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본진심守本眞心》 - 최상승론、 삼가귀감.

2023. 8. 1. 09:52글뭉치

수본진심.pdf
3.57MB
수본진심[b5].pdf
3.66MB


 

 

 

 

 

 

 

 

守本眞心

 

 

 

 

 

 

 

 

 

 

 

 

〖최상승론 最上乘論〗 -  3

 

〖유가귀감 儒家龜鑑〗 - 36

 

〖도가귀감 道家龜鑑〗 - 65

 

〖선가귀감 禪家龜鑑〗 - 80

    

                                                                                           〖진심직설 眞心直說〗 - 188

 

 

 

 

 

 

 

  

 

 

 

 

 

 

 

 

                

  

                  제 오조 홍인선사 술 

                  第 五祖 弘忍禪師 述

          최상승론 最上乘論

         

 

 

  

 

 

 

凡趣聖道悟解真宗。修心要論.若其不護淨者。一切行無由取見。願善知識如有寫者。用心無令脫錯。恐誤後人。夫修道之本體.須識當身心本來清淨不生不滅無有分別。自性圓滿清淨之心。此是本師。乃勝念十方諸佛。

 

무릇 성도聖道에 나아감에 진종真宗인 수심요론修心要論(마음 닦는 요긴한 논論)을 깨달아 알아야 하나니, 그 청정[淨]을 보호하지 않는 자는 일체의 행行(수행)이 견見[見性]을 얻을 까닭이 없느니라. 원컨대 선지식으로서 이 글을 베끼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마음을 써서 누락되거나 그릇됨이 없도록 하라. 뒷 사람을 그르칠까 두렵다. 대저 도道를 닦는 본체本體는,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본래청정本來淸淨해서 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야[不生不滅] 분별分別도 없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자성원만청정自性圓滿淸淨한 마음이 이것이 바로 본사本師이니, 곧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념念하는 것보다 수승殊勝하니라(낫느니라).

 

 

問曰。何知自心本來清淨。答曰。十地經云。眾生身中有金剛佛性。猶如日輪體明圓滿廣大無邊。只為五陰黑雲之所覆。如瓶內燈光不能照輝。譬如世間雲霧八方俱起天下陰闇。日豈爛也.何故無光。光元不壞。只為雲霧所覆。一切眾生清淨之心亦復如是。只為攀緣妄念煩惱諸見黑雲所覆。但能凝然守心。妄念不生。涅槃法自然顯現。故知自心本來清淨。

 

물어 말하길, 『어떻게 자신의 마음이 본래청정本來清淨한 줄을 압니까?』 답해 말하길, 『<십지경十地經>에 이르되, 「중생의 몸 가운데에 금강불성金剛佛性이 있으니, 마치 일륜日輪(해)의 체體가 밝고 원만圓滿해서 광대무변廣大無邊하나, 다만 오음五陰의 먹구름에 덮힌 바가 된 것과 같으며, 항아리 안의 등불이 환히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하였다. 비유하면 세간世間의 구름과 안개가 팔방八方에서 함께 일어남에 천하天下가 어두운 것과 같으니, 해인들 어찌 빛날 수가 있겠는가? 어찌한 연고로 빛이 없겠는가? 빛은 원래로 훼손되지 않았으며, 다만 구름과 안개에 덮힌 바가 되었을 뿐이니, 일체 중생의 청정한 마음도 또한 이와 같다. 다만 반연攀緣하는 번뇌망념煩惱妄念에 모든 견見이 먹구름으로 덮힌 바가 된 것이니, 다못 응연凝然히 근본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망념妄念은 일어나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의 법法이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이 본래청정本來清淨한 것을 알 것이다.』 

 

 

問曰。何知自心本來不生不滅。答曰。維摩經云。如無有生如無有滅。如者真如佛性自性清淨。清淨者心之原也。真如本有不從緣生。又云。一切眾生皆如也。眾賢聖亦如也。一切眾生者。即我等是也。眾賢聖者。即諸佛是也。名相雖別身中真如法性並同。不生不滅故言皆如也。故知自心本來不生不滅。

 

물어 말하길, 『자기의 마음이 본래 나지 아니하고 멸하지 아니함[不生不滅]을 어떻게 압니까?』 답해 말하길, 『<유마경維摩經>에 이르되, 「여如[如如]로 남이 없으며 여如[如如]로 멸함이 없다.」 하였다. ‘여如(如如)’라 함은 진여불성真如佛性인 자성청정自性清淨이며, ‘청정清淨’이라 함은 마음의 본원本原이다. 진여真如는 본래本來로 있는 것이지 연緣을 좇아 나지 아니한다.』  또 이르되, 『일체중생一切眾生이 모두 여如[如如]하며, 모든 현성賢聖이 또한 여如[如如]하다. 일체중생一切眾生이라 함은 곧 나와 같은 이요, 모든 현성賢聖이라 함은 곧 모든 부처님들이시다. 이름과 모양은 비록 다르나 몸 가운데의 진여법성真如法性은 모두가 같다. 나지 아니하고 멸하지 아니한[不生不滅] 까닭으로 모두 ‘여如[如如]’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로므로 자기 마음이 본래 나지 아니하고 멸하지 아니한 것을 알 것이다.』   

 

* 「여如」 (여여如如):  

「如者不動 如者動, 不動而動 動而不動.」

앞의 ‘여如’는 동動하지 않음[不動]이요, 뒤의 ‘여如’는 동動함이니, 자비慈悲로써 동하지 않되 동하고[不動而動], 해탈解脫로써 동하되 동하지 않음[動而不動]이라.

 

 

問曰。何名自心為本師。答曰。此真心者。自然而有不從外來。不□束修[不屬於修]於三世中。所有至親莫過自守於心。若識心者守之則到彼岸。迷心者棄之則墮三塗。故知三世諸佛以自心為本師。故論云。了然守心則妄念不起則是無生。故知心是本師。

 

물어 말하길, 『무엇을 이름하여 ‘자기의 마음으로 본사本師(근본스승)를 삼는다’ 합니까?』 답해 말하길, 『이 참 마음[真心]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지 밖으로 좇아 온 것이 아니며, 삼세三世 가운데에서 수행함에 속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가까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 것[自守於心]’만 못하다. 만약 마음을 아는 자가 그것을 지키면 피안彼岸에 이르고, 마음을 미혹한 자가 그것을 버리면 삼도三途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삼세제불三世諸佛은 자기의 마음으로써 본사本師를 삼는 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논論에 이르되, 「요연了然히 마음을 지키면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그러한 즉 이 무생無生이니, 그런 까닭으로 마음이 이 본사本師(근본 스승)인 것을 알 것이다. 』 

 

 

問曰。何名自心勝念彼佛。答曰。常念彼佛不免生死。守我本心則到彼岸。金剛經云。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故云。守本真心勝念他佛。又云。勝者只是約行勸人之語。其實究竟果體平等無二。

 

물어 말하길, 『무엇을 이름하여 ‘자기의 마음이 저 부처님을 념念하는 것보다 수승하다’라고 합니까?』 답해 말하길, 『항상 저 부처님을 념念하여도 생사生死를 면免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본 마음[本心]을 지키면 피안彼岸에 이른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되,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道를 행하는 것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되, ‘근본 참 마음[本真心]을 지키는 것이 다른 부처님을 념念하는 것보다 수승하다’ 라고 한 것이다.』 또 이르되, 『‘수승하다’라 함은, 단지 수행하기를 기약하여 사람에게 권고勸告하는 말이지, 그 실제에 있어선 구경究竟의 과체果體가 평등하여 둘이 없는 것이다. 

 

 

問曰。眾生與佛真體既同。何故諸佛不生不滅。受無量快樂自在無礙。我等眾生墮生死中受種種苦耶。答曰。十方諸佛悟達法性。皆自然照燎於心源。妄想不生正念不失。我所心滅故得不受生死。不生死故即畢竟寂滅。故知萬樂自歸。一切眾生迷於真性不識心本。種種妄緣不修正念故即憎愛心起。以憎愛故則心器破漏。心器破漏故即有生死。有生死故則諸苦自現。心王經云。真如佛性沒在知見六識海中。沈淪生死不得解脫。努力會是。守本真心妄念不生。我所心滅自然與佛平等無二。

 

물어 말하길, 『중생과 부처의 진체真體는 이미 한가지로 같은데, 무슨 까닭으로 모든 부처님은 나지 아니하고 멸하지 아니하여 한량이 없는 쾌락을 받으며 자재自在하여 걸림이 없으며, 우리 중생들은 생사生死 가운데에 떨어져서 갖가지 고통을 받습니까?』 답해 말하길,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은 법성法性을 깨닫고 통달하여 모두가 자연히 마음의 근원根源을 밝게 비추시니, 망상妄想은 나지 아니하고 정념正念은 잃지 아니하여 ‘나’라고 하는 마음[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는 까닭으로 생사生死를 받지 않는다. 생사生死를 하지 않는 까닭으로 곧 필경畢竟에 적멸寂滅인 것이니, 그러므로 만 가지 즐거움이 스스로 돌아오는 것을 알 것이다. 일체중생一切眾生은 진성真性을 미迷(미혹)하여 마음의 근본根本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망령된 반연攀緣으로 정념正念을 닦지 아니한 까닭에 곧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憎愛心]이 일어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까닭으로 마음의 그릇은 깨지고 새며, 마음 그릇이 깨지고 새는 까닭으로 곧 생사生死가 있게 된다. 생사生死가 있는 까닭으로 곧 모든 고통이 제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다. <심왕경心王經>에 이르되, 「진여불성真如佛性이 지견知見인 육식六識의 바다 가운데에 빠져 있어서 생사生死에 침윤沈淪하며 해탈解脫을 얻지 못한다.」 하였다. 이것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하나니, 근본 참마음[本真心]을 지켜서 망념妄念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고 하는 마음[我所心]이 멸滅하면 자연히 부처와 더불어서 평등하여 둘이 없느니라.』 

 

 

問曰。真如法性同一無二。迷應俱迷。悟應俱悟。何故佛覺性眾生昏迷.因何故然。答曰。自此已上入不思識分。非凡所及。識心故悟。失性故迷。緣合即合說不可定。但信真諦守自本心。故維摩經云。無自性無他性。法本無生今即無滅。此悟即離二邊入無分別智。若解此義但於行知法要。守心第一。此守心者。乃是涅槃之根本入道之要門。十二部經之宗三世諸佛之祖。

 

물어 말하길, 『진여법성真如法性은 하나로 같아서 둘이 없으니, 미迷하면 응당 함께 미迷하고 깨달으면 응당 함께 깨달을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은 각성覺性하고 중생은 혼미昏迷합니까? 무엇을 인因한 까닭으로 그러합니까?』 답하여 말하길, 『이 이상으로부터는 사의思議할 수 없는 분상分上[識分]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범부가 미칠 바가 아니다. 마음을 아는 고故로 깨닫고 성性을 잃는 고故로 미迷하게 되나니, 인연因緣이 합合함에 곧 합合하여 지는 것이지 설說이라는 것이 고정固定되어 있을 수는 없다. 다만 진제真諦를 믿어서 자기의 본심本心을 지킬 뿐이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 이르되, 「자성自性도 없으며 타성他性도 없나니, 법法에는 본래 남이 없으며[無生] 지금에 곧 멸함도 없다[無滅].」 하였다. 이렇게 깨달은즉 두 변[二邊,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미혹함]을 여의어 무분별지無分別智에 들어가게 되리라. 만약 이 뜻을 이해한다면 다만 수행함에 있어 법의 요긴한 것[法要]을 알아야 하나니, ‘마음을 지키는 것[守心]’이 제일第一이니라. 이 ‘마음을 지킨다[守心]’는 것은, 곧 이 열반涅槃의 근본根本이요 도道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門이며, 십이부경十二部經의 종지宗旨이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조상이다.』 

 

 

問曰。何知守本真心是涅槃之根本。答曰。涅槃者體是寂滅無為安樂。我心既是真心。妄想則斷。妄想斷故則具正念。正念具故寂照智生。寂照智生故窮達法性。窮達法性故則得涅槃。故知守本真心是涅槃之根本。

 

물어 말하길, 『근본 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열반의 근본임을 어떻게 압니까?』 답하여 말하길, 『열반涅槃이라 함은, 체體가 이 적멸寂滅인 함이 없는 안락安樂함이다. 내 마음이 이미 이러한 참 마음[真心]일진댄 망상妄想은 곧 끊어지며, 망상이 끊어진 까닭으로 정념正念이 갖추어진다. 정념이 갖추어진 까닭으로 고요히 비추는 지혜[寂照智]가 생겨나고, 고요히 비추는 지혜가 생겨난 까닭으로 궁극에 법성法性을 통달通逹하게 되며, 궁극에 법성을 통달한 까닭으로 곧 열반涅槃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근본 참 마음을 지키는 것[守本真心]이 곧 열반涅槃의 근본根本인 것을 알 것이다.』 

 

 

問曰。何知守本真心是入道之要門。答曰。乃至舉一手爪畫佛形像。或造恒沙功德者。只是佛為教導無智慧眾生作當來勝報之業及見佛之因。若願自早成佛者會是守本真心。三世諸佛無量無邊。若有一人不守真心得成佛者。無有是處。故經云。制心一處無事不辦。故知守本真心是入道之要門也。

 

물어 말하길,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도道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답해 말하길, 『나아가 한 손톱을 들어서 부처님의 형상을 그리거나 혹은 항하사의 공덕을 짓는 것은, 다만 이것은 부처님이 지혜 없는 중생들이 당래當來(미래)에 수승한 과보의 업과 부처님을 보게될 인因을 짓도록 가르쳐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만약 스스로 일찍 성불成佛하기를 원하는 자는, 마땅히 이 근본 참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시나, 만약 한 사람이라도 참 마음을 지키지 아니하고서 부처를 이룬 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되, 「마음을 한 곳에 지어나가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이 도道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임을 알 것이다.』  

 

 

問曰。何知守本真心是十二部經之宗。答曰。如來於一切經中說一切罪福一切因緣果報。成引一切山河大地草木等種種雜物起無量無邊譬喻。或現無量神通種種變化者.只是佛為教導無智慧眾生.有種種欲心心行萬差。是故如來隨其心門引入一乘。

 

물어 말하길, 『근본 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십이부경十二部經의 종지宗旨인 줄을 어떻게 압니까?』 답하여 말하길, 『여래如來가 모든 경전 가운데에 일체의 죄복罪福과 일체의 인연과보因緣果報에 대해 설하시며, 일체의 산과 강과 대지와 초목 등 갖가지 잡다한 물物들을 인용해서 한량없고 갓 없는 비유를 일으키시며, 혹은 한량없는 신통神通과 갖가지 변화變化로 나타내신 것은, 다만 이것은 부처님께서 지혜 없는 중생들을 가르쳐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갖가지 욕심과 마음의 행하는 바가 만 가지로 차별이 있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如来는 그 마음을 따라서 법문法門으로 인도하여 일승一乘에 들게 하신 것이다.

 

 

我既體知眾生佛性本來清淨如雲底日。但了然守本真心妄念雲盡慧日即現。何須更多學知見所生死苦一切義理及三世之事。譬如磨鏡塵盡明自然現.則今於無明心中學得者終是不堪。若能了然不失正念。無為心中學得者此是真學。雖言真學竟無所學。何以故。我及涅槃二皆空故。更無二無一。故無所學。法性雖空.要須了然守本真心。妄念不生。我所心滅故.涅槃經云。知佛不說法者是名具足多聞。故知守本真心是十二部經之宗也。

 

나는 이미 중생의 불성佛性이 본래부터 청정清淨하지만 구름이 깔려 있는 태양과 같아서, 다만 요연了然히 근본 참 마음을 지켜 망념妄念의 구름이 다하면 지혜의 달은 곧 나타난다는 것을 체득體得하여 알고 있다. 어찌 모름지기 생사生死의 고통인 바 지견知見인 모든 의리義理와 삼세三世의 일들을 더욱 많이 배워야 하겠는가. 비유하기를, 거울을 문질러 티끌이 다하면 밝음은 자연히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지금 무명심無明心 가운데에서 배워 얻으려 함은 결국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무명심으로 배워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요연了然히 정념正念을 잃지 않을 수 있어서, 무위심無為心 가운데에 배워 얻는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진실한 배움[真學]이다. 비록 진실한 배움[真學]이라고는 말하나 필경에는 배울 바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나[我]와 열반涅槃의 이 둘이 모두 공空한 까닭이며, 더욱이 둘도 없고 하나도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배울 바가 없는 것이다. 법성法性은 비록 공空하나 반드시 요연了然히 근본 참 마음을 지켜야 하나니, 망념妄念이 나지 아니하며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는 까닭이다. <열반경涅槃經>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설법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 이름이 ‘다문多聞을 구족具足함’이다[若知如來常不說法 是名具足多聞]」 하였다. 그러므로 근본 참마음을 지키는 것[守本真心]이 이 십이부경十二部經의 종지宗旨인 것을 알 것이다.』 

 

 

問曰。何知守本真心是三世諸佛之祖。答曰。三世諸佛皆從心性中生。先守真心妄念不生我所心滅後得成佛。故知守本真心是三世諸佛之祖也。上來四種問答若欲廣說何窮。吾今望。得汝自識本心是佛。是故慇懃勸汝。千經萬論莫過守本真心。是要也。吾今努力按法華經.示汝大車寶藏明珠妙藥等物.汝自不取不服窮苦奈何.會是妄念不生我所心滅.一切功德自然圓滿。不假外求歸生死苦。於一切處正念察心。莫愛現在樂種未來苦。自誑誑他不脫生死。努力努力。今雖無常共作當來成佛之因。莫使三世虛度狂喪功夫。經云。常處地獄如遊園觀。在餘惡道如己舍宅。我等眾生今現如此.不覺不知驚怖殺人了無出心。奇哉苦哉。

 

물어 말하길, 『근본 참 마음을 지키는 것[守本真心]이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조상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답하여 말하길, 『삼세제불三世諸佛은 모두가 심성心性 가운데를 좇아서 나나니, 먼저 참 마음[真心]을 지키면 망념妄念이 나지 아니하여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한 뒤에 성불成佛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근본 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조상인 것을 알 것이다. 위로부터 이어진 네 가지 문답을 만약 널리 설하고자 한다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내가 이제 바라는 것은, 그대가 스스로 ‘근본 마음이  부처[本心是佛]라는 것’을 알아 얻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은근히 그대에게 권하노니, 천경千經과 만론萬論이 근본 참마음[根本眞心]을 지키는 것만 못하니라. 이것이 요긴한 대목이니라. 

 

내가 이제 노력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살펴서 그대에게 큰 수레 · 보배 창고 · 밝은 구슬 · 묘한 약 등의 물건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대가 그것을 취하지 않고 먹지 않는다면 궁핍한 고통을 어찌하겠는가? 마땅히 망념妄念이 나지 아니하여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면 일체의 공덕功德은 자연히 원만圓滿해서, 밖으로 구하여 생사의 고통으로 귀결歸結됨[外求歸生死苦]을 가차假借하지(빌리지) 않느니라. 일체처一切處에 정념正念으로 마음을 살필지니, 현재의 즐거움에 애착해서 미래의 괴로운 씨앗을 심지 말라. 스스로 속이고 남을 속여서는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나니,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지금은 비록 무상無常할지라도 함께 당래當來에 성불成佛할 인因을 지어야지, 삼세三世를 헛되이 보내며 미쳐서 잃어버리게 되는 공부를 하지 말라. 경經[法華經]에 이르되, 「늘 지옥에 있으면서 정원을 노니는 것처럼 보고, 나머지 악도惡途에 있으면서 제 집처럼 여긴다.」 하였다. 우리같은 중생들은 지금 현재가 이와 같거늘, 사람을 죽이는[諸煩惱賊 常伺殺人] 두려움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여 끝내 벗어나려는 마음이 없으니, 기이하고도 괴롭도다.

 

 

若有初心學坐禪者。依觀無量壽經.端坐正念閉目合口。心前平視隨意近遠。作一日想.守真心念念莫住。即善調氣息.莫使乍麁乍細。則令人成病苦。夜坐禪時或見一切善惡境界。或入青黃赤白等諸三昧。或見身出大光明。或見如來相。或見種種變化。但知攝心莫著並皆是空。妄想而見也。

 

만약 초심初心으로 좌선坐禪을 배우려는 이가 있다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의지하되, 단정히 앉아 정념正念을 지니며, 눈을 감고 입을 닫으며, 마음은 앞을 평상平常으로 바라보되 뜻에 따라(자유롭게) 멀고 가깝게 하며, 한결같이 일상관日想觀을 지어  참 마음[真心]을 지켜서 생각 생각 머무르지 말 것이며, 곧 기식氣息을 잘 조절하되 어떤 때는 거칠고 어떤 때는 세밀하게 하지 말라. 그러면 사람으로 하여금 병고病苦를 이루게 하리라. 밤에 좌선坐禪할 때에는 혹 일체의 선악경계善惡境界(좋고 나쁜 경계)를 보거나, 혹 청황적백青黃赤白(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등의 온갖 삼매三昧에 들어가거나, 혹은 몸에서 대광명大光明이 나는 것을 보거나, 혹은 여래如來의 상相을 보거나, 혹은 갖가지 변화를 보게 될 것이나, 다만 섭심(攝心, 마음을 거두어들임)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나란히 모두가 이 공空함이라 망상妄想으로 보인 것임을 알 것이다.

 

* 일상관日想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십육관문十六觀門중의 하나로, 해가 서쪽으로 지는 모습을 보면서 극락정토를 관상觀想한다.

 

 

經云。十方國土皆如虛空三界虛幻.唯是一心作。若不得定不見一切境界者亦不須怪。但於行住坐臥中.常了然守本真心。會是妄念不生我所心滅.一切萬法不出自心。所以諸佛廣說如許多言教譬喻者。只為眾生行行不同遂使教門差別。其實八萬四千法門三乘八道位體七十二賢行宗。莫過自心是本也。

 

경經[維摩經]에 이르되, 「시방十方의 국토國土는 다 허공과 같고 삼계三界는 빈 꼭두각시여서 오직 한 마음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정定을 얻지 못하고 온갖 경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다못 행주좌와行住坐臥(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하는 가운데에 늘 요연了然히 근본 참 마음을 지키면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하여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함에 일체一切의 만법萬法이 마음으로부터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부처님께서 널리 설하신 허다許多한 언교言教와 비유譬喻와 같은 것이, 단지 중생의 행하는 바가 같지 아니하여 마침내 교문教門으로 하여금 차별이 있게 한 것이니,기실其實(그 실제에 있어선)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과 삼승팔도위체三乘八道位體와 칠십이현행종七十二賢行宗이 ‘자기 마음이 근본[自心是本]’이라는 것에서 넘어서는 것이 없다. 

 

 

若能自識本心。念念磨鍊莫住者.即自見佛性也。於念念中常供養十方恒沙諸佛。十二部經念念常轉。若了此心源者.一切心義自現.一切願具足一切行滿一切皆辦.不受後有。會是妄念不生我所心滅。捨此身已.定得無生不可思議。努力莫造大[莫造作]。如此真實不妄語難可得聞。聞而能行者恒沙眾中莫過有一。行而能到者億叉劫中無生一人。好好自安自靜善調諸根就視心源。恒令照燎清淨勿令無記心生。

 

만약 능히 스스로 근본 마음[本心]을 알아서 생각 생각 닦고 단련하여 머무르지 않게 할 수 있는 자라면 곧 스스로 불성佛性을 보나니, 생각 생각 가운데에 항상 시방十方의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供養함이요, 십이부경十二部經을 생각 생각에 항상 굴리는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의 근원을 깨치는 자는 일체 마음의 뜻이 스스로 드러나고, 일체의 원력願力이 구족具足하며, 일체의 행行이 원만圓滿하고, 일체가 다 명백하여서, 후유後有(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 망념妄念이 나지 아니하여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면 이 몸을 버린 것이니, 결정코 무생無生의(남이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얻는다. 노력하되 莫造大하라[莫造作, 지어서 만들려 하지 말라]. 이와 같은 진실하고 망령되지 않은 말은 얻어 듣기 어렵고, 듣고서 능히 행하는 자는 항하사수恒河沙數의 대중 가운데에 하나 있지도 못하며, 행하고서 능히 도달한 자는 억만겁億萬劫 가운데 한 사람 있기가 어렵다. 좋게 스스로 편안하고 스스로 고요하여 모든 육근六根을 잘 조절하며 마음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언제나 청정清淨을 밝게 비추어서 무기심無記心이 나지 않도록 하라.』 

 

 

問曰。何名無記心。答曰。諸攝心人為緣外境麁心小息。內鍊真心心未清淨時。於行住坐臥中恒懲意看心。猶未能了了清淨獨照心源。是名無記心也。亦是漏心猶不免生死大病。況復總不守真心者。是人沈沒生死苦海。何日得出。可憐。努力努力。經云。眾生若情誠不內發者。於三世縱值恒沙諸佛無所能為。經云。眾生識心自度.佛不能度眾生。若佛能度眾生者。過去諸佛恒沙無量。何故我等不成佛也。

 

물어 말하길, 『무엇을 이름하여 무기심無記心이라 합니까?』  답하여 말하길, 『모든 섭심攝心하는(마음을 거두어 들이는) 사람은 반연攀緣하는 바깥 경계의 머트러운 생각이 조금 쉬어지게 되었으나, 안으로는 참 마음을 단련함에 있어서 마음이 아직 청정한 때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가운데에 항상 뜻을 그쳐서(조용한 경지에 빠져서) 그것을 들여다 보고 있으나, 오히려 그것은 요요청정了了淸淨하여 홀로 마음의 근원[心源, 自己面目]을 비추지는 못한 것이니(그것은 확실하게 청정본연淸淨本然의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니), 이 이름이 ‘무기심無記心’이다. 또한 이것은 유루有漏의 마음이니, 오히려 생사生死의 대병大病을 면免하지 못한 것이어늘, 하물며 다시 참 마음을 지키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랴. 이러한 사람은 생사고해生死苦海에 침몰沈沒하여 어느 날에 뛰쳐나올 기약期約이 있겠는가? 가련하도다. 그러니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경經에 이르되,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이 안으로부터 돈발頓發하지 아니한 자는, 삼세三世에 설사 항하사의 모든 부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어찌할 바가 없느니라.」 하였고, 경經에 이르되,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서 자기自己가 자기를 제도濟度해야지,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한다.」 하였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항하사수恒河沙數와 같이 그지없이 계시거늘, 무슨 까닭으로 우리들은 아직도 성불成佛을 못하였겠는가? 

 

 

只是情誠不自內發。是故沈沒苦海。努力努力。勤求本心勿令妄漏。過去不知已過亦不及。今身現在有遇得聞妙法。分明相勸決解此語。了知守心是第一道。不肯發至誠心.求願成佛受無量自在快樂。乃始轟轟隨俗貪求名利。當來墮大地獄中受種種苦惱.將何所及。奈何奈何。努力努力。

 

다만 이것은 정성情誠이 안으로부터서 돈발頓發하지 못한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생사고해生死苦海에 침윤浸潤하는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부지런히 본심本心을 구하여 망령되이 새지 않도록 하라. 과거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지나갔으며 또한 잡을 수도 없으나, 지금 이 몸은 현재 이 묘법妙法을 만나 듣게 되었으니, 분명히 서로 권고勸告해서 결정코 이 법어法語를 깊이 이해하여, 분명하게 본심本心을 지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제일第一의 도道이니라. 지극한 정성精誠을 발發하려 하지 아니하고서, 막연히 성불成佛하기를 바라고 한량없는 자재해탈自在解脫의 쾌락快樂을 구하며 시끄러운 세속의 탐심을 따라 명예나 이끗을 구한다면, 당래當來(미래)에 대지옥大地獄에 떨어져서 갖가지 고통과 뇌로움을 받게 됨이 어디에까지 이르를 것인가? 어찌하고 어찌하랴?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但能著破衣飱麁食。了然守本真心佯癡不解語。最省氣力而能有功。是大精進人也。世間迷人不解此理。於無明心中多涉艱辛廣修相善.望得解脫乃歸生死。若了然不失正念而度眾生者。是有力菩薩。分明語汝等守心第一。若不勤守者甚癡人也。不肯現在一生忍苦。欲得當來萬劫受殃。聽汝更不知何囑。八風吹不動者真是珍寶山也。若知果體者.但對於萬境起恒沙作用巧辯若流.應病與藥而能妄念不生我所心滅者.真是出世丈夫。如來在日歎何可盡。吾說此言者至心勸汝。不生妄念我所心滅.則是出世之士。

 

다만 능히 헤어진 옷을 입고, 거칠고 머트러운 음식을 먹으면서, 요연了然히 근본 참마음을 지키되,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거짓 바보가 된다면, 이는 가장 기력氣力은 적게 들이면서 능히 공력功力이 있는 것이니(가장 효과적으로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대정진인大精進人이다. 세간世間의 미혹한 사람은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무명심無明心 가운데에 갖은 혹독한 고통을 겪으면서 널리 상相에 나타나는 그러한 선善을 닦음으로 해서 해탈도解脫道를 바라나니, 그러다가 결국은 생사生死의 고통에 귀결歸結되고 마느니라. 만약 요연了然히 정념正念을 잃지 아니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자라면, 이것이 대력보살大力菩薩이니라. 

 

분명히 그대들에게 ‘마음 지키는 것이 제일第一’임을 말하나니, 만약 부지런히 지키지 않는 자는 심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재 한 생의 고통 참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당래當來에 만겁萬劫동안의 재앙을 얻고자 하는구나. 다시 더 어떻게 부탁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그대에게 듣고자 하노라. 팔풍八風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 보배산이다. 만약 과체果體를 아는 자가 다만 만가지 경계境界를 대對함에 항사작용恒沙作用의 변재辯才를 일으킴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병病에 응應하여 약藥을 주되 능히 망념妄念이 나지 아니하며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게 할 수 있는 자라면,진실로 이 세간世間을 뛰어난 대장부大丈夫이니라. 여래如來가 매일같이 계셔서 찬탄讚歎한다 하더라도 어찌 다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이러한 말을 설하는 것은 지극한 마음으로 그대에게 권고하는 것이니, 망념妄念이 나지 아니하여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면 바로 이것이 세간世間을 뛰어난 보살[士]이니라.』 

 

 

問曰。云何是我所心滅。答曰。為有小許勝他之心。自念我能如此者。是我所心涅槃中病.故涅槃經曰。譬如虛空能容萬物。而此虛空不自念言我能含容如是。此喻我所心滅趣金剛三昧。

 

물어 말하길, 『무엇을 일러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였다’합니까?』 답하여 말하길, 『남을 이기고자(남보다 내가 옳다)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허용함이 있게 되면, 스스로 ‘나는 능히 이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아소심我所心은 열반涅槃 가운데의 병病이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 이르되, 「비유컨댄 허공이 능히 만물萬物을 받아들일 수 있으되 이 허공이 ‘나는 능히 받아들여 품는 것이 이와 같다’라고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 이는 아소심我所心이 멸滅하여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나아감을 비유하신 것이다.』 

 

 

問曰。諸行人求真常寂者。只樂世間無常麁善。不樂第一義諦。真常妙善其理未見。只欲發心緣義遂思覺心起則是漏心。只欲亡心則是無明昏住又不當理。只欲不止心不緣義即惡取空。雖受人身行畜生行。爾時無有定慧方便。而不能解了明見佛性。只是行人沈沒之處。若為超得到無餘涅槃。願示真心。

 

물어 말하길, 『모든 수행하는 사람이 참되고 떳떳한 고요함[真常寂]을 구하는 것은, 다만 세간世間의 무상無常하고 거친 선善만을 좋아하고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되고 떳떳한 묘선妙善[真常妙善]의 그 이치를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발심發心하여 뜻을 반연攀緣해서 마침내 생각으로 깨달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는 새어나가는 마음[漏心]입니다. 다만 마음을 없애고자 하면 이것은 무명無明의 혼혼한 곳[昏沈]에 머무는 것이니 이 또한 이치에 합당合當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을 멈추지도[止] 아니하고 뜻을 반연攀緣하지도 아니하고자 하면 악취공惡取空(악하게 공을 취함, 단멸斷滅에 집착함)이니 비록 사람 몸을 받았으되 행行하는 것은 축생畜生의 행行인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정혜定慧의 방편方便이 없어서 깨달아 밝게 불성佛性을 볼 수가 없으니, 다만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깊이 빠져드는 곳입니다. 만약 이를 초월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를 수 있다면, 원컨대 참 마음[真心]을 보여주소서. 

 

 

答曰。會是信心具足志願成就緩緩靜心。更重教汝。好自閑靜身心一切無所攀緣。端坐正念善調氣息.懲其心不在內不在外不在中間。好好如如穩看看熟.則了見此心識流動。猶如水流陽焰曄曄不住。既見此識時唯是不內不外。緩緩如如穩看看熟.則返覆銷融虛凝湛住。其此流動之識颯然自滅。滅此識者乃是滅十地菩薩眾中障惑。此識滅已其心即虛凝寂淡泊皎潔泰然。吾更不能說其形狀。

 

답하여 말하길, 『 마땅히 믿는 마음[信心]이 갖추어지면 뜻과 원력이 성취되어 서서히 마음이 고요해질 것이다. 다시 거듭 그대에게 가르쳐주노니, 좋게 스스로 몸과 마음을 한가하고 고요히 해서 일체의 반연攀緣하는 바가 없게 하고, 단정히 앉아 정념正念을 가져서 기식氣息을 잘 조절하여 구하는 그 마음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아서 좋고 좋으며 여여如如하고 평온하여 간看하여 나아가는 것이 순숙純熟해지면, 이 심식心識의 흐름과 움직임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마치 흐르는 물에 아지랑이가 찬란히 빛나며 머물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미 이러한 식識을 본 때에는 오직 이 안도 아니요 밖도 아니며 완완緩緩하고 여여如如해서 평온히 간看하여(보며) 나아감이 순숙純熟해진 것이다. 녹아내리기를 반복하며 허공에 응어리져 맑게 머무르다가 이러한 흐름과 움직임의 식識이 홀연히 스스로 멸滅하게 되는데, 이 식識을 멸滅한 자는 곧 십지보살중十地菩薩眾 가운데의 장혹障惑을 멸滅하게 된다. 이 식識이 멸滅해버린 그 마음은 곧 비고 응적凝寂하고 담박淡泊하며 교결皎潔하고 태연泰然하나니, 나는 다시 이 이상 그 형상形狀을 설해줄 수가 없다. 

 

 

汝若欲得者。取涅槃經第三卷中金剛身品及維摩經第三卷見阿閦佛品。緩緩尋思細心搜撿熟看。若此經熟實得能於行住坐臥及對五欲八風不失此心者。是人梵行已立所作已辦。究竟不受生死之身。五欲者色聲香味觸。八風者利衰毀譽稱譏苦樂。此是行人磨鍊佛性處。甚莫怪今身不得自在。

 

그대가 만약 (이러한 경지를) 얻고자 하는 자라면, <열반경涅槃經> 제 삼 권 가운데의 [금강신품金剛身品]과 <유마경維摩經> 제 삼 권의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을 가져서 느긋하고 깊이 사유思惟하고 자세한 마음으로 찾아 살펴서 익숙해지도록 보라. 만약 이 경經에 순숙純熟해서 실답게 깨달아 능히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오욕五欲과 팔풍八風을 상대하여 이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자라면, 이 사람은 청정한 행[梵行]이 이미 섰으며 짓는 바가 이미 갖추어져서 구경究竟에는 생사生死의 몸을 받지 않느니라. 오욕五欲이라 함은 물질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느낌[色聲香味觸]이요, 팔풍八風이라 함은 이로움과 쇠퇴함과 헐뜯음과 명예와 칭찬과 비웃음과 괴로움과 즐거움[利衰毀譽稱譏苦樂]이다. 이것이 수행하는 사람이 불성佛性을 닦고 단련하는 곳이니, 지금 이 몸이 자재自在를 얻지 못함을 심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經曰。世間無佛住處菩薩不得現用。要脫此報身。眾生過去根有利鈍不可判。上者一念間。下者無量劫。若有力時隨眾生性起菩薩善根。自利利他莊嚴佛土。要須了四依乃窮實相。若依文執則失真宗。諸比丘等.汝學他出家修道。此是出家出生死枷。是名出家。

 

경에 이르되, 「세간世間은 부처가 머물 곳이 없고 보살이 작용을 드러낼 수 없다.」 하였다. 반드시 이 보신報身을 벗어나고자 함에, 중생은 과거의 근기根機가 날카롭고 둔함이 있으므로 가히 판단할 수는 없으나, 상근기上根機는 일념간一念間이요 하근기下根機는 무량겁無量劫이다. 힘이 있을 때에 중생衆生의 성性을 따라 보살菩薩의 선근善根을 일으켜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불토佛土를 장엄莊嚴하라. 모름지기 사의법四衣法을 요달了達해서 실상實相을 궁구窮究하기를 요要하나니, 만약 문자를 집착해서 의지하면 참된 진종真宗을 잃으리라. 모든 비구比丘들이여, 그대들이 타방他方으로 집을 나와 도道를 닦으며 배우려는 것은, 바로 이 집을 나온 것[出家]이 생사의 칼[枷, 목을 구속하는 형틀]에서 뛰쳐나고자 한 것이니, 이것이 이름하여 출가出家이니라. 

 

 

 

正念具足修道得成。乃至解身支節。臨命終時不失正念。即得成佛。弟子上來集此論者。直以信心依文取義作如是說。實非了了證知。若乖聖理者願懺悔除滅。若當聖道者迴施眾生。願皆識本心一時成佛。聞者努力當來成佛。願在前度我門徒。

 

정념正念을 구족具足하여 도道를 닦아 이루면, 나아가 몸 마디마디가 떨어져나가는 죽음을 당하는 때에도 정념正念을 잃지 않아 곧 성불成佛하리라. 제자弟子가(산승山僧이) 상래上來로(위로부터서) 이 논論을 집필한 것은, 직접 신심信心으로써 문자에 의지해서 뜻을 취取하여 이와 같은 설說을 지은 것이지, 실로 분명하게 증득證得하여 안 것이 아니다. 만약 성인의 이치를 어그러뜨린 것이 있다면 원컨대 참회하노니 멸滅하여 제거해주길 바란다. 만약 성인의 도道에 합당合當하다면 중생에게 회향廻向하여 보시布施하고자 하노라. 원컨대 모두가 근본 마음을 알아 일시一時에(함께) 성불成佛하라. 이 말을 듣는 자는 노력해서 당래當來에 성불成佛하여 우리 문도부터 먼저 제도해주길 바란다.』 

 

 

問曰。此論從首至末。皆顯自心是道。未知果行二門是何門攝。答曰。此論顯一乘為宗。然其至意道迷趣。解自免生死。乃能度人直言自利不說利他。約行門攝。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指天地為誓。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물어 말하길, 『이 논論이 첫머리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마음이 곧 도道’라는 것을 드러내셨는데, 과果와 행行의 두 문 가운데에 이것은 어느 문에 포섭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답해 말하길, 『이 글은 일승一乘으로 종宗을 삼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 지극한 뜻은 미迷한 이를 인도引導하여 해탈解脫로 나아가 스스로 생사生死를 면免하고 이에 능히 남도 제도할 수 있게 한 것이니, 바로 말하자면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것[自利]이지 남을 이롭게 하는 것[利他]은 설說하지 않았다. 대체로 행문行門에 포섭되나니, 만약 사람이 이 글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자가 있다면 곧 성불이 바로 앞에 있느니라. 만약 내가 그대를 속이는 것이라면 당래當來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니, 하늘과 땅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의 밥이 될 것이다.

 

 

 

 

 

 

- 最上乘論 一卷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

 

 

 

爾時世尊問維摩詰 「汝欲見如來 為以何等觀如來乎?」

그때에 부처님께서 유마힐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여래를 보고자 하였는데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

 

維摩詰言 「如自觀身實相 觀佛亦然。

유마힐은 대답하였다. “제가 이 몸의 실상實相이 공空함을 보는 것과 같이 부처님을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我觀如來前際不來 後際不去 今則不住。

저는 여래를 과거에서도 오지 않고, 미래로도 가지 않으며, 현재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봅니다.

 

不觀色 不觀色如 不觀色性。

색色을 보지 않고, 색과 성공(性空-色如)을 보지 않으며, 색의 자성[色性]을 보지 않습니다.

 

不觀受 想 行 識 不觀識如 不觀識性.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등을 보지 않고, 식識 등과 성공[識如]을 보지 않으며, 식 등의 자성[識性]을 보지 않습니다.

 

非四大起 同於虛空。

사대四大가 일어난 것이 아니며, 허공虛空과 같습니다.

 

六入無積 眼 耳 鼻 舌 身 心已過.

육입六入은 쌓여 모임이 없으니, 안 · 이 ·비 · 설 · 신 · 의[心]를 이미 초월 했습니다.

 

不在三界 三垢已離。順三脫門.

삼계三界에 있지 않고, 3독의 더러움[三垢]을 이미 떠났으며, 3해탈문三脫門을 수순합니다.

 

具足三明 與無明等。

삼명三明을 모두 갖추었지만 무명無明과 평등하여 다르지 않습니다.

 

不一相 不異相 不自相 不他相 非無相 非取相。

하나의 모습[一相]도 아니고, 다른 모습[異相]도 아닙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自相]도 아니고, 타자의 모습[他相]도 아닙니다. 모습이 없는 것[無相]도 아니고, 모습을 취하는 것[取相]도 아닙니다.

 

不此岸 不彼岸 不中流 而化眾生。

이 언덕에도 머무르지 않고, 저 언덕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강 중간의 흐름[中流]에도 머무르지 않으면서 중생을 교화합니다.

 

觀於寂滅 亦不永滅。

항상 적멸을 관하면서도, 영원히 적멸에 들어가지는 않고 세간에 들어갑니다.

 

不此不彼 不以此 不以彼。不可以智知 不可以識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 한 면을 붙들어 쥐어도 안 되고 저 한 면을 붙들어 쥐어도 안 됩니다. 지혜로써 이해해서도 안 되고 의식으로써 추측해서도 안 됩니다.

 

無晦無明 無名無相 無強無弱 非淨非穢。不在方 不離方 非有為 非無為。無示無說。不施不慳 不戒不犯 不忍不恚 不進不怠 不定不亂 不智不愚 不誠不欺 不來不去 不出不入.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습니다.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습니다. 강함도 없고 약함도 없습니다. 깨끗함도 아니고 더러움도 아닙니다. 어떤 방위에 있지도 않고 어떤 방위를 떠나지도 않습니다. 유위법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닙니다. 보여줌도 없고 설함도 없습니다. 보시도 하지 않고 아끼지도 않습니다.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계율을 범하지도 않습니다. 인욕하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습니다. 정진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습니다. 선정 속에도 있지 않고 산란하지도 않습니다. 지혜롭지도 않고 우둔하지도 않습니다. 진실하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습니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一切言語道斷。

요컨대 모든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습니다.

 

非福田 非不福田 非應供養 非不應供養 非取非捨。非有相 非無相。

복전도 아니고 복전 아님도 아닙니다. 공양해야 할 것도 아니고 공양하지 않아야 할 것도 아닙니다. 취하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형상[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同真際 等法性。

진제眞際와 같고 법성法性과 평등합니다.

 

不可稱 不可量 過諸稱量。

일컬을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서 모든 일컬음과 헤아림을 뛰어넘었습니다.

 

非大非小 非見非聞 非覺非知.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離眾結縛。

온갖 결박을 떠났습니다.

 

等諸智 同眾生.

모든 지혜에 평등하고, 중생과 같습니다.

 

於諸法無分別。一切無失.

모든 법에 대하여 분별함이 없으며, 온갖 것을 잃음이 없습니다.

 

無濁無惱 無作無起 無生無滅。無畏無憂 無喜無厭無著。無已有 無當有 無今有。

탁악세濁惡世도 없고 번뇌도 없습니다. 지음[作]도 없고 일으킴[起]도 없습니다.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습니다. 두려워함도 없고 근심함도 없습니다. 기뻐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습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현재도 없습니다.

 

不可以一切言說分別顯示。

요컨대 어떤 언어문자로도 분별하고 나타내 보일 수가 없습니다.

 

世尊 如來身為若此 作如是觀。以斯觀者 名為正觀 若他觀者 名為邪觀。」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은 이와 같으므로 이와 같이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정관正觀이라고 하고, 만약 다르게 본다면 사관邪觀이라고 합니다.”

 

爾時舍利弗問維摩詰 「汝於何沒而來生此?」

그때에 사리불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서 죽어서[沒)]이 세계로 와서 태어났습니까?”

 

維摩詰言 「汝所得法有沒生乎?」

유마힐이 말하였다. “그대가 얻은 법法에는 죽음과 태어남이 있습니까?”

 

舍利弗言 「無沒生也。」

사리불이 말하였다. “죽음과 태어남이 없습니다.”

 

「若諸法無沒生相 云何問言 『汝於何沒而來生此?』 於意云何?譬如幻師 幻作男女 寧沒生耶?」

유마힐이 말하였다. “만약 온갖 법이 생멸이 없다면, 그대는 어찌해서 나에게 ‘그대는 어디에서 죽어서 이 세계로 와서 태어났느냐?’ 고 물었습니까? 그대 생각은 어떻습니까? 비유컨대 마술사가 마술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냈다면, 설마 그들이 죽어 태어날까요?”

 

舍利弗言 「無沒生也。

사리불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죽음과 태어남이 없습니다.”

 

汝豈不聞佛說諸法如幻相乎?」

유마힐이 말하였다. “그대는 부처님께서 온갖 법은 환상幻相과 같다 라고 설하신 것을 들어보지 않았던가요?”

 

答曰 「如是. 若一切法如幻相者 云何問言 『汝於何沒而來生此?』 舍利弗 沒者為虛誑法 敗壞之相 生者為虛誑法 相續之相。菩薩雖沒 不盡善本 雖生 不長諸惡。」

사리불이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유마힐이 말하였다. “만약 온갖 법이 환상幻相과 같다면, 어째서 ‘그대는 어느 곳에서 죽어서 이 세계에 와 태어났습니까?’ 라고 물었습니까? 사리불님, 죽는다[沒]는 것은 허망부실한 법이 파괴되는 현상입니다. 생겨난다는 것은 허망부실한 법이 상속하는 현상입니다. 보살은 비록 죽더라도 선근善本을 없애지 않으며, 비록 태어나더라도 온갖 악을 증장增長하지 않습니다.”

 

是時佛告舍利弗 「有國名妙喜 佛號無動。是維摩詰於彼國沒 而來生此。」

이 때에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묘희국妙喜國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부처님의 명호는 무동無動이다. 이 유마힐은 그 나라에서 죽어서 이곳에 와서 태어난 것이니라."

 

舍利弗言 「未曾有也。世尊 是人乃能捨清淨土 而來樂此多怒害處。」

사리불이 말하였다.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분이 청정한 국토를 버리고 성냄과 해침이 많은 이곳으로 와서 태어나 즐길 수 있다니 말입니다.”

 

維摩詰語舍利弗 「於意云何? 日光出時與冥合乎?」

유마힐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대 생각은 어떠합니까? 햇빛이 날 때 어둠과 결합할까요?”

 

答曰 「不也 日光出時 即無眾冥。」

사리불이 답하였다. “아닙니다. 햇빛이 날 때는 모든 어둠이 사라져버립니다.”

 

維摩詰言 「夫日何故行閻浮提?」

유마힐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태양은 무슨 까닭으로 염부제(閻浮提)로 운행하여 올까요?”

 

答曰 「欲以明照 為之除冥。」

사리불이 답하였다. “밝게 비춤으로써 어둠을 없애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維摩詰言 「菩薩如是 雖生不淨佛土 為化眾生故 不與愚闇而共合也 但滅眾生煩惱闇耳」

유마힐은 말하였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비록 청정하지 못한 불국토에 태어나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므로 결코 중생의 어리석음의 어둠에 휩쓸려 오염되지 않고, 다만 중생의 번뇌의 어둠을 없앨 뿐입니다.”

 

是時大眾渴仰 欲見妙喜世界無動如來 及其菩薩 聲聞之眾。

그 때에 대중들은 묘희국의 무동여래無動如來와 그 보살과 성문의 대중들을 목마르듯 우러르며 보고 싶어 했다.

 

佛知一切眾會所念 告維摩詰言 「善男子 為此眾會 現妙喜國無動如來 及諸菩薩 聲聞之眾 眾皆欲見。」

부처님께서는 모든 대중들의 모임이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유마힐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대중들의 모임을 위하여 묘희국의 무동여래와 보살들과 성문들의 대중을 나타나게 하라. 대중들 모두가 보고 싶어 하노라.”

 

於是維摩詰心念 「吾當不起于座 接妙喜國 鐵圍山川溪谷江河 大海泉源 須彌諸山 及日月星宿 天龍鬼神梵天等宮 并諸菩薩 聲聞之眾 城邑聚落 男女大小 乃至無動如來 及菩提樹 諸妙蓮華 能於十方作佛事者 三道寶階從閻浮提 至忉利天 以此寶階 諸天來下 悉為禮敬無動如來 聽受經法。閻浮提人 亦登其階 上昇忉利 見彼諸天。妙喜世界成就如是無量功德 上至阿迦膩吒天 下至水際 以右手斷取 如陶家輪 入此世界 猶持華鬘 示一切眾。」

이 때에 유마힐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묘희국을 이 사바세계로 이끌어와야겠다. 그 철위산(鐵圍山). 산천. 계곡. 강하江河. 큰 바다. 수원泉源. 수미산들과 해와 달. 별. 하늘. 용. 귀. 신. 범천 등의 궁전과 모든 보살들과 성문들, 성읍城邑. 취락聚落과 남녀노소들, 더 나아가 무동여래와 보리수, 갖가지 미묘한 연꽃 등, 시방에서 불사佛事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함께 옮겨와야겠다. 또 세 길의 보배 계단을 염부제閻浮提로부터 도리천忉利天까지 끌어올려, 그 계단으로 천인들이 내려와 모두 무동여래에게 예경하고 경법經法을 듣고 받게 하겠다. 그리고 염부제의 사람들도 그 계단으로 도리천에 올라가 저 천인들을 보게 하고, 묘희세계가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한 것을 보게 하겠다. 그런 다음 묘희국을 위로는 아가니타천阿迦膩吒天으로부터 아래로는 수륜[水際]에 이르기까지, 오른손으로 끊어 취하기를 마치 도공[陶家]이 고령토를 잡아 쥐듯이 하여 이 세계로 옮겨서 마치 꽃다발을 손에든 것처럼 보여 주어야겠다.’

 

作是念已 入於三昧 現神通力以 其右手斷取妙喜世界 置於此土。

이런 생각을 하고는 삼매에 들어가 신통력을 나타내어 그 오른손으로 묘희세계를 끊어 취해서 이 사바세계 땅 위에 옮겨 놓았다.

 

彼得神通菩薩及聲聞眾 并餘天 人 俱發聲言 「唯然世尊 誰取我去 願見救護。」

이미 신통력을 얻은 묘희국의 보살들과 성문 대중들과 그 밖의 천인들은 함께 소리 내어 말하였다. “여보십시오! 세존이시여, 누가 우리를 집었습니까? 보시고 구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無動佛言 「非我所為 是維摩詰神力所作。」

무동불無動佛이 말하였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유마힐이 신통력으로 하는 것이다.”

 

其餘未得神通者 不覺不知己之所往 妙喜世界 雖入此土 而不增減 於是世界亦不迫隘 如本無異。

그 나머지 아직 신통력을 얻지 못한 자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였다. 묘희세계가 비록 이 사바세계 안으로 옮겨져 들어왔지만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았으며 이 묘희세계도 좁아지지 않아, 각자 본래와 같이 다름없었다.

 

爾時釋迦牟尼佛告諸大眾 「汝等且觀妙喜世界無動如來 其國嚴飾 菩薩行淨 弟子清白。」

그때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모든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묘희세계의 무동여래와, 그 나라의 장엄한 장식과, 보살행의 청정함과, 제자들의 3업이 청백함을 보라.”

 

皆曰 「唯然 已見。」

모두가 말하였다. “예! 이미 보았습니다.”

 

佛言 「若菩薩欲得如是清淨佛土 當學無動如來所行之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청정한 불국토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무동여래가 행한 도를 배워야 하느니라.”

 

現此妙喜國時 娑婆世界十四那由他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皆願生於妙喜佛土。

이 묘희국이 나타났을 때, 이 사바세계의 14나유타那由他 명의 사람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모두 묘희불국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였다.

 

釋迦牟尼佛即記之曰 「當生彼國。」

석가모니부처님은 곧 그들에게 수기를 주어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장래에 모두 저 나라에 태어나리라.”

 

時妙喜世界於此國土所應饒益 其事訖已 還復本處 舉眾皆見。

그때에 묘희세계는 이 세계에서 중생을 응당 이롭게 해야 할 일이 끝나자 본래의 처소로 되돌아갔으며, 모든 대중들은 다 그것을 보았다.

 

佛告舍利弗 「汝見此妙喜世界及無動佛不?」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묘희세계와 무동불을 보았는가?”

 

「唯然 已見 世尊 願使一切眾生得清淨土 如無動佛 獲神通力 如維摩詰。世尊 我等快得善利 得見是人親近供養。其諸眾生 若今現在 若佛滅後 聞此經者 亦得善利 況復聞已信解 受持讀誦解說 如法修行。若有手得是經典者 便為已得法寶之藏 若有讀誦解釋其義 如說修行 即為諸佛之所護念 其有供養如是人者 當知即為供養於佛 其有書持此經卷者 當知其室即有如來 若聞是經能隨喜者 斯人即為取一切智 若能信解此經 乃至一四句偈 為他說者 當知此人 即是受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예,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무동불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얻게 하고, 유마힐 같은 신통력을 얻게 하기를 원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런 좋은 공덕이익을 얻었고, 특히 유마힐 거사 이분을 뵙고 친근히 하고 공양할 수 있으니 정말 통쾌합니다. 기타의 모든 중생들이 만약 지금 현재나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이 경전을 듣는다면 역시 좋은 공덕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하물며 듣고 나서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해설하며, 가르침대로[如法] 수행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손에 얻었다면, 그는 이미 법보의 창고를 얻은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송하고 그 뜻을 해석하고 설한대로 수행한다면, 그는 모든 부처님들에 의해 호념(護念)받을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사람을 공양한다면, 곧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베껴 써서 지닌다면, 그의 방 안에는 여래가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이 경전을 듣고 따라 기뻐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일체지로 향할 것입니다. 만약 이 경전을 믿고 이해하고, 심지어 4구게(四句偈) 하나라도 남에게 설명하여 준다면, 이 사람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기를 받은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 [유마경 강의] 송찬문 번역.

 

 

 

 

 

 

 

 

 

 

 

 

 

 

 

 

 

 

 

 

 

 

 

 

 

 

 

 

 

 

 

 

 

            

 

 

              청허휴정 찬

              淸虛休靜 撰

삼가귀감三家龜鑑

 

 

 

              

 

 

【유가귀감儒家龜鑑】

 

 

 

○ 孔子曰 天何言哉 董仲舒曰 道之大原出於天 蔡沉曰 天者嚴其心之所自出 此即周茂叔所謂無極而太極也

 

공자孔子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하였고, 동중서董仲舒는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 하였으며, 채심蔡沉은 「그 마음의 나온 곳을 엄격히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주무숙周茂叔의 이른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는 것이다. 

 

 

⋅ 孔子曰 天何言哉: 

 

「昔 尼父謂門弟子曰 予欲無言 天何言哉.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萬物生焉) 則彼淨名之默對文殊. (文殊問 何等是不二法門 淨名默然不應 文殊曰 善哉善哉 乃至無有言語文字 直入不二法門) 善逝之密傳迦葉. (善逝 涅槃也 卽佛之十號中一數也 世尊在靈山會上 拈花示衆 獨迦葉微笑破顏)」.  

 

옛날 공자孔子는 문제자門弟子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予欲無言 天何言哉〕”라고 하였다. 이는 저 정명淨名이 침묵으로 문수文殊를 대하고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 [고운집孤雲集] 감화상비명監和尙碑銘.

 

 

 

⋅ 董仲舒曰 道之大原出於天: 

 

「道之大原出於天 天不變道亦不變」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오나니, 하늘은 변하지 아니하며 도道 또한 변하지 아니한다. 

 

「仲舒氏曰 道之大原出於天 於是乎寐若窹焉 醉若醒焉 然猶曰蒼蒼者天也 而不知民彝物則之出於此而全體是天也 於是乃曰 天則理也 然後人始知人事之無非天矣 夫性也在人物 指人物而名之曰人也物也 是跡也 求其所以然而辯之 則在人者性也 在物者亦性也 同一性也 則同一天也 奚疑焉」

 

중서仲舒 씨가 말하되,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道之大原出於天]’ 하였는데, 그야말로 잠든 사람을 깨우고 술 취한 사람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함이로다. 하지만 오히려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라[蒼蒼者天也]’고는 말하면서도 사람의 양심[民彝]과 사물의 법칙[物則] 모두가 하늘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전체가 바로 하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후에 ‘하늘이라 함은 바로 이치이다.[天則理]’라 하였는데, 그러한 뒤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사람과 사물 모두가 하늘 아닌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대저 성性은 인人과 물物에 함께 있으니, 인人과 물物을 가리켜서 인人이라 물物이라 이름 붙인 것은 그 자취일 따름이다. 만약 그러한 까닭을 추구하여 판단해보면 인人에 있어서도 성性이요 물物에 있어서도 성性인 것이니, 같은 하나의 성性이라면 같은 하나의 天임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 [목은문고牧隱文藁] 권지卷之 십十.

 

 

 

 

 

  蔡沉曰 天者嚴其心之所自出: 

 

「昔蔡九峯序書集傳 以明帝王之道曰 言天則嚴其心之所自出 言民則謹其心之所由施 禮樂敎化 心之發也 典章文物 心之著也 嗚呼 公其有得於斯乎.」

 

옛적에 채구봉蔡九峯(송宋나라 채침蔡沈)의 [서경집전書經集傳] 서문에 제왕帝王의 도道를 밝히면서, ‘하늘을 말하자면 그 마음의 나온 곳을 엄격히 하였고, 백성을 말하자면 그 마음의 말미암아 베푸는 바를 삼가하였으니, 예악교화禮樂敎化는 마음에서 발發함이오 전장문물典章文物은 마음의 드러남이라.’ 하였으니, 오호라! 공公은 여기에서 얻은 것이로다. 

 

- 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권卷 일백삼십구一百三十九.

 

 

 

○ 書傳序曰 [心]精一執中 堯舜禹相傳之心法也 建中建極 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 曰德 曰仁 曰敬 曰誠 言雖殊而理則一 無非所以明此心之玅也 吁 心之德 其盛矣乎.

 

서전書傳의 서문에서 말한, ‘정미롭고 한결같이 중中을 잡음’은 요堯 순舜 우禹가 서로 전한 심법心法(마음 법)이요, ‘중中을 세우고 극極을 세움’은 상商나라 탕왕湯王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다. 덕德이라 ‧ 인仁이라 ‧ 경敬이라 ‧ 성誠이라 함은, 말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여서, 이 ‘마음의 묘玅를 밝힌바’가 아님이 없다. 아, 마음의 덕이여, 참으로 크구나!

 

 

⋅ 「問 精一執中 三聖人傳授心法 而朱子序<中庸> 以爲治天下之大法. 精一執中 何以爲治天下之大法. 答 正心而後 可以修齊治平 不先正其心 而欲治天下 得乎. 道心者 天理之公 人心者 形氣之私也. 不惟形氣 凡有偏係於我者 皆不離私一邊 故爲天下國家者 唯其私之務去. 夫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 王者奉三無私 以臨億兆之上 私而非公 天下不可治矣.」

 

“정일집중精一執中(정미롭게 한결같이 중中을 잡음)은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전수한 심법心法인데, 주자朱子가 <중용中庸> 서문을 지으면서 이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이라고 하였으니, 어찌해서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이 되는 것입니까?” 하는 나의 질문에 목재가 대답하였다.

 

“마음을 바르게 한 뒤에야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할 수 있는 것이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고서 천하를 다스리려고 한들 될 수 있겠는가. 도심道心은 천리天理의 공公이요,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의 사私이다. 형기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치우쳐 있는 모든 것은 다 사私이기 때문에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그 사私 제거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줌이 없고,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춰줌이 없으니, 왕자王者는 이 세 가지 사사로움이 없는 것을 받들어 만 백성을 다스려야 하고, 만일 사私를 따르고 공公을 행하지 않는다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 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집與猶堂全書] 권卷 이십일二十一.

 

 

⋅ 「夫精一執中 堯舜禹相傳之要指也 克復爲仁 孔顔相傳之要指也 以言語求之 蓋甚不同矣 然孔子之所謂己 卽舜之所謂人心 孔子之所謂禮 卽舜之所謂道心 克而復 卽精一之功 而仁之與中 又名異而實同者也」

 

대저 ‘정일집중精一執中’은 요堯, 순舜, 우禹가 서로 전수傳授하신 요지要指요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은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서로 전한 요지要指이니, 언어言語로 그것을 구求하면 대개 심히 같지 않으나 공자孔子의 이른바 ‘기己’는 곧 순舜임금의 이른바 ‘인심人心’이고, 공자孔子의 이른바 ‘예禮’는 곧 순舜임금의 이른바 ‘도심道心’이고, 이겨서 되돌아온다[克而復]는 것은 곧 ‘정일精一’의 공부이며, 인仁과 중中도 또한 명칭은 다르나 실로 같은 것이라.

 

[심경부주心經附註] 제일권第一卷, 안연문인장顔淵問仁章.

 

 

 

○ 中庸性道敎三句 亦名異而實同 體用備焉 此乃孔孟傳授心法

 

중용中庸의 ‘성性’ ‧ ‘도道’ ‧ ‘교敎’ 세 글귀는 또한 이름은 다르나 실로 같은 것이어서 본체[體]와 작용[用]을 갖추고 있으니, 이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전하고 받은 심법心法이다.

 

 

⋅ 「中庸性道敎三句 豈非所謂上頭一關 而吾輩所欲聞者 正在於此矣 然而此只是日用事物當然之理 而非所謂窈冥昏默者 顔子所謂卓爾 曾子所以一唯 孟子所謂躍如 程子所謂活潑潑地 而體用一原 顯微無間者也」

 

중용中庸의 성性과 도道와 교敎의 세 글귀는 어찌 이른바 상두일관上頭一關이 아닐 것이며,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 일용日用하는(날마다 쓰는) 사물事物의 당연한 이치이며 이른바 요명혼묵窈冥昏默한 것은 아니다. 안자顔子의 이른바 ‘탁이卓爾’와 증자曾子의 이른바 ‘일유一唯’와 맹자孟子의 이른바 ‘약여躍如’와 정자程子의 이른바 ‘활발발지活潑潑地’이니, 체體와 용用이 일원一原(한 근원)이며 드러남과 숨음에 사이가 없는 것이다. 

 

- [숙재집肅齋集] 권지卷之 팔八.

 

 

 

○ 道由性而出 言道而不言性 則人不知道之本原 道由敎而明 言道而不言敎 則人不知道之功用 故道之一字 包性包敎 推其本原 必歸之天命 大學之三綱八目 亦不外乎是也

 

도道는 성性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道를 말하고 성性을 말하지 아니하면 사람이 도道의 본래 근원[本原]을 알지 못하고, 도道는 교敎를 말미암아 밝혀지니 도道를 말하고 교敎를 말하지 아니하면 사람이 도道의 공용功用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도道라고 하는 이 한 글자는 성性을 포함하고 교敎를 포함하나니, 그 본래의 근원을 미루어보면 반드시 천명天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학大學의 삼강三綱과 팔목八目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大學之三綱八目: 

* 삼강三綱-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 팔목八目-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 周易先言道而後言性 此道字 是統體一太極 子思先言性而後言道 此道字各具一太極 

 

주역周易은 먼저 도道를 말하고 뒤에 성性을 말하였으니, 이 도道라는 글자는 이 통체統體로 하나의 태극[統體一太極]이며, 자사子思는 먼저 성性을 말하고 뒤에 도道를 말하였으니, 이 도道라는 글자는 각각이 하나의 태극을 갖춘 것[各具一太極]이다. 

 

 

⋅ 統體一太極, 各具一太極: 

 

「凝者 聚也. 氣聚而成形也. 蓋性爲之主 而陰陽五行 爲之經緯錯綜 又各以類凝聚而成形 陽而健者成男 則父之道也 陰而順者成女 則母之道也. 是人物之始 以氣化者也. 氣聚成形 則形交氣感 遂以形化 而人物生生 變化無窮矣. 自男女而觀之 則男女各一其性 而男女一太極也 自萬物而觀之 則萬物各一其性 而萬物一太極也.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

 

‘응凝’이라 함은 모인 것이다. 기氣가 모여서 형形을 이룬다. 대개 성性은 주主가 되고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은 씨줄과 날줄로 서로 짜여지고 또 각기 동류同類끼리 엉겨 모여서 형체를 이루는데, 양陽으로 굳센 것이 남성을 이루면 ‘아비의 도道’이고, 음陰으로 순順하는 것이 여성을 이루면 ‘어미의 도道’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의 비롯함으로 기氣로써 변화하는 것이다. 기氣가 모여서 형形을 이루면 형形이 기氣를 교감하면서 드디어 형체가 변화하여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며 변화가 무궁무진 하도다. 남녀男女로서 보면 곧 남녀는 각각이 하나의 그 성性을 가지고 있지만 남녀男女는 하나의 태극太極이요, 만물萬物로서 보면 만물萬物은 각각 하나의 그 성性을 가지고 있지만 만물萬物은 하나의 태극太極이다. 대체로 합하여 말하면 만물은 통체로 하나의 태극[統體一太極]이요, 나누어 말하면 일물一物은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춘 것[各具一太極]이다.」

 

- [율곡전집栗谷全書] 권지卷之 이십二十.

 

 

○世之言道者 高則入於荒唐 卑則滯於形氣 今言道字非他 循性之謂也. 

 

세상의 도道를 말하는 자는, 높으면 황당한 데 들어가고 낮으면 모양과 기운에 얽매인다. 지금 말하는 도道라는 글자는 다른 것이 아니요, 성性을 따르는 것이라 말한다. 

 

 

⋅ 「蓋子思此道字 以道之用而言 對性作體用說 以性爲道之體 以道爲性之用 所以爲道是循性之謂也.」

 

대개 이 도道라는 글자는 도道의 용用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성性을 대상으로 하여 체體와 용用으로 설한다. 성性을 도道의 체體(본질)로 삼고, 도道를 성性의 용用(작용)으로 삼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도道는 성性을 따름이라 말한다. 

 

- [후산선생문집后山先生文集] 권지卷之 십오十五.

 

 

 

○ 戒懼是保守天理 幾未動之敬也 愼獨是撿防人欲 幾已動之敬也 故君子之心 常存敬畏.

 

경계하여 두려워함[戒懼]은 천리天理(하늘의 이치)를 보호하여 지키는 것이니 기틀이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경敬이요, 혼자일 때를 삼감[愼獨]은 사람의 욕심을 가려내어 막는 것이니 기틀이 이미 움직인 경敬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마음은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함에 있다. 

 

 

⋅ 戒懼是保守天理 幾未動之敬也 愼獨是撿防人欲 幾已動之敬也:

 

 「戒懼是保守天理 故爲存養工夫 愼獨爲檢防人欲 故爲省察工夫. 」

 

경계하여 두려워함[戒懼]은 천리天理를 보호하여 지키는 것이니 그러므로 존양공부存養工夫가 되고, 홀로 있음을 삼감[愼獨]은 사람의 욕심을 가려내어 막는 것이니 그러므로 성찰공부省察工夫가 됩니다.

 

- [학서집鶴棲集] 권지卷之 오五.

 

 

 

○ 謹獨一念已發時工夫 戒懼一念未發前工夫. 然纔知未發 便是已發 即不中 中則天地萬物爲一體.

 

혼자일 때를 삼감[謹獨]은 한 생각이 이미 일어난[已發] 때의 공부이고, 경계하여 두려워함[戒懼]은 한 생각이 아직 일어나기 이전[未發]의 공부이다. 그러나 겨우 (생각이)일어나지 않았음을 앎은 바로 이미 일어난 것이니 곧 절節에 들어맞지 않음이요[不中], 절節에 들어맞으면[中] 천지만물天地萬物이 한 몸이 된다[一體]. 

 

 

⋅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희喜와 로怒와 애哀와 락樂이 발發하지 아니한 때를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다 절節에 중中함(맞음)을 ‘화和’라 이르나니, 중中은 천하天下에 큰 ‘본本(근본)’이요 화和는 천하天下에 ‘달達(통달)한 도道’이니라. 

 

朱子曰 喜怒哀樂 情也 其未發則性也 無所偏倚 故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 故謂之和.

 

─ 주자朱子가 이르길,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이요 그 발發하지 아니함은 ‘성性’이요 치우친[偏倚]바가 없는 까닭으로 이르되 ‘중中’이라. 발發하여 다 절節에 맞음은 정情의 바름이요 어그러지고 틀린 바가 없는 까닭으로 이르되 화和이라. 

 

- [율곡선생전집栗谷先生全書] 권지卷之 십구十九.

 

 

 

○ 幽則有鬼神 明則有日月 此亦謹獨一句. 

 

어두우면 귀신鬼神이 있고 밝으면 일월日月(해와 달)이 있다. 이 역시 근독謹獨의(혼자인 때를 삼간다는) 한 글귀이다. 

 

 

 

⋅ 幽則有鬼神 明則有日月: 

 

「嗚呼 有至大至剛之氣 寓於無形 塞乎無垠 升而爲天 沈而爲淵 明則有日月 幽則有鬼神 在人爲君臣父子之懿 遇治世而發之 則爲大業偉績 使萬物得其所 遇亂世而發之 則利害不能動其心 威武不能奪其志 守節秉義 抗大亂而不懼.」

 

아,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기운이 있어 형체 없는 곳에 깃들고 한량없는 곳에 충만하다가 올라가서는 하늘이 되고, 내려가서는 못이 되며, 밝으면 일월日月이 되고, 어두우면 귀신이 되며, 사람에게는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인륜이 되는 것입니다. 치세治世를 만나서 발현되면 위대한 업적이 되어 만물로 하여금 처소를 얻게 하고, 난세亂世를 만나서 발현되면 이해利害가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위무威武가 그 뜻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절개와 의리를 지켜 큰 난리에 맞서되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 [사림제문士林祭文] 허목許穆.

 

 

 

○ 涵養靜工夫 一箇主宰嚴肅也 省察動工夫 情念纔發覺治也 故曰精以察之 一以守之 即所謂顧諟天之明命.

 

함양涵養은 고요한 공부이니 하나의 주인공主人公이 엄숙함이요, 성찰省察은 움직이는 공부이니 정념情念이 겨우 조금 일어남에 곧 깨달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미롭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라’고 말한 것이니, 곧 이른바 저 하늘의 밝은 명령을 돌아보고 살피라는 것이다. 

 

 

 

○ 心一放即 悠悠蕩蕩 無所歸着.

 

마음을 한 번 놓은 즉은, 아득하고 허랑虛浪하여 돌아가 머물 곳이 없다. 

 

 

 

○ 心必操意必誠 言必謹動必愼 內外交修之道

 

마음은 반드시 잡아야 하고 뜻은 반드시 정성스러워야 하며, 말은 반드시 조심해야 하고 행동은 반드시 삼가야 하나니, (이는) 안과 밖을 함께 닦는 길이다. 

 

 

 

○ 一念之善 慶雲景星 一念之惡 烈風暴雨 堯舜桀紂 在此一句 烈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한 생각이 선善함에 오색구름이 모이고 상서로운 별이 빛나며 한 생각이 악惡함에 거센 바람이 불고 폭우가 나림’이니, 요순堯舜과 걸주桀紂가 이 한 글귀에 있다. (그러나) 열심烈心의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은 하나일 뿐이다. 

 

 

 

○ 渾厚包涵從容 是廣大之氣象.

 

질박하고 두터움과 널리 싸안음과 몸가짐이 조용한 것은, 넓고 큰 기상이다. 

 

 

⋅ 渾厚包涵從容 是廣大之氣象:

 

 薛氏曰 第一要有渾厚包涵從容廣大之氣象. 

[量狹者 不能容物 從狹隘上 生萬般病痛]

 

설씨가 이르되, ‘첫째로 요긴함은, 혼후渾厚하고(질박하며 후하고), 포함包涵하며(널리 싸안으며), 종용從容(몸가짐이 조용)하고, 광대廣大함이다.’라 하였다. [도량이 좁은 자는 물物을 용납하지 못하니, 소견이 좁고 막힌 데에서 만 가지 병통이 생기는 것이다.]

 

- [율곡선생전집栗谷先生全書] 권지卷之 이십이二十二. 

 

 


○ 促迫偏窄輕躁 非有德之氣象.

 

급히 서두름과 한 편으로 치우침과 경솔하고 조급함은, 덕이 있는 기상이 아니다. 

 

 

⋅ 薛敬軒曰 厚重靜定寬緩 進德之基. 又曰 促迫偏窄 淺率浮躁 非有德之氣像.

 

설경헌薛敬軒이 이르되, ‘후중厚重(두터이 자중)함과 정정靜定(고요하고 정定함,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과 관완寬緩(너그럽고 느긋함)은 덕德에 나아가는 기초이다.’라 하였다. 또 이르되, ‘촉박促迫(급히 서두름)과 편착偏窄(한편으로 치우침)과 천솔淺率(천박하고 경솔함)과 부조浮躁는(들뜨고 조급함은) 덕이 있는 기상이 아니다.’라 하였다.   

 

- [소곡선생유고素谷先生遺稿] 권지卷之 이십일二十一.

 

 

 

○ [聞善言則拜 告有過則喜 有聖賢氣象]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는 것과 과오가 있다고 말해주면 기뻐하는 것은, 성현의 기상이 있음이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禹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했다.[禹聞善言則拜]’라는 말과 ‘자로子路는 사람들이 그에게 과실이 있음을 말해 주면 기뻐하였다.[子路人告之以有過則喜]’라는 말이 있다.

 

 

 

○ 省欲則心靜 心靜則事自簡.

 

욕심을 줄이면 마음이 고요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하는 일이 저절로 간소해진다. 

 

 

⋅ 「省欲則心靜 心靜則事簡」   ― 愚謂省欲則心自靜事自簡.

 

욕심을 덜어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하면 일이 간소해진다.  ― 내가 생각건댄, 욕심을 덜어내면 마음이 절로 고요해지고 일이 절로 간소해진다.  

 

- [지봉선생집芝峯先生集] 권지卷之 이십오二十五.

 

 

 

○ 少言沈默最妙 知道則言自簡

 

말이 적어 침묵함이 가장 묘함이니, 도를 알면 말은 저절로 간략해진다. 

 

 

⋅ 「薛敬軒曰 少言沉默最妙. ..... 栗谷先生曰 多言多慮 最害心術.」 

 

설경헌이 이르되, ‘말을 적게하여 침묵함이 가장 묘하다.’ 하였고, .....  율곡 선생이 이르되, ‘말이 많으면 생각이 많아지니 가장 해로운 심술心術이다.’ 하였다. 

 

- [소곡선생유고素谷先生遺稿] 권지卷之 이십일二十一.

 

 

 

○ 謹言 乃爲學第一工夫 言不謹 而能存心者 鮮矣.

 

말을 삼가는 것이 배움의 첫째가는 공부가 되나니,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서 존심存心할 수(마음을 지킬 수) 있는 자는 드물다. 

 

 

⋅ 「讀書錄(薛敬軒)曰 謹言乃爲學第一工夫 言不謹而能存心者鮮矣. 一語妄發 卽有悔.」

 

[독서록]에서 이르되, ‘말을 삼가는 것이 배움의 첫째가는 공부가 되나니,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서 존심存心할 수 있는 자는 드무니라. 한마디 말이 망령되이 일어남에 곧 후회함이 있느니라.’ 하였다.  

 

- [석동선생유고石洞先生遺稿] 권지卷之 칠七.

 

 

 

 

○ 多言 最使人心流蕩 而氣亦損 夢寐精神 亦不安.

 

말이 많음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유탕流蕩(방탕)하게 하고 기운 또한 손상시키나니, 꿈에서도 깨어서도 정신이 또한 편하지 못하다.

 

 

 

○ 纔舒放即當收歛 纔言語便思簡默.

 

조금이라도 흩어져 방자放恣함에 곧 거두어들이고, 잠깐 말을 함에 곧 간단히 침묵할 것을 생각하라.  

 

 

 

○ 必使一念不妄起 一言不妄發 庶乎寡過.

 

반드시 한 생각이라도 망령되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한 말이라도 망령되이 나오지 않게 하면, 거의 허물이 적을 것이다.

 

 

 

○ 聞人過失 如聞父母之名 耳可聞而口不可言.

 

남의 허물을 듣거든 부모의 이름을 들음과 같이하여, 귀는 들어도 입은 말하지 말 것이다. 

 

 

 

○ 是非終日有 不聽自然無 來說是非者便是是非人.

 

시비是非는 종일토록 있으나 듣지 않으면 자연히 없다. 와서 시비是非를 말하는 자가 곧 이 시비是非하는 사람이다.

 

 

 

○ 待左右當嚴而惠 左右之言 不可輕信 必審其實[親].

 

좌우(곁)의 사람을 대함에 마땅히 엄숙하되 은혜로워야 하고, 좌우의 말은 가벼이 믿지 말고 반드시 그 진실함을 살필 것이다. 

 

 

 

○ [親]愛之言 亦不可偏聽 若聽一面說 便見相離別.

 

친한 이의 사랑스런 말이라도 또한 치우쳐서 듣지 말라. 만약 한쪽 말만을 들으면 서로 헤어지게 되리라. 

 

 

 

○ 輕言輕動之人 不可與深計 易喜易怒者 亦然.

 

가벼이 말하고 가벼이 행동하는 사람은 깊은 계획을 함께 할 수 없나니, 쉽게 기뻐하고 쉽게 노여워하는 자도 또한 그러하다.

 

 

⋅ 薛文淸讀書錄曰。輕言輕動之人。不可與深計。易喜易怒者亦然。

 

설문청(설경헌)이 [독서록]에서 이르되, ‘가벼이 말하고 가벼이 행동하는 사람은 깊은 계획을 더불어 할 수 없으니, 쉽게 기뻐하고 쉽게 노여워하는 자도 또한 그러하니라.’ 하였다.  

 

- [운계만고雲溪漫稿] 권지卷之 삼십三十.

 

 

 

○ 欲人無聞 莫若勿言 欲人無知 莫若勿爲.

 

남이 듣지 못하길 바라는 것은 말하지 않음만 같지 못하고, 남이 알지 못하길 바라는 것은 하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 

 

 

 

○ 大丈夫心事 當如靑天白日 使人得而見之.

 

대장부大丈夫의 심사心事는 응당 맑은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 「大丈夫心事 當如靑天白日 使人得而見之可也.」

 

대장부大丈夫의 심사心事는 응당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설경헌). 

 

─ 내가 생각건대, 청천백일은 청명함을 의미한다. 군자에게 청명한 덕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기를 청천백일과 같이 할 것이다. 

 

- [동춘당선생문집同春堂先生文集] 권지卷之 십육十六.

 

 

 

○ 奢侈華麗 人之大惡 淳朴質直 人之大德.

 

사치奢侈스럽고 화려華麗함은 사람의 큰 악惡이요, 순박淳朴하고 질직質直함은 사람의 큰 덕德이다. 

 

 

 

○ 古賢 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옛 성현은 때가 된 연후에야 말하는지라 사람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즐거운 연후에야 웃는지라 사람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의義인 연후에야 취取하는지라 사람이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아니하였다. 

 

 

⋅ 「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曰 信乎夫子不言不笑不取乎 公明賈對曰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子曰 其然 豈其然乎.」

 

공자께서 공숙문자(公孫枝)에 대해 공명가公明賈에게 이르시길, “진실로 부자夫子가(선생께서는) 말하지 아니하며, 웃지 아니하며, 취하지 아니하느냐?” 공명가가 대답하되, “아뢴 사람이 과過하였습니다. 부자는(선생께서는) 때인(때가 된) 연후에 말하는지라 사람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즐거운 연후에 웃는지라 사람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의義인 연후에 취取하는지라 사람이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아니하나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그러한가. 어찌 그러하리오?” 하였다. 

 

- [논어論語]

 

 

 

○ 君子行有不得 皆反諸己 而無責人之心 心常洒落. 常人纔不得於天 即怨天 纔不合於人 即尤人 心常不寧 忿懥勞擾.

 

군자는 어떤 일을 행하였으되 뜻대로 얻지 못한 것이 있거든 모두 자기에게로 돌이키나니, 남을 꾸짖는 마음이 없으므로 마음은 항상 씻은 듯 깨끗하다. 보통 사람은 하늘에게서 얻지 못한즉 하늘을 원망하고 남이 마음에 맞지 아니한즉 곧 남을 탓하나니, 마음은 항상 편치 못하여 분하게 여기고 어지럽게 근심한다. 

 

 

⋅ 孟子曰「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而天下 歸之」.

 

맹자가 이르시되, ‘어떤 일을 행했으나 얻지 못한 것이 있거든 모두 돌이켜 자기에게서 구해야 하니[反求諸己], 그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돌아온다’ 하였다. 

 

 

 

○ 人爲外物所動者 只是淺.

 

사람이 외물外物(바깥 일)에 동요動搖하는 바가 되면 다만 이는  천한 것이다. 

 

 

 

○ 人有才而露 亦是淺 深則不露.

 

사람이 재주가 있어서 그것을 드러내면 또한 이는 천한 것이니, 깊으면 드러내지 않는다. 

 

 

 

○ 識量大則毁譽欣慼 不足以動其心

 

식견識見과 도량度量이 크면 비난이나 칭찬, 기쁨이나 슬픔이 그 마음을 동요動搖시키지 못한다. 

 

 

⋅ 「識量大則毀譽欣戚 不足以動其心」

 愚謂先儒言識進則量進 識固先於量矣.

 

식견과 도량이 크면 비난이나 칭찬, 기쁨이나 슬픔이 그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한다. 

 

─ 내가 생각건대, 선유先儒가 ‘식견이 나아지면 도량이 넓어진다(識進則量進)’하였으니, 식견識見이 실로 도량보다 우선한다. 

 

- [지봉선생집芝峯先生集] 권지卷之 이십오二十五.

 

 

 

○ 聖人之心 應物即休 元不少動.

 

성인의 마음은 물物에 응應함에 곧 쉬므로, 원래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 心誠色溫 氣和辭婉 必能動人.

 

 마음이 진실하고(정성스럽고) 얼굴빛이 온화하며 기운이 화평하고 말이 그윽하면, 반드시 사람을 움직일(감동시킬) 수 있다. 

 

 

 

○ 惟正可以服人 故寧可正而不足 不可邪而有餘.

 

오직 바름만이 사람을 감복感服시킨다. 그러므로 차라리 바름으로 부족할지언정 삿됨으로 넉넉하지 말 것이다.

 

 

 

○ 正其義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

 

그 의義를 바르게 함에 그 이익을 도모하지 말며, 그 도道를 밝힘에 그 공功을 헤아리지 말라.

 

 

 

○ 一行有失 百行難補 故防末在本

 

한 가지 행行에 잃어버림이(실수가) 있으면 백 가지 행行으로도 채우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끝을 방비防備하는 것은 근본根本에 있다. 

 

 

 

○ 人多於快意之事 忘却道.

 

사람이 흔히 쾌활한 일에서 도道를 잊어버린다. 

 

 

 

○ 爲政通下情爲急 處事尤宜心平氣和.

 

정사政事를 함에 아래의(아래 사람과) 뜻을 통함이 중요하고, 일에 있어서는 더욱 마땅히 마음이 평등하고 기운이 온화하여야 한다. 

 

 

 

○ 事最不可輕忽 雖至微至易者 皆當以愼重處之.

 

일은 무엇보다도 가볍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극히 작고 쉬운 일이라 할지라도 모두 마땅히 신중히 처리할 것이다. 

 

 

 

○ 見人善 尋己善 見人惡 尋己惡 從也 改也 俱爲我師.

 

남의 선善을 보거든 자기의 선善을 찾고, 남의 악惡을 보거든 자기의 악惡을 찾으라. 따르고 고치는 것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된다.

 

 

 

○ 結朋須勝己 似我不如無 毁吾者師 譽吾者賊.

 

벗은 모름지기 자기보다 나은 이를 사귀어라. 나와 비슷한 이는 없느니만 못하다. 나를 훼방하는 이는 스승이요 나를 칭찬하는 이는 도둑이다. 

 

* 세상에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없음을 알면 배울 수 있다. 

 

 

 

○ 非莫非於飾非 過莫過於文過.

 

잘못은 잘못을 꾸미는 것 만한 잘못이 없고, 허물은 허물을 꾸미는 것만한 허물이 없다.

 

 

 

○ 以德報寃 以善報惡 人若唾面 不拭自乾.

 

덕德으로 원한을 갚고 선善으로 악을 갚으라. 남이 만약 얼굴에 침을 뱉으면 저절로 마를 때까지 닦지 말아라. 

 

 

 

 

○ 覺人詐而不形於言 有餘味.

 

남이 속이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에 대하여 드러내지 않으면, 남는 맛이 있다. 

 

 

⋅ 「薛瑄曰 事已往不追最妙 覺人詐而不形於言 有餘味」.

 

설선(설경헌)이 이르되, ‘일이 이미 지나가면 뒤쫓지 않는 것이 가장 묘하니, 남이 속이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을 따라 드러내지 않으면 남는 맛이 있다.’ 하였다. 

 

- [청장관전서靑莊舘全書] 권지卷之 이십팔二十八.

 

 

 

○ 即人言可以見所養之淺深.

 

사람의 말에 나아가면 가히 수양修養한 바의 얕고 깊음을 볼 수가 있다. 

 

 

 

○ 知足者 貧賤亦樂 不知足者 富貴亦憂.

 

만족할 줄 아는 이는 가난하고 천해도 또한 즐겁고, 만족할 줄 모르는 이는 부귀해도 또한 근심한다. 

 

 

 

○ 知安則榮 知足則富.

 

편안할 줄 알면 영화롭고, 만족할 줄 알면 부유하다.  

 

 

 

○ 人無百歲人 枉作千年計.

 

사람이 백세 사는 사람이 없는데, 헛되이 천년 계획을 세운다. 

 

 

 

○ 大厦千間 夜臥八尺 良田萬頃 日食二升.

 

큰 집이 천 칸이라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 자 뿐이요, 기름진 논이 만 이랑이라도 하루에 먹는 것은 두 되 뿐이다. 

 

 

⋅ 「趙淸獻座右銘曰 爽口味多 須作疾 快心事過 必爲殃. 又曰 良田萬頃 日食三升 大廈千間 夜臥八尺 信矣.」

 

조청헌의 좌우명에 이르되, ‘입에 맞는 음식이 많으면 모름지기 병이 되고, 즐거운 일이 지나치면 반드시 재앙이 된다.’하였고, 또 이르되 ‘기름진 논이 만 이랑이라도 하루에 먹는 것은 두 되 뿐이요, 큰 집이 천 칸이라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 자 뿐이니, 믿을지니라.’하였다. 

 

- [지봉유설芝峯類說] 권卷 오五.

 

 

 

○ 人皆愛珠玉 我愛賢師友.

 

사람이 모두 주옥珠玉을 사랑하지만, 나는 어진 스승과 벗을 사랑한다. 

 

 

 

○ 黃金千兩未爲貴 得人一語勝千金.

 

황금이 천냥이라도 귀함이 되질 못하나니, 사람의 말 한마디 얻음이 천금보다 수승하다. 

 

 

 

○ 有名不用鐫頑石 路上行人口是碑. 

 

명성이 있어 굳은 비석에 새기더라도 쓸모가 없으니, 길을 가는 사람의 입이 이 비석이니라. 

 

 

 

○ 平生不作皺眉事 世上應無切齒人. 

 

평생에 눈살 찌푸리는 일을 짓지 않으면, 세상에 응당 분하여 이를 가는 사람이 없다. 

 

 

⋅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관직을 제수받자 병을 핑계 대고 응하지 않으면서 지은 칠언율시 1구와 2구에 “평생토록 얼굴 찡그릴 일을 짓지 아니하니, 이 세상에 이를 가는 자들이 없으리라. [平生不作皺眉事 天下應無切齒人]”라는 말이 나온다. 

 

- [격양집擊壤集] 권卷 칠七.

 

 

 

○ 貧㞐閙市無相識 富住深山有遠親.

 

가난하면 시끄러운 장바닥에 살아도 서로 아는 이가 없고, 부유하면 깊은 산속에 살아도 먼 친척이 있다(먼 친척이라며 찾아온다). 

 

 

 

○ 凡事留人情 後來好相見 若要人重我 無過我重人.

 

무릇 일을 함에 인정人情을 남겨두면 뒤에 서로 만나기가 좋으리니, 만약 남이 나를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면 내가 남을 소중히 대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 有客來相訪 如何是治生 恒存方寸地 留與子孫耕.

 

객客이 방문하여 와서 ‘어떤 것이 인생을 다스리는 것입니까?’ 하거든, ‘항상 방촌方寸(마음)의 땅을 보존하여 자손이 경작하도록 남겨 주라’고 하라.

 

 

⋅ 「但存方寸地 留與子孫耕」

 

「다만 방촌의 땅을 보존하여 자손에게 경작하도록 남겨 준다.」

 

- [학림옥로鶴林玉露] 권卷 육六. 송宋, 나대경羅大經.

 

 

⋅ 「有此地而不能治 治而不知其法者 雖治此地 亦猶不治. 是故孔子孟軻 治地之農師圃師也」

 

이 땅[방촌지方寸地. 마음]이 있어도 능히 다스리지 못하나니, 다스리려 하여도 그 방법을 모르는 자는 비록 이 땅을 다스리더라도 다스리지 않은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자와 맹가孟軻는 땅을 다스리는 농사農師이고 포사圃師인 것이다.

 

  • [승정원일기, 정조 23년 기미년 4월 4일.]

 

 

 

○ 爲子死孝 爲臣死忠 人無忠孝之心 其餘不足觀也.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에 죽고, 신하가 되어서는 충忠에 죽으라. 사람이 충효忠孝의 마음이 없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 心統性情 君子存心 恒若鑑空衡平 與天地合其德.

 

마음[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솔하나니, 군자君子는 존심存心(마음을 보존)하기를 항상 ‘거울이 비고 저울이 평등[鑑空衡平]한’ 것과 같이 하여 천지天地와 더불어 그 덕德을 합한다. 

 

 

 

○ 於戱 三月忘味 終日如愚 此聖賢忘內之樂也 不貴黃屋 不賤陋巷 此聖賢忘外之樂也. 然則 聖賢之樂 不在內外 當在何處.

 

오호라! 석 달을 맛을 잊고 종일 어리석은 것 같았으니, 이는 성현이 안을 잊은 즐거움이다. 황옥黃屋(천자가 타는 수레의 지붕)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누추한 내 집 뒷골목을 천히 여기지 아니하니, 이는 성현이 밖을 잊은 즐거움이다. 그러한즉 성현의 즐거움은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으니, 어느 곳에 있는고?

 

 

 

○ 古之詩人 觀鳶魚 而知道之費隱 聖人 觀川流 而知道之不息. 今之學者 其可不盡心乎.

 

옛 시인은 솔개의 날음과 물고기의 뜀을 보고서 도道의 비은費隱(쓰임과 숨음)을 알았고, 성인은 냇물이 흘러감을 보고서 도道의 쉬지 않음을 알았거니, 지금의 학자는 그 어찌 마음을 극진極盡히 하지 아니하는가? 

 

 

 

○ 文王之詩 無聲無臭之天 子思子亦引之 以結中庸之義 吁 即吾渾然未發之中也 此周茂叔所謂太極本無極也.

 

문왕文王의 시詩에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하늘’ 이라 하였고, 자사子思도 역시 이를 인용하여 중용中庸의 의義에 결부시켰으니, 아! 곧 나의 혼연渾然한 미발지중未發之中(혼연渾然하여 마음 발發하기 전의 중中)이요, 이는 주무숙周茂叔이 이른바 ‘태극太極은 본래 무극無極이다’라 하신 것이다.

 

 

 

 

 

 儒家龜鑑 終

 

 

 

 

 

 

 

 

 

 

 

 

 

 

 

 

 

 

 

 

 

 

 

 

 

 

 

 

 

 

 

 

 

 

 

 

 

 

 

 

 

 

 

 

 

 

 

 

【도가귀감道家龜鑑】

 

 

 

○ 有物渾成 先天地生 至大至妙 至虛至靈 浩浩蕩蕩 歷歷明明 方隅不可㝎其居 劫數不能窮其壽 吾不知其名 强名曰心.

 

어떤 물건이 있어 혼연渾然히 이루어져 천지天地에 앞서 생겼다. 지극히 크고 지극히 묘妙하며, 지극히 비고 지극히 신령하며, 넓고 넓어 걸림 없이 아득하며, 분명하고도 밝으며, 그 방우方隅로 가히 그 있는 곳을 정할 수 없고 겁수劫數로 그 수명을 다할 수 없으니,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해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 心’이라 한다. 

 

 

 

○ 亦曰谷神 遂爲三才之本 萬物之母.

 

또한 곡신谷神[虛明靈妙]이라 하나니, 삼재三才의 근본[本]이요 만물萬物의 어미[母]가 된다. 

 

⋅ 谷神: 곡谷은 허명虛明이요 신神은 영묘靈妙이라. 

⋅ 三才: 天 ‧ 地 ‧ 人.

 

 

 

○ 有名無名 有念無念 同出於斯 故曰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름 있음과 이름 없음, 생각 있음과 생각 없음이 모두가 ‘이것’에서 나오므로 ‘현玄하고 또 현玄한 온갖 묘妙의 문門’이라 한다. 

 

 

 

○ 體曰道 用曰德. 用無體不生 體無用不妙 故備擧道德 請捨諸緣 以觀其妙.

 

체體를 도道라 하고 용用을 덕德이라 한다. 용用은 체體가 없이는 나지 못하고 체體는 용用이 없으면 묘妙하지 못하므로 도道와 덕德을 두루 갖춘 것이니, 청컨대 모든 반연攀緣을 버리고서 그 묘妙를 관觀하라. 

 

 

 

○ 聖人無名 神人無功 至人無己. 抱道德之眞實 虛心無我 常遊於無物之域 以仁義天下國家爲浮華.

 

성인聖人은 이름이 없고 신인神人은 공로功勞가 없으며 지인至人은 자기自己가 없다. 도道와 덕德의 진실을 품었으되 빈 마음에 내가 없으니, 항상 무물無物(물物 없음)의 경계에서 노닐며 인의仁義로써 천하국가天下國家를 부질없는 꽃으로 여긴다. 

 

 

⋅「夫列子 御風而行 冷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대저 열자列子는 바람을 제어하여 날아다니는데 시원하고 좋아서 열흘 하고도 오일 후에야 돌아왔으나 그는 행복에 이르른 사람이기에 날짜를 세어본 적도 없었다. 이는 비록 걸어다니는 것은 면했다고는 하나 오히려 ‘의지하는 바(바람)’가 있는 것이다. 만약 대저 천지의 정正을 타고 육기六氣(風寒暑濕燥火)의 변화를 제어하여 무궁無窮함에 노니는 자라면 또 무엇에 의지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길, 『지인至人은 자기가 없고, 신인神人은 공로가 없으며, 성인은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 堯舜之道 可以爲衆父 不可以爲衆父父.

 

요순堯舜의 도道는 가히 뭇 사람들의 아버지는 될 수 있으나 뭇 사람들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될 수 없다. 

 

 

⋅ 「齧缺 可以爲衆父 而不可以爲衆父父」

 

치결齧缺은 중부衆父(뭇 사람들의 아버지)는 될 수 있지만 중부부衆父父(뭇 사람들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될 수 없다.

 

- <장자莊子> [천지天地] 

 

 

 

○ 人世大夢也 大夢之中 必有大覺之王. 故大覺然後 知此其大夢也 然則 莊周與胡蝶 俱爲夢也.

 

인간 세상은 큰 꿈[大夢]이요 큰 꿈을 꾸는 가운데에는 반드시 크게 깨어난[大覺] 왕王이 있다. 그러므로 크게 깨어난 연후에야 이것이 그 큰 꿈[大夢]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즉 장주莊周와 호접胡蝶은 함께 꿈이 되는 것이다.

 

 

⋅ 「夢飮酒者 旦而哭泣 夢哭泣者 旦而田獵. 方其夢也 不知其夢也 夢之中 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 知此其大夢也 而愚者 自以爲覺 竊竊然知之 君乎.」

 

꿈에 맛있는 술을 마신 자는 아침에 깨어서는 울고, 꿈에 울었던 자는 아침에 깨어서는 즐거이 사냥을 간다. 바야흐로 꿈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꿈꾸는 가운데서 또 꿈을 꾼다. 깨어난 뒤에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지만, 또 다시 크게 깨어난[大覺] 뒤에라야 그것이 커다란 꿈[大夢]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깨어났다고 여기고 있으니, 마음속으로 몰래 그것을 아는 이는 누구인가?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 흑야몽黑夜夢 – 밤에 눈을 감고 꾸는 꿈.

백일몽白日夢(夢中夢) – 낮에 눈을 뜨고 꾸는 꿈.

삼중몽三重夢- 꿈 속의 꿈에서 또 꿈을 꿈. 

 

 

 

○ 人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故眞人 抱一專氣].

 

사람[人]은 하늘[天]을 본받고 하늘[天]은 도道를 본받으며 도道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 그러므로 진인眞人은 한결같이 오로지 기氣를 품는다.

 

 

 

○ 養生如牧羊 鞭其後.

 

양생養生은 양羊을 기르는 것과 같아서 그 뒤를 채찍질 한다. 

 

 

 

○ 聖人不爭故 天下莫能與之爭 聖人不自大故 能成其大.

 

성인聖人은 다투지 않는 까닭으로 천하의 누구도 능히 그와 다툴 수 없고, 성인聖人은 스스로 크다 하지 않는 까닭으로 능히 그 큼을 이룰 수 있다. 

 

 

 

○ 天道無親 常與善人 天道不言 亦常善應.

 

천도天道(하늘의 도)는 친親함이 없으니 항상 좋은 사람을 함께하고, 천도天道는 말이 없으니 또한 항상 잘 응應한다.

 

 

 

○ 天道若張弓 損有餘而補不足 人道却不然 損不足而奉有餘.

 

천도天道(하늘의 도)는 얹은 활(시위를 당긴 활)과 같아서 남는 것을 덜어서 부족한 것을 도우나, 인도人道(사람의 도)는 도리어 그렇지 아니하여 부족한 것을 덜어서 남는 것을 받든다. 

 

 

 

○ 五色令人盲 五聲令人聾. 然美色爲甚 一爲花箭 一爲伐性斧 故聖人爲腹不爲目.

 

다섯 빛깔[靑黃赤白黑]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소리[宮商角徵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먹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빛깔이 심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꽃 화살[花箭]이 되고 한편으로는 성품을 치는 도끼가 되나니[伐性斧],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는다. 

 

 

 

 

○ 天之穿之 日夜無止 衆人顧塞其竇.

 

하늘은 뚫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건만, 사람은 도리어 그 구멍을 막는다. 

 

 

⋅ 「天之穿之 日夜無降 人則顧塞其竇」.

 

하늘은 뚫기를 밤낮으로 그침이 없는데, 사람은 도리어 그 구멍을 막는다. 

 

- <장자莊子> [외물外物].

 

 

 

○ 道人 被葛懷玉 故德有所長 形有所忘.

 

도인道人은 갈포 옷을 입고 옥을 품었으니, 그러므로 덕德은 길어지고 형形은 잊는다. 

 

 

 

○ 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故禍莫大於不知足 知足之足常足矣.

 

심히 애착愛著하면 반드시 크게 허비虛費하게 되고, 많이 감추면 반드시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화禍는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만족할 줄 아는 만족이 떳떳한 만족이라.

 

 

⋅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 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이름과 몸은 어느 것이 친한가? 몸과 재물은 어느 것이 나은가? 얻음과 잃음은 어느 것이 병인가? 이러한 까닭으로 지나치게 애착하면 반드시 크게 허비하게 되고, 많이 감추면 반드시 많이 잃어버리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아니하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나니, 이로써 가히 장구長久하리라.

 

-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사십사四十四.

 

 

⋅ 「禍莫大於不知足이요 咎莫大於欲得이라. 故知足之足이 常足矣니라.」

 

화禍(재앙)는 족足(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구咎(허물)는 얻고자 하는(欲得)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아는 만족이 떳떳한 만족이니다.

 

-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사십육四十六.

 

 

 

 

○ 信言不美 美言不信 又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믿을만한 말은 아름답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또 가벼이 승낙하면 반드시 믿음이 적어지고, 많이 쉬우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다. 

 

 

 

○ 大像無形 大功無功 至親無禮 至誠無僞 故眞喜無笑 眞哭無聲.

 

큰 상像은 형상이 없고 큰 공功은 공功이 없으며, 지극히 친親함은 예禮가 없고 지극한 정성精誠은 작위作爲가 없으며, 진실로 기쁘면 웃음이 없고 진실로 울면 소리가 없다. 

 

 

 

○ 空谷善應 虛室生白. 人能虛己而遊世 孰能害之.

 

빈 골짝은 잘 감응感應하고, 빈 방[內心]은 흰 빛을 생生한다. 사람이 능히 자기를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칠 수가 있으랴. 

 

 

⋅「瞻彼闋者 虛室生白」

 

저 둥그스름하게 원만한 것[闋者]을 바라보노라면 텅 빈 방 안에서 흰빛이 생겨나나니.

 

 -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 「聖人豈不曰不亦樂乎. 獨坐深究 如虛室生白 精神感通 雖謂之鬼神之力可也 君能至此境界 又何患於無朋.」

 

성인(孔子)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홀로 깊이 궁구窮究하기를 빈방에 흰 빛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하여 정신精神이 감응感應하여 통通하면, 비록 그것을 귀신鬼神의 힘이라고 이르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대가 능히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또 어찌 붕우朋友(벗)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 [성호선생전집星湖先生全集] 권지卷之 삼십三十, 답권기명答權旣明.

 

 

 

○ 虛名浮利 縱得之未必福 縦失之未必禍.

 

허망한 이름과 부질없는 이끗은 설사 그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福이 되지는 못하고 비록 잃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화禍가 되지는 못한다. 

 

 

 

○ 古之得道者 窮亦樂通亦樂 此所樂非窮通 窮通外物也.

 

예로부터 도道를 얻은 자는 궁窮하여도 즐기고 통通하여도 즐겼다. 이 즐김[樂]이라 하는 것은 궁窮하고 통通함이 아니니, 궁窮하고 통通함은 밖의 물건[外物]인 것이다. 

 

 

 

○ 世之籠爵祿者 因其所好而籠之 我若無所好 則超出乎萬物之外 誰得而籠之

 

세상의 새장인 벼슬과 녹봉은 그 좋아하는 바를 인因하여 그를 가둔다. 내가 만약 좋아하는 바가 없다면 만물萬物의 밖으로 뛰어날 것이니 누가 이를 가둘 수 있겠는가?

 

 

 

○ 人若呼我牛 呼我馬 我俱應之 我有其實 人與之名 我若不受 再受其殃.

 

남이 만약 나를 소라고 부르고 나를 말이라 불러도 나는 모두 그에 응應할 것이다. 나에게 그러한 실상이 있어서 남이 이름을 지어준 것인데 내가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그 앙화(殃禍, 어려움)를 받게 되리라.

 

 

⋅ 「昔者 子呼我牛也 而謂之牛 呼我馬也 而謂之馬. 苟有其實 人與之名而不受 再受其殃. 吾服也恒服 吾非以服有服」

 

「지난날 자네가 나를 소라고 불렀다면 나는 소라고 했을 것이고, 나를 말이라고 불렀다면 나는 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진실로 그럴 만한 실상이 있어 남이 나에게 그런 이름을 주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그 재앙을 받게 되리라. 나의 복종은 변함없는 복종이지, 내가 복종한다고 해서 복종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장자莊子> [천도天道]

 

 

 

○ 謙讓下心 處衆之德也 江海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故也.

 

겸양謙讓과 하심下心은 대중 속에서 사는 덕德이다. 강과 바다가 능히 온갖 계곡의 왕王이 되는 것은, 그렇게 잘 아래로 향하는 까닭이다. 

 

 

 

○ 天無不覆 地無不載 君子法之.

 

하늘은 덮지 않는 것이 없고 땅은 싣지 않는 것이 없으니, 군자는 그것을 본받는다. 

 

 

 

○ 人心生一念 天地悉皆知.

사람이 마음에 한 생각만 내어도, 하늘과 땅은 모두 다 안다.

 

 

 

○ 人間私語 天聞若雷 暗室虧心 神目如電.

 

사람 사이의 사사로운 말은 하늘이 우레와 같이 듣고, 어두운 방에서의 이지러진 마음은 귀신이 번개와 같이 본다. 

 

 

 

○ 君子愽取衆善 以輔其身 書不必孔子之言 藥不必扁鵲之方 合義者從 愈病者良.

 

군자君子는 온갖 선善을 두루 취取함으로써 그 몸을 돕는다. 글이 반드시 공자孔子의 말일 필요는 없고 약藥이 반드시 편작扁鵲의 처방處方일 필요는 없다. 뜻에 맞는 것은 따를지니,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 萬竅之風 出一虛 入一虛 百家之論 是一心 非一心.

 

만 가지 구멍의 바람은 나오되 한 허공[一虛]이요 들어가되 한 허공[一虛]이라. 백가百家의 논설論說도 (이와 같아서) 옳되 한 마음[一心]이요 그르되 한 마음[一心]이다.  

 

 

 

○ 此心 天地之逆旅 天地 萬物之逆旅 至人 一生一死 成然寐 遽然覺.

 

이 마음은 천지天地의 여관[逆旅]이요 천지天地는 만물萬物의 여관이다. 지인至人은 한 번 나고 한 번 죽으니, 형체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잠을 자다가 정신이 떠나면 홀연히 깨어난다. 

 

 

⋅ 「今一以天地爲大爐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 成然寐 遽然覺(거연교).」

 

지금 하나의 천지天地로써 큰 용광로로 여기고 조화옹의 큰 다스림으로 여긴다면, 어디로 보내진들 안 될 것이 없도다. ‘형체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잠을 자다가, 정신이 떠나면 홀연히 깨어난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 此心 出無本 入無竅. 有實而無乎 處常在動用中.

 

이 마음[心]은 나오되 근본이 없고 들어가되 구멍이 없다. 실다웁게 있으되 없으니, 처處함이 항상 움직이고 작용하는[動用] 가운데에 있다. 

 

* 동용動用:  육체적 동작과 정신적 작용.

 

 

 

○ 通於一而萬事畢 虛於心而鬼神服.

 

하나를 통通하니 만사萬事가 마쳐지고, 마음을 비우니 귀신鬼神이 항복降服한다. 

 

 

 

○ 建之以無極 主之以太一 動若水 靜若鏡 應若響.

 

세움은 무극無極으로써 하고 주主는 태일太一로써 하면, 움직임은 물과 같고 고요함은 거울과 같으며 감응함은 메아리와 같다. 

 

 

 

○ 人有畏影避迹者 足愈數而迹愈多 走愈疾而影愈急 不知處陰以休影 處靜以息迹.

 

사람이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취를 피하려는 자가 있으나, 발이 더욱 잦을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지고 달아남이 더욱 빠를수록 그림자는 더욱 급하니, 그늘에 있으므로써 그림자를 쉬고 고요함에 있음으로써 발자취를 쉴 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道隱無名 知者不言 言者不知. 又言者在意 得意忘言者 可以言. 又道不可見 道不可聞.

 

도道는 은미隱微하여 이름이 없으니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또 말이란 그 뜻에 있으니 뜻을 얻고 말을 잊은 자라야 가히 말 할만하다. 또 도道는 가히 볼 수 없으며 도道는 가히 들을 수 없다. 

 

 

⋅ 「道隱無名夫惟道善貸且成」.

 

도道는 은미隱微하여 이름이 없으니, 오로지 도道는 잘 빌려주고 또 이룬다. 

 

  • <노자老子> 사십일四十一.

 

 

⋅ 「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노자老子> 오십육五十六, <장자莊子> [천도天道].

 

 

 

 

 

道家龜鑑 終

 

 

 

 

 

 

 

 

 

 

 

 

 

 

 

 

 

 

 

 

 

 

 

 

 

 

 

 

 

 

 

 

 

 

 

 

 

 

 

 

 

 

 

 

 

 

 

 

 

 

 

 

 

【선가귀감禪家龜鑑】

 

 

 

[禪家龜鑑 卷上]

 

 

○ 有一物이 於此호되 從本以來昭昭靈靈하야 不曾生하며 不曾滅하야 名不得하며 狀不得이로다. 

 

한 어떤 것이 여기에 있으되 본래本來로부터 옴에 밝고 밝으며 영靈하고 령靈하야 잠깐도 나지 아니하며 잠깐도 멸滅하지 아니하야 이름 짓지 못하며 모양 잡지 못하리로다. 

 

 

‘일물一物(한 어떤 것)’은 하물何物고(무슨 물건인고)? ○ 고인古人(옛 사람)이 원상圓相을 그려 보이시거니와, 그러나 보지 못하는 것을 구태여 이리 보이시도다. 석가釋迦도 오히려 알지 못하시거늘 가섭迦葉이 어찌 전득傳得하리오(전하리오)? 유가儒家는 ‘일태극一太極’이라 하시고 도가道家는 ‘천하모天下母’라 하시고 불가佛家는 ‘일물一物’이라 하시니, 기실其實은(실제에 있어서는) 다 ‘이것’을 지향指向하시니라. 

 

옛날 육조六祖가 이르시되, 「일물一物이 있으되 위로는 하늘을 괴고 아래로는 땅을 받쳐 상례常例로(늘) 인인人人(사람 사람)이 동용動用(육체적으로 동작하고 정신적으로 작용)하는 중中에 있나니, 이것이 무엇고?」 신회선사神會禪師가 즉시에 중중衆中(대중 가운데)에서 나와 사로되, 「이 제불諸佛의 본원本源이시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이리소이다.」 조祖가 이르시되, 「내가 일물一物이라 이름 지어도 맞지 아니하거든 네 어찌 본원本源이니 불성佛性이니 구태어 이름을 짓느냐?」 하시니, 이 신회선사神會禪師는 언어言語로 누설漏洩하니 육조六祖의 얼자孽子(서자庶子)이라. 

 

또 회양선사懷讓禪師가 와서 육조六祖께 참예參禮하시거늘 조祖가 물으시되, 「어디에서 오는가?」 사師가 사로되, 「숭산嵩山에서 옵니다.」 조祖가 물으시되, 「무엇이 이리 오더냐?」 하시거늘, 사師가 팔년八年을 궁구窮究하여 사로되, 「일물一物(한 어떤 것)이라 정사呈似하여도(비슷하게 일러도) 맞지 아니하옵니다.」 하니, 이 회양선사懷讓禪師는 자긍묵두自肯點頭하므로(스스로 긍정하여 고개를 끄덕이므로) 육조六祖의 적자嫡子이라. 

 

‘종본이래從本以來’는 이것이 목숨이 그지없어 과거過去가 비롯함이 없도다. ‘소소영영昭昭靈靈’은 수증가차修證假借하지(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아니하여 허虛하고 영靈하며 적寂하고 묘妙하여 자연自然히 명통明通하도다(밝게 통하도다).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일찍이 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함)’은, 범부凡夫와 외도外道는 나는 것으로 멸滅을 삼고 멸滅하는 것으로 남을 삼거니와, 이 정법正法은 본래本來로 나지 아니하므로 이제 멸滅도 없어 상주常住하여(항상 머물러) 불천不遷함(옮기지 아니함)이 허공虛空이 본래本來 나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이제 또 멸滅 없음과 같도다. ‘명부득名不得’은 말씀이 미치지 못하고 ‘상부득狀不得’은 뜻이 미치지 못하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하나니라. 

 

 

 

○ 佛祖出世가 無風起浪이로다.

 

부처와 조사祖師가 세간世間에 나심이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을 이룸이로다. 

 

 

‘부처[佛]’는 자성自性을 깨달으시어 만덕萬德을 갖추신 이름이시고 ‘조사祖師’는 불심종佛心宗을 깨달으시되 행行과 해解가 서로 맞으신 이름이시니라. 인인人人(사람 사람)이 본구本具하며(본래로 갖추었으며) 개개箇箇가(개인 개인이) 원성圓成하야(원만히 이루어) 연지臙脂 찍으며 분粉 바르지 아니한 면목面目으로 보건댄 불조佛祖의 출세出世하심이 대평세大平世(크게 태평한 세상)에 난亂(어지러움)을 일으키심이며 무풍해無風海(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심이라 이를지로다. <허공장경虛空藏經>에 이르시되, 「문자文字를 펴냄이 이 마업魔業이며 가사假使(설령) 불어佛語라도(부처님의 말씀이라도) 이 마업魔業이니 문자文字를 여의며 말씀을 여의어야 마魔가 작용作用하지 못하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선사先師가 이르시되, 「이르는 것은 그만두지 아니하려니와 오직 지묵紙墨(종이와 먹)에 오를까 두려워하노라.」 하시니 또한 이 뜻이로다. 차此(이) 일절一節은 부처를 치시며 조사祖師를 치시옵고 법法을 빼앗으며 사람을 빼앗아 본대평本大平 소식消息을 잡아 나투시도다.

 

 

 

○ 然이나 法有多義하고 人有多機하니 不妨施設이로다.

 

그러나 법法에는 많은 의용義用(뜻의 쓰임)이 있고 인人(사람)에게는 많은 근기根機가 있으니 펴냄이 방해妨害롭지 아니하도다. 

 

 

‘법法’은 본심本心이요 ‘인人’은 중생衆生이라. ‘법法’에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의 두 의용義用이 있고 ‘인人’에는 돈오頓悟과 점수漸修의 두 근기根機가 있으므로, 가지가지로 문자文字와 언어語言를 펴냄이 방해妨害롭지 아니하도다. 위에는 이미 본분本分을 의론議論하시므로 불조佛祖가 다 공능功能이 없으시거니와 이는 신훈新熏을 의론議論하시므로 불조佛祖의 대은大恩을(크신 은혜를) 감격感激함이로다. 중생衆生이 비록 나면서 두원족방頭圓足方하나(머리는 둥글고 발은 모나나), 그러나 혜일慧日이 무명無明의 구름에 숨음이 태중胎中에서 눈 멂과 같아서 흑백黑白을 가리지 못하므로, 만약 불조佛祖가 방편方便의 바람으로 무명無明의 구름을 쓸어내시며 금침金針으로 눈의 가물거림을 걷지 아니하시면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영영永永히 그칠 기약期約이 없을 것이로다. 슬프다! 몸을 부수며 뼈를 두드려도 불조佛祖의 대은大恩을 소분小分(조금)도 갚지 못하리로다. 

 

 

 

○ 强立種種名字호되 或心或佛或衆生이라 하시니 不可守名而生解이니 當體便是라 動念即乖하리라.

 

구태여 갖가지로 이름을 지으시되 혹或 마음이라 하시며 혹或 부처라 하시며 혹或 중생衆生이라 하시니, 이름 지켜 앎을 냄이 옳지 못하리니 다다른(당當한) 체體가 곧 이것이라 념念을 움직이면 즉시即時에 어기리라. 

 

 

‘마음’은 영지靈知의 이름이요 ‘부처’는 선각先覺의 이름이시고 ‘중생衆生’은 범凡과 성聖의 모든 이름이라. 이름도 또한 실實의 빈賓이라 빈賓으로써 실實을 구求함이 천지天地로 현격懸隔하리라. 일물一物은 본래本來 차별差別이 없거늘 미인迷人(미혹한 사람)을 위爲하시어 세 가지의 차별差別된 이름을 세우시니라. 이것의 체體는 시비是非를(옳고 그름을) 여의니, 만약 조금이라도 여겨서 헤아리면 문득 어기리라.

 

 

 

○ 世尊三處傳心者가 爲禪旨요 一代所說者가 爲敎門이니, 고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라 하니라.

 

세존世尊이 세 곳에서 마음 전傳하신 것은 선禪의 종지宗旨이고 한 대代에 이르신 것은 교문敎門이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선禪은 이 부처의 마음이요 교敎는 이 부처의 말씀이라」 하시니라.

 

 

‘세존世尊’은 부처의 별명別名(다른 이름)이시니 세간世間의 추존推尊하옵는(추앙하여 높이 받드는) 뜻이라. ‘삼처三處’는 부처께 가섭迦葉이 전심傳心하신(마음을 전해 받은) 곳이니, 제일처苐一處는 다자탑多子塔 전前(앞)에 분반좌分半座하시고(자리를 나누어 앉으시고), 제이처苐二處는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염화시중拈花示衆하시고(연꽃을 들어 대중에 보이시고), 제삼처苐三處는 사라쌍수간娑羅雙樹間에 곽시쌍부槨示雙趺하신(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곳이라. ‘일대소설一代所說’은 부처의 사십구년四十九年을 이르신 말씀이시니 아난阿難에 유통流通하신 법法이라. 여래如來의 행적行迹에 이르시되, 「선등禪燈(선의 등불)일랑 가섭迦葉의 마음에 켜시고 교해敎海(교敎의 바다)일랑 아난阿難의 입에 부으시다.」 하시니라.

 

 

 

○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面壁이 皆是敎迹이어니와 得之於心則世間의 麤言細語가 皆是敎外別傳禪旨이리라.

 

만약 사람이 입에서 잃어버리면 염화拈花와(꽃을 드신 것과) 면벽面壁(벽을 보고 마음을 관하신 것)이 다 교敎의 자취이거니와 마음에 득得하면(얻으면) 세간世間의 거친 말씀과 미세微細한 말씀이 다 이 교敎 밖의 각별各別히 전傳하신 선禪의 종지宗旨이리라. 

 

 

‘실지어구失之於口(입에서 잃어버리면)’는 이 법法이 본래本來 명자상名字相(이름과 글자의 상相)을 여의며 언설상言說相(말로 설하는 상相)을 여의며 심연상心緣相(마음이 반연하는 상相)을 여의나니, 만약 명자상名字相과 언설상言說相과 심연상心緣相을 가져서 입에 견주어 쓰며 마음에 헤아리면 세존世尊의 염화拈花와 달마達摩의 면벽面壁이 교敎의 자취이거니와, 일체一切 분별分別을 다 놓아 자심自心을 세우면 삼가촌리三家村裏(세 집이 모일만한 마을 속)에 우부우부愚夫愚婦(우매한 사내와 아낙네)가 다 상례常例로(늘) 정법正法을 이르며[說] 십자十字(열십자 모양)의 가두街頭(길거리)에 초동목수樵童牧叟(나무하는 아이와 양치는 늙은이)가 다 깊이 실상實相을 이르며 또 앵가연어鶯歌鷰語가(꾀꼬리의 노래와 제비의 말이) 다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하며 우후계명牛吼鷄鳴이(소 울음과 닭 울음소리가) 다 이 법法을 번역翻譯하도다. 

 

옛날 보적선사寶積禪師가 도자屠者(도축屠畜하는 사람)의 집에 가셨는데 고기 사는 사람이 이르되, 「정精한 데를(좋은 곳을) 일편一片(한 편) 베어 달라.」 하거늘 도자屠者가 이르되, 「저 소의 어느 것이 정精하지(좋지) 아니하리오?」 하거늘 사師가 그 말씀에 대오大悟하시니라. 또 보수화상寶壽和尙이 저잣거리 가운데 앉으시어 두 사람의 농담弄談함을 보시더니 한 사람이 뺨을 치거늘 맞은 사람이 이르되 「너는 면목面目 없는 놈이로다.」 하시거늘 사師가 이 말씀에 대오大悟하시니, 이로써 보건대 세간世間의 추세麁細한(거칠고 미세한) 말씀이 다 교외敎外(교 밖)의 선지禪旨인 것을 알 것이로다. 그러나 사람이 한갓(공연히) 이 말씀만 보고 친절親切히 반조返照하는 공부工夫가 없으면 마침내 득의得意를 한 허두한虛頭漢(허황된 놈)이 됨을 면免치 못하리라. 

 

 

 

○ 吾有一言하니 絶慮忘緣이로다. 兀然無事坐호니 春來草自靑이로다.

 

내 한 말씀을 두었나니, 염려念慮를 끊고 연경緣境을(반연攀緣된 경계를) 잊음이로다. 올연兀然하여 무사無事히(일 없이) 앉으니 봄이 옴에 풀이 절로 푸르도다.

 

 

‘올연兀然’은 무심無心한 모양이라. 이 사람이 마음에 자득自得하야(스스로 얻어) 무생경계無生境界(남이 없는 경계)에 기래끽반飢來喫飯하고(배고프면 밥을 먹고) 곤래즉면困來即眠하니(피곤하면 잠을 자니) 일 없는 한도인閑道人(한가한 도인)의 진락眞樂(진실한 낙)이라 이를지로다. 연려緣慮가 나는데 덜어버린 것이 아니며 일이 있는데 없게 한 것이 아니라 본래本來로 연緣이 없으며 본래本來로 일이 없어 녹수청산綠水靑山(푸른 물 푸른 산)과 송풍나월松風蘿月(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비치는 달)에 임의任意로(마음대로) 소요逍遙하며(노닐며) 자맥홍진紫陌紅塵과(도성都城 길 붉은 먼지와) 어촌주사漁村酒肆(어촌 술집)에 안한자재安閑自在하여(편안하고 한가롭게 자재하여) 연대年代와 갑자甲子는(시간 가는 것은) 알지 못하되 봄이 옴에 풀이 절로 푸르도다.

 

 

 

○ 咄哉 丈夫여 將頭覓頭하야 馳求不歇이로다. 若言下에 廻光하야 更不別求하면 與祖佛無殊하야 當下無事하리라.

 

애닯다! 장부丈夫여. 머리를 가지고서 머리를 찾아 치달려 구求함을 그치지 아니한다. 만약 말씀 끝에 심광心光(마음 빛)을 돌이켜 다시 다른 데 가 구求하지 아니하면 불조佛祖와 다름이 없어 즉시에 일 없으리라. 

 

 

돌자咄者는(‘돌咄’이라 함은) ‘애달프다’ 하는 소리이라. 옛날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가지고서 머리를 찾더니, 이제 중생衆生이 마음을 가지고서 마음을 찾는 것이, 잊고자(잊어버리고자 하면) 더욱 어기며 달리고자(쫓아가고자 하면) 더욱 멀어지니 진실眞實로 ‘미치다[狂]’라고 이를지로다. 만약 머리 잃지 아니한 줄을 알면 범성凡聖(범부와 성인)이 일체一體(한 몸)이라 즉시에 일이 없으리라. 

 

 

 

○ 經에 云, 狂性이 自歇하면 頭非外得하리라. 縱未歇狂한들 亦何遺失이리오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미친 성性이 이제 헐歇하면(쉬면) 머리를 밖에 가서 얻지 아니하리라. 비록 미침을 헐歇치(쉬지) 못한들 또한 어찌 잃으리오?」 하시니라. 

 

 

오직 광심狂心(미친 마음)을 헐歇하면(쉬면) 머리는 본래本來 안연安然(그대로 편안)하였도다. 비록 제 광심狂心(미친 마음)을 헐歇하지(쉬지) 못한들 어찌 제 미혹함을 인因하여 제 머리를 잃으리오?

 

 

 

○ 經에 云 一切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하는 것이 如見空花의 起滅이로다. 然이나 妙覺圓照는 離於花翳하니 故로 翳眼으로 觀空하면 無花에 見花라 하시고 又云 翳差하면 花除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남이 없는 데에 거짓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을 보는 것이 허공虛空 꽃의 기起와(일어남과) 멸滅을(사라짐을) 보는 것과 같도다.」 하였다. 그러나 묘각원조妙覺圓照는 꽃과 가리움을 여의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가리운 눈으로 허공虛空을 보면 꽃 없는데 꽃을 보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눈에 가리운 병이 나으면 거짓 꽃이 스스로 없어지리라.」 하시니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부처님 외外에는 다 이것이라. ‘묘각원조妙覺圓照’는 인인人人(사람 사람)의 본심本心(본 마음)이요 ‘예翳’는 안병眼病(눈병)이라. ‘예翳’는 견분見分에 견주시고 ‘화花’는 상분相分에 견주시고 ‘허공虛空’은 진성眞性에 견주시니라. 중생衆生이 미혹하여 생사生死를(나고 죽음을) 봄은 공화空花가(허공꽃이) 일어남과 같고 깨달아 열반涅槃을 얻음은 공화空花가(허공꽃이) 멸滅함과 같도다. 그러나 허공虛空의 성性은 잠깐도 기멸起滅(일어나고 멸함)이 없거늘 안병眼病(눈병)으로써 이견二見을(두 견해를) 내고, 진각眞覺의 성性은 잠깐도 생열生涅(생사와 열반)이 없거늘 안병妄病(망령된 병)으로써 이견二見을(두 견해를) 내도다. <사익경思益經>에 이르시되, 「제불諸佛이 세간世間에 나심이 중생衆生을 생사生死에서 내어 열반涅槃에 들이기 위爲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의 이견二見(두 견해) 제도濟度함을 위爲하다.’ 하시니라. 

 

 

 

○ 離心求佛者는 外道요 執心爲佛者는 爲魔라. 大抵忘機는 是佛道요 分別은 是魔境이라. 又 分別을 不生하면 虛明이 自照이리라. 

 

마음을 여의고 부처를 구求하는 이는 외도外道요 마음을 집執(집착)하야 부처 삼는 이는 마魔이라. 대저大抵 기機(기틀) 잊음은 이 부처의 도道요 분별함은 이 마魔의 경계境界이라. 또 분별分別을 내지 아니하면 허虛하고 밝음이 제 스스로 비추리라.

 

 

연緣[攀緣]하여 생生한 만법萬法이 가명假名(거짓 이름)이라 무실無實커늘(실다움이 없거늘) 중생衆生이 미혹迷惑하여 명상名相(이름과 모양)에 착着(집착)하도다. 허명虛明한(비고도 밝은) 자성自性을 알지 못하므로 진퇴進退(나아가고 물러남)에 어겨서 외도外道와 사마邪魔의 이름을 얻도다. ‘기機’는 능能과 소所의 마음 일어나는 곳이라. 

 

 

 

○ 若不秘重得意一念하고 別求見性神通則豈有休歇時이리오. 一念者는 一法也이니 所謂衆生心也이라. 

 

만약 뜻을 얻은 일념一念일랑 비중秘重히(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각별各別히 견성見性과 신통神通을 구求하면 어찌 휴헐休歇할(쉴) 시절時節이 있으리오? ‘일념一念’이란 것은 일법一法이니 이른바 중생심衆生心이라. 

 

 

이는 향외치구向外馳求하는(밖을 향하여 치달려 구하는) 병病이니 역시亦是 마외魔外(마군과 외도)의 이갱二坑(두 구덩이)이라. 바로 일념불생一念不生하여(한 생각이 나지 아니하여) 전후제단前後際斷하면(앞과 뒤가 끊어지면) 삼세三細와 육추六麤가 다 그쳐 조체照體(비추는 체體)가 독립獨立하여(홀로 서서) 곧 과위果位가 진불眞佛(참 부처)이리라. 

 

* 삼세三細: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

육추六麤: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

 

 

 

○ 淨名이 云 我의 本性이 元自淸淨하니 即時豁然하면 還得本心이라 하시며 又 一悟에 即至佛地라 하시니라. 

 

정명淨名이 이르시되, 「나의 본성本性이 본래本來 제 스스로 청정淸淨하니,  즉시에 훤출하여 도로 본심本心을 얻으리라.」하시며, 또 「한 깨달음에 곧 불지佛地(부처님 땅)에 이르리라.」 하시니라. 

 

 

이는 본성청정本性淸淨을 이르시니라. 

 

 

 

○ 祖師가 云 性自淸淨하니 起心着淨하면 却生淨妄하리라. 妄無處所하야 着者가 是妄이니 若不生心動念하면 自然無妄이라 하시니라. 

 

조사祖師가 이르시되, ‘성性이 제 스스로 청정淸淨하니 마음 일으켜 깨끗함에 착着(집착)하면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妄이 생겨나리라. 망妄이란 것은 자리가 없어서 착着(집착)함이 이 망妄이니, 만약 마음 내며 념念(생각) 움직이지 아니하면 자연自然히 망妄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이는 망성妄性(망妄의 성性)이 본공本空(본래 공空함)을 이르시니라. 

 

 

 

○ 敎門엔 惟傳一心法하시고 禪門엔 惟傳見性法하시니 心이 即是性이요 性이 即是心이니라.

 

교문敎門에는 오직 일심법一心法을 전傳하시고 선문禪門에는 오직 견성법見性法을 전傳하시니 심心이 곧 성性이요 성性이 곧 심心이니라. 

 

 

‘마음’은 이 중생衆生의 본원本源心이라 무명無明의 상相을 취取하는 마음이 아니요, ‘성性’은 이 일심一心의 본법성本法性이라 성性과 상相의 서로 맞추어 보는 성性이 아니니라. 심자‘心’字와 성자‘性’字가 각각各各 심천深淺(깊고 얕음)이 다르거늘 선자禪者(선禪을 행하는 자)와 교자敎者(교敎를 행하는 자)가 다 이 이름만 알아 혹或 옅은 것을 깊이 알며 혹或 깊은 것을 옅게 알아 관觀과 행行에 대병大病(큰 병)이 되므로 이리 자세仔細히 가리시니라(분변分辨하시니라). 

 

이 일심一心의 체성體性은 깊고 넓어 만법萬法을 갖추어 끌어 동動하지 아니하되 연緣을 좇으므로 체體에 즉即하며 용用에 즉即하며 인人에 즉即하며 법法에 즉即하며 망妄에 즉即하며 진眞에 즉即하며 사事에 즉即하며 리理에 즉即하여 의세義勢는 천만차별千萬差別이로되 도리어 담연상적湛然常寂하여 일체一切가 다 갖추어 있으므로 성性 아니며 상相 아니며 리理 아니며 사事 아니며 부처 아니며 중생衆生 아닌 등等이라. 이 같이 대불가사의大不可思議이므로 종사宗師가 바로 인인人人(사람 사람)의 현전일념現前一念을 가르쳐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시거든, 학자學者가 그 언하言下(말 아래)에 대오大悟하면(크게 깨달으면) 백천百千의 법문法門과 무량無量한 묘의妙義를(묘한 뜻을) 일시一時에 증득證得하나니라. 

 

이는 비록 선禪과 교敎를 대변對辯하셔도 망리성불望理成佛하는(이치로 성불하기를 바라는) 교敎의 뜻이 아니니라. 선사先師가 이르시되, 「진심眞心은 포함중묘包含衆妙(온갖 묘妙를 포함)하되 역초언사亦超言辭(또한 언사言辭를 초월)하고 진성眞性은 리명절상離名絶相하되(이름을 여의고 모양을 끊었으되) 연기무애緣起無碍(연緣하여 일어남에 걸림이 없다)」라 하시니라. 

 

 

 

○ 心則從妙起明이니 如鏡之光이요 性則即明而妙이니 如鏡之體이니라.

 

마음은 묘妙를 좇아 밝음이니 거울의 빛과 같고, 성性은 밝음에 즉即하야 묘妙하니 거울의 체體와 같으니라. 

 

 

이는 상象 외外의 법法을 한갓 말씀이 미치지 못하므로 상문上文(윗 글)에 심자‘心’字과 성자‘性’字를 다시 비유譬喩로 나타내시니라. 

 

 

 

○ 敎門에 惟執悉達이 一生成佛者는 爲小乘機也이요 多劫에 修行하야 相盡性顯하야사 方得成佛者는 爲大乘機也이요 一念悟時가 名爲佛者는 爲頓機也이요 本來成佛者는 爲圓機也이니, 猶禪門에 煩惱와 菩提를 異執者는 爲皮也이요 斷煩惱하고 得菩提者는 爲肉也이요 迷則煩惱요 悟則菩提者는 爲骨也이요 本無煩惱라 元是菩提者는 爲髓也이니라. 

 

교문敎門에 ‘오직 실달悉達이 일생성불一生成佛하시니라’하고 집執하는 이는 소승근기小乘根機요, ‘여려 겁劫에 수행修行하야 상相이 다하고 성性이 나투어야 비로소 성불成佛하리라’ 하는 이는 대승근기大乘根機요, ‘일념一念 깨닫는 시절時節이 이름이 부처라’ 하는 이는 돈교근기頓敎根機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하는 이는 원교근기圓敎根機이니, 선문禪門에 ‘번뇌煩惱와 보리菩提를 다르다’ 한 이는 가죽이요, ‘번뇌煩惱를 끊고 보리菩提를 득得하리라’ 한 이는 살이요, ‘미혹하면 번뇌煩惱요 깨치면 보리菩提라’ 한 이는 뼈요, ‘본래本來 번뇌煩惱 없어 원시보리元是菩提(원래 이 보리菩提)라’ 한 이는 수髓(골수)라 하심과 같으니라. 

 

 

범어梵語에 ‘실달悉達(싯다르타)’은 여기서 이름에 돈길頓吉이니, 석가釋迦의 태자太子때 이름이니라. ‘상相’은 생生과 주住와 이異와 멸滅이니 이는 생기生起(생生하여 일어남)이라. 멸滅은 십신위十信位에서 끊어지고 이異는 삼현위三賢位에서 끊어지고 주住는 십현위十聖位에서 끊어지고 생生은 불위佛位에서 끊어지나니, 이는 수단修斷(닦아 끊음)이라 펴면 오십오위五十五位요 줄이면 사위四位이니 오직 생념生念과 멸념滅念을 의론議論하실 따름이라. ‘번뇌煩惱’는 우전憂煎(근심으로 끓임)이 위번爲煩(번煩이 됨)이요 미난迷亂(미혹으로 어지러움)이 위뇌爲惱(뇌惱가 됨)이니, 심心(마음)과 경境이(경계가) 서로 싸우는 것이라. 범어梵語에 ‘보리菩提’는 여기서 이름에 각覺이라. 

 

교문하敎門下는(‘교문敎門~’ 아래로는) 여래如來의 사교四敎를 의론議論하시니 ‘오직 실달태자悉達太子만이 일생一生에 성불成佛하시고 여인餘人(나머지 사람)은 불성佛性이 없어 성불成佛 못하리라.’ 고 아는 이는 ‘소승근기小乘根機’요, ‘삼무수겁三無數劫에 오위五位를 복단伏斷하여(항복받고 끊어) 십지十地가 만족滿足하고 사지四智가 원명圓明하여 처음에 멸상滅相을 끊고 마침내 생상生相을 그쳐 일념상응一念相應하야사 상주常住한 심성心性을 보리라.’ 고 아는 이는 ‘대승근기大乘根機’요, ‘무시無始로(비롯함이 없이) 미도迷倒(미혹하고 전도)하여 망인중생妄認衆生(망령되이 중생을 인식)하다가 일념一念(한 생각) 오시悟時(깨달은 때)가 전체全體로 시불是佛이라(이 부처라)’고 아는 이는 ‘돈교근기頓敎根機’요, ‘생生과 주住와 이異와 멸滅이 다 없어 본래本來 평등平等하여 동일同一한 각성覺性이라’고 아는 이는 ‘원교근기圓敎根機’이라. 선문하禪門下는(‘선문禪門~’아래로는) 달마達摩의 사제자四弟子(네 제자)의 견해見解가 심천深淺(깊고 얕음)을 가리시니(분변分辨하시니), ‘피皮’는 도부道副요, ‘육肉’은 총지㧾持요, ‘골骨’은 도육道育이요, ‘수髓’는 혜가慧可이라. 

 

대저大抵 혹或 ‘교敎라’ 혹或 ‘선禪이라’ 함이 오직 사람의 견해見解가 심천深淺(깊고 옅음)에 있지 본법本法에는 간섭干涉치 아니하니라. 슬프다! 미혹하면 촉사觸事가(부딪히는 일마다) 면장面墻(담을 마주함)이요 깨치면 만법萬法이 임경臨鏡(거울을 비춤)이며, 국집局執하면 좌정관천坐井觀天(우물에 앉아 하늘을 바라봄)이요 통달通達하면 등산망해登山望海로다(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봄이로다). 

 

 

 

○ 然이나 諸佛說經은 先分別諸法하시고 後說畢竟空이시거니와 祖師示句는 迹絶於意地이시거든 理顯於心源이니라.

 

그러나 제불諸佛이 이르신 경經은 먼저 제법諸法을 분별分別하시고 후後에 필경공畢竟空을 이르시거니와, 조사祖師가 보이신 구句는 자취가 의지意地(뜻 땅)에서 끊어지시거든 리理(이치)가 심원心源에 드러나나니라.

 

 

‘적迹’은 조사祖師의 언적言迹(말의 자취)이요 ‘의意’는 학자學者의 의지意地(뜻 땅)이라. ‘제불諸佛’은 만대萬代에 의빙依憑을 위爲하시므로 리理를 위시委示하시고 ‘조사祖師’는 즉시即時 도탈度脫에 계시므로 의意에 현통玄通케 하시니라. 

 

 

 

○ 諸佛은 說弓하시고 祖師는 說絃하시니, 佛說無碍之法하샤사 方歸一味이어니와 拂此一味之迹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하시니라. 故로 云 庭前栢樹子話가 龍藏에 所未有底라 하시니라. 

 

제불諸佛은 활을 이르시고 조사祖師는 시울(줄)을 이르시니, 부처는 걸림이 없는 법法을 이르시어 비로소 일미一味(한 맛)에 돌아가시거든 이 일미一味의 자취를 떨어버려야 비로소 조사祖師의 보이신 일심一心을 나타내시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뜰 앞에 잣나무)’라는 화話(화두)는 용장龍藏(용궁의 장경藏經)에도 있지 아니한 것이라.」 하시니라. 

 

 

◉ 제불諸佛은 곡시曲示하시므로(곡진曲盡히 보이시므로) ‘비궁譬弓(활등에 비유)’하시고 조사祖師는 직시直示하시므로(곧바로 보이시므로) ‘비현譬絃(활줄에 비유)’하시니라. ‘용장龍藏’은 불佛(부처님) 일대一代에 소설所說하신(설법하신) 용궁만장龍宮萬藏(용궁에 있는 장경藏經)의 법法이시니라. 유승有僧(어떤 스님)이 조주화상趙州和尙께 문問하사오되(물으시되), 「어느 것이 이 조사祖師가 서래西來하신(서쪽에서 오신) 뜻이니잇고?」 주州가 이르시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뜰 앞에 잣나무)니라.」 하시니 이 화話(화두)는 어로語路와(말길과) 의로義路가(뜻길이) 다 그쳐(끊어져) 의의상량擬議商量치(여겨서 헤아리지) 못하리니, 역시亦是 상문上文(윗 글)에 ‘적절어의지迹絶於意地(뜻 땅에서 자취가 끊어지니) 이현어심원理顯於心源(이치가 마음 근원에서 드러난다)’함이라. 그러므로 조사祖師가 서래西來하신(서쪽에서 오신) 단전밀지單傳密旨는(홑으로 전하신 비밀한 뜻은) 오교일승五敎一乘 밖에 멀리 벗어나신 것을 알 것이로다. [현중명玄中銘]에 역운亦云(또한 이르시되), 「호가곡자胡家曲子(부처님 나라의 노래)가 운출청소韻出靑宵라(푸른 하늘에서 울려 나온다).」 하시도다. 

 

 

 

○ 故로 學者는 先以如實言敎로 委辨不變隨緣二義가 是自心之性相이며 頓悟漸修兩門이 是自行之始終然後에 放下敎義하고 但將自心에 現前一念하야 參詳禪旨則必有所得하리니 所謂出身活路이니라.

 

그러므로 학자學者(배우는 이)는 먼저 실實다운 언교言敎로써 불변不變과(변變하지 않음과) 수연隨緣의(연緣을 따름의) 이의二義가(두 뜻이) 이 자심自心(자기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며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양문兩門이 이 자행自行(자기 수행)의 시始와 종終인 줄을 위곡委曲(곡진曲盡)히 가린 후後에, 교敎의 뜻을 놓고 오직 자심自心에 현전일념現前一念을 가져 선지禪旨를 상명祥明히(상세히 밝게) 참구叅究하면 반드시 득得할(깨달을) 곳이 있으리니, 이르신바 「출신出身할(몸을 뛰어날) 산 길[活路]」이니라. 

 

 

 

이 위는 선교禪敎를 대변對辨하시다가 이에 이르러서는 시틋하여(시들해져서) 선禪에 결단決斷하시니라. 상근인上根人은 이 한限(한계)에 덜지 아니하여 이미 다 알려니와 말세학자末世學者는 법안法眼이 분명分明치 못하여 혼란정법渾亂正法(정법을 혼란)할까 선성先聖(앞선 성인)이 시름하시어 자세仔細히 분변分辨하시니(분별하여 가리시니) 학자學者는 다시금 잠심완미潛心玩味(마음을 가라앉혀 잘 씹어 음미)할지어다. 의교관행依敎觀行(교敎를 의지하여 관행觀行함)은 천성千聖(일천 성인)의 궤철軌轍(자취)이어니와 현애철수懸崖撤手(절벽에 매달려 손을 놓음)이라야 충천장부衝天丈夫(하늘을 찌르는 장부)이로다. ‘불변不變(변치 않음)’은 심진여心眞如요 ‘수연隨緣(인연을 따름)’은 심생멸心生滅이며 ‘성性’은 체體요 ‘상相’은 용用이라. ‘돈오頓悟’는 불변不變이요 ‘점수漸修’는 수연隨緣이며 ‘시始’는 인因이요 ‘종終’은 과果이라.

 

 

 

○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이언정 莫參死句이어다.

 

대저大抵 학자學者는 모름지기 산 구句를 참구叅究할지언정 죽은 구句는 참구叅究하지 말지니라. 

 

 

‘활구活句’는 선禪이요 ‘사구死句’는 교敎이라. 차하此下(이 아래로)는 활구活句의 공부工夫를 자세仔細히 가리시니라. 

 

 

 

○ 凡本叅公案上에 切心做工夫를 如雞가 抱卵하며 如猫가 捕鼠하며 如飢가 思食하며 如渴이 思水하며 如兒가 憶母하면 必有透徹之期하리라.

 

대범大凡 참선本叅하는 공안公案에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工夫 지음을 닭이 알 안 듯 하며, 고양이 쥐 잡듯 하며, 주린 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이 물 생각하듯 하며, 아이 어미 그리워하듯 하면 반드시 사무칠 기약期約이 있으리라.  

 

 

‘공안公案’은 조사祖師의 화두話頭이니 본참공안本叅公案은 일천칠백칙화두一千七百則話頭에서 처음 맡아 참구叅究하는 화두話頭라. ‘계포란雞抱卵(닭이 알 안 듯 함)’은 난기煖氣를(따듯한 기운을) 상속相續하야사 명근命根(생명)을 이루고 명근命根을 이루고도 지어자졸일성至於子啐一聲에(새끼의 ‘쪼르르’ 하는 한 소리에 이르러서) 모탁母啄(어미가 부리로 쪼아줌)을 못 미치면 그 알이 썩나니, 이는 공부工夫에 시종始終(시작부터 끝까지) 간단間斷(사이가)없음을 견주시니라(비유하시니라). 또 ‘묘猫의 서鼠(고양이의 쥐)’와 ‘기飢의 식食(배고픔의 밥)’과 ‘갈渴의 수水(목마름의 물)’와 ‘아兒의 모母(아이의 어미)’가 다 이 진실절심眞實切心(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이니, 화두話頭도 이 절심切心(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이루지 못하리라. 

 

 

 

○ 先德이 云 叅禪은 須透祖師關이요 妙悟는 要窮心路絶이라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참선叅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사무치고 미묘微妙한 깨달음은 모름지기 마음 길 끊어진 데에 다하여라.」 하시니라. 

 

 

‘관關’은 거래去來가(오고 감이) 불통不通한(통하지 아니한) 것이니, 조사祖師의 공안公案에 심의식心意識으로 통通하지 못하는 것을 견주시니라. 

 

 

 

○ 高峯이 云 叅禪은 須具三要이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나, 苟闕其一이면 如折足之鼎하여 終成廢器라 하시니라.

 

고봉高峯이 이르시되, 「참선叅禪은 모름지기 세 마루(종요宗要)가 갖추어져야 하리니, 하나는 큰 신근信根[信心]을 둘 것이요 둘은 큰 분지憤志[憤心]를 둘 것이요 셋은 큰 의정疑情[疑心]을 둘 것이니 진실眞實로 그 하나라도 궐闕하면(빠지면) 발 꺾인 솥이 마침내 폐기廢器가(못쓰는 그릇이) 됨과 같으리라.」 하시니라. 

 

 

불佛이 이르시되, 「성불成佛(부처를 이룸)엔 신위근본信爲根本(신信이 근본이 됨)이라.」 하시고, 영가永嘉가 이르시되, 「수도修道(도道를 닦음)엔 선수입지先須立志라(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우라)」 하시고, 몽산蒙山이 이르시되, 「공부工夫엔 불의언구不疑言句가(언구言句에 의심하지 않음이) 시위대병是爲大病(이 큰 병이 됨)이라.」 하시니라. 

 

 

 

○ 妙喜가 云 日用應緣處에 只擧狗子無佛性話하야 擧來擧去하며 看來看去하야 覺得沒理路하며 沒義路하며 沒滋味하야 心頭가 熱悶時가 便是當人의 放身命處이며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라 하시고, 又云 若欲敵生死인댄 須得這一念子爆地一破하야사 方了得生死라 하시니라. 

 

묘희妙喜가 이르시되, 「일용응연日用緣應(일용日用으로 연緣을 응應)하는 곳에서 오직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개가 불성이 없다’ 하는 화두)를 들며 들며 살피며 살펴 이로理路가(이치길이) 없으며 의로義路가(뜻길이) 없으며 자미滋味가(맛이) 없어 심두心頭가(마음이) 답답함을 알 시절時節이 곧 당인當人의 신명身命(몸과 목숨)을 놓을 곳이며 또 이 성불작조成佛作祖할(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될) 터전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만약 생사生死를 대적對敵하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이 일념一念을 ‘퍽!’하고 한 번 부수어야 비로소 생사生死를 마치리라.」 하시니라. 

 

 

유승有僧(어떤 스님)이 조주화상趙州和尙께 문問하시되(물으시되), 「구자환유불성야무狗子還有佛性也無잇가(개가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州가 이르시되, 「무無!」 라 하시니, 이 무자無字는 선사先師가 이르시되, 「유무有無(있고 없음)의 무無가 아니며 진무眞無(참으로 없음)의 무無가 아니라.」 하시니, 이 화話(화두)는 어로語路와(말길과) 의로義路가(뜻길이) 다 고쳐 상량商量치(헤아리지) 못하리로다. 또 이르시되, 「조주노인검趙州露刃劒(조주의 칼날 드러남)이 한상광염염寒霜光焰焰(찬 서릿 빛이 이글거림)이로다. 의의문여하擬議問如何인댄(헤아려 어떠냐 물으면) 분신작양단分身作兩段(몸이 두 쪽을 이루게 됨)이라.」 하시다. ‘폭爆’은 불에 밤이 튀는 소리이니, 공부工夫하다가 마침내 의단疑團이 타파打破함을 견주시니라.

 

 

 

○ 先德이 云 這箇無字는 三世諸佛面目이시며 歷代祖師骨髓이시며 亦是諸人命根이니 諸人은 還肯也無아. 大疑之下에사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이 ‘무자無字’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면목面目이시며 역대조사歷代祖師의 골수骨髓이시며 또한 이 제인諸人(모든 사람)의 명근命根(목숨)이니 제인諸人은 도리어 긍신肯信하느냐(수긍하여 믿느냐), 마느냐? 큰 의심疑心 아래에사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조주미출전趙州未出前(조주가 나시기 전)엔들 어찌 불조佛祖가 없었으리오? 구안납승具眼衲僧(눈을 갖춘 납승)은 속지 아니하려니와 그러나 선현先賢(앞선 성현)이 이 조주선趙州禪을 이리 치우쳐 돋우심은 밀의密意가(비밀한 뜻이) 있으시니, 모름지기 조주趙州의 허물을 잡아야사 명안한明眼漢(눈 밝은 놈)이라 하려니와 자긍처自肯處(스스로 수긍한 곳) 없이 구피변口皮邊으로(입 껍데기로) 조고照顧할진댄(돌아 비출진댄) 한갓(공연히) 일기一期(한 생애)에 눈 멀뿐 아니라 타일他日(다른 날)에 방법죄謗法罪(법을 비방한 죄)로 철방鐵捧 맞음을 면免치 못하리라. 

 

 

 

○ 話頭를 不得擧起處에 承當하며 不得思量卜度하며 又不得將迷待悟하고 就不可思量處하야 便思量하면 心無所之가 如老鼠가 入牛角하야 便見倒斷也이리라. 又尋常에 計較安排底가 是識情이며 隨生死遷流底가 是識情이며 怕怖慞惶底가 是識情이어늘 今人은 不知是病하고 只管在裏許하야 頭出頭沒한다. 

 

화두話頭를 거기擧起하는(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말며, 사량思量하야 헤아리지 말며, 또 미迷를 가져서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고, 가히 사량思量하지 못할 곳에 나아가 사량思量하면, 마음 갈 곳 없음이 늙은 쥐가 쇠뿔에 들어감과 같아서 곧 거꾸러짐을 보리라. 또 심상尋常(평소)에 헤아려 벌려놓는 것이 이 식정識情이며, 생사生死를 좇아 천류遷流하는(옮겨다니는) 것이 이 식정識情이며, 두려워 무서워하는 것이 이 식정識情이어늘, 요즘 사람은 이것이 병病인 줄을 알지 못하고 오직 이에 걸려있어 들락 날락 한다. 

 

 

화두話頭에 십종병十種病이 있으니, 의근하복탁意根下卜度(뜻 뿌리에서 점치듯 헤아리는 것)과 양미순목처타근揚眉瞬目處挅根(눈썹을 올리고 눈을 깜빡이는 곳에서 근본을 헤아리는 것)과 어로상활계語路上活計와(말 길 위에서 살림살이 하는 것과) 문자중인증文字中引證(문자 속에서 끌어다가 증거를 삼는 것)과 거기처승당擧起處承當(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는 것)과 재무사갑리在無事匣裏와(일 없는 갑匣 속에 있는 것과) 작유무회作有無會와(‘있음’과 ‘없음’으로 앎을 짓는 것과) 작진무회作眞無會와(‘참으로 없다’는 것으로 앎을 짓는 것과) 작도리회作道理會와(도리道理로 앎을 짓는 것과) 작장미대오作將迷待悟(미혹을 가져서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이 십종병十種病을 여의고 제사거각提撕擧覺(의심疑心을 잡들이해서 거각擧覺)만 할지어다. 

 

 

 

○ 大抵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니 更不問如何若何하고 下觜不得處에 棄命一攢하야 和身透入이어다.

 

대저大抵 이 일은 문자蚊子(모기)가 철우鐵牛(쇠소)에 오름과 같음이니, 다시 여하약하를 묻지 말고 부리(주둥이)를 박지 못할 곳에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비벼(뚫어) 몸 까지 사무쳐 들어갈지어다. 

 

 

중결상의重結上意하시니(위의 뜻을 거듭 맺으시니), 참득활구叅得活句하야(활구活句를 얻어 참구參究하여) 불사퇴굴不使退屈케(하여금 물러나지 않게) 재삼권려再三勸勵(제삼 권하고 격려)하시도다. 

 

 

 

 

○ 工夫는 如調鉉之法하야 緊緩에 得其中이니라. 勤則近執着하고 忘則落無明하나니 惺惺歷歷하며 密密綿綿이어다. 

 

공부工夫는 시울[鉉, 줄]이 조화調和하는 법法과 같아서 팽팽함과 느슨함에 그 중中을 득得(체득)할지니라. 힘쓰면 집착執着에 가깝고 잊으면 무명無明에 떨어지나니, 깨끗[惺惺]하고 분명[歷歷]하며 밀밀密密히 이어갈 지어다.

 

 

‘현絃’은 금슬琴瑟(거문고와 비파)의 시울(줄)이라. ‘무명無明’은 인인人人이 비록 본각명本覺明(본각本覺의 밝음)을 두었으나 상상미도常常迷倒(항상 미혹으로 전도顚倒)하여 시각명始覺明(시각始覺의 밝음)이 없는 것이라. 공부工夫함이 긴급緊急(팽팽하여 조급)하면 혈기부조血氣不調한(혈기가 고르지 못한) 고병苦病(괴로운 병)이 나고 방완放緩하면(놓아 느슨하면) 습한성성習閑成性한(한가한 습習으로 성性을 이룬) 임병任病이 되리니, 공부工夫의 묘妙는 오직 성력면밀惺歷綿密(성성惺惺하고 역력歷歷하며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야 생력성편省力成片할(힘을 덜어 한 조각을 이룰) 따름이니라. 

 

 

 

○ 工夫가 到行不知行하며 坐不知坐하면 當此之時하야 八萬四千魔軍이 在六根門頭하여서 伺候하야 隨心生設하나니 心若不起하면 爭如之何이리오.

 

공부工夫가 행行하되(가되) 행行을(가는 줄을) 알지 못하며 좌坐하되(앉되) 좌坐를(앉는 줄을) 알지 못함에 이르면 이 시절時節을 당當하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마군魔軍이가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있어 엿보아 마음을 좇아 생겨나며 일을 벌이나니, 마음을 만약 일으키지 아니하면 그가 어찌 하리오?

 

 

‘마魔’는 생사生死를 즐기며 오욕五欲을 즐겨 정법正法을 뇌란惱亂케(어지럽게)하는 귀명鬼名(귀신의 이름)이라. ‘마종魔種이(마魔의 종류가) 팔만사천八萬四千’은 중생衆生의 팔만사천八萬四千 진로번뇌塵勞煩惱를 표標하시니라. 마魔는 자심自心(자기 마음) 외外에 있지 아니하니, 안이眼耳(눈귀) 등等의 육근六根에 마음을 내면 마음을 좇아 종종변화種種變化하되 도道가 높을수록 더욱 성盛(치성)하나니라. 범부凡夫는 제 경계境界를 수용受用하므로(받아들이므로) 뇌란惱亂치(어지럽히지) 아니하거니와 보살菩薩은 제 경계境界를 배반背叛하므로(거스르므로) 대적對敵하나니라. 

 

고古(옛날) 일도인一道人(한 도를 닦는 사람)이 일단一旦(어느 아침) 정중定中에(선정禪定 가운데에) 보니 일효자一孝子(한 효자)가 주검을(시체를) 손에 받아와 울며 이르되, “네 어찌 내 어미를 죽였느냐.” 하거늘 도인道人이 이것이 마魔인 것을 알고 도끼로 찍었는데 효자孝子가 쾌주快走하거늘(쾌히 달아나거늘) 후일後日(뒷날)에 도인道人이 출정出定하여(선정禪定에서 나와) 보니 제 다리를 베었더라. 우又(또) 일도인一道人(한 도 닦는 사람)은 일야정중一夜定中(어느 밤 선정禪定 중)에 보니 일저자一猪子(한 돼지)가 와서 좌座를(좌복을) 뒤엎거늘 도인道人이 저비猪鼻(돼지 코)를 잡아 뚫어 끌어당기며 “불을 켜라” 소리치거늘 사미沙彌가 불 켜서 가 보니 도인道人이 제 비단鼻端(콧구멍)을 잡았더라 하니, 그러므로 내심內心(안의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외마外魔(밖의 마군이)가 들어오지 못하나니라. 

 

고인古人이 역운亦云(또한 이르시되), 「벽극풍동壁隙風動(벽에 틈이 있으면 바람이 동動함)이요 심극마침心隙魔侵(마음에 틈이 있으면 마魔가 침범함)이라」 하시니라. 

 

 

 

 

○ 起心은 是天魔이요 不起心은 是陰魔이요 或起或不起는 是煩惱魔이어니와 然이나 我正法中에는 本無如是事하니라. 

 

마음 일으키는 이는 이 천마天魔요 마음 아니 일으키는 이는 이 음마陰魔요 혹或 일으키며 혹或 아니 일으키는 이는 번뇌마煩惱魔이어니와, 그러나 우리 정법正法 중中에는 본래本來 이런 일이 없느니라. 

 

 

사마외도邪魔外道(삿된 마군이와 외도)가 본무기종本無其種커늘(본래 그 씨가 없거늘) 수행실념修行失念하야(수행하는 이가 정념正念을 잃어버리는 데서) 수파기원遂派其源하도다(마침내 그 근원이 파생되도다). 그러나 마경魔境은(마군의 경계는) 몽사夢事라(꿈속 일이라) 깬 사람에게는 없느니라. 

 

 

 

○ 工夫를 若打成一片則縱今生에 透不得이라도 眼光落地之時에 不爲惡業의 所牽이리라. 

 

공부工夫를 만약 일편一片을 이루면, 비록 이 생生에 사무치지 못할지라도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시절時節에 악업惡業에 이끌릴 바가 되지 아니하리라. 

 

 

차此(이)는 수행인修行人이 공부상工夫上에 속효速效를(빨리 깨닫기를) 구求하다가 마침내 퇴굴退屈하므로(물러나므로) 각별各別히 위로慰勞하시도다. 인인人人(사람 사람)이 임종臨終에(죽음을 맞이함에) 안광眼光(눈 광명)이 낙지落地하되(땅에 떨어지되) 일생一生의 선악업과善惡業果가(좋고 나쁜 업의 과보가) 다 나타나 보이나니, ‘비록 공부工夫를 투철透徹히 하지 못했을지라도 불피악업不被惡業의 소견所牽’은(나쁜 업에 끌려가는 바가 되지 않음은) 반야력般若力(반야의 힘)이 승勝한(뛰어난) 까닭이니라. 

 

 

 

○ 於法에 有親切返照之功하야 自肯點頭者라야 始有語話分하리라.

 

법法에 친절親切히 반조返照하는 공부工夫를 두어 자가긍신自家肯信하야(제 가풍家風을 기꺼이 믿어) 점두點頭한(고개를 끄덕인) 사람이라야 비로소 말씀 이를(설說할) 분分이 있으리라. 

 

 

차此는 학어배學語軰(말을 배우는 무리)를 경책警策하시도다. ‘반조返照’는 본각本覺이 위자爲自(자自가 됨)이오 시각始覺이 위타爲他(타他가 됨)이니 저 시각始覺으로 내 본각本覺을 조찰照察하는(비추어 살피는) 것이라. ‘말씀’은 뜻을 나투나니 뜻을 득得하고(얻고) 말씀을 잊은 사람이라야 이를[說] 분分이 있으리라. 고인古人(옛 사람)이 운云(이르시되), 「어증즉語證則(증득證得을 말한즉) 불가시인不可示人이어니와(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어니와) 설리즉說理則(이치를 설說한즉) 비증非證이면 불료不了라(증득證得함이 아니면 할 수 없음이라)」 하시니라. 

 

 

 

○ 心如木石者라야 始有學道分하리라.  

 

마음이 목석木石 같은 이라야 비로소 도道를 배울 분分이 있으리라. 

 

 

此(이)는 방심배放心軰(마음을 놓아지내는 무리)를 경책警策하시도다. 무심無心이라야 무생도無生道(남이 없는 도道)에 소분상응少分相應(조금은 상응相應)하리라. 

 

 

 

○ 大抵參禪者는 還知四恩의 深厚麽아. 還知四大醜身이 念念에 衰朽麽아. 還知人命이 在呼吸麽아. 生來에 値遇佛祖麽아. 及聞無上法하고 生希有心麽아. 不離僧堂하야 守節麽아. 不與隣單雜話麽아. 切忌鼓扇是非麽아. 話頭를 十二時中에 明明不昧麽아. 對人接話時에 無間斷麽아. 見聞覺知時에 打成一片麽아. 返觀自己하야 捉敗佛祖麽아. 今生에 決定續佛慧命麽아. 此一報身에 定脫輪廻麽아. 當八風境하야 心不動麽아. 起坐便宜時에 還思地獄苦麽아. 此是參禪人의 日用中에 點檢底道理이니라. 古人이 云 「此身을 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하야 度此身고」 하시니라. 

 

대저大抵 참선叅禪하는 사람은 도리어 사은四恩[父·師·君·施]의 깊고 두터운 것을 아느냐? 도리어 사대四大[地·水·火·風]의 더러운 몸이 념념念念(생각 생각)에 늙어가는 것을 아느냐? 도리어 인명人命(사람의 목숨)이 호흡呼吸(숨 들이쉬고 내쉼)에 있는 것을 아느냐? 살아 옴에 불조佛祖를 만났느냐? 또 위 없는 법法을 듣고 희유希有한 마음을 내느냐? 승당僧堂을 여의지 아니하고 절개節介를 지키느냐? 이웃 단위單位의 사람과 잡雜된 말을 아니하느냐? 남의 시비是非 부추김을 경계警戒하고 있느냐? 화두話頭를 십이시十二時에 분명分明히 하여 매각昧却하지(어둡지) 아니하느냐? 사람을 대접對接하여 말할 때에 (화두 의심이)사이가 끊어짐이 없느냐? 보며 들으며 알며[見聞覺知] 할 때에 일편一片(한 조각)을 이루느냐? 자기自己를 돌아보아 불조佛祖의 허물을 잡았느냐? 이 생生에 쾌정決定히(결정코 쾌히)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겠느냐? 이 한 보報(과보)의 몸에 일정一定한(정해진) 윤회輪廻를 벗어나겠느냐? 팔풍경계八風境界를 당當하야 마음을 동動치(동요動搖하지) 아니하느냐? 일어나며 앉으며 편안便安히 마음 맞은 때에 도리어 지옥地獄의 고상苦狀(괴로운 모습)을 생각하느냐? 이것이 참선叅禪하는 사람의 일용日用(평상시)에 살펴볼 도리道理이니라. 옛 사람이 이르시되, 「이 몸 이 생生을 향向하야 제도濟度하지 아니하면 다시 어느 생生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濟度하리오?」 하시니라. 

 

 

‘사은四恩’은 부父(부모)와 사師와(스승과) 군君(임금)과 시施(시주施主)이니, 부父(부모)가 생지生之(낳아주고) 師가(스승이) 교지敎之(가르쳐주며) 군君(임금)이 호지護之(보호해주고) 施(시주)가 육지育之하심(길러주심)이라. ‘사대四大’는 수水와(물과) 지地와(땅과) 화火와(불과) 풍風(바람)이니, 수水가(물 기운이) 습지濕之(축축하게 하고) 지地가(땅 기운이) 견지堅之(견고하게 하며) 화火가(불 기운이) 난지煖之(따듯하게 하고) 풍風이(바람 기운이) 동지動之(움직이게)함이라. ‘추신醜身(추한 몸)’은 부父(아버지)의 정일적精一滴(정精 한방울)과 모母(어머니)의 혈일적血一滴(피 한방울)이 화합和合하야사 이 몸을 이루므로 수대水大가 근본根本이라. 오직 수水가(습한 기운이) 있고 지地가(견고함이) 없으면 기름 같아서 흘러내리며, 오직 지地가 있고도 수水가 없으면 마른 가루 같아서 어울리지 못할 것이며, 오직 지地와 수水가 있어도 화火가(따듯함이) 없으면 음처陰處(그늘진 곳)에 육편肉片(고기조각) 같아서 썩어질 것이며, 오직 지地와 수水와 화火가 있고도 풍風(바람, 움직임)이 없으면 자라나지 못하리라. 

 

차신성시此身成時(이 몸이 이루어질 때)에 비공鼻孔(콧구멍)이 먼저 이루어져 어미 숨 끝에 의지하므로 언왈諺曰(속담에 이르길), ‘자식子息(아들 숨)’이라. 그러므로 살아서 옴에도 풍화風火(숨결과 따듯함)를 먼저 득得하고(얻고) 죽어서 감에도 풍화風火를(숨결과 따듯함을) 먼저 실失하나니라(잃어버리나니라). 이제 관찰觀察하건댄 발조피골髮爪皮骨(터럭, 손톱, 피부, 뼈) 등等은 지地(땅)에 돌려보내고, 농혈변리膿血便利(고름, 피, 똥, 오줌) 등等은 수水(물)에 돌려보내고, 난기煖氣는(따듯한 기운은) 화火(불)에 돌려보내고, 동전動轉은(움직이며 나아감은) 풍風(바람)에 돌려보내니, 사대四大가 각리各離함에(각각 여의어 감에) 임자가(주인이) 없도다. 이미 사대四大가 무주無主라(주인이 없음이라) 망심妄心(망령된 마음)도 그렇거늘, 중생衆生이 미자법신진지迷自法身眞智하고(자自의 법신法身과 참된 지智를 미혹하고) 인타사대연려認他四大緣慮하야(타他의 사대四大와 연려緣慮를 인식하여)  념념생멸念念生滅하며(생각 생각 나고 죽으며) 념념탐진念念貪瞋하야(생각 생각 탐내고 성내어서) 미이불반迷而不返하니(미혹하여 돌이키지 아니하니) 실위가석實爲可惜(실로 가히 애석愛惜함)이로다. 

 

‘호흡呼吸’은 출식出息(나가는 숨)이 위호爲呼(호呼가 됨)이니 화火이며 양陽이요, 입식入息(들어오는 숨)은 위흡爲吸(흡吸이 됨)이니 풍風이며 음陰이라, 인명人命(사람 목숨)의 생사生死가(죽고 사는 것이) 호呼와 흡吸에 있나니라. ‘팔풍八風’은 순풍順風이 사四(네 가지)이니, 찬예讚譽(칭찬과 기림) 등等이요 역풍逆風이 사四(네 가지)이니 기훼譏毁(헐뜯음과 비방) 등等이니라. 

 

 

 

【上來法語는 如人이 飮水에 冷暖을 自知이니 聰明이 不能敵業이며 乾慧가 未免苦輪하나니 各須察念하야 勿以媕娿自謾이어다.】 

 

【위의 법어法語는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며 더움을 제 스스로 아는 것과 같으니, 총명聰明이 능能히 업業을 대적對敵하지 못하며 간혜乾慧가 고륜苦輪을 면免치 못하나니, 각각各各 모름지기 살펴서 헤아려 암아媕娿로써(의심하고 머뭇거림으로써) 자기自己를 속이지 말지어다.】

 

 

‘암아媕娿’는 음音이 암아菴阿이니 의심疑心을 가져서 명쾌明決치 못하는 모양이라. 이는 만법인慢法人(법과 사람을 속임)이 자안自眼(자신의 눈)이 분명分明치 못하되 한갓 총명聰明과 간혜乾慧를 믿어서 상래上來法語(위에 적힌 법어)의 정절程節을 행行하지 못하면서 행行하는 듯이 월분과도越分過度(분에 넘치는 과도)한 말씀을 일러 어렴풋이 자기自己를 속이므로 각각各各 반조返照하게(돌이켜 비추도록) 경책警策하시도다. 

 

 

 

○ 學語之軰는 說時似悟호되 對境還迷하나니 所謂言行이 相違者也이로다.

 

말씀만 배운 무리는 이를(설說할) 때는 아는 듯 하되 경境에(경계를) 대對하여서는 도리어 미迷(미혹)하나니, 이르는 말씀과 행실行實이 서로 어기는 사람이로다. 

 

 

차此(이)는 결상자만지의結上自謾之意하시도다(위의 ‘스스로 속이다’의 뜻을 맺으시도다.)

 

 

 

○ 悟入이 不甚深者는 雖終日內照하나 常爲淨潔에 所拘하며 雖觀物虛하나 恒爲境界에 所縛하나니 此人之病은 只在認見聞覺知하야 爲空寂知하야 坐在光影門頭也이니라. 故로 若不深知心體離念則終未免見聞覺知의 所轉하리라.

 

깨달아 들어감이 심甚히 깊지 못한 사람은 비록 날이 맟도록 안을 조찰照察하나(비추어 살피나) 상례常例로(늘) 깨끗한 데에 걸림이 되며, 비록 물허物虛한(물物이 빈) 데를 보나 상례常例로(늘) 경계境界에 얽매임이 되나니, 이 사람의 병病은 오직 ‘견문각지見聞覺知를(보고 듣고 앎을) 그릇 알아 공적영지空寂靈知로 삼고 광영光影의 문門 끝에 앉았음’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만약 심체心體에(마음의 체體가) 념念 여읜 것을 깊이 알지 못하면 마침내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굴림을 면免치 못하리라. 

 

 

이는 알되 그릇 안 사람의 병病을 나타내시니, 역시亦是 상문上文(윗 글)에 묵조사사黙照邪師(묵묵히 비추는 삿된 스승)의 류類(부류)이로다. 고운古云(고인이 이르시되), 「심불견심心不見心(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함)이라」 하시며 「비심경계非心境界라(마음의 경계가 아니라)」 하시며 「의심즉차擬心即差(마음을 헤아림은 곧 차별됨)이라」 하시거늘, 기심관조起心觀照(마음을 일으켜 관조觀照)하니 가위실지可謂失旨이로다(가히 뜻을 잃었다고 할 만하도다). 

 

 

 

○ 法離三世라 不可因果中契이니라. 

 

법法은 삼세三世를 여읜지라 인因과 과果로 계합契合하려 함이 옳지 못하니라. 

 

 

차명본법此明本法에 리인과離因果하시도다(이는 본법本法의 인과因果 여읨을 밝히시도다). ‘법法’은 본진심本眞心이요 ‘삼세三世’는 중생衆生이 무작지중無作智中(지음이 없는 지智[無作智]  가운데에) 자심자광自心自誑하여(자신의 마음이 스스로를 속여서) 허망변기虛妄變起한(허망虛妄하게 변화하여 일으킨) 것이므로, 허망虛妄으로 진심眞心에 계합契合하지 못한 것임을 알 것이로다.

 

 

 

○ 須虛懷自照하야 信一念緣起의 無生이어다. 然이나 無明力大故로 後後長養하야 保任不忘이 爲難하니라.

 

모름지기 마음을 비워 스스로 비추어보아 일념一念(한 생각) 연緣(반연攀緣)하야 일어남에 남이 없는 줄을 신信할지어다(믿을지어다). 그러나 무명無明의 힘이 크므로 후후後後에 길러내 가져서 잊지 아니함이 어려우니라. 

 

 

차명의용此明義用(이는 의용義用을 밝힘)에 인과역연因果歷然(인과因果가 분명)하시도다. ‘연기무생緣起無生(연緣하여 일어남에 남이 없음)’은 돈頓이니 인因이요, ‘장양보임長養保任(길러내어 가짐)’은 점漸이니 과果이라.

 

 

 

○ 惑本無從이어늘 迷眞忽起하니라.

 

혹惑이 본래本來 좇은 데가 없거늘 진眞을 미迷하야 문득 일어나니라.

 

 

차명기혹지인此明起惑之因하시니(이는 혹惑을 일으키는 인因을 밝히시니), 승사올귀繩蛇杌鬼가(‘노끈 뱀’과 ‘나무 그루터기 귀신’이) 성자공고性自空故(성性이 스스로 공空한 까닭)이라. 

 

 

 

○ 若照惑無本則空花三界를 如風捲烟이요 幻化六塵을 如湯銷氷하리라.

 

만약 혹惑(미혹)의 근본根本이 없는 줄을 조찰照察하면(비추어 살피면), 공화空花와(허공 꽃과) 같은 삼계三界를 바람이 연기 거두듯 하며 환화幻化(환幻의 변화)와 같은 육진六塵을 더운 물이 얼음 녹이듯 하리라. 

 

 

차명조혹지연此明照惑之緣하시니(이는 혹惑(미혹)을 비추는 연緣을 밝히시니), 피상부존皮尙不存(가죽이 오히려 있지 아니함)이라 모무소부毛無所附(털이 붙을 바가 없음)이로다. 

 

 

 

○ 然이나 此心을 雖凡聖이 等有이나 果顯易信이어니와 因隱難明이니 故로 淺識之流는 輕因重果하나니 願諸道者는 深信自心하야 不自屈하며 不自高이어다.

 

그러나 이 마음을 비록 범凡과 성聖이 같이 두었으나 과果는 드러나 쉬이 신信하려니와(믿으려니와) 인因은 숨어 밝힘이 어려우니, 그러므로 앎이 옅은 무리는 인因일랑 경輕히(가벼이) 여기고 과果를 중重히(중대하게) 여기나니, 원願하노니 모든 도자道者는(도道를 닦는 사람은) 자심自心(자신의 마음)을 깊이 신信하야(믿어서) 자굴自屈치(스스로 굽히지) 말며 자고自高치(스스로 높이지) 말지어다. 

 

 

‘과果’는 성聖이요 ‘인因’은 범凡이라. 고추성경高推聖境(성인의 경계를 높이 추앙)하는 천식淺識(옅은 식識)의 무리는 자심自心(자신의 마음)은 경輕히(가벼이) 여기고 성지聖智(성인의 지혜)는 중重히(중대하게) 여기나니, 진실眞實한 수도인修道人은 불변문不變門(변치 않는 문)으로 보건댄 범성凡聖이 평등平等하므로 자굴自屈치(스스로 굽히지) 말며 수연문隨緣門(연을 따르는 문)으로 보건댄 범성凡聖이 역연歷然(분명)하므로 자고自高치(스스로 높이지) 말지어다. 

 

 

 

○ 悟人은 即頓見이어늘 迷人은 期遠劫하나니라. 

 

깨달은 사람은 즉시에[頓] 다 보거늘 미혹한 사람은 먼 겁劫을 기약期約하나니라. 

 

 

피안차안彼岸此岸(이 언덕과 저 언덕)이 일겁상배日劫相倍(날[日]과 겁劫으로 서로 차이가 있음)이로다. 불탄기재佛歎奇哉가(부처님께서 “기이하도다”하고 탄식 하신 것이), 양이차야良以此也(진실로 이러한 까닭)이시니라.

 

 

 

○ 經에 云 理雖頓悟이나 事非頓除라 하시며 又云 文殊는 達天眞이요 普賢은 明緣起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리理(이치)는 비록 다(몰록) 깨달으나 사事는 다(몰록) 없애지 못하리라」 하시며 또 이르시되, 「문수文殊는 천진天眞의 불佛을 달達하고(요달了達하시고) 보현普賢은 연기緣起의 행行을 명明하다(밝히시다)」 하시니라. 

 

 

‘리理(이치)’로는 해사전광解似電光(앎이 번갯불과 같음)이나 인해과해因該果海(인因이 과果의 바다를 갖춤)이요, ‘사事’로는 행동궁자行同窮子(행行이 가난한 자식과 같음)이나 과철인원果徹因源(과果가 인因의 원源에 통함)이로다. 또 지달각성智達覺性(지智가 각성覺性을 요달了達)하시고 행명리환行明離幻하시니라(행行이 환 여읨[離幻]을 밝히시니라).

 

 

 

○ 善達覺性이 不因修生하면 名이 正知見이니라.

 

각성覺性이 닦음을 인因하야 나지 아니한 줄을 잘 알면 이름이 정正한 지견知見이니라. 

 

 

본성청정性本淸淨(성性이 본래로 청정淸淨)하여 오염부득汚染不得(더렵혀 물들지 아니함)이로다.

 

 

 

○ 大道는 本乎其心하고 心法은 本乎無住하니 無住心體가 靈知不昧하야 性相이 寂然하야 包含德用하니라. 

 

큰 도道는 그 마음을 근본根本하고 심법心法은 주住 없는 데를 근본根本하니, 주住 없는 마음의 체體가 영지靈知하여(신령스럽게 알아) 어둡지 아니하야 성性과 상相이 고요하야 덕용德用을 싸서 머금으니라. 

 

 

‘심心’은 제불중생諸佛衆生(모든 부처와 중생)의 미오근본迷悟根本(미혹하고 깨닫는 근본)이요 ‘성性’은 공공절적空空絶迹(공空이 공空함으로 자취를 끊음)이요 ‘상相’은 상상완연像像宛然(상像마다 완연宛然함)이라. 법자法字(‘법法’이라는 글자)가 시기어리삼세始起於離三世하야(‘삼세三世를 여읨’에서 먼저 일으켜) 종결어본무주終結於本無住하샤(‘무주無住를 근본함’에서 끝을 맺어) 중명공적영지重明空寂靈知하시니라(거듭 공적영지空寂靈知를 밝히시니라).

 

 

 

○ 古德이 云 只貴子眼正이언정 不貴汝行履處하노라 하시다. 

 

고덕古德이 이르시되, 「오직 그대 눈 정正함(바름)을 귀貴히 여길지언정 그대 행리行履하는 곳은 귀貴히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시다. 

 

 

석昔(지난날)에 앙산혜적선사仰山慧寂禪師가 「<열반경涅槃經> 사십권四十券이 총시마설總是魔說(모두가 마魔의 설함)이라」 이르시니, 이는 앙산仰山의 정안正眼(바른 눈)이라. 또 앙산仰山이 위산영우화상潙山靈祐和尙께 행리처行履處를(밟아 행할 곳을) 문問하시거늘(물으시거늘) 위산화상潙山和尙이 이르시되, 「지귀자안정只貴子眼正(자네의 눈 바른 것을 귀하게 여길지언정) 불귀여행리처不貴汝行履處라(그대의 행리行履하는 곳을 귀히 여기지 않음이라.)」 하시니, 차此(이)는 정안계명正眼開明한(바른 눈이 밝음을 연) 후後에사 행리行履할(밟아 행할) 것을 보이시니라. 

 

 

 

○ 古德이 云 若未悟煩惱性空하고 心性本淨則悟旣未徹이어니 修豈稱眞哉이리오. 故로 云 迷心修道하면 但助無明이라 하시며, 又云 不能了自心하면 云何知正道이리오 하시니라. 

 

고덕古德이 이르시되, 「만약 번뇌煩惱의 성性이 공空하고 심성心性이 본래本來 깨끗한 줄을 알지 못하면 깨달음이 이미 사무치지 못하였거니 닦은들 어찌 진眞에 맞으리오(칭합稱合하리오?). 그러므로 이르시되, 「마음을 모르고[迷] 도道를 닦으면 오직 무명無明을 도움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자심自心(자기의 마음)을 능能히 알지 못하면 어찌 정도正道(바른 도道)를 알리오?」 하시니라. 

 

 

이금작기以金作器(금으로써 그릇을 만듦)에 기기개금器器皆金(그릇마다 다 금)이요, 이토작기以土作器(흙으로써 그릇을 만듦)에 기기개토器器皆土(그릇마다 다 흙)이리라. 

 

 

 

○ 先修後悟는 有功之功이라 功歸生滅이어니와 선오후수先悟後修는 無功之功이라 功不虛棄이니라. 

 

먼저 닦고 후에 깨달음은 공功 있는 공功이라 공功이 생멸生滅에 돌아가거니와, 먼저 깨닫고 후에 닦음은 공功 없는 공功이라 공功이 허虛히(헛되이) 버려짐이 아니니라. 

 

 

先悟也 玉本無瑕(‘먼저 깨달음’은 옥이 본래로 흠이 없음)이요 先修也 雕文喪德(‘먼저 닦음’은 글을 새겨 덕德을 잃어버림)이로다.

 

 

 

○ 自悟修行은 無能所觀하니 譬如弄傀儡하야 線斷一時休이로다. 

 

저를 깨닫고 행行 닦음은 능能과 소所의 관觀이 없으니, 비유하건댄 꼭두각시놀음에 실을 끊어버리면 일시一時에 그침과 같도다. 

 

 

차명무심합도문此明無心合道門하시니라(이는 무심無心이 도道에 합合하는 문門을 밝히시니라). 「정학자定學者는 칭리섭산고稱理攝散故로(이치에 칭합하여 산란함을 거둬들이는 까닭으로) 유망연지력有忘緣之力하고(반연攀緣을 잊어버리는 힘이 있고), 혜학자慧學者는 택법관공고擇法觀空故로(법法을 택擇하여 공空을 관觀하는 까닭으로) 유유탕지공有遣蕩之功이어니와(보내어 없애버리는 공력이 있거니와), 차인此人(이 사람)은 절일진이작대絶一塵而作對(한 티끌도 대대[對]를 짓는 것이 끊어짐)이니 하로유탕지공何勞遣蕩之功이며(어찌 보내어 없애버리려는 공력을 수고로이 할 것이며) 무일념이생정無一念而生情(한 생각도 망령된 정情을 냄이 없음)이어니 기하망연지력豈假忘緣之力하리오(어찌 반연을 잊어버리는 힘을 빌리리오.)」 하시다. 

 

 

 

○ 法本無縛이어니 何用解이며 法本不染이어니 何用洗이리오.

 

법法이 본래本來 얽매임이 없거늘 어찌 풂을 쓰며, 법法이 본래本來 더럽지 아니하거니 어찌 씻음을 쓰리오?

 

 

차此(이)는 중명본해탈본청정重明本解脫本淸淨하시도다(본래로 해탈解脫이요 본래로 청정淸淨임을 거듭 밝히시도다).

 

 

 

○ 不用捨衆生心하고 但莫染汚自性이어다. 求正法이 是邪이니라. 

 

중생심衆生心 버림을 쓰지 말고 오직 자성自性을 더럽히지 말지어다. 정법正法을 구求함이 이 사법邪法이니라. 

 

 

차此(이)는 중명불오염重明不汚染하시도다(오염汚染되지 아니함을 거듭 밝히시도다).

 

 

 

○ 一念情生하면 即墮異趣하리니 亦名이 守屍鬼子이니라.

 

일념一念(한 생각) 정情을 내면 곧 다른 취趣[六趣]에 떨어지리니, 또한 이름이 ‘송장 지키는 귀신’이니라.

 

 

차명염념윤회此明念念輪廻하시도다(이는 생각 생각 윤회輪廻함을 밝히시도다). 정유다종情有多種하고(정情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취역다종趣亦多種하나(취趣에도 또한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근본根本이 유삼有三하니(셋이 있으니), 탐貪(탐하는 마음)은 아귀餓鬼요 진瞋(성내는 마음)은 지옥地獄이요 치癡는(어리석은 마음은) 축생畜生 등等이니, 개시무혜고皆是無慧故로(모두가 지혜智慧가 없는 까닭으로) 역미면수시귀자亦未免守屍鬼子(역시 송장 지키는 귀신을 면치 못함)이로다. 

 

 

 

○ 斷煩惱者는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은 名大涅槃이니라.

 

번뇌煩惱를 끊는 이는 이름이 이승二乘이요 번뇌煩惱를 내지 아니하는 이는 이름이 대열반大涅槃이니라. 

 

 

번뇌煩惱를 끊는 이는 역성逆性(성性을 거스름)이요 번뇌煩惱를 내지 아니하는 이는 순성順性(성性을 따름)이라. 또 번뇌煩惱가 대유이종大有二種하니(크게는 두 종류가 있으니) 망집妄執과 이견異見은 이사利使(예리한 번뇌)요 인망위진認妄爲眞(망妄을 인식하여 진眞으로 삼음)은 둔사鈍使(둔한 번뇌)이라.

 

* 십사번뇌十使煩惱: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見取, 계취戒取’의 오이사五利使와 ‘탐욕貪欲, 진에瞋恚, 무명無明, 만慢, 의疑’의 오둔사五鈍使가 있다.  

 

 

 

○ 諦觀殺盜淫妄이 從一心上起이라 當處便寂하면 何須更斷이리오.

 

살殺(살생殺生)과 도盜(투도偸盜)와 음婬(음행淫行)과 망妄이(망어妄語가) 일심一心(한 마음)을 좇아 일어나는지라 그 곳[當處]이 곧 적연寂然한 줄을 자세仔細히 관觀하면 어찌 다시 끊으리오?

 

 

차此(이)는 쌍명성상雙明性相하시도다(성性과 상相을 쌍으로 밝히시도다). 

 

 

 

○ 不識其相하면 賊即能爲하고 不達其空하면 永不可斷이리라.

 

그것이 상相인 줄을 알지 못하면 도적盜賊이 곧 능能히 저지르고, 그것이 공空인 줄을 사무쳐 알지 못하면 영영永永히 끊지 못하리라. 

 

 

차此(이)는 결상선수후오結上先修後悟하시도다(위의 ‘먼저 닦고 후에 깨달음’을 맺으시도다).

 

 

 

○ 經에 云 覺性이 本淨하고 無明이 本空하니 悟此理하야 不生一念이 名爲永斷無明이라 하시고 又云 斷斷而無斷이며 修修而無修라 하시고 又云 念起即覺하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각성覺性이 본래本來 청정淸淨하고 무명無明이 본래本來 공空하니’ 이 리理(이치)를 알아 일념一念을 내지 아니함이 이름이 무명無明을 영영永永히 끊음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끊으며 끊되 끊음 없으며 닦으며 닦되 닦음 없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념念이 일어나거든 곧 알라.」 하시니라. 

 

 

차此(이)는 결상선오후수結上先悟後修하시도다(위의 ‘먼저 깨닫고 뒤에 닦음’을 맺으시도다.)

 

 

 

○ 先德이 云 修道가 如磨鏡光生하니 雖云磨鏡이나 却是磨塵이요 所言修道는 只是遣妄이라 하시다.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도道 닦음이 거울을 갈아(문질러) 광光(빛)을 냄과 같으니, 비록 ‘거울을 갈다(문지른다)’ 이르나 도리어 이는 ‘티끌을 갊(문지름)’이요 말한 바 ‘도道 닦음’은 오직 이 ‘망妄을 보냄’이라 하시다. 

 

 

차此(이)는 총결상의總結上意하시도다(윗 글의 뜻을 모두 맺으시도다.)

 

 

 

○ 八風五欲에 心如日月이면 天堂地獄에 所不能攝이리라.

 

팔풍八風과 오욕五欲에 마음이 일월日月과 같으면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에 능能히 잡히지 아니하리라. 

 

 

차此(이)는 고제본심지광高提本心之光하시어(본심本心의 빛을 높이 들어) 할출지옥지외喝出天獄之外이시도다(천당과 지옥의 밖으로 꾸짖어 쫓아내시도다.)

 

 

 

○ 先德이 云 心者는 萬形之模範이요 業者는 一心之影響이라 하시며 又云 一切萬法이 從心幻生하니 心旣無形이어니 法何有相이리오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마음은 만萬 형상의 모模(거푸집)와 범範(법)이요 업業은 한 마음의 영影(그림자)과 향響(메아리)이라.」 하시며, 또 이르시되, 「일체一切의 만법萬法이 마음을 좇아 환생幻生(환幻으로 생生)하니 마음이 이미 형상 없거니 법法이 어찌 모양 있으리오?」 하시니라. 

 

 

‘모模’는 주물鑄物하는 거푸집이요 ‘범範’은 법法이라. 차하此下(이 아래)는 광인환법廣引幻法하야(널리 환법幻法을 끌어와서) 이명심범지본공以明心法之本空하샤(심법心法의 본래 공空함을 밝히시어) 이위수행지본以爲修行之本하시니라(수행의 근본을 삼으시니라). 

 

 

 

○ 先德이 亦云 心爲大幻師요 身爲大幻城이요 沙界大幻衣요 名相大幻食이어늘 凡夫는 不識幻하야 處處에 迷幻業하고 聲聞은 怕幻境하야 昧心而入寂하고 菩薩은 識幻境하야 不拘諸名相이라 하시다. 

 

선덕先德이 또 이르시되, 「마음은 큰 환幻의 사師요 몸은 큰 환幻의 성城이요 사계沙界는 큰 환幻의 옷이요 명상名相은 큰 환幻의 밥이어늘, 범부凡夫는 환幻인 줄을 알지 못하야 처처處處에서 환업幻業에 미迷(미혹)하고, 성문聲聞은 환경幻境을(환幻의 경계境界를) 두려워하여 마음을 매각昧却(회피)하야 적寂에 들고, 보살菩薩은 환경幻境을(환幻의 경계境界를) 알아 모든 명상名相에 걸리지 아니하나니라.」 하시다.

 

 

중환衆幻(모든 환幻)이 출어일심出於一心하니(한 마음에서 나오니) 묘불가사의妙不可思議(묘妙하여 가히 사의思議할 수 없음)이로다.

 

 

 

 

○ 經에 云 知幻即離라 不作方便이요 離幻即覺이라 亦無漸次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환幻을 알면 곧 여읨이라 방편方便을 짓지 아니하고, 환幻을 여의면 곧 각覺이라 또 점차漸次가 없다.」 하시니라. 

 

 

몽견신창夢見身瘡하다가(꿈에 몸이 곪음을 보다가) 교즉돈유覺則頓愈하니(깨어나면 몰록 나으니) 방편점차方便漸次(방편의 점차漸次)는 리궁어시理窮於是(리理가 여기에서 다함)이로다. 

 

 

 

○ 離幻者는 如雲散月出하니 非謂無雲이 便名爲月이라 但於無雲處에 見月矣이요, 非謂無幻이 便是眞如이라 但於無幻處에 見眞理矣이니라.

 

환幻을 여읨은 구름 흩어져 달 나오듯 하니, 구름 없음이 곧 이름하여 달이라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구름 없는 곳에서 ‘달을 볼 것이요’, 환幻 없음이 곧 이 진여眞如라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환幻 없는 곳에서 ‘진리眞理를 볼지니라.’ 

 

 

반야무등촉半夜無燈燭이로되(한밤중에 등불이 없으되) 가서역력선家書歷歷宣(자기 집 글은 분명히 전해짐)이로다. 

 

 

 

○ 大抵起心動念하며 言妄言眞이 無非幻也이니라. 

 

대저大抵 마음 일으키며 념念 움직이며 망妄이라 이르며 진眞이라 이르는 것이 환幻 아님이 없느니라. 

 

 

만리부운소산진萬里浮雲消散盡하니(만리에 뜬 구름이 흩어지고 사라져 다하니) 일륜명월재한공一輪明月在寒空이로다(한 바퀴 밝은 달은 찬 허공에 있도다.)

 

 

 

 

上篇 終

 

 

 

 

 

 

 

 

 

 

 

 

 

 

 

 

 

 

 

 

 

 

 

 

[禪家龜鑑 卷下]

 

 

 

○ 頓悟自性하고 發三心하며 起四信하야 廣修萬行이어다.

 

자성自性을 돈오頓悟하고(몰록 깨닫고) 삼심三心을 내며 사신四信을 일으켜서 만행萬行을 널리 닦을지어다.

 

 

차명발대심此明發大心하야 이위만행지본以爲萬行之本하시니라(이는 ‘큰마음을 발發하여 만행萬行의 근본根本으로 삼음’을 밝히시니라). ‘삼심三心’은 비悲(자비)와 지智(지혜)와 원願(원력)이요, ‘사신四信’은 진여眞如와 불佛과 법法과 승僧이라. 일운역발사무량심一云亦發四無量心하라((한편으론 이르되 또한 ‘사무량심[自悲喜捨]을 발發하라.’) 하시니라. 

 

 

 

○ 佛法本根源이 衆生心裏出이니 先師가 云 一念에 齊修八萬行이라 하시다.

 

불법佛法의 본래本來 근원根源이 중생심衆生心에서 나오니, 선사先師가 이르시되, 「일념一念에 팔만행八萬行을 가지런히 닦는다.」 하시다.

 

 

차명자성만행此明自性萬行하시다(이는 자성만행自性萬行을 밝히시다).

 

 

 

○ 然이나 衆生이 生無慧目이라 必借善知識의 開示故로 親近善友하야 敬事如佛호되 不惜身命하야 諮決衆疑하며 先須念念에 自歸三寶하며 自度衆生이어다.

 

그러나 중생衆生이 태어남에 지혜智慧의 눈이 없는지라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의 열어 보이심을 가차假借하는(빌리는) 까닭으로 선우善友를(좋은 도반과 선지식을) 친근親近하옵고(가까이 친견하옵고) 공경恭敬하야 섬기기를 부처와 같이 하되 몸과 목숨을 아끼지 말아서 온갖 의심疑心을 물어 결단決斷하며, 먼저 모름지기 념념念念에 자삼보自三寶(자신의 삼보)를 귀의歸依하며 자중생自衆生(자신의 중생)을 제도濟度할지어다.

 

 

상명정인上明正因하시고(위에서는 정인正因을 밝히시고) 차명정연此明正緣하시니라(여기서는 정연正緣을 밝히시니라.) ‘선지식善知識’은 선능지진식망善能知眞識妄하시며(잘 능히 진眞을 알고 망妄을 알며) 지병식약知病識藥하시므로(병病을 알고 약藥을 아시므로) <열반涅槃>에 위구족인연爲具足因緣(인연因緣을 모두 갖춤)이시며 <법구法句>에 위무량공덕爲無量功德(한량없는 공덕功德을 이룸) 등等이시니라 하시며, ‘불석신명不惜身命(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고인古人이 혹或 전신보법全身報法하시며(온 몸으로 법을 갚으시며) 혹或 매골수은賣骨酬恩하시며(뼈를 팔아서 은혜를 갚으시며) 혹或 할육문경割肉聞經하시며(살을 베어서 경經을 들으시며) 혹或 분신사덕焚身謝德(몸을 태워서 덕德을 보답)하신 등等이라.

 

 

 

○ 心淸淨은 是佛이요 心光明은 是法이요 心不二는 是僧이라. 又 性本知覺이 爲佛이요 性本寂滅이 爲法이요 性上妙用이 爲僧이니라. 忽得自家底호니 今日에야 方知本來無事이로다.

 

마음이 청정함이 이 불佛이요 마음의 광명光明이 이 법法이요 마음의 둘 아님이 이 승僧이라. 또 성性의 본래지각本來知覺이 불佛이요 성性의 본래적멸本來寂滅이 법法이요 성性의 묘용妙用이 승僧이니라. 문득 내 것을 얻으니 오늘에야 비로소 본래本來 일 없는 줄을 알 것이로다. 

 

 

차명자성삼보此明自性三寶하시니라(여기서는 자성삼보自性三寶를 밝히시니라). 일면삼목一面三目(한 얼굴에 세 눈)이 부종불횡不縱不橫하야(세로 아니요 가로 아니어서) 도작불개刀斫不開(칼로 잘라도 열리지 않음)이라 지묘난사至妙難思(지극히 묘妙하여 사의思議하기 어려움)이로다. 하택대사荷澤大師가 수속일구왈收束一句曰(일구一句로 거두어 모아 이르시되) 「공적지空寂知[空寂靈知]라.」 하시니라. 

 

 

 

○ 經에 云 度衆生하야 入滅度라 하시고 又云 實無衆生이 得滅度者라 하시니 何也오. 菩薩은 只以念念者로 爲衆生也하시나니 了念體空者는 度衆生也이요 念旣空寂者는 實無衆生이 得滅度者也이니라. 然則悟者는 佛也요 迷者는 衆生也요 悲者는 度衆生也요 智者는 了達也요 願者는 勤行也이니, 皆自性中의 建立事也이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야 멸도滅度에 들게 하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진실眞實로 중생衆生이 멸도滅度를 득得할(얻을) 것이 없다.」 하시니, 어떠뇨? 보살菩薩은 오직 념념念念으로 중생衆生을 삼으시나니, ‘념체念體의 공空을 앎[了]’은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함이요 ‘념念이 이미 공적空寂함’은 진실眞實로 중생衆生이 멸도滅度를 득得할 것이 없음이니라. 그러할진댄 ‘깨달음[悟]’은 불佛이요 ‘미혹함[迷]’은 중생衆生이요 ‘자비慈悲’는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함이요 ‘지혜智慧’는 사무쳐 앎이요 ‘발원發願’은 부지런히 행行하는 것이니, 다 내 성性의 건립建立하는 일이니라. 

 

 

차명자성중생此明自性衆生하시니라(여기서는 자성중생自性衆生을 밝히시니라). 심본멸心本滅(마음이 본래 적멸寂滅)하므로 생불生佛이(중생과 부처가) 역적멸상亦寂滅相(또한 적멸寂滅한 상相)이로다. 지어작용至於作用하여서는(작용作用함에 이르러서는) ‘심무비心無非’는(마음에 그름 없는 것은) 계戒요 ‘심무난心無亂’(마음에 어지러움 없는 것)은 정定이요 ‘심무치心無癡’는(마음에 어리석음 없는 것은) 혜慧요 ‘심불기心不起’는(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지止요 지불매知不昧는(지知가 어둡지 않음은) 관觀이요 ‘안심제리安心諦理’는(진리의 이치에 안심安心함은) 인忍이요 ‘심무간단心無間斷(마음이 끊어짐이 없음)’은 진進 등等이니, 차此(여기)에 총명자성문摠明自性門하시고(자성문自性門을 모두 밝히시고) 하下(아래)에 별명수상문別明修相門하시니라(수상문修相門을 따로 밝히시니라). 

 

 

 

○ 然이나 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언정 別無聖解이니라.

 

그러나 수행修行하는 종요宗要는, 「오직 범부凡夫의 정情을 다함이언정 각별各別히(따로) 성인聖人의 앎[聖解]이 없느니라.」 

 

 

범정성해凡情聖解(범부의 정情과 성인의 해解)가 개유망견皆由妄見(다 망령된 견해로 말미암음)이니, 이견구사二見俱捨하야사(두 견見을 함께 버려야) 방계일성方契一性(바야흐로 한 성性에 계합契合함)이로다.

 

 

 

○ 經에 云 末世諸衆生이 心不生虛妄하면 佛說如是人은 現世에 即菩薩이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말세末世에 제중생諸衆生(모든 중생)이 마음에 허망虛妄을 내지 아니하면 부처님께서 이르시되 ‘이 같은 사람은 현세現世에 곧 보살菩薩이라’」 하시니라. 

 

 

심불허망心不虛妄(마음이 허망하지 아니함)은 계정혜력戒定慧力(계정혜의 힘)이라. 보자菩者는(‘보菩’라 함은) 각覺[깨달음]이요 살자薩者는(‘살薩’이라 함은) 유정有情[중생]이라.

 

 

 

○ 無德之人은 不依佛戒하야 不護三業하고 放逸懈怠하며 輕慢他人하야 較量是非로 而爲根本하나니라.

 

덕德 없는 사람은 부처의 계戒를 의빙依憑(의지)하지 아니하야 삼업三業을 호지護持하지(보호하여 가지지) 아니하고 마음을 놓아 게으르며 남을 경만輕慢히 여겨(업신여겨) 시비是非를 교량較量함(옳고 그름을 겨룸)으로 근본根本을 삼나니라. 

 

 

이계以戒로(계戒로써) 결상기하結上起下하시도다(위를 맺고 아래를 일으키시도다). 일파심계一破心戒(한 번 심계心戒를 파破함)에 백과구생百過俱生(온갖 허물이 함께 생겨남)이로다. <열반경涅槃經>에 운云(이르시되), 「파계비구破戒比丘(계戒를 파破한 비구)는 신무위덕身無威德(몸에 위의威儀와 덕德이 없음)이라.」 하시니라. 

 

 

 

○ 經에 云 帶婬修禪은 如蒸沙作飯이요 帶殺修禪은 如塞耳叫聲이요 帶偸修禪은 如漏巵求滿이요 帶妄修禪은 如刻糞爲香이니 縱有多智라도 皆成魔道이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음婬[淫行]을 가져서 선禪을 닦음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음과 같고, 살殺[殺生]을 가져서 선禪을 닦음은 귀를 막고서 소리 지름과 같고, 투偸[偸盜]를 가져서 선禪을 닦음은 새는 잔에 채움을 구求함과 같고, 망妄을[妄語] 가져서 선禪을 닦음은 똥을 각刻(조각)하야 향香을 삼음과 같으니, 비록 많은 지혜智慧를 둘지라도 다 마도魔道를 이루리라.」 하시니라. 

 

 

차명수행궤칙此明修行軌則에 삼무루학三無漏學하시니라(이는 수행修行의 궤칙軌則에 세가지 샘이 없는 학學이 있음을 밝히시니라). 소승小乘은 품법稟法(법규를 받음)이 위계爲戒(계戒가 됨)이니 조치기말粗治其末(대략 그 끝을 다스림)이어니와 대승大乘은 섭심攝心(마음을 거두어들임)이 위계爲戒(계戒가 됨)이니 세절기본細絶其本하나니라(그 뿌리를 세밀히 끊나니라). ‘사계四戒(네 가지 계)’는, 음婬(음행)은 단청정斷淸淨(청정淸淨을 끊음)이요 살殺(살생)은 단자비斷慈悲(자비慈悲를 끊음)이요 투偸(도둑질)는 단복덕斷福德(복덕을 끊음)이요 망妄(거짓말)은 단진실斷眞實(진실을 끊음)이니, 차사중此四重이(이 네가지 중重한 계戒가) 위백계지본爲百戒之本이므로(온갖 계戒의 근본根本이 되므로) 별명別明하샤(따로 밝혀) 사무사범使無思犯(생각으로라도 범犯함이 없게 하려하심)이시니라. 

 

‘삼학三學’은 일운一云(한편으론 이르되), 「무억無憶(억憶 없음)이 계戒요 무념無念(념念 없음)이 정定이요 막망莫妄(망妄 하지 아니함)이 혜慧이라.」 일운一云(한편으론 이르되), 「계戒는 착적捉賊(도적을 잡음)이요 정定은 박적縛賊(도적을 결박함)이요 혜慧는 살적殺賊(도적을 죽임)이라.」 일운一云(한편으론 이르되), 「계기戒器가(계의 그릇이) 완고完固(온전하며 견고)하고 정수定水가(선정의 물이) 징청澄淸(맑고 깨끗)하야사 혜월慧月(지혜의 달)이 방현方現(바야흐로 나타남)이라.」 하시고, 우운又云(또 이르시되), 「경전어정經詮於定(경經은 정定에 대한 해석)이시고 율전어계律詮於戒(율律은 계戒에 대한 해석)이시고 논전어혜論詮於慧라(논論은 혜慧에 대한 해석이라).」 하시니, 삼학三學이 역위만법지원亦爲萬法之源이므로(또한 만법萬法의 근원根源이 되므로) 별명別明하샤(따로 밝히시어) 사무제루야使無諸漏也이시도다(모든 루漏가 없게 하려 하심이시도다). 

 

 

 

○ 經에 云 若不持戒하면 尙不得疥癩野干之身이온 況淸淨菩提果를 可冀乎아.

 

經에 이르시되, 「만약 계戒를 지니지 못하면 오히려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엊지 못할 것이어늘 하물며 청정보리과淸淨菩提果를 가可히 바라랴?」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어찌 행실行實(행行의 실實다움이) 없으신 부처가 계시며 소림문하少林門下에 어찌 망어妄語(거짓말) 하시는 조사祖師가 계시리오?

 

 

 

○ 先德이 云 重戒를 如佛하면 佛常在焉이라 하시고 又云 以戒로 爲師하라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계戒를 중重히 여김을 부처와 같이 하면 부처가 상례常例로(늘) 계시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계戒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시니라. 

 

 

 

욕입무루문欲入無漏門인댄(샘이 없는 문에 들어가고자 할진댄) 초계아주草繫鵝珠(‘풀에 묶인 비구’와 ‘구슬을 삼킨 거위’의 이야기)로 이위전도以爲前導이어다(앞에서 인도해줌을 삼을지어다). 

 

 

 

○ 經에 云 欲脫生死인댄 先斷貪欲과 及諸愛渴하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생사生死를 벗고자 할진댄 먼저 탐욕貪欲과 또한 애갈愛渴을 그치라.」 하시니라. 

 

 

애위윤회본愛爲輪廻本(애愛는 윤회輪廻의 근본根本이 됨)이요 욕위수생연欲爲受生緣(욕欲은 생生을 받는 연緣이 됨)이라. 아난阿難이 운云(이르시되), 「욕기欲氣는(애욕愛欲의 기운은) 추탁麤濁(거칠고 탁)하여 성조腥臊가(비리고 누린 것이) 교구交遘라(서로 관계를 가짐이라.)」 하시며, 불佛이 운云(이르시되), 「음심婬心(음란한 마음)을 부제不除하면(없애지 못하면) 진불가출塵不可出(티끌은 가히 벗어나지 못함)이라.」 하시며, 우운又云(또 이르시되), 「은애일박착恩愛一縳着하면(은혜와 사랑에 한번 집착하여 결박되면) 견인입죄문牽人入罪門(사람을 끌고 죄罪의 문門으로 들어감)이라.」 하시며, 우운又云(또 이르시되), 「투탈차문透脫此門하면(이 문門을 꿰뚫어 벗어나면) 출진나한出塵羅漢(티끌을 벗어난 나한)이라.」 하시도다. ‘갈渴’은 정애情愛가(온정과 애착이) 지절至切한(지극히 간절한) 것이라. 

 

 

 

○ 經에 云 無碍淸淨慧가 皆因禪定生이라 하시니 是知超凡入聖하야 坐脫立亡者가 皆禪定之力也로다. 故로 云 欲求聖道인댄 離此코 無路이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걸림 없는 청정혜淸淨慧(청정한 지혜智慧)가 다 선정禪定을 인因하야 난다.」 하시니, 범凡을(범부를) 넘어 성聖(성인)에 들며 앉아서 벗으며 서서 죽음도 다 선정禪定의 힘인 줄을 이에 알 것이로다. 그러므로 이르시되, 「성도聖道(성인의 도道)를 구求하고자 할진댄 이를 여의고는 길이 없다.」 하시니라. 

 

 

차此(이)는 계戒의 정定이라. 무정무혜無定無慧하면(선정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시광시우是狂是愚요(이는 미치고 어리석음이요), 편수일문偏修一門하면(치우쳐 한 문門 만을 닦으면) 무명사견無明邪見(무명의 삿된 견해)이리라. 

 

 

 

○ 心이 在定則能知世間의 生滅諸相하리라. 

 

마음이 정定에 있으면 능能히 세간世間의 생生하고 멸滅하는 모든 상相을 알리라. 

 

 

차此(이)는 정定의 혜慧이라. 「허극일광虛隙日光(빈틈의 햇빛)에 진애塵埃(티끌먼지)가 요요擾擾하고(어지럽고) 청담수저淸潭水底(맑은 연못 물 밑)에 영상影像(그림자 형상)이 소소昭昭로다(분명함이로다).」 별명삼학別明三學(따로 삼학三學 밝힘)을 도차기경到此己竟하시니라(여기에 이르러서 끝마치시니라). 연然이나(그러나) 거일구삼擧一具三(하나를 듦에 셋을 갖춤)이라 기유단상豈有單相이리오(어찌 홑으로 된 상相이 있으리오?) 차하此下(이 아래로)는 산거세행散擧細行하야(세세한 행行을 나누어 제시하여) 중명상의重明上義하시니라(거듭 위의 뜻을 밝히시니라). 

 

 

 

○ 心念不起가 名爲坐요 自性不動이 名爲禪이니라.  

 

심념心念을 일으키지 아니함이 이름이 좌坐요, 자성自性을 움직이지 아니함이 이름이 선禪이니라. 

 

 

욕명좌선지欲明坐禪旨인댄(좌선坐禪의 요지要旨를 밝히고자 할진댄) 간취화리빙看取火裏氷이어다(불 속의 얼음을 가져서 볼지어다). 

 

 

 

○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경境을 보고 마음 일으키지 아니함이 이름이 불생不生이요, 나지 아니함이 이름이 념念 없음[無念]이요, 념念 없음이 이름이 해탈解脫이니라. 

 

 

 

○ 正念을 不忘하면 煩惱가 不生하리니 如云 眼若不睡하면 諸夢이 自除이니라.  

 

정념正念을 잊지 아니하면 번뇌煩惱가 나지 아니하리니, 「눈이 만약 잠 자지 아니하면 모든 꿈이 절로 없어지리라.」 하고 이르신 것과 같으니라. 

 

 

 

○ 修道證滅은 是亦非眞也이어니와 心法이 本寂이라야 乃眞滅也이니 故로 曰 諸法이 從本來常自寂滅相이라 하시니라. 

 

도道 닦아 멸滅을 증證함은 이 또한 진실眞實이 아니어니와 심법心法이 본래本來 적멸寂滅이라야 진실眞實한 멸滅이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제법諸法이 본래本來로부터 옴에 상례常例로(늘) 제 적멸寂滅한 상相이라.」 하시니라. 

 

 

무시무비無是無非하야(옳음이 없고 그름이 없어서) 유적유조唯寂唯照(오직 적멸이요 오직 비춤)이로다. 묘수妙首[文殊]가 사량思量함(헤아림)에 유마維摩가 두구杜口(침묵)하시도다. 

 

 

 

○ 若有見正覺하야 解脫離諸漏하야 不着一切世이면 彼非證道眼이니라. 

 

만약 「정각正覺하야 해탈解脫하야 제루諸漏(모든 루漏)를 여의어 일체세一切世(일체 세간)에 착着(집착)하지 아니하노라.」 하는 견見을 두면, 그것은 도道를 증證한 눈이 아니니라. 

 

 

안불자견眼不自見(눈은 저를 보지 못함)이어늘 견안자見眼者(눈을 보는 자)가 망妄(거짓)이로다. 

 

 

 

○ 見生趣滅은 聲聞見이요 不見生하고 惟見滅은 緣覺見이요 法本不生일새 今亦無滅이라 不起二見은 菩薩見이니라.

 

남[生]을 보고 멸滅에 나아가는 이는 성문聲聞의 견해見解요, 남[生]을 보지 못하고 오직 멸滅을 보는 이는 연각緣覺의 견해見解요, 법法이 본래本來 나지 아니하므로 이제 또 멸滅함이 없는지라 이견二見을(두 견해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이는 보살菩薩의 견해見解이니라. 

 

 

무위일법無爲一法(함이 없는 한 법)에 견유천차見有千差(견해는 천가지 차별이 있음)이로다. 

 

 

 

○ 水澄珠瑩이요 雲散月明이니 三業이 淸淨에 百福이 俱集이니라. 

 

물이 맑음에 구슬이 비추이고 구름이 흩어짐에 달이 밝나니, 삼업三業이 청정함에 백복百福(온갖 복)이 다 모이나니라.

 

 

주침식해珠沉識海(구슬이 식識의 바다에 빠짐)이어늘 망상罔象이 얻어내고 월은마운月隱魔雲(달이 마군魔軍의 구름에 숨음)이어늘 지풍智風(지혜의 바람)이 쓸어버리도다. 삼업三業의 김을(잡초를) 맴에 백百 복福밭이 무성茂盛하나니라. 

 

* ‘망상罔象’은 눈 먼 사람이고, ‘이루离婁’는 눈 밝은 사람이니, 황제黃帝가 구슬을 들에 가서 잃으시고 찾으라 하시니, 이루离婁가 못 찾거늘 망상罔象이 한 쪽 세로로부터 풀을 베어 찾았느니라.

 

 

 

○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라야 是眞布施이니라. 

 

간난艱難(가난)한 사람이 와서 빌거든 분分을 따라 보시布施하라. 동체同體한 대비심大悲心이라야 이 진실眞實한 보시布施이니라. 

 

 

 

자타自他가(나와 남이) 위일왈동체爲一曰同體(하나 됨이 ‘동체同體’)이라.

 

 

       

○ 有人이 來害이어든 當自攝心하야 勿生瞋恨이어다. 一念瞋心起에 百萬障門開하나니라.

 

혹 사람이 와서 해害하는 이가 있거든 반드시 내 마음을 거두어 잡아 진한瞋恨(성냄과 원한심)을 내지 말지어다. 한 생각 진심瞋心(성내는 마음)이 일어남에 백만百萬가지 장애障礙의 문門이 열리나니라. 

 

 

번뇌煩惱가 비록 갓이 없으나 진瞋(성냄)과 만慢(我慢, 아만)이 심甚하도다. <열반경涅槃經>에 운云(이르시되), 「도할이사塗割二事(약을 바르고 칼로 베는 두 가지 일)에 기심무이其心無二라(그 마음이 둘 없음이라)」 하시니라. 

 

 

 

○ 若無忍行이면 萬行이 不成하리라.

 

만약에 참는 행실行實이 없으면 만행萬行이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행문行門(수행의 문)이 비록 갓 없으나 자慈와(사랑과) 인忍(참음)이 근원根源이로다. 고덕古德이 운云(이르시되), 「인심여환몽忍心如幻夢(참는 마음은 환상이나 꿈과 같음)이요 욕경약귀모辱境若龜毛라(욕된 경계는 거북의 털과 같음이라.)」 하시니라. 

 

 

 

○ 凡有下心者는 萬福이 自歸依하리라.

 

대범大凡 마음 낮게 쓰는 사람은 만복萬福이 절로 귀의歸依하나니라. 

 

 

대해大海(큰 바다)가 낮은 까닭으로 백천百川(온갖 시내)의 왕王이 되나니라. 

 

 

 

○ 生死中에 不失正念이 大力菩薩이니 正念者는 無念也이라.

 

생사生死에서 정념正念을 잃지 아니함이 힘센 보살菩薩이니, 정념正念은 념念 없는 것[無念]이라. 

 

 

고성古聖(옛 성인)이 이르시되, 「산간선정山間禪定(산 속의 선정)은 어렵지 아니하거니와 세간경世間境을(세간世間의 경계境界를) 대對하여 념念(생각) 움직이지 아니함이 가장 어렵다.」 하시니라. 

 

 

 

○ 守本眞心이 大精進人也이라. 又 身心不動이 第一精進이니라. 

 

본진심本眞心(근본 참 마음) 지킴이 큰 정진精進하는 사람이라. 또 신身(몸)과 심心(마음)을 동動치(움직이지) 아니함이 제일第一의 정진精進이니라. 

 

 

‘정精’은 부잡不雜한(잡되지 아니한) 것이요 ‘진進’은 불퇴不退한(물러나지 아니한) 것이라. 

 

 

 

○ 經에 云 若起精進心이면 是妄이라 非精進이라 하시고, 古德이 云 莫妄想하며 休得也하라 하시다.

 

경經에 이르시되, 「만약 정진精進이라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는 망妄이라 정진精進이 아니라.」 하시고, 고덕古德이 이르시되, 「망상妄想을 말며 쉬어라.」 하시도다. 

 

 

막망상莫妄想(‘망상을 말라’ 함)은 천진불天眞佛(천진한 부처)이요, 휴망상休妄想(‘망상을 쉬어라’ 함)은 불천진佛天眞(부처가 천진함)이로다. 

 

 

 

○ 於道에 懈怠者는 常常望後하나니 是는 自棄人也이라.

 

도道에 게으른 사람은 상례常例로(늘) 후後(뒤)를 바라나니, 이는 저를 버리는 사람이니라. 

 

 

‘망후望後’는(‘뒤를 바랜다’ 함은), 세즉細則(세밀히 하면) 금일今日(오늘)과 후일後日(내일)이요 추즉麤則(거칠게 하면) 금신今身(금생의 몸)이요 후신後身(후생의 몸)이라. 전전추탁展轉推托하니(옮겨다니며 미루나니) 가위자기可謂自棄이로다(가히 ‘저를 버린다’고 말할 수 있음이로다.)

 

 

 

○ 經에 云 持呪는 現業易制라 自行可違이어니와 宿業難除라 必借神力이라 하시니라. 

 

경經에 이르시되, 「신주神呪를(신묘한 주문을) 송지誦持함(외워 가짐)은 현세업現世業은 제어制禦함이 쉬움이라 내 행行으로 가可히 거스르려니와 숙세업宿世業은 덜어내기가 어려운지라 반드시 신력神力(신묘한 힘)을 가차假借하야사(빌려야) 하리라.」 하시니라. 

 

 

금혹세인今或世人(지금에 혹 세상 사람)이 욕정이사欲正而邪하며(바르고자 하되 삿되고) 욕결이염欲潔而染하며(맑고자 하되 물들며) 덕륭복비德隆福鄙하며(덕은 높으나 복이 비루하며) 행선신흉行善身凶하며(선善을 행行하나 몸이 흉凶하며) 지어무악이화至於無惡而禍하며(악惡이 없음에 이르러도 화근禍根이 있으며) 불살이요不殺而夭(살생殺生을 아니하여도 요절夭折)하나니, 개시숙업皆是宿業(모두가 이 숙업宿業[익혀온 업])이라. <능엄경楞嚴經>에 운云(이르시되), 「송지신주자誦持神呪者(신묘한 주문을 외워 가지는 자)는 오역중죄五逆重罪(오역五逆의 중대한 죄)가 여풍취사如風吹沙하야(바람 부는데 모래와 같아서) 차정성불次定成佛하리라(다음에 반드시 성불成佛하리라).」 하시니라. 

 

 

 

○ 達摩가 云 禮拜는 禮者敬也이요 拜者伏也이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라 하시고, 又云 身口意가 청정淸淨이라 하시니라. 

 

달마達摩가 이르시되, 「예배禮拜라 함은 ‘예禮’는 공경恭敬하는 것이요 ‘배拜’는 굴복屈伏하는 것이니, 진성眞性을 공경恭敬하고 무명無明을 굴복屈伏함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신身(몸)과 구口와(입과) 의意가(뜻이) 청정淸淨함이라.」 하시니라. 

 

 

‘예배禮拜’는 자성불自性佛께 귀의歸依하는 것이니, 역시회망향진亦是廻妄向眞(또한 망妄을 돌이켜 진眞으로 향함)이라.

 

 

 

○ 念佛은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에 無益하리라. 

 

염불念佛은 입에 있음을 이르되 ‘송誦’이요 마음에 있음을 이르되 ‘념念’이니, 한갓(공연히) 송誦하고 념念을 잃어버리면 도道에 이익利益이 없으리라. 

 

 

심즉연불경心則緣佛境하야(마음은 부처의 경계를 연緣하여) 억지불망憶持不忘하고(기억하여 가져서 잊지 아니하고), 구즉칭불명호口則稱佛名號하야(입은 부처의 명호를 불러서) 분명불난分明不亂하므로(분명하고 어지럽지 아니하므로) 명왈名曰(이름하여 이르되) ‘염불念佛(부처를 념念함)’이라. 

 

 

 

○ 五祖가 云 守本眞心이 勝念十方諸佛이라 하시고 六祖가 云 常念他佛하여서는 不免生死이어니와 守我本心이라야 則到彼岸이라 하시다.

 

오조五祖가 이르시되,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킴이 시방제불十方諸佛을 념念하는 것보다 승勝타(수승하다).」 하시고, 육조六祖가 이르시되, 「상례常例로(늘) 다른 부처를 념念하여서는 생사生死를 면免치 못하려니와 본심本心을 지켜야사 즉시에 저 가(피안)에 건너리라.」 하시다. 

 

 

차하此下(이 아래)는 제종사諸宗師(모든 종사宗師)가 직현실교直顯實敎의 즉심즉불即心即佛하시고(실교實敎의 ‘마음에 즉即함이 곧 부처[即心即佛]’라 함을 바로 드러내시고) 척파권교斥破權敎의 구생정토求生淨土하시니(권교權敎의 ‘정토에 나기를 구한다[求生淨土]’함을 물리쳐 부수어버리시니), 가위可謂(가히 진실로), 「환단일립還丹一粒이(환단還丹의 한 알갱이가) 점철성금點鐵成金(쇠에 점을 치니 금을 이룬다)」함이요 「지리일언至理一言(지극한 이치의 한마디 말)이 혁범성성革凡成聖(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이룬다)」함이로다. 

 

 

 

○ 念念에 見性하야 常行平等하면 徃如彈指하야 便覩彌陁이리라. 

 

념념念念(생각 생각)에 성性을 보아 상례常例로(늘) 평등平等을 행行하면 감(왕생往生)이 탄지彈指하는(손가락 퉁기는) 사이 같아서 문득 미타彌陁를 뵈오리라. 

 

 

 

○ 迷心念佛이 有取捨義하니 欣彼極樂이 爲取요 厭此裟婆가 爲捨이니라. 經에 云 種種取捨가 皆是輪廻라 하시니라. 

 

마음을 모르고 염불念佛함이 취取와(가짐과) 사捨(버림)의 뜻이 있나니, 저 극락極樂을 기뻐함이 취取요(가짐이요) 이 사바娑婆를 슬퍼함이 사捨(버림)이니라. 경經[圓覺經]에 이르시되, 「갖가지의 취사取捨가 다 이 윤회輪廻라.」 하시니라. 

 

[범어梵語에 ‘사바娑婆’는 차운此云(여기서 이르되) 감인堪忍(참고 견딤)이니, 위차謂此(이렇게 이르는 것은) 세계인世界人(세상 사람)이 감인중고고堪忍衆苦故(온갖 고통을 참고 견뎌내는 까닭)이라]

 

 

 

○ 佛向性中作이언정 莫向身外求이어다. 性迷即凡이요 性覺即佛이니라. 

 

부처를 성중性中을(성性 가운데를) 향向하여 지을지언정 몸 밖을 향向하여 구求하지 말지어다. 성性을 모름(미혹함)이 곧 범凡이요 성性을 앎(깨달음)이 곧 불佛이니라. 

 

 

 

○ 淨名이 云 迷人은 念佛求生이어니와 悟人은 自淨其心이라 하시고 又云 心淨하면 佛土가 淨이라 하시고 又云 淨穢가 在心이언정 何關國土이리오 하시다.

 

정명淨名이 이르시되, 「모르는(미혹한) 사람은 염불念佛하여 남(왕생往生)을 구求하거니와 아는(깨달은) 사람은 제 마음을 맑히시니라.」하시고, 또 이르시되,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佛土가 깨끗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깨끗하며 더러움이 마음에 있을지언정 어찌 국토國土에 관계하리오?」 하시도다.

 

 

 

○ 先德이 云 大抵衆生이 識心自度이언정 佛不能度衆生이시니라. 佛若能度이신댄 過去諸佛이 已恒沙無量이시되 何故로 我等이 今不成佛고. 故知自不修道하고 徒望淨土者가 錯矣이로다.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대저大抵 중생衆生이 마음을 깨달아 저를 제도濟度함이언정 부처가 능能히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지 못하시나니라. 부처가 만약 능能히 제도濟度하실진댄 과거過去에 제불諸佛이 이미 항사恒沙(항하의 모래수)와 같아서 그지없으시거늘 어떤 탓으로 우리들이 지금토록 성불成佛을 못하였느뇨? 그런 까닭으로 제(저는) 도道 닦지 아니하고 한갓 정토淨土를 바라는 사람이 착錯인(그르친) 줄을 알 것이로다. 

 

 

세전世典[弘明集]에 운云(이르시되), 「사광師曠이 수교雖巧이나(비록 재주가 뛰어나나) 불능탄무현지금不能彈無絃之琴이며(줄 없는 거문고를 탈 수는 없으며) 호학狐狢이(여우와 오소리가) 수온雖熅이나(비록 그 털이 따듯하나) 불능열무기지인不能熱無氣之人(기운 없는 사람을 열이 나게 하지는 못함)이라.」 하고, 불경佛經에 역운亦云(또한 이르시되), 「대의왕大醫王(큰 의원)이 능치일체병能治一切病이로되(능히 모든 병을 치료하되) 불능치명진지인不能治命盡之人이며(생명이 다한 사람을 치료하지는 못하며) 대각왕大覺王(큰 깨달음의 왕)이 능도일체중생能度一切衆生(능히 모든 중생을 제도)하시되 불능도불신지인不能度不信之人(믿지 아니한 사람을 제도할 수는 없음)이라.」 하시니, 이로써 보건댄 신信(믿음) 없는 사람이 자불수도自不修道하고(제 스스로 도道를 닦지 아니하고) 도망정토徒望淨土함이(공연히 정토淨土를 바라는 것이) 가위可謂(가히 진실로), ‘천착만착千錯萬錯(천번을 그르침이요 만번을 그르침)’이로다. 

 

 

 

○ 評曰 上來諸德은 直指一心하시고 別無方便하시니 理實如是이어니와 然이나 迹門에 實有極樂世界에 阿彌陀佛이 有四十八大願하시니 凡念十聲者는 承此願力하야 必往生蓮胎하야 徑脫輪廻하나니 三世諸佛이 異口讚歎하시며 十方菩薩이 同願往生이온 又況古今往生之人이 傳記에 昭昭하시니 願諸行者는 愼勿錯認이어다. 但除其病이언정 不除其法이시니라. 

 

평론評論하여 이르시되, 「위의 제덕諸德(모든 대덕大德들)은 바로 일심一心(한 마음)을 가르치시고 각별各別한 방편方便이 없으시니 이理(이치)는 진실眞實로 이러하거니와, 그러나 적문迹門에 진실眞實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48가지 큰 원력)을 두어계시니, 대범大凡(무릇) 십성十聲을(열번 소리내어) 념念하는 사람은 이 원願의 힘을 받들어 반드시 연화태중蓮花胎中(연꽃 태胎 가운데)에 가서 나(왕생往生하여) 윤회輪廻를 즐겨 벗나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른 입으로 찬탄讚歎하시며 시방보살十方菩薩이 한가지로 가서 남을(왕생往生함을) 원願하거늘 또한 하물며 고금古今(예와 이제)에 왕생往生한 사람이 전기傳記에 분명分明하시니, 원願컨댄 모든 행行하는 사람은 삼가 그릇되이 알지 말지어다. 오직 그 병病을 덜어낼지언정 그 법法은 덜지 아니하시니라.」 

 

 

차此(이)는 의적문依迹門(적문迹門을 의지)하시어 편찬염불방편偏讚念佛方便(염불 방편을 치우쳐 찬탄)하시니라. 방편자方便者는(‘방편方便’이라 함은) 방장일법方將一法하야(바야흐로 한 법을 가져서) 변두제근便逗諸根(모든 육근六根을 곧 피함)이니 제불선교諸佛善巧(모든 부처님의 좋은 수단手段)의 법法이시니라. 범어梵語의 ‘아미타阿彌陁’는 차운此云(여기서 이르되) 무량수無量壽(한량없는 목숨)이시며 역운亦云(또한 이르되) 무량광無量光(한량없는 빛)이시니,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일불호第一佛號(첫째가는 부처님 명호)이시니라. 

 

인명因名(인행因行하실 때의 이름)이 법장비구法藏比丘이시더니 대세자재왕불對世自在王佛하사와(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을 대對하시어) 발사십팔원發四十八願(사십팔원四十八願을 발發)하시되, 「아작불시我作佛時(내가 성불할 때)에 시방무사수세계十方無史數世界(시방 역사가 없는 무수한 세계)의 제천인민諸天人民으로(모든 하늘과 인간으로부터) 이지연비윤동지류以至蜎飛蝡動之流(구물거리며 날거나 움직이는 벌레의 무리에 이르기까지)가 십성념아명자十聲念我名者(나의 이름을 열 번 념念한 자)는 필생아찰必生我刹하리니(반드시 나의 세계에 나게 되리니) 부득시원不得是願인댄(이 발원發願이 이루어지지 않을진댄) 종불성불終不成佛호리이다(끝내 성불成佛하지 않겠나이다).」하고 운운云云하시니, 이러므로 선성先聖(앞선 성인)이 운云(이르시되), 「창불일성唱佛一聲(부처를 부르는 한 소리)에 천마天魔가 경외敬畏하며(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명제귀부名除鬼簿하고(이름이 귀신의 장부에서 없어지고) 연출금지蓮出金池하나니라(금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나나니라.)」 하시니, 윤회속탈輪廻速脫함은(윤회에서 속히 벗어남은) 또 염불念佛이 첩경捷徑(지름길)인 줄을 알 것이로다.

 

참법懺法에 운云(이르시되), 「자력自力(자기의 힘)과 타력他力(남의 힘)이 일지일속一遲一速하니(하나는 느리고 하나는 빠르니), 욕월고해자欲越苦海者(고통의 바다를 건너려는 자)가 종수작선種樹作船(나무를 심어 배를 만듦)은 비자력수행比自力修行(자기 힘으로 수행함에 비유)하니 지야遲也(느림)이요 가선월해借船越海는(배를 빌려 바다를 건너는 것은) 비불력몽탈比佛力蒙脫(부처님의 힘을 입어서 벗어남을 비유)하니 속야速也(빠름)이라.」 하시며, 우왈又曰(또 이르기를), 「자력경다겁自力經多劫이어니와(자신의 힘으로는 다겁多劫을 지나거니와) 불위경각시佛威頃刻時라(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는 눈 깜짝할 사이라.)」 하시며, 

 

우왈又曰(또 이르기를), 「세간치아世間稚兒(세간의 어린아이)가 박어수화迫於水火하야(물과 불에 핍박당하여) 고성대규高聲大呌하면(높은 소리로 소리치면) 부모父母가 문지즉제사차치聞之則諸事且置코(그것을 들으면 모든 일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질주구원疾走救援(뛰어와 구원)하나니 여인임명종시如人臨命終時(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고성염불즉高聲念佛則(높은 소리로 염불하면) 피불彼佛(저 부처님)이 구유천안천이具有天眼天耳(하늘 눈과 하늘 귀를 구족)하시므로 결정래영決定來迎(결정코 와서 맞이)하시니라. 미타彌陁의 대비대원大悲大願(큰 자비와 큰 원력)이 승어부모勝於父母하시고(부모보다 뛰어나시고) 중생衆生의 생사生死하는(죽고 사는) 고통苦痛이 심어수화甚於水火(물과 불보다 심함)이로다. 」하시니라. 

 

유인有人(어떤 사람)이 운云(이르되), ‘유심唯心(다만 마음)이 정토淨土라 정토淨土는 불가생不可生(날 수가 없음)이요 자성自性(자신의 성품)이 미타彌陁라 미타彌陁는 불가견不可見(볼 수가 없음)이라’ 하나니, 이 말씀이 옳은 듯 하되 도리어 그릇되도다. 피불彼佛은(저 부처님은) 무탐무진無貪無瞋하시니(탐욕과 성냄이 없으시니) 아역무탐무진호我亦無貪無瞋乎아(나도 또한 탐욕이 없고 성냄이 없는가)? 피불彼佛은(저 부처님은) 변지옥작연화變地獄作蓮花(지옥地獄을 변화시켜 연화세계蓮花世界로 만들기)를 이어반장易於反掌(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하시거든 아我(나)는 상공업력常恐業力(항상 업력을 두려워함)으로 자타지옥自墮地獄이온(스스로 지옥에 떨어지거늘) 황변작연화호況變作蓮花乎아(하물며 그것을 변화시켜 연화세계를 만들겠는가)? 

 

피불彼佛은(저 부처님은) 관무진세계觀無盡世界를(다함이 없는 세계 관觀하기를) 여재목전如在目前(눈 앞에 있는 것과 같이)하시거든 아我(나)는 격벽사隔壁事(벽을 사이에 둔 일)도 유부지猶不知이온(오히려 알지 못하거든) 황견시방여목전호況見十方如目前乎아(하물며 시방을 눈앞과 같이 보겠는가)? 시고是故로(이러한 까닭으로) 탐진貪瞋(탐내고 성냄)이 수공雖空이나(비록 공空하나) 능발업能發業하고(능히 업業을 발發하고), 업역공業亦空이나(업 또한 공空하나) 능초지옥고能招地獄苦하고(능히 지옥의 고통을 부르고), 지옥고地獄苦가 수공雖空이나(비록 공空하나) 공空이 지마난인只麽難忍(다만 참기 어려움)이니라. 

 

밀사密師[圭峰宗密]가 운云(이르시되), 「자심自心(자기 마음)에 유체공성사이의有體空成事二義하므로(‘체의 공함[體空]’과 ‘일을 이룸[成事]’의 두 뜻이 있으므로) 설실돈오設實頓悟코도(설사 실로 몰록 깨쳤다 하더라도) 종수점수終須漸修하라(끝내 모름지기 점차로 닦아가라).」 하시니, 기유천생석가자연미타豈有天生釋迦自然彌陁(어찌 천생天生의 석가釋迦와 자연自然의 미타彌陁)가 있으리오? 우황마명용수又況馬鳴龍樹(또 하물며 마명馬鳴과 용수龍樹)는 실시조사悉是祖師(다 이 조사祖師)이시되 명수언교明垂言敎하샤(언교言敎를 드리워 밝히시어) 심권왕생深勸往生하시곤(깊이 왕생往生을 권勸하셨거늘) 아하인재我何人哉이완되(나는 어떤 사람이관대) 불욕왕생不欲往生고(왕생往生코자 하지 않는고)? 

 

우각자촌량又各自忖量하라(또 각기 스스로 헤아려보라). 여인음수如人飮水(사람이 물을 마심)에 냉난자지冷煖自知(차고 더운 것은 스스로가 앎)이니 임명종시臨命終時(목숨이 다한 때)에 생사거주生死去住가(나고 죽고 가고 머무름이) 정득자재부定得自在否아(결정코 자재하겠는가)? 약불여시若不如是인댄(만약 이와같지 못할진댄) 막이일시공고莫以一時貢高로(한 때 잘난체 함으로써) 각치영겁침타却致永劫沉墮이니다(도리어 영겁永劫토록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말 것이다.)」 하시며, 우又(또) 불佛(부처님)이 자운自云(스스로 이르시되), 「서방西方이 거차去此가(여기서 감이)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라.」 하시고, 우운又云(또 이르시되), 「거차去此가(여기서 감이) 불원不遠(멀지 않음)이라.」 하시니 하야何也오(어떠한고)? 

 

기유이둔機有利鈍하므로(근기根機에 예리함과 둔함이 있으므로) 교유권실敎有權實하시며(가르침에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이 있으시며) 언유현밀語有顯密하시니(말에 드러냄과 비밀함이 있으시니) 법왕法王의 법중法中에는(법 가운데에는) 살활殺活(죽이고 살림)이 자재自在하시도다. 통인달사通人達士는(통달한 사람은) 장차명경將此明鏡하야(이 밝은 거울을 가져서) 수변자면연추須辨自面姸醜이언정(모름지기 자기 얼굴의 예쁘고 추함을 판별할지언정) 무체일우毋滯一隅하야(한 모퉁이에 막혀서) 시시비비是是非非이어다(시비를 일으키지 말지어다).

 

 

 

○ 聽經은 有經耳之緣과 隨喜之福하니 幻軀는 有盡이어니와 實行은 不亡이니라. 

 

청경聽經(경을 들음)은 귀에 지나간 연緣(인연)과 따라 기뻐한 복福이 있으니, 거짓 몸은 다함이 있거니와 진실眞實의 행行은 없지 않나니라. 

 

 

차명지학此明智學하시니(이는 ‘지혜로운 배움’을 밝히시니), 여식금강如食金剛(금강金剛을 먹음과 같음)이며 승시칠보勝施七寶(칠보를 보시한 것보다 수승함)이로다. 수사壽師[永明延壽禪師]가 운云(이르시되), 「문이불신聞而不信이라도(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상결불종지연尙結佛種之緣이오(오히려 부처될 씨앗의 인연을 맺은 것이요) 학이불성學而不成이라도(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유개인천지복猶盖人天之福(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을 덮음)이라.」 하시다. 

 

 

 

○ 看經을 若不向自己上하야 做工夫인댄 雖看盡萬蔵이라도 猶無益也이리라.

 

간경看經을(경전 보기를) 만약 자기自己를 향向하여 공부工夫를 이루지 아니할진댄 비록 만장萬蔵(수많은 장경藏經) 보기를 다할지라도 오히려 이익利益이 없으리라.

 

 

차명우학此明愚學하시니(이는 ‘어리석은 배움’을 밝히시니), 춘금주제春禽晝啼며(봄새가 낮에 울며) 추충야명秋蟲夜鳴(가을벌레가 밤에 욺)이로다. 밀사密師[圭峰宗密禪師]가 운云(이르시되), 「식자간경識字看經(글자를 알아 경을 봄)이 원불증오元不證悟(원래로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함)이요 소문석의銷文釋義가(문자를 새겨 뜻을 해석함이) 유치탐진사견猶熾貪瞋邪見(오히려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邪見]만 치성熾盛케 함)이라.」 하시니라. 

 

 

 

 

○ 惑有不窮世出世에 善惡因果가 皆從一念起者는 居常時中에 輕御自心하야 不解省察하나니 以故로 雖有看經과 及禪偈에 忽然得意之時이라도 但即時欣幸이요 後便輕擲하야 不加決擇하고 反逐塵緣하야 念念流轉하나니 豈有成辦之期이리오.

 

혹或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선악善惡의 인因과 과果가 다 일념一念(한 생각)을 좇아 일어난 줄을 궁구窮究하지 아니한 사람은, 상례常例로(늘) 십이시十二時(24시간)에 자심自心(자기 마음) 다스림을 경輕히(가벼이) 하여 성찰省察(살펴 관찰)함을 알지 못하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비록 간경看經(경전을 봄)과 또 선게禪偈(선禪의 게송)에 문득 뜻을 얻은 시절時節이 있을지라도 오직 즉시即時에 흔행欣幸(기쁘고 다행)할 뿐이요 후後에는 문득 경輕히(가벼이) 버려버리고 결택決擇함을 더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진연塵緣(티끌 인연)을 좇아 념념念念(생각 생각)에 흘러 옮아가나니, 어찌 성판成辦(성취할)할 기약期約이 있으리오?

 

 

 

○ 學者가 不能返照自心에 煩惱性空故로 但將聰慧하야 終年竟歲토록 數他珍寶하나니라. 

 

학자學者(배우는 자)가 능能히 자심自心(자기 마음)에 번뇌煩惱의 성性이 공空한 줄을 도리어 비추지 못하므로, 오직 총혜聰慧(총명과 슬기)를 가져서 년年을 마치며 세歲가(세월이) 맟도록 남의 진보珎寶(보배)를 헤아리나니라. 

 

 

찬피고지鑽彼古紙하고(저 옛 종이만을 뚫고) 망아보장忘我寶蔵(내 보배창고를 잊음)이로다. 

 

 

 

○ 凡人이 多於敎法上에 悟하고 不於自心上에 悟하나니 雖至成佛이라도 皆謂之聲聞見이니라. 

 

대범大凡(무릇) 사람이 많이들 교법상敎法上에(교법敎法에서) 깨닫고 자심상自心上에(자기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성불成佛함에 이를지라도 다 성문聲聞의 견해見解라 이를지니라. 

 

 

분비욕궁사수의憤悱欲窮沙數義하나니(분하고 애절하여 모래 수의 뜻을 궁구窮究하고자 하나니), 기지무설시진승豈知無說是眞乘이리오(어찌 설說함 없음이 이 진승眞乘임을 알리오)?

 

* 분비憤悱(분하고 애절함): (알아내고자) 스스로 성내고 애태우다.

「子曰, 不憤이어든 不啓하며 不悱어든 不發호되, 擧一隅에 不以三隅反이어든 則不復也이니라.」 

공자 이르길, “알려고 애쓰지 않거든 열어주지 않으며 표현하지 못해 애태우지 않거든 드러내지 않되, 한 모퉁이를 들어보였을 때 그것으로 남은 세 모퉁이를 반증反證하지 못하면 반복反復하지(다시 말해주지) 않는다.”하시니라.

 

 

 

○ 先德이 云 迷人은 向文字中求悟이어늘 悟人은 向自心而覺하며 迷人은 修因待果이어늘 悟人은 了心本空이라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미혹한 사람은 문자文字를 향向하여 깨닫기를 구求하거늘 깨달은 사람은 자심自心을 향向하여 각覺하며, 미혹한 사람은 인因을 닦아 과果를 기다리거니와 깨달은 사람은 심心(마음)의 본래本來 공空함을 아나니라.」 하시니라. 

 

전제筌罤가(그물이) 불시어토不是魚兎(물고기와 토끼는 아님)이요 조박糟粕이(술 찌꺼기가) 불시본미不是本味(술 본래의 맛은 아님)이로다. 

 

 

 

○ 祖師가 云 千經萬論이 莫過守本眞心이라 하시다. 

 

조사祖師가 이르시되, 「천경千經과 만론萬論이 본진심本眞心(근본 참마음)을 지킴에 지나는 것이 없다.」 하시다. 

 

 

◉ 차此(이)는 結上諸文하샤(위의 모든 글을 맺으시어) 중중경책말세우학重重警策末世愚學하샤(말세의 어리석은 학자를 거듭 거듭 경책하시어) 불착문자不着文字하고(문자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귀취자기歸就自己케(자기를 향하여 돌아오도록) 하시도다. 

 

 

 

○ 直饒講得千經論이라도 也落禪家第二機이리라. 

 

비록 천경론千經論을 강설講說할지라도 선가禪家의 제이기第二機에 떨어지리라. 

 

 

◉ 의교리교依敎離敎가(교敎를 의지하고 교敎를 여읨이) 우열형연優劣逈然이로다(뛰어남과 뒤쳐짐이 아득하여 멀도다). 「수왈해중천주雖曰海中千珠이나(비록 바다 가운데에 천개의 구슬을 말하나) 하사격외일보何似格外一寶이리오(어찌 격格 밖의 한 보배와 같으리오)?」

 

 

 

 

○ 先德이 云 一法을 通하면 萬法이 自通하나니 故로 好愽聞者는 不知道라 하시다.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일법一法(한 법)을 통通하면 만법萬法이 절로 통通하나니, 그러므로 널리 들음을 즐기는 자는 도道를 알지 못하나니라.」 하시다. 

 

 

◉ 일법一法(한 법)은 리명절상離名絶相(이름을 여의고 모양을 끊음)이어늘 만사천려萬思千慮(만 가지 사량思量과 천 가지 염려念慮)가 무익어도無益於道(도道에 이익됨이 없음)이로다. 

 

 

 

○ 學未至於道하여서 衒耀見聞하야 徒以口舌辯利로 相勝者는 如厠屋에 塗丹雘이니라. 

 

학學(배움)이 도道에 이르지 못하여서 듣고 본 것을 뽐내어 한갓 혀끝의 날랜 말로 서로 이기려는 자는, 측옥厠屋(화장실)에 단확丹雘(단청)을 바르는 것과 같으니라. 

 

 

 

○ 學本修性이라 豈慍人之不知이며 道本全生이라 何蘄世之爲用이리오.

 

학學(배움)은 본래本來 성性을 닦음이라 어찌 사람의 알지 못함을 온노慍怒하며(성내며), 도道는 본래本來 생生을 온전히 함이라 어찌 세상世上에 쓰임을 기구蘄求하리오(바라고 구하리오)?

 

 

◉ 차삼절此三節(이 세 절)은 심척위인지학深斥爲人之學하사(사람의 배움을 깊이 비판하여) 以結三道字하시니라(세가지 길을 맺으시니라.) 「즉심위도자即心爲道者(마음에 즉即하여 도道로 삼는 자)는 가위심류득원可謂尋流得源(가히 진실로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는다.’라고 말할 수 있음이로다.」

 

 

 

○ 出家人이 習外典하는 것이 如以刀로 割泥이니 泥無所用이요 而刀가 自傷焉이니라. 

 

출가出家한 사람이 외전外典(불교 밖의 경전)을 배우는 것이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아서 흙은 쓸데없고 칼이 저만 상함이니라. 

 

 

◉ 문외장자자門外長者子가(문 밖에 장자長者의 아들이) 환입화택중還入火宅中하는구나(도리어 불타는 집으로 들어가는구나). 

 

 

 

○ 出家爲僧이 豈細事乎리오. 非求安逸也이며 非求溫飽也이며 非求利名也이라. 爲生死也이며 爲斷煩惱也이며 爲續佛慧命也이며 爲出三界하야 度衆生也이니라. 

 

출가出家하여 중이 됨이 어찌 적은 일이리오? 안일安逸(편안함)을 구求하는 것이 아니며 온포溫飽를(배부름을) 구求하는 것이 아니며 이명利名을(이익과 명예를) 구求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生死를 위爲하며 번뇌煩惱 끊기를 위爲하며 부처의 혜명慧命 이음을 위爲하며 삼계三界에 벗어나 중생衆生 제도濟度함을 위爲함이니라. 

 

 

 

○ 經에 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시며 又曰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시고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시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하라 하시니라. 

 

경經[遺敎經]에 이르시되, 「무상無常의 불이 모든 세간世間을 불사른다」 하시며 또 이르시되, 「중생衆生의 고苦로운(괴로운) 불이 사면四面에 함께 붙는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모든 번뇌煩惱의 적賊(도적)이 상례常例로(늘) 사람을 죽이려 엿보고 있다」 하시니, 도인道人(도道 닦는 사람)은 마땅히 자기를 경책警策하야 깨어서 머리에 불붙은 것을 구救하듯 하라.」 하시니라. 

 

 

◉ ‘무상지귀無常之鬼는(무상無常의 귀신은)’ 이살위희以殺爲戱하나니(죽음으로써 유희遊戲를 삼나니) 천지天地(하늘과 땅)도 상유종궁尙有終窮이온(오히려 끝내 다함이 있거든) 황만물호況萬物乎아(하물며 만물萬物에 있어서랴). 한서왕래寒暑往來와(추움과 더움이 가고 오는 것과) 일월성허日月盈虛와(해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과)  내지화개엽락乃至花開葉落과(나아가 꽃 피고 잎 떨어지는 것과) 염념찰나念念刹那(생각 생각의 찰나刹那)가 개시무상皆是無常(다 이 무상無常)이라. ‘고화사분苦火四焚(고통의 불이 사면에서 타오름)’은 비생로병사야比生老病死也(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유함)이라. 

 

 

 

○ 貪世浮名은 枉功勞形이요 營求世利는 業火에 加薪이로다.

 

세간世間의 부명浮名(뜬 이름)을 탐착貪着함은 거짓 공부功夫에 몸만 고단함이요, 세간世間의 이욕利欲을 영구營求함(꾀하여 구함)은 업業의 불에 섶을 보탬이로다. 

 

 

◉ ‘세간世間의 명리名利’는(명예와 이익은) 불붙은 섶이니, <법화法華>에 「추폐麤蔽한(거칠고 해진) 색성향미色聲香味는(물질과 소리와 향기와 맛은) 치화지구致火之具(불을 부르는 도구)이니 탐貪하지 말라.」 하시니 이러한 뜻이로다. 

 

 

 

○ 先德이 云 名利衲子는 不如草衣野人이라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명리납자名利衲子(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납자)는 초의草衣(풀옷) 입은 야인野人(세속 사람)만 같지 못하다.」 하시니라. 

 

 

 

○ 末世에 羊質虎皮之軰가 不識廉耻하고 望風隨勢하야 陰媚取寵하나니 噫라 其懲也夫인져.

 

말법末法에 양羊의 얼굴에 범의 가죽 무리가 렴廉과(염치와) 치耻를(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풍風(바람)을 바라며 세勢(권세權勢)를 따라 그윽이 아부하여 총애寵愛를 취取하나니, 슬프다! 그 징증懲證할 것인져(그 징험徵驗됨이 있을 것인져).

 

 

◉ 말세불자末世佛子가 심염세리心染世利하야(마음이 세속 이익에 물들어) 망렴망치忘廉忘耻하고(염치와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추주풍진趨走風塵하야(바람과 티끌에 굽신거리며 나아가) 반취소어속인反取笑於俗人(도리어 속인俗人의 웃음을 사게 됨)이로다. ‘풍세미총風勢媚寵’은 아부권문阿附權門(권세權勢에 아부)하는 짓이라. 名利衲子(이익과 명예를 구하는 납자)를 以羊質虎皮로(양 바탕에 호랑이 가죽으로) 증험證驗하므로 ‘징야부懲也夫[徵也夫]’ 삼자三字(세 글자)로 결結하시니(맺으시니), 문출장자文出莊子하니라(글이 <장자莊子>에 나오니라).

 

 

 

○ 先德이 云 末世佛法이 變於人情하야 以世利로 賤賣하니 可悲로다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말세末世에 불법佛法이 인정人情에 변變하여 세리世利로(세속 이끗으로) 천賤하게 팔리나니, 가可히 슬픔이로다.」 하시니라. 

 

 

 

○ 經에 云云 何賊人이 假我衣服하야 裨販如來하며 造種種業이어뇨 하시다. 

 

경經에 이르시되, 「어떤 도적盜賊이 내 의복衣服을 가차假借하야(빌려서) 여래如來를 팔며 가지가지 업業을 짓느뇨?」 하시다. 

 

 

 

○ 末法에 比丘가 有多般名字하니 或鳥鼠僧이라 하며 或啞羊僧이라 하며 或禿居士라 하며 或地獄滓라 하며 或披袈裟賊이라 하시니, 噫라 其所以以此일새니라.

 

말법末法에 비구比丘가 여러 가지 명자名字가(이름이) 있으니, 혹或 ‘조서승鳥鼠僧(박쥐중)’이라 하며, 혹或 ‘아양승啞羊僧(벙어리 염소중)’이라 하며, 혹或 ‘독거사禿居士(머리 민 거사)’라 하며, 혹或 ‘지옥재地獄滓(지옥 찌꺼기)’라 하며, 혹或 ‘가사적袈裟賊(가사 입은 도적)’이라 하시니, 슬프다! 그것이 이러한 까닭이니라.

 

 

◉ 차此(이)는 통결상문通結上文하시니라(윗글을 통틀어 맺으시니라). 비도매법非徒賣法이라(다만 법法만 파는 것이 아니라) 겸판여래兼販如來하사와(여래如來를 함께 팔아) 발인과배죄복撥因果排罪福하며(인과因果가 없다하고 죄罪와 복福을 배척하며) 비등신구沸騰身口하며(몸과 입으로 떠들며) 질기증애迭起憎愛하니(미워하고 사랑함을 번갈아 일으키니) 가위可謂(가히 진실로), ‘애재우재哀哉吁哉(슬프고도 슬픔)이며 창연비산愴然悲酸(애닯고 비통함)’이로다. 

 

피승피속왈避僧避俗曰(중도 벗어나고 속인도 벗어남을 이르길) ‘조서鳥鼠(박쥐)’요 설불설법왈舌不說法曰(혀로 설법하지 못함을 이르길) ‘아양啞羊(벙어리 염소)’이요 승형속심왈僧形俗心曰(중의 형색에 속인의 마음을 이르길) ‘독거사禿居士(머리 민 거사)’요 죄중불천왈罪重不遷曰(죄가 무겁되 고치지 아니함을 이르길) ‘지옥재地獄滓(지옥 찌꺼기)’요 매불영생왈賣佛營生曰(부처님을 팔아 생을 누리는 것을 이르길) ‘피가사적披袈裟賊(가사 입은 도적)’이라. 이피가사적以披袈裟賊으로(‘가사 입은 도적’이라는 말로써) 증차다명證此多名하므로(이 많은 이름을 증명하므로) 이차이자以此二字(‘이차以此’ 두 글자)로 결結하시니(맺으시니), 문출노자文出老子하니라(글이 <노자老子>에 나오니라).

 

 

 

○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麽아 即今에 虛受信施者가 是이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나니 是誠何心哉오.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털 입으며 뿔 인 것을 알고자 하는가? 곧 지금 신시信施를(신심 있로 시주물施主物을) 허虛히(헛되이) 수受하는(받아 쓰는) 것이 이것이어늘, 혹或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아니하여서 먹으며 춥지 아니하여서 입나니 이는 진실眞實로 어떤 마음인고? 목전目前(눈 앞)의 낙樂이 곧 이 신후身後(이 몸 뒤)의 고苦인 줄을 다 사량思量치(헤아리지) 않는다.」 하시니라. 

 

 

◉ [지론智論(지도론智度論)]에 일도인一道人(한 도 닦는 사람)이 오립속五粒粟(다섯 좁쌀)에 수우신受牛身하야(소 몸을 받아서) 생상근골生償筋骨하고(살아서는 뼈와 근육이 상하도록 일해서 갚고) 사환피육死還皮肉하니(죽어서는 가죽과 살로 되돌려주니) 허수신시虛受信施가(헛되이 시주물施主物 받은 것이) 보여영향報如影響(응보應報가 메아리와 같음)이로다.

 

 

 

○ 故로 曰 寧以熱鐵로 纏身이언정 不受信心人의 衣하며 寧以洋銅으로 灌口이언정 不受信心人의 食하며 寧以鐵鑊의 投身이언정 不受信心人의 房舍等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르되, 「차라리 뜨거운 쇠로 몸을 쌀 지언정 신심인信心人(신심 있는 사람)의 의衣를(옷을) 수受하지(받지) 말며, 차라리 구리 녹힌 물을 입에 부울지언정 신심인信心人(신심 있는 사람)의 식食(음식)을 수受하지(받지) 말며, 차라리 쇠가마에 몸을 던질지언정 신심인信心人(신심 있는 사람)의 방사房舍들을(머물 곳을) 수受하지(받지) 말라.」 하시니라. 

 

 

◉ ‘보살菩薩의 대원大願’은 <범망경梵網經> [심지법문품心地法門品]에 다 갖추어 나타내시니라. 

 

 

 

○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며 受施를 如受箭이어다. 幣厚言甘이 道人의 所畏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도인道人은 밥 먹음을 독약毒藥 먹듯 하며 신시수용信施受用(신자信者의 보시布施 수용受用)함을 화살 수受하듯(받듯) 할지어다. 폐백幣帛(대접)을 후厚하게 해주고 말을 달게 이르는 것은 도인道人의 두려운 곳이라.」 하시니라. 

 

 

 

○ 故로 曰 逆境界는 易打이어니와 順境界는 難打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역경계逆境界는 물리침이 쉽거니와 순경계順境界는 물리침이 어렵다.」 하시니라. 

 

 

◉ 역순경계逆順境界는 아상我相의 소치所致(아상我相으로 인해 생긴 바)이니라.

 

 

 

○ 故로 曰 修道之人은 如一塊磨刀之石하니 張三也가 來磨하며 李四也가 來磨하야 磨來磨去에 別人刀는 快호되 而自家石은 漸消이어늘 然이나 有人은 更嫌他人이 不來我石上磨하나니 實爲可惜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수도修道하는 사람은 한 무더기의 칼 가는 돌과 같으니 장가張家 셋째아들이 와서 갈며 이가李家 냇째아들이 와서 갈아, 갈아 오고 갈아 감에 남의 칼은 쾌快호되(잘들되) 자가自家(자기 집) 돌은 점점漸漸 소消커늘(닳아 없어지거늘),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내 돌에 와서 갈지 아니함을 혐심嫌心하나니(싫어하는 마음을 내나니) 진실眞實로 가可히 슬프다.」 하시니라. 

 

 

◉ 차此(이)는 석상경계釋上境界(위의 경계를 해석)하시니라. 

 

 

 

○ 故로 古語에 亦有之하니 曰 三途苦는 未是苦이어니와 袈裟下에 失人身이 始是苦也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옛 말씀에 또한 있나니, 이르시되, 「삼도三途의 고苦는 이 고苦가 아니어니와 가사하袈裟下에(가사를 입고) 인신人身(사람 몸) 잃음이 비로소 이 고苦라(괴로움이라)」 하시니라. 

 

 

◉ 시기어일오희始起於一於戱하샤(시작은 하나의 ‘오호라!’로 일으켜서) 종경어일고어終結於一古語하시고(마지막은 하나의 ‘옛 말씀에’로 끝을 맺으시고) 중간中間은 주역허다고紬繹許多故로(많은 것을 설명하여 풀어내시는 까닭으로) 왈자曰字하시니(‘이르시되’라는 글자를 쓰시니), 차역일단문법此亦一段文法(이 또한 한 단락의 문법文法)이로다.

 

 

 

○ 咄哉此身이여, 九孔에 常流이로다. 百千癰疽에 一片薄皮이로다 하시며, 又云 革囊盛糞이요 膿血之聚이라 臭穢可鄙이니 無貪惜之이어다. 何況百年을 將養하다가 一息에 背恩이겠는가. 

 

「애달프다, 이 몸이여! 구공九孔(아홉 구멍)에 상례常例로(늘) 흐르도다. 백천百千의 부스럼에 일편一片(한 편)의 엷은 가죽이로다.」 하시며 또 이르시되, 「가죽 자루에 똥을 담고 고름과 피의 무더기라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니 탐貪하여 아끼지 말지어다. 어찌 하물며 백년百年을 가져서 기르다가 한 숨에 은혜恩慧[恩惠]를 배반背叛함이겠는가?」

 

 

◉ ‘구공九孔(아홉 구멍)’은 일신一身(한 몸)의 상칠하이上七下二(위 일곱이요 아래 둘)이라. 상래제업上來諸業(위로부터 오는 모든 업業)이 개유차신皆由此身(다 이 몸을 말미암음)이므로 발성질돌發聲叱咄하시고(소리를 내어 ‘돌!’ 하여 꾸짖으시고) 특명과오特明過惡하샤(특별히 잘못을 밝히시어), 상래제업上來諸業(위로부터 오는 모든 업業)이 개유차신皆由此身(다 이 몸을 말미암음)이므로 사수심인使修心人으로(마음을 닦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탐무석毋貪毋惜케(탐하고 아끼지 말도록) 하시도다. 

 

이 몸은 분취糞聚라(똥을 모아둔 것이라) 냄새나고 더러움이 이러하니, 상례常例로(늘) 행실行實 없음이 가장 누추陋麤하여(더럽고 거칠어서) 선신善神이 다 배거背去하나니라(등지고 가버리느니라). <위의경威儀經>에 운云(이르시되), 「불세정수不洗淨手로(깨끗이 씻지 않은 손으로) 경권經卷을 잡거나 불전佛前에 가래침 뱉거나 하면 이 사람은 다 측충厠蟲(화장실 벌레가) 되리라.」 하시고 또 「등측登厠에(화장실에 올라서서) 세정洗淨(씻지[뒷물]) 아니한 사람도 이러하리라.」 하시고, 

 

우운又云(또 이르되), 「범입측시凡入厠時(무릇 화장실에 들어간 때)에 먼저 모름지기 탄지삼성彈指三聲(손가락 퉁기기를 세 번)하여 측귀厠鬼를(화장실 귀신을) 경계警戒하고 가래침 뱉지 말며 어언語言으로(말로) 작성作聲(소리내지) 말며 화벽서자畵壁書字(벽에 그림 그리거나 글씨 쓰지를) 말고 오주五呪를(다섯 가지 주문을) 묵송黙誦하여(묵묵히 마음으로 읊어) 착실세정着實洗淨하라(착실히 깨끗하게 씻으라). [度+七] 만약 이 오주五呪를(다섯 주문을) 송지誦持(읊어 가지지) 아니하면 비록 칠항하수七恒河水(일곱 항하의 물)로 세정洗淨하여도 신기身器가(몸이) 조촐하지(깨끗하지) 못하리라.」 하시며, 

 

우운又云(또 이르되) 「세정洗淨(깨끗이 씻음, [뒷물])에 수용냉수須用冷水하며(모름지기 차가운 물을 쓰며) 세수洗手(손을 씻음)에 수용목설회니須用木屑灰泥(모름지기 톱밥과 회갈색 진흙을 사용)하라.」 하시니라. 차등측세정此登厠洗淨(이는 화장실에 올라 씻음)이 역시亦是(이 또한) 도인道人의 일용행실日用行實(일상으로 쓰는 행실)이므로 략인경문畧引經文(간략히 경문經文을 인용)하여 병부우차幷附于此하노라(아울러 여기에 붙이노라). 

 

* 오주五呪: 

입측주入厠呪, 옴 하로다야 사바하. 

세정주洗淨呪,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세수주洗手呪, 옴 주가라야 사바하. 

거예주去穢呪, 옴 시리예 바헤 사바하. 

정신주淨身呪, 옴 바아라 놔가닥 사바하. 

 

 

 

○ 大抵道人은 宜應端心하야 以質直으로 爲本이니라. 一瓢一衲으로 旅泊無累하야 出言을 涉典章하며 說法을 傍稽古이어다. 語是心苗이니 豈恣胸臆이리오.

 

대저大抵(무릇) 도인道人은 반드시 마음을 단정端正히 하야 질직質直함(질박하고 곧음)으로 근본根本을 삼음이 마땅하니라. 일표一瓢와(한개의 표주박과) 일납一衲으로(한 벌의 누더기로) 나그네 머물 듯 하여 걸림이 없어, 말의 출처를 전장典章(경전과 어록)에 간섭干涉하며 법法 설說함을 계고稽古(옛 일을 참고)하여 의방依傍할지어다(의지하고 따를지어다). 말씀은 이 마음의 움싹이니 어찌 짐작으로 방자放恣하게(제멋대로) 하리오?

 

 

◉ 차此(이)는 석질직이자釋質直二字(‘질직質直’이라는 두 글자를 해석)하시니라. 

 

 

 

○ 佛이 言 心如直絃하라 하시며 淨名이 云 直心이 是道場이며 直心이 是淨土라 하시니라. 

 

불佛이(부처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곧은 시울(줄)과 같이 하라.」 하시며 정명淨名이 이르시되, 「직심直心(곧은 마음)이 이 도량道場이며 직심直心(곧은 마음)이 이 정토淨土라.」 하시니라. 

 

 

◉ 차此(이)는 결상문結上文하시니라(윗글을 맺으시니라). 

 

 

 

○ 有罪에 即懺悔하고 發業에 即慚愧하면 有丈夫氣象하니라.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하리며 又知非底一念이 成佛作祖基本이니라. 

 

죄罪가 있음에 즉시에 참회懺悔하고 업業이 발發함에 즉시에 참회懺愧하면 장부丈夫의 기상氣象이 있나니라. 또 허물을 고쳐 제 스스로 새로우면 죄罪가 마음을 좇아 멸滅할 것이며 또 그릇됨을 안 일념一念이 부처가 되며 조사祖師가 될 터전이니라. 

 

◉ ‘참회懺悔’는, 참기전건懺其前愆하며(그 이전의 허물을 참懺하며[뉘우치며] 회기후과悔其後過이요(그 뒷날의 잘못을 경계하여 회悔함이요[꾸짖음이요]), ‘참괴懺愧’는, 참책어내懺責於內하며(안에서 스스로 꾸짖어 참懺하며[뉘우치며]) 괴발어외愧發於外하는(밖에서 남에게 드러내어 괴愧하는[부끄러워하는]) 것이라. 그러나 심본공적心本空寂이라(마음은 본래 공적空寂함이라) 죄업무주罪業無主이로다(죄업罪業이 주인이 없음이로다.) 

 

 

 

○ 實際理地엔 不受一塵이어니와 佛事門中엔 不捨一法이니라. 

 

실제實際인 리理(이치)의 땅에는 일진一塵(한 티끌)도 받지 아니하려니와, 불사佛事의 문門 가운데에는 일법一法(한 법)도 버리지 아니하나니라. 

 

 

◉ 차此(이)는 총결상래만행제문總結上來萬行諸文하시니라(위로부터 오는 만행萬行의 모든 글을 모아서 맺으시니라.) [현중명玄中銘]에 운云(이르시되), 「삼라만상森羅萬像은 고불가풍古佛家風(옛 부처의 가풍家風)이요, 벽락청소碧落靑宵는(푸른 하늘과 청량한 밤은) 도인활계道人活計라(도인道人의 살아가는 계책計策이라) 하시니라. 

 

 

 

○ 凡夫는 取境하고 道人은 取心하나니 心境을 兩忘하야사 乃是眞法이니라. 

 

범부凡夫는 경境을(경계를) 취取하고 도인道人은 심心(마음)을 취取하나니, 심心과 경境을 다 잊어야 이 진법眞法(진실한 법)이니라. 

 

 

◉ 차此(이)는 합론범부이승合論凡夫二乘(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을 합하여 논)하시니라. 

 

『천지상공진일월天地尙空秦日月이요 

산하불견한군신山河不見漢君臣이로다.』 [曇穎達觀]

 

천지天地에 오히려 진秦나라 일월日月이 공空함이요 

산하山河에 한漢나라 군신君臣을 보지 못함이로다.

 

 

 

○ 聲聞은 宴坐林中호되 被魔王의 捉이어니와 菩薩은 遊戱世間호되 外魔가 不覓하나니라.

 

성문聲聞은 림중林中(수풀 속)에 연적宴寂히(평안하고 고요히) 앉되 마왕魔王의 잡음을 입거니와, 보살菩薩은 세간世間에 놀며 희롱戱弄하되 외마外魔가(밖의 마군魔軍이가) 찾지 못하나니라. 

 

 

◉ 차此(이)는 합론성문보살合論聲聞菩薩(성문聲聞과 보살菩薩을 합하여 논)하시니라. 

 

『삼월나유화하로三月懶遊花下路하니 

일가수폐우중문一家愁閉雨中門이로다.』 [風穴延沼]

 

삼월(三月)에 겨르로이 꽃 아래 길을 노니나니,

한 집은 비가 오는 중에 문을 닫고 근심함이로다. 

 

 

 

○ 衆生이 迷己逐物故로 說諸法의 本來空寂하샤 爲第一體句하시고 又恐沉空滯寂故로 說恒沙妙用하샤 爲第二用句하시고 又是走殺兩頭故로 說不空不有하샤 爲第三體用句하시니 此는 佛祖의 不易之軌則也이시니라. 

 

중생衆生이 ‘기己(자기)를 미혹하여 물物을(다른 무언가를) 쫓는 까닭으로’ 제법諸法의 본래공적本來空寂을 설說하시어 제일第一의 체구體句를 삼으시고, 또 ‘공空에 잠기며 적寂에 걸릴까 두려운 까닭으로’ 항사恒沙의 묘용妙用을 설하시어 제이第二의 용구用句를 삼으시고, 또 ‘이 양두兩頭(두 끝)에 내달리는 까닭으로’ 불공不空과(공空 아님과) 불유不有를(유有 아님을) 설하시어 제삼第三의 체용구體用句를 삼으시니, 이는 부처와 조사祖師의 개역改易치(고쳐서 바꾸지) 못할 법法이시니라. 

 

 

◉ 『상억강남삼월리常憶江南三月裏에 

자고제처백화향鷓鴣啼處百花香하노라.』 [朱子]

 

항상 강남의 삼월을 생각하는 속에,

자고새 우는 곳에 일백 꽃이 향기롭도다. 

 

 

 

○ 大抵衆生이 外迷着相 內迷着空하나니 經에 云 衆生의 虛妄浮心이 多諸巧見이라 하시니라. 

 

대저大抵(무릇) 중생衆生이 밖을 미迷(미혹)하야 상相에 착着(집착)하고 안을 미迷(미혹)하야 공空에 착着(집착)하나니, 경經[圓覺經]에 이르시되, 「중생衆生의 허망虛妄하게 뜬 마음이 모든 교견巧見(공교工巧한 소견所見)이 많다.」 하시니라. 

 

 

◉ 차此(이)는 통결상의通結上意하시니(위의 뜻을 통틀어 맺으시니), 인교이경引敎已竟하시니라(교敎를 인용함을 마치시니라). 

 

 

 

○ 先德이 云 禪學者는 取湛然不動淸淨境界하야 爲是佛法하나니 也大錯也이로다. 亦云 湛湛黑暗深坑이 寔可怖畏라 하시니라.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선학자禪學者는 맑아 동動치 아니하는 청정경계淸淨境界를 취取하여(가져서) 이 불법佛法으로 삼나니 큰 착錯(그르침)이로다.」 또 이르시되, 「맑고 맑되 흑암黑暗한(몹시 어두운) 깊은 구렁이 가장 두렵도다.」 하시니라. 

 

 

◉ 차하此下(이 아래)는 할출선자지병喝出禪者之病하시니라(선학자의 병을 꾸짖어 벗어나게 하시니라.)

 

『휴언불석능견구休言拂石能堅久이어다.

약비무생시찰나若比無生是刹那이니라.』 [南明泉]

 

불석拂石이 능히 굳어서 오래간다 이르지 말지어다.

만약 무생無生과 견줄진댄 이 찰나刹那이니라. 

 

* 불석拂石: 큰 돌이 있으되 방方이 사천리四千里라. 

 

 

 

○ 禪學者는 本地風光을 若未發明則孤峭玄關에 擬從何透이리오. 往往에 斷滅空으로 以爲禪하며 無記空으로 以爲道하며 一切俱無로 以爲高見하나니 此는 冥然頑空이라 受病幽矣니 今天下之言禪者가 多坐在此病하니라.

 

선학자禪學者는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만약 발명發明치 못하면 홀로 높고 깊은 관關에 어디를 좇아 사무치리오? 므리므리예(이따금) 단멸공斷滅空으로 선禪을 삼으며 무기공無記空으로 도道를 삼으며 일체一切 다 없음으로 고견高見을(높은 견해를) 삼나니, 이는 아득하여 완공頑空이라 병病을 수受함(얻음)이 깊으니, 이제 천하天下에 선법禪法을 이르는 사람이 많이들 이 병病에 앉았나니라. 

 

 

◉ 향상일관向上一關(향상向上의 한 관문關門)은 조족무문措足無門(발걸음을 두되 문이 없음)이로다. 운문대사雲門大師가 운云(이르시되), 「광불투탈光不透脫(빛이 뚫고 벗어나지 못함)에 유양종병有兩種病하고(두 가지 병이 있고) 법신法身에도 역유양종병亦有兩種病하니(또한 두 가지 병이 있으니) 일일투출一一透出하야사(하나하나 뚫고 벗어나야) 시득始得다(비로소 옳다).」 하시니라.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면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이로다.』

 

향기로운 풀 길[芳草路]을 밟지 아니하면, 

꽃 떨어지는 촌[落花村]에 이르기는 어려움이로다. 

 

 

 

○ 宗師가 亦有多病하니 病在耳目者는 以瞠眉努目하며 側耳點頭로 爲禪하고 病在口舌者는 以顚言倒語하며 胡唱亂喝로 爲禪하고 病在手足者는 以進前退後하며 指東畫西로 爲禪하고 病在心腹者는 以窮玄究妙하며 超情離見으로 爲禪하나니 據實而論컨댄 無非是病이니라. 

 

종사宗師가 또 많은 병病을 두었나니, 병病이 이목耳目(귀와 눈)에 있는 이는 눈썹 찡그리며 눈 부릅뜨며 귀기울이며 머리 끄덕임을 선禪으로 삼고, 병病이 구설口舌(입과 혀)에 있는 이는 미친 말을 하며 거꾸로 된 말을 하며 호할胡喝하며 난할亂喝로 선禪으로 삼고, 병病이 수족手足(손과 발)에 있는 이는 앞에 나아가며 뒤로 물러나며 동東을 가리키며 서西를 그림으로 선禪으로 삼고, 병病이 심복心腹(가슴과 배)에 있는 이는 현玄을 궁구窮究하며 묘妙를 궁구窮究하며 정情을 건너뛰며 견見을 여읨을 선禪으로 삼나니, 실實을 들어 의론議論컨댄(실상대로 말한다면) 이 병病 아님이 없느니라. 

 

 

◉ 살부살모殺父殺母는(아비 죽이고 어미 죽임은) 불전佛前(부처님 앞)에 참회懺悔어니와(참회하거니와) 방대반야謗大般若는(대반야大般若를 비방함은) 불통참회不通懺悔(참회가 통하지 않음)이니라. 

 

 

 

○ 凡人이 臨命終時에 若一豪나 凡聖情量을 不盡커나 思慮를 未忘하면 向驢胎馬腹裏하야 托質하며 泥犁鑊湯中에 煮煠하다가 乃至依前再爲螻蟻蚊虻이리라. 

 

대범大凡(무릇) 사람이 명종命終(목숨을 마침)에 임臨할 시절時節에 만약 한 터럭만큼이라도 범凡과(범부와) 성聖(성인)의 정량情量(헤아림)을 다하지 못하거나 사려思慮를(생각을) 잊지 못하면, 나귀의 배와 말의 뱃속을 향向하여 몸을 의탁依託하며 니리泥犁와(지옥과) 확탕鑊湯(끓는 가마솥) 가운데에 볶고 달여지다가 이전처럼 다시 개미와 모기나 등에가 됨에 이르리라. 

 

 

◉ 백운白雲이 운云(이르시되), 「설사設使 일호모一毫毛나(한 터럭만큼이라도) 범성凡聖(범부와 성인)의 정념情念(생각)이 정진淨盡(깨끗이 다함)이라도 역미면입려마태중亦未免入驢馬胎中(또한 나귀나 말의 뱃속에 들어감을 면하지 못함)이라.」 하시니라. 

 

 

 

○ 凡人이 臨命終時에 但觀五蘊皆空하고 四大無我이니 眞心無相이라 不去不來하나니 生時性亦不生이며 死時性亦不去하야 湛然圓寂하야 心境一如이니 但能如是直下頓了하면 不爲三世의 所拘繫하야 便是出世自由人也이니라. 若見諸佛이라도 無心隨去하며 若見地獄이라도 無心怖畏이어다. 但自無心하면 同於法界하리니 此가 即是要節也이라. 然則平常은 是因이요 臨終은 是果이니 道人은 須着眼看이어다. 

 

대범大凡(무릇) 사람이 명종命終(목숨을 마침)에 임臨할 시절時節에 오직 오온五蘊[色受想行識]이 다 공空하고 사대四大[地水火風]가 아我(나) 없음을 관觀할지니, 진심眞心은 상相이 없는지라 가지 아니하며 오지 아니하나니, 생시生時(난 때)에도 성性이 또한 나지 아니하며 사시死時(죽은 때)에도 성性이 또한 가지 아니하여 맑아 원적圓寂하여 마음과 경境이(경계가) 한가지이니, 오직 능能히 이와 같이 바로 다 요달了達하면 삼세三世에 걸려 얽매이지 아니하여 곧 이 출세出世한(세상을 벗어난) 자유인自由人이리라. 만약 제불諸佛(모든 부처님)을 보아도 쫓아갈 마음을 내지 말며 만약 지옥地獄을 보아도 두려운 마음을 내지 말지어다. 오직 자기가 무심無心하면 법계法界와 같으리니 이것이 곧 최요最要한(가장 요긴한) 정절程節이라. 그러면 평상平常은 이 인因(원인)이요 임종臨終은 이 과果(결과)이니 도인道人(도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눈을 떠서 볼지어다. 

 

 

◉ 차이절此二節(이 두 구절)은 특개종사特開宗師의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하시고(종사宗師의 무심無心하여 도道에 합合하는 문門을 특별히 열으시고) 권차교중權遮敎中에 염불구생로念佛求生路하시니라(교敎 가운데의 염불왕생하는 길 구하는 것을 방편으로 막으시니라). 연然이나(그러나) 근기부동根機不同하며(근기가 같지 아니하며) 지원역이志願亦異하니(뜻과 원력이 또한 다르니) 원제도인願諸道人(원컨대 도道 닦는 사람)은 평석平昔에(여느때처럼) 각수기편各隨其便하고(각기 그 방편을 따르고) 임행臨行에(수행修行함에 임臨하여) 물생의회勿生疑悔어다(의심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말지어다).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어다. 

백년광영전두공百年光影轉頭空이로다.』 [南明泉]

 

좋게 이때를 향하여 자기自己를 밝힐지어다.

백년의 빛과 그림자가(세월이) 머리를 돌이킴에 공空하여짐이로다.

 

 

 

○ 若能悟我本空하면 生死怖畏가 都息하리라. 

 

만약 능能히 아我(나)의 본공本空한(본래로 공空한) 것을 알면 생사生死의 두려움이 다 그치리라. 

 

 

◉ 차此(이)는 결상양문結上兩文하시니라(위 두 글을 맺으시니라). <반야般若>에 유미식경사상有迷識境四相하시고(식경識境을 미迷한 사상四相[我·人·衆生·壽命]이 있으시고) <원각圓覺>에 유미지경사상有迷智境四相하시니(지경智境을 미迷한 사상四相이 있으시니) 추세麤細가(거칠고 미세함이) 수수雖殊이나(비록 다르나) 생사生死는 일야一也이로다(하나로다). 진아眞我(참나)는 리상離相이라(상相을 여읨이라) 수수생사誰受生死이리오(누가 생사生死를 받으리오)? 

 

『춘산난첩청春山亂疊青이오 

추수양허벽秋水樣虛碧이로다. 

요요천지간寥寥天地間에 

독립망하극獨立望何極가.』 

 

봄 산은 어지럽게 겹쳐져 푸르러 있고, 

가을 물은 허공을 본떠 푸른 빛이다.

요요寥寥한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서서 어디까지 바라보는가?

 

 

- 시하면목是何面目고(이 무슨 면목面目인고)? 

동도방지同道方知이리라(도道가 같아야 바야흐로 알리라).

 

 * 春山疊亂青 春水樣虛碧 寥寥天地間 獨立望何極 

[雪竇重顯]

 

 

 

○ 祖師가 云 不坐禪하며 不持律호되 妙覺心珠가 白如日이로다. 當體虛玄하야 一物無하니 阿誰가 承受然燈佛이리오 하시니 故知釋迦八相이 聲聞曲見이며 凡夫劣解이로다. 龐居士의 所謂學無爲心空及第者가 便是此意이로다.

 

조사祖師가 이르시되, 「좌선坐禪 아니하며 지율持律(계율 가지지) 아니하되 묘각심주妙覺心珠(묘각妙覺의 심주心珠)가 깨끗함이 해와 같도다. 당체當軆가 비고 깊어 일물一物도 없으니 뉘(누가) 연등불然燈佛께 수기受記를 받으리오?」 하시니, 그러므로 석가釋迦의 팔상八相이 성문聲聞의 굽은 견해이며 범부凡夫의 못난 앎인 줄을 알 것이로다. 방거사龐居士의 이른바 「무위無爲를 배워 심공급제心空及第하라(마음 공空하여 과거에 합격하라)」 함이 곧 이 뜻이로다. 

 

 

◉ 『일종동반출日從東畔出이오 

계향오경제雞向五更啼이로다.』 [開福道寧]

 

해는 동쪽 끝에서 떠오름이요, 

닭은 오경五更이 되면 욺이로다. 

 

 

 

○ 禪學者는 要須識句라야 始得다.

 

선학자禪學者는 모름지기 구句를 알아야사 옳다. 

 

 

◉ 차일구자此一句字(이 ‘일구一句’라는 글자)는 통결일편대의通結一篇大義하시니라(한 편篇의 대의大義를 통틀어 맺으시니라). 차편此篇(이 편篇)이 시기어일물始起於一物하샤(처음에 ‘일물一物’로 일으키시어) 중설어만행中設於萬行하시고(중간에 ‘만행萬行’으로 시설示設[제시]하시고) 종결어일구終結於一句하시니(마지막에 ‘일구一句’로 맺으시니), 유유전猶儒典에 유삼의지류야有三義之類也이로다(유가儒家의 경전에 세 뜻의 분류가 있음과 같도다.)

 

『약시양마若是良馬인댄 

하대편영何待鞭影이리오.』

 

만약 이 좋은 말일진댄, 

어찌 채찍 그림자를 그다리리오?

 

 

- 선문禪門에 최초最初[最初句]와 말후末後[末後句]가 종차득명從此得名하도다(이를 좇아 이름을 얻도다).

 

 

 

○ 本分宗師의 全提此句가 如木人唱拍과 紅爐點雪이며 亦如石火電光이라 學者가 實不可擬議也이로다. 故로 古人이 知師恩曰 不重先師의 道德이어니와 只重先師가 不爲我說破라 하시니 此가 亦禪家格言이로다.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이 구句를 전제全提하심(온전히 들어보이심)이 목인木人(나무사람, 장승)의 박수 치며 노래 부름과 홍로紅爐(붉은 화로)의 눈 떨어짐이 같으며 또한 돌의 불(부싯돌)과 번개 빛이 같음이라. 학자學者가(배우는 사람이) 진실眞實로 어떻다고 의론議論하지(헤아리지) 못하리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스승의 은택恩澤(은혜)을 알고 이르시되, 「선사先師의 도덕道德은 중重히 여기지 아니하거니와 오직 선사先師가 나를 위爲하시어 설파說破하지 아니하심을 중重히 여기도다.」 하시니, 이 또한 선가禪家의 법격法格의 말씀이로다. 

 

 

◉ 『전천강월영箭穿江月影은 

수시사조인須是射鵰人이어다.』 [法石祖珍] 

 

화살이 강의 달 그림자를 꿰뚫음은, 

모름지기 이 독수리를 쏘는 사람이어다. 

 

 

 

○ 大抵學者는 先須詳辨宗途이어다. 昔에 馬祖一喝也에 百丈이 耳聾하시고 黃蘗이 吐舌하시니 這一喝이 便是拈花消息이시며 亦是達摩의 初來底面目이시니 吁이라 此가 臨濟宗之淵源也이시도다.

 

대저大抵(무릇) 학자學者는 먼저 모름지기 종도宗途를(종파의 갈래길을) 자세仔細히 가릴지어다. 옛날 마조馬祖가 일할一喝(한 번 할喝) 하심에 백장百丈이 귀 먹으시고 황벽黃蘗이 혀를 뱉으시니, 일할一喝(한 할喝)이 곧 이 염화拈花하신(꽃을 드신) 소식消息이시며 또한 이 달마達摩의 처음으로 오신 면목面目이시니, 이는 임제종臨濟宗의 연원淵源이시도다. 

 

 

◉ 『장자일지무절목杖子一枝無節目이어늘 

은근분부야행인殷勤分付夜行人하시도다.』

 

지팡이 한 가지가 마디가 없거늘,

은근히 밤 길 가는 사람에게 분부分付하시도다(건네주시도다). 

 

 

- 석昔(예전)에 마조馬祖의 일할一喝(한 할喝)에 백장百丈이 득대기得大機하시고(큰 기틀을 얻으시고) 황벽黃蘗이 득대용得大用하시니(큰 작용을 얻으시니) 사견전등록事見傳燈錄하니라(이 일은 [전등록]에 보이느니라). 대범大凡(무릇) 조사祖師의 종도宗途가(갈래길이) 유오有五하시니(다섯이 있으니), 왈曰(이르기를) 임제종臨濟宗과 왈曰 조동종曹洞宗과 왈曰 운문종雲門宗과 왈曰 위앙종潙仰宗과 왈曰 법안종法眼宗이라. 

 

 

【임제종臨濟宗】 

 

본사本師(근본 스승이신) 석가불釋迦佛(석가모니불)로부터 지삼십삼세至三十三世(삼십삼세) 육조혜능대사하직전六祖慧能大師下直傳하시니(육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곧게 전하시니), 왈曰(이르기를) 남악회양南嶽懷讓과 왈曰 마조도일馬祖道一과 왈曰 백장회해百丈懷海와 왈曰 황벽희운黃蘗希運과 왈曰 임삼의현臨滲義玄[임제의현臨濟義玄]과 왈曰 흥화존장興化存獎과 왈曰 남원도옹南院道顒과 왈曰 풍혈연소風穴延沼와 왈曰 수산성념首山省念과 왈曰 분양선소汾陽善昭와 왈曰 자명초원慈明楚圓과 왈曰 양기방회楊歧方會와 왈曰 백운수단白雲守端과 왈曰 오조법연五祖法演과 왈曰 원오극근圓悟克懃과 왈曰 경산종고선사徑山宗杲禪師 등等이니라. 

 

 

【조동종曹洞宗】

 

육조하방전六祖下傍傳이시니(육조六祖 아래에 곁갈래로 전하시니), 왈曰 청원행사靑原行思와 왈曰 석두희천石頭希遷과 왈曰 약산유엄藥山惟儼과 왈曰 운암담성雲巖曇晟과 왈曰 동산양개洞山良价와 왈曰 조산탐장曹山耽章과 왈曰 운거도응선사雲居道膺禪師 등等이니라.

 

 

【운문종雲門宗】

 

마조방전馬祖傍傳이시니(마조馬祖의 곁가래로 전하시니), 왈曰 천왕도오天王道悟와 왈曰 용담숭신龍潭崇信과 왈曰 덕산선감德山宣鑑과 왈曰 설봉의존雪峯義存과 왈曰 운문문언雲門文偃과 왈曰 설두중현雪竇重顯과 왈曰 천의의회선사天衣義懷禪師 등等이니라.

 

 

【위앙종潙仰宗】

 

백장방전百丈傍傳이시니(백장百丈의 곁갈래로 전하시니), 왈曰 위산영우潙山靈祐와 왈曰 앙산혜적仰山慧寂과 왈曰 향엄지한香嚴智閑과 왈曰 남탑광용南塔光涌과 왈曰 파초혜청芭蕉慧淸과 왈曰 곽산경통霍山景通과 왈曰 무착문희선사無着文喜禪師 등等이니라. 

 

 

【법안종法眼宗】

 

설봉방전雪峯傍傳이시니(설봉雪峯의 곁갈래로 전하시니), 왈曰 현사사비玄沙師備와 왈曰 지장계침地藏桂琛과 왈曰 법안문익法眼文益과 왈曰 천태덕소天台德韶와 왈曰 영명연수永明延壽와 왈曰 용제소수龍濟紹修와 왈曰 남대수안선사南臺守安禪師 등等이라. 

 

 

 

【임제가풍臨濟家風】

 

적수단도赤手單刀로 살불살조殺佛殺祖로다. 변고금어현요辨古今於玄要이요 험용사어주빈驗龍蛇於主賓이로다. 조금강보검操金剛寶劒하샤 소제죽본정령掃除竹本精靈하시고 분사자전위奮獅子全威하샤 진열호리심담震烈狐狸心膽이시도다. 요식임제종마要識臨濟宗麽아. 청천굉벽력靑天轟霹靂이요 평지기파도平地起波濤이로다. 

 

맨손에 한 칼 들고 부처도 죽이고 조사祖師도 죽임이로다. 예와 이제를 삼현三玄 삼요三要로써 판단하고, 용과 뱀을 빈주구賓主句로 알아낸다. 금강金剛의 보검寶劒으로 도깨비를 쓸어내고, 사자獅子의 위엄威嚴을 떨쳐 여우와 너구리의 넋을 찢네. 임제종臨濟宗을 알려는가? 푸른 하늘에 벼락치고 평지에 파도가 일어남이로다. 

 

 

【조동가풍曹洞家風】

 

권개오위權開五位하샤 선접삼근善接三根하시며 횡추보검橫抽寶劒하샤 참제견조림斬諸見稠林하시고 묘협홍통妙恊弘通하샤 절만기천착截萬機穿鑿이시도다. 위음나반威音那畔에 만목연광滿目烟光이요 공겁이전空劫已前에 일호풍월一壺風月이로다. 요견조동종마要見曹洞宗麽아. 불조미생공겁외佛祖未生空劫外에 정편불락유무기正偏不落有無機로다.

 

권도로 오위五位를 열어 세 가지 근기를 잘 다루며, 보검寶劒을 빼어들고 모든 사견邪見의 숲을 베어 내며, 널리 통하는 길 묘하게도 맞추어서 모든 기틀의 천착穿鑿을 끊음이로다. 위음왕불威音王佛 나시기 전 눈에 가득한 풍경이요, 공겁이전空劫已前 별 세계 경치로다. 조동종曹洞宗을 알려는가? 부처님과 조사도 안 나시고 아무 것도 없던 그 전, 정편正偏이 유무有無 기틀에 떨어지지 않음이로다.」 

 

 

【운문가풍雲門家風】

 

검봉유로釰鋒有路요 철벽무문鐵壁無門이로다. 흔번노포갈등掀飜露布葛藤하시며 전각상정견해剪却常情見解이시도다. 신전迅電에 불급사량不及思量이어니 열염烈熖에 영용주박寧容湊泊이리오. 요식운문종마要識雲門宗麽아 주장자柱杖子가 발도상천[足+孛]跳上天이어늘 잔자리盞子裏에 제불설법諸佛說法이시도다. 

 

칼날에는 길이 있고 철벽에는 문이 없다. 온 천하의 갈등葛藤을 둘러엎고, 못된 소견을 잘라내 버리니, 번쩍하는 번갯불은 사량思量으로 미칠 수 없거니, 활활 타는 불꽃 속에 어찌 머무를 수 있으리요. 운문종雲門宗을 알려는가? 「주장자柱杖子가 날아 하늘 높이 오르고, 잔 속에서 모든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도다.」 

 

 

【위앙가풍潙仰家風】

 

사자창화師資唱和하시며 부자일가父子一家이시도다. 협하서자脇下書字에 두각쟁영頭角崢嶸이요 실중험인室中驗人에 사자요절獅子腰折이로다.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를 일추분쇄一搥扮碎하시고 유양구무일설有兩口無一舌 구곡주통九曲珠通이시도다. 요식위앙종마要識潙仰宗麽아. 단비횡고로斷碑橫古路이어늘 철우면소실鐵牛眠少室이로다. 

 

스승과 제자가 부르면 화답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집에 살고 있네. 옆구리에 글자 쓰고 머리 위에 뿔이 뾰족하구나. 방 안에서 사람들을 시험하니 사자 허리 부러지도다.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를 한 망치로 부수었네. 입은 둘이 있으나 혀는 하나도 없는 것이 구곡주九曲珠를 꿰뚫었다. 위앙종潙仰宗을 알려는가? 「부러진 비석 옛 길에 쓰러져 있고 무쇠 소는 작은 집에 잠을 자네.」 

 

 

 

【법안가풍法眼家風】

 

언중유향言中有響이요 구리장봉句裏藏鋒이시도다. 촉루髑髏가 상간세계常干世界요 비공鼻孔이 마촉가풍磨觸家風이로다. 풍가월저風柯月渚가 현로진심顯露眞心이요 취죽황화翠竹黃花가 선명묘법宣明妙法이로다. 요식법안종마要識法眼宗麽아. 풍송단운귀령거風送斷雲歸嶺去이어늘 월화유수과교래月和流水過橋來이로다. 

 

말 가운데 메아리가 있고 글 속에 칼날이 숨었구나. 해골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콧구멍은 어느 때나 그 가풍家風을 불어내네. 바람 부는 나뭇가지와 달 비치는 물가에는 참마음이 드러나고, 푸른 대와 누른 꽃은 묘한 법을 환히 밝혀 주네. 법안종法眼宗을 알려는가? 「맑은 바람 구름을 산마루로 보내 주고, 밝은 달 물에 떠서 다리 지나 흘러오네.」 

 

 

 

【別明臨濟宗旨, 따로 임제종지臨濟宗旨를 밝힘】

 

대범大凡 일구중一句中에 구삼현具三玄하고 일현중一玄中에 구삼요具三要하니 일구一句는 무문채인無文綵印이요 삼현삼요三玄三要는 유문채인有文綵印이며 권실權實은 현玄이요 조용照用은 요要이라. 

 

일구一句 가운데 삼현三玄이 갖추어 있고, 일현一玄 가운데 삼요三要가 갖추어 있는데, 일구一句는 글발이 없는 인印이고, 삼현三玄과 삼요三要는 글발이 있는 인印이다. 권도와 실상은 현玄이며, 비침과 씀은 요要가 된다. 

 

 

【삼구三句】

 

第一句는 상신실명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이라.

 

‘첫째 구句’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句’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셋째 구句’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삼요三要】

 

일요一要는 조즉대기照即大機요 이요二要는 조즉대용照即大用이요 삼요三要는 조용동시照用同時라.

 

‘첫째 요要’는 비침이 곧 큰 기틀이요, ‘둘째 요要’는 비침이 곧 큰 씀이며, ‘셋째 요要’는 비침과 씀이 동시이다. 

 

 

【삼현三玄】

 

체중현體中玄은 삼세일념三世一念 등等이요 구중현句中玄는 경절언구徑截言句 등等이요 현중현玄中玄은 양구방할良久棒喝 등等이라.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三世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良久와 방망이[棒]와 할喝 같은 것들이다. 

 

 

【사료간四料揀】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은 대하근待下根이요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은 대중근待中根이요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은 대상근待上根이요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은 대출격인待出格人이라.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奪人不奪境]’은 하등근기下等根機들을 다루는 법이고,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奪境不奪人]’은 중등근기中等根機들을 다루는 법이며,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人境兩俱奪]’은 상등근기上等根機를 다루는 법이고,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않는 것[人境俱不奪]’은 격格 밖의 사람을 다루는 법이다. 

 

 

【사빈주四賓主】

 

빈중빈賓中賓은 학인무비공學人無鼻孔이니 유문유답有問有答이요 빈중주賓中主는 학인유비공學人有鼻孔이니 유주법有主法이요 주중빈主中賓은 사가무비공師家無鼻孔이니 유문재有問在이요 주중주主中主는 사가유비공師家有鼻孔이니 불방기특不妨奇特이라.

 

‘손 가운데 손[賓中賓]’은 배우는 이가 콧구멍이 없는 것이니 물음이 있고 대답이 있는 것이고, ‘손 가운데 주인[賓中主]’은 배우는 이가 콧구멍이 있는 것이니 주인도 있고 법도 있는 것이며, ‘주인 가운데 손[主中賓]’은 스승의 콧구멍이 없는 것이니 묻는 것만 있고, ‘주인 가운데 주인[主中主]’은 스승의 콧구멍이 있는 것이니 기특한 것도 해롭지 않다. 

 

 

【사조용四照用】

 

선조후용先照後用은 유인재有人在이요 선용후조先用後照는 유법재有法在이요 조용동시照用同時는 구경탈식驅耕奪食이요 조용부동시照用不同時는 유문유답有問有答이라. 

 

‘먼저 비추고 뒤에 씀[先照後用]’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먼저 쓰고 뒤에 비춤[先用後照]’은 법이 있는 것이며, ‘비춤과 씀이 동시로 되는 것[照用同時]’은 밭을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이고, ‘비춤과 씀이 동시가 아닌 것[照用不同時]’은 물음이 있고 대답이 있는 것이다. 

 

 

【사대식四大式】

 

정리正利는 소림면벽少林面壁 류類이요 평상平常은 화산타고禾山打鼓 류類이요 본분本分은 산승불회山僧不會 류類이요 공가貢假는 달마불식達摩不識 류類이라.

 

‘정리正利’는 소림굴에서 면벽하고 있는 따위고, ‘평상平常’은 ‘화산禾山의 북을 친다’는 따위며, ‘본분本分’은 「산승은 모르노라」 한 따위고, ‘거짓을 꾸민다는 것’은 달마達摩대사가 「아지 못하노라」 한 따위들이다. 

 

 

【사할四喝】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劒은 일도一刀에 휘단일체정해揮斷一切情解요 거지사자踞地獅子는 발언토기發言吐氣에 중마뇌열衆魔腦裂이요 탐간영초探竿影草는 탐기유무사승비공探其有無師承鼻孔이요 일할부작일할용一喝不作一喝用은 구상삼현사빈주具上三玄四賓主 등等이라. 

 

‘금강왕 보배 칼[金剛王寶劒]의 할喝’은 한 칼에 온갖 생각과 알음알이를 끊어버리는 것이고, ‘땅에 버티고 앉은 사자[踞地獅子]의 할喝’은 말을 하거나 입김만 내쏘아도 모든 마군의 머리가 터지는 것이며, ‘탐지하는 댓가지와 그림자 보이는 풀 묶음[探竿影草]의 할喝’이란 것은 그 상대자의 콧구멍이 있는가 없는가를 탐지하는 것이며, 또 ‘한 가지 할이 한 할로만 쓰이지 않음[一喝不作一喝用]’은 위에 말한 삼현三玄과 사빈주四賓主 같은 것들을 다 갖추어 있는 것이다. 

 

 

【팔방八棒】

 

촉령반현觸令返玄과 안소종정按掃從正과 고현상정靠玄傷正과 고책苦責은 벌방罰棒이요 순종지順宗旨는 상방賞棒이요 유허실有虛實은 변방辨棒이요 맹가盲枷는 할방瞎棒이요 소제범성掃除凡聖은 정방正棒이라. 

 

‘영令을 내려서 이치에 돌아가게 하는 것’과 ‘닥치는 대로 쓸어버려서 바르게 하는 것’과 ‘이치도 내버리고 바른 것까지도 쳐버리는 것’과 ‘몹시 책망하는 것’들은 벌罰을 주는 방망이고, ‘종지에 맞는 것’은 상賞을 주는 방망이며, ‘허虛와 실實이 있는 것’은 가리어 보는 방망이고, ‘함부로 쓰는 것’은 눈먼 방망이며, ‘범부와 성인을 함께 쓸어버리는 것’은 바른 방망이다. 

 

 

- 此等法은 非特臨濟宗風이라. 上自諸佛下至衆生皆分上事이니 若離此說法이면 皆是妄語이니라. 

 

이와 같은 법들은 하필 임제종臨濟宗의 가풍家風만이 될 뿐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다 제대로 갖추어 있는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것을 여의고 설법한다는 것은 모두 망녕된 말이다. 

 

 

 

○ 臨濟喝과 德山棒이 皆徹證無生하샤 透頂透底하샤 大機大用이 自在無方하샤 全身出沒하시며 全身擔荷하시되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하시니라. 然이나 據實而論컨댄 此二師도 亦不免偸心鬼子이시도다.

 

임제臨濟의 할喝과 덕산德山의 방棒이 다 무생無生을 철저히 증득證得하시어 위를 사무치시며 아래를 사무치시어 대기大機와(큰 기틀과) 대용大用(큰 작용)이 자재自在하여 방소方所가 없으시어 온 몸이 출몰出沒하고 온 몸이 짊어지시되 물러나시어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의 대인경계大人境界를 지키시니라. 그러나 실實을 들어 의론議論컨댄(실상대로 말한다면) 이 이사二師도(두 선사께서도, 임제와 덕산) 또한 도적盜賊질하는 귀신을 면免치 못하시도다. 

 

 

◉ 대기大機는 원응圓應으로 의義 삼고 대용大用은 직절直截로 의義 삼으니라.

 

『번뇌해중위우로煩惱海中爲雨露요 

무명산상작운뢰無明山上作雲雷이시도다.』 [同安常察]

 

번뇌煩惱의 바다 가운데는 비와 이슬이 되고, 

무명無明의 산 위에는 구름과 우레 되도다.

 

 

 

○ 大丈夫는 見佛見祖를 如冤家이어다. 若着佛求하면 被佛縛하고 若着祖求하면 被祖縛하리라. 有求皆苦이라 不如無事이로다.

 

대장부大丈夫는 부처 뵈오며 조사祖師 뵈옴을 원수寃讎와 같이 할지어다. 만약 불佛(부처)에 착着(집착)하여 구求하면 불佛(부처)에 얽매임을 입고 만약 조祖(조사)에 착着(집착)하여 구求하면 조祖(조사)에 얽매임을 입으리라. 구求함을 둠이 다 고苦라(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괴로움이라), 무사無事(일 없음)만 같지 못하도다.

 

 

◉ 차此(이)는 원결편수遠結篇首에(멀리 책 첫머리를 맺음에) 「불조출세무풍기랑佛祖出世無風起浪(불조佛祖가 세상에 나오심이 바람 없는데 물결 일으킴이라」하시니, 가위전후조응可謂前後照應이며(가히 진실로 전후前後가 비추어 응應함이며) 수미일관首尾一貫(머리와 꼬리가 하나로 관통함)이로다. ‘유구개고有求皆苦’는(‘구함이 있으면 다 괴로움이라’ 함은) 결상당체변시結上當軆便是하시고(윗 글의 ‘당체當軆가 바로 이것이라’함을  맺으시고), ‘불여무사不如無事’는(‘일 없음만 같지 못하다’함은) 결상동념즉괴結上動念即乖하시니라(윗 글의 ‘념念 움직인즉 곧 어그러짐이라’함을 맺으시니라).

 

 

- 범불조출세凡佛祖出世가(무릇 불조佛祖가 세상에 출현하심이) 난세지영웅亂世之英雄이시며(어지러운 세상의 영웅이시며) 대평지간적大平之奸賊이시므로(태평시절의 간악한 도둑이시므로) ‘단하丹霞[丹霞天然禪師]가 소목불燒木佛하며(나무 부처를 불사르며)’ ‘노모老母(노파)가 불원견불不願見佛하며(부처 뵈옵기를 원치 아니하며)’ ‘운문雲門이 타끽구자打喫狗子호미(“쳐서 개에게 먹이겠다”함이)’ 개시최사현정저수단皆是摧邪顯正底手段(모두가 이 삿됨을 꺾어버리고 바름을 드러내는 수단)이로다. 필경畢竟에 유하기특有何奇特고(무슨 기특함이 있는고)?

 

『동령운생서령백東嶺雲生西嶺白이요 

전산화발후산홍前山花發後山紅이로다.』

 

동쪽 멧부리에 구름이 생겨나니 서쪽 멧부리가 햐얗고, 

앞 산에 꽃이 피니 뒷 산이 벌겋도다.

 

 

 

○ 先德이 云 神光不昧하야 萬古徽猷하니 入此門來인댄 莫存知解이어다.

 

선덕先德이 이르시되, 「신광神光이 매각昧却치(어둡지) 아니하야 만고萬古에 빛나니, 이 문門에 들어오는 이는 지해知解(알음알이)를 두지 말지어다.

 

 

◉ 상편上篇엔 이환지일자以幻之一字로(‘환幻’이라는 한 글자로) 종결終結하시고(끝을 맺으시고) 도차到此하얀(여기에 이르러선) 이지해이자以知解二字로(‘지해知解’라는 두 글자로) 종결終結하시니(끝을 맺으시니), 일권갈등一卷葛藤(한 권의 칡넌출)을 일구一句(한 글귀)에 도파都破하시도다(모두 깨뜨려버리시도다). ‘신광불매神光不昧’는(신광神光이 어둡지 아니함은) 결상소소영령結上昭昭靈靈하시고(위의 ‘소소영령昭昭靈靈’함을 맺으시고), ‘만고휘유萬古徽猷는(만고에 빛남은)’ 결상부증생멸結上不曾生滅하시고(위의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 일찍이 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함’을 맺으시며), ‘막존지해莫存知解(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결상불가수명생해結上不可守名生解하시도다(위의 ‘불가수명이생해不可守名而生解, 이름 지켜서 앎을 냄이 옳지 못하다’를 맺으시도다). 

 

문자門者는(‘문門’이라 함은) 유범성有凡聖의 출입의出入義하니(범부와 성인의 출입出入하는 뜻이 있으니), 여하택如荷澤의 소위지지일자所謂知之一字가 중묘지문衆妙之門이로다(하택荷澤의 이른바 「‘지知’라는 한 글자가 온갖 묘妙의 문門이라」 함과 같도다. 지해자知解者는(‘지해知解’라 함은) 식해識解(알음알이)이니 고운古云(옛 사람이 이르시되), 「금설金屑이(금가루가) 수귀雖貴이나(비록 귀하나) 낙안성예落眼成翳라(눈에 떨어지면 가리움을 이룸이라).」 하시며 우운又云(또 이르시되), 「불이지不以智로 지知이며(지智로 알지 못함이며) 불이식不以識으로 식識이라(식識으로 알지 못함이라).」 하시니라. 

 

 

 

『여사거창명종지如斯擧唱明宗旨인댄 

소쇄서래벽안승笑殺西來碧眼僧이로다.』

 

 

이와같이 종지宗旨를 들어 밝힐진댄,

서쪽에서 오신 눈 푸른 달마승達摩僧을 크게 웃김이로다.

 

 

 

 

下篇 終

 

 

 

 

 

 

禪家龜鑑 終

 

 

 

 

 

 

 

 

 

 

 

 

 

 

 

 

 

 

 

 

 

 

 

 

 

 

 

 

 

 

 

 

 

 

 

 

 

 

 

                 

 

 

 

 

 

 

 

 

 

 

 

 

 

 

 

 

 

 

 

 

 

 

    

                         고려 보조국사      

                         高麗 普照國師 

       진심직설 眞心直說

 

 

 

 

 

 

 

【진심정신眞心正信】

 

 

華嚴에 云信爲道源功德母이라 長養一切諸善根이라 하시며 又唯識에 云信如水淸珠라 能淸濁水故라 하시니 是知萬善發生이 信爲前導로다 故로 佛經首에 立如是我聞은 生信之所謂也이니라 或曰祖門之信이 與敎門信으로 有何異耶오 曰多種不同하니 敎門에는 令人天으로 信於因果호대 有愛福樂者면 信十善으로 爲妙因하고 人天으로 爲樂果하며 有樂空寂者면 信生滅因緣으로 爲正因하고 苦集滅道로 爲聖果하며 有樂佛果者면 信三劫六度로 爲大因하고 成正覺(菩提涅槃)으로 爲正果어니와 祖門正信은 非同前也이니라 不信一切有爲因果하고 只要信自己本來是佛이니 天眞自性이 人人具足하고 涅槃妙體가 箇箇圓成하야 不假他求라 從來自備이니라.

 

<화엄경華嚴經>에 말씀하시되, 「신信은 도道에 근원根源이요 공덕功德에 어머니라 일체 모든 선근善根을 기룬다.」 하며, 또 [유식론唯識論]에 말씀하시되, 「신信은 물 맑히는 구슬과 같다.」 하시니 그런 고故로 일만一萬 선善을 발생發生함은 신信이 앞을 인도引導함을 알지로다. 불경佛經 첫 꼭대기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을 세우는 것은 신信을 생生케 함이니라. 혹或이 가로되, “조사祖師의 문門에 신信이 교문敎門의 신信으로 더불어 무엇이 다르나뇨?” 답왈, “여러 가지가 다르니라. 교문敎門에는 인천人天으로 하여금 인과因果를 믿게 호되 복락福樂을 사랑하는 자는 십선十善을 믿음으로 묘妙한 인因을 삼고 인간 천상에 나는 걸로 즐거운 결과를 삼으며, 공적空寂을 즐기는 자는 생멸인연生滅因緣을 믿음으로 정인正因을 삼고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성과聖果를 삼으며, 불과佛果를 즐기는 자는 삼무수겁三無數劫에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음으로 큰 인因을 삼고 성정각成正覺[菩提涅槃]으로 정과正果를 삼거니와, 조사문중祖師門中에 정신正信은 교문敎門에 신信하는 것과 같지 아니하나니라. 일체 유위인과有爲因果를 믿지 아니하고 다못 자기 심성心性이 본래本來 이 불佛임을 믿을지니 천진자성天眞自性이 사람 사람이 구족具足하고 열반묘체涅槃妙體가 개개원성箇箇圓成하야 타인他人에게 구함을 가차假借치 아니한지라 종래從來 스스로 갖추었나니라. 

 

 

三祖云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언만 良由取舍하야 所以不如라 하시며 志公이 云有相身中에 無相身이오 無明路上에 無生路라 하시며 永嘉云無明實性이 即佛性이오 幻化空身이 即法身이라 하시니 故知衆生이 本來是佛이로다. 旣生正信이라도 須要解滋이니 永明云信而不解면 增長無明하고 解而不信이면 增長邪見이라 하시니 故知信解相兼하야사 得入道疾이니라.

 

삼조三祖 이르시되, 「두렷이 태허공太虛空과 같아서 모지람도 없고 남음도 없건마는 진실로 취사取捨를 말미암아 소이所以로 같지 아니하다.」 하며, 지공志公이 이르시되, 「상相 있는 몸 가운데에 상相 없는 몸이요 무명노상無明路上에 생사生死 없는 길이라.」 하시며, 영가永嘉 이르시되, 「무명無明 실實다운 성품性品이 곧 불성佛性이요 환화幻化 헛된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 하시니, 그런 고故로 알라. 중생衆生이 본래本來 이 불佛이로다. 이미 정신正信을 내더라도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영명永明이 이르시되, 「나의 성리性理를 알지 못하고 믿기만 하면 무명無明을 증장增長하고, 알고 믿지 아니하면 사견邪見을 증장增長함이라.」 하시니, 그런 고로 믿음과 아는 것이 서로 겸兼하야사 도道에 들어감이 빠르니라. 

 

 

或曰初發信心하야 未能入道라도 有利益否아 曰起信論에 云若人이 聞是法已하고 不生怯弱하면 當知是人은 定紹佛種이라 必爲諸佛之所授記하리니 假使有人이 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하야 令行十善이라도 不如有人이 於一念頃에 正思惟此法이니 過前功德하야 不可爲喩라 하시며 又般若經에 云乃至一念生淨信者는 如來가 悉知悉見하나니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라 하시니 是知欲行千里인대는 初步를 要正이로다 初步를 若錯이면 千里俱錯인달하야 入無爲國인댄 初信步를 要正이니 初信을 旣失하면 萬善이 俱退라리라 故로 祖師云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이라 하시니 是此理也이라.

 

혹或이 가로되, “처음으로 신심信心을 발發하야 능히 도道에 들지 못하더라도 이익이 있나니까?” 답왈 “[기신론起信論]에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이 법을 듣기를 마치고 겁내지 아니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정定히 불성종자佛性種子를 이룰지라 반드시 제불諸佛의 수기授記한 바 되리니, 가사假使 어떠한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중생衆生을 화化하야 하여금 십선十善을 행行케 하더라도 어떠한 사람이 한 생각 사이에 정正히 이 법을 생각[正思惟]함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功德에 지나서[過] 가히 비유치 못하리라.」 하시고, 또 <반야경般若經>에 이르시되, 「내지 일념一念이라도 깨끗한 신信을 내는 자는 여래如來가 다 알며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무량복덕無量福德을 얻으리라.」 하시니, 이 알거라. 천리千里를 행行코자 할진대 첫걸음을 바로 할지로다. 초보初步를 만일 어기면 천리千里가 한가지 어긴 것이라 무위국無爲國에 들고저 할진댄 처음 신심信心을 바로 할지니 초신初信을 이미 잃으면 만선萬善이 한가지로 물러가리라. 그런 고로 조사祖師 이르시되, 「호리毫釐라도 어김이 있으면 천지현격天地懸隔하리라.」 하시니 이 이치 이니라.” 

 

 

 

 

【진심이명眞心異名】

 

 

或曰已生正信이어니와 未知커라 何名眞心고 曰離妄名眞이오 靈鑑曰心이니 楞嚴經中이 發明此心하니라 或曰但名眞心耶아 別有異號耶아 曰佛敎祖敎가 立名不同하니 且佛敎者는 菩薩戒에 呼爲心地이니 發生萬善故요 般若經에 喚作菩提이니 與佛爲體故요 華嚴經에 立爲法界이니 交徹融攝故요 金剛經에 號爲如來이니 無所從來故요 般若經에 呼爲涅槃이니 衆聖所歸故요 金光明經에 號曰如如니 眞常不變故요 淨名經에 號曰法身이니 報化依止故요 起信論에 名曰眞如이니 不生不滅故요 涅槃經에 呼爲佛性이니 三身本體故요 圓覺中에 名曰總持이니 流出功德故요 勝鬘經에 號曰如來藏이니 隱覆含攝故요 了義經에 名爲圓覺이니 破暗獨照故이니라. 由是로 壽禪師唯心訣에 云一法千名이라 應緣立號라 하시니 備在衆經이라 不能具引하노라 

 

혹或이 가로되, “이미 정신正信(바로 믿는 것)을 내었거니와 알지 못해라. 어떤 이름이 진심眞心이닛고?” 답왈, “망령된 걸 떠난 것이 참된 것이요 신령되이 감각鑑覺하는 것을 마음이라 하나니, <능엄경楞嚴經>에 이 마음을 발명發明하셨나니라.” 혹或이 가로되, “다못 이름을 진심眞心이라 하는가 별別로 다른 명호名號가 있는가?” 답왈, “불교佛敎 조교祖敎가 이름 세움이 다르니 또한 불교佛敎는 보살계菩薩戒에 ‘심지心地’라고 부르나니 만선萬善을 발생發生하는 고故요, <반야경般若經>에 ‘보리菩提’라고 불러 짓나니 불佛로 체體가 된 연고緣故요, <화엄경華嚴經>에 ‘법계法界’라고 세우는 것은 서로 사귀어 융통融通이 섭攝하는 고故요, <금강경金剛經>에 ‘여래如來’라고 하시니 좇아 오는 바가 없는 연고요, <반야경般若經>에 ‘열반涅槃’이라 하나니 여러 성현聖賢이 돌아가 의지하는 바요, <금광명경金光明經>에 ‘여여如如’라 하나니 참 떳떳하야 변치 아니하는 연고요, <정명경淨名經>에 ‘법신法身’이라 하나니 보신불報身佛과 화신化身이 의지한 연고요, [기신론起信論]에 ‘진여眞如’라고 하나니 나지도 아니하고 멸滅치도 아니한 연고요, <열반경涅槃經>에 ‘불성佛性’이라 하나니 삼신三身의 본체本體인 연고요, <원각圓覺>에 ‘총지總持’라 하나니 공덕功德을 출생出生하는 연고요, <승만경勝鬘經>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나니 번뇌煩惱가 여래如來를 능히 숨겨 덮는 연고요 또 여래如來가 능히 자체自體 내內에 만법萬法을 머금어 섭攝하는 연고요, 또 <요의경了義經>에 ‘원각圓覺’이라 하나니 어두운 것을 파破하고 홀로 비추는 연고이니라. 일로써 말미암아 연수선사延壽禪師의 [유심결唯心訣]에 이르시되, 「한 법 이름이 천 가지라 인연因緣을 응應하야 호號를 세움이라.」 하시니 갖추어 여러 경經에 있는지라 능히 갖추어 인증引證할 수 없나니라. 

 

 

或曰佛敎는 已知어니 祖敎는 何如오 曰祖師門下에 杜絶名言하야 一名도 不立이어니 何更多名이리오만 應感隨機에 其名이니 亦衆하니라 有時에 呼爲自己이니 衆生本性故오 有時에 名爲正眼이니 鑑諸有相故오 有時에 號曰妙心이니 虛靈寂照故요 有時에 名曰主人翁이니 從來荷負故오 有時에 呼爲無底鉢이니 隨處生涯故요 有時에 喚作沒絃琴이니 韻出今時故오 有時에 號曰無盡燈이니 照破迷情故요 有時에 名曰無根樹이니 根蒂堅牢故오 有時에 呼爲吹毛劍이니 截斷塵根故오 有時에 喚作無爲國이니 海晏河淸故오 有時에 號曰牟尼珠이니 濟益貧窮故오 有時에 名曰無鑐鎖니 關閉六情故오 乃至名泥牛木馬心源心印心鏡心月心珠種種異名을 不可具錄이로다 若達眞心하면 諸名을 盡曉어니와 昧此眞心하면 諸名을 皆滯하리니 故로 於眞心에 切宜子細하노라.

 

혹或이 가로되, “불교佛敎는 이미 알았거니와 조사祖師의 교敎는 어떠하나뇨?” 답왈, “조사祖師의 문하門下는 이름과 말을 두절杜絶(막아 끊는다는 말)하야 일명一名도 세우지 아니하였거니 어찌 이름하리오마는, 감感을 응應하고 기틀[機]을 좇아 그 이름이 또한 많으니라. 유시有時에는 ‘정안正眼’이라 하나니 모든 상相 있는 것을 감각鑑覺하는 연고요, 유시有時에는 ‘묘심妙心’이라 하나니 허령적조虛靈寂照고요, 유시有時에는 ‘주인옹主人翁’이라 하나니 종래從來로 어깨에 메인 연고요, 유시有時에 ‘무저발無底鉢’이라 하나니 곳을 따라 생애生涯하는 연고요, 유시有時에는 ‘줄 없는 거문고[沒絃琴]’라 하나니 금시今時를 운韻 내는 연고요, 유시有時에 ‘무진등無盡燈’이라 하나니 미정迷情을 비추어 파破하는 연고요, 유시有時에 ‘무근수無根樹’라 하나니 뿌리와 꼭지가 견고한 연고요, 유시有時에 ‘취모리검吹毛利劍’이라 하나니 근진根塵(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을 절단截斷하는 연고요, 유시有時에 ‘무위국無爲國’이라 하나니 해안하청海晏河淸(바다도 잔잔하고 강도 맑은)고요, 유시有時에 ‘마니주摩尼珠’라 하나니 빈궁貧窮을 건지는 연고요, 유시有時에 ‘무수쇄無鑐鎖’라 하나니 육정六情을 관폐關閉하는 연고요, 내지 이름이 ‘니우泥牛’며 ‘목마木馬’며 ‘심원心源’이며 ‘심인心印’이며 ‘심경心鏡’이며 ‘심월心月’이며 ‘심주心珠’며 가지가지 다른 이름을 가히 갖추어 기록지 못하리로다. 만일 참 마음을 통달通達하면 모든 이름을 다 알려니와 이 진심眞心을 매昧하면 모든 이름을 다 알지 못하리라. 고로 저 진심眞心에 간절히 자세히 하노라.” 

 

 

 

【진심묘체眞心妙體】

 

 

或曰眞心은 已知名字어니와 其體如何耶오 曰放光般若經에 云 般若는 無所有相이라 無生滅相이라 하시고 起信論에 云眞如自體者는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이 無有增減하야 非前際生이며 非後際滅이니 畢竟常恒하야 從本已來로 性自滿足一切功德이라 하시니 據此經論컨댄 眞心本體가 超出因果하며 通貫古今이로다 不立凡聖하야 無諸對待홈이 如太虛空이 遍一切處달하야 妙體凝寂하야 絶諸戱論이로다 不生不滅하며 非有非無하며 不動不搖하야 湛然常住하나니 喚作舊日主人翁이라 하며 名曰威音那畔人이며 又名空劫前自己라 하나니 一種平懷하면 無纖毫瑕翳하나니 一切山河와 大地草木과 叢林萬象森羅와 染淨諸法이 皆從中出하나니라 故로 圓覺經에 云善男子야 無上法王이 有大陀羅尼門하니 名爲圓覺이라 流出一切淸淨眞如와 菩提涅槃과 及波羅蜜하야 敎授菩薩이라 하시고.

 

혹或이 가도되, “진심眞心의 명자名字는 이미 알거니와 그 체體가 어떠하뇨?” 답왈,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이르시되, 「지혜智慧는 형상이 없는지라 생멸生滅이 없다.」 하시고, [기신론起信論]에 이르시되, 「진여眞如 자체自體는 일체 범부凡夫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제불諸佛이 증감增減이 있음이 없어 전제前際에 생生하는 것도 아니며 후제後際에 멸滅하는 것도 아니니 필경畢竟에 항상하야 본래本來로 좇아 써 옴으로 성품性品이 스스로 일체공덕一切功德이 만족滿足함이라.」 하시니, 이 경론經論을 의거依據할진댄 진심본체眞心本體가 인과因果에 초출超出하며 고금古今을 통관通貫함이로다. 범성凡聖을 세우지 아니하야 모든 대대對待가 없음이 태허공太虛空이 일체 곳을 두루하는 것 같다. 묘체妙體가 고요하야 모든 희론戱論이 끊어졌도다. 나는 것도 아니며 멸한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요동搖動치 아니하야 깨끗하게 항상 있나니 ‘구일주인옹舊日主人翁’이라 하며 또한 ‘위음나반인威音那畔人’이라 하며 또 이름이 ‘공겁전자기空劫前自己’라 하나니, 한가지 평평平平이 생각하면 섬호纖毫라도 하자瑕疵 있어 가림이 없나니, 일체산하一切山河와 초목총림草木叢林과 만상삼라萬象森羅와 염정제법染淨諸法이 다 가운데로 좇아 나나니라. 고故로 <원각경圓覺經>에 이르되, 「선남자善男子야 무상법왕無上法王이 대다라니문大陀羅尼門이 있으니 이름이 ‘원각圓覺’이라 일체一切 청정진여淸淨眞如와 보리菩提와 열반涅槃과 및 바라밀波羅蜜을 유출流出하야 보살菩薩을 교수敎授함이라.」 하시고, 

 

 

圭峰이 云心也者는 沖虛妙粹하고 炳煥靈明이로다 無去無來라 冥通三際하고 非中非外라 洞徹十方이로다 不滅不生이라 豈四山之可害며 離性離相이라 奚五色之能盲이리오하며 故로 永明唯心訣에 云夫此心者는 衆妙群靈이 而普會라 爲萬法之王오 三乘五性而冥歸라 作千聖之母로다 獨尊獨貴하며 無比無儔하나니 實大道之源이며 是眞法之要로다 信之則三世菩薩이 同學蓋學此心也오 三世諸佛이 同證蓋證此心也오 一大藏敎가 詮顯蓋顯此心也오 一切衆生의 迷妄이 蓋迷此心也오 一切行人의 發悟가 蓋悟此心也오 一切諸祖의 相傳이 蓋傳此心也오 天下衲僧의 參訪이 蓋參此心也로다 達此心則頭頭皆是며 物物全彰이오 迷此心則處處顚倒요 念念痴狂이로다 此體는 是一切衆生의 本有之佛性이며 乃一切世界의 生發之根源이로다 故로 世尊이 鷲峰에 良久하시고 善現이 巖下에 忘言이삽다 達磨少室에 壁觀하시고 居士毘耶에 杜口하시니 悉皆發明此心妙體시니라 故로 初入祖門庭者는 要先識此心體也이니라.

 

규봉圭峰이 이르시되, 「마음이라는 것은 비고 묘하야 정밀하고 빛나고도 신령하야 밝도다. 무거무래無去無來라 그윽히 삼제三際에 통通하고 비중비외非中非外라 훤출히 시방에 사무쳤도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어찌 사산四山[사생四生, 生老病死]이 가히 해롭게 하며 성품[性]을 떠나고 상相도 떠난지라 어찌 오색五色이 능히 눈 멀리리오?」 하며, [영명유심결永明唯心訣]에 이르시되, 「대저 이 마음은 모든 묘한 것과 모든 신령한 것이 널리 모인지라 만법萬法에 왕王이 되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귀의歸依함이 된지라 천성千聖의 어머니를 짓는도다. 홀로 높고 홀로 귀하며 견줄 데 없고 짝 없나니 진실로 대도大道의 근원根源이며 이 진법眞法의 강요綱要로다.」하였다. 믿은즉 삼세보살三世菩薩이 한가지로 이 마음을 배우며, 삼세제불三世諸佛이 한가지로 이 마음을 증득證得하며, 일대장교一大藏敎가 이 마음을 나투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미망迷妄)이 이 마음을 미迷한 것이며, 일체수행인一切修行人이 이 마음을 깨친 것이며, 일체제조一切諸祖의 상전相傳이 이 마음을 전傳한 것이며, 천하납승天下衲僧이 이 마음을 참방參訪하는 것이로다. 이 마음을 통달通達한즉 두두頭頭가 다 이것이며 물물物物이 온전히 드러남이요 이 마음을 미迷한즉 처처處處에 전도顚倒하며 념념念念이 치광痴狂함이로다. 이 체體는 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본유불성本有佛性이며 일체세계一切世界를 발생發生하는 근원根源이로다. 고故로 세존世尊이 영축봉靈鷲峰에서 양구良久하시고 선현善現이[須菩提] 암하巖下에서 말을 잊으시도다. 달마達磨는 소실少室에서 벽壁을 관觀하시고 거사居士는 비야리毘耶離에서 입을 막으시니 다 이 마음 묘체妙體를 발명發明하심이니라. 그런 고로 처음에 조사문정祖師門庭에 들어오는 자는 종요宗要로이 먼저 이 마음의 체體를 알지니라.” 

 

 

 

【진심묘용眞心妙用】

 

 

或曰妙體는 已知어니와 何名妙用耶오 曰古人이 云風動心搖樹요 雲生性起塵이로다 若明今日事댄 昧卻本來人이라 하니 乃妙體起用也이니라 眞心妙體는 本來不動하야 安靜眞常이나 眞常體上에 妙用現前하니 不妨隨流得妙로다 故로 祖師頌云心隨萬境轉이나 轉處寔能幽로다 隨流認得性하면 無喜亦無憂라 하시니 故로 一切時中에 動用施爲호대 東行西往하며 喫飯著衣하며 拈匙弄筯(箸)하며 左顧右盻이 皆是眞心의 妙用現前이어늘 凡夫는 迷倒하야 於著衣時에 只作著衣會하며 喫飯時에 只作喫飯會하나니 一切事業이 但隨相轉일새 所以로 在日用而不覺하며 在目前而不知로다 若是識性之(底)人인댄 動用施爲에 不曾昧卻이니라.

 

혹或이 가로되, “묘체妙體는 이미 알았거니와 어찌 이름을 묘용妙用이라 하나뇨?” 답왈, “고인古人이 이르되, 「바람이 동動함에 마음 나무가 흔들리고 구름이 남에 성性의 티끌이 일어남이로다. 만일 금일사今日事를 밝힐진댄 본래인本來人을 매각昧卻하리라.」 하니 이는 이에 묘체妙體의 용用을 일으킴이니라. 진심묘체眞心妙體는 본래 동動치 아니하야 안정진상安靜眞常하나 진상체상眞常體上에 묘용妙用이 현전現前하니 류流를 따라 묘妙를 얻음이 방해롭지 아니하도다. 그런 고로 조사祖師 송頌하야 이르시되, 「마음이 일만경계一萬境界를 따라 굴리나 굴리는 곳에 다 능히 깊숙하도다. 류流를 따라 성품性品을 알면 즐거워 함도 없고 또한 근심도 없다.」 하시니, 고로 일체시중一切時中에 동용시위動用施爲호되 동서東西에 왕래往來하며 밥 먹고 옷 입으며 숟가락 잡고 젓가락 희롱하며 왼쪽 보고 오른쪽 보는 것이 다 참마음에 묘용妙用이 현전現前하거늘 범부凡夫는 미迷함에 전도顚倒하야 옷 입을 때에 다못 옷 입는 아름알이를 지으며 밥 먹을 때에 다못 밥 먹는 아름알이를 짓나니 일체사업一切事業이 다못 상相을 따라 굴릴새 소이所以로 날로 쓰면서 깨치지 못하며 목전目前에 있으되 알지 못하는도다. 만일 이 성품을 아는 사람일진댄 동용시위動用施爲에 일찍이 매각昧卻하지  아니하리라. 

 

 

故로 祖師云 在胎名神이오 處世名人이오 在眼觀照요 在耳聽聞이오 在鼻嗅香이오 在口談論이오 在手執捉이오 在足運奔이니 遍現하면 俱該法界하고 收攝하면 在一微塵하나니 知之者는 爲是佛性이어니와 不識者는 喚作精魂이라 하나니 所以로 道吾의 舞笏과 石鞏의 拈弓과 袐魔의 와 俱胝의 豎指와 忻州의 打地와 雲巖의 師子가 莫不發明這著大用이니 若於日用에 不迷하면 自然縱橫無礙也하리라.

 

고故로 조사祖師 이르시되, 「모태母胎에 있어서는 이름이 신神이요 세상에 처處하야는 이름이 사람이요 눈에 있어서는 보고 귀에 있어서는 듣고 코에 있어서는 냄새 맡고 입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으면 잡고 발에 있으면 달아나나니, 두루 나타나면 함께 법계法界를 끌이고(감싸고) 거두면 일미진一微塵에 있나니, 아는 자는 이 ‘불성佛性’이어니와 알지 못한 자는 ‘정혼精魂’이라 불러 짓는다.」 하니, 쓴 바로[所以] 도오道吾는 홀笏을 춤추고 석공石鞏은 활을 버티고 비마袐魔는 나무 가지를 가지고 구지俱胝는 손가락을 세우고 흔주忻州는 땅을 치고 운암雲巖은 사자를 희롱하는 것이 이낱 대용大用을 발명發明치 아니함이 없으니 일용日用이 미迷하지 아니하면 자연自然히 종횡무애縱橫無礙하리라.” 

 

 

 

【진심무지眞心無知】

 

 

或이 曰眞心與妄心을 對境時에 如何辨別眞妄耶오 曰妄心對境은 有知而知라 於順違境에 起貪瞋痴心하나니 又於中容境에 起癡心也이니 旣於境上에 起貪瞋癡三毒인댄 足見是妄心也로다 祖師云逆順相爭이 是爲心病이라 하시니 故知하라 對於可不可者가 是妄心也이니라 若眞心者인댄 無知而知라 平懷圓照故로 異於草木하고 不生憎愛故로 異於妄心하나니 即對境虛明하야 不憎不愛하며 無知而知者가 是眞心故이니라 肇論에 云夫聖心者는 微妙無相이라 不可爲有오 用之彌勤이라 不可爲無로다 乃至非有故로 知而無知하고 非無故로 無知而知로다 하시니 是以로 無知即知라 無以言異於聖人心也ㅣ로다 又妄心을 在有著有하고 在無著無하야 常在二邊할새 不知中道라 하며 永嘉云捨妄心取眞理하면 取捨之心이 成巧僞로다.

 

혹或이 가로되,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이 경계境界에 대對할 때에 어찌 진망眞妄을 가리나뇨?” 답왈, “망심妄心이 경계境界를 대함은 알음알이 있게 아는 것이라 역순경계逆順境界에 탐진치심貪瞋痴心이 일어나고 또 중용경中容境에 치심癡心을 일으킴이니, 이미 탐진치 삼독심貪瞋癡三毒心이 날진댄 족히 망심妄心을 보겠도다. 조사祖師 가로되, 「역순逆順이 서로 싸우는 것이 마음에 병病이라.」 하시니, 그런 고로 시비경계是非境界를 대하는 것이 이 망심妄心이니 만일 진심眞心일진댄 앎이 없이 아는 것이라. 여상如常 뚜렷이 비춘 고故로 초목草木과 다르고 증애심憎愛心이 없는 고로 망심妄心과 다르니, 경계境界를 대對하야 비고 밝아 증애憎愛가 없으며 앎이 없이 아는 자者가 이 진심眞心이니, [조론肇論]에 이르시되, 「대저 성인聖人의 마음은 미묘微妙하야 형상이 없는지라 가히 있는 것이 아니요 씀에 더욱 뻗힌지라 가히 없는 것이 아니로다. 있는 것이 아닌 고로 알되 앎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닌 고로 앎이 없으되 아는도다. 이로써 앎이 없이 곧 아는지라 써 말하되 성인의 마음에 다르지 않다.」 하시고, 또 「망심妄心은 유有에 있으면 유有에 착著하고 무無에 있으면 무無에 착著하야 항상 두 갓에 있을새 중도中道를 알지 못한다.」 하시며, 영가永嘉 이르시되, 「망심妄心을 버리고 진리眞理를 취取하면 취사심取捨心이 공교工巧하고 거짓됨을 이루는도다. 

 

 

學人이 不了用修行하야 深成認賊將爲子로다 하니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고 常處中道이니라 故로 祖師云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이어다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하며 肇論에 云是以로 聖人은 處有不有하고 居無不無로다 雖不取於有無나 然이나 不捨於有無로다 所以로 和光塵勞하며 周旋五趣하되 寂然而往하며 忽爾而來하야 恬淡無爲而無不爲라 하시니 此는 說聖人이 垂手爲人하사 周旋五趣하사 接化衆生하시되 雖往來而無往來相시니라 妄心은 不爾故로 眞心妄心이 不同也이니라 眞心은 乃平常心也요 妄心은 乃不平常心也이니라.

 

「학인學人이 알지 못하야 도적을 그릇 알아 자식을 삼는다.」 하니 만일 진심眞心일진댄 유무有無에 있어 유무有無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상 중도中道에 처處하나니라. 고故로 조사祖師 이르시되, 「인연因緣을 좇지 말며 공空에 주住치 말지어다. 한가지 여상如常 생각하면 인연因緣이 스스로 다하리라.」 하며, [조론肇論]에 이르시되, 「이로써 성인은 유有에 처處하야 유有가 아니요 무無에 거居하야도 무無가 아니로다. 비록 유무有無를 취取하지 아니하나 그러나 유무有無를 버리지 아니하는도다. 소이所以로 화광동진和光同塵하야 오취五趣에 두루 주선周旋하나 고요히 가고 홀연히 오나니 편안하고 맑아 하염이 없으되 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시니 이것은 성인이 사람을 위하사 두루 오취에 주선周旋하사 중생衆生을 제접提接하야 교화敎化하시니 비록 왕래往來하나 왕래함이 없으시니라. 망심妄心은 그렇지 아니하는 고로 진眞과 망妄이 다르니라. 또 진심眞心은 평상심平常心이요 망심妄心은 불평상심不平常心이니라.” 

 

 

或曰何名平常心也오 曰人人具有一點靈明호대 湛若虛空하야 遍一切處하나니 對俗事하야는 假名理性이오 對妄識하야는 權號眞心이니라 無分毫分別이되 遇緣不昧하고 無一念取捨로되 觸物皆周라 不逐萬境遷移로다 設使隨流得妙라도 不離當處湛然이라 覓即知君不見인 乃眞心也이니라.

 

혹或이 가로되, “어떤 것이 평상심平常心이뇨?” 답왈, “인인人人이 다 일점영명一點靈明이 있으되 맑기가 허공과 같아서 일체처一切處에 두루하나니 속사俗事를 대하야서는 거짓 이름을 성리性理라 하고 망식심妄識心을 대하야는 권權으로 이름을 진심眞心이라 함이로다. 털끝 만치라도 분별分別이 없으되 인연因緣을 만나면 매昧하지 아니하고 일념一念이라도 취사取捨가 없으되 물건에 닿음에 다 두루하나 만경萬境을 좇아 옮아가지 아니하는도다. 설사 류流를 따라 묘妙를 얻을지라도 당처當處를 여의지 아니하야 항상 담연湛然한지라, 찾은즉 알거라 그대가 가히 보지 못하리니, 이것이 진심眞心이니라.” 

 

 

或曰何名不平常心耶아 曰境有聖與凡, 境有染與淨, 境有斷與常, 境有理與事, 境有生與滅, 境有動與靜, 境有去與來, 境有好與醜, 境有善與惡, 境有因與果하나니 細論則萬別千差어니와 今乃且擧十對하니 皆名不平常境也이니라 心隨此不平常境而生하며 不平常境而滅하나니 不平常境心이 對前平常眞心할새 所以로 名不平常妄心也이니라 眞心은 本具하야 於不隨不平常境에 生起種種差別할새 所以로 名平常眞心也이니라.

 

혹或이 가로되, “어찌 이름을 불평상심不平常心이라 하는고?” 답왈, “경계境界에 성인 범부와 더럽고 깨끗한 것과 단상斷常과 이사理事와 생멸生滅과 동정動靜과 거래去來와 호추好醜와 선악善惡과 인과因果가 있나니, 만일 자세히 의론議論할진댄 만별천차萬別千差어니와 (지금 거론한 열 가지 상대가) 다 불평상심不平常心이니라. (마음은 이 불평상경계不平常境界를 따라서 나고 불평상경계不平常境界를 따라 멸滅하나니 불평상경계不平常境界의 마음은 앞의 평상진심平常眞心을 대對할새 소이所以로 불평상망심不平常妄心이니라.) 진심眞心은 본구本具하야 불평상경계不平常境界에 종종차별심種種差別을 일으키지 아니할새 소이所以로 이름이 평상진심平常眞心이니라.” 

 

 

或曰眞心이 平常하야 無諸異因인대 奈何로 佛說因果善惡報應乎아 曰妄心이 逐種種境호대 不了種種境혼들노 遂起種種心할새 佛說種種因果法하사 治伏種種妄心호려 하사 須立因果也어니와 若此眞心不逐種種境하며 由是不起種種心할새 佛이 即不說種種法하시니 何有因果也리오 或曰眞心은 平常不生耶아 曰眞心有時施用이 非逐境生이나 但妙用遊戱하야 不昧因果耳이니라. 

 

혹或이 가로되, “진심眞心이 평상平常하야 모든 다른 인유因由가 없을진댄 어찌 불佛께서 인과선악보응因果善惡報應을 말하느뇨?” 답왈, “망심妄心이 종종경계種種境界를 좇아 나되 종종경계種種境界를 요달了達치 못함으로 종종種種 마음을 일으킬새 불佛께서 종종인과種種因果를 말씀하사 종종망심種種妄心을 다스려 조복調伏받으려 하사 인과법因果法을 세웠거니와, 진심眞心은 종종경계種種境界를 좇지 아니하며 종종種種 마음을 내지 아니할새 불佛께서 종종법種種法을 설說하지 아니하시니 어찌 인과因果가 있으리오?” 혹或이 가로되, “진심眞心은 평상平常하야 나지 아니하느냐?” 답왈, “진심眞心의 용用을 베푸는 것이 경계境界를 좇아 나지 아니하나 다못 묘용妙用으로 유희遊戱하야 인과因果를 매昧치 아니하나니라.” (‘평상平常’이라는 말은 ‘평平’자는 고하高下가 없다는 말이요 ‘상常’자는 간단間斷이 없단 말이니라.)

 

 

- [진심직설眞心直說] 중 일부 발췌, 백용성白龍城 역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