨起隨滅無礙本體。 不應隨一切幻事的生住異滅 而起欣厭取捨通身放下 如死人一樣自然根塵識心消落 貪嗔癡愛泯滅。 所有這身子的痛癢苦樂飢寒飽暖榮辱生死 禍福吉凶 毁譽得喪 安危險夷 一概置之度外 這樣才算放下一放下 一切放下 永永放下 叫作萬緣放下 萬緣放下了 妄想自消 分別不起 執著遠離。 至此一念不生 自性光明。 全體顯露 至是參禪的條件具備了 再用功眞參實究 明心見性才有分。
 
「모든 반연을 버리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참선의 선결 조건이라고 우리들이 이미 알았다면,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  위에서 한 생각이 영원히 쉬면 곧 바로 머무름이 없는 깨달음을 담박에 증득하여 털끝만치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이치로서 현상을 다스리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모두 거짓 이름 뿐이며, 원래 나와 자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모든 사물은 다 꿈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으며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나의 이 사대(四大)의 몸과 산하대지(山河大地)는 자신의 성품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바다 가운데 뜬 거품과 같아 일어났다가 꺼졌다가 함이 걸림이 없는 본체 그대로이다. 
 
일체의 허망한 일인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것을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 것이며, 전체를 버려 죽은 사람과 같은 모양이 되면 자연히 감각이 객관 세계를 통한 식심(識心)이 없어질 것이며,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애착하는 마음도 없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몸을 통한 고통과 즐거움과 배고프고 춥고 배부르고 따뜻함과 영화와 욕됨、 삶과 죽음、 재화와 복、 길함과 흉함, 헐뜯음과 칭찬함、 얻음과 잃음, 안전함과 위태로움, 험함과 평탄함 등의 이 모든 것을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버려 버리고, 이와같이 수를 셈하는 것도 버리고 하나도 버리고 일체도 버려서 길이길이 버리면、 모든 반연을 버렸다고 말할 수 있으며, 모든 반연을 다 버린 것이다. 따라서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고 분별은 일어나지 않아 집착은 멀어질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성품에서 나오는 광명이 전체에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참선의 조건이 구비된 것이며、 다시 노력하여 진실로 참구(參究)하면,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日來常有禪人來問話 夫法本無法 一落言詮 即非實義。 憭此一心 本來是佛直下無事 各各現成 說修說證 都是魔話。 達摩東來 「直指人心 見性成佛」 明明白白指示 大地一切衆生都是佛。 直下認得此淸淨自性 隨順無染 二六時中 行住坐臥 心都無異 就是現成的佛不須用心用力 更不要有作有爲 不勞纖毫言說思惟。 所以說成佛是最容易的事 最自在的事而且操之在我 不假外求。 大地一切衆生 如果不甘長劫輪轉于四生六道 永沈苦海 而願成佛 常樂我淨 諦信佛祖誠言 放下一切 善惡都莫思量 箇箇可以立地成佛。 諸佛菩薩及歷代祖師 發願渡盡一切罪生 不是無憑無據空發大願 空講大話的。
 
근래에 참선하는 사람들이 항상 대화하기를 「대저 법은 본래 법이 아니며、한번 언어(言語)의 표현에 떨어지면, 곧 진실한 뜻이 아니다。 이 일심(一心)을 밝히면 본래 부처이며 당장에 아무런 일도 없고 모든 것이 눈 앞에서 각각 완성되는데,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마(魔)의 이야기다」라고 한다.
 
달마스님이 동토(東土)에 오셔서 「곧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고 하심은 명백한 가르침이며 대지의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이다. 당장에 이 청정한 자기의 성품을 알면, 모든 것을 따라도 물들지 않으며, 하루 24시간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워도 마음은 도무지 변하지 않으니, 이것이 완성된 부처로서 마음을 쓸 필요도 힘을 들일 필요도 없어, 다시는 지을 것도 해야할 것도 없어, 털끝만한 말이나 생각도 필요치 않다.
 
이렇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일은 가장 쉬운 일이요, 가장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있는 일이요,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  대지의 일체 중생이 오랜 겁동안에 사생(四生)과 육도(六道)에 윤회하며, 길이 괴로움의 바다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부처를 이루어 영원하고 즐거우며, 진실한 자아와 깨끗하기를 원하니, 진실로 부처님과 조사의 정성된 말씀을 믿어 일체를 버리고, 선도 악도 모두 사량(思量)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역대의 조사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하였으니, 이것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니、 공연히 발원했으며 헛되이 말했겠는가?
 
 
上來所說 法爾如此 且經佛祖反覆闡明 叮嚀囑咐 眞語實語 并無絲毫虛誑。 無柰大地一切衆生 從無量劫來 迷淪生死苦海 頭出頭沒 輪轉不已 迷惑顛倒 背覺合塵。 猶如精金投入糞坑 不惟不得受用 而且染污不堪。 佛以大慈悲 不得已說出八萬四千法門 俾各色各樣根器不同的衆生 用來對治貪瞋癡愛等八萬四千習氣毛病。  猶如金染上了各種汚垢 乃敎你用鏟用刷用水用布等來洗刷琢抹一樣。 所以佛說的法 門門都是妙法 都可以了生死 成佛道。 只有當機不當機的問題 不必强分法門的高下。 流傳中國最普通的法門爲宗教律淨密 這五種法門 隨各人的 根性和興趣 任行一門都可以。 總在一門深入 歷久不變 就可以成就。
 
위에서 설한 바가 으례히 그러한 것이므로 부처님과 조사께서 거듭거듭 밝혀 정녕히 부촉하신 진실한 말씀에는 터럭 만큼의 헛됨과 거짓이 없다。 아니、 대지의 일체 중생이 한없는 세월을 내려 오면서,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 나왔다가 들어 갔다가 하면서 윤회를 그치지 않으니, 미혹하여 뒤집히고,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합했기 때문이다. 마치 순금이 똥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아서 사용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 더러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큰 자비심은 그냥 있을 수 없어 8만 4천의 법문을 설하여 각양각색의 근기가 같지 않은 중생들의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애착하는 마음 등、 8만 4천 번뇌의 병을 대치하신 것이니, 마치 순금 빛깔 위의 여러가지 더러운 때를 닦고 씻고, 또는 물이나 헝겁 등을 사용하여 한 모양으로 깨끗이 함을 가르친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법은 모두가 다 묘한 법이며, 모두가 생사(生死)를 해결할 수 있는 도이다.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아니한가의 문제이니 구태여 법문의 높고 낮음을 나눌 필요가 없다. 중국에 전래한 일반적 법문은 종(宗)과 교(敎)와 율(律)과 정토(淨土)와 밀교(密敎)이다. 이 다섯 가지 법문은 모든 사람들의 근기와 성품을 따라서 교화하기 위해서이니 한 부분만 수행해도 좋을 것이다。 모두가 한 문에 깊이 들어감에 있으니,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나아가면 틀림없이 성취할 것이다.
 
 
宗門主參禪 參禪在 「明心見性」。 就是要參透自己的本來面目 所謂 「明悟自心 徹見本性」 這箇法門 自佛拈花起 至達摩祖師傳來東土以後下手功夫屢有變遷。
 
종문(宗門)은 참선을 주로한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소위 「밝게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 똑똑히 본래의 성품을 본다」는 이 법문은 부처님께서 연꽃을 드신 것으로부터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 이후에 이르기까지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번 변했다.
 
 
在唐宋以前的禪德 多是由一言半句 就悟道了 師徒間的傳授 不過以心印心并沒有什麼實法 平日參問酬答 也不過隨方解縛 因病予藥而已 宋代以後 人們的根器陋劣了 講了做不到譬如說 「放下一切」 「善惡莫思」 但總是放不下 不是思善 就是思惡 到了這箇時候 祖師們不得已 採取以毒攻毒的辦法 敎學人參公案 或是看話頭 甚至于要齩定一箇死話頭 敎你齩得緊緊 剎那不要放鬆 如老鼠啃棺材相似 齩定一處 不通不止 目的在以一念抵制萬念 這實在是不得已的辦法 如惡毒在身 非開刀療治 難以生效。
 
당(唐)、 송(宋) 이전의 선사들은 흔히 한 마디의 말이나, 반 귀절의 말로 도를 깨달았다. 스승과 제자가 사이에 전수(傳授)하는 것도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가하는데 지나지 않아, 어떠한 실법(實法)이 있음을 인정치 않았다. 일상 생활에서 묻고 대답하고, 그 경우를 따라서 풀어 주고 속박하는데 불과하여 병을 보아서 약을 줄 뿐이었다.
 
송대(宋代) 이후, 사람들의 근기가 비열하여, 알려 주어도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비유하면 「일체를 놓아라」 「선(善)도 악(惡)도 생각하지 말라」 했으나, 모든 것을 놓아 버리지 못하며、 선은 생각하지 않고, 악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 조사(祖師)가 부득이 독(毒)으로써 독(毒)을 쳐부수는 법을 채택하여 학인에게 「공안(公案)을 참구하여라」 또는 「화두(話頭)를 보아라」라고 가르쳤다. 심지어는 일정한 하나의 죽은 화두를 파고들게 해서 그로 하여금 긴급히 계속하여 찰라도 흐트러지지 말라고 한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 궤짝을 뚫는 것과 같이 정해진 한 곳만 파면 뚫어져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한 생각으로써만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다. 마치 저 악의 독이 몸에 있으니,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古人的公案多得很 後來專講看話頭 有的 「看拕死屍的是誰」 有的 「看父母未生以前 如何是我本來面目」 晚近諸方多用 「看念佛是誰」 這一話頭 其實都是一樣 都退平常 并無奇特 如果你要說 看念經的是誰 看持呪的是誰 看拜佛的是誰 看喫飯的是誰 看穿衣的是誰 看走路的是誰 看睡覺的是誰 都是一箇樣子。
 
옛 사람들의 공안(公案)이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보라고만 가르쳤다. 흔히 「저 시체를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군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 등이 있으며, 근래에 와서 제방에서 흔히 쓰는 것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은 이 누구인가」 하는 하나의 화두 뿐이다. 그 실은 다 같은 것이며, 일반적인 것이며、 별로 기특한 것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요점을 말하면、 「경을 읽는 것은 누구며、 주문을 외우는 것은 누구며,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은 누구며、 밥을 먹는 것은 누구며、 옷을 입는 것은 누구며、 길을 가는 것은 누구며, 잠을 자고 깨는 것은 누구인가?」 하는 이 모두는 같은 형식의 화두이다.
 
 
誰字下的答案 就是心話從心起 心是話之頭念從心起 心是念之頭 萬法皆從心生 心是萬法之頭其實話頭 即是念頭念之前頭就是心直言之 一念未生以前就是話頭 由此 你我知道 看話頭就是觀心 父母未生以前的本來面目 就是心 看父母未生以前的本來面目 就是觀心性即是心 「反聞聞自性」 即是反觀觀自心 「圓照淸淨覺相」 淸淨覺相 即是心 照即觀也。
 
「누구냐?」 라는 물음의 답은 마음이니, 말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이 말의 머리요, 생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다。 만법이 다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마법의 머리이다。 실로 화두는 곧 이 염두(念頭)이며, 생각 전에는 이 마음이다. 곧바로 말하면 한 생각도 생기기 이전에 화두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대와 내가 도를 알려면 화두를 보아야 하며, 이것은 곧 관심(觀心)인 것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이 마음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본다는 것은 곧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는 것은 곧 관하는 것을 돌이켜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이다. 「원만히 청정한 깨달음을 비춘다」고 하는 청정한 깨달음은 곧 이 마음이며, 비춤은 곧 봄이다.
 
 
心即是佛 念佛即是觀佛 觀佛即是觀心所以說「看話頭」 或者是說 「看念佛是誰」 就是觀心 即是觀照自心清淨覺體 即是觀照自性佛心即性 即覺即佛 無有形相方所 了不可得 清淨本然 周徧法界 不出不入 無往無來 就是本來現成的清淨法身佛 行人都攝六根 從一念始生之處看去 照顧此一話頭 看到離念的清淨自心 再緜緜密密 恬恬淡淡寂而照之 直下五蘊皆空 身心俱寂 了無一事 從此晝夜六時 行住坐臥 如如不動 日久功深 見性成佛 苦戹度盡。
 
마음이 곧 부처이며, 염불(念佛)이란 곧 관불(觀佛)이며, 관불은 곧 관심(觀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부처를 생각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살피라고 말했는데 이는 관심이며,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당체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 성품의 부처를 관조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곧 성품이며、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마음이란 형상과 방향과 장소가 없으므로 마침내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청정한 그대로요、 법계에 두루하여 나온 것도 들어 간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본래 완성된 청정한 법신의 부처다. 수행하는 사람이 육六근(根)을 거두어 들여 한 생각이 비로소 일어나는 곳을 쫓아 살피고, 한 화두를 비추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면밀히 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하고 비추어 보면, 곧 바로 오五온(蘊)이 다 공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하여 마침내 한 일도 없게 된다. 밤이나 낮이나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결같이 하여, 날이 더하고 공덕이 깊어지면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어 고통은 없어지고 제도하는 일은 끝날 것이다.
 
 
昔高峯祖師云 「學者能看箇話頭 如投一片瓦塊在萬丈深潭 直下落底 若七日不得開悟 當截取老僧頭去」 同參們 這是過來人的話 是眞語實語 不是騙人的誑語啊。
 
옛날 고봉(高峯) 조사가 이르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 화두를 살피기를, 마치 한 개의 개와쪽을 만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지면 곧 바로 못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이 같이 하였으되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나의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동참하는 이들이여、 이 옛 사람의 말씀은 진실한 말이지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허망한 말이 아니다.
 
 
然而爲什麽現代的人 看話頭的多, 而悟道的人沒有幾箇呢 這箇由于現代的人 根器不及古人 亦由學者對參禪看話頭的理路 多是沒有摸淸 有的人東參西訪 南奔北走 結果閙到老 對一箇話頭還沒有弄明白 不知什麼是話頭 如何才算看話頭 一生總是執著言句名相 在話尾上用心 「看參佛是誰」呀 「照顧話頭」呀 看來看去 參來參去 與話頭東西背馳 那裏會悟此本然的無爲大道呢 如何到得這一切不受的王位上去呢 金屑放在眼裏 眼只有瞎 那裏會放大光明呀 可憐啊 可憐啊 好好的兒女 離家學道 志願非凡 結果空勞一場 殊可悲憫。
 
그러나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고, 도를 깨닫는 사람은 적은가? 이것은 현대인의 근기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배우는 자가 참선을 하는데 화두의 이치만 논하여、 흔히 깨끗함을 잊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남쪽으로, 북쪽으로 분주하게 싸다니다가, 늙음에 이르러 한개의 화두를 대하여 도리어 희롱에 빠짐이 명백하니, 무엇이 화두이며 어떻게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언구(言句)와 명상(名相)에 집착하여 말꼬리에만 마음을 쓰면서、 「부처님께 참례하는 이는 누구인가?」 「화두를 비추어 보라」하면서 화두를 참구해 가면서 화두와 더불어 동서로 어긋난다. 어떻게 이 속에서 본연의 함이 없는 대도(大道)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일체를 받지 않는 최고의 자리(王位)에 도달하리요? 금 가루를 눈에 넣으면, 눈이 멀 것인데 어떻게 큰 광명을 볼 수 있겠는가? 가련하고 가련한지고. 나이 어린 소녀가 집을 떠나 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 뜻과 원은 비범하지만 결과는 헛될 뿐이니, 가히 불쌍하도다.
 
 
古人云 「甯可千年不悟 不可一日錯路」 修行悟道 易亦難 難亦易如開電燈一樣 會則彈指之間 大放光明 萬年之黑暗頓除 不會則機壞燈毁 煩惱轉增 有些參禪看話頭的人 著魔發狂 吐血罹病 無明火大 人我見深 不是很顯著的例子嗎 所以用功的人 又要善于調和身心 務須心平氣和 無罣無礙 無我無人 行住坐臥 妙合玄機。
 
옛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의 길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또한 어려우며、어렵고도 또한 쉬운 것이다。 전기불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면 손가락 한번 튕기는 사이에 큰 광명을 비춰 만년의 어두움을 한꺼번에 없애며、 알지 못하면 기회는 놓치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욱 더해 진다. 
 
잠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한 사람이 마(魔)에 집착하여 발광(發狂)하고 피를 토하고 병을 앓고, 무명(無明)의 불꽃이 커져 남이라는 소견과 나라는 소견이 깊어지는 것은 현저한 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몸과 마음을 잘 조화(調和)하며,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氣)를 고르게 하기를 힘써、 구애도 걸림도 없고, 나라는 소견과 남이라는 소견도 없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울 때에도 묘하게 현묘한 기틀에 합해야 한다.
 
 
參禪這一法 本來無可分別 但做起功夫來 初參有初參的難易 老參有老參的難易 初參的難處在什麼地方呢 身心不純熟 門路找不淸 功夫用不上 不是心中著急 就是打盹度日 結果成爲 「頭年初參 二年老參 三年不參」 易的地方是什麽呢 只要具足一箇信心 長永心 和無心 所謂信心者 第一信我此心 本來是佛 與十方三世諸佛衆生無異 第二信釋迦牟尼佛說的法 法法都可以了生死 成佛道 所謂長永心者 就是選定一法 終生行之 乃至來生又來生 都如此行持參禪的總是如此參去 念佛的總是如此念去 持呪的總是如此持去 學敎的總是從聞思修行去 任修何種法門 總以戒爲根本 果能如是做去 將來沒有不成的。
 
참선이라는 이 한 법은 본래 가히 분별할 수 없으며, 다만 공부해 가는데 처음 참구하는 이는 처음대로 어려움과 쉬움이 있고, 오랫 동안 참구한 이에게는 오래된 대로 어렵고 쉬움이 있다。 처음 참구하는 이의 어려움이란 무엇인가? 몸과 마음이 순일하고 익숙하지 못하여 나아갈 길이 맑지 못하고、 공부를 하여도 향상되지 않으며, 마음에 급하다는 생각이 없어 눈을 감고 세월만 보내나니、 「초년은 처음 참구함이요、 2년째는 오랫동안 참구함이요, 3년째는 참구하지 않음」이라는 결과를 이룰 뿐이다.
 
쉬움이란 무엇인가? 오직 하나의 신심(信心)을 갖춘 것으로서 영원한 마음[長永心]과 무심(無心)함을 요한다. 이른바 신심이란 것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지방 세계의 모든 중생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요, 둘째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그 모든 법이 생사를 요달하여 부처를 이루는 도(道)임을 믿는 것이다.
 
이른바 영원한 마음[長永心]이란, 어떤 한 법을 선정(選定)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되、 내생과 후 내생에 이르도록 이와같이 수행함을 말한다. 참선을 이와 같이 참구하며, 염불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주문도 이와 같이 주문하며、 교학도 이와 같이 들어서 생각하고 수행한다. 어떠한 법문을 수행하더라도 다 계(戒)가 근본이 된다. 과연 능히 이와 같이 수행하면 장차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溈山老人說 「若有人能行此法 三生若能不退 佛階決定可期」 又永嘉老人說 「若將妄語誑衆生 永墮拔舌塵沙劫」 所謂無心者 就是放下一切 如死人一般 終日隨衆起倒 不再起一點分別執著 成爲一箇無心道人 初發心人 具足了這三心 若是參禪看話頭 就 「看念佛是誰」 你自己默念幾聲 「阿彌陀佛」 看這念佛的是誰 這一念是從何處起的 當知這一念不是從我口中起的 也不是從我肉身起的 若是從我身 或口起的 我若死了 我的身口猶在 何以不能念了呢。
 
위산(霧山) 노사는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법을 수행하되 삼三생(生)을 능히 물러서지 않는다면 결코 부처의 자리를 얻을 것이다」하였고, 또 영가(永嘉) 노사는 「만약 망녕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영원히 발설(拔舌)지옥에 떨어져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세월을 보낼 것이다」라고 했다.
 
이른바 무심(無心)이란,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아 종일토록 여러 가지를 따라 일어나고 앉지만 다시는 하나의 분별이나 집착도 일으키지 아니하여 한 무심도인(無心道人)을 이루는 것이다.
 
처음 수행하려는 마음을 낸 사람이 이 세 가지 마음을 구족하면, 만약 이 참선에서 화두를 드는 것이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가」를 살피는 것과 같다. 네 스스로가 묵념했다가 몇 번 소리를 내어 「아미타불」을 부를 때, 「염불하는 이는 누구며 이 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일어났는가?」 한다. 마땅히 알라. 이 한 생각은 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나의 육신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만약 나의 몸이나 혹 입으로부터 나왔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나의 몸과 입이 오히려 존재할 것이니 어찌 생각하지 못하는가? 
 
 
 
當知此一念是從我心起的 即從心念起處 一覷覷定 驀直看去 如貓捕鼠 全副精神集中于此 沒有二念 但要緩急適度 不可操之太急 發生病障 行住坐臥 都是如此 日久功深 瓜熟蒂落 因緣時至 觸著掽著 忽然大悟 此時如人飲水 冷煖自知 直至無疑之地 如十字街頭見親爺 得大安樂。
 
마땅히 알라。 이 한 생각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났으니, 곧 마음으로부터 생각이 일어난 곳을 찾아 그 자리를 결정하여 똑바로 살피기를、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온전히 정신을 여기에 집중하면 두 가지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
 
다만 느리거나 급하게 하지 말고 그 도를 적당히 해야 하므로 너무 조급하게 하지 말라. 조급히 서두르면 병과 장애가 생길 것이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모두들 이와 같이 해가 가고 공부가 깊어지면、 참외가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인연이 이르면 잡거나 밀거나 홀연히 크게 깨달을 것이다. 이 때 사람이 물을 마심에 그 차고 뜨거움은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곧 의심할 것 없는 경지에 이르러 네거리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것과 같으니, 큰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老參的難易如何呢 所謂老參 是指親近過善知識 用功多年 經過了一番煅練身心純熟 理路清楚 自在用功 不感辛苦。 老參上座的難處 就是在此自在明白當中停住了 中止化城 不到寶所 能靜不能動 不能得眞實受用 甚至觸境生情取捨如故 欣厭宛然 粗細妄想 依然牢固 所用功夫 如冷水泡石頭 不起作用久之也就疲懈下去 終于不能得果起用。 老參上座 知道了這箇困難 立即提起本參話頭 抖擻精神 于百尺竿頭 再行邁進 直到高高峯頂立 深深海底行 撒手縱橫去 與佛祖體相見 困難安在 不亦易乎。
 
오랫 동안 구한 이의 어렵고 쉬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 바 오래 참구한 사람은 친근하여 선지식(善知識)을 지났음을 가리키며、 오랫 동안 공부를 하였으므로 한 차례 단련되었으므로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해져서 참선의 뜻이 맑아졌으며,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으므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오래 참구한 사람의 어려움이란、 자재롭고 명백하므로 중간에서 머무는 것이다。 화성(化城)의 중간에서 머무르니,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함이다. 또 고요하기만 하고 움직임이 없으며, 능히 진실한 수용(受用)을 얻지 못한다. 심지어는 객관 세계를 대하면 곧 감정을 내어 취하고 버리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완연하다. 크고 작은 망녕된 생각이 자연스럽게 굳어져、 하고 있는 참선공부가 얼음물과 거품이 부딪치는 바위와 같아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오래되면 피로하고 게을러지며、 마침내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다.
 
오래 참구한 사람은 길을 알아 모든 곤란을 해결했으니, 서면 곧 본래 참구하는 화두를 일으켜 정신을 들어 백척이나 되는 찰간 위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 곧 높고 높은 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다니되 손을 놓고 마음대로이니, 부처님이나 조사와 서로 봄이니, 곤란이 어찌 있으며,또한 쉽지 않겠는가. 
 
 
話頭即是一心 你我此一念心 不在中間内外 亦在中間內外 如虛空的不動而徧一切處。 所以話頭不要向上提 也不要向下厭 提上則引起掉擧 厭下則落于昏沈 違本心性 皆非中道。 大家怕妄想 以降伏妄想爲極難 我告訴諸位 不要怕妄想亦不要費力去 降伏他你只要認得妄想 不執著他 不隨逐他 也不要排遣他 只不相續 則妄想自離 成謂 「妄起即覺 覺妄即離」。
 
화두란 곧 한 마음[一心]이니, 그대와 내가 이 한 생각의 마음이며, 중간이나 안팎이 없으며, 또한 중간이나 안팎이 없으므로 허공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곳에 두루 한다. 그러므로 화두를 들때 위로 끌어 올리려고도 하지 말고 또 밑으로 끌어 내리려고도 하지말라。 위로 끌어 올리려고 하면 시끄럽고 어지러움(掉擧)이 일어나고, 아래로 끌어 내리려고 하면 혼몽한 데[昏沈] 떨어지니 본래의 심성(心性)을 어기므로 다 중도(中道)가 아니다.
 
대가(大家)가 망상(妄想)을 두려워하여 망상을 항복함을 가장 어려움으로 여긴다。 내가 여러분에게 아뢰노니 망상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한 노력을 허비하지도 말라。 망상을 항복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스스로 망상을 인식하고, 저에 집착하지도 말며, 저를 배척하려고도 말며, 오직 망상이 계속되지만 않게 하면 망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이른바 「망상이 일어나면 곧 망상인 줄 깨닫고 망상인 줄 깨달으면 곧 없어질 것이다」 함이다. 
 
 
若能利用妄想做功夫 看此妄想從何處起 妄想無性 當體立空 即復我本無的心性 自性清淨法身佛 即此現前 究實言之 眞妄一體 生佛不二 生死涅槃 菩提煩惱 都是本心本性 不必分別 不必欣厭 不必取捨 此心清淨 本來是佛 不需一法 那裏有許多羅索 ———— 參。
 
만약 능히 망상을 이용하여 공부를 하되、 이 망상이 어디서부터 일어났는가를 살펴라. 그러면 망상은 자성이 없어 당체가 공했으며, 곧 나의 본래부터 없는 심성(心性)의 자성(自性)이 청정한 법신불(法身佛)이 눈 앞에 나타난다. 진실로 말하면、 진여와 망상이 일체(一體)이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과 보리와 번뇌가 본래의 마음이며、 본래의 성품이다。 분별이 필요치 않으며, 좋아하고 싫어함도 필요치 않으며, 취하고 버리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부처이니 한 법도 필요치 않나니、 이 속에 무엇이 있겠는가? 참(參, 참구하라)!
 
 
 
 
 
 
 
 
 
 
 
Ⅱ,선당(禪堂)의 가르침
 
 
가, 이끌어 온 말(引言)
 
諸位常時來請開示 令我很覺感媿。 諸位天天辛辛苦苦 砍柴種地 挑土搬磚 一天忙到晚 也沒打失辦道的念頭。 那種爲道的殷重心 實在令人感動。 虛雲慚媿 無道無德 說不上所謂開示 只是拾古人幾句涎唾 來酬諸位之問而已。
 
여러 사람들이 항상 와서 가르침을 청하니, 나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도다. 여러 분들은 날마다 괴롭게 나무를 하고 씨뿌리며 흙을 돋우고 돌을 치우며 하루가 빨리 가고 저녁에 이르면 또한 도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잊어 버린다。 어떤 것이 도를 위하는 진실한 마음이며, 실제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 허운(虛雲)은 부끄러워 하며、 도도 없고 덕도 없어 법상에 오르지 않고 소위 법문을 하지만, 다만 이것은 옛 사람들의 말씀 몇 귀절을 이끌어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할 뿐이다.
 
 
 
나、 참선수행의 입문방법(入門方法)
 
用功辦道的方法很多 現在且約畧說說。
 
실제의 수행과 도를 이루는 방법은 많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약해서 설법하고자 한다.
 
 
 
 
1、 도를 이루는 선결조건(先決條件)
 
 
⓵ 깊이 인과를 믿으라
 
無論甚麼人 尤其想用功辦道的人 先要深信因果。 若不信因果 妄作胡爲 不要說辦道不成功 三塗少他不了。 古德云 「欲知前世因 今生受者是 欲知來世界 今生作者是。」 又說 「假使百千劫 所造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 楞嚴經說 「因地不眞 果招紆曲」。 故種善因結善果 種惡因結惡果 種瓜得瓜 種豆得豆 乃必然的道理。 談到因果 我說兩件故事來證明。
  
물론 어떤 사람이고 간에 수행하여 도를 이루려는 사람은 먼저 깊이 인과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과를 믿지 않는다면 망녕되이 도를 이룬다고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성공할 수도 없으므로 삼三악도의 작은 부분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옛 스님이 이르기를, 「전생의 원인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받고 있는 일이 곧 그것이며、 내세의 결과를 알고자 하면 금생에 하고 있는 일이 곧 그것이다」 하였다.
 
또 설하기를 「설사 백천 겁이라도 지은 바 업(業)은 없어지지 않아서 원인과 반연이 만날 때 과보를 도리어 받게 된다」하였다.
 
능엄경에서 이르기를, 「원인이 진실하지 못하면、 결과도 바르지 못함을 가져 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좋은 원인을 심으면 좋은 결과를 맺게 되고 악한 원인을 심으면 악한 결과를 맺게 되며, 외를 심으면 외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 것은 필연적 도리이다. 인과에 관하여 두 가지 고사(故事)를 들어 설명하겠다.
 
· 유리왕(琉璃王)이 석가족을 죽인 고사(故事)
 
釋迦佛前 迦毗羅閱城裏有一箇捕魚村 村裏有箇大池 那時天旱水涸 池裏的魚類盡給村人取喫 最後剩下一尾最大的魚 也被烹殺。 祇有一箇小孩從來沒有喫魚肉 僅那天敲了大魚頭三下來玩要。 後來釋迦佛住世的時候 波斯匿王很相信佛法 娶釋種女生下一箇太子 叫作琉璃。 琉璃幼時在釋種住的迦毗羅閱城讀書 一天爲因戲坐佛的座位 被人罵他 把他抛下來 懷恨在心。 及至他作國王 便率大兵攻打迦毗羅閱城 把城裏居民盡數殺戮。 當時佛頭痛了三天。 諸大弟子都請佛設法解救他們 佛說定業難轉。 目犍連尊者 以神通力用鉢攝藏釋迦親族五百人在空中 滿以爲把他們救出 那知放下來時 已盡變爲血水。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카피라성에 한 어촌(魚村)이 있었다。 그 어촌에는 큰 못이 있었고, 한 때 가뭄으로 못물이 말랐다。 못속의 고기들은 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잡아 먹혔다。 마지막으로 못 바닥을 긁으니 가장 큰 고기가 나왔고, 이 고기 또한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
 
그때、 과거부터 고기를 먹지 않던 어떤 소년이 이 큰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때리면서 희롱했다.
 
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실 때 <파사익>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었으며, 석가족의 아내를 얻었으며 한 태자를 낳았고 이름을〈유리〉라고 불렀다。 유리태자가 어렸을 때、 석가족이 살고 있는 카피라 성에서 자라고 공부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앉는 자리에 올라가 놀다가 사람들의 꾸짖음을 들었고、 그들에 의해서 끌려 내려졌으므로 마음에 분함이 맺혔다. 후에 국왕이 되어서 문득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카피라 성을 공격하여 그 성의 많은 주민을 끌어내어 살해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3일간 두통(頭痛)이 있으셨다. 모든 제자들은 부처님께 법을 베풀어 저들을 구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부처님은 결정된 업(業)은 돌이키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목건련>존자는 신통력으로 석가족 5백인을 바루에 넣어 공중에 있게 하여 그들을 구출코자 했다. 그러나 바루를 내려 놓으니 모두가 피로 되었음을 어찌 알았으리요.
 
 
諸大弟子請問佛 佛便將過去村民喫魚類那段公案說出。 那時大魚就是現在的琉璃王前身。 他率領的軍隊 就是當日池裏的魚類。 現在被殺的羅閱城居民 就是當日喫魚的人。 佛本身就是當日的小孩 因爲敲了魚頭三下 所以現在要遭頭通三天之報。 定業難逃 所以釋族五百人 雖被目連尊者救出 也難逃性命。後來琉璃王生墮地獄。 怨怨相報 沒有了期 因果實在可怕。
 
모든 제자들은 부처님께 여쭈어 답을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촌민들이 고기를 먹던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
 
그때의 큰 물고기는 현재의〈유리〉왕의 전신(前身)이며, 그가 거느린 군대는 그 때의 많은 물고기였으며, 현재에 피살된 〈카피라〉의 주민들은 그 때 고기를 먹던 사람들이며、 부처님은 그 때의 소년으로 고기의 머리를 세 번 때린 원인으로 현재 3일간 두통의 과보(果報)를 받았다。 결정된 업은 피하기 어려우므로 석가족 5백사람은 비록 목련존자의 구출을 입었으나 생명을 잃고 말았으며、 그후 〈유리〉왕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
 
원한과 원한은 서로 갚는 것이므로 그칠 날이 없으며, 원인과 결과는 진실로 있는 것이니、 가히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 
 
 
 
· 백장(百丈)스님이 여우를 제도한 고사(故事)
 
百丈老人有一天上堂 下座後 各人都已散去 獨有 一位老人沒有跑。 百丈問他作甚麼。 他說 「我不是人實是野狐精前生本是這裏的堂頭 因有箇學人問我 『大修行人還落因果否』 我說 『不落因果』 便因此墮落 作了五百年野狐精 沒法脫身 請和尙慈悲開示」。 百丈說 「你來問我」。 那老人便道 「請問和尙 大修行人還落因果否」。 百丈答道 「不昧因果」。 那老人言下大悟。 即禮謝道 「今承和尚代語 令我超脫狐身 我在後山巖下 祈和尚以亡僧禮送」。 第二天百丈在後山石巖以杖撥出一頭死狐 便用亡僧禮將他化葬。
 
백장스님이 하루는 법상에 올라 법을 설하였다. 법상에서 내려 온 후, 모든 사람은 다 돌아갔는데 오직 한 노인만이 돌아가지 않았다. 백장스님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본래 사람이 아니고 여우이며, 전생에는 본시 이곳의 조실(堂頭)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학인이 나에게 「크게 수행한 사람도 도리어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답했습니다。 곧 이 대답으로 인해 타락하여、 5백년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자비심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백장스님은 『그대가 나에게 물어 보아라.』 이 노인은 곧 물었다. 
『스님께 묻겠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도리어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백장스님이 답하기를, 『인과에 매혹되지 않는다(不昧因果)』고 했다. 이 노인은 이 한 마디의 말씀에 크게 깨달아 곧 절하고 이르기를,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로 인하여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 뒷산 바위 아래 있으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중의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루어 주십시오.』
 
그 이틀 뒤에 백장 스님은 뒷산 바위 아래 한 마리의 죽은 여우를 발견하고 중의 장례법으로 그를 화장했다.
 
 
我們聽了這兩段故事 便確知因果可畏 雖成佛也難免頭痛之報。 報應絲毫不爽定業實在難逃。 我們宜時加警惕 慎勿造因。
 
우리들이 이 두 가지 고사(故事)를 듣고, 인과가 가히 두려움을 확실히 알았으며、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두통(頭痛)의 과보를 면할 수 없다。 과보의 상응함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고、 결정된 업은 실제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때 그 때마다 두려워하고 삼가하여 원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⓶ 엄격히 계율을 지키라
 
用功辦道首要持戒。 戒是無上菩提之本 因戒才可以生定 因定才可以發慧 若不持戒而修行 無有是處。
수행하여 도를 이루는 데는 첫째가 계율을 지킴이다。 계율은 곧 위 없는 깨달음의 근본이며、 계(戒)로 인해서 가히 정(定)이 생기고, 정을 인해서 가히 혜(慧)가 나타난다. 만약 계를 지키지 않고 수행을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楞嚴經四種清淨明誨 告訴我們 不持戒而修三昧者 塵不可出。 縱有多智禪定現前 亦落邪魔外道。 可知道持戒的重要。 持戒的人 龍天擁護魔外敬畏。 破戒的人 鬼言大賊 掃其足迹。
 
능엄경(楞嚴經)에서 네 가지 청정(淸淨)을 명백히 밝혀 우리들에게 가르쳤으니, 계를 지키지 않고 삼매(三昧)를 닦는다 하더라도 번뇌를 벗어날 수는 없다. 비록 많은 지혜와 선정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역시 사마(邪魔)와 외도(外道)에 떨어질 것이니、 계를 지킴의 중요성을 알아라.
 
계를 지키는 사람은 하늘과 용이 옹호하고 사마와 외도들이 공경하고 두려워 하며, 계를 깨뜨린 사람은 귀신들이 도적이라고 말하며 그의 발자취를 쓸어 버린다.
 
 
從前在罽賓國近著伽藍的地 有條毒龍時常出來爲害地方 有五百位阿羅漢聚在一起 用禪定力去驅逐他 總沒法把他赶跑。 後來另有一位僧人 也不入禪定僅對那毒龍說了一句話 「賢善遠此處去」 那毒龍便遠跑了。 衆羅漢問那僧人甚麼神通把毒龍赶跑。 他說 「我不以禪定力 直以謹慎於戒 守護輕戒 猶如重禁」。 我們想想 五百位羅漢的禪定力 也不及一位嚴守禁戒的僧人。
 
옛날 계빈국에 절터가 있었는데 독용(毒龍)이 때때로 나타나 그 지방을 해치므로 5백의 아라한이 함께 모여 선정의 힘으로 독용을 쫓고자 했으나 독용을 쫓지는 못했다. 후에 한 스님이 와서 선정에는 들지도 않고 독용을 향해서 한 귀(句)를 설하기를、 「어진 이여,여기서 멀리 떠나거라」 하니, 이 독용이 멀리 달아났다. 이 때 여러 나한들이 이 스님께 「무슨 신통(神通)으로 독용을 쫓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스님은 「나는 선정의 힘을 쓰지 않고, 바로 계행을 지켜 가벼운 계율도 수호하기를 오히려 무거운 계율과 같이 지킵니다.」라고 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5백 아라한의 선정력이 계율을 엄수하는 한 사람의 스님에 미치지 못하
는 것 같다.
 
 
或云 六祖說 『心平何勞持戒 行直何用參禪』。 我請問你的心已平直沒有。 有箇月裏嫦娥赤身露體抱著你 你能不動心嗎。 有人無理辱罵痛打你 你能不生瞋恨心嗎。 你能够不分別怨親愛 人我是非嗎。 統統作得到 才好開大口 否則不要說空話。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육조(六祖)스님께서 「마음이 평등하면 어찌 계율 지키는 일이 어려우며、 행동이 곧으면 어찌 참선이 필요하리오.」라고 했다』 하였다。 내 그대에게 묻노니 마음이 평등하고 곧은가? 만약 달밤에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벗은 채 온몸을 드러내고 그대를 껴안는다면 그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무리하게 그대를 욕하고 때린다면 그대는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대는 원수와 친한 이、 미움과 사랑、 나와 남、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아니 하는가? 전체적으로 그럴 수 있다면 입을 여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헛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⓷ 믿음을 굳게 가지라
 
想用功辦道 先要一箇堅固信心。 信爲道元功德母。 無論作甚麼事 沒有信心是作不好的。 我們要了生脫死 尤其要一箇堅固信心。
 
생각컨대 수행하여 도를 이루는데는 먼저 신심(信心)을 굳게 하는 일이다.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다. 무슨 일이라고 논할 필요도 없이 믿는 마음이 없으면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우리들이 나고 죽음을 해탈하는 데는 더욱 이 믿음을 굳게 해야 할 것이다. 
 
 
佛說大地衆生皆有如來智慧德相 只因妄想執著 不能證得。 又說了種種法門 來對治衆生的心病。 我們就當信佛語不虛 信衆生皆可成佛。 但我們爲 甚麽不成佛呢。 皆因未有如法下死功夫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다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德相)은 있지만, 다못 망녕된 생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능히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갖가지 법문은 중생의 마음 병을 대치(對治)하고자 함이라』고 하셨다. 우리들은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다고 믿으며, 모든 중생이 다 부처를 이룬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째서 성불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다 법답게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譬如我們信知 黃豆可造豆腐 你不去造他 黃豆不會自己變成 豆腐即使造了 石膏放不如法 豆腐也會造不成。 若能如法磨煑去渣 放適量的石膏 決定可成豆腐。 辦道亦復如是 不用功固然不可以成佛 用功不如法 佛也是不能成。 若能如法修行 不退不悔 決定可以成佛。 故我們應當深信自己本來是佛 更應深信依法修行決定成佛。
 
비유하면,콩으로 두부를 만들지만, 만약 그대가 만들지 않는다면, 콩 스스로가 두부로 변할 수는 없으므로 곧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만약 간수를 여법히 넣지 않으면 두부 또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약 법답게 갈고 끓이고 적당하게 간수를 치면, 반드시 두부(豆腐)가 된다.
 
도를 이루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노력하지 않으면 부처를 이룰 수 없으며、 법답게 노력하지 않으면 또한 부처를 이룰 수 없다. 만약 여법히 수행하고 물러나지도 잘못하지도 않으면, 결정코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깊이 믿어야 하고、 법답게 수행하면 결정적으로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永嘉禪師說 「證實相 無人法 剎那滅卻阿鼻業 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他老人家慈悲 要堅定後人的信心 故發如此宏誓。
 
영가(永嘉)스님이 『진실한 세계를 증득하면 인간도、 진리라는 것도 없어지고、 찰라에 아비지옥의 업도 없어진다. 만약 내가 거짓말로 중생을 속였다면 스스로 발설지옥에 불려가서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오랜 시간을 지내게 될 것이다.』고 했으니、 이 늙은이의 자비심은 뒷 사람의 신심을 굳게하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이 같은 큰 서원을 발한 것이다.
 
 
⓸ 수행의 길을 결정하라
 
信心既具 便要擇 定一箇法門來修持 切不可朝秦暮楚。 不論念佛也好 持呪也好 參禪也好 總要認定一門 驀直幹去 永不退悔。 今天不成功 明天一樣幹。 今年不成功 明年一樣幹。 今世不成功 來世一樣幹。 溈山老人所謂 「生生若能不退 佛階決定可期」
 
믿는 마음이 이미 갖추어졌으면, 한 가지 법문을 결정해서 수행해야지, 아침 저녁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염불도 좋고、주문을 하는 것도 좋고、 참선도 좋으나, 하나의 문을 결정해서 바로 달려 나아가야 영원히 퇴전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도 도를 이루지 못하고, 내일도 마찬가지이며, 금년도 도를 이루지 못하고, 내년도 마찬가지이며、 금생에도 도를 이루지 못하고 내생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산(霧山)스님은 『세세생생에 만약 물러나지 않으면, 부처의 자리를 결정코 약속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有等人打不定主意 今天聽那位善知識說念佛好 又念兩天佛 明天聽某位善
知識說參禪好 又參兩天禪 東弄弄西弄弄 一生弄到死 總弄不出半點 「名堂」 豈不寃哉枉也。
 
어떤 사람들은 수행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오늘은 어떤 선지식의 염불하는 법을 듣고는 좋아하면서 한 이틀 염불을 하고, 내일은 다른 선지식에게 참선하는 법을 듣고는 좋아 하면서 한 이틀 참선을 한다. 이렇게 동쪽으로 쏠렸다가 서쪽으로 쏠렸다가 일생을 방황하면서 죽음에 이르면, 모두가 허송세월이요 반분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름만 선사일 뿐이니 어찌 원수가 아니며 잘못됨이 아니겠는가?
 
 
 
2、참선방법(參禪方法)
 
用功的法門雖多 諸佛祖師皆以參禪爲無上妙門。 楞嚴會上佛敕文殊菩薩揀選圓通 以觀音菩薩的耳根圓通爲最第一。 我們要反聞聞自性 就是參禪。 這裏是禪堂。 也應該講參禪 這一法。
 
우리가 공부해야 할 법문은 많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은 참선으로써 위 없는 묘문(妙門)을 삼으셨다.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부처님은 문수보살에게 원통(圓通)을 선택할 것을 가르치실 때에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으로써 으뜸을 삼으셨다. 우리는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自性)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참선이요 이 안에 선당(禪堂)이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참선법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 좌선(坐禪)이란?
 
平常日用皆在道中行 那裏不是道場 本用不著甚麼禪堂 也不是坐才是禪的  所謂禪堂 所謂坐禪 不過爲我等末世障深慧淺的衆生而設。 
 
우리가 평소에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도(道)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행위이니 어느 곳인들 도량(道場)이 아니겠는가? 본래 어떠한 선당도 소용되지 아니하나니, 앉아야 비로소 선(禪)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당이니 좌선이니 하는 것은 우리와 같이 장애가 깊고 지혜가 옅은 말세(末世)의 중생을 위해서 베푼 것에 지나지 아니 한 것이다.
 
 
坐禪要曉得善調養身心。 若不善調 小則害病 大則著魔 實在可惜。 禪堂的行香坐香 用意就在調身心。 此外調身心的方法還多 今擇要畧說。
 
좌선을 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잘 조절하고 장양(長養)해야 한다. 만약에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적게는 병에 걸리게 되고, 크게는 마군(魔軍)이 붙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당(禪堂)에서 향을 들고 경행(經行)하는 것과 자리에 앉아 앞에 향을 피우는 것은 몸과 마음을 조절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다.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은 이 밖에도 많으나 중요한 것만을 가려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跏趺坐時 宜順著自然正座。 不可將腰作意挺起 否則火氣上升 過後會眼屎多口臭氣頂 不思飲食 甚或吐血。 又不要縮腰垂頭 否則容易昏沈。 如覺昏沈來時 睜大眼睛 挺一挺腰 輕畧移動臀部 昏沈自然消滅。
 
가부좌를 할 때에는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지 말고 자연스럽고도 바르게 앉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화기(火氣)가 위로 올라가게 되므로 좌선이 끝난 다음에 눈꼽이 끼고 입이 텁텁해지며 기운이 솟구치고 입맛이 없어지며, 심할 경우에는 피를 토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머리를 수그릴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면 쉽게 혼침(昏沈)에 떨어지게 된다.
 
만약에 혼침이 온다고 느껴질 때에는 눈동자를 부릅뜨고 기지개를 하고 나서 가볍게 엉덩이를 옮기면 혼침이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用功太過急迫 覺心中煩燥時 宜萬緣放下 功夫也放下來 休息約半寸香 漸會舒服 然後再提起用功。 否則日積月累 便會變成性燥易怒 甚或發狂著魔。
 
공부를 지나치게 다그쳐서 마음이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는 모든 반연(攀緣)을 놓아 버리되 공부까지도 놓아 버려라. 향이 반 마디쯤 타도록 쉬면 서서히 편안해질 것이다. 그런 뒤에 다시 공부를 들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날로 쌓이고 달로 쌓여 조급해져서 쉽사리 성내는 성품으로 바뀌게 되며, 심할 경우에는 발광(發狂)을 하거나 마군이 붙게 된다.
 
 
坐禪 有些受用時境界很多 說之不了。 但你不要去執著它 便礙不到你。 俗所謂 「見怪不怪 其怪自敗」。 雖看見妖魔鬼怪來侵擾你 也不要管他 也不要害怕。 就是見釋迦佛來替你摩頂授記 也不要管他 不要生歡喜。 楞嚴所謂 「不作聖心 名善境界。 若作聖解 即受羣邪」。
 
좌선을 할 때에 수용(受用)하게 되는 경계는 대단히 많기 때문에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만 그대가 그것에 집착만 하지 아니한다면 장애가 그대에게 이르지는 아니 할 것이다。 세속에서 이른바 「괴이한 것을 보고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그 괴이한 것이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 바로 이를 이른 것이다. 비록 요괴스러운 마군이 와서 그대를 뒤흔들더라도 상관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며, 또한 석가 부처님이 오셔서 그대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실지라도 상관하지 말며 기뻐하지도 말라。 능엄경에서 이른바 「거룩하다는 마음을 짓지 아니 하는 것을 선경계라 한다. 만약에 거룩하다는 알음알이를 지으면 곧 모든 사도(邪道)에 빠지게 된다」는 말은 이를 이른 것이다.
 
 
② 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 손님과 주인을 인식하라
 
用功怎樣下手呢。 楞嚴會上憍陳那尊者說客塵二字 正是我們初心用功下手處。 他說 「譬如行客 投寄旅亭 或宿或食 宿食事畢 俶裝前途 不遑安住。 若實主人 自無攸往。 如是思惟 不住名客 住名主人。 以不住者 名爲客義。 又如新霽 清暘升天 光入隙中 發明空中 諸有塵相 塵質搖動 虛空寂然。 澄寂名空 搖動名塵。 以搖動者 名爲塵義」。 客塵喩妄想 主空喩自性。 常住的主人 本不跟客人。 或來或往 喩常住的自性 本不隨妄想 忽生忽滅。 所謂 但自無心于萬物 何妨萬物。 常圍繞 塵質自搖動 本礙不著澄寂的虛空。 喩妄想自生滅 本礙不著如如不動的自性。 所謂 一心不生 萬法無咎。
 
그렇다면 공부는 어디에서 부터 시작할 것인가? 능엄회상에서 교진나존자가 객(客)·진(塵) 두 자에 대해서 설명 한 것이 바로 우리들 초심자가 공부를 시작해야 할 곳이다. 그는 「마치 길 가는 손님이 객주집에 들려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데, 먹거나 자는 일을 마치며는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나야 하고 오래 머물지 못하거니와, 주인은 갈 데가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머물지 않는 이는 손님(客)이요 머무는 이는 주인(主)이니,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객(客)이라 하겠나이다. 또 비가 개고 볕이 나서 햇빛이 틈으로 들어오면、허공에 있는 티끌을 보게 되나니、 티끌은 흔들리고 허공은 고요하나이다。 맑고 고요한 것은 허공(空)이요, 흔들리는 것은 티끌(塵)이니, 그러므로 흔들리는 것을 진(塵)이라 하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손님과 티끌은 망상(妄想)에 비유한 것이요 주인과 허공은 자성(自性)에 비유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 머물러 있는 주인은 손님이 가거나 오거나 본래 그를 뒤따르지 아니하나니, 이는 항상 머물러 있는 자성이 본래 망상이 몰록 일어나거나 몰록 없어지거나 그것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니, 이른바 「스스로 만물에 무심(無心)하다면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티끌은 스스로 흔들려서 본래 맑고 고요한 허공에 장애가 되지 아니 하나니, 이는 망상이 스스로 일어나거나 없어지거나 본래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는 자성에 장애가 되지 아니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니、 이른 바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아니 한다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라는 것이다.
 
 
此中客字較粗 塵字較細。初心人先認淸了 「主」和 「客」 自不爲妄想遷流。 進步明白了 「空」和 「塵」 妄想自不能爲礙。 所謂 「識得不爲寃果」 能於此諦審領會 用功之道 思過半了。
 
이 가운데서도 손님(客)이라는 글자는 비교적 거칠고 티끌(塵)이라는 글자는 비교적 미세하다. 그러므로 초심자가 먼저 주인과 손님의 뜻을 명확하게 인식한다면 스스로 망상을 따라 흐르는 일을 아니 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허공과 티끌의 뜻을 명백하게 인식한다면 망상은 저절로 장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 바 「깨달으면 원결(寃結)이 되지 아니한다」라는 것이다. 이 도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공부하는 길은 반쯤 이룬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⓷ 화두(話頭)와 의정(疑情)
 
古代祖師 直指人心 見性成佛。 如達摩祖師的安心 六祖的惟論見性 只要直下承當便了 沒有看話頭的。 到後來的祖師 見人心不古 不能死心塌地 多弄機詐。 每每數他人珍寶 作自己家珍。 便不得不各立門庭 各出手眼 才令學人看話頭。
 
옛날에 조사들은、 저 달마 대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리라[安心]」라든가、 육조 대사의 「오직 성품을 보는 것만을 논한다[唯論見性]」는 것과 마찬가지로 「곧 바로 인심(人心)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 하였으니, 다만 곧장 받아들였을 뿐 화두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뒷날 조사들은 인심을 보는 것이 옛과 같지 아니 하며 법을 위해서 선뜻 죽으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대개는 거짓 기틀을 얽어 매양 남의 보물을 헤아리면서 자기의 보배를 삼았다. 그리하여 각각 저마다 기치[門庭]를 세우고 각각 저마다 방면[手眼]을 내어 학인들에게 화두를 보게 하였다.
 
 
話頭很多 如 「萬法歸一一歸何處」。 「父母未生前 如何是我本來面目」 等等。 但以念佛是誰 爲最普通。
 
화두에는 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든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어떠한 것이 나의 본래 면목인가」등、그 종류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대체로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念佛是誰]」라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화두라고 할 것이다.
 
 
甚麼叫話頭 話就是說話 頭就是說話之前 如念 「阿彌陀佛」是句話 未念之前就是話頭。 所謂話頭 即是一念未生之際 一念才生 已成話尾。 這一念未生之際叫作不生 不掉擧 不昏沈 不著靜 不落空 叫作不滅 時時刻刻 單單的的 一念回光返照。 道 「不生不滅」 就叫作看話頭 或照顧話頭。
 
그렇다면 무엇을 화두라고 하는가? 화(話)는 말이요 두(頭)는 말하기 전이니、 저「아미타불]을 염(念)할 때에 「아미타불」 이것은 화요 이를 염하기 전이 화두다. 따라서 화두란 곧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이니、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이미 화미(話尾)를 이루게 된다. 이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을 「나지 아니한다[不生]」고 부르니 흔들리지 아니하고 혼침하지 아니하고 고요에 빠지지 아니하고 허무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이를 「없어지지 아니한다[不滅]」고 부르나니 언제나 홀로 밝아서 한 생각으로 빛을 돌이키어 반조(返照)한다. 이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함[不生不滅]」을 일러서 화두를 본다[看話頭]고도 하며、혹은 화두를 비춘다[照顧話頭]라고도 한다. 
 
 
看話頭先要發疑情。 疑情是看話頭的拐杖。 何謂疑情 如問念佛的是誰 人人都知道是自己念。 但是用口念呢。 還是用心念呢。 如果用口念 睡著了還有口爲甚麽不會念。 如果用心念 心又是箇甚麼樣子 郤沒處捉摸。 因此不明白 便在 「誰」 上發起輕微的疑念 但不要粗 愈細愈好。 隨時隨地 單單照顧定 這箇疑念。 像流水般不斷地看去 不生二念。 若疑念在 不要動著他。 疑念不在 再輕微提起。 初用心時 必定靜中比動中較得力些。 但切不可生分別心。 不要管他得力不得力 不要管他 動中或靜中 你一心一意的用你的功好了。
 
화두를 보려면 먼저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화두를 보는 길잡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할 때에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입으로써 하는가? 아니면 마음으로써 염하는가? 만약에 입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잠들었을지라도 입은 그대로 있는데도 어째서 염할 줄을 모르는가? 만약에 마음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 붙잡을 수도 없고 더듬을 수도 없으니 답답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누구인가?」에 가벼운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 거칠게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더욱 좋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홀로 밝게 비추되 마치 물이 땅 위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볼 것이요, 두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약에 의심이 있을지라도 그것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또한 의심이 없다면 다시 가볍게 일으켜야 한다. 초심자로서는 고요한 가운데서의 공부가 시끄러운 가운데서의 공부보다 힘을 얻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절대로 분별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힘을 얻거나 못 얻거나 상관하지 말며, 또한 시끄러운 곳이거나 고요한 곳이거나 상관하지 말라. 다만 한 마음 한 뜻으로 해나가면 그대의 공부는 좋아질 것이다.
 
 
「念佛是誰」四字 最著重在箇 「誰」字 其餘三字不過言其大者而已。 如穿衣喫飯的是誰 疴屎放尿的是誰 打無明的是誰 能知能覺的是誰。 不論行住坐臥 「誰」字一擧 便最容易發疑念 不待反覆 思量卜度 作意才有。 故誰字話頭 實在是參禪妙法。 但不是將 「誰」字 或 「念佛是誰」 四字作佛號念。 也不是思量卜度去找 念佛的是誰 叫做疑情。有等將 「念佛是誰」 四字 念不停口 不如念句阿彌陀佛功德更大。 有等胡思亂想 東尋西找 叫做疑情 那知愈想妄想愈多 等於欲升反墜 不可不知。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念佛是誰]?」하는 네 글자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누구인가[誰]」라는 글자이니、나머지 세 글자는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라든가, 똥 누고 오줌 누는 자는 누구인가라든가、노여움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인가라든가, 능히 지각(知覺)하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등이다. 어쨌든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누구인가?」라는 글자를 들면 가장 쉽게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조그만큼도 반복하여 사량하거나 헤아리거나 생각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인가라?」는 화두야말로 참으로 참선의 묘법(妙法)이라 할 것이다. 
 
다만 「누구인가?」、 혹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네 글자를 가지고 부처님의 명호(名號)라는 생각을 지어서도 안 되며, 사량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찾는 것을 의정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네 글자를 가지고 하는 것이 입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미타불의 큰 공덕을 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어지러운 망상으로써 동으로 찾고 서로 뒤지는 것을 의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망상도 더욱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는가. 이는 마치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서 도리어 아래로 떨어지는 격이니、 똑바로 이해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初心人所發的疑念很粗 忽斷忽續 忽熟忽生 算不得疑情 僅可叫做想。 漸漸狂心收籠了 念頭也有點把得住了 才叫做參。 再漸漸功夫純熟 不疑而自疑。 也不覺得坐在甚麼處所 也不知道有身心世界 單單疑念現前 不間不斷 這才叫做疑情。 實際說起來 初時那算得用功 僅僅是打妄想 到這時眞疑現前 才是眞正用功的時候。 道時候是一箇大關隘 银容易跑入歧路。 
 
초심인이 일으키는 의심은 대체로 거칠어서 한꺼번에 끊어진 듯했다가는 이어지고, 금방 익은 듯했다가는 설고 하니, 애초에 의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저 생각이라고나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날뛰던 마음을 가두어 염두(念頭)에 무엇인가 잡히는 듯한 것이 있다면 참구(參究)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점차로 공부가 순숙(純熟)해져서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자기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게 되며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어 한 줄기 의심이 저절로 드러나서 끊어지지 아니할 때에야 비로소 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를 들어 말하면, 처음에야 어찌 공부를 한다고 말하겠는가? 그저 겨우 망상을 깨뜨린다고나 할 수 있을테지만、 이 때에 이르면 진정한 의심이 드러나게 되니, 비로소 진정한 공부를 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하나의 커다란 관문(關門)이 있으니 흔히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갈림길로 접어들게 된다.
 
 
 
(一) 這時候淸淸淨淨無限輕安 若稍失覺照 便陷入輕昏狀態。 若有箇明眼人在旁 一眼便會看出他。 正在這箇境界 一香板打下 馬上滿天雲霧散 很多會因此悟道的。
 
(一) 이 때에는 아주 깨끗하고 한없이 가볍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각조(覺照)를 놓쳐버릴 것 같으면 곧 가벼운 혼침상태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눈 밝은 이가 곁에 있다면 이는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경지를 일러서 「향나무 널판으로 내려치자마자 온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는 것이다. 흔히 이 때문에 도를 깨친 것으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二) 這時清清淨淨 空空洞洞 若疑情沒有了 便是無記 坐枯木岩。 或叫「冷水泡石頭」。 到這時就要提 提即覺照(覺即不迷 即是慧。 照即不亂 即是定)單單的的這一念 湛然寂照 如如不動 靈靈不昧 了了常知 如冷火抽烟 一線緜延不斷 用功到這地步 要具金剛眼睛 不再提。 提就是頭上安頭。
 
(二) 이 때에는 아주 깨끗하며 텅 비고 툭 틔였기 때문에 의정을 두지 아니할 것 같으면 곧 무기(無記)에 떨어져 마치 나무 등걸이나 바위덩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찬물이 돌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킨다」라고도 한다. 이 때에는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를 들면 곧 각조覺照하게 될 것이다(覺은 곧 미혹하지 아니함이니 慧요、照는 곧 어지럽지 아니함이니 定이다)。 홀로 빛나는 이 한 생각은 고요하게 비추며、 여여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하며, 분명하게 지각하며、 한결같이 이어져 끊이지 아니한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과도 같은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니, 다시는 화두를 들 필요가 없다. 화두를 다시 든다면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앉혀 놓는 격이다.
 
 
 
昔有僧問趙州老人道 「一物不將來時如何」。 州曰 「放下來」。 僧曰 「一物不將來放下箇甚麼」。 州曰 「放不下挑起去」。 就是說這時節。 此中風光 如人飲水 冷暖自知 不是言說可能到。 到這地步的人 自然明白 未到這地步的人 說也沒用。 所謂 「路逢劍客須呈劍 不是詩人不獻詩」。
 
옛날에 어떤 중이 조주(趙州) 노인에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조주가 「놓아버리라〔放下來〕」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중은 다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놓아 버립니까?」하고 물었다. 조주는 「놓아 버리지 않으려면 짊어지고 가거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때의 소식을 말한 것이다. 이 소식은 물을 마셔본 자만이 그 물의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말로서 표현할 수는 없다. 이 경지에 이른 이는 저절로 분명하게 알 것이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는 말해 주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이른 바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내어놓고, 시인이 아니라면 시를 바치지 말라」는 것이다.
 
 
㉰ 조고화두(照顧話頭)와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或問 「觀世音菩薩的反聞聞自性 怎見得是參禪」。 我方說照顧話頭 就是教你時時刻刻單單的的 一念回光返照 這「不生不滅」。(話頭)反聞聞自性 也是教你時時刻刻單單的的 一念反聞聞自性。 「回」就是反 「不生不滅」就是自性。
 
어떤 이는 「관세음보살의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을 듣는다는 것이 어떻게 참선이 되겠는가?」라고 묻는다. 나는 이제 화두를 비춘다[照顧話頭]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이것은 그대에게 언제나 홀로 빛나는 한 생각을 돌이켜 반조하는 것이 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임[不生不滅]」을 가르친 것이며, (話頭)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을 듣는다(反聞聞自性]]는 것도 또한 그대에게 언제나 홀로 빛나는 한 생각으로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을 듣도록 하려는 것이다。 「회(回)」는 곧 반(反)이오、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한다」는 것은 곧 자성이다.
 
 
「聞」 和「照」 雖順流時循聲逐色 聽不越於聲 見不超於色 分別顯。 然但逆流時反觀自性 不去循聲逐色 則原是一精明 「聞」 和「照」 沒有兩樣。 我們要知道 所謂照顧話頭 所謂反聞自性 絕對不是用眼睛來看 也不是用耳朶來聽。 若用眼睛來看或耳朶來聽 便是循聲逐色被物所轉 叫作順流。 若單單的的一念在 「不生不滅」中 不去循聲逐色 就叫作逆流 叫作照顧話頭 也叫作反聞自性。
 
‘들음[聞]과 비춤[照]은 바로 흐를(順流)때에는 소리를 따르고 빛을 좇는 등, 경계에 끄달리게 되어 청각(聽覺)은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시각(視覺)은 빛을 넘어서지 못하여 분별이 뚜렷하다. 그러나 거꾸로 흐를[逆流]때에는 돌이키어 자성을 관(觀)하여 소리를 따르거나 빛을 좇지 아니하여 본래 정명(精明)한 하나로서 「들음」과 「비춤」은 두 물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두를 비춘다거나 돌이키어 자성을 듣는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로 눈동자를 사용하여 보거나 귓부리를 사용하여 듣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눈동자를 사용하여 본다거나 귓부리를 사용하여 듣는다면 이는 소리를 따르고 빛을 좇아 물건에게 부림을 받는 것이어서 순류(順流)라 부른다. 만약에 홀로 빛나는 한 생각이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것」 가운데서 소리를 따르거나 빛을 좇지 아니하면 이를 역류(逆流)라 부르며, 화두를 비춘다고 부르며、 돌이키어 자성을 듣는다고 부른다.
 
 
⓹ 생사심(生死心)과 장원심(長遠心)
 
參禪最要生死心切 和發長遠心。 若生死心不切 則疑情不發 功夫做不上。若沒有長遠心 則一曝十寒 功夫不成片。 只要有箇長遠切心 眞疑便發。 眞疑發時 塵勞煩惱不息而自息。 時節一到 自然水到渠成。
 
참선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심이 간절해야 하며、 동시에 장원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이다。 생사심이 간절하지 아니하면 의정이 일어나지 아니하며、 공부가 제대로 향상되지 아니한다. 장원심이 없는 것은 마치 하루 동안 볕을 쬐고 열흘 동안 추운 것 [一曝十寒]과 같아서 공부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반드시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게 되며, 진정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는 번뇌를 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쉬어지게 된다。 결국 시절이 한번 이르면 자연히 물은 도랑을 이루는 법이다.
 
 
我說箇親眼看見的故事 給你們聽。 前清庚子年間 八國聯軍入京 我那時跟光緒帝慈禧太后們一起走。 中間有一段 徒步向陜西方面跑 每日跑幾十里路 幾天沒有飯喫。 路上有一箇老百姓 進貢了一點番薯藤 給光緒帝 他喫了還問那人是甚麼東西 這麼好喫。 你想皇帝平日好大的架子 多大的威風 那曾跑過幾步路 那曾餓過半頓肚子 那曾喫過番薯藤。 到那時架子也不擺了 威風也不逞了 路也跑得了 肚子也餓得了 菜根也喫得了。 爲甚麼他這樣放得下 因爲聯軍想要他的命他一心想逃命呀。 可是後來議好和 御駕囘京 架子又擺起來了 威風又逞起來了 路又跑不得了 肚子餓不得了 稍不高興的東西 也喫不下咽了。 爲甚他那時又放不下了 因爲聯軍已不要他的命 他已沒有逃命的心呀。 假使他時常將逃命時的心腸來辦道 還有甚麼不了。 可惜沒箇長遠心 遇著順境 故態復萌。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을 그대에게 들려 주겠다。 청(淸)나라 경자(庚子)년 (一九○○년)에 8국의 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 왔다. 그 때에 나는 광서황제(光緖皇帝)와 자희태후(慈禧太后) 일행을 따라 도보로 협서방면을 향하여 피난을 가게 되었다. 날마다 수 십리씩을 도망하였으며 며칠 동안은 밥조차 먹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에서 한 노인이 토마토와 고구마를 광서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다 자시고 나서 그 노인에게 「이것이 무슨 물건인데、 이다지도 맛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황제는 평소에 훌륭한 가마를 타고 당당한 위풍을 지니고 있었으니, 어찌 일찌기 몇 걸음이나마 걸어 보았을 것이며, 어찌 일찌기 반끼나마 배를 곯아 보았을 것이며, 어찌 일찌기 토마토나 고구마 따위를 자셔 보았을 것인가? 그러나 이에 이르러서는 가마도 제대로 꾸미지 못하고 위풍도 거드럭거리지 못하고, 길에서는 뛰어야 했으며, 배는 곪아야 했으며、채근(菜根)이라도 먹어야 했으니 어찌하여 그가 이 지경에 떨어지고 말았을까? 연합군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니 그는 일심으로 도망칠 생각만 하지 않았겠는가?」고. 그러나 뒤에 협상이 이루어져 어가(御駕)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자 가마도 제대로 꾸미게 되었고, 위풍도 거드럭거리게 되었고, 길에서 뛰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되게 되니, 차차로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어찌하여 그가 이 때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연합군이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지 아니하니、 그에게는 이미 도망칠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그가 늘 도망칠 때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을 처리한다면 어떤 일인들 안 될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장원심이 없었기 때문에 순경(順境)을 만나자 교만한 태도가 다시 싹트게 된 것이다.
 
 
諸位同參呀 無常殺鬼 正時刻要我們的命 他永不肯同我們 「議和」的呀。快發箇長遠切心 來了生脫死吧。 高峯妙祖說「參禪若要剋日成功 如墮千丈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 萬思想 單單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功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高峯今日犯大妄語 永墮拔舌泥犁」。 他老人家也一樣大悲心切 恐怕我們 發不起長遠切心 故發這麼重誓來向我們保證。
 
그대들은 동참하고 있는가? 무상(無常)이라는 살귀(殺鬼)가 바로 이 시각에도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으며 더구나 저들은 영원히 우리와는 협상을 하려 들지 아니하지 않는가? 선뜻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내어 삶을 깨달아 죽음에서 벗어나라。 고봉 원묘(高峯原妙)선사께서는 「참선을 함에 있어서 날짜를 기약하여 공을 이루려고 할진댄, 마치 천길의 우물밑에 떨어진 것과 같이 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천 생각 만 사량이 오직 벗어나기를 구하는 마음이어야 하며, 끝내 결코 두 생각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이렇게 공ㅇ르 들여서 삼일, 혹은 오일, 혹은 칠일에 사무치지 못한다면 내가 오늘 큰 거짓말을 저지른 것이니, 길이 혀를 뽑아 밭갈이를 하는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하였다. 저 노인네가 한결 같이 자비심이 간절하여 우리가 장원하고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할까 저어하여 저처럼 다짐을 거듭하고 우리를 향하여 보증하신 것이다. 
 
 
⓺ 공부할 때 두 가지 어려움과 쉬움
 
用功人有兩種難易 (一)初用心的難易 (二)老用心的難易。
 
공부하는 이에게는 두 가지의 어려움과 쉬움이 있다。 하나는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의 어려움과 쉬움이요, 다른 하나는 오래도록 공부를 쌓았을 때의 어려움과 쉬움이다.
 
 
 
(i) 초심자(初心者)의 어려움과 쉬움
 
㉮ 초심자의 어려움 ― 게으른 마음(偸心)이 죽지 않는다.―
 
初用心的通病 就是妄想習氣放不下來 無明 貢高 嫉妒 障礙 貪瞋癡愛 懶做好喫 是非人我 漲滿一大肚皮 那能與道相應。 或有些是箇公子哥兒出身習氣不忘 一些委屈也受不得 半點苦頭也喫不得 那能用功辦道。他沒有想想本師釋迦牟尼佛 是箇甚麼人出家的。 或有些識得幾箇文字 便尋章摘句 將古人的言句作解會 還自以爲了不起 生大我慢遇著一場大病 便叫苦連天。 或臘月三十到來 便手忙腳亂 生平知解 一點用不著 才悔之不及。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의 보편적인 병통은 망상과 습기가 놓아지지 아니한다는 점이다。 무명과 아만、 질투、 장애、 탐욕、 진에、 우치、 애착、 나태 등을 짓고 먹기를 좋아하며 남과 나를 분별하고 뱃살만 불린다면 어떻게 도(道)와 상응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부잣집 출신인 경우에 습기를 잊지 못하여 약간의 모욕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하나니, 어떻게 공부를 하며 사리를 판단하겠는가. 그대들은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떠한 신분으로 출가를 하셨는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문자를 깨우쳐 글귀나 뒤적이며 옛 사람의 말마디나 가지고 알음알이를 지어 스스로 대단한듯이 여겨 큰 아만을 일으키고 있지마는 한 바탕 큰 병을 만나면 비명이 하늘에 닿는다. 혹은 섣달 그믐이 되어서야 비로소 허둥지둥거리지마는 평소의 알음알이는 반푼어치도 쓸데가 없으니 그제서야 후회해도 돌이키지 못한다.
 
 
有點道心的人 又摸不著一箇下手處。 或有害怕妄想 除又除不了 終日煩煩惱惱 自怨業障深重 因此退失道心。 或有要和妄想拼命 憤憤然提拳鼓氣 挺胸睜眼像煞有介事。 要與妄想決一死戰 那知妄想郤拼不了 倒弄得吐血發狂。 或有怕落空 那知早已生出「鬼」。 空也空不掉 悟又悟不來。 或有將心求悟 那知求悟道想成佛 都是箇大妄想。 砂非飯本 求到驢年也 決定不得悟。 或有掽到一兩枝靜香的 便生歡喜 那僅是盲眼烏龜鑽木孔 偶然掽著。 不是實在功夫 歡喜魔早已坿心了。 或有靜中覺得清清淨淨很好過 動中又不行 因此避喧向寂 早作了動靜兩魔王的眷屬 諸如此類 很多很多。 初用功摸不到路頭實在難。 有覺無照 則散亂不能「落堂」 有照無覺 又坐在死水裏浸殺。
 
약간의 도심(道心)이 있는 사람은 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찾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망상을 두려워하여 없애고 또 없애도 끊이지 아니하여 종일토록 번뇌하고 스스로 원망하여 업장을 두껍게 하며, 이로 말미암아 도심(道心)에서 물러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망상과 더불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씩씩거리며 팔을 걷어 부치고 기운을 돋우며 가슴을 내밀고 눈을 부릅떠서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일 기세를 보인다。 결국은 망상과 더불어 한판 죽음을 건 싸움을 결정하려는 것이니, 저들이 어찌 망상이 없어지기는커녕 도리어 피를 토하거나 발광을 하게 됨을 알겠는가? 어떤 이들은 허무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나 저들이 어찌 이미 「귀굴(鬼窟)」에 태어났음을 알겠는가? 공(空)했다고는 하나 공이 떨치지 못하고, 깨달았다고는 하나 깨달음이 오지 아니한다. 어떤 이들은 마음을 가져 깨달음을 구하나니, 저들이 어찌 도를 깨닫기를 구한다든가,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큰 망상임을 알겠는가? 모래로는 밥을 지을 수 없는 법이니 나귀의 해가 이르도록 구한다해도 결정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매화[一兩技]의 정향(靜香)에 부딪쳐 곧 환희심을 일으키나니, 저들이 이것은 눈 먼 거북이가 나무 구멍을 겨우 꿰뚫은 것처럼 우연히 부딪친 것이요 참으로 공부가 익었기 때문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환희마(歡喜魔)가 이미 마음에 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고요한 가운데서는 청정하여 매우 순탄하게 공부가 됨을 느끼나 시끄러운 가운데서는 그렇게 되지 아니하니、 이로 말미암아 시끄러움을 피하여 고요함에 나아가니 저들은 이미 동정(動靜)의 두 마왕의 권속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와 같은 부류는 대단히 많다.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 길을 바로 들어 서지 못하면 진실로 어려움이 많다. 깨달음은 있으나 비춤이 없으면 산란하여 「낙당(落堂)」하지 못하고, 비춤은 있으나 깨달음이 없으면 또 사수(死水)에 앉아 빠져 죽게 된다.
 
 
㉯ 초심자의 쉬움 |놓아버리고 일념(一念)만을 들어라 |
 
用功雖說難 但摸到路頭又很易。 甚麼是初用心的易呢。 沒有甚麼巧 放下來便是。 放下箇甚麼 便是放下一切無明煩惱。 怎樣才可放下呢。 我們也送過往生的。 你試罵那死屍幾句 他也不動氣。 打他幾棒 他也不還手。 平日好打無明的 也不打了 平日好名好利的 也不要了 平日諸多習染的 也沒有了 甚麼也 不分別了 甚度也放下了。
 
공부를 하기가 어렵다고는 하나, 일단 길만 바로 들어서면 또한 대단히 쉬운 것이다. 어떠한 것이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의 쉬움인가? 무슨 공교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놓아 버릴 뿐이다. 어떠한 것을 놓아 버리느냐 하면, 곧 일체의 무명과 번뇌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놓아 버릴 수 있는가? 우리들이 장례행렬을 보낸다고 하자. 그대는 시험삼아 저 시체에다 대고 몇 마디 욕설을 퍼부어 보라. 그는 화를 내지 아니할 것이다. 그를 몇 방망이 때려 보라. 그는 대거리를 하지 아니할 것이다. 평소에 심술을 잘 부리던 자도 심술을 부리지 아니하며,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던 자도 그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평소에 습기(習氣)와 염오(染汚)가 많던 자도 그것이 없다. 아무 것도 분별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라도 놓아 버린다.
 
 
諸位同參呀。 我們這箇軀賣子一口氣不來就是一具死屍。 我們所以放不下 只因將它看重 方生出人我是非愛憎取捨。 若認定這箇軀賣子是具死屍 不去寶貴它 根本不把它看作是我 還有甚麼放不下 只要放得下。 二六時中 不論行住坐臥 動靜閒忙 通身內外只是一箇疑念 平平和和不斷的疑下去 不雜絲毫異念。 一句話頭 如倚天長劍 魔來魔斬 佛來佛斬 不怕甚麽妄想。 有甚麼打得你閒。
 
그대들은 동참하는가? 우리도 이 몸뚱어리가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하면 곧 한 구의 시체가 되고 만다. 우리가 놓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몸뚱어리를 중요하게 여겨 인아(人我)와 시비(是非)·애증(愛僧)·취사(取捨)를 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몸뚱어리가 한 구의 시체라고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것을 나라고 보지도 아니할 것이니, 도리어 무엇인들 놓아 버리지 못하겠는가? 다만 놓아 버려야 한다. 하루 종일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움직이고 잠잠하고 한가하고 바쁘고를 막론하고 온 몸이 통째로 하나의 의념(疑念)이 되어 항상 끊이지 아니하고 의심하여 가라. 터럭만큼의 다른 생각도 섞지 말라. 화두 한 마디로 마치 천장검(天長劍)을 의지한양 마군이 오면 마군을 베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라. 어떠한 망상도 두려워하지 말라. 무엇이 침범할 수 있겠는가? 
 
 
又那箇去分動分靜 那箇去著。 有著空 如果怕妄想 又加一重妄想。 覺清淨早已不是清淨。 怕落空 已經墮在有中。 想成佛 早已入了魔道。 所謂運水搬柴 無非妙道 鋤田種地 總是禪機。 不是一天盤起腿子打坐 才算用功辦道的。
 
또 너는 어찌 부질없이 동(動)과 정(靜)을 분별하여 집착하는가? 공(空)에 집착하면 과연 망상을 두려워 할만 하나 그것은 또 망상을 한겹 더하는 것이다. 청정하다고 생각하면 이미 청정이 아니다。 허무[空]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 하면 이미 유(有)에 떨어진 것이다. 부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이미 마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 묘도(妙道) 아님이 없고, 김 매고 씨 뿌리는 것이 모두 선기(禪機)라는 것은、 하루 동안 다리를 틀고 엉덩이를 깔고 앉아야 비로소 공부가 되고 사리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ⅱ) 고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 고참자의 어려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甚麼是老用心的難呢。 老用心用到眞疑現前的時候。 有覺有照 仍屬生死 無覺無照 又落空亡 到這境地實在難。 很多到此灑不脫 立在百尺竿頭 沒法進步的。 有等因爲到了這境地 定中發點慧 領畧古人幾則公案 便放下疑情。 自以爲大徹大悟 吟詩作偈 瞬目揚眉 稱善知識 殊不知已爲魔眷. 又有等錯會了達摩老人的 「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 和六祖的 「不思善 不思惡 正與麼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 的意義 便以坐在枯木岩爲極則。 這種人以化城爲寶所 認異地作家鄉 婆子燒庵 就是罵此等死漢。
 
어떠한 것이 오래도록 공부를 쌓았을 때의 어려움인가? 오래도록 공부를 쌓았을 때라는 것은 참다운 의심을 현전(現前)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시절이다。 깨달음도 있고 비춤도 있으면 그대로 생사(生死)에 있는 것이요 깨달음도 없고 비춤도 없다면 또 허무에 떨어진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진실로 어려움이 많다. 대개는 여기에 이르면 긴장이 되어 백척간두에 서서 나아갈 방법을 모른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이 경지에 이르러 정(定) 가운데서 자그마한 지혜를 일으켜 옛 사람의 몇몇 공안을 건성으로 알아채고서는 곧 의정을 놓아버린다. 스스로 크게 사무치고 크게 깨달았다고 생각하여 시를 읊조리고 게송을 지으며 눈을 껌벅이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선지식이라고 떠들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아니하는 자들은 마군의 권속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달마노인의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나, 육조의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명(明) 상좌의 본래 면목인가?」라는 뜻을 잘못 알고서는 나무 등걸이나 바위덩이처럼 앉아 있는 것만으로 구경을 삼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신기루를 보배있는 장소로 알며,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니, 노파가 암자를 불사른 것도 바로 이러한 죽은 놈들을 꾸짖기 위한 것이다.
 
 
㉯ 고참자의 쉬움 |면밀하게 공부하라|
 
甚麼是老用心的易呢。 到這時只要不自滿 不中輟 緜緜密密做去 緜密中更緜密 微細中更微細。 時節一到 桶底自然打脫。 如或不然 找善知識抽釘拔楔去。
 
어느 것이 지긋하게 공부를 쌓았을 때의 쉬움인가? 이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자만하지도 말고, 중간에서 걷어 치우지도 말고, 면밀하게 공부해 나가야 한다. 면밀한 가운데 다시 면밀하게, 미세한 가운데 다시 미세하게 해야 한다. 시절이 한번 이르면 통 밑바닥이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면 선지식을 찾아서 못을 뽑고 쐐기를 빼야 한다.
 
 
寒山大士頌云
高高山頂上 四顧極無邊
靜坐無人識 孤月照寒泉
泉中且無月 月是在青天
吟此一曲歌 歌中不是禪
 
首二句 就是說獨露眞常 不屬一切 盡大地光皎皎地 無絲毫障礙。 次四句  是說眞如妙體 凡夫固不能識 三世諸佛也找不到我的處所 故曰無人識。 孤月照寒泉三句 是他老人家方便譬如這箇境界。 最後兩句 怕人認指作月 故特別提醒我們 凡此言說 都不是禪呀
 
한산(寒山)대사가 송하기를,
 
높은 산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
4방을 돌아봄에 끝이 없구나.
나 혼자 앉았음에 아는 사람 없고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
샘물에는 원래 달이 없거니
달은 스스로 저 하늘에 있었다.
내 노래 한 곡조를 불러 보노니
이 노래 속에 곧 선(禪)이 있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첫 2구는 홀로 드러나고 참으로 항상되어 일체에 속하지 아니하며 온 대지에 빛이 밝아서 터럭만큼도 장애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다음 4구는 진여 묘체를 설한 것이니, 범부는 애당초에 알 수 없고 삼세제불도 나의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하므로 「아는 사람 없다」고 한 것이다.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는 3구는 저 노인의 방편이니, 이러한 경계를 비유한 것이다。 최후의 2구는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알까봐 저어하여 특별히 우리들을 일깨운 것이다. 이 말 모두가 선이 아니겠는가?
 
 
 
 
다、결 론(結論)
 
就是我方才說了一大堆 也是扯葛藤 打閒岔。 凡有言說 都無實義。 古德接人非棒則喝 那有這樣羅索。 不過今非昔比 不得不强作標月之指。 諸位同參呀 究竟指是誰月是誰 參。
 
나는 이제야 비로소 한 커다란 언덕을 강설하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넝쿨을 펴는 것이요 길을 갈래 내는 것이다. 무릇 언설은 모두 참다운 뜻이 없다. 그러므로 옛 스님네들은 몽둥이로 때리지 아니하면 고함을 질렀으니、 어찌 이처럼 너절하게 늘어 놓는 일이 있었겠는가? 억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짓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들은 동참하고 있는가? 구경에 손가락은 누구이며 달은 누구인가? 참구할지어다.
 
Ⅲ, 참선경어(參禪警語)
 
 
心即是佛 佛即是覺。 此一覺性 生佛平等 無有差別。 空寂而了無一物 不受一法 無可修證。 靈明而具足萬德 妙用恆沙 不假修證。 只因衆生迷淪生死 經歷長劫 貪瞋癡愛 妄想執著 染汚已深 不得已而說修說證。 所謂修者 古人謂爲不祥之物 不得已而用焉。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깨달음이다. 이 깨닫는 성품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고요하여 한 물건도 없고 한 법도 받지 아니하며 수행할 수도 없고 증득할 수도 없다。 신령스럽게 밝아 만덕(萬德)을 갖추고 있으며, 묘용(妙用)이 항하(恒河)의 모래알
과 같아서 수행과 증득을 빌리지 아니한다. 다만 중생이 생사(生死)에 미혹하고 침륜하여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탐욕과 진에、우치、애착 등, 망상과 집착이라는 더러움에 물듦이 이미 깊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어서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
에 대해서 옛 사람들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인지라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나 사용한다고 하였다.
 
 
此次打七 已經三箇半七 還有三箇半七。 下三箇半七 身心較爲純熟 用功當比前容易 諸位不可錯過因緣。 務要在下三筒半七內 弄箇水落石出 發明心地 才不孤負這箇難得的機綠。
 
이제부터 7을 깨뜨리겠다。 이미 3개 반을 거쳤으나 아직도 3개 반이 남아 있다. 아래의 3개 반은 몸과 마음이 비교적 순수하고 숙성하여 공부를 하기가 전에 비해서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처럼의 인연을 그릇되게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니, 힘쓸 일은 아래의 3개 반에 있다。 물이 마르고 돌이 드러나는 경지를 지어 심지(心地)를 밝혀야 이처럼 얻기 어려운 인연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這二十多天來 諸位一天到晚起早睡遲 努力用功 結果出不了四種境界。
 
지난 20여일 동안, 여러분은 하루같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공부에 노력하였으나 그 결과는 다음의 네 가지 경계에서 벗어나지 아니할 것이다.
 
一者 路頭還有搞不清的 話頭看不上 糊糊塗塗 隨衆打盹 不是妄想紛飛 就是昏沈搖擺。
 
첫째, 공부하는 가운데 아직도 뚜렷하게 분간되지 아니하는 것이 있어서 화두가 잘 들려지지 아니하여 어리벙벙하게 대중을 따라 꾸벅거리니、 망상이 흩날리지 아니하면 혼침이 뒤흔들게 된다.
 
二者 話頭看得上 有了點把握 但是死死握著一片敲門瓦子。 念著 「念佛是誰」 這箇話頭 成了念話頭。 以爲如此可以起疑情 得開悟。 殊不知這是在話尾上用心 乃是生滅法 終不能到一念無生之地。 暫用尙可 若執以爲究竟實法 何有悟道之期。 晚近禪宗之所以 不出人了 多緣誤于在話尾上用心。
 
둘째, 화두가 제대로 들려서 무엇인가 잡히는 것이 있으나, 다만 죽도록 한 조각 문 두드리는 기왓장을 잡고 있을 따름이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염(念)하고 있으니, 이러한 화두는 염화두(念話頭)를 이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의정이 일어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다. 이는 화미(話尾)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어서 곧 생멸하는 법인지라, 일념무생(一念無生)의 자리에는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잠깐 동안 사용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마는、 만약에 이에 집착하여 구경의 참다운 법을 삼는다면 어떻게 오도(悟道)를 기약할 수 있으랴? 최근의 선종에서 인물이 나지 아니하는 까닭도 대개는 이처럼 화미에 마음을 쓰는 탓이라 하겠다.
 
三者 有的會看話頭 能照顧現前一念無生。 或知念佛是心 即從此一念起處 驀直看到無念心相。 逐漸過了寂靜 粗妄旣息 得到輕安 就有了種種境界出現。 有的不知身子坐在何處了 有的覺得身子輕飄飄的上騰了 有的見到可愛的人物而生歡喜心的 有的見到可怕的境界而生恐怖心的 有的起婬慾心的 種種不一要知這都是魔 著即成病。
 
세째,어떤 이는 화두가 잘 들려서 현전하는 일념무생을 비추거나, 혹은 염불하는 자가 곧 마음인 줄 알아 이 일념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 곧장 무념심상(無念心相)에 나아가서 차츰 적정함을 지내고 거치른 망상을 이미 쉬어 경안(輕安)함에 이르러 갖가지 경계가 나타나게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몸뚱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모르게 되며、어떤 경우에는 몸뚱이가 훨 날아 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며、 어떤 경우에는 기대하던 사람이나 물건이 나타나 환희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두려운 경계가 나타나 공포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음욕심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갖가지가 있으나, 이 모두가 마군인지라 집착하면 곧 병을 이루게 됨을 알아야 한다.
 
四者 有的業障較輕的 理路明白 用功恰當 已走上了正軌的。 清清爽爽 妄想若歇 身心自在 沒有甚麽境界。 到此地步 正好振起精神 用功向前。 惟須注意枯木巖前又路多。 有的是在此昏沈而停住了。 有的是得了點慧解 作詩作文 自以爲足 起貢高我慢。
 
네째, 어떤 이는 업장이 비교적 가벼워 이로(理路)가 명백하고 공부하는 것이 제대로 들어맞아 이미 바른 궤도에 오른 경우도 있다. 청정하고 상쾌하여 망상이 다한 것 같고 몸과 마음이 자재하여 어떠한 경계도 나타나지 아니한다. 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되도록이면 떨치고 일어나서 앞을 향해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다만, 나무등걸이나 바위덩이와 같은 경지 앞에 또 다시 많은 길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흔침에 빠져 머물러 버리며, 어떤 이는 약간의 알음알이를 얻어 시문(詩文)이나 지으면서 스스로 만족하며 아만을 드높인다.
 
以上四種境界都是病 我今予你們以對治之藥。
 
이상의 네 가지 경계가 다 병통이니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이에 대치하는 약을 주리라.
 
第一 如話頭未看上 妄想昏沈多的人。 你還是看 「念佛是誰」 這箇誰字。 待看到妄想昏沈少 誰字不能忘了時 就看這一念起處。 待一念不起時 即是無生 能看到一念無生 是名眞看話頭。
 
첫째、화두가 아직 들려지지 아니하고 망상과 혼침이 많은 사람은、 다시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할 때의 그 「누구인가 (誰)?」라는 글자를 보라。 망상과 혼침이 적어질 때까지 보아 「누구인가?」라는 글자가 잊혀지지 아니할 때에 곧 저 일념이 일어나는 곳을 보게 될 것이다. 일념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때가 곧 무생(無生)이니, 능히 일념무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 이름하여 ‘참으로 화두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第二關于執著 「念佛是誰」 在話尾上用心 以生滅法爲是的人。 也可照上述的意思 即向念起處看到一念無生去。
 
둘째、「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에 집착하여 화미(話尾)에 마음을 쓰며 생멸법으로써 구경을 삼고 있는 이를 위한 처방이니, 이들도 위에서 설명한 뜻에 비추어 공부하라。 곧 일념이 일어 나는 곳을 향하여 일념무생(一念無生)을 보도록 하라.
 
第三 關于觀無念已得寂靜輕安 而遇到任何境界的人。 你只照顧本參話頭一念不生 佛來佛斬 魔來魔斬 一概不理他 自然無事 不落羣邪。
 
세째, 무념을 관하여 이미 적정과 경안을 얻어 어떠한 경계에 도달한 이를 위한 처방이니, 이들은 다만 본래 참구하던 화두만을 비추되 일념도 일으키지 말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고, 마군이 오면 마군을 베어 한결같이 문제로 삼지 아니하면 자연히 일이 없고 모든 사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第四 關于妄念已歇 清清爽爽 身心自在的人。 應如古人所說 「萬法歸一一歸何處」。 由一向至極處邁進 直至高高山頂立 深深海底行 再撒手縱橫去。
 
넷째, 망념이 이미 다하여 청정하고 상쾌하여 몸과 마음이 자재한 이를 위한 처방이니, 이들은 마땅히 옛 사람이 설한 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처럼, 하나를 따라 지극한 곳을 향해 매진하여 곧바로 높고 높은 산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거닐면서 다시 손을 놓아 거침없이 행동하라.
 
以上所說 都是對末法時期的鈍根人說的方法 其實宗門上上一乘。 本師釋迦牟尼佛在靈山會上拈花之旨 教外別傳。 歷代祖師 惟傳一心 直指人心 見性成佛 不落階級 不假修證。 一言半句即了 無一法可得 無一法可修 當下就是不起妄緣 即如如佛。 那裏有許多閒話呢。
 
이상 설명한 것이 모두 말법시대의 근기가 노둔한 사람을 위해서 설한 방법이지마는, 그 실은 종문(宗門)의 상상일승(上上一乘)이다。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경교(經敎)밖에 따로 전하시고, 역대 조사들이 오직 일심을 전하여 인심을 곧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이 모두 계급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수행과 증득을 빌리지 아니한 것이다. 따라서 일언 반구(一言半句)에라도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한 법도 닦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 그 자리에서 망녕된 반연만 일으키지 아니하면 곧 여여한 부처이니、 이 가운데 무슨 부질없는 말이 필요하겠는가?
 
 
 
Ⅳ、섣달 그믐 보다(普茶)때의 가르침
 
諸位上座 今天又是臘月三十日了 大衆都認爲是過年 常住沒有好供養 請諸位多喫杯茶。 照曆書規定 一年有春夏秋冬四季 十二箇月 二十四箇節氣。 人事上的措施 多是應著天時而來的。 如農人的春耕夏耘 秋放冬藏 工人的起工停工 商人的開張結賬 學校的開學放假 我們出家人的結制解制 請職退職 無一不是根據天時節令而來的。 一般人認爲過年是一箇大關節 要把一年的事 作箇總結同時要休息幾天。
 
상좌 여러분、오늘은 섣달 그믐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모두 한 해를 보낸다고 생각할 것이다。 절에는 좋은 공양거리가 없으니、 여러분들은 차나 들라。 역서(曆書)의 규정을 볼것 같으면 1년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이 있고, 12개월이 있으며, 24절기가 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제도도 천지(天時)에 상응하여 유래한 것이 많으니、 농부는 봄에는 밭을 갈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갈무리를 하며, 기술자들은 공사를 착수하고 정지하며、상인들은 점포를 열고 닫으며, 학교는 개학과 방학을 하며, 우리들 출가인은 결제와 해제를 하며、 소임을 맡거나 물러나는 등, 어느 한 가지도 천지의 절령(節令)에 근거하여 유래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일반인들은 해를 보내는 것을 하나의 커다란 전기(轉機)로 여기고 있어서 한 해 동안의 일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며칠 동안의 휴식을 갖게 된다.
 
你我有緣 僥倖今日同在雲門 平安過年 這是佛祖菩薩的加庇 龍天的護持亦由大家累劫栽培之所感。 但我們自己平安過年 不可忘記那些痛苦不堪的人。 我們不可貪圖歡樂 要格外的省慎 深自懺悔 精進修持 自利利他 廣培福慧 年老的人 死在眉睫 固要猛進。 年輕的人 亦不可悠忽度日 須知黃泉路上無老少孤墳多是少年人。 總要及早努力 了脫生死 方爲上計。
 
그대들과 나는 인연이 있어 요행히 오늘 운문(雲門)에 함께 거처하면서 평안하게 한 해를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은 부처님과 조사와 보살네의 가피요 용왕과 하늘의 보호인 동시에, 여러분들이 오랫 동안 심은 공덕의 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한 해를 편안히 보낼지라도 저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들은 환락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우리들은 격외(格外)의 성찰과 참회를 깊이 하며 정진과 수행을 하여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꾀하고 널리 복덕과 지혜를 북돋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늙은이들은 죽음이 눈 깜빡할 사이에 있으니 용맹스럽게 정진하여야 하며, 젊은이들 역시 한가하게 날짜를 보내서는 안 된다。 황천길에는 늙은이와 젊은이의 구별이 없으며, 외로운 무덤은 소년의 것이 많은 법이다. 어쨌든 일찌기 노력하여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써 제일의 계책을 삼아야 한다.
 
我們本來天天喫茶 何以今天名 「喫普茶」 呢。 這是先輩的婆心 藉喫普茶提醒大家。
 
우리들은 본래 매일 차를 마시고 있는데도 어째서 오늘은 「보다(普茶)를 마신다」고 하는가? 이것은 선배들의 노파심이니、 보다를 마시는 것을 핑계삼아 여러분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昔趙州老人 道風高峻 十方學者參禮的甚衆。 一日 有二僧新到 州指一僧問日 「上座曾到此間否」 云 「不曾到」。 州云 「喫茶去」 又問那一僧云 「曾到此間否」 云 「曾到」 州云 「喫茶去」。 院主問曰 「不曾到 敎伊喫茶去且置 曾到 爲甚麽也敎伊喫茶去」。 州云 「院主」 院主應 「喏」 州云 「喫茶去」。
 
옛날에 조주 노인은 도풍(道風)이 우뚝하여 시방에서 참례하는 학자들이 대단히 많았다. 하루는 두 중이 새로 도착하였다。 조주는 한 중을 가리키며 「그대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고 물었다。 그 중은 「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주는 「차나 마시게」라고 하였다. 또 다른 중에게 「이 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고 물으니 그 중은 「와 본적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주는「차나 마시게」라고 하였다。 이를 보고 원주가 「와 본 적이 없다는 이에게 차를 마시라는 것은 그렇다 치고 와 본 적이 있다는 이에게도 차를 마시라는 것은 어째서입니까?」고 물으니, 조주는 「원주!」 하고 불렀다. 그러자 원주는 「네」 하고 대답했다。 조주는 다시 「차나 마시게」 라고 하였다。
 
如是三人都得了利益。 後來傳偏天下 都說 「趙州茶」。 又如此地 雲門祖師 有學者來見 就學起胡餠 學者就領會了。 所以天下相傳 「雲門鮮」 「趙州茶」。
 
이처럼 세 사람 모두가 이익을 얻었는데 후세에 이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전해져 「조주차(趙州茶)」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운문조사에게도 있었으니, 어떤 학자가 찾아오자 운문은 호빵을 제시했으며, 그 학자는 곧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운문병(雲門餠)」 「조주차(趙州茶)」 라고 전해지게 되었다.
 
 
現在諸位 正在喫茶喫餅 會了麽。 如若未會 當體取喫茶的是誰 喫餅的是誰。 大抵古人 念念合道 步步無生 一經點醒 當下即悟。 今人梵行未淸 常常在動 念念生滅 覆障太厚 如何點法 他亦不化。 所以諸位總要放下一切 不使凡情妄念 染汚自己的妙明眞心。 古人說 「但盡凡情 別無聖解」。 你現在喫化生 若不知花生的香味 就同木石。 若知花生的香味 就是凡夫。 如何去此有無二途處。 就是衲僧本分事。 縱然超脫了這些見解 猶在鬼窟裏作活計 大家子細。 放下身心 莫隨節令轉 直下參去。
 
현재 여러분은 바로 차를 마시고 빵을 먹고 있다. 알겠는가? 만약에 알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차를 마시는 자는 누구인가? 빵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대체로 옛 사람들은 생각 생각이 도에 합했고 걸음 걸음이 무생(無生)이었으며, 하나의 경전에서 알아챘고, 그 자리에서 곧 깨달았다. 요즘 사람들은 수행이 청정하지 못하고 항상 동요하고 있으며、 생각 생각에 생멸(生滅)하며, 업장이 두터우니 어떻게 법을 깨달을 것이며 남을 교화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요컨대 일체를 놓아 버려서 범정(凡情)과 망념이 자기의 묘명(妙明)한 진심(眞心)을 더럽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옛 사람이 설하기를 「다만 범부의 정념만 없애 버려라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고 하였다. 그대는 현재 낙화생을 먹고 있는데、 만약에 낙화생의 향미를 모른다면 나무나 돌과 마찬가지요, 만약에 낙화생의 향미를 안다면 곧 범부이니、 어떻게 하여야 이 유무(有無)의 두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납승의 본분사(本分事)다。 비록 이 견해에서 벗어날지라도 귀신의 굴 가운데서 살 궁리를 꾸미고 있는 격이니, 여러분들은 자세히 참구하라. 신심(身心)을 놓아 버리고 절령(節令)을 쫓아 뒹굴지 말아라。 곧바로 참구하라.
 
 
 
 
 
 
 
V、수행과 불수행(不修行)
 
 
講修行 講不修行 都是一句空話。 你我透徹了自己這一段心光 當下了無其事還說甚麽修與不修。 試看本師釋迦牟尼佛的表顯。 出家訪道 苦行六年證道。 夜覩明星 嘆曰 「奇哉奇哉 大地衆生 皆有如來智慧德相 祇因妄想執著 不能證得。 若離妄想 則清淨智 自然智 無師智 自然現前」。 以後說法四十九年 而曰 「未說著一字」。 自後歷代祖師 一脈相承 皆認定 「心佛衆生 三無差別」。 「直指人心 見性成佛」。 橫說竪說 或棒或喝 都是斷除學者的妄想分別。 要他直下 「識自本心 見自本性」。 不假一點方便葛藤。 說修說證 佛祖的意旨 我們也就皎然明白了。
 
수행한다고 하거나 수행하지 아니한다고 하거나 모두 하나의 부질없는 말이다. 그대와 내가 자신의 이 심광(心光)을 사무치기만 하면 그대로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행한다고 하거나 수행하지 아니한다고 할 것인가?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의 나투심을 보라. 출가하여 도를 묻고 6년 고행을 거쳐 도를 증득하고 나서 밤에 샛별을 보면서 탄식하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다。 온 세상의 중생들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는데도、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증득하지 못하고 있구나. 만약에 망상만 여읜다면 곧 청정한 지혜、 자연히 갖추어진 지혜、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는 지혜가 저절로 전할 것을․․․」이라고 하셨다. 그 뒤로부터 49년 동안 설법하시고 나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 뒤에 조사들도 일맥으로 상승하면서 모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셋이 차별이 없다」 거나、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 고 인정 하였으며、 차근차근 조리있게 설명하거나 또 방망이를 휘두르기도 하고 큰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학자들의 망상과 분별을 끊어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저들은 곧 바로 「자기의 본심을 깨닫고 자기의 본성을 보았을 뿐」 한낱의 방편이나 언어 문자[葛藤]를 빌리지 않았다. 수행한다고도 하고 수행하지 아니한다고도 한 불조의 의도를 우리들은 명확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你我現前這一念心 本來清淨 本自具足 周徧圓滿 妙用恆沙 與三世諸佛無異。 但不思量善惡 與麽去 就可立地成佛 坐致天下太平。 如此有甚麼行可修講修行豈不是句空話嗎。 但你我現前這一念心 向外融求 妄想執著 不能脫離 自無始以來 輪轉生死 無明煩惱 愈染愈厚。 初不知自心是佛即知了 亦不肯承當作不得主 沒有壯士斷腕的勇氣 長在妄想執著中過日子。 上焉者 終日作模作樣 求禪求道 不能離于有心。 下焉者 貪瞋癡愛 牢不可破 背道而馳。 這兩種人生死輪轉 沒有已時 講不修行 豈不又是空話。
 
그대와 나의 현전하는 이 일념은 본래 청정하고 본래 구하며 두루하고 원만하며 묘용이 항하(恒河)의 모래알 같아서 삼(三)세 제불과 더불어 다름이 없다. 다만 선악만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수도 있으며, 앉아서 천하태평을 이룰 수도 있다. 이렇거늘 무슨 행을 닦을 것인가? 수행한다는 것이 어찌 헛소리가 아니겠는가? 다만 그대와 나의 현전하는 이 일념이 밖으로만 치달아 망상과 집착을 구하여 벗어날 줄 모르며,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생사에 유전하여 무명과 번뇌는 더욱 물들고 더욱 두터워진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 마음이 곧 부처인 줄 알지 못하였고, 알고나서는 받아들이려 하지 아니하여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며, 장사의 팔뚝을 끊을 만한 용기도 없어서 길이 망상과 집착 가운데서 날을 보내고 있다. 향상(向上)하는 자들도 종일토록 이리저리 선(禪)을 찾고 도를 찾아 유심(有心)을 여의지 못하며、 향하(向下)하는 자들은 탐욕과 진에(瞋恚)와 우치와 애욕이 깨뜨릴 수 없을 만큼 굳어서 도를 등지고 내달리고 있다. 이와 같은 2종의 사람들이 생사에 유전하여 그칠 때가 없으니 수행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이 헛소리가 아니겠는가?
 
 
所以大丈夫 直截了當。 深知古往今來 事事物物 都是夢幻泡影 無有自性。 人法頓空 萬緣俱息 一念萬年 直至無生。 旁人看他穿衣喫飯 行住坐臥 一如常人。 殊不知他安坐自己清淨太平家裏 亭受無盡藏寶 無心無爲 自由自在 動靜如如冷暖祇他自己知道。 不惟三界六道的人天神鬼窺他不破 就是諸佛菩薩也禁他不何。 這樣還說箇甚麼修行與不修行呢。 其次的人 就要發起志向 痛念生死 發慚媿心 起精進行 訪道力參。 常求善知識 指示途徑 勘辨邪正。 「如切如磋 如琢如磨」 「江漢以濯之 秋陽以曝之」 漸臻于精純皎潔 這就不能說不修行了。
 
그러므로 대장부는 곧 바로 알아채어、 깊이 고금의 사물이 모두 꿈과 같고 헛개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자성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인(人)과 법(法)이 몰록 공해지고 만연이 모두 쉬어져서 일념이 만년이 되어 곧 바로 무생에 이르러야 한다. 이와 같은 이를 곁에서 보면 옷 입고 밥 먹고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한결같이 보통 사람들과 같아서、 그가 자기의 청정하고 태평한 집안 속에 앉아서 무진장의 보배를 누리며 무심무위(無心無爲)하고 자유 자재하며 동(動)과 정(靜)이 한결같음을 알지 못한다. 차고 더운 것은 오직 그만이 알 뿐이다。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인간과 하늘과 귀신들만이 그를 엿보며, 남이 깨뜨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도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이렇거늘 수행한다거나 수행하지 아니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 사람들은 뜻을 일으켜 생사를 아프게 생각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정진과 수행을 하며, 도를 묻고 힘껏 참구하며, 늘 선지식을 찾아서 지름길을 지시 받아 사(邪)와 정(正)을 가려야 한다. 「끊는 듯、 오리는 듯、 쪼는 듯、 가는 듯」하며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로써 씻고, 가을 볕으로써 쪼이어」 점점 정밀하고 순결함에 나아가야 하거니、 수행하지 아니한다고 설해서는 아니된다.
 
 
上來說的不免遷上就下 仍屬一些葛藤 明眼人看來 要認爲 「拕泥帶水」。然祖庭秋晚 去聖日遙 爲應羣機 不得已而如此羅索。 究實論之 講修行講不修行 都是空話 直下無事 本無一物 那容開口 菩薩呀 會嗎。
 
이상에서 말한 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옮기는 격임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한낱 갈등일 뿐이다. 눈 밝은 사람이 본다면 우물쭈물거린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조사의 뜰에는 가을이 깊었고 성인이 가신지는 오래 되었으므로 보통 근기들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처럼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논한다면 수행한다거나 수행하지 아니한다거나 하는 것 모두가 헛소리다。 곧 바로 무사(無事)함에 이른다면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떻게 입을 열 수가 있겠는가? 보살들아! 알겠는가?
 
 
 
 
參禪要旨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