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1. 22:28ㆍ글뭉치
<< 달마 이입사행론 達摩 二入四行論>>
【달마소전達摩小傳】
法師者 西域南天竺國人 是大婆羅門國王第三之子也。 神慧踈朗 聞皆曉悟。 志存摩訶衍道 故捨素從緇 紹隆聖種。冥心虛寂 通鑒世事 內外俱明 德超世表。 悲悔邊隅正教陵替 遂能遠涉山海 遊化漢魏。 亡心之士 莫不歸信 取相存見之流 乃生譏謗。 于時唯有道育慧可 此二沙門 年雖後生 俊志高遠 幸逢法師 事之數載 虔恭諮啟 善蒙師意。 法師感其精誠 誨以真道。 如是安心 如是發行 如是順物 如是方便。 此是大乘安心之法 令無錯謬。 如是安心者壁觀 如是發心者四行 如是順物者 防護譏嫌 如是方便者 遣其不著。 此略序所由 意在後文。
법사法師는 서역남천축국西域南天竺國 사람으로, 이는 대바라문大婆羅門 국왕國王의 셋째 아들이시다. 신령한 지혜가 툭 트이고 밝아 들으면 모두 분명하게 깨달았다. 뜻을 마하연도摩訶衍道에 둔 까닭으로 세속 옷[素]을 벗어버리고 먹물 옷[緇]의 수행자가 되어, 성스러운 씨앗[佛法]을 높이 받들어 이었다. 마음이 허적虛寂한데에 명합冥合하고(가만히 합하고) 세상 일을 툭 통하여 잘 살펴서 안과 밖이 모두 밝았으며 그 덕德은 세상의 모범을 초월했다. 나라 여러 주변에서 바른 가르침이 점점 쇠미衰微하여짐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드디어 능히 산과 바다를 건너 한漢나라 위魏나라 땅을 다니시며 교화敎化하셨다. 마음을 잊은[無心] 선비가 귀의歸依하여 신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상相을 취하는 견해가 있는 무리들은 이에 헐뜯고 비방하는 마음을 내었다. 그 시대에 오직 도육道育과 혜가慧可가 있었으니, 이 두 사문沙門은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높고 원대한 뜻을 품은 인물이라 법사法師와의 만남을 기뻐하였으며, 몇 해 동안 그를 받들어 삼가 공경히 섬기어 물어 여쭈었다. 법사法師는 그들의 정성精誠에 감동하여 진도眞道(참된 도)로써 가르쳤으니, 이는 여시안심如是安心과 여시발행如是發行과 여시순물如是順物과 여시방편如是方便이다. 이것은 대승안심大乘安心의 법法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어긋나거나 그르침이 없게 하였다. ‘여시안심如是安心’이란 벽관壁[면벽관심面壁觀心]이요, ‘여시발심如是發心’이란 사행四行(원수갚는 행, 인연 따르는 행, 구함 없는 행, 법에 칭합하는 행)이며, ‘여시순물如是順物’이란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막아서 보호함이요, ‘여시방편如是方便’이란 떨쳐버려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간략히 연유한 바를 서술한 것이니 그 뜻은 후문後文에 있다.
【이입사행二入四行】
夫入道多途 要而言之 不出二種。一是理入 二是行入。
대저 도道에 들어감은 많은 길이 있으나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이입理入이요, 둘은 행입行入이다.
理入者 謂藉教悟宗 深信含生凡聖同一真性 但為客塵妄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真 凝住壁觀 自他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文教 此即與理冥符 無有分別 寂然無為 名之理入。
이입理入이란, 교教에 의지하여 종지宗旨를 깨달음을 이르며, 생명 있는[含生] 모든 범부와 성현이 동일同一한 진성真性을 지니고 있으나 다만 객진客塵의 망妄(번뇌)에 뒤덮혀 있으므로 능히 드러내지 못할 뿐임을 깊이 믿는 것이다. 만약 망妄을 없애고 진眞에 돌아가려 할진댄 마음을 모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해야 할 것이니[凝住壁觀], (그리하면) 자타自他와 범성凡聖 등이 동일同一해서 굳게 머물러 옮겨지지 아니하여 다시는 글의 교법敎法을 좇지 않게 되리라. 이에 곧 이치와 더불어 가만히 부符(증표)가 서로 맞듯하여 분별分別이 없고 적연寂然하여 함이 없어지나니, 이 이름이 ‘이입理入’이다.
行入者 所謂四行。 其餘諸行悉入此行中。 何等為四 一報冤行 二隨緣行 三無所求行 四稱法行。
행입行入이란, 이른바 사행四行(네 가지 행行)이다. 그 나머지 모든 행行들은 다 이 행行 가운데 들어간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보원행報冤行이요,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이요,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이며, 넷째는 칭법행稱法行이다.
云何報冤行. 修道行人 若受苦時 當自念言 我從往昔 無數劫中 棄本從末 流浪諸有 多起怨憎 違害無限. 今雖無犯 是我宿殃惡業果熟 非天非人所能見與 甘心忍受 都無冤訴。 經云 逢苦不憂 何以故 識達本故。 此心生時 與理相應 體冤進道 是故說言報冤行。
무엇을 일러 ‘보원행報冤行(원한에 대해 보답하는 행)’이라 하는가? 도道를 닦아 행하는 사람이 만약 괴로움을 받을 때에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길, “나는 아주 오래된 때로부터 셀 수 없이 한량 없는 세월 가운데에 근본根本을 버리고 지엽枝葉적인 일 만을 좇아서 모든 존재를 유랑流浪하였으며, 많은 원망怨望과 증오憎惡를 일으켜 남에게 어긋진 해害를 끼친 것이 한限이 없다. 지금은 비록 범犯하지는 않았으나 숙세宿世의 죄업罪業인 악업惡業의 과보果報가 익었기 때문이요, 하늘이 준 것도 아니며 남이 준 것도 아니니,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이다. 달게 여기는 마음으로 참고 받아들이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결코 없다.”라고 한다. 경經에 이르기를,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하지 말지니, 왜 그런가 하면 식識으로써 근본根本을 통달通達하는 까닭이다.」하였다. 이 마음이 생生할 때에 이치[理]와 더불어 상응相應하면 원망의 체體로서 도道에 나아가게 되니 이러한 까닭으로 설說하여 말하길 ‘보원행報冤行’이라 한다.
第二隨緣行者 眾生無我 並緣業所轉 苦樂齊受 皆從緣生。 若得勝報榮譽等事 是我過去宿因所感 今方得之緣盡還無 何喜之有。 得失從緣 心無增減 喜風不動 冥順於道。 是故說言隨緣行。
두 번째 ‘수연행隨緣行(인연을 따르는 행)’이라 함은, 중생은 나라는 것이 없어서[無我] 모두가 업業의 구르는 바를 연緣하여 고통과 즐거움을 받나니, 이는 모두가 연緣을 좇아서 생生하는 것이다. 만약 영예로움 같은 수승殊勝한 일의 과보果報를 얻었다 하더라도 이는 내가 과거 전생에 맺은 인因이 감응感應한 것이니, 지금 비로소 그것을 얻은 연緣(조건)이 다하면 무無로 돌아가거늘 어찌 그것에 기뻐함이 있으리요? 연緣을 좇아서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나 마음은 늘거나 줄어듦이 없으니, 기쁨의 바람이 불어도 동요動搖됨이 없이 도道에 명합冥合하여 따른다. 이러한 까닭으로 설說하여 말하길 ‘수연행隨緣行’이라 한다.
第三無所求行者 世人常迷 處處貪著 名之為求。 智者悟真 理將俗反 安心無為 形隨運轉 萬有斯空 無所願樂。 功德黑暗 常相隨逐。 三界久居 猶如火宅 有身皆苦 誰得而安。 了達此處 故於諸有 息想無求。 經云 有求皆苦 無求則樂。 判知無求真為道行。
세 번째 ‘무소구행無所求行’이라 함은, 세상 사람[世人]은 도리道理에 미혹[迷]하여 곳곳 마다 탐착貪著하니 그것을 이름하여 ‘구함[求]’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智者]은 진리真理를 깨달아 속俗[妄]을 가져서 (마음을)돌이키니[反照], 무위無為에 안심安心하며 형形은 흐름을 따른다. 만유萬有는 이 공空이라 즐거움을 원할 바가 없으니, 공덕녀功德女와 흑암녀黑闇女는 항상 서로를 쫓아 따른다. 삼계三界에 오래도록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불타는 집과 같나니, 몸이 있음에 모두가 고통인데 누구라서 편안함을 얻겠는가? 이곳[此處]을 요달了達한 까닭에 모든 소유所有에 대하여 생각을 쉬어버려 구함이 없다. 경經에 이르기를, 「구함이 있음은 모두가 고통이요 구함이 없으면 즐거움이다.」 하였으니, ‘구함 없음[無求]’이 진실로 ‘도행道行’이 됨을 알겠다.
第四稱法行者 性淨理體 目之為法 此理眾相斯空 無染無著 無此無彼。 經云 法無眾生 離眾生垢故 法無有我 離我垢故。 智者若能信解此理 應當稱法而行。 法體無慳 於身命財 行檀施捨 心無悋惜. 達解三空 不倚不著 但為去垢 攝化眾生 而不取相. 此為自立 復能利他 亦能莊嚴菩提之道。 檀施既爾 餘五亦然。 為除妄想 修行六度 而無所行 是為稱法行。
네 번째 ‘칭법행稱法行’이라 함은, ‘성性의 청정한 이체理體를 가리켜 법法으로 삼음이니, 이 이치는 온갖 상相이 이에 공空해서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이것[此]도 없고 저것[彼]도 없는 것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법法에는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때[垢]를 여의었기 때문이며, 법法에는 나 있음이 없으니 나라는 때[垢]를 여의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이 만약 이 이치를 믿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응당應當 법法에 계합契合[稱法]하여 행行한다. 법의 본체[法體]에는 아까워함[慳]이 없으니 신체나 목숨이나 재물까지라도 보시布施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세 가지가 원래 공함[三空: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를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물건]을 요달了達하여 기대지도 않으며 집착하지도 않나니, 다만 번뇌의 때를 벗어버리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함이니 거기에 상相을 낼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뜻을 세우고 다시 능히 타인을 이롭게하며 또한 능히 보리菩提의 도道를 장엄莊嚴하는 것이다. 보시布施[檀那]의 공덕이 이미 이러하므로 다른 다섯 가지(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바라밀波羅蜜 또한 그러하다. 망상번뇌妄想煩惱를 제거하기 위하여 육바라밀六波羅蜜[六度]을 수행修行해 나가지만 실로 행한다는 생각까지도 없음, 이것을 일러 ‘칭법행稱法行(법에 계합하는 행)’이라고 한다.
【給道友之信】
○ 吾恆仰慕前哲 廣修諸行 常欽淨土 渴養遺風 得逢釋迦 證大乘者巨億 獲四果者無數。 實謂天堂別國 地獄他方 得道獲果 形殊體異 披經求福 潔淨行因 紛紛繞繞 隨心作業 向涉多載 未遑有息。 始附端居幽寂 定境心王。 但妄想久修 隨情見相 其中變化 略欲難窮。 末乃洞鑒法性 粗練真如 始知方寸之內 無所不有 明珠朗徹 玄達深趣。 上自諸佛 下及蠢動 莫非妄想別名 隨心指計。 故瀉幽懷 聊顯入道方便偈等 用簡有緣同悟之徒。 有暇披覽坐禪。
내가 항상 전철(前哲-자기보다 먼저 현명하게 도를 깨친 분)을 우러러 사모하였으며, 모든 행을 널리 닦았으며, 또 항상 정토를 흠모하여 거기에 남겨둔 가풍[宗風]을 목마르게 수양修養하였다. 석가釋迦를 만나게 되어 대도大道[大乘]을 증득證得한 자가 수억이요, 사과四果를 증득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실로 천당天堂은 별국別國이고 지옥地獄은 타방他方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도道를 얻고 과위果位를 증득證得하면 형상이 달라지고 몸도 빼어날 것이라 생각하여 경經을 펼치고 복福을 짓는 일을 열심히 하였으며, 수행의 원인이 되는 것도 아주 청결히 하였으며 분분요요紛紛繞繞히 마음을 따라 업業을 지으며 많은 것을 행行하고 여러 곳으로 돌아다녔으되 조금도 마음을 쉴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비로소 다시 아주 그윽하고 고요한 선정禪定의 경계境界에 단정히 거居했으나 마음은 다만 망상妄想으로 오랫동안 수행을 했으되 자기 정견情見을 따라서 모양다리만 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 변화한 것을 간략히 말을 하고자 하나 그것을 다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법성法性을 아직 훤출하게 살펴봄에 미치지 못했더니, 수행을 하여 진여眞如를 단련해 가면서 보니 비로소 방촌지方寸地(마음) 내內에 있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또 밝은 구슬이 훤하게 사무쳐서 아주 깊은 지취旨趣를 현현하게 요달了達 했다.위로는 제불諸佛에 이르고 아래로는 준동蠢動에 이르기까지 망상妄想의 다른 이름 아님이 없었으며 마음을 따라 계교計較 함이었다. 그런 까닭에 깊은 마음을 써서 애오라지(부족하나마 그대로) 입도방편入道方便의 글귀들을 나타내어 깨달음을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간략하게 베푸나니, 틈이 있을 때면 이것을 펼쳐보고서 좌선坐禪을 하라.
○ 須見本性會也。 融心令使淨 瞥起即便是生滅 於中憶想造邪命 覓法計心業不遷 展轉增垢心難究竟. 智者暫聞八字 即便悟理 始知六年徒勞苦行。 世間遶遶盡是魔人 徒自喧喧 空為鬥諍。 虛妄作解 教化眾生 口談藥方 不除一病。 寂寂從來本無見相 何有善惡及與邪正。 生亦不生 滅亦不滅。 動則不動 定則非定。 影由形起 響逐聲來。 弄影勞形 不知形之是影 揚聲止響 不知聲之是響根。 除煩惱而求涅槃者 喻去形而覓影。 離眾生而求佛者 喻默聲而尋響。 故知迷悟一途 愚智非別。 無名處強為立名 因其名即是非生矣。 無理處強為作理 因其理即諍論興焉。 幻化非真 誰是誰非 虛妄無實 何有何無。 當知得無所得 失無所失。 未及造談 聊申此句 詎論玄旨。
모름지기 반드시 본성本性을 보아야[見性] 한다. 마음을 원융히 해서 청정淸淨해야 할 것이니, 한 생각 언뜻 일으킨즉 바로 이 생멸生滅이라, 그 가운데 억상憶想으로 삿된 업業을 짓거나 어떤 법을 찾아서 계교하는 마음으로 업을 짓는 것을 옮기지(고치지) 아니하고 전전展轉이 번뇌의 때를 더할 것 같으면, 마음은 마침내 원만하게 깨치기 어려울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잠깐 여덟 자[八字]를 듣고 곧 문득 이치를 깨달으면, 비로소 (부처님께서) 육년 고행하신 것이 한갓 수고로운 고행苦行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세간世間에 분주한 것이 모두가 이 마군魔軍의 사람이니, 한갓 스스로 시끄럽고 공연히 투쟁을 일삼으며 허망虛妄한 알음알이를 지어서 중생을 교화하나니, 입으로는 약방문藥方文을 말하나 한 병病도 없애지를 못한다. 적적寂寂하여 종래從來로 본디 견(見分-주관)과 상(相分- 대상)이 없거늘 무슨 선善과 악惡이 있으며 더불어 사邪와 정正이 있겠는가? 생生하나 또한 생生하지 아니하고, 멸滅하나 또한 멸滅하지 아니한다. 동動하면 동動치 않음이요, 정定하면 정定하지 않음이라. 그림자는 형체[形]를 말미암아 일어나고, 메아리는 소리[聲]를 쫓아서 온다. 그림자를 (없애려) 희롱하면서 형形을 수고롭게 함은 형形이 이 그림자인 줄을 알지 못해서이고, 소리를 드높이며 메아리를 멈추려 함은 소리가 이 메아리의 근본인 줄을 알지 못해서이다. 번뇌煩惱를 없애고 열반涅槃을 구하려는 것은 비유하면 형形을 버리고서 그림자를 찾는 격이며, 중생衆生을 떠나서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비유하면 소리를 잠잠히 하면서 메아리를 찾는 격이다. 그러므로 미혹함[迷]과 깨달음[悟]은 하나의 길이요 어리석음[愚]과 지혜[智]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름이 없는 곳에 억지로 이름을 세우니 그 이름으로 인해 곧 옳고 그른 시비是非가 생기는 것이고, 이치가 없는 곳에 억지로 이치를 지으니 그 이치로 인하여 곧 쟁론諍論이 일어나는 것이다. 환화幻花가 참이 아닌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를 것이며 허망虛妄해서 실實다움이 없는데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겠는가? 마땅히 알 것이니, 얻어도 얻은 바가 없으며 잃어도 잃은 바가 없느니라. 에오라지 거듭 이러한 글귀로써 말을 지으나 어찌 현현玄玄한 지취旨趣를 논論할 수가 있겠는가?
○ [云何諸佛說空] 諸佛說空法 為破諸見故。 而復著於空 諸佛所不化。 生時唯空生 滅時唯空滅 實無一法生 實無一法滅。 一切法為貪欲而起。 貪欲無內亦無外 亦不在中間。 分別是空法 凡夫為所燒。 邪正無內外 亦不在諸方。 分別是空法 凡夫為所燒 一切法亦如是。
모든 부처님께서 공법空法을 설說하심은, 모든 견해를 깨트리기 위한 까닭이다. 그런데 다시 공空에 집착을 한다면 모든 부처님께서도 교화敎化하지 못한다. 날[生] 때에도 오직 공空이 난 것이요 멸滅할 때에도 오직 공空이 멸한 것이라, 실로 한 법도 생生한 것이 없고 실로 한 법도 멸滅한 것이 없다. 일체의 법은 탐욕貪欲으로 일어나게 되나, 탐욕貪欲이라는 것은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밖에도 있지 아니하며 또한 중간에도 있지 아니하다. 이 공법空法을 분별分別함으로(분단分斷을 내어서 보기 때문에) 범부들이 거기에 타져 죽는다. 사邪와 정正이라는 것도 안에도 밖에도 없으며 또한 모든 방위에도 없는데 이 공법空法을 분별分別하여 범부들이 거기에 타죽는다. 일체법一切法이 또한 이와 같다.
* 諸佛說空法 為破諸見故: 「如來一切法 除我一切心 我無一切心 何須一切法.」 - [宗鏡錄]
○ [般若論理] 法身無形 故不見以見之。 法無音聲 故不聞以聞之。 般若無知 故不知以知之。 若以見為見 有所不見。 若以無見為見 即無所不見。 若以知為知 有所不知。 若以無知為知 無所不知。 不能自知非有知 對物而知非無知。 若以得為得 有所不得。 若以無得為得 無所不得。 若以是為是 有所不是。 若以無是為是 無所不是。 一智慧門入百千智慧門。 見柱作柱解 是見柱相作柱解。 睹心是柱 法無柱相。 是故見柱即得柱法。 見一切形色亦如是。
법신法身은 형체가 없으므로 보지 못함으로써 그것을 본다. 법신法身은 음성이 없으므로 듣지 못함으로써 그것을 듣는다. 반야般若는 앎이 없으므로 알지 못함으로써 그것을 안다. 만약 봄으로써 봄을 삼을 것 같으면 곧 보지 못하는 바가 있거니와, 만일 봄이 없는 것으로써 봄을 삼을 것 같으면 곧 보지 못하는 바가 없다. 만약 아는 것으로써 앎을 삼는다면 알지 못하는 것이 있거니와, 만일 앎이 없는 것으로써 앎을 삼는다면 아지 못하는 바가 없다. 자기 자신은 알 수가 없기에 앎이 있지 아니하나, 물物을 대하여서는 앎으로 앎이 없는 것도 아니다(모든 것을 아는 그 자신은 알지 못하니 ‘非有知’, 사물을 보면 분별하여 알수 있으니 ‘非無知’). 만일 얻음으로써 얻음을 삼는다면 얻지 못하는 바가 있거니와 만일 얻음이 없는 것으로 얻음을 삼는다면 얻지 못하는 바가 없다. 만일 옳은 것으로서 옳음을 삼는다면 옳지 못한 바가 있거니와 만일 옳음이 없는 것으로서 옮음을 삼는다면 옳지 않은 바가 없다. 한 지혜智慧의 문門이 백천 지혜의 문으로 들어가느니라.
기둥을 보고 ‘기둥’이라는 해解(알음알이)를 짓나니, 이는 기둥의 상相을 보고 기둥이라는 해解(알음알이)를 지은 것이다. 보는 마음[睹心]이 이 기둥인 것이지, 법法에는 기둥이라는 상相이 없다(‘기둥’이라고 하는 그 생각을 보는 것이지 법에는 ‘기둥’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기둥을 봄에 곧 기둥의 법法을 얻는다. 일체의 형색形色을 보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 “참말로 밝은 거 어두운 것이 없기 따문에 참말로 밝은 것이여. 참말로 상[相]이 없고 크고 적은 모냥이 없기 따문에 참말로 큰 것이여. 아무리 찾아 봐도 없기 따문에 참말로 있는 것이여. 없다고 해 놓고 보니 없다고 헌 놈은 뉘귄가? 그건 없는 놈이 아니여. 있다고 해 놓고 보니 아무리 찾아 보지, 거기에 무슨 코빼기 눈깔이 어디 있는가? 허지마는 코빼기 눈깔이 참말로 있어.” - 전강선사 법문 571번.
* 「首楞嚴經鈔云 若能轉物 即同如來者 心外無物 物即是心 但心離分別爲正智 正智即是般若 周徧法界 無有障礙」. - [宗鏡錄]
○ [批判虛無主義] 有人言 一切法不有。 難曰 汝見有不。 不有於有 有於不有 亦是汝有。 有人言 一切法不生。 難曰 汝見生不。 不生於生 生於不生 亦是汝生。 復言 我見一切無心。 難曰 汝見心不。 無心於心 心於無心 亦是汝心。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일체법一切法은 있지 않다[不有]”라고 한다. 힐난詰難해 이르되, “그대가 있음[有]은 보았느냐? ‘있음[有]에서의 있지 않음[不有]’이라거나, ‘있지 않음[不有]에서의 있음[有]’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이것은 그대의 있음[汝有]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일체법一切法은 남이 없다[無生].”라고 한다. 힐난해 가로되, “그대가 남[生]은 보았느냐?”‘남[生]에서의 나지 않음[不生]’이라거나, ‘나지 않음[不生]에서의 남[生].’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것은 그대의 남[汝生]이다. 또 다시 말하기를, “내가 일체를 봄에 마음이 없다[無心].”라고 말한다. 힐난해 가로되, “네가 마음[心]은 보았느냐? ‘마음[心]에서의 마음 없음[無心]’이라거나 ‘마음 없음[無心]에서의 마음[心]이라.’ 하더라도 역시 이것은 그대 마음[汝心]이다.
○ [三藏法師法語] 三藏法師言 不解時人逐法 解時法逐人。 解則識攝色 迷則色攝識。 不因色生識 是名不見色。 不求於求 求於無求 亦是汝求。 不取於取 取於無取 亦是汝取。 心有所須 名為欲界。 心不自心 由色生心 名為色界。 色不自色 由心故色 心色無色 名無色界。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이르기를, 「깨달아 알지 못할 때[不解時]에는 사람이 법法을 쫓고, 깨달아 알 때에는[解時] 법法이 사람을 쫓는다. 깨달아 알면 식識[마음]이 색色[대상]을 포섭하고, 미혹하면 색色[대상]이 식識[마음]을 포섭한다. 색色을 인因하여 식識이 생生하지 아니함, 이것을 이름하여 ‘불견색不見色(색을 보지 않음)’이라 한다.」 하였다. ‘구함에서의 구하지 않음’이라거나 ‘구함 없음에서의 구함’이라 하더라도 역시 이것은 그대의 구함[汝求]이다. ‘취함[取]에서의 취하지 않음[不取]’이라거나 ‘취함 없음[無取]에서의 취함[取]’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것은 그대의 취함[汝取]이다. 마음에 구求하는 바가(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이름하여 ‘욕계欲界’라 한다. 마음[心]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라 색色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내니[生心] 이름하여 ‘색계色界’라 하고, 색色은 스스로 색色이 아니라 마음[心]을 말미암는 까닭으로 색色이니, 마음[心]과 색色이 없는 색色을 이름하여 ‘무색계無色界’라 한다.
○ [何謂佛心] 問 何名佛心。 答 心無異相 名作真如。 心不可改 名為法性。 心無所屬 名為解脫。 心性無碍 名為菩提。 心性寂滅 名為涅槃。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불심佛心(부처의 마음)이라 합니까?” 답하되, “마음의 다른 상 없음[無異相]을 이름하여 ‘진여真如’라 하고, 마음의 바뀔 수 없음[心不可改]을 이름하여 ‘법성法性’이라 한다. 마음의 속한 바 없음[無所屬]’을 이름하여 ‘해탈解脫’이라 하고, 마음 성품[心性]의 걸림 없음[無碍]을 이름하여 ‘보리菩提’라 한다. 마음 성품[心性]의 (생사生死 없는) 적멸寂滅을 이름하여 ‘열반涅槃’이라 한다.
*열반涅槃: 자성自性이 공空한 까닭에 적멸寂滅하여 한 상相도 가히 얻을 것이 없음.
○ [所謂三寶] 問曰 何名如來。 答 解如應物 故名如來。 問 何名佛。 答 如法覺 覺無所覺 故名為佛。 問 何名為法。 答 心如法不生 心如法不滅 故名為法。 問 何名為僧。 答 如法和合 故名為僧。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여래如來’라 합니까?” 답하되, “여如[如如]를 깨달아[解] 물物[衆生]에 응應하는 까닭으로 이름하여 ‘여래如來’라 한다.”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불佛이라 합니까?” 답하되, “여법如法한 각覺(깨침)이니, 각覺(깨침)이 각覺한(깨친) 바가 없는[無所覺] 까닭으로 이름하여 ‘불佛’이라 한다.”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법法’이라 합니까?” 답하되, “마음이 여법如法하여 나지 아니하고[不生] 마음이 여법如法하여 멸하지 아니하는[不滅] 까닭에 이름하여 ‘법法’이라 한다.”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승僧’이라 합니까?” 답하되,“ 여법如法하여 화합和合한 까닭에 이름하여 ‘승僧’이라 한다.”
* 如法和合 故名為僧: 진정한 의미의 화합和合이란 말은, 「부처님[佛]과 법[法]과 자기 자신[自己]이 화합和合된 존재다. 부처님과 법이 화합된 것이 자기한테 있다.」 그래서 스님을 ‘승가僧伽’라 그러고 ‘상카’라고 하는 것이다. - 송담선사 법문 641번.
* 「心淸淨是佛 心光明是法 心不二是僧.」 - [禪家龜鑑]
○ [空定] 問 何名為空定。 答 看法住空 名為空定。 問 何名為住法。 答 不住住 不住於不住 如法住 名為住法。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공정空定’이라 합니까?” 답하되, “법法을 간看하여 공空에 머무름을 이름하여 ‘공정空定’이라 한다.”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주법住法(법에 머무름)’이라 합니까?” 답하되, “머무름[住]에 머물지 아니하며[不住], 머물지 않음[不住]에도 머물지 않는[不住] 여법한 머무름[如法住]을 이름하여 ‘주법住法’이라 한다.”
○ [男女相] 問 云何即男非男 即女非女。 答 依法推求 男女相不可得。 何以得知 即色非男女相故。 若色是男相 一切草木應是男 其女人亦如是。 惑人不解 妄想見男女 即是幻化男幻化女 畢竟無實。 諸法無行經云 知諸法如幻 速成人中上。
묻되, “무엇을 일러 ‘남자에 즉即하여 남자가 아니요, 여자에 즉即하여 여자가 아님’이라 합니까?” 답하되, “법法에 의지해서 미루어 구해보면, 남녀男女의 상相은 얻을 수가 없다[不可得, 空]. 무엇으로 아는가 하면, 색色에 즉即하면 남녀상男女相이 아닌[寂滅相] 까닭이다. 만약 색色이 이 남자의 상相이라면 일체의 초목草木도 응당 남자라야 옳고, 그 여인女人도 또한 이와같다(만약 색이 여자의 상相이라면 일체의 초목도 응당 여자라야 옳다). 미혹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망상妄想으로 남자와 여자를 보나니, 곧 이것은 환幻이 남자로 변화變化한 것이요 환幻이 여자로 변화變化한 것이니 필경에는 실다움이 없다[無實].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 이르기를, 「모든 법이 환幻과 같은 줄을 알면 속히 사람 가운데 상등인上等人을 이루리라.」 하였다.
○ [正覺] 問 證有餘涅槃 得羅漢果者 此是覺不。 答 此是夢證。 問 行六波羅蜜 十地萬行滿足 覺一切法不生不滅 非覺非知 無心無解為覺不。 答 亦是夢。 問 十力四無所畏十八不共法 菩提樹下道成正覺 能度眾生 乃至入於涅槃 豈非是覺. 答 亦是夢。 問 三世諸佛平等教化眾生 得道者如恆沙 此可非是覺。 答 亦是夢。 但有心分別計挍 自心現量者 皆是夢。 覺時無夢 夢時無覺。 此心意識妄想 夢裡智慧 無能覺所覺。 若如法覺 真實覺時 都不自覺 畢竟無有覺。 三世諸佛正覺者 並是眾生憶想分別。 以是故名為夢。 若識心寂滅 無一動念處 是名正覺。 齊有心識不滅已來 皆是夢。
묻되,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증득證得하여 나한과羅漢果를 얻은 것, 이것이 깨달음이 아닙니까?” 답하되, “이것은 꿈에 증득한 것이다.” 묻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하여 십지만행十地萬行을 만족하고 일체법一切法이 불생불멸不生不滅임을 깨닫되, 각覺도 아니요 지知도 아니며 마음도 없고[無心] 알음알이도 없으면[無解] 깨달음이라 하겠습니까?” 답하되, “역시 꿈이다.” 묻되, “십력十力·사무소외四無所畏·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도道로써 능히 중생을 제도하신 것이나 열반에 드신 것이 어찌 이 깨달음이 아니겠습니까?” 답하되, “역시 꿈이다.” 묻되,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이 중생을 평등平等히 교화하여 도道를 얻은 자가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데, 이것이 가히 깨달음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답하되, “역시 꿈이다.”
다못 분별계교分別計挍하는 마음이 있어서 마음으로부터 헤아려 나타난 것[自心現量者]은 다 이 꿈이다. 깨달은 때에는 꿈이 없고, 꿈꾸는 때에는 깨달음이 없다. 이것은 심의식心意識의 망상妄想이요 꿈 속의 지혜이니, 깨달은 자도 깨달은 것도 없는 것이다. 만약 여법如法하게 깨닫고 진실眞實하게 깨달은 때에는 도무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나니[不自覺], 필경에 깨달음이 있음이 없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정각正覺(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두가 이 중생眾生의 억상분별憶想分別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이름하여 꿈이라 한다. 만약 식심識心이 적멸寂滅하여 하나도 념念을 동動하는 곳이 없으면, 이 이름이 정각正覺이다. 일제히 심식心識이 멸滅하지 아니함이 있은 이후[已來]로는 다 이 꿈이다.”
○ [修道下手處] 問 修道斷惑 用何心智。 答 用方便心智。 問 云何方便心智。 答 觀惑知惑本無起處 以此方便 得斷疑惑 故言心智。 問 如法心斷何惑。 答 凡夫外道聲聞緣覺菩薩等解惑。
묻되, “도道를 닦아[修道] 미혹을 끊음[斷惑]에 어떠한 심지心智(마음의 지혜)를 씁니까?” 답하되, “방편심지方便心智를 쓴다.” 묻되, “무엇을 방편심지方便心智라 합니까?” 답하되, “미혹을 관觀하여 미혹이 본래로 일어나는 곳이 없는 줄을 아나니, 이러한 방편方便으로써 의혹疑惑 끊음을 얻는 까닭으로 ‘심지心智(마음의 지혜)’라 말한다.” “여법如法한 마음은 어떠한 미혹을 끊습니까?” “범부 · 외도 · 성문 · 연각 · 보살 등의 해혹解惑(‘알았다’고 하는 미혹)을 끊는다.”
* 觀惑知惑本無起處: 「妄本空 心本淨」 - [無住警策]
「果能識妄本空 知真本淨 依之修行 倒因可除 涅槃可詣矣」
- [首楞嚴經 纂註]
○ [二諦] 問 云何二諦。 答 譬如陽炎 惑者見陽炎作水解 實非水 此是陽炎。 二諦義亦復如是。 凡夫見第一義諦為世諦 聖人見世諦為第一義諦。 故經云 諸佛說法 常依二諦。 第一義諦即世諦 世諦即第一義諦 第一義諦即是空。 若見有相 即須併當卻。 有我有心 有生有滅 亦即併當卻。 問 云何併當却。 答 若依法看 即失諦視 不見一箇。 故老經云 建德若偷。 引入虛空。
묻되, “무엇을 ‘이제二諦[眞諦·俗諦]’라 합니까?” 답하되, “비유하면 봄날 아지랑이[陽炎]와 같나니, 미혹한 자는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는 해解를 짓는데 실實은 물이 아니요 이것은 아지랑이다. 이제二諦[眞諦·俗諦]의 뜻도 역시 이와 같다. 범부凡夫는 제일의제第一義諦(최상의 진리)를 보고 세제世諦[俗諦]를 삼고, 성인聖人은 세제世諦[俗諦]를 보고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삼는다. 고故로 경經에 이르기를, 「제불諸佛의 설법說法은 언제나 이제二諦[眞諦·俗諦]에 의지한다.」하였으니, 제일의제第一義諦가 곧 세제世諦이며 세제世諦가 곧 제일의제實이다. 제일의제[實]란 곧 이 공空이다. 만약 상相이 있음을 보면 곧 모름지기 아울러 당체當体에서 쉬어버려야(물리쳐야) 한다. 내[我]가 있고 마음[心]이 있으며 생生이 있고 멸滅이 있음에, 또한 곧 아울러 당체當体에서 쉬어버려야(물리쳐야) 한다.” 묻되, “무엇을 일러 ‘아울러 당체當体에서 쉬어버림[併當却]’이라 합니까?” 답하되, “만약 법法을 의지해서 본다면[看話頭] 곧 제諦[二諦]를 잃어버리고 봄[視]이라 한 개[一箇]의 상相도 보지 못한다. 고故로 <노경老經>에 이르기를, 「건덕약투建德若偷(세워진 덕은 짝을 훔친 듯 하다(잘 들어맞는다).」 하여, 허공虛空으로 들게 이끌었다.
* 併當却: 다 물리치다. 다 쉬어버리다. ‘성인聖人’이다 ‘범부凡夫’다, ‘제일의제第一義諦다’‘세제世諦다’ 라고 하는 두 가지 소견[二見]을 아울러서 법에 의지하여 당체當体에서 쉬어버린다, 또는 물리친다.
* 建德若偷: 「偸匹也.建德者 因物自然 不立不施 故若偷匹.」 짝을 훔침이라[匹也]. 세워진 덕이라 함은[建德者], 물物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인因함이니, 세우지 않고[不立] 베풀지 않는[不施] 까닭으로 짝을 훔친 듯 하다[若偷匹, 잘 들어맞다]. - <道德經> 41장, 王弼 注.
○ [心與法] 問 貪欲名何物心。 答 凡夫心。 問 作無生是何物心。 答 是聲聞心。 問 解法無自性是何物心。 答 是緣覺心。 問 不作解不作惑 是何物心。 答 菩薩心。 問 不覺不知是何物心。 即不答。 所以不答者 是法不可答 法無心故 答即有心。 法無言說 答即有言說。 法無有解 答即有解。 法無知見 答即有知見。 法無彼此 答即有彼此。 如此心言 俱是計著。 心非色故 不屬色。 心非非色 不屬非色。 心無所屬 即是解脫。 若犯禁戒時忙怕 但知怕心不可得 亦得解脫。 亦知生天不可得。 雖知空 空亦不可得。 雖知不可得 不可得亦不可得。
묻되, “탐욕貪欲은 어떤 물심物心을 이름한 것입니까?” 답하되, “범부심凡夫心이다.” 묻되, “무생無生(남이 없음)을 짓는 이것은 어떤 물심物心입니까?” 답하되, “이것은 성문심聲聞心이다.” 묻되, “‘법法은 자성自性이 없음 을 아는[解]’ 이것은 어떤 물심物心 입니까?” 답하되, “이것은 연각심緣覺心이다.” 묻되, “해解(알음알이)도 짓지 아니하고 혹惑(미혹)도 짓지 않는 이것은 어떤 물심物心입니까?” 답하되, “보살심菩薩心이다.” 묻되, “알지도 깨치지도 않는[不覺不知] 이것은 어떤 물심物心입니까?” 곧 답答하지 않겠다. 답하지 않는 까닭은, 이 법法은 답을 할 수가 없다. 법法은 무심無心인(마음 없는) 까닭으로 답을 한즉即 유심有心(마음 있음)이 된다. 법은 언설言說(말로 설함)이 없으니[無言說] 답을 한즉 언설言說(말로 설함)이 있게 된다[有言說]. 법은 해解(알음알이)가 있음이 없으니[無有解] 답을 한즉 해解(알음알이)가 있게 된다[有解]. 법은 지견知見이(아는 견해가) 없으니[無知見] 답을 한즉 지견知見이 있게 된다[有知見]. 법은 피차彼此(이것과 저것)가 없으니[無彼此] 답을 한즉 피차彼此가 있게 된다[有彼此]. 이 같은 마음에 대한 말들은 모두가 이 계교하여 집착한 것이다[計著]. 마음은 색色이 아닌 까닭으로 색色에 속하지 않으며[不屬色], 마음은 색色이 아님도 아니니 색色 아님에도 속하지 않는다[不屬非色]. 마음이 속한 바가 없으니 곧 이것이 해탈解脫이다. 만약 금禁한 계戒를 범한 때에는 마음이 급하고 두려울 것인데, 다못 두려운 그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을 알면 또한 해탈解脫을 얻는다. 또한 하늘에 나는 것도 또한 얻을 수 없음을 알아라. 비록 공空을 안다고 하더라도 공空 또한 얻을 수 없다[不可得]. 비록 얻을 수 없음을 안다 하더라도 얻을 수 없음도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不可得亦不可得].
○ [心中有貴] 心若有所貴 必有所賤。 心若有所是 必有所非。 心若善一箇物 一切物即不善。 心親一箇物 一切物作怨家。 心不住色 不住非色。 不住住 亦不住不住。 心若有住 即不免繩索。 心若有所作處 即是繫縛。 心若重法 法留得你。 心若尊一箇法 心必有所卑。 若取經論意 會不貴解。 但使有所解處 即心有所屬。 心有所屬 即是繫縛。 經云 非下中上法得涅槃。 心雖即惑入 而不作無惑解。 心若起時 即依法看起處。 心若分別 即依法看分別處。 若貪若嗔若顛倒 即依法看起處。 不見起處 即是修道。 若對物不分別 亦是修道。 但使有心起 即撿挍依法併當卻。 (初釋二乘非究竟。)
마음에 만약 귀貴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천賤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마음에 만약 옳게[是]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르게[非] 여기는 것이 있다. 마음이 만약 하나의 물物을 선善으로 여기면 다른 일체의 물物이 곧 불선不善이 된다. 마음이 하나의 물物을 친親하게 여기면 일체의 물物이 원가怨家(원수)가 된다. 마음은 색色에 머물지 아니하며, 색 아님[非色]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머묾[住]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머물지 않음[不住]에도 머물지 않나니, 마음이 만약 머묾[住]이 있으면 곧 승삭(繩索 노끈과 새끼줄- 얽매임)을 면할 수가 없다. 마음이 만약 짓는 바의 처소處所가 있다면 즉시即是(바로 이것이) 얽매이는 것이다[繫縛]. 마음이 만약 법法을 중重히 여기면 그 법法이 그대를 잡아 가둔다. 마음이 만약 하나의 법을 존중히[尊] 여기면 마음은 반드시 천히[卑] 여기는 것이 있다. 만약 경론經論의 뜻[意]을 취取할 것 같으면, 반드시 (아는) 해解를 귀貴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다못 해解하는 처소處所가 있으면 곧 마음은 속屬한(속박된) 바가 있게 된다. 마음이 속屬한 바가 있으면 즉시即是 얽어매인[繫縛] 것이다. 경經[勝鬘經]에 이르길, 「하중상下中上의 법法이 아니면 열반涅槃을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비록 미혹[惑]에 즉即하여 들어가더라도, ‘미혹이 없다[無惑]’고 하는 해解(알음알이)도 짓지 말아라(‘미혹이란 것은 본래로 없는 것이다’라는 알음알이도 짓지 말아라). 마음이 만일 일어날 때에는 곧 법法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곳을 간看하라(살펴 보라). 마음이 만약 분별分別하면 곧 법法을 의지해서 분별分別하는 곳을 간看하라(살펴 보라). 만약 탐貪하거나 성내거나[嗔] 전도顛倒된 때에는 곧 법法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곳을 간看하라. 일어나는 곳을 보지 못하면 바로 이것이 도를 닦는 것[修道]이다. 만약 물物을(어떤 것을) 대對함에 분별分別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도를 닦는 것[修道]이다. 다못 마음이 일어남이 있을 것 같으면, 곧 견주어 비교하려는 마음을 거두어서[撿挍] 법法[話頭]에 의지해 아울러 당체當体에서 쉬어버려야 한다.[併當却, 看話頭].
* 心雖即惑入 而不作無惑解: 정법正法은 현실을 여의지아니하고 동시에 현실에 집착하지 아니한 것. 현실을 여의지 아니허면서 현실에 집착함이 없고, 현실을 집착하지 아니하면서 현실 속에 치연熾然히 불사佛事를 진행해나가는 이것이야말로 대승법大乘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153번.
* 「即一切法 離一切相」 - <首楞嚴經>
○ [得道如箭] 問 修道得道 有遲疾不。 答 挍百千萬劫。 即心是者疾 發心行行者遲。 利根人知即心是道 鈍根人處處求道 不知道處。 又不知即心自是阿耨菩提。 問 云何疾得道。 答 心是道體 故疾得道。 行者自知惑起時 即依法看使盡。 問 云何心是道體。 答 心如木石。 譬如有人以手自畫作龍虎 自見之還自恐怕。 惑人亦如是。 心識筆子畫作刀山劍樹 還以心識畏之。 若能無心畏 妄想悉除。 意識筆子分別畫作色聲香味觸 還自見之 起貪嗔癡 或見或捨 還以心意識分別 起種種業。 若能知心識從本已來空寂 不見處所 即是修道。 或以自心分別畫作虎狼師子毒龍惡鬼 五道將軍閻羅王牛頭阿婆 以自心分別屬之 即受諸苦惱。 但知心所分別者 皆是色。 若悟心從本已來空寂 知心非色 心即不屬。 色非是色 自心化作。 但知不實 即得解脫。
묻되, “도道를 닦아 도를 얻음에 더디고 빠른 것이 있습니까?” 답하되, “백천만겁百千萬劫으로 견주어볼 수 있다. ‘마음에 즉即함이 이것이다.’하면 빠른 것이요, 마음을 발發해서 만행萬行을 행行하는 것은 더딘 것이다. 이근인利根人(근기根機가 예리한 사람)은 즉심即心이 이 도道임을 알고, 둔근인鈍根人(근기가 둔한 사람)은 곳곳에서 도道를 구하나 도처道處(도道 있는 곳)를 알지 못하며, 또 즉심即心(마음)이 곧 그대로 이 아뇩보리阿耨菩提인 줄을 알지 못한다.” 묻되, “어떻게 하면 빠르게 도道를 얻습니까?” 답하되, “마음이 이 도체道體인 까닭으로 빠르게 도道를 얻는다. 수행하는 사람은 스스로 미혹이 일어나는 때를 알아서 곧 법法[話頭]에 의지해서 간看하여(보아) 나아감을 다해야 한다.”
묻되, “어째서 마음이 이 도道의 체體입니까?” 답하되, “마음은 나무나 돌과 같나니(분별심이 없나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자신이 용과 호랑이를 그려 놓고, 스스로 그것을 보고서 도리어 스스로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미혹한 사람도 역시 이와 같아서, 심식心識의 붓으로써 도산 刀山과 검수劍樹의 지옥을 그려 놓고 도리어 심식心識으로써 그것을 두려워 한다. 만약 능히 두려움에 무심無心할 수 있다면, 망상妄想은 다 사라진다. 의식意識의 붓으로 분별分別하여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그림을 그려 놓고서, 도리어 스스로 그것을 보고 탐진치貪嗔癡의 마음을 일으켜서 어떤 것은 보고 어떤 것은 버리며, 또 다시 심의식心意識의 분별分別로써 갖가지 업業을 일으킨다. 만약 능히 심식心識이 종본이래從本已來로(근본根本으로 좇아 옴으로) 공적空寂한 것임을 알아서 처소處所를(두려움 일어난 곳을) 볼 수 없으면, 곧 이것이 도를 닦는 것[修道]이다. 혹은 스스로의 마음이 분별分別함으로 호랑이와 이리와 사자와 독룡毒龍과 악귀惡鬼와 오도장군五道將軍과 염라왕閻羅王과 우두아파牛頭阿婆의 귀졸들을 그려서 자신의 마음이 분별함으로 그것에 속박되나니, 곧 갖은 고통과 괴로움을 받게 된다. 다못 마음이 분별分別하는 바의 것은 모두가 이 색色임을 알아라. 만약 마음이 종본이래從本已來로 공적空寂한 줄을 깨달으면, 마음이 색色이 아님을 알아서 마음은 곧 속박 당하지 않는다. 색色은 이 색色이 아니며[非色] 자신의 마음이 변화[化]하여 지은 것이니, 다못 실實답지 못한 것임을 알면 곧 해탈解脫을 얻느니라.”
*利根人知即心是道: 「靈光獨耀 迥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即如如佛.」 - [禪門拈頌集] 百丈.
*但知不實 即得解脫: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即見如來.」 - <金剛經>
○ [依理法之三寶 實現大道] 今若依法佛法僧行道時 不得有善惡好醜 因果是非 持戒破戒等見。 若人作如是計挍者 皆是迷惑 自心現量 不知境界從自心起。 若知一切法不有 亦如是。 自心現量 皆是惑心 作是作非。 若人謂佛智慧勝 亦如是。 自心化作有 化作無 還被惑。 經云 若依法佛修道 不作化眾生 不作實眾生。 是故法界平等 無有得失。 若依法佛修道 不求涅槃。 何以故 法是涅槃故 云何以涅槃求涅槃。 亦不求法 心是法界故。 云何以法界求法界。 若欲正心時 不畏一切法 不求一切法。 若用法佛修道者 心如石頭 冥冥不覺不知 不分別 一切騰騰如似痴人。 何以故 法無覺知故。 法能施我無畏故 是大安穩處。 譬如有人犯死罪 必合斬首 值王放赦 即無死憂。 眾生亦如是 造作十惡五逆 必墮地獄 法王放大寂滅赦 即免一切罪。 若人與王善友 因行在他處 殺他男女 為他所執 便欲抱怨 是人忙怕無賴。 忽見大王 即得解脫。 若人破戒犯殺 犯婬犯盜 畏墮地獄 自見己之法王 即得解脫。
“이제 만약 법法에 의지하여 불법승佛法僧의 도道를 행行하는 때라면, 선과 악, 아름답고 추함, 원인과 결과, 옳음과 그름, 계戒를 가지고 계戒를 파破함 등의 견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계교計挍를 짓는 자라면 모두가 미혹迷惑하여 자기 마음이 헤아려 나타낸[現量]것으로, 경계境界가 자기 마음으로 좇아 일어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일체법一切法은 있지 않다.’라고 안다 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다(역시 자심현량自心現量인 것이다). 자심自心으로 현량現量한 것은 모두가 이 미혹한 마음[惑心]으로 옳음[是]을 짓고 그름[非]을 짓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부처님의 지혜는 수승하다.’라고 말한다면 또한 이와 같다(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이다). 자심自心이 화化하여 유有를 짓고 화化하여 무無를 짓지만 도리어 미혹迷惑을 입은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만약 법法에 의지해서 부처님의 도道를 닦는다면 ‘중생은 (자심自心이) 화化한 것이다’는 생각도 짓지 않고, ‘중생은 실實다운 것이다’라는 생각도 짓지 않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법계法界가 평등平等하여 얻고 잃음이 있음이 없다.」 고 하였다. 만약 법불法佛(법의 부처, 當處)에 의지해서 도를 닦을진댄, 열반涅槃을 구하지 말아라. 왜 그런가 하면 ‘법法이(그 자체로) 이 열반涅槃’인 까닭이니, 어떻게 열반涅槃으로써 열반涅槃을 구하겠는가? 또한 법法도 구하지 말지니, ‘마음이 이 법계法界’인 까닭이다. 어떻게 법계法界로써 법계法界를 구하겠는가? 만약 (전도된)마음을 정正히(바르게) 하고자 하는 때라는, 일체법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일체법을 구하지도 말아라. 만약 법불法佛(법의 부처, 當處)을 써서 도道를 닦는 자라면, 마음은 돌머리와 같아서(정식情識이 없어서) 명명冥冥하여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며[不覺不知] 분별하지도 않아[不分別] 일체一切에 (무심無心하여) 등등騰騰한 것이 흡사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다. 왜 그런가 하면 법法은(진리 자체는) 깨어 앎[覺知]이 없는 까닭이요 법法은 능히 나에게 두려움 없음을 베풀어 주는 까닭이니, 이것[法]이 크게 안온安穩한 곳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죽을 죄罪를 범하여 반드시 참수斬首 당함이 합당合當한데, 마침 왕이 용서하여 사면赦免해줌을 만나면 곧 죽음에 대한 근심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또한 이와 같아서, 십악十惡과 오역죄五逆罪를 지어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나, 법왕法王이 큰 적멸寂滅로써 사면赦免하여 놓아주게 되면 곧 일체의 죄罪를 면免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왕王과 더불어 선우善友(좋은 벗)라면, 다른 곳에서 다른 남녀를 죽이는 행동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 문득 원망과 추궁을 받게 되어 몹시도 초조하고 두려워 의지할 곳이 없을 것인데, 홀연히 대왕大王을 만나 뵙고서는 곧 해탈解脫(풀려남)을 얻게 된다. 만약 사람이 계戒를 파破하여 살생을 범하고 음행을 범하고 도둑질을 범하여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 하다가, 스스로 자기의 법왕法王을 보게 되면[見性] 곧 해탈解脫을 얻게 되는 것이다.”
*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 [永嘉證道歌]
○ [依古典悟者力弱] 修道法 依文字中得解者 氣力弱。 若從事上得解者 氣力壯。 從事中見法者 即處處不失念。 從文字中解者 逢事即眼闇。 經論談事 與法踈。 雖口談事耳聞事 不如身心自經事。 若即事即法者深 世人不可測。修道人數數被賊盜物奪剝 無愛著心 亦不懊惱 數被人罵辱打謗 亦不懊惱。ㅡ若如此者 道心漸漸壯 積年不已 自然於一切違順都無心。ㅡ 是故即事不索者 可謂大力菩薩。 修道心 若欲壯大 會寄心規域外。
“도법道法을 닦음에, 문자文字를 의지한 가운데 해解(마음의 속박이 풀림)를 얻은 자는 그 기력氣力이 약弱하다. 만약 일[事上, 日用]을 좇아서 해解를 얻은 자는 기력이 장대壯大하다. 일을 좇는 가운데에 법法을 본 자는 처처處處에(곳곳에) 즉即해서 념念을 잃지 않는다. 문자文字를 좇는 가운데에 해解한 자는 일을 만나면 곧 눈이 어두워진다. 경론經論을 담론談論하는 일이 법法과 더불어서는 먼 것이다. 비록 입으로 일을 담론하고 귀로 일을 듣더라도, 몸과 마음이 스스로 일을 겪은[經驗] 것만 같지 못하다. 만약 일[事]에 즉即해서 법法에 즉即한 자라면 깊으니, 세상 사람은 가히 측량測量(추측하여 헤아림)할 수가 없다. 도道를 닦는 사람은 자주자주 도적이 물物을 훔치고 빼앗고 약탈함을 입게(당하게)되더라도 애착심愛著心(아끼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억울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으며, 수차례 사람이 욕설하고 모욕하며 때리고 비방함을 입는다(당한다) 하더라도 또한 억울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만약 이 같은 자[即事即法者]라면 도심道心은 점점 더 장대해지고, 해를 거듭하여 그치지 아니하면 자연히 일체의 거스름과 따름[違順]에 다 무심無心하게 되리라. 이러한 까닭으로 일에 즉即하여 속박되지 않는[不索] 자는 가히 진실로 ‘대력보살大力菩薩’이라 할만하다. 도道를 닦는 마음이 만약 장대하고자(견고하여 크고자) 할진댄, 반드시 마음이 규역規域 밖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 依文字中得解者 氣力弱: 「聰明不能敵業 乾慧未免生死.」 - [白雲和尙語錄]
* 即事即法者: 即處處不失念者, 일을 당하는 곳곳 마다에 자신의 정념正念[眞心]을 잃지 않는 자.
○ [超越常規的世界] 問 何等事名為規域外。 答 不證大小乘解 不發菩提心 乃至不願一切種智 不貴解定人 不賤著貪欲人 乃至不願佛智慧 其心自然閑靜。 若人不取解 不求智慧 如此者 欲免法師禪師等惑亂。 若能存心立志 不願賢聖 不求解脫 復不畏生死 亦不畏地獄 無心直作任 始成一箇規鈍心。 若能見一切賢聖 百千劫作神通轉變 不生願樂心者 此人欲免他誑惑。 又問 若為生規域外。 答 仁義禮智信者名規域心。 生死涅槃 亦名規域心。 若欲出規域外 乃至無有凡聖名字 不可以有法知 不可以無法知 不可以有無法知。 齊知之所解處 亦名規域內。 不發凡夫心 聲聞菩薩心 乃至不發佛心 不發一切心 始名出規域外。 若欲一切心不起 不作解 不起惑 始名為出一切。 世間痴人等 逢一箇胡魅漢作鬼語 即作鬼解 用為指南 不可論。 若為得作大物用。 聞有人領百千萬億眾 即心動。 好看自家心法 為有言說文字以不。
묻되, “어떠한 일을 규역規域 밖이라 합니까?” 답하되, “대·소승大小乘의 해解(알음알이)를 증證하지 아니하고,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하지 아니하며, 나아가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도 원願하지 아니하고, 정定을 통달通達한 사람을 귀貴히 여기지 않으며, 탐욕貪欲에 집착한 사람을 천賤히 여기지 않고, 나아가 부처님의 지혜[佛智慧] 까지라도 원願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자연自然히 한가롭고 고요[閑靜]해질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해解를 취取하지 아니하고 지혜智慧도 구하지도 아니하면, 이와 같은 사람은 법사法師나 선사禪師들의 혹란惑亂(미혹의 어지럽힘)을 면免하게 된다. 만약 능히 존심存心(마음을 보존)하여 뜻을 세워[立志], 현인賢人과 성인聖人 되기를 원치 아니하고 해탈解脫을 구하지도 않으며 다시 생사生死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또한 지옥을 두려워하지도 않아서 무심無心하고 질직質直하게 임의任意대로 지어갈 수 있다면, 비로소 하나의 ‘상규常規(일반적 규범)에 둔한 마음[規鈍心]’을 이루게 되리라. 만약 능히 일체의 현성賢聖이 백천겁百千劫의 신통변화神通轉變 짓는 것을 보고도 원하거나 즐거워하는 마음[願樂心]을 내지 않을 수 있는 자라면, 이 사람은 남[他]에게 속아 미혹됨을 면한다.”
또 묻되, “어찌하면 규역規域 밖에 나겠습니까[生]?” 답하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五常]이라는 것이 이름이 규역規域의 마음[規域心]이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또한 이름이 규역規域의 마음이다. 만약 규역規域 밖에 뛰어나며 나아가 ‘범부凡夫다, 성인聖人이다’하는 이름과 글자까지라도 있음이 없고자 하면, 유有의 법法으로써 아는 것도 불가不可하고 무無의 법法으로써 아는 것도 불가不可하며 유有이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한 법法으로써 아는 것도 불가不可하다. 모든 지知의 해解하는 바의 처소[齊知之所解處, 늘 알아차리는 곳]도 또한 이름하여 ‘규역 안[規域內]’이라 한다. 범부심凡夫心이나 성문聲聞 · 보살심菩薩心을 발發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불심佛心도 발發하지 아니하여 일체一切의 마음을 발發하지 않아야사, 비로소 이름하여 ‘규역 밖[規域外]에 뛰어났다.’고 한다. 만약 일체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자 할진댄, 해解도 짓지 아니하고 혹惑도 일으키지 아니해야 비로소 일체를 벗어났다[出一切]고 이름한다. 세간世間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의 오랑케 도깨비 같은 놈이 귀신의 말 짓는 것을 만나서 곧 귀신의 해解를 지어 지남指南(길잡이)으로 삼아 쓰나니, 논論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큰 물物의 씀[用](위대한 사람의 작용)’이라고 (생각을)지어 얻기를 위한다면, ‘어떤 사람이 백천만억의 대중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곧 마음이 동動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自家]의 심법心法(話頭, 眞心) 간看하기를 좋아한다면, 언설言說과 문자文字로써서 가진 것[有]으로 삼겠는가?[好看自家心法 為有言說文字以不]”
*齊知之所解處: 「齊知之所知則淺矣」 - <장자> 22편.
*存心: 욕망慾望 등에 의해서 본심本心을 해害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그 본연本然의 상태狀態를 지님.
○ [淳朴心] 問 何者名為淳朴心 何者名為巧偽心。 答 文字言說 名巧偽。 色非色等 行住坐臥 施為舉動 皆是淳朴。 乃至逢一切苦樂等事 其心不動 始名淳朴心。
묻되, “어떤 것을 이름하여 순박淳朴한 마음[淳朴心]이라 하며, 어떤 것을 이름하여 교묘히 꾸며낸 마음[巧偽心]이라 합니까?” 답하되, “문자文字와 언설言說이 ‘교위巧偽(교묘히 꾸며냄)’이다. 색色이나 색 아닌[非色] 등과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시위거동施為舉動이 다 이 ‘순박淳朴(순수하고 질박함)’이며, 나아가 일체의 고통[苦]과 즐거움[樂] 등의 일을 만나 그 마음이 동動치 아니하면 비로소 이름을 ‘순박淳朴한 마음[淳朴心]’이라 한다.”
* 순박淳朴: 순진純眞하고 질박質朴함. 본질本質에 가까운 마음. [質直爲本, 질직함을 근본으로 삼는다]
* 교위巧偽: 재주 기운으로 의식적으로 꾸며서 하는 행위. 작위作爲적인 마음.
○ [正心邪心] 問 何名為正 何名為邪。 答 無心分別 名為正 有心解法 名為邪。 乃至不覺邪正 始名正。 經云 住正道者 不分別是邪是正。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정正이라 하고 무엇을 이름하여 사邪라 합니까?” 답하되, “마음에 분별分別함이 없음을 정正이라 하고, 마음에 법을 이해함[解法]이 있음을 사邪라 하며, 나아가 사邪와 정正도 지각知覺하지 않아야사 비로소 이름하여 정正이라 한다. 경經[維摩經]에 이르되, 「정도正道에 머무는 자는 ‘이것은 사邪]다, 이것은 정正이다’라고 분별分別하지 않는다.」 라 하였다.”
* 住正道者 不分別是邪是正: 「正道邪道為二. 住正道者 則不分別是邪是正. 離此二者 是為入不二法門。」 - <維摩詰所說經>
○ [根性利鈍] 問 何者是利根鈍根。 答 不由師教 從事見法者 名為利根。 從師言教解者 名為鈍根。 從師言教聞法 亦有利根鈍根。 聞師言 不著有 即不取不有。 不著相 即不取無相。 不著生 即不取無生。 此是利根人。 貪解取義 是非等見 此鈍根人解義。 利根人聞道 不發凡夫心 乃至賢聖心亦不發 凡聖雙絕。 此是利根人聞道。 不愛財色 乃至佛菩提 亦不愛。 若愛佛菩提 即捨亂取靜 捨愚痴取智慧 捨有為取無為 不能雙絕無碍 此是鈍根人。 與沒即去 越過一切凡聖境界。 聞道不發貪欲心 乃至正念正思惟 亦不發。 聞道不發聲聞心 乃至菩薩心 亦不發。 是名利根人。 菩薩以法界為舍宅 四無量心為戒場。 凡有施為 終不出法界心。 何以故 體是法界故。 從你種種云為 跳踉蹄蹶 悉不出法界 亦不入法界。 若以法界入法界 即是痴人。 菩薩了了見法界故 名法眼淨。 不見法有生住滅 亦名法眼淨。 經云 不滅痴愛者 愛本不生 今無可滅。 痴愛者 就內外中間求覓 不可見 不可得 乃至十方求之 無毫釐相可得 即不須滅而求解脫。
묻되, “어떤 사람이 이근利根(영리한 근기)이고 둔근鈍根(둔한 근기)입니까?” 답하되, 스승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아니하고 일[事]을 좇아 법을 보는 자[見法者]를 이름하여 ‘이근利根’이라 하고, 스승의 말씀 가르침[言教]을 좇아 이해 하는 자[解者]는 이름하여 ‘둔근鈍根’이라 한다. 스승의 말씀 가르침[言教]를 좇아 법法을 듣는 데에도 또한 이근利根鈍 둔근鈍根이 있으니, 스승의 말씀을 듣고 유有를 집착하지 않니하고 곧 불유不有도 취하지 않으며, 상相을 집착하지 아니하고 곧 무상無相(상 없음)도 취하지 아니하며, 생生(남)을 집착하지 아니하고 곧 무생無生(남이 없음)도 취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바로 ‘이근인利根人’이다. 해[解]를 탐貪하여 뜻을 취取하여 옳고 그름[是非]등의 견해를 가지면, 이것이 ‘둔근인鈍根人의 뜻 이해함[解義]’이다. 이근인利根人의 도道를 들음[聞道]은, 범부凡夫의 마음을 발發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현성賢聖의 마음도 또한 발發하지 아니하여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이 쌍雙으로 끊어지니, 이것이 바로 ‘이근인利根人의 도道를 들음[聞道]’이다. 재물財과 색色을 애착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부처님의 보리菩提까지도 또한 애착하지 않는다. 만약 부처님의 보리菩提를 애착한다면, 곧 산란함을 버리고 고요함을 취하며 어리석음[愚痴]을 버리고 지혜[智慧]를 취하며 유위有為를 버리고 무위無為를 취하여서 능히 쌍雙[兩邊]을 끊어 걸림이 없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둔근인鈍根人’이다. 몰沒하고 즉即함을 함께[與] 쉬어버리면[與沒即去, 없애려는 마음과 즉即하려는 마음을 쌍雙으로 쉬어버리면], 일체의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의 경계境界에서 뛰어나리라. 도道를 들음[聞道]에 탐욕심貪欲心을 발發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정념正念과 정사유正思惟까지도 또한 발發하지 않는다. 도道를 들음에 성문심聲聞心도 발發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보살심菩薩心 까지도 또한 발發하지 않는다. 이 이름이 ‘이근인利根人’이다.
보살菩薩은 법계法界로써 살림사는 집으로 삼고, 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捨]으로 계戒 가지는 도량道場으로 삼는다. 무릇 시위施為가(행위함이) 있어도 끝내 법계法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하면 체體가(바탕이) 바로 법계法界인 까닭이다. 비록[從] 그대가 갖가지로 좇아서 말하고 행하며 뛰어 솟구치고 허둥지둥 내달리는 것이 다 법계를 벗어나지 못함이요, 또한 법계에 들어가지도 못함이라. 만약 법계法界로써 법계法界에 들어가려 한다면 곧 이는 어리석은 사람[痴人]이다. 보살菩薩은 법계法界를 요요了了(분명)하게 보는 까닭으로, ‘법의 눈이 청정하다[法眼淨]’고 이름한다. 법法의 생주멸生住滅 있음을 보지 못하니 또한 이름하여 ‘법안이 청정하다[法眼淨]’고 이름한다. 경經에 이르되,「어리석음과 애욕(痴愛)을 멸하지(없애지) 않는다.」 함은, ‘애愛는 본래로 나지 아니아니[不生] 지금에 가히 멸滅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애착[痴愛]이라는 것은, 안과 밖과 중간으로 나아가 구하여 찾더라도 가히 보지 못하고 가히 얻지 못하며, 나아가 시방十方으로 그것을 구하여도 호리毫釐(털 끝)도 가히 얻을 만한 상相이 없나니, 곧 모름지기 ‘(어리석은 애착을)멸滅하고 나서야 해탈解脫을 구할 것이 아니다.
* 不滅痴愛者: 「不滅痴愛 起於明脫 故無二相 智契無二 名一合相。」 - [大方廣佛華嚴經綱要] 卷第二十九
* 即不須滅而求解脫: 「無明實性即佛性 幻化空身即法身.」 - [永嘉證道歌]
○ [做學問不得入道] 問 世間人種種學問 云何不得道。 答 由見己故 不得道。 若能不見己 即得道。 己者我也。 聖人所以逢苦不憂 遇樂不喜者 由不見己故。 所以不苦樂者 由亡己故。 得至虛無 己尚自亡 更有何物而不亡也。 天下亡己者有幾。 若能亡己時 一切本無。 己者橫生計挍 即感生老病死 憂悲苦惱 寒熱風雨 一切不如意事 此並妄想現. 由如幻化 去住不由己。 何以故 橫生拒逆 不聽去住。 所以有煩惱 由執己故 即有去住。 知去住不由己者 即我所是 幻化法 不可留停。 若不逆幻化者 觸物無碍。 若能不逆變化者 觸事不悔。
묻되, “세간世間의 사람들이 갖가지 학문學問을 하되 어째서 도道를 얻지 못합니까?” 답하되, “‘자기[己]’를 봄으로 말미암아 도道를 얻지 못한다. 만약 능히 자기[己]을 보지 않을 수 있다면 곧 도道를 얻는다[得道]. ‘자기[己]’라는 것은 ‘나[我]’이다. 성인聖人은 이러한 까닭으로 고통을 만나도 근심하지 않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나니, ‘자기를 보지 않음[不見己]’을 말미암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기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니, 자기를 잊음[亡己]을 말미암은 까닭이다. 허무虛無에 이르게 되면 자기[己]도 오히려 스스로 잊어버릴 것이어늘,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서 (고락苦樂을) 없애지 못하겠는가? 천하天下에 자기를 없앤 자[亡己者]가 얼마나 있겠는가?
만약 능히 자기[己]를 없앤 때[時]에는, 일체가 본래本來로 없다[一切本無]. 자기[己, 我]라는 것은 끊임없이 견주어 헤아림[計挍]을 내어, 곧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生老病死] 것과, 근심하고 슬퍼하며 고뇌苦惱하는[憂悲苦惱] 것과, 차갑고 뜨거우며 바람 불고 비 내리는[寒熱風雨] 것들에 미혹되어 일체가 뜻과 같지 못한 일이 되나니, 이 모든 것이 다 망상妄想의 나타남인 것이다. 말미암는 것이 환화幻化와 같아서 가고 머무는 것은 자기[己]를 말미암지 않는다. 왜 그런가하면 끊임없이 거역拒逆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가고 머무름을 따르지 않나니, 이러한 이유로 해서 번뇌煩惱가 있게 되고 자기를 집착함[執己]을 말미암는 까닭으로 곧 가고 머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가고 머무르는 것이 자기[己]를 말미암지 않는 자는, 곧 나라고 하는 이것이 환화幻化의 법法이어서 멈추어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안다. 만약 환화幻化를 거스르지 않는 자라면 물物을 부딪힘[觸物]에 있어 걸림이 없으며, 만약 능히 변화變化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 자라면 일을 부딪힘[觸事]에 후회하지 않는다.”
* 觸物: 「撥草瞻風無別事 要明父母未生前, 忽然踏着毘盧頂 觸目無非格外禪.」 - [浮休堂大師集]
○ [空的真理與修道的主體] 問 諸法既空 阿誰修道。 答 有阿誰 須修道。 若無阿誰 即不須修道。 阿誰者我也。 若無我 逢物不生是非。 是者我自是之 而物非是也。 非者我自非之 而物非非也。 如風雨青黃赤白等譬可知。 好者我自好之 而物非好也。 何以故 如眼耳鼻舌 色聲等譬喻可知。
묻되 “모든 법[諸法]이 이미 공空[無自性]인데 누가 도道를 닦습니까?” 답하되, “그 ‘누구[阿誰]’가 있으니 모름지기 도道를 닦는다. 만약 그 ‘누구[阿誰]’가 없다면 곧 모름지기 도道를 닦을 필요가 없다. 그 ‘누구[阿誰]’라는 것은 ‘나(我)’이다. 만약 ‘나’가 없다[無我]면 물物을 만남에 시비是非하는 마음이 나지 않는다. ‘옳다(是)’는 것은 나 스스로가 그것을 옳다[是]고 하는 것이지 물物은 옳은 것이 아니다[非是](어떤 사물을 대함에 ‘옳다고 여기는 내 생각의 일어남’을 보고 있는 것이지 사물 자체에 있어서는 ‘옳음’이랄 것이 없다). ‘그르다[非]’는 것은 나 스스로가 그것을 그르다[非]고 하는 것이지 물物은 그른 것이 아니다[非非](어떤 사물을 대함에 ‘그르다고 여기는 내 생각의 일어남’을 보고 있는 것이지 사물 자체에 있어서는 ‘그름’이랄 것이 없다). 바람과 비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 등으로 비유해 보아도 가히 알 수가 있다. ‘좋다[好]’는 것은 나 스스로가 그것을 좋다[好]고 여기는 것이지 물物은 좋음이 아니다[非好](어떤 사물을 대함에 ‘좋다고 하는 내 생각의 일어남’을 보고 있는 것이지 물物 자체에 있어서는 ‘좋다[好]’고 할 것이 없다). 왜 그런가하면, 눈 · 귀 · 코 · 혀와 빛 · 소리 등에 비유해 보면 가히 알 수가 있다.
*若無我 逢物不生是非: 「酒不醉人人自醉 色不迷人人自迷(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는데 사람 사람이 스스로 취하고, 색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지 않는데 사람 사람이 스스로 미혹된다.)」 - [明心寶鑑] 省心篇.
○ [行至非道之處] 問 經云 行於非道 通達佛道。 答 行非道者 不捨名 不捨相。 通達者 即名無名 即相無相。 又云 行非道者 不捨貪 不捨愛。 通達者 即貪無貪 即愛無愛。 行非道者 即苦無苦 即樂無樂 名為通達。 不捨生 不捨死 名為通達。 行非道者 即生無生 不取無生 即我無我 不取無我 名為通達佛道。 若能即非無非 不取無非 是名通達佛道。 以要言之 即心無心 名為通達心道。
“경經[維摩經]에 이르길, ‘비도非道[逆道之道]를 행行하면 불도佛道에 통달通達한다.’고 함에 대하여 묻습니다.” 답하되, “‘비도非道를 행한다’는 것은 이름[名]을 버리지 않고 모양[相]을 버리지 않는 것이요, ‘통달通達’이라는 것은 이름에 있어[即名] 이름이 없고[無名] 모양에 있어[即相] 모양이 없는[無相] 것이다. 또 말하자면, ‘비도非道를 행한다’는 것은 탐貪을 버리지 않고 애愛도 버리지 않는 것이요, ‘통달通達’이라는 것은 탐貪에 있어[即貪] 탐貪이 없으며[無貪] 애愛에 있어[即愛] 애愛가 없는[無愛] 것이다. 비도非道를 행行하는 자가 고통에 즉即해서 고통이 없으며 즐거움에 즉即해서 즐거움이 없음을 이름하여 통달通達이라고 하며, 생生을 버리지 않고 사死를 버리지 않음을 통달通達이라고 한다. ‘비도非道를 행行한다’는 것은 생生에 있어[即] 생生이 없으되 생生 없음[無生]도 취하지 아니하고, 나[我]에 있어[即] 나가 없으되 나 없음[無我]도 취取하지 않나니, 이름하여 ‘불도佛道를 통달通達함’이라 한다. 만약 그름[非]에 있어 그름이 없으되[無非] 그름 없음도 취取하지 않을 수 있으면[不取無非], 이것이 이름하여 ‘불도佛道를 통달通達함’이다.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면, ‘마음에 있어 마음이 없음[即心無心]을 마음의 도道에 통달通達함[通達心道]’이라고 이름한다.
* 「行於非道 通達佛道: 維摩詰言 若菩薩行於非道 是為通達佛道。」 - <維摩詰所說經>
○ [究盡一切存在] 問 云何達一切法。 答 即物不起見 名為達 即物不起心 即物不起貪 即物不起惱 悉名為達。 即色無色 名達色。 即有不有 名達有。 即生無生 名為達生。 即法無法 名達法。 逢物直達 此人慧眼開 亦可觸物不見相異無異 名為達。
묻되, “어떻게 일체법一切法에 달[達]합니까?” 답하되, “물物에 즉即하여 견해[見]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달[達]이라 하며, 물物에 즉即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물物에 즉即하여 탐심[貪]을 일으키지 않으며 물物에 즉即하여 번뇌[惱]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다 이름하여 ‘달[達]’이라 한다. 색色에 즉即해서 색이 없음[無色]을 이름하여 ‘색色에 달[達色]했다’ 하고, 있음[有]에 즉即해서 있지 아니함[不有]을 이름하여 ‘있음에 달[達有]했다’고 하며, 남[生]에 즉即해서 남이 없음[無生]을 이름하여 ‘남에 달[達生]했다’고 하고, 법法에 즉即해서 법이 없음[無法]을 이름하여 ‘법에 달[達法]했다’고 한다. 물物을 만남에 곧바로 달[達]하면 이 사람은 혜안慧眼이 열린 것이며, 또한 물物을 부딪힘[觸]에 상相의 다름[異]과 다름 없음[無異]을 보지 않으면 이름하여 달[達]이라 한다.
* 達一切法: 일체법一切法에 『달達』하는 방법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즉即해서 『이 뭣고?』
○ [非捨邪見入正見] 問 經云 外道樂諸見 菩薩於諸見而不動。 天魔樂生死 菩薩於生死而不捨。 答 邪見同正見故 不動. 外道樂諸見者 謂見有見無。 即有不有 即無不無 名為不動。 不動者 不離正不離邪。 即是正解時 即無邪正 不須離邪求正。 即有不有 不動時見有。 即無不無 不動時見無。 依法看邪正都不異 故言不動。 亦不須捨邪入正 故言於諸見而不動。 經云 以邪相入正法。 又云 不捨八邪入八解脫。 生死同涅槃故不捨 即生無生 即死無死 不待捨生以入無生 捨死入於無死 寂滅故涅槃。 經云 一切眾生本來寂滅 不復更滅。 又云 一切法皆是涅槃。 不須捨生死始是涅槃。 如人不須捨凍陵始是水 性自同故。 生死涅槃 亦性同故 不須捨。 是故菩薩於生死而不捨。 菩薩住不動者 住無住名為住。 以外道樂諸見故 菩薩教令即見無見 不勞離見然後無見。 天魔樂生死 菩薩不捨者 欲令悟即生無生 不待捨生以入無生。 如似不須捨水而求濕 捨火而就熱 水即濕 火即熱 生死即是涅槃。 是故菩薩不捨生死而入涅槃 生死性即涅槃故。 不待斷生死而入涅槃。 聲聞斷生死入涅槃 菩薩體知性平等故 能以大悲同物取用。 生死義一名異 不動涅槃 亦義一名異。
“경經[維摩經]에 이르기를, 「외도外道는 모든 견見(견해)을 좋아하고 보살菩薩은 모든 견見에 있으되 동動하지 않는다.」 「천마天魔는 생사生死를 좋아하고 보살菩薩은 생사生死에 있으면서 버리지 않는다.」 라고 함을 묻습니다.” 답하되,“사견邪見이 정견正見과 동일同一한 까닭으로 동動하지 않는다. ‘외도外道가 모든 견見을 좋아한다’라고 한 것은, 있음[有]을 보고 없음[無]을 보는 것을 이른 것이다. 있음[有]에 즉即하여(나아가) 있지 아니하고[不有], 없음[無]에 즉即하여(나아가) 없지 아니함[不無]을 이름하여 ‘동動함이 없음[不動]’이라 한다(유有가 유有가 아니요 무無가 무無가 아님을 이름하여 부동不動이라 한다). ‘동動치 않음[不動]’이라 함은, 정正을 여의지 아니하고 사邪를 여의지 아니함이다. 곧 이것이 바르게 해解(이해)하는 때이며, 곧 사邪와 정正이 없으니 모름지기 사邪를 여의거나 정正을 구하지 않는다. 있음[有]에 즉有하여 있지 아니하니[不有] 있음[有]을 볼 때에 동動치 아니하고[不動], 없음[無]에 즉即하여 없지 아니하니[不無] 없음[無]을 볼 때에 동動치 아니한다[不動]. 법法을 의지해서 보면 사邪와 정正이 도무지 다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부동不動’이라 말한다. 또한 모름지기 사邪를(삿됨을) 버리고서 정正(바름)에 들어갈[捨邪入正] 필요가 없으니, 그러므로 「모든 견見에 있으되 동動치 않는다[於諸見而不動]」라고 말한다. 경經[維摩經]에 이르기를,「사상邪相(삿된 상相)으로써 정법正法(바른 법)으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팔사八邪(여덟가지 삿됨)를 버리지 아니하고 팔해탈八解脫(여덟가지 해탈)에 들어간다.」 라고 하였다.
생사生死가 열반涅槃과 동일同一한 까닭에 버리지 않나니, 생生에 즉即하여 생生이 없으며[無生] 사死에 즉即하여 사死가 없어서[無死], 생生을 버림으로써 생生 없음[無生]에 들어가거나 사死를 버림으로써 사死 없음[無死]에 들어가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니, (본래로)적멸寂滅의 열반涅槃인 것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일체중생一切眾生이 본래本來로 적멸寂滅이니 다시 또 멸滅하지 않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일체법一切法이 다 이 열반涅槃이다.」 하였으니, 모름지기 생사生死를 버릴 필요없이 비로소 이 열반涅槃인 것이다. 사람이 모름지기 얼음 덩어리[凍陵]를 버릴 필요 없이 (그대로가)비로소 이 물인 것과 같나니, (얼음과 물은) 성性(濕性)이 그대로가 동일同一한 까닭이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또한 성性이 동일同一한 까닭에 모름지기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菩薩은 생사生死에 있으되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보살菩薩은 부동不動에 머문다.」 라고 한 것은, 머무름 없음[不住]에 머무름[住]을 이름하여 머문다[住]라고 한 것이다. 「외도外道는 모든 견見을 좋아한다.」 라고 한 까닭으로 해서 ‘보살菩薩은 견見에 즉即하여 견見이 없는[無見] 것이지 애써 견見을 여읜 연후然後에야 견見 없음[無見]이 아님’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천마天魔는 생사生死를 좋아하고 보살菩薩은 버리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생生에 즉即하여 생生이 없는 것[無生]이지, 생[生] 버림을 기다려서 생[生] 없음[無生]에 들어감이 아님을 깨닫게 하고자 한 것이다. 마치 모름지기 물을 버리고서 습기를 구하거나 불을 버리고서 열에 나아감이 아닌 것과 같아서, 물이 곧 습기요 불이 곧 열이며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菩薩은 생사生死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듦」이니, 생사生死의 성性이 곧 열반涅槃이기 때문이다. 생사生死가 끊어지기를 기다려서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성문聲聞은 생사生死를 끊고서 열반涅槃에 들어가나, 보살菩薩은 체體의 성性이 평등함을 아는 까닭으로, 능히 대비大悲로써 물物(중생)과 한가지로[同] 씀을(用, 작용을) 취取한다. 생生과 사死는 이치는 하나이나 이름이 다르고, 부동不動과 열반涅槃도 또한 이치는 하나이나 이름이 다른 것이다.
* 外道樂諸見 菩薩於諸見而不動: 「外道者樂諸見 菩薩於諸見而不動」, 「衆魔者樂生死 菩薩於生死而不捨」 - <維摩詰所說經> [文殊師利問疾品]
* 以邪相入正法: 「若能不捨八邪入八解脫 以邪相入正法.」 - <維摩詰所說經> [弟子品]
* 一切衆生本來寂滅 不復更滅: 「諸佛知一切衆生畢竟寂滅 即涅槃相 不復更滅.」 - <維摩詰所說經> [菩薩品]
* 菩薩住不動: 「菩薩住不動地.」 - <入楞伽經> [無常品]
○ [究極真理近或] 問 大道為近為遠。 答 如似陽炎非近非遠。 鏡中面像亦非近非遠。 虛空浪宕針花等 亦非近非遠 若言是近 十方求之不可得。 若言是遠 了了眼前經。 論云 近而不可見者 萬物之性也。 若見物性者 名為得道。 見物心者 是物性無物相 即物無物 是名見物性。 所謂有形相之物 皆是物。 審見物性 實而不謬者 名為見諦 亦名見法。 近而不可見者 法相也。 智者任物不任己 即無取捨 亦無違順。 愚者任己不任物 即有取捨 即有違順。 若能虛心寬放 大亡天下者 即是任物隨時。 任物隨時即易 違拒化物即難。 物欲來任之莫逆 若欲去 放之勿追。 所作事 過而勿悔。 事未至者 放而勿思 是行道人。 若能任者 即委任天下 得失不由我。 若任而不拒 縱而不逆者 何處何時 而不逍遙。
묻되, “대도大道는 가깝습니까, 멉니까?” 답하되, “흡사 양염陽炎이(봄 아지랑이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아니하며, 거울 가운데의 얼굴 모습도 또한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아니하며, 허공에 (정신이 아찔하여) 물결이 치는 것과 (무언가에 부딪혀서 번쩍하며 나타나는) 바늘 꽃 등도 또한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아니한 것과 같나니, 만약 이것이 가깝다고 말한다면 시방十方으로 그것을 구求하더라도 얻을 수가 없으며, 만약 이것이 멀다고 말한다면 요요了了(明白)해서 눈 앞을 지나간다. 논論에 이르기를, ‘가까워서 가히 보지 못하는 것은 만물萬物의 성性이라.’라고 하였다. 만약 물物의 성性을 본 자는 도를 얻었다[得道]고 이름한다. 물심物心(물의 중심, 本性)을 본다는 것은, 이 물物의 성性이 물物의 상相이 없어서 물物에 즉即하여 물物이 없음이니, 이것이 ‘물物의 성性을 본다’고 이름한 것이다. 이른바 형상形相이 있는 물物은 모두가 다 이러한 물物인 것이다. 물物의 성性을 참으로 보아 실實다워 어기지 않는 자는, 이름하여 ‘진리[諦]를 본다’고 이름하며 또한 ‘법을 본다(見法)’고 이름한다. 가까워서 (오히려)보지 못하는 것이 법法의 상相[法相, 진리의 모습]이다.
지혜 있는 사람[智者]은 물物에 맡기고 자기自己에게 맡기지 않으니, 곧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또한 어기고 따름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愚者]은 자기自己에게 맡기고 물物에 맡기지 않으니, 곧 취하고 버림이 있으며 곧 어기고 따름이 있다. 만약 능히 빈 마음으로 너그럽게 놓아버려 크게 천하天下를 잊을 수 있는 자라면, 곧 물物에 맡기며 때를 따른다[隨時]. 물物에 맡기며 때를 따름[隨時]은 곧 쉽거니와 어기고 막아서 물物을 변화시키기는 곧 어렵다. 물物이 오고자하면 그것에 맡겨 거역拒逆하지 말며 만약 가고자 하면 그것을 놓아버려 쫓지 말라. 짓는 바의 일이 지나가버린 것은 후회하지 말며, 일이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은 놓아버려 생각지 말지니, 이것이 도道를 행하는 사람이다. 만약 능히 맡길 수 있는 자라면, 곧 천하天下를 위임委任하더라도 얻고 잃음이 나로 말미암지 않는다. 만약 맡김에 거부하지 않으며 놓아버림에 거역하지 않는 자라면, 어느 곳 어느 때라서 소요逍遙[自在]하지 않겠는가?
○ [究極真理易知] 問 云何名為大道甚易知易行 而天下莫能知莫能行。 願開示之。 答 此言實爾。 高臥放任 不作一箇物 名為行道。 不見一箇物 名為見道。 不知一箇物 名為修道。 不行一箇物 名為行道 亦名易知 亦名易行。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대도大道는 심히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우나 천하가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다.’라고 합니까? 원하옵나니 그것을 열어 보이소서.” 답하되, “이 말은 실實로 그러하다. 높이 누워 놓아 맡김에 한 개의 물物도 짓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도를 행한다[行道]’고 하고, 한 개의 물物도 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도를 본다[見道]’고 하며, 한 개의 물物도 알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도를 닦는다[修道]’ 하고, 한 개의 물物도 행行하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도를 행한다[行道]’고 하나니, 또한 이름하여 알기 쉽다[易知]고 하며, 또한 이름하여 행하기 쉽다[易行]고 한다.
* 近而不可見者 萬物之性也: 「道非內亦非外。 非近亦非遠。近而不可見者. 萬物之性也。 近尚不可見。 更道遠而不可
見有什麼意旨。」 - [楞伽阿䟦多羅寶經宗通]
○ [老子說問] 老經云 慎終如始 必無敗事 此云何。 答 此是懷信義人 一發心時 永無退沒 有古有今。 初發心是今 於今望昔是古 於古望初是今。 若道心有始有終者 名為信佛法人 古今不改者 名為實。 虛妄誑詐者 名為華。
묻되, “<노경老經[道德經]>에 이르기를, 「마지막 삼가하기를(慎: 操心·誠) 시작과 같이하면 반드시 일에 실패함이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답하되, “이것은 신의信義(믿음과 의리)를 품은 사람이니, 한 번 마음을 발發한 때에는 영원히 물러나 매몰됨이 없어서 옛에 있으며 지금에도 있는 것이다. 처음 마음을 발發함은 이 지금[今]이요, 지금[今]에 있어서 지난 날을 그리는 것이 이 옛[古]이며, 옛[古]적의 처음을 그리워 하는 것이 이 지금[今]이다. 만약 도심道心이 시작에도 있고 끝에도 있는 자라면 이름하여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라 하고, 옛과 지금이 바뀌지 아니한 자를 이름하여 ‘실實(열매, 실다움)’이라 하며, 허망하게 그럭저럭 속이는 자를 이름하여 ‘화華(꽃), 겉만 화려함’라고 한다.
* 열매는 실로 배를 채울 수 있고, 꽃은 화려하나 허망하다.
○ [菩薩生活] 問 云何是菩薩行。 答 非賢聖行 非凡夫行 是菩薩行。 若學菩薩時 不取世法 不捨世法。 若能即心識入道者 凡夫聲聞無能測量。 所謂一切事處 一切色處 一切惡業處 菩薩用之 皆作佛事 皆作涅槃 皆是大道。 即一切處無處 即是法處 即是道處。 菩薩觀一切處即是法處。 菩薩不捨一切處 不取一切處 不揀擇一切處 皆作佛事。 即生死作佛事 即惑作佛事。 問 諸法無法 云何作佛事。 答 即作處非作處 無作法 即善不善處 見佛。
묻되, “무엇을 일러 보살행菩薩行이라 합니까?” 답하되, “현성賢聖(현인과 성인)의 행行이 아니며 범부凡夫의 행行이 아닌 것,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다. 만약 보살菩薩을 배우는 때라면, 세간世間의 법을 취하지 아니하며[不取, 智慧] 세간世間의 법을 버리지도 않는다[不捨, 慈悲]. 만약 능히 심식心識에 즉即하여 도道에 들어갈 수 있는 자[轉識得智]는, 범부凡夫와 성문聲聞이 능히 칙량測量(추측하고 헤아릴 수)할 수가 없다. 이른바 일체 일[事]의 처소處所와 일체 색色의 처소와 일체 악업惡業의 처소에서 보살菩薩은 그것을 쓰면서[用] 모든 불사佛事를 짓고 모든 열반涅槃을 짓나니, 모두가 이 대도大道인 것이다. 일체처一切處에 즉即하여 처소가 없는 것이 곧 이 법法의 처소[法處]이며 곧 이 도道의 처소[道處]이다. 보살菩薩은 일체처一切가 곧 이 법의 처소[法處]임을 관觀하나니, 보살菩薩은 일체처一切處를 버리지 아니하고[不捨] 일체처一切處를 취하지 아니하며[不取] 일체처一切處를 간택揀擇하지도 아니하여 다 불사佛事를 지으며, 생사生死에 즉即하여 불사佛事를 지으며, 미혹迷惑에 즉即하여 불사佛事를 짓는다.[是即菩薩行]
묻되, “모든 법法이 법이 없는데[無法] 무엇을 일러 ‘불사佛事를 짓는다.’라고 합니까?” 답하되, “지음에 즉한 곳[即作處]이 짓지 아니한 곳이니[非作處] 법法을 지음이 없으며, 선善에 즉함[即善]이 선善하지 아니한 곳[不善處]이니 부처를 보게 된다[見佛].”
○ [佛與亡靈] 問 云何見佛。 答 即貪不見貪相 見貪法。 不見苦相 見苦法。 不見夢相 見夢法。 是名一切處見佛。 若見相時 即一切處見鬼。
묻되, “무엇을 일러 ‘부처를 본다[見佛]’고 합니까?” 답하되, “탐貪에 즉即하여(나아가) 탐貪의 상相을 보지 아니하고 (탐을 통하여) 탐貪의 법法을 보고, (고苦에 즉即하여) 고苦의 상相을 보지 아니하고 (고를 통하여) 고苦의 법法을 보며, (꿈에 즉即하여) 꿈의 상相을 보지 아니하고 (꿈을 통하여) 꿈의 법法을 본다. 이것이 ‘일체처一切處에서 부처를 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상相을 보는 때에는 곧 일체처一切處에서 귀鬼(귀신)를 보는 것이다.”
* 一切處見佛: 「逢苦不憂 何以故 識達本故。 此心生時 與理相應 體冤進道 是故說言報冤行」(경에 이르기를,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하지 말지니 왜그런가 하면, 식識으로써 근본根本을 통달通達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생生할 때에 이치와 더불어 상응相應하면 원망의 체體로써 도道에 나아가게 되나니 이런 까닭으로 설하여 말하길 보원행報冤行이라 한다)。」
○ [理法世界] 問 法界體性在何處. 答 一切皆是法界處. 問 法界體性中 有持戒破戒不。 答 法界體性中 無有凡聖 天堂地獄亦無。 是非苦樂等 常如虛空。
묻되, “법계法界의 체성體性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되, “일체一切가 모두 다 이 법계法界의 처소處所다.” 묻되, “법계法界의 체성體性 가운데 계를 가지고[持戒] 계를 파함[破戒]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하되, “법계法界의 체성體性 가운데에는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이 없고, 천당天堂과 지옥地獄도 또한 없으며, 옳음과 그름 · 고통과 즐거움 등이 그대로 허공虛空과도 같다.”
○ [悟處] 問 何處是菩提處。 答 行處是菩提處 臥處是菩提處 坐處是菩提處 立處是菩提處。 舉足下足 一切皆是菩提處。
묻되, “어느 곳이 이 보리菩提의 처소[處]입니까?” 답하되, “행行하는(가는) 곳이 이 보리菩提의 처소處所요, 눕는 곳이 이 보리菩提의 처소處所요, 앉는 곳이 이 보리菩提의 처소處所요, 서 있는 곳이 이 보리菩提의 처소處所요,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舉足下足] 일체가 다 이 보리菩提의 처소處所이다.
* 촉목보리觸目菩提: 부딪히는 것마다 보리菩提이다.
○ [諸佛境界] 問 諸佛境界 願為說之。 答 法非有非無 不取非有非無解者 名佛境界。若心如木石 不可以有智知 不可以無智知。 佛心不可以有知 法身不可以像見。 齊知之所解者 是妄想分別。 從你作種種解 皆是自心計挍 自心妄想。 諸佛智慧 不可說示人 亦不可藏隱 亦不可以禪定測量。 絕解絕知 名為諸佛境界。 不可量度 是名佛心。 若能信佛心如是者 亦即滅無量恆沙煩惱。 若能存心 念佛智慧如是者 此人道心 日日壯大。
묻되, “모든 부처님의 경계境界를, 원하옵나니 저를 위하여 설하여 주옵소서.” 답하되, “법法은 유有가 아니요[非有] 무無가 아니며[非無]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非有非無] 하는 해解도 취取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님 경계[佛境界]’라고 한다. 만약 마음이 목석木石과 같다면(정식情識이 없다면), 가히 지혜 있음[有智]으로도 알지 못하고 지혜 없음[無智]으로도 알지 못한다. 불심佛心(부처의 마음)은 가히 유有로써 알지 못하며, 법신法身은 가히 상像으로써 보지 못한다. 앎의 해解하는 바로써 가지런히 하는 것은(온갖 아는 것으로써 이해하는 것은) 이 망상분별妄想分別이다. 그대를 좇아 갖가지 해解를 지음이 모두가 다 이 자심自心의 계교計挍이며 자심自心의 망상妄想이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佛智慧]는 사람에게 설說하여 보여줄 수 없고, 또한 숨겨서 감출 수도 없으며 또한 선정禪定으로써 측량測量할 수도 없다. 해解가 끊어지고 앎[知]이 끊어짐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경계[諸佛境界]’라 한다. 헤아리고 추측할 수 없는 이 이름이 ‘불심佛心’이다. 만약 능히 불심[佛心]이 이와 같음을 믿을 수 있는 자라면 또한 헤아릴 수 없는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번뇌煩惱가 곧 멸滅하여진다. 만약 능히 존심存心(마음을 보존)할 수 있어서 부처님 지혜를 념念함이 이와 같은 자는, 이 사람은 도심道心이 날로 장대壯大하리라.”
○ [慧日西沉] 問 何名如來慧日潛沒於有地。 答 非有見有 慧日沒於有地。 無相見相亦然。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여래如來의 혜일慧日(지혜 날: 本覺)이 유지有地(있음의 땅)에 잠몰潛沒됨(잠김)’이라 합니까?” 답하되, “유有가 아닌데[非有] 유를 보는 것[見有]을 ‘혜일慧日이 유지有地에서 잠몰潛沒됨’이라 한다. 상相이 없는데[無相] 상相을 보는 것도[見相] 또한 그러하다.
○ [不動相] 問 何名不動相 答 不得於有 無有可動。 不得於無 無無可動。 即心無心 無心可動。 即相無相 無相可動 故名不動相。 若作如是證者 是名自誑惑。 上來未解 解時無法可解。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동動치 않는 상相[不動相]’이라 합니까?” 답하되, “‘유有에 있어 유有가 가히 동動함이 없으며(유를 취하여 얻지 아니하면 동할 것이 없으며), 무無에 있어 무無가 가히 동動함이 없다(무를 취하여 얻지 아니하면 동할 것이 없다). 마음에 즉即하여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가히 동動할 것이 없으며, 상相에 즉即하여(나아가) 상相이 없으니 상相이 가히 동動할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부동상不動相’이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증證함을 짓는 자는, 이 이름이 자광혹自誑惑(제가 저한테 속는 것)이다. 위로부터 오면서 알지를 못했으니[未解], 알[解] 때에는 법法을 가히 앎[解]이 없느니라.
○ [生滅與不生滅] 問 現見有生滅 云何言無生滅。 答 從緣生者 不名為生 從緣生故。 從緣滅者 不能自滅 從緣滅故。 問 云何緣生不名為生。 答 從緣生 不從彼生 亦不自生 亦不共生 亦不無因生。 又無生法 復無生者 亦無生處。 是故知不生。 所見生滅者 幻生非生 幻滅非滅。
묻되, “나타나 보이는 생멸生滅이 있거늘, 어째서 생멸生滅이 없다고 합니까?” 답하되, “연緣(조건)을 좇아 생生하는 것은 생生이라고 이름하지 않나니, 연緣을 좇아서 생生하는 까닭이다. 연緣을 좇아 멸滅하는 것은 스스로 멸滅할 수 없나니 연緣을 좇아서 멸滅하는 까닭이다.” 묻되, “어째서 연緣으로 생生함은 생生이라 이름하지 않습니까?” 답하되, “연緣을 좇아서 생生함[從緣生]은, 저[彼]를 좇아서 생하지 않고, 또한 스스로 생[自生]하지도 않으며, 또한 함께 생[共生]하지도 않고, 또한 원인 없이 생[無因生]하지도 않는다. 또 ‘생生하는 법法’이 없으며 다시 ‘생生하는 자者’도 없으며 또한 ‘생生하는 곳[處]’도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지 않음[不生]임을 알지니라. 생멸生滅로 보여지는 것은, 환의 생[幻生]으로써 생生이 아니며 환의 멸[幻滅]로써 멸滅이 아니다.
○ [罪的本質] 問 凡夫何故墮惡道。 答 由我故痴 故言道我飲酒。 智者言 你無酒時 何不飲無酒。 雖道我飲無酒 你我何處在。 痴人亦言 我作罪。 智者言 汝罪似何物者。 此皆是緣生無自性。 生時既知無我 誰作誰受。 經云 凡夫強分別 我貪我嗔恚。 如是愚痴人 即墮三惡道。 經云 罪性非內非外 非兩中間者 此名罪無處所。 無處所者 即是寂滅處。 人墮地獄者 由心計我 憶想分別 謂我作惡我受 我作善亦我受。 此是惡業。 從本已來無 橫憶想分別 謂為是有。 此是惡業。
묻되, “범부는 무슨 까닭으로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됩니까?” 답하되, ‘나(我)’를 말미암는 까닭으로 어리석고, 때문에 “나는 술을 마신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이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술이 없을 때에는 ‘술 없음을 마신다’고 아니하는가?”라 한다. 비록 ‘나는 술 없음을 마신다’고 말 하더라도, 그대의 그 ‘나’라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가? 어리석은 이가 또 말하길, “나는 죄罪를 지었다.”고 한다. 지혜로운 이가 말하길, “너의 죄罪는 흡사 무슨 물건과 같은 것인가?” 이는 모두가 연緣(조건)으로 생生한 것으로 그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죄가)생生하는 때에 이미 나 없음[無我]을 알지니, 누가 짓고 누가 받는가? 경經에 이르기를, 「범부는 억지로 분별하여 ‘내[我]가 탐貪을 낸다, 내[我]가 성을 낸다[嗔恚]’고 한다」 하였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곧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 경經에 이르기를, 「죄罪의 성性은 안도 아니요[非內] 밖도 아니며[非外] 양쪽의 중간도 아니다[非兩中間].」 라고 한 것은, 이는 ‘죄罪는 처소處所가 없음’을 이름한 것이다. ‘처소處所가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적멸의 처소[寂滅處]’이다. ‘사람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것은, 마음이 나를 헤아려 억상분별憶想分別함을 말미암아, ‘내가 악을 지었으니 내가 받는다’하고, ‘내가 선을 지었으니 또한 내가 받는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악업惡業은 종본이래從本已來로 없거늘[無], 제멋대로 억상분별憶想分別하여 이것이 있다[有]고 간주하여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악업惡業이다.
* 誰作誰受: 누가 짓고 누가 받는가? 짓는 것이 받는 것이다. 지음[作]과 받음[受]이 동시同時.
* 凡夫強分別 我貪我嗔恚: 「凡夫強分別 我貪我嗔恚。 善友慈悲 愍念眾生。 無始已來
為之疲勞。 今教觀察 悟達本無。」 - [法句經疏]
○ [救自我者] 問 誰能度我。 答 法能度我。 何以得知。 取相故墮地獄 觀法故解脫。 若見相憶想分別 即受鑊湯爐炭 牛頭阿婆等事 即現見生死相。 若見法界性即涅槃性 無憶想分別 即是法界體。
묻되, “누가 능히 ‘나[我]’를 제도 할 수 있습니까?” 답하되, “법法이 능히 ‘나’를 제도할 수 있다.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느냐하면, 상相을 취하는 까닭으로 지옥地獄에 떨어지고 법法을 관觀하는 까닭으로 해탈解脫을 한다. 만약 상相을 보고서 억상분별憶想分別하면, 곧 화탕노탄鑊湯爐炭과 우두아파牛頭阿婆(옥졸의 귀신)등의 일을 받아 곧 생사生死의 상相이 나타남을 보게 된다. 만약 법계法界의 성性이 (그대로)열반涅槃의 성性임을 보면, 억상분별憶想分別함이 없으니 곧 이[即是] 법계法界의 체體인 것이다.”
○ [存在的本質] 問 云何法界體。 答 心體是法界體。 此法界無體 亦無畔齊 廣大如虛空不可見 是名法界體。
묻되, “무엇을 일러 법계法界의 체體라 합니까?” 답하되, “마음의 체[心體]가 법계의 체[法界體]다. 이 법계法界는 체體가 없고 또한 정해진 경계[畔齊, 한계]가 없으며 광대廣大함이 허공虛空과 같아서 가히 볼 수가 없으니, 이 이름이 ‘법계의 체[法界體]’이다.”
○ [知理法] 問 云何知法。 答 法名無覺無知。 心若無覺無知 此人知法。 法名不識不見。 心若不識不見 名為見法。 不知一切法 名為知法 不得一切法 名為得法。 不見一切法 名為見法 不分別一切法 名為分別法。
묻되, “무엇을 일러 ‘법法을 안다[知法]’ 합니까?” 답하되, “법法은 각覺이 없고 지知가 없음을 이름하나니, 마음이 만약 각覺이 없고 지知가 없으면 이 사람은 ‘법法을 안다[知法]’고 한다. 법法은 알지 못하고[不識] 보지 못하는[不見]것을 이름하나니, 마음이 만약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이름하여 ‘법을 본다[見法]’고 한다. 일체의 법을 알지 못함을 이름하여 ‘법을 안다[知法]’고 하며, 일체의 법을 얻지 못함을 이름하여 ‘법을 얻었다[得法]’고 하며, 일체의 법을 보지 못함을 이름하여 ‘법을 본다[見法]’고 하며, 일체의 법을 분별하지 않음을 이름하여 ‘법을 분별한다[分別法]’고 한다.
○ [超越見聞的理法與覺者] 問 法名無見 云何無碍知見。 答 無知是無碍知 無見是無碍見。 問 法名無覺 佛名覺者云何。 答 法名無覺 佛名覺者 無覺為覺 與法同覺 是佛覺。 若勤看心相 見法相 勤看心處 是寂滅處 是無生處 解脫處 是空處 菩提處。 心處無處處 是法界處 道場處 法門處 智慧處 禪定無碍處。 若作如此解者 是墮坑落塹人。
묻되, “법法의 이름이 ‘견해 없음[無見]’일진댄, 어째서 ‘걸림이 없는 지견[無碍知見]’이라 합니까?” 답하되, “‘앎[知]이 없음’이 이 ‘걸림이 없는 앎[無碍知]’이며, ‘견해[見] 없음’이 이 ‘걸림이 없는 견해[無碍見]’이다.”
묻되, “법法이 이름하여 ‘깨침 없음[無覺]’일진댄, 부처님은 이름이 ‘깨달으신 분[覺者]’이시니 어째서 그러합니까?” 답하되, “법法은 이름하여 ‘깨침이 없음[無覺]’인데 부처님은 이름이 ‘깨달으신 분[覺者]’인 것은, 각 없음[無覺]을 각[覺]으로 삼으며 법法도 더불어 각覺과 같음(법 없음을 법으로 삼음)이니, 이것이 부처님의 각[佛覺]이다. 만약 부지런히 마음의 상相을 보고 법法의 상相을 보며 부지런히 마음의 처소處所를 보아서, “이것이 적멸寂滅의 처소이다, 이것이 무생無生의 처소요 해탈解脫의 처소다, 이것이 공空의 처소요 보리菩提의 처소다. 마음의 처소[心處]는 처소가 없는 처소[無處處]이니, 이것이 법계法界의 처소요 도량道場의 처소요 법문法門의 처소요 지혜智慧의 처소요 선정禪定이 걸림없는 처소이다.”라고 하나니, 만약 이와같이 알음알이를 내는 자는, 이는 구렁텅이에 쳐박힌 것이요 구덩이에 떨어진 사람이다.
○ [六波羅蜜] 問 六波羅蜜能生一切智。 答 波羅蜜者 無自無他 誰受誰得。 眾生之類 共業果報 無有分別福之與相。 經云 難勝如來 及會中最下乞人 等於大悲 具足法施 名為檀波羅蜜。 無事無因 無有樂厭 體性如如 究竟無非 其誰求是。 是非不起 及戒體清淨 名為尸波羅蜜。 心無內外 彼此焉寄。 音聲之性 無所染著 平等如虛空 名為闡提波羅蜜。 離諸根量 究竟開發 不住諸相 名為毗梨耶波羅蜜。 三世無相 剎那無住處 事法不居 靜亂性如 名禪波羅蜜。 涅槃真如 體不可見 不起戲論 離心意識 不住方便 名為如如。 無可用 用而非用。 經云 有慧方便解。 是故名為般若波羅蜜。
묻되,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능히 일체지一切智를 생장生長시킬 수 있습니까?” 답하되, “바라밀波羅蜜이라 함은, 자自(나)가 없고 타他(남)가 없음이어늘 누가 받고 누가 얻겠는가? 중생衆生의 무리는 공업共業의 과보果報이니, 복福의 주어지는 상相으로 분별分別할 것이 있음이 없다(중생은 복의 상을 분별할 줄을 모른다). 경經[維摩經]에 이르되, 「난승여래難勝如來와 모임 가운데의 가장 하천下賤한 걸인乞人은 평등平等한 대비大悲로 법시法施(법보시)를 구족具足하였나니, 이름하여 ‘단바라밀檀波羅蜜[布施波羅蜜]’이라 한다. 일[事]이 없고 원인[因]도 없으며, 좋아함과 싫어함이 있음이 없으니, 체體의 성性이 여여如如하여 구경究竟에 그름이 없거늘[無非] 그 누가 옮음을 구하겠는가? 시비是非를 일으키지 않아 계戒의 체體가 청정清淨하니, 이름하여 ‘시바라밀尸波羅蜜[持戒波羅蜜]’이라 한다. 마음은 안과 밖이 없거늘 피彼와(저것과) 차此가(이것이) 어찌 있겠는가? 음성音聲의 성性이 착著(집착)하여 물드는 바가 없어서 평등平等하기가 허공과 같으니, 이름하여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忍辱波羅蜜]’이라 한다. 모든 육근六根의 사량思量을 여의어 구경究竟에 (마음이) 열리고[開] (지혜가) 발發하여 모든 상相에 머무르지 않나니, 이름하여 비리야바라밀毗梨耶波羅蜜[精進波羅蜜]이라 한다. 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에 상相이 없고 찰나剎那에도 머무는 곳이 없으며 일과 법에 머무르지 않아서 고요함[靜]과 어지러움[亂]의 성[性]이 같으니(어지러움과 고요함이 둘이 아니니), 이름이 ‘선바라밀禪波羅蜜[禪定波羅蜜]’이라 한다. 열반涅槃인 진여眞如는 체體를 가히 보지 못하며 희론戲論을 일으키지 못하며 심의식心意識(제8식·제7식·제6식)을 떠나있으며 방편方便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이름하여 ‘여여如如’라 한다. 가히 씀이 없으며[無可用] 쓰되 씀이 아니다[用而非用]. 경[維摩經]에 이르되, 「지혜智慧가 있는 방편方便은 해탈解脫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이름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智慧波羅蜜]’이라 한다.”
* 難勝如來 及會中最下乞人 等於大悲 具足法施: 「維摩詰乃受瓔珞 分作二分 持一分施此會中一最下乞人 持一分奉彼難勝如來。」 - <維摩詰所說經>
○ [心性遠離結縛] 問 何名解脫心。 答 心非色故 不屬色 心非非色 不屬非色。 心雖照色不屬色。 心雖照非色不屬非色。 心非色相可見。 心雖非色 非色非是空。 心非色 心不同太虛。 菩薩了了照空不空 小乘雖照空 不照不空。 聲聞雖得空 不得不空。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해탈심解脫心’이라 합니까?” 답하되, “마음은 색色이 아니므로 색色에 속하지(속박되지) 아니하며, 마음은 색色 아님도 아니므로 색 아님[非色]에도 속하지 않는다. 마음은 비록 색色을 비추나[照見] 색色에 속하지 아니하며, 마음은 비록 색 아님[非色]을 비추나 색 아님[非色]에도 속하지 않는다. 마음은 상相으로 가히 볼 수 있는 색色이 아니다. 마음은 비록 색色이 아니지만, 색色 아님이 공空이라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색色이 아니나, 마음이 태허太虛와 같지도 않다. 보살菩薩은 요요了了[分明]하게 공불공空不空(비었으되 비지 않음)을 비추며, 소승小乘은 비록 공空을 비추어보나 불공不空을 비추지는 못한다. 성문聲聞은 비록 공空을 얻으나 불공不空을 얻지는 못한다.
* 菩薩了了照空不空: 보살菩薩은 요요了了하게 공불공空不空을 비춘다.
― 물物을 다 여의고 떼고 다 여의고 떼부렀다. 아무 것도 없다만 그대로 갖춰 있는 거여. 없으니 아주 없어부러? 없으니 아주 없었으니 아주 있어부러. - 전강선사 법문 16번.
―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이여?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여. 중생심이... 중생심 그 제팔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如來藏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一切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疑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근六根·육식六識·육진六塵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있다 그 말이여. 「육반신용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이요」 , 그래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 눈을 통해서 보고 · 귀를 통해서 듣고 ·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더웁고 험을 느끼고 ·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헌다 그 말이여.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摩尼珠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神妙한 신통神通이다 그 말이여. 그런디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여[空不空]. 분명히 있으되 비어있는 것이고, 분명이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영 허건만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최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空不空]’이여. - 송담선사 법문 세등 51번.
○ [諸種妄執] 問 何名一切法非有非無。 答 心體無體 是法體。 心非色故非有 用而不廢故非無。 復次用而常空故非有 空而常用故非無。 復次 無自性故非有 從緣起故非無。 凡夫住有 小乘住無 菩薩不住有無 是自心計妄想。 色非色不染色 非色非色不染非色。 復次 不見見 不見不見 是名見法。 不知知 不知不知 是名知法. 如是解者 亦名為妄想。即心無心 心無心故名為法心。 今時行者 以此破一切惑 心如虛空 不可破壞 故名為金剛心。 心不住住 不住不住 故名為般若心。 心性廣大 運用無方 故名為摩訶衍心. 心體開通 無障無碍 故名為菩提心。 心無崖畔 亦無方所。 心無相故非有邊 用而不廢故非無邊。 非有際非無際 故名為實際心。 心無異無不異 即心無體。 不異而無不體 非不異無異不異 故名為如心. 即心無變名異 隨物而變名無異 亦名真如心。 心非內外中間 亦不在諸方 心無住處 是法住處 法界住處 亦名法界心。 心性非有非無 古今不改 故名為法性心。 心無生無滅 故名為涅槃心。 若作如此解者 是妄想顛倒 不了自心現境界 名為波浪心。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일체법一切法은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다.’라고 합니까?” 답하되, “‘마음의 체體는 체 가 없으니[無體], (체가 없는)이것이 법法의 체體다. 마음은 색色이 아니므로 유有가 아니며, 작용하여 멈추지 않으므로[不廢] 무無가 아니다.’라거나, 다시 ‘작용[用]하되 항상 공空한 까닭으로 유有가 아니며, 공空하되 항상 작용하는 까닭으로 무無가 아니다.’라거나, 다시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으로 유有가 아니며, 연緣을 좇아 일어나는 까닭으로 무無가 아니다.’라거나, 범부凡夫는 유有에 머무르고[住] 소승小乘은 무無에 머무르며[住] 보살菩薩은 유有와 무無에 머무르지 않는다[不住].’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은 자기 마음의 ‘계교망상計較妄想’인 것이다. ‘색色은 색色이 아니니 색色에 물들지 아니하고, 색色은 색 아님[非色]도 아니니 색 아님[非色]에도 물들지 않는다.’라거나, 다시 ‘봄[見]을 보지 못하며[不見] 보지 못함[不見]도 보지 못하니[不見] 이것이 이름하여 법을 본다[見法]는 것이다.’라거나, ‘앎[知]을 알지 못하며[不知] 알지 못함[不知]도 알지 못하나니[不知] 이 이름이 법을 앎[知法]이다.’”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해解하는 것도 또한 이름하여 ‘망상妄想’이라 한다.
‘마음에 즉하여[即心] 마음이 없음[無心]이라 마음[心]이 마음 없음[無心]인 까닭으로 이름하여 법의 마음[法心, 진리의 마음]이라 하나니, 금시今時(요즘) 행行(수행)하는 자가 이로써 일체의 미혹迷惑을 부수어버리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가히 파괴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금강심金剛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은 머무름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머무르지 않음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반야심般若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의 성性은 광대廣大하여 운용運用이 방소方所가 없으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마하연심摩訶衍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의 체體가 열려 통하여[開通, 사무치게 깨달아] 장애가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으로 이름하여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에는 끝간데(가장자리)가 없고 또한 방소方所(처소)가 없다.’라거나, ‘마음은 상相이 없는 까닭으로 갓[邊]이 있지 아니하며, 작용하되 멈추지 않는 까닭으로 갓[邊]이 없지 아니하다.’라거나, ‘끝이 있음도 아니요[非有際] 끝이 없음도 아니니[非無際] 그러므로 이름하여 실다운 끝의 마음[實際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은 다름이 없고 다르지 아니함도 없나니, 마음에 즉即하여 체體가 없는 것이다. 다르지 아니하니[不異] 체體 아님이 없으며[無不體], 다르지 아니함도 아니니[非不異] 다름과 다르지 않니함도 없어서[無異不異], 그러한 까닭으로 이름하여 여여심如如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에 즉即하여 변變함 없음이 이름하여 다름[異]이요, 「물物을 따라서 변變함이 이름하여 다름 없음[無異]이니 또한 이름하여 진여심真如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은 안과 밖과 중간이 아니며 또한 모든 방위에도 있지 않아서 마음은 머무는 곳[住處]이 없으니, 이것이 법法의 머무는 곳이며 법계法界의 머무는 곳이라 또한 이름하여 법계의 마음[法界心]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의 자성[心性]은 있음[有]이 아니요 없음[無]이 아니어서 예와 지금에 있어서 변하여 고쳐지지[變改] 않나니,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성심法性心 이라 한다.’라거나, ‘마음은 생겨남도 없고[無生] 멸함도 없으니[無滅] 그러므로 이름하여 열반심涅槃心이라 한다.’라고 하는데, 만약 이와 같이 해解(알음알이)를 짓는 자는 이것이 바로 망상전도妄想顛倒인 것이며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境界를 깨닫지 못한 것이니, 이름하여 ‘파랑심波浪心(경계에 물결치며 끄달리는 마음)’이라 한다.
○ [自心現] 問 云何自心現。 答 見一切法有 有自不有 自心計作有。 見一切法無 無自不無 自心計作無。 乃至一切法 亦復如是 並自心計作有 計作無。 貪似何物作貪解。 此皆自心起見故 自心計無處所 是名妄想。 自謂出一切外道計見 亦是妄想。 自謂無念無分別 亦是妄想。 行時法行 非我行 非我不行。 坐時法坐 非我坐 非我不坐。 作此解者 亦是妄想。
묻되, “무엇을 일러 ‘자기 마음의 나툼[自心現]’이라 합니까?” 답하되, “일체법一切法을 유有로(존재하는 것으로) 보나, 유有가 스스로 유有라 하지 않는데 자기 마음이 헤아려 유有를 짓는다. 일체법을 무無로 보나 무無가 스스로 무無라 하지 않는데 자기 마음이 헤아려 무無를 짓는다. 나아가 일체一切의 법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아울러 자기 마음이 헤아려 유有를 짓고 헤아려 무無를 짓는다. 탐貪이(탐내는 것이) 흡사 어떤 물건이기에 탐貪이라는 해解를 짓는가? 이 모두는 자기 마음이 견해[見]를 일으킨 까닭이요 자기의 마음은 헤아리는[計] 처소가 없는 것이니, 이 이름이 망상妄想이다. 스스로 이르길, ‘일체 외도外道의 헤어림[計]과 견해[見]를 뛰어났다.’고 하는데, 또한 이것도 망상妄想이다. 스스로 이르길, ‘념念이 없으며 분별分別함이 없다.’라고 하는데, 이 또한 망상妄想이다. 스스로 이르길, ‘걸어가는 때[行時]에는 법法(진리)이 걸어가는 것이지 내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며 내가 걸어가지 않음도 아니다. 앉을 때[坐時]에는 법法이 앉는 것이지 내가 앉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앉지 않음도 아니다.’ 이러한 해解를 짓는 것도 또한 망상妄想이다.
* 見一切法有 有自不有 自心計作有: 「唯識無境오직 식識 뿐이요 경계境界가 없다)」 - [唯識論]
*「用心親切 不生計度有無等 則不落外道.」 - [蒙山法語]
용심用心이 친절親切이면, 용심用心이, 공부헌 마음이 간절할 것 같으면, 불생개탁유무등不生計度有無等이다, 유무등有無等이니 뭐 일체一切니 무슨 뭐 별 별, 없어. 무슨 마음 속으로 일체 이치理致도 없어. 견성見性했느니 뭐 내가 알았느니 뭐 그따구 놈의 소, 어디서 그런것이 나와. 어디 견성見性이 그런것인가? 즉則 불락외도不落外道니라, 외도外道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전강선사 법문 38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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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刻石作佛像] 又問 其道皆妄想作者 何者是妄想作。 答 法無大小形相高下。 譬如家內有大石 在庭前。 從汝眠上坐上 不驚不懼。 忽然發心作像 雇人畫作佛形像。 心作佛解 即畏罪 不敢坐上。 此是本時石 由你心作是。 心復似何物。 皆是你意識筆子頭畫作是 自忙自怕。 石中實無罪福 你家心自作是。 如人畫作夜叉鬼形 又作龍虎形 自畫還自見 即自恐懼 彩色中畢竟無可畏處。 皆是你家意識筆子分別作是。 阿寧有一箇物 悉是你妄想作是。
또 묻되, “그 도道[六道]가 다 망상妄想이 지은 것이라 하는데, 어떤 것이 이 망상妄想이 지은 것인가?” 답하되, “법法은 크고 작은 형상과 높고 낮음이 없다. 비유하면 집 안에 큰 돌이 있는데, 뜰 앞에 자리해 있다. 거기에 그대는 올라가 자기도 하고 올라가 앉기도 하는데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홀연히 상像[佛像]을 만들려는 마음을 내어 사람을 고용해서 부처님의 형상形像을 그렸다. 마음은 ‘부처님’ 이라는 알음알이를 짓게 되니, 곧 죄罪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위에 앉지를 못한다. 이것은 본시本時 돌[石]이었으나, 그대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것(죄, 두려움)을 지은 것이다. 마음은 다시 이 무슨 물건과 같은 것인가? 다 이것은 그대의 ‘의식의 붓 끝’으로 그려낸 것이 이것이건만, 스스로 초조해 하고 스스로 두려워 한다. 돌 가운데는 실로 죄罪와 복福이 없는데, 그대의 마음이 스스로 이것[罪福, 忙怕]을 짓는 것이다. 사람이 야차와 귀신의 형상을 그리고 또 용과 호랑이의 형상을 그리고서 자신의 그림을 자신이 보고 곧 스스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나니, 채색彩色[그림] 가운데에는 필경에 두려워 할만한 곳이 없다. 모두가 그대의 ‘의식의 붓’으로 분별하여 지은 것이 이것이다. 무슨 한 개의 물物이라도 있겠는가? 다 이것은 그대의 망상妄想이 이것을 지은 것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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