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언해中庸諺解》 이범규李範圭 해解

2023. 9. 19. 08:52글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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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규李範圭 해解 <중용언해中庸諺解> 

 

 

 

 

○ 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이요 修道之謂敎이니라.

 

하늘이 명命하신(부여하신) 것을 일러 성性이요, 성性을 솔率하는(좇는) 것을 일러 도道이요, 도道를 닦음을 일러 교敎이니라.

 

 

【이범규李範圭】 자사子思가 이르시되, 학문學問의 이치理致는 성性과 명命보다 더 정精함이 없고 공功은 도道와 교敎보다 더 큼이 없으니, 세상이 또한 이른바 성性과 도道와 교敎를 아느냐? 천하의 사람이 성품을 두지 아니함이 없으니, 성품이 바깥으로 흘러들어옴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을 내심에 이미 기운을 주어서 써 형용形容을 이루고 또 반드시 이치를 태워주어서 성품을 이루거든, 사람이 이것을 받아서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의 덕德을 삼으니 이것이 성품이 하늘에 근원함이니 이에 하늘이 명命하심이라 이름이오, 

 

천하天下의 일이 도道가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도道는 억지로 함이 아니라 성품性品 가운데 일만 이치理致가 다 갖추어져 사람이 각각 그 성품의 자연自然함을 좇으면 날마다 쓰는 사물事物 사이에 스스로 지극히 마땅하여 바꾸지 못할 이치가 있으니 이것이 도道가 성품에 쓸 리利함이니 이에 성품을 거느린 것[率性]이라 이름이오, 

 

만일 성인聖人이 법法을 세워서 천하를 인도引導하면 가르침이 있나니, 가르치는 것[敎]이 사람에게 본래 없는 것으로써 억지로 함이 아니라 대개 사람의 성품과 도道가 비록 같으나 기품氣稟이 혹 다른지라 능히 다 도道에 합合하지 못하니 성인聖人이 사람의 마땅히 행行할 바의 도道를 인因하여 품절品節하여(품절은 품수를 구별하고 절차를 정함이라) 천하에 법法을 하사 지나치고 불급不及한(미치지 못한) 자로 하여금 다 취取하여 절충折衷하게 하니 이것이 교敎가 도道에 인因함이니, 이에 도道를 닦음을 이름이라. 이 성性과 도道와 교敎의 써 이름 한 것이 그 근본이 다 하늘에서 나온 것이나, 실상實相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 솔성率性: 일념기동一念機動, 솔이심率爾心. 직심直心.

 

* ‘명命’은 령令과 같음이요, ‘성性’은 곧 이치理致요, ‘솔率’은 좇음이요, ‘도道’는 길과 같음이요, ‘수修’는 품절品節함이라. 

 

 

 

 

○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이니 可離면 非道也이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도道는 가可히 수유須臾도(잠깐도) 리離치(떠나지) 못할 것이니, 가可히 리離할(떠날) 것이면 도道가 아니라. 이런 고故로 군자君子는 그 보지 못하는 바에 계신戒愼하며 그 듣지 못하는 바에 공구恐懼하나니라.

 

【李範圭】 생각하건대, 성품性品은 도道의 붙어 나온 바가 되고 교敎는 도道의 말미암아 이룬 바가 되니, 도道는 예와 이제의 사람과 물物의 한가지로 말미암는 바를 가히 볼지라 좇은즉 다스리고 잃은즉 어지러우니, 사람이 마땅히 몸[身]으로 써 몸[體] 받아서 합合하여 하나가 되어서 비록 잠깐 사이라도 가히 떠나지 못할지라. 만일 그 가히 떠날 것이면 이것은 몸 밖에 물건이오 성품을 좇는 도道가 아니라. 도道의 가히 떠나지 못할 것이 이와 같으니, 이런 고故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도道에 들어가는 군자君子가 반드시 그 도道를 몸 받는 공功을 정밀精密히 하여 마음이 항상 공경恭敬하고 두려워하여 눈의 보이는 것이 있음을 기다린 뒤에 경계하고 삼갈 것이 아니라 비록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일만형상一萬形象이 접接하지 아니할지라도 그 마음이 항상 경계하고 삼가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요, 귀의 들리는 것이 있음을 기다린 뒤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비록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일만 감동感動이 다 적연寂然할지라도 그 마음이 항상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잊지 못하면 두고[存] 기르는[養] 공功이 때로 혹 간단함이 없어서 써 하늘 이치의 근본 그러한[本然] 것을 두어서 잠깐 사이라도 떠나지 아니하게 하는 바이니라. 

 

* 도道는 날마다 쓰는 사물事物의 마땅히 행行할 이치이니, 다 성性의 덕德이요 마음의 갖춘 것이라. 

 

 

 

 

○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이니라. 

 

은隱만치 현見한(뵈인) 것이 없으며 미微만치 현顯한(드러난) 것이 없으니, 고故로 군자君子는 그 독獨(홀로있음)을 신愼(삼가)하나니라.

 

 

【李範圭】 대저 도道가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군자君子가 진실로 마땅히 두고 기르는 공功을 정밀精密히 할 것이나, 저 간절하고 종요한 곳에 마땅히 삼갈 바가 있으니, 사람은 생각이 바야흐로 맹동萌動할(싹이 틀) 때에 땅으로 말하면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가 은밀隱密치 아니함이 아니오 일로 말하면 한 생각의 움직임이 세미細微치 아니함이 아니로되, 그 자최[跡]는 비록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나 기미幾微는 이미 움직여서 그 착한 것을 하고자 함과 악한 것을 하고자 함을 사람은 비록 알지 못하나 나는 홀로 아나니, 이것은 곧 천하의 드러나 보임이 은隱한 데 보다 더 지나감이 없고 천하의 밝게 나타남이 미微한 것보다 더 지나감이 없는지라, 이에 삼가지 아니하면 후에 장차 미치어 제어制御하지 못할 것이 있을지라, 고로 군자君子가 항상 경계하며 두려워하고도 이 은미隱微하여 홀로 아는 가운데 더욱 위하여 더 삼가서 일호一毫(한 터럭)만치라도 착하지 아니한 것으로 하여금 은미隱微한 가운데 가만히 붓고[滋] 가만히 자라지 못하게 할지라.

 

* 은隱은 어두운 곳이요, 미微는 적은 일이요, 독獨은 남은 알지 못하는 바요 나만 혼자 아는 바의 땅[地]이라. 

 

 

 

 

○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오 發而皆中節을 謂之和이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이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이니라

 

희喜와 노怒와 애哀와 락樂이 발發하지 아니한 때를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다 절節에 중中함(맞음)을 화和라 이르나니, 중中은 천하天下에 큰 본本(근본)이요 화和는 천하天下에 달達(통달)한 도道이니라.

 

 

【李範圭】 도道는 가히 떠나지 못할지라 군자君子가 진실로 敬(잡도리함)을 주장하는 공功을 정밀精密히 할 것이나, 그러나 도道의 가히 떠나지 못할 바는 이 도道의 체體와 용用의 온전함이 근본 나가(내가) 마음의 성性과 정情에 있는 것이니 희喜와 로怒와 애哀와 락樂의 네 가지는 사람이 다 같이 둔 바 정情이라. 발發하지 아니한 때를 당當하여는 마음의 한 물건도 없고 편偏함도 없고 의倚함도 없어서 흡족히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이르되 中이요, 희喜와 로怒와 애哀와 락樂이 스스로 당연當然한 이치가 있으니 이른바 절節이라. 그 이미 발發하기에 미쳐서 다 절차에 맞으면 베푸는 것이 다 마땅하여 당연當然한 이치로 더불어 서로 거스르고 어그러짐이 없음이니 이것이 이르되 화和이라. 중中이란 것은 성性의 덕德이요 도道의 체體니,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아니하되 천하天下의 사물事物 이치가 구비具備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은 천하의 큰 근본根本이요, 화和라는 것은 정情의 바름이요 도道의 용用이니 감동感動하여 서로 통通해서 예[古]와 이제[今] 사람과 물物의 한가지 말미암는 바가 흡족히 맞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은 천하의 통通하여 행行하는 달達한 도道이라. 대저 중中과 화和가 나의 성품과 정情이 되니, 도道의 체體와 용用이 곧 이에 있는지라 도道가 근본 내 마음의 바깥에 있지 아니하니 어찌 가히 떠나리오. 이것은 군자君子의 두고[存] 기르고[養] 살피는 공功이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서 정밀精密한 것을 더할 바이니라. 

 

*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이요 그 발發하지 아니함은 성性이라. 중中은 편의偏倚한(치우친) 바가 없음이니 발發하여 다 절節에 맞음은 정情의 바름이요, 화和는 어그러지고 틀린 바가 없음이니라. 

 

 

 

 

○ 致中和이면 天地가 位焉하며 萬物이 育焉이니라.

 

중中과 화和를 이르면 천지天地가 위位하며 만물萬物이 육育하나니라.

 

 

【李範圭】 군자君子가 이 도道의 체體와 용用이 사람 마음에 갖추어져 큰 근본根本을 가히 세우지 아니하지 못하고 달達한 도道를 가히 행行치 아니하지 못함을 아는지라, 이에 그 계구戒懼하는(경계하여 두려워하는) 공功을 다하여 더욱 엄嚴하고 더욱 공경하여 보고 듣는 바로부터 거두어서 보지 아니하고 듣지 아니하는 지극히 고요한 곳에 이르도록 조금도 편偏하고 의倚함(치우침)이 없어서 써 중中의 분량을 채우면 천명天命의 성性이 온전하고 큰 근본이 서서[立] 날[日]로 써 굳을 것이요, 더욱 그 홀로[獨]를 삼가는 공功을 다하여 더욱 정精하고 더욱 주밀周密하여 은미隱微한 가운데로 부터서 사물事物을 응應하는 즈음[際]에 이르도록 일호一毫도 어그러지고 틀림이 없어서 그 화和의 분량을 채우면 성性을 좇는 도道가 다하여 달도達道의 행行함이 날로 써 넓을지라. 

 

그러나 중中과 화和는 한 사람의 중中과 화和가 아니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한가지로 있는 중화中和이라. 중中과 화和를 이미 극진極盡히 하면 이 고요함에 한번 숨 쉬는 사이라도 중中이 아님이 없을지니, 내가 마음이 바르고 천지의 마음이 또한 바를지라. 고로 음양陰陽과 동정動靜이 각각 그 바에 그쳐서 천지天地가 이에 편안할 것이요 움직임에 한 일이라도 화和하지 아니함이 없을지니, 나의 기운氣韻이 순順하고 천지의 기운이 또한 순順할지라. 고로 기뻐하고 즐겨함이 서로 통창通暢하여 만물萬物이 이에 길러지리니, 이에 이른즉 도道를 닦는 가르침도 또한 나로부터 나와서 참 능히 도道에 떠나지 못할지라. 그 극진함을 미루어가면 화和함이니 가히 하지 못할 것 같으나 그 공功을 궁구窮究하면 계신공구戒愼恐懼하고 홀로[獨]를 삼감으로부터 나옴이니, 가르침[敎]으로 말미암아 도道에 들어가는 군자君子가 가히 그 닦음[修]을 극진히 하지 아니하랴. 

 

 

* 치致는 미루어서 극진히 함이요, 위位는 그 처한 바에 편안함이요, 육育은 그 사는 것을 이룸[遂]이라. 

 

* 光明寂照徧河沙 凡聖含靈共一家
一念不生全體現 六根才動被雲遮
斷除煩惱重增病 趣向眞如亦是邪
隨順世緣無罣碍 涅槃生死是空花

 

- 張拙.

 

 

 

 

 

右第一章

 

○ 仲尼가 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중니仲尼가 가라사대, 군자君子는 중용中庸이요 소인小人은 중용中庸에 반反하니라(뒤집히나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부자夫子의 말씀을 이끌어서 머리 글장의 뜻을 풀어 가라사대, 중용中庸이란 것은 한편[偏]으로 (치우치지)아니하고 의지[倚]하지 아니하고 과過하거나(지나치거나)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이 없는 평상平常한 이치이니, 이 이치가 비록 사람이 한가지로 둔 바이나, 그러하나 오직 군자君子라야 능히 몸[體] 받아서 안에 둔[存] 바와 밖에 발發한 바가 한결같이 중용中庸의 근본 그러한[本然한] 것을 의거依據하거니와, 만약 저 소인小人은 가운데 둔 것이 한편[偏]이 아니면 의지함[倚]이요 바깥에 발發한 것이 과過함이(지나침이) 아니면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이라 그 날마다 쓰는 행위가 다 중용中庸의 도道와 서로 위반違反되나니라. 

 

* ‘중니仲尼’는 공자孔子의 자字이라. ‘중용中庸’은 한편[偏]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의지[倚]하지 아니하고 과過하고 불급不及함이 없어서 평平하고 상常한(떳떳한) 이치이니, 천명天命의 당연當然한 바 정미精微함의 극진極盡한 지경地境이니라. 

 

 

 

 

○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反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이니라. [王肅本作小人之反中庸]

 

군자君子의 중용中庸은 군자君子요 시時로 중中함이요, 소인小人의 중용中庸에 반反함은 소인小人이요 기탄忌憚함이 없음이니라.

 

 

【李範圭】 ‘군자君子의 중용中庸’은 군자로 써 착함을 하는 덕德이 있어서 일[事]을 응應하고 물物을 접接함에 또 능히 때를 따라서 중도中道에 처處하니, 대저 군자君子가 되면 중용中庸의 체體가 설[立] 것이요 또 때를 따라 중도中道로 하면 중용中庸의 행用이 행行할지라 이것이 중용中庸이 되는 바요, ‘소인小人의 중용中庸을 뒤집음’은 소인小人으로 써 악惡함을 할 마음이 있어서 일[事]을 응應하고 물物을 접接함에 또 욕심을 부리고 망령되이 행行하여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으니, 대저 이미 소인小人이 되었은즉 중용中庸의 체體가 어그러졌거늘 또 기탄忌憚이 없으니 중용中庸의 용用이 어그러진지라 이것이 중용中庸을 뒤집는 바이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다만 공경恭敬하고 방사放肆한 사이에 있을 따름이니라.

 

* 왕숙王肅(한漢나라 때의 사람) 책에는, 「소인반중용小人反中庸」을「소인지반중용小人之反中庸」이라 하였으니, 정자程子 또한 그러하다 하였으므로 지금에 이를 좇는 것이라. 

 

* 화和를 변變하여 용庸이라 함은, 성정性情으로 써 말하자면 ‘중화中和’요 덕행德行으로 써 말하자면 ‘중용中庸’이라 함이 옳으니라. 그러나 중용의 ‘중中’이 실상 ‘중화中和’의 뜻을 겸하니라. 

 

 

 

 

 

右第二章

 

○ 子가 曰 中庸은 其至矣乎인져 民鮮能이 久矣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중용中庸은 그 지극한져 민民(백성)이 능能한 이가 적은 지 오래니라.

 

 

【李範圭】 부자夫子가 일찍이 말씀이 있어 가라사대, 천하天下의 도道가 중中일 따름이라. 과過하면(지나치면) 중中을 잃고 불급不急하면(미치지 못하면) 이르지 못하니, 다 극진히 착한 도道가 아니요, 오직 중용中庸의 이치는 과過하고(지나치고)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이 없어서 날마다 쓰는 떳떳한 행실에 가히 바꾸지 못할 것이 되니, 그 지극히 정精하고 지극히 수연粹然하여 가히 다시 더할 수 없는 것이라. 지금 세상 사람은 기품氣稟(타고난 기질)에 거리끼고 습관習慣에 젖어서 능히 알아서 행行할 이가 적음이 이미 오래라, 하심이라. 

 

* <논어論語>에는 「민선능民鮮能」의「능能」자字가 없나니라.

 

 

 

 

 

右第三章

 

○ 子가 曰 道之不行也를 我知之矣로라. 知者는 過之하고 愚者는 不及也이니라. 道之不明也를 我知之矣로라. 賢者는 過之하고 不肖者는 不及也이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도道의 행行하지 못함을(못하는 까닭을) 내가 아노라. 지知한(총명한) 자者는 과過하고(평상平常에 지나치고) 우愚한(어리석은) 자者는 급及치(현묘玄妙함을 구함에 미치지) 못하나니라. 도道의 명明치 못함을 내가 아노라. 현賢한 자者는 과過하고 불초不肖한 자者는 급及치 못하나니라. 

 

 

【李範圭】 부자夫子가 일찍이 말씀이 있어 가라사대, 도道는 본래 항상 행行하여 그치고 쉬지 못할 것이어늘 이제 천하의 행行하지 못함은 내가 그 연고緣故를 아노라. 대저 사람이 저 이치를 알아야 바야흐로 그대로 행行하여 갈 것이어늘 이제 기질氣質이 총혜聰慧(총명)한 사람이 있으니 추측推測함이 높고 깊어서 능히 반드시 알지 아니할 것을 알아서 그 아는 것이 항상 도道에 지나쳐서 ‘도道로써 족히 행行할 것이 없다’하고, 또 기질氣質이 혼매昏昧한(이리석은) 사람이 있으니 능히 알 것을 알지 못하여 그 아는 것이 항상 도道에 미치지 못하여 행行할 바를 알지 못하는지라 이것이 도道에 행行하지 못한 바이요, 

 

도道는 본래 항상 밝아서 어둡지 아니한 것이어늘 지금 천하의 밝지 못함은 내가 그 연고緣故를 아노라. 대저 사람이 저 이치를 행行하여 보아야 바야흐로 참된 것을 알 것이어늘 이제 기질氣質이 민첩敏捷한 사람[賢者]이 있으니 이상한 일을 하기를 좋아하여 반드시 행하지 아니할 것을 행하여 그 행行함이 항상 도道에 지나쳐서 도道로 써 ‘족히 알 것이 없다’하며, 또 기질氣質이 나약한 사람[不肖者]이 있으니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지 못하여 그 행行함이 항상 도道에 미치지 못하거늘 또 알 바를 구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도道의 밝지 못한 바이니라. 

 

* 도道는 하늘 이치의 당연當然한 것이니 중中일 따름이니라. 

 

 

 

 

○ 人莫不飮食也이언마는 鮮能知味也이니라.

 

사람이 음식을 아니하는 이 없건마는 능히 맛을 아는 이가 적으니라. 

 

 

【李範圭】 그러나 도道의 이른바 ‘중中’이란 것은 이에 하늘 명[天命]과 사람 마음[人心]의 밝은 것이라. 당연當然히 바꾸지 못할 이치이니 진실로 사람이 사는 일용日用 사이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되 특별히(특별한 것을 구하여) 행行함에 나타나지 못하고 익힘에 살피지 못함이니, 이로써 그 지극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잃어버림이라. 지금 사람이 음식飮食을(먹고 마시지) 아니하는 이가 없으되 능히 그 음식飮食의 바른 맛을 아는 이가 적으니, 맛의 바른 것[正味]을 알면 반드시 즐겨하여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요 도道의 중中을 알면 반드시 지켜서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어늘, 그 지知와 우愚와 현賢과 불초不肖의 살피지 아니함에 어찌 하리오? 하심이라. 

 

 

 

 

 

右第四章

 

○ 子가 曰 道其不行矣夫인져

 

자子가 가라사대, 도道가 그 행行치 못할 것인져.

 

 

【李範圭】 자子가 일찍이 말씀이 있어 가라사대, 도道란 것은 당연當然한 이치이니 진실로 사람의 능히 행行할 바요, 또 마땅히 행할 바이어늘 이제 너무 과過한 것(지나친 것)에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에 잃어버리니, 중용中庸의 도道가 그 천하에 행하여지지 못하는 것인져 하심이라. 

 

 

 

 

 

右第五章

 

○ 子가 曰 舜은 其大知也與이신져 舜이 好問而好察邇言하샤 隱惡而揚善하시며 執其兩端하샤 用其中於民하시니 其斯以爲舜乎이신져.

 

자子가 가라사대, 순舜은 그 큰 지知(지혜)이신져. 순舜이 묻기를 좋게 여기시고 이언邇言 살핌을 좋게 여기시되, 악惡을 은隱하시고(숨기시고) 선善을 양揚하시며(드날리시며), 그 두 끝을 잡으시어 그 중中을 백성에게 쓰시니 그것이 이 써 순舜이 되심인져.

 

 

【李範圭】 부자父子가 일찍이 말씀이 있어 가라사대, “사람이 지혜智慧가 아니면 도道를 볼 수 없으니, 옛적 임금인 순舜과 같으신 이는 그 큰 지혜이신져. 무엇으로써 순舜의 큰 지혜智慧이심을 아느뇨? 순舜이 써 하되 천하天下의 의리義理는 궁진窮盡함이 없고 한사람의 물견物見은 한정限定이 있으니, 대저 한 일을 처치處置함에 스스로 이미 그 이치를 알았다 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절절切切히 사람에게 묻기를 좋아하여 물어서 얻은 바의 말을 다만 높고 깊은 의론議論만 반드시 살필뿐이 아니라 극히 천근淺近한(얕고 가까운, 俗語)말도 또한 지극한 이치가 있다하여 살피기를 좋아하시니 그 착한 것을 버림이 없음을 가히 알 것이요, 살펴서 그 말의 이치에 당當하지 아니하여 악惡한 것은 숨겨서 베풀지 아니하고 그 말의 이치에 당當하여 착한 것은 드러내서 숨기지 아니하시니 그 넓고 크고 빛나고 밝음이 이와 같으신지라 천하의 사람이 누가 즐겨 착한 말로 써 고告하지 아니하리오. 그러나 말이 다 착하되 같지 아니함이 두 끝이 있으니 반드시 다 쓸 것이 아니라, 순舜이 그 두 끝을 잡고 가리되[擇] 두 끝 안에 그 살핌을 극진히 하여 말의 지당至當함이 있어서 흡족히 사리事理에 합合한 것을 이르되 중中이니, 곧 사업事業에 베풀어서 이 중中을 써서 백성에게 더하시니, 대저 사람의 순舜을 의론議論하는 자가 반드시 이르되 그 총명聰明과 예지睿知가 天下에 높아서 가히 미치지 못하리라 하나 스스로 자기의 소견만 쓰지 아니하고 남의 소견을 취하는 것이 이에 순舜이 되신 바를 뉘 알리오? 지혜智慧가 반드시 대순大舜과 같은 후에야 가히 이 도의 행行함을 바라리라.” 하심이라. 

 

* ‘이언邇言’은 옅고 가까운 말이요 ‘양단兩端’은 여러 의론議論이 같지 아니한 끝이니, 모든 물건이 다 양단兩端이 있으니 크고 적고 두텁고 얕은 류類이라. 

 

 

 

 

 

右第六章

 

○ 子가 曰 人皆曰予知로되 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而莫之知辟也하며 人皆曰予知로되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이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사람이 다 가로되 내 지知호라 호되 구驅하야(몰아서) 고罟와 화擭와 함정陷阱의 가운데 납納호되(들이되)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이 다 가로되 내 지知호라 호되 중용中庸을 가리어[擇] 능能히 기월期月(정해놓은 기간의 한 달)도 지키지 못하나니라.

 

 

【李範圭】 부자夫子가 일찍이 말씀이 있어 가라사대, 세상 사람이 더불어 일[事]을 의론議論한즉, 다 자부自負하야 가로되, ‘내가 능히 일을 미연未然에 헤아려서 지智 하다’ 하나, 그러나 이른바 지智라 함은 화禍를 알아서 능히 피避할 줄을 아는 것이 귀貴하거늘 그 어찌하여 화禍의 기틀[機]이 숨어 있는 바가 다 그물[罟]과 덪[擭]과 함정[陷阱]이로되 이에 스스로를 몰아서 그 가운데에 들이되 피할 바를 알지 못하고 위태함을 행하여 요행僥倖을 바라다가 화禍되고 패敗함을 취取하니 이것은 그 마음에 가리운 바가 있음이니 과연果然 이것이 지혜가 되리오?  또한 지금 사람이 더불어 이치를 의론한즉 다 자부自負하여 가로되 ‘내 능히 이치의 정미精微함을 분석分析하여 아노라’ 하나, 그러나 이른바 안다 함은 그 아는 것의 참된 것과 그 지키는 것의 굳음이거늘 어찌하여 겨우 분별함을 알고 써 중용中庸을 구하여 이에 겨우 얻었다가 곧 잃어버려서 능히 기월期月도 지키지 못하니 비록 택擇한 바가 있으나 마침내 나의 둠[存]이 아니라. 이것은 그 아는 것이 마침내 참됨이 아니니 어찌 지혜라 이르리오? 이것이 도道의 밝지 못함이라. 그런즉 도道를 밝히고자 하는 자는 한갓 지혜智慧에 미침이 귀貴할 뿐이 아니오 인仁으로 지킴이 더욱 귀貴하니라. 

 

 

 

 

 

右第七章

 

○ 子가 曰 回之爲人也가 擇乎中庸하야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회回가 사람됨이 중용中庸을 택擇하여(가리어) 한 선善(착함)을 얻으면 권권拳拳히 응膺(가슴)에 복服하여 잃지 아니하나니라.

 

 

【李範圭】 자子가 일찍이 말씀이 있어 가라사대, 천하天下의 사물事物이 다 중용中庸의 이치가 있으되 사람이 스스로 능히 택擇하지(가리지) 못하고 곧 택한다 하여도 또한 능히 지키지 못하되, 오직 회回의 사람됨이 능히 일[事]을 따르고 물物을 따라서 모든 이치를 분변分辨하여 이른바 중용中庸을 구求하여 가져서 행行하되, 택擇한(가린) 바를 따라서 매양 한 중용中庸의 착함[善]을 얻은즉 몸[身]으로 몸[體] 받고 힘써 행行하여 지킴이 심히 굳어서 권권拳拳히 받들어 가져서 마음과 가슴사이에 붙여두어서 다시 잃어버리지 아니하니, 회回의 능히 지킴이 이와 같은지라 이것이 행行함에 과過하고(지나치고)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이 없는 바요 도道의 써 밝은 바이니라. 

 

* ‘회回’는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안연顏淵의 이름이요, ‘권권拳拳’은 받들어 가지는 모양이요, ‘복服’은 붙임과 같음이요, ‘응膺’은 가슴이라. 

 

 

 

 

 

右第八章

 

○ 子가 曰 天下國家도 可均也이며 爵祿도 可辭也이며 白刃도 可蹈也이로되 中庸은 不可能也이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천하天下와 국가國家도 가可히 균均할(고르게 다스릴) 것이며 작록爵祿(벼슬과 봉급)도 가可히 사辭(사양)할 것이며 백인白刃(흰 칼날)도 가可히 도蹈할(밟을) 것이로되, 중용中庸은 가可히 능能치 못하나니라.

 

 

【李範圭】 자子가 일찍이 말씀이 있어 가라사대, 천하天下와 국가國家가 지극히 크니 다스리기 어려우나 그러나 이치에 마땅하고 마땅치 아니함을 물론勿論하고(논하지 아니하고) 처치處置하여(일을 감당하여) 가기만 기필期必하면(꼭 이룰 것을 기약하면) 자품資禀이 명민明敏(총명하고 민첩)함에 가까운 자는 능히 평平하게 다스릴[均] 것이요, 벼슬과 록祿(봉급)은 인정人情에 좋아하는 바이라 물리치기가 어려운 것이나 그러나 마땅히 사양[辭]할만 하고 마땅히 사양치 아니할만 함을 물론하고 다만 나가지 아니함으 써 높음을 삼으면 자품資禀이 렴결廉潔(청렴결백)함에 가까운 자는 능히 사양[辭]할 것이요, 흰 칼날은 사람의 두려워 하는 바이라 범犯하기가 어려우나 그러나 마땅히 죽을 만하고 마땅히 죽지 아니할 만함을 물론하고 다만 생명生命을 경輕히(가벼이) 함으로 써 용맹勇猛을 삼으면 자품資禀이 과감果敢(결단있고 용감)함에 가까운 자는 능히 밟을[蹈] 것이라. 이 세 가지는 비록 어려우나 다 기품氣稟의 편벽偏僻됨과 사세事勢의 급박急迫함에 오는 것이니 반드시 종용從容히 절節에 맞음이 아니로되, 중용中庸은 비록 알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운 일은 없으나 그러나 천리天理가 혼연渾然(분별없고 순수원만)하여 과果하고(지나치고)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이 없으니 실로 의義가 정精하고 인仁이 익어서 일호一毫(한 터럭만큼)의 사사私事로운 뜻이 없는 자가 아니면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라. 이것이 그 심히 쉬운 것 같으나 실상은 가히 능能치 못할 바이니라. 

 

 

 

 

 

右第九章

 

○ 子路가 問强한대 子가 曰 南方之强與아 北方之强與아 抑而强與아. 

 

자로子路가 강强함을 묻자온대 자子가 가라사대, 남방南方의 강强함인가, 북방北方의 강强함인가, 너의 강强함인가?

 

 

【李範圭】 자로子路가 대개 강强한 것이 족히 써 도道를 맡을만하다 함을 들었으나 그 참됨을 얻지 못한지라 고로 부자夫子에게 묻자와 가로되, ‘선비가 어떠하여야 강强함이 되나니잇가?’ 함이라. 자로子路가 용맹勇猛을 좋아하는지라 부자夫子가 자발自發하여 묻는 뜻이 행행行行한 강强한데 있음을 아시고 먼저 힐문詰問하여 가라사대, ‘강强의 종류가 한 가지가 아니니 너의 묻는 것이 과연 남방南方 풍기風氣(풍속)에 익어서 남방南方의 강强함을 말하는 것인가, 과연 북방北方 풍기風氣에 익어서 북방의 강强함을 말하는 것인가, 의리義理에 근본하여 너의 마땅히 강强할 것을 말하는 것인가?

 

* ‘자로子路’는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중유仲由이라.

 

 

 

 

○ 寬柔以敎이오 不報無道는 南方之强也이니 君子가 居之니라.

 

관寬하며(너그러우며) 柔하여(부드러움으로) 써 가르치고 도道 없는 이를 갚지(보복) 아니함은 남방南方의 강强함이니 군자君子가 거居하나니라.

 

 

【李範圭】 어떠한 것이 남방南方의 강强함인가? 만일 사람이 옳지 아니함이 있으면 다만 너그럽고 부드럽게 권勸하여 화化하게 하여 스스로 뉘우쳐 깨닫게 하고, 가르침을 좇지 아니할지라도 교계校計하지 아니하며, 심甚하여 사람이 횡역橫逆의 일로써 나에게 베풀지라도 또한 다만 받을 뿐이요 보복報復하지 아니하고 마땅히 받지 아니할 바를 교계較計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풍기風氣가 유약柔弱하여 능히 용납容納하고 참는 것으로써 사람을 이기는 것이니 이는 남방南方의 강强함이라. 또한 충후忠厚한 도道가 됨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니 군자君子가 이로써 자처自處하나 이는 너의 마땅히 할 바의 강强함이 아니니라. 

 

* ‘관유이교寬柔以敎’는 이르되 함용含容하고 손순巽順하여 써 사람의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을 가르침이요 ‘불보무도不報無道’는 이르되 횡역橫逆의 일이 옴을 곧 받기만 하고 갚지 아니함이라. 

 

 

 

 

○ 衽金革하야 死而不厭은 北方之强也이니 而强者가 居之니라.

 

금金[창]과 혁革[갑옷]을 임袵하여(자리하여) 죽어도 염厭치(싫어하지) 아니함은 북방北方의 강强함이니 강强한 자者가 거居하나니라.

 

 

【李範圭】 북방北方의 강强함은 이것과 다르니, 금金과 혁革은 흉凶한 그릇이요(무기요) 몸을 죽이는 것은 중重한 일이로되 저 사람인즉 평일平日에 금金과 혁革을 보기를 임석衽席과 같이하여 그 가운데 편안하고 익어서 비록 이것으로써 싸우다가 죽을지라도 또한 원망하고 뉘우치는 뜻이 없으니, 이것은 풍기風氣(풍속)가 강한强悍하여(강하고 사나워) 전혀 과감果敢히 함으로써 사람을 이기니, 북방北方의 강强함인 것이라. 강强한 자가 이로써 자처自處하니 이것도 또한 너의 마땅히 강强할 바의 강强함이 아니니라.  

 

 

 

 

○ 故로 君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여 中立而不倚하나니 强哉矯여 國有道에 不變塞焉하나니 强哉矯여 國無道에 至死不變하나니 强哉矯여

 

고故로 군자君子는 화和하되 류流치(흐르지) 아니하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중中에 립立하여(서서) 의倚치(의지하지) 아니하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나라의 도道가 있음에 색塞을 변變치 아니하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나라가 도道가 없음에 죽음에 이르러도 변變치 아니하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李範圭】 남북南北의 강强함이 다 한편에(치우쳐) 한限함으로써 사람을 이기나 학자學者의 강强함은 그 기질氣質의 편벽偏僻됨을 변화變化하여 스스로를 이김에 있는지라. 고로 성덕成德한 군자君子는 스스로 의리義理의 강强함이 있으니 세상에 처處함에 화和함이 귀貴하되 화和함은 흐르는데 이르기가 쉽거늘 군자君子는 화和한 것으로써 사람과 한가지로 하되 능히 스스로 지킴을 바른 것으로써 하여 일찍이 이치를 어기고 무리를 따라서 흐름에 이르지 아니하니 이것은 사람에게 처處하는 이치를 가리어 지켜서 스스로 그 흐르기 쉬운 사심私心을 이기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몸을 처處함에 가운데 서는[立] 것이 귀貴하되 가운데 서는 것이 한편偏이 됨에 이르기가 쉽거늘 군자君子는 무리를 어기고[違] 홀로 서서 능히 스스로 그 옳은 것을 믿고 법法을 바꾸어 써 사람을 좇아서 한편 됨에 이르지 아니하니 이것은 몸을 처處하는 이치를 가리어[擇] 지켜서 스스로 그 한편偏 되기 쉬운 사심私心을 이기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달達한 자는 뜻을 얻음에 매양 그 지킨 바를 잃어버림에 이르거늘 군자君子는 나라의 도道가 있음을 당하여 부귀富貴한즉 능히 도道를 행行하고 때를 건져서 써 그 포부抱負를 베풀되 그 달達하지 아니한 때에 본디 닦고 도道를 변變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그 달達함에 처處하는 이치를 가리어[擇] 지켜서 스스로 그 변하기 쉬운 사심私心을 이기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궁窮한 자는 견디기가 어려워서 그 지키는 바를 마치지 못함이 많거늘 군자君子는 나라의 도道가 없음을 당當하여 빈천貧賤한즉 능히 의義를 지키고 명命에 편안하여 써 그 몸을 마쳐서 죽기에 이르도록 그 평생의 절조節操를 변變치 아니하니 이것은 그 궁窮함의 처處하는 이치를 가리어[擇] 지켜서 스스로 그 변하기 쉬운 사심私心을 이기나니, 강强하다 교矯함이여. 

 

군자君子의 강强함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의리義理와 학문學問 가운데로 좇아 온 것이 아니면 능치 못하리니 너의 마땅히 강强할 바이라 하시니, 부자夫子가 자로子路에게 고告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각하면 가히 배우는 자가 진실로 용맹勇猛이 족히 사사私事를 제어制御한즉 마음이 물物에 가리우지 아니하여 능히 택擇할 것이오 마음이 물物에 빼앗기지 아니하여 능히 지키리니 또 어찌 중용中庸을 가히 능히 못하리오?

 

* ‘교矯’는 강한 모양이라. ‘의倚’는 한편으로 치우침이요, ‘색塞’은 달達하지 못함이라.

 

* 남북南北은 사람을 이기는 것으로써 강强함을 삼으니 이것은 풍기風氣(살아온 환경) 가운데 쌓인[囿] 것이요, 군자君子는 스스로 이기는 것으로써 강强함을 삼으니 이것은 풍기風氣 밖에 나온 것이라 마땅히 ‘중中’의 자字로 써 주장을 삼을지니, 남방南方은 중中에 미치지 못한[不及] 자요 북방北方은 중中에 지나간[過] 자이니 다 기질氣質의 편벽偏僻됨이 그러하게 함이라. 반드시 군자君子와 같이하여서 바야흐로 의리義理에 순純전하여야 중용中庸의 강强함이 되리니 이 군자君子는 중인衆人으로 더불어 대對함이 아니요 정히 남북南北의 강强함으로 더불어 대對함이니 중重함이 끝절節에 있나니라. 

 

 

 

 

 

右第十章

 

○ 子가 曰 素隱行恠를 後世에 有述焉하나니 吾弗爲之矣로라. 君子가 遵道而行하다가 半塗而廢하나니 吾弗能已矣로라.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하나니 唯聖者能之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소은素隱하며(숨어서 질박하게 살며) 괴恠(괴이한 일)를 행行함을 후세後世에 술述[稱述]하는 이가 있나니, 내 하지 아니하노라. 군자君子가 도道를 좇아 행行하다가 도塗(길)에 반半만 하여 폐廢하나니(그만두나니) 내 능能히 마지 못하노라(그만두지 못하노라). 군자君子는 중용中庸을 의依하여 세世(세상)에 둔遯하여(숨어서) 앎을 보지 못하여도 뉘우치지 아니하나니, 오직 성자聖者라야 능能히 하나니라.

 

 

【李範圭】 부자夫子의 말씀을 끌어 가로되, 이제 사람이 있으니 일용심상日用尋常한 이치를 족히 행할 것이 아니며 족히 알 것이 아니라하여 깊이 은벽隱僻한 이치를 구求하여 사람이 능히 알지 못할 바를 알고자하며 지나가서 궤이詭異한 행위를 하여 사람이 능히 행하지 못할 바를 행하고자 하니, 이것은 대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하고자 함이라. 사람의 정情이 범상함을 싫어하고 새것을 기뻐하는 고로 후세後世에 또한 혹 일컬어 전술傳述하는 자가 있으나 이것은 그 알고 행行함이 다 중中에 지나가서[過] 마땅히 하지 아니할 것을 하는 자이라. 나는 나의 마땅히 알바를 알며 나의 능히 행行할 바를 행하여서 차라리 후세에 칭술稱述함이 없을지언정 중中에 지나가고 바름을 잃어버리는 자와 행行을 하지 아니하리라. 

 

세상에 또 일종一種의 이름이 군자君子라 하는 자가 있으니, 도道의 중中이 귀貴함을 알고 사물事物을 따라서 중용中庸의 도道를 택擇하여 좇아 행行하니 이는 아는 것이 족히 써 미칠만 하되, 다만 그 힘이 족하지 못함이 있어서 行하여 半途(중도)에 이르러서 폐廢하여버리고(그만두어버리고) 나아가지 아니하니 이것은 그 알고 행行함이 또 불급不及함(미치지 못함)에 이름이니 마땅히 마지아니할 것을 마는 자이라. 나는 시종始終을 한결같이 하여 능히 말지 아니함이 있노라.

 

만일 도道를 체體하여 쉬지 아니하는 자는 내가 성덕成德한 군자君子에게 얻음이 있노라. 군자君子의 아는 바와 행하는 바는 자연히 중용中庸의 이치에 의지하여 더불어 하나가 되어서, 곧 몸이 맟도록 사람에게 앎을 보이지 못할지라도 마침내 뉘우치지(후회하지) 아니하나니, 대개 중용中庸의 도道가 오직 나에게 있음을 믿은지라 칭술稱述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마침에 폐廢하여버리지 아니하니 이것은 과불급過不及함이 없고 유시유종有始有從하여(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서) 천리天理에 순연純然하고 인사人事에 다한 성자聖者라야 능能히 하나니, 대저 성聖인즉 내가 능히 당當하지 못하나 그러나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지 못한다 하시니, 부자夫子가 은벽隱僻하고 궤이詭異함에 하지 아니하고 반도半途(중도)에 마지아니하시니, 그 능한바가 정히 이에 있는지라 비록 성聖으로써 스스로 거居하지 아니하시나 또한 어찌 능히 사양하시리오.

 

* 알고 행함이 너무 지나침과[過, 行恠] 알고 행함이 미치지 못함[不及, 半途廢]이 있으나, 그 알고 행함이 중中을 얻고 지智와 인仁과 용勇의 세 가지 달達한 덕德을 겸비하여 중용中庸의 극진極盡함에 나아감이 정正히 이른바 군자君子의 중용中庸이라.

 

 

 

 

 

右第十一章

 

○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군자君子의 도道는 비費하되 은隱하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위의 글에서 도道는 가히 떠나지 못한다는 뜻을 밝혀 가라사대, 도道는 하늘에 근원根原하여 체體가 군자君子에게 갖춘[備]지라 고로 도道가 군자君子의 도道가 되나니, 이 도道는 그 당연當然함의 발용發用함이 충만充滿하고 영일盈溢하여 물物마다 있지 아니함이 없고 어디든지 그렇지 아니함이 없으니 대개 그 쓰임의 넓음이 극진함이요 그 가운데 나아가서 그러한 바의 체體가 있으나, 형상과 자최의 가히 볼 것이 없고 소리와 냄새의 가히 찾을 데가 없으니 또 그 체體의 은미隱微함이 극진하니라. 

 

* 『費而隱』 : ‘비費’는 용用의 넓음이요 ‘은隱’은 체體의 적음[微]이라. ‘비費’는 어디든지 그 작용이 퍼져있는 것을 말함이요, ‘은隱’은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도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을 말함이니, 곧 도道는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있으니, ‘무재부재無在不在’라 있음과 있지 아니함이 없음이라.

 

*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총명한 자는 도道를 가볍게 여기므로 [중中에]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도道를 멀리 있다고 여기므로 [중中에]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 [禮記正義]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그대들은 내가 숨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숨긴 것이 없다. 

- <論語> 述而 第七.

 

 

 

 

○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되 及其至也하야난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知焉하며 夫婦之不肖로도 可以能行焉이로되 及其至也하야난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能焉하며 天地之大也에도 人猶有所憾이니 故로 君子가 語大인댄 天下가 莫能載焉이오 語小인댄 天下가 莫能破焉이니라.

 

부부夫婦의 우愚로도(어리석음으로도) 가可히 써 여與하여(참여하여) 알 것이로되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부부夫婦의 불초不肖로도 가可히 써 능能히 행行하되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능能치 못하는 바가 있으며, 천지天地의 큼에도 사람이 오히려 감憾하는(원망하는) 바가 있나니, 고故로 군자君子가 대大를 이를진댄 천하天下가 능能히 재載하지 못하고 소小를 이를진댄 천하天下가 능能히 파破하지 못하나니라.

 

【李範圭】 시험하여 도道의 비費[用]한 것으로써 볼진대 부부夫婦(사내나 아녀자) 가운데 어리석은 자는 도道에 마땅히 알바가 없을 것 같으나, 그러나 또한 본연本然한 양지良知가 있어서 일용평상日用平常한 이치[理]에 가히 아는 것이 있으되 다만 그 전체全體의 지극함이 아니라. 그 지극至極한 데에 미쳐서는 비록 생이지지生而知之한(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성인聖人이 마땅히 알지 못할 것이 없는 이라도 혹 때가 처지處地로 더불어 막히고 이목耳目에 궁진窮盡함이 있어서 또한 다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부부夫婦 가운데 불초不肖한 자는 도道에 마땅히 능能할 바가 없을 것 같으나 그러나 또한 본연本然한 양능良能이 있어서 일용평상日用平常한 일에 가히 능한 것이 있으되 다만 그 전체의 지극함이 아니라 그 지극한데 미쳐서는 비록 안이행지安而行之하는 성인聖人이 마땅히 능能하지 못할 것이 없는 이라도 혹 기수氣數(자신의 길흉과 화복의 운수)가 형세로 더불어 막히고 마음과 힘이 미치지 못하여 또한 능히 다 행行하지 못하는 바가 있나니 어찌 특별히 성인聖人뿐이리오? 

 

곧 천지天地의 화육化育함(변화로 길러냄)으로써 이 같이 그 크나, 그러나 덮고[覆] 싣고[載] 내고[生] 이룸[成]의 편벽됨과 차고[寒] 더웁고[暑] 재앙[災]과 상서[祥]의 바른 것을 잃어버림에 사람이 오히려 그 원願함에 만족하지 못하여 유감遺憾됨이 있으니, 대저 가까이는 부부夫婦(사내와 아녀자)의 능히 알고 능히 행하는 바로부터 멀리는 성인聖人과 천지天地의 능히 다 하지 못하는 바에 이르기까지 도道가 진실로 크고 적은 것을 겸하여 그 용用을 갖춘[備] 것이라. 고로 군자君子의 도道가 그 큰데 나아가서 말할진댄 혼륜渾淪(혼륜은 기운이 미분未分한 한 덩어리라)하고 보박溥博(보박은 넓고도 넓음이라)하여 물物을 포함包含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그 큰 것이 바깥이 없으니 뉘 능히 그 바깥에 나아가 실을[載] 자가 있으며 그 적은 데 나아가서 말할진댄 기미幾微가 섬실纖悉하여 물物에 체體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그 적은 것이 안이 없으니 뉘 능히 그 안에 들어가 파破할 자가 있으리오? 도道가 참으로 쓰임이 넓은 것이니라. 

 

 

*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어떻게 해야 비로소 도道를 알 수[知] 있으며, 어떻게 수행해야 비로소 도道를 증득할 수[行] 있을까?

 

‧ 「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 死亡貧苦 人之大惡存焉 故欲惡者 心之大端也 人藏其心 不可測度也 美惡皆在其心 不見其色也 欲一以窮之 舍禮何以哉」 

음식飮食과 남녀男女는 사람의 큰 욕구欲求가 있는 곳이요, 죽음과 가난의 고통은 사람의 큰 싫어함이 있는 곳이라. 그러므로 욕欲(바람)과 오惡(미워함)는 마음의 큰 단서端緖이라. 사람은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나 헤아리지 못한다. 좋아하고 미워함이 그 마음 속에 있으나 그 색상을 보지 못한다. 하나로써 이를 궁구窮究하고자 하면 ‘예禮’를 버리고 무엇으로써 하리오? - <禮記> 禮運.

 

‧ 「具足凡夫法 凡夫不知, 凡夫若知 即是聖人. 具足聖人法 聖人不知, 聖人若知 即是凡夫」
범부凡夫의 법法을 갖추었으면서도 범부가 모른다. 만약 범부가 안다면[反照] 곧 성인聖人이다. 성인聖人의 법法을 갖추었으면서도 성인이 모른다. 만약 성인이 안다면[念] 곧 범부凡夫이다. - 天童密雲 圜悟禪師.

 

 

*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天下 莫能破焉』: 천지天地의 큼에도, 사람은 오히려 만족하지 못하여 원망하는 바가 있나니, 고故로 군자君子가 ‘대大’를 말할진댄 천하天下가 능能히 싣지 못하고 ‘소小’를 이를진댄 천하天下가 능能히 파破하지 못하나니라. (곧 무량무변無量無邊으로 큼이 바로 ‘작음[小]’이요, 무량무변無量無邊으로 작음이 바로 ‘큼[大]’이니, ‘공空’을 말함이라.)

 

‧ 「大而武外 小而無內」

커서 밖이 없으며, 작아서 안이 없다. - <莊子>

 

  「藏舟於壑 藏山於澤, 藏天下於天下」

배를 골짜기에 숨기고 산을 바다 속에 감추지만, 천하는 천하 속에 감춘다. - <莊子>

 

  「於一毛端現寶王剎,坐微塵裏轉大法輪」

한 터럭 끝에 보왕찰을 나타내고, 작은 먼지 속에 앉아서 대법륜을 굴린다. - <楞嚴經>.

 

 

 

 

○ 詩云 鳶飛戾天이어늘 魚躍于淵이라 하니 言其上下察也이니라. 

 

시詩에 이르되, 「연鳶은(솔개는) 비飛하여(날아서) 천天에(하늘에) 려戾하거늘(이르거늘) 어魚는(고기는) 연淵에서(못에서) 약躍한다(뛴다).」 하니, 그 상하上下(위와 아래)에 찰察함(나타남)을 이르니라. 

 

【李範圭】 도道의 크고 적은 데에 극진함이 이와 같으니 그 흘러 행行함의 활발活潑한 기틀은 가히 시詩에서 보겠다. [대아한록大雅旱麓]편에 이르되, ‘솔개[鳶]는 그 성품을 좇아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그 성품을 좇아 뛰어서 못[淵]에 있다.’ 하니, 시詩가 어찌 홀로 솔개와 물고기만을 위하여 말한 것이리오? 대개 말하되 하늘과 땅 사이에 물物이 아님이 없고 하늘과 땅 사이에 물物이 도道가 아님이 없으니 솔개가 위에 나는 것은 다 도道의 위로 나타나는 것이니 한 솔개를 들어 말하여 ‘위에 형상을 이룬 것이 다 도道라’ 함이요, 물고기가 아래에 뛰는 것은 다 도道가 아래로 나타나는 것이니 한 물고기를 들어 말하여 ‘아래에 형상을 이룬 것이 다 도道라’ 함이라. 도道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그 밝게 나타남이 대개 이와 같으니 어찌하여 쓰임의 넓음이 이와 같은고? 그러한 바는 체體의 은미隱微한 것이니라. 

 

* 「海闊從魚躍, 天空任鳥飛」

드넓은 바다는 물고기가 뛰어놀게 하고, 텅 빈 하늘은 새가 날도록 맡겨둔다. - [五燈全書] 

 

이는 ‘중화中和’를 말함이니, ‘천지입언天地立焉, 만물육언萬物育言’으로 자기自己가 본래로 만물萬物과 더불어 천지天地의 양육養育 속에 있음이라. 그런 까닭으로 자신을 돌이킴에 정성精誠스럽게 하면,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의 경계에 도달하여 본상本相을 스스로 보리라.

 

 

 

 

○ 君子之道는 造端乎夫婦이니 及其至也하야난 察乎天地니라.

 

군자君子의 도道는 단端(끝)이 부부夫婦에 조造하나니(지어지나니),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천지天地에 찰察하니라(나타나나리라).

 

【李範圭】 합合하여 말하면 군자君子의 도道이라. 그 일절一節을 말한즉 비롯함을 부부夫婦의 거실居室하는(한집에 사는) 사이에 붙이니 대개 사람의 일에 지극히 가까운 것이나 도道가 그 사이에 유루遺漏되지 아니하니 이른바 어리석고 불초不肖한 자도 가히 알고 가히 능함이니 적어서 능히 파破하지 못할 것이 이것이요, 그 전체全體의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밝게 나타나서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른바 성인聖人과 천지天地의 능히 다 하지 못하는 바이니 커서 능히 싣지 못할 것이 이것이라. 이것이 다 도道의 쓰임의 넓음이나 그 소이연所以然(그러한 까닭)은 은미隱微하여 보이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도道의 가히 잠깐이라도 떠나지 못할 것이요 군자君子가 계신戒懼하고(두려워 경계하고) 신독愼獨(홀로 있음을 삼가)하는 공功을 가히 잠깐이라도 간단間斷함이 있지 못할 것이라. 

 

 

 

 

 

右第十二章

 

○ 子가 曰 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이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道를 하되 사람에게서 멀리하면 가可히 써 도道라 하지 못하리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부자夫子의 말씀을 이끌어 가라사대, 도道가 인륜일용人倫日用 사이에 밝게 나타나니 어찌 사람에게 먼[遠] 것이리오? 다만 사람이 도道에 종사從事하는(마음을 다하는) 자가 매양 인사人事를 떠나서 고원高遠함(높고도 먼 것)을 구求하고자하면 반드시 사람의 성性에 거슬러서 그 자연한 데에 말미암지 아니하고 일의 마땅함을 잃어버려서 당연當然함에 합合하지 아니하리니, 가히 도道라고 이르지 못할지니라. 

 

 

 

 

○ 詩云 伐柯伐柯이여 其則不遠이라 하니 執柯以伐柯호되 睨而視之하고 猶以爲遠하나니 故로 君子는 以人治人하다가 改而止니라.

 

시詩에 이르되 「가柯(도끼자루)를 벰이여, 가柯를 벰이여, 그 칙則(법法)이 멀지 아니하다.」 하니 가柯를 잡아 써 가柯를 베되 예睨하야(흘끗) 보고 오히려 써 멀리 여기나니, 고故로 군자君子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리다가 개改커든(고치거든) 止하나니라(그치나니라). 

 

【李範圭】 도道를 함이 사람에게 멀지 아니함을 무엇으로 가히 볼고? [빈풍벌가시豳風伐柯詩]에 이르되, ‘도끼자루를 벰이여, 도끼 자루를 벰이여. 그 잡은 자루가 이 베는 자루의 길고 짧은 법이라 구함이 멀지 아니하다.’ 고 하나, 그러나 시時의 말로써 생각하면 그 자루를 잡고 나무를 베어서 써 자루를 하는 자가 저 자루의 길고 짧은 법이 비록 이 자루에 있으나, 그러나 잡은 자루는 이미 이룬 것이요 베는 자루는 이루지 못한 것이라. 저것과 이것이 다르니 베는 자가 이것을 보고 저것을 보니 오히려 써 멀다 하려니와 도道는 각각 당當한 사람의 몸에 있어서 저것과 이것의 다름이 없으니 본성本性의 발發한 것이 능히 알고 능히 행하여 참 멀지 아니함이 도끼자루로 더불어 또 같지 아니한지라. 

 

고故로 군자君子의 사람 다스리는 것이 곧 그 사람의 도道로써 달래어[誘] 끼고[掖] 열어[開] 인도引導하여 도리어 그 사람의 몸을 다스리되 그 능히 아는[知] 바와 그 능히 행行할 바로써 앎을 책責하고 행함을 책責하다가 그 사람이 능히 고쳐서 능히 알 바를 알고 능히 행할 바를 행하면 사람의 도道를 다한지라 곧 그쳐서 다스리지 아니하고 다시 알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써 바라지 아니하나니, 이에 가히 도道가 사람에게 멀지 아니함을 볼지니 사람이 마땅히 사람을 멀리 하지 아니함으로써 도道를 삼을지니라.  

 

 

 

 

○ 忠恕가 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이니라.

 

충忠과 서恕가 도道에 위違함이 멀지 아니하니, 기己에 시施하여 원願치 아니함을 또한 사람(남)에게 시施하지 말지니라.

 

【李範圭】 대저 군자君子가 사람(남)을 다스림에 반드시 사람(남)으로써 하는 것은 진실로 사람[人, 남]과 이 마음[心]이 같고 마음과 이 도[道]가 같음으로써 함이라. 이에 나아가면 가히 도道에 가까운 법을 깨달을지니 대개 도道가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체體와 용用이 다 갖추어졌으되 다만 사람이 사사私事로운 뜻의 간격間隔함(사이가 벌어짐)이 된지라 고故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많이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여 도道에 나아가기가 더디어 먼 것이라. 만일 충忠에 근본根本하여 서로 써 행行하면 비록 물物과 나 사이에 능히 혼연渾然히(차별없이) 화化하지 못하였으나 마음이 공변되고 이치를 얻어서 가히 자연自然함에 거의[幾]할지니, 그 도道에 나아감[去]이 무엇이 멀리오? ‘충忠’과 ‘서恕’의 일이 무엇인가하면,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사람(남)에게 미치는데 지나지 아니하니, 만일 사람이 도道의 바깥 일로 써 나에게 베푸는 것을 내 마음에 원願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자기의 마음으로 써 사람(남)의 마음을 헤아리면 사람(남)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과 같음을 알지라. 자기의 원하지 아니하는 바로 써 사람(남)에게 베풀지 아니할지니, 이것이 ‘충忠’과 ‘서恕’의 일이라. 이로써 도道를 구하면 도道에 나아감이 스스로 멀지 아니할지니라. 

 

 

* ‘충忠’은 자기의 마음을 다함이요, ‘서恕’는 자기를 미루어서 사람(남)에게 미침이요, ‘위違’는 가는 것이니, 말하되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르기에 상거相去(서로의 거리)가 멀지 아니함이요 배반하고 간다함은 아니니, 또는 곧 그 사람에게 멀지 아니한 것이라. 

 

 

 

 

○ 君子之道가 四에 丘未能一焉이로니 所求乎子로 以事父를 未能也하며 所求乎臣으로 以事君을 未能也하며 所求乎弟로 以事兄을 未能也하며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야 所求乎朋友로 先施之를 未能也이로니,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이어든 不敢盡하야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가 胡不慥慥爾리오.

 

군자君子의 도道가 넷임에 구丘가 하나도 능能하지 못하나니, 아들에게 구求하는 바로써 아비 섬김을 능能치 못하며, 신하에게 구求하는 바로써 임금 섬김을 능能치 못하며, 아우에게 구求하는 바로써 형兄 섬김을 능能치 못하며, 벗에게 구求하는 바로써 먼저 시施함(베품)을 능能치 못하나니, 용庸한 덕德을 행行하며 용庸한 언言(말)을 근謹하여(삼가서) 부족不足한 바가 있거든 감敢히 면勉치(힘쓰지) 아니하지 아니하며 유여有餘하거든 감敢히 진盡치(다하지) 아니하여 말이 행실을 돌아보며 행실이 말을 돌아볼지니, 군자君子가 어찌 조조慥慥하지 아니하리오?

 

【李範圭】 이 충忠과 서恕는 이에 구丘가 종사從事하여 배워서 군자君子 되기를 원하는 바이라. 군자君子가 윤리倫理를 다 하는 도道가 큰 끝이 네 가지가 있으되 구丘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하니 오히려 하나도 능能치 못하노니, 아들의 도道는 효孝함에 있으니 사람(남)의 아들 된 이에게 구하는 것이 반드시 그 효孝하고자 함이나 그러나 몸에(己, 자기에게) 돌이켜 구하건대 나의 아비를 섬긴 바가 능히 효孝를 다하지 못하며, 신하의 도道는 충忠함에 있으니 사람(남)의 신하된 이에게 구하는 것이 반드시 그 충忠하고자 함이나 그러나 몸에(자기에게) 돌이켜 구하건대 나의 임금을 섬기는 바가 능히 충忠을 다하지 못하며, 아우의 도道는 공손함에 있으니 사람(남)의 아우 된 이에게 구하는 것이 반드시 그 공손하고자 함이나 그러나 몸에(자기에게) 돌이켜 구하건대 나의 형兄을 섬긴 바가 능히 공손함을 다하지 못하며, 벗의 도道는 신信에 있으니 사람(남)의 붕우朋友된 이에게 구하는 것이 반드시 그 신信이 있고자함이나 그러나 몸에(자기에게) 돌이켜 구하건대 나의 먼저 벗에게 베푼 바가 능히 신信을 다하지 못하였나니, 군자君子의 도道를 내 능能치 못함이 이와 같으나 그러나 구丘의 능能치 못한 바는 다 군자君子의 이미 능能히 한 바이라. 

 

군자君子가 아들과 신하와 아우와 벗의 도道로 써 몸[身]에 몸[體] 받음은 떳떳한 덕德이니 행行하여 그 실상을 밟음은 덕德이 몸에 있고자 함이요, 아들과 신하와 아우와 벗의 도道로 써 입에 배품은 떳떳한 말이라 삼가서 그 가可함을 가림[擇]은 말을 가벼이 내지 아니하고자 함이니 행行함이 부족함에 이르기 쉬운즉 감히 강면强勉하여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요, 삼감이 그 남음이 있을까 두려워 한즉 감히 다하여 스스로 족足한데 미치지 못할지니 이것인즉 말하는 바가 다 그 행行하는 바이므로 행실을 돌아봄이요 행行하는 바가 그 말하는 바에 미침으로 말을 돌아봄이니, 군자君子는 행行함에 실상을 밟음이 있고 말이 다 독실篤實한 의론議論이라 어찌 조조慥慥히(독실한 모양) 일호一毫의 허위虛僞가 없고자 아니하리오? 나는 마땅히 이 군자君子로써 법法을 삼아서 스스로 힘쓰노라. 

 

 

 

 

 

右第十三章

 

○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오 不願乎其外니라.

 

군자君子는 그 위位에 소素하여서 행行하고 그 밖을 원願치 아니 하나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스스로 말씀을 세워서 ‘비費’를 밝혀 가라사대, 대저 사람의 거居한 바의 지위地位가 같지 아니하나 그러나 이 지위에 거居하면 반드시 이 도道가 있나니 이른바 현재現在의 마땅히 행行할 이치[理]라. 군자君子가 다만 현재現在에 거居한 바의 지위를 인因하여 마땅히 행行할 바의 도道를 행하여 나의 분수[分] 안에 일을 다 할 따름이요 현재 지위 밖에 별도로 원하고 사모함이 있어서 마음을 가히 기필期必치(기약하지) 못할 일에 바라지 아니할지라. 대개 본분本分 안에 그 도道가 스스로 쉽게 다 하지 못할지니, 내가 그 본분本分 안에 일을 행行함에 스스로 겨를(틈)하여 밖에 미칠 겨를[暇]이 없나니라.

 

 

 

 

○ 素富貴하얀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얀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얀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얀 行乎患難이니, 君子는 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부귀富貴에 소素하얀 부귀富貴에 행行하며 빈천貧賤에 소素하얀 빈천貧賤에 행行하며 이적夷狄에 소素하얀 이적夷狄에 행行하며 환란患難에 소素하얀 환란患難에 행行하나니, 군자君子는 드는 데마다 스스로 득得하지(얻지) 아니할 데가 없나니라. 

 

【李範圭】 이르는바 위位에 소素하여 행行함이 어떠하뇨? 만일 부귀富貴의 지위에 거居하여서는 부귀의 마땅히 행行할 도道를 행할지니 은택恩澤이 백성에 더할 것이요, 빈천貧賤의 지위에 거居하여서는 빈천의 마땅히 행行할 도道를 행할지니 몸(자기)을 닦아 홀로 착[善]할 것이요, 이적夷狄(오랑캐)의 지위에 거居하여서는 이적의 마땅히 행行할 도道를 행할지니 충신忠信하고 독경篤敬함을 떠나지 아니함이요, 환난患難(근심과 재난)의 지위에 거居하여서는 환난의 마땅히 행行할 도道를 행할지니 문명文明하고 유순柔順할지라. 지위[位]는 같지 아니함이 있으나 군자君子가 다 그 마땅히 할 도道를 다하면 도道가 가는 데를 따라서 있고 마음이 곧 가는 데를 따라서 즐거울 지라. 고로 들어가는 데마다 자득自得하지 아니함이 없을지니, 이른바 지위에 소素하여 행行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라. 

 

 

 

 

○ 在上位하야 不陵下하며 在下位하야 不援上이오 正己而不求於人이면 則無怨이니 上不怨天하며 下不尤人이니라.

 

위의 위位에 있어서 아래를 능陵치(업신여기지) 아니하며 아래의 위位에 있어서 위를 원援치(잡아당기지) 아니하고 몸을 정正히(바르게) 하고 사람에게 구求하지 아니하면 원怨(원망함)이 없으리니, 위로 하늘을 원怨하지(원망하지) 아니하며 아래로 사람을 우尤하지(허물하지) 아니 하나니라.

 

【李範圭】 군자君子의 바깥을 원願하지 아니함을 무엇으로써 볼까? 만일 위의 지위에 거居하여 아래의 사귐[交]을 거만히 하지 아니하여 아래를 능홀陵忽하지(업신여겨 경시하지) 아니하고 아래의 지위에 거居하여 위로 사귐[交]을 아첨하지 아니하여 위를 잡아당기지 아니하나니, 아래를 업수히 여겨서 몸(자기)의 형세를 펴지 못하면 그 아래를 원망하고 위를 잡아당겨서 몸(자기)의 하고자 함을 이루지 못하면 그 위를 원망하는 것이라. 이제 오직 그 몸에(자기에게) 있는 것을 바르게 하고 사람에게(남에게) 구하는 바가 없으면 위에 있지 못함이 없고 아래에 얻지 못함이 없을지니 무슨 원망함이 있으리오? 이 마음을 미루어서 우러러 하늘에 궁窮하고 통通하고 얻고 잃어버림을 모두 한 자연自然한 이치에 부칠 따름이니 무엇을 하늘에 원망하며 쓰고[用] 놓고[舍] 주고[予] 빼앗는[奪] 것을 모두 우연한 경우에 돌려보낼 따름이니 무엇을 사람에게 원망하리오? 이른바 바깥에 원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으니라. 

 

 

 

 

○ 故로 君子는 居易以俟命하고 小人은 行險以徼幸이니라.

 

고故로 군자君子는 이易(쉬움, 평지)에 거居하여 써 명命을 기다리고 소인小人은 험險에 행行하야 써 행幸을 요徼하나니라.

 

【李範圭】 오직 그 위位에 소素하여 바깥을 원願하지 아니하는 고故로 군자君子의 하는 바가 이치를 순順히 하여 평平하고 쉬운 길에 편안히 거居하여 궁[窮]하고 통[通]하고 얻고[得] 잃어버림[失]을 한결같이 하늘 명命을 듣고, 소인小人인즉 사사로운 지혜를 달려[騁] 행해서 날로 기울어지고 험險한 길에 행行하여 마땅히 얻지 못할 바에 요행僥倖함을 구求하니 어찌 능히 군자君子의 평이平易한 데에 거居하여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것과 같으리오?

 

* ‘거이居易’는 위位에 소素하여(처處한 바에 맞게) 행行함이요, ‘사명俟命’은 바깥에 원하지 아니함이요, ‘요徼’는 구함이요 ‘행幸’은 마땅히 얻지 못할 것을 얻음이라. 

 

* 천명天命: 「莫之爲而者는 天也요 莫之致而至者는 命也라」.

함이 없이 함이 ‘천天’이요, 이룸이 없이 이름이 ‘명命’이라.

 

  • <孟子> 萬章 上.

 

 

 

 

○ 子가 曰 射가 有似乎君子하니 失諸正鵠이오 反求諸其身이니라.

 

子가 가라사대, 사射가(활을 쏨이) 군자君子와 같음이 있나니, 정正과 곡鵠에 실失하고(잃고) 돌이켜 그 몸에 구求하나니라.

 

【李範圭】 일찍이 공자孔子의 말씀을 증거[證]하여 가라사대, 활 쏘는 것이 하나의 재주로되 군자君子의 도道와 같음이 있으니, 활을 쏘되 저 정正과 곡鵠을 잃어버려서 능히 맞추지 못한즉 돌이켜서 몸에(己, 자기에게) 구하여 써 생각하되 ‘내 뜻이 바르지 못하고 몸이 곧지 못하다’하여 나를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아니하는 지라. 대저 활 쏘는 자의 마음 세운 것이 이와 같으니 곧 군자君子가 행行하여 얻지 못함이 있으면 돌이켜 몸에(자기에게) 구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군자君子와 같음이 있는 것이라. 이 말로 보면 군자君子가 위位에 소素하여 행行하고 바깥을 원願하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이 이와 다르리오?

 

* ‘정正’은 베[布]에 그린 것이요 ‘곡鵠’은 가죽을 부침이니, 다 사포射布의 가운데요 활 쏘는 데 ‘과녁’이라. 

 

 

 

 

 

 

右第十四章

 

○ 君子之道는 辟如行遠必自邇하며 辟如登高必自卑니라.

 

군자君子의 도道는 辟컨댄(비유하건댄) 먼데 행行함이 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함 같으며, 비辟컨댄(비유하건댄) 높은 데 오름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함 같으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이르사대, 군자君子의 도道는 있지 아니한 바가 없으나 그 나아가는 것인즉 차례가 있나니, 성性을 다하고 명命을 아는 것이 반드시 인륜人倫 일용日用의 떳떳함에 근본하고 의義에 정精하고 신神에 들어감이 반드시 쇄소응대洒掃應對하는 처음에 근본 하는지라. 비유하건댄 먼 데에 行함이(먼 길을 감에)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비로소 함(시작함)과 같으니 가까움에 길들여 이르는 곳이 곧 먼 데라 가까운 데를 놓아두고 먼 데를 할 바가 없으며, 또 비유하건댄 높은 데를 오름에(높은 곳을 오르려 함에)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비로소 함(시작함)과 같으니 낮은 데에서 위로 통달通達하는 곳이 곧 높은 데라 낮은 데를 놓아두고서 높은 것을 할 바가 없으니, 도道의 나아감이 차례가 있음이 이와 같으니라.  

 

 

 

 

○ 詩曰 妻子好合이 如鼓瑟琴하며 兄弟旣翕하야 和樂且耽이라 宜爾室家하며 樂爾妻帑이라 하거늘.

 

시詩에 가로되, 처자妻子의 호好하며(좋아하며) 합合함이 슬瑟과(비파와) 금琴을(거문고를) 고鼓함(타는 것)과 같으며 형兄과 제弟가 이미 흡翕하여(합하여) 화和하며 락樂하고 또 탐耽혼디라 네의 실가室家를 의宜케 하며 네의 처妻와 노孥를(자식을) 락樂케(즐겁게) 하다 하거늘.

 

【李範圭】 도道가 집에 행行하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 시詩에 가로되, ‘처자妻子가 정情이 좋고 계분契分(친분)이 합함이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 하니 화和함의 지극함이요, 형제兄弟가 이미 흡연翕然히 우애友愛하여 화락和樂하고 또 즐겁다 하니 즐거움이 오래도록 변치 아니함이라. 이미 합合한즉 능히 너의 집을 마땅히 할 것이요 좋아하며 합한즉 능히 너의 아내와 자손을 즐겁게 하리라. 

 

* 이 시詩는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당체棠棣 편篇에 나오는 글이라.

 

 

 

 

○ 子가 曰 父母는 其順矣乎이신져

 

자子가 가라사대, 부모父母는 그 순順하신 것이로다.

 

【李範圭】 공자孔子가 이 시詩를 읽으시고 칭찬하여 가라사대, ‘처자妻子가 화和하지 못하고 형제兄弟가 마땅하지 못함은 다 부모父母의 근심을 끼치는 것이라. 사람이 능히 처자를 화하고 형제에게 마땅함이 이와 같으면 부모는 그 안락安樂하시어 순順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로다.’ 하시니, 대저 반드시 처자妻子를 화和하고 형제兄弟에 마땅한 연후然後에 부모父母가 순順함은 비록 도道 가운데 한가지 일이나, 또한 가히 먼 데 행行함이 가까운 데로부터 하며 높은 데 오름이 낮은 데로부터 하는 뜻을 알 것이라. 그런즉 배우는 자가 도道에 그 가히 낮고 가까움을 좇지 아니하고 거연遽然히 높고 먼 데를 구할 것이리오? 

 

 

 

 

 

右第十五章

 

○ 子가 曰 鬼神之爲德이 其盛矣乎인져

자子가 가라사대, 귀신鬼神의 덕德이 됨이 그 성盛함이로다.

 

【李範圭】 자사子思가 공자孔子의 말씀을 이끌어 가라사대, ‘하늘과 땅 사이가 다 이 음양陰陽의 기운이니 그 기운의 신령한 곳을 이르되 귀신鬼神이라. 대저 귀신鬼神의 덕德 됨이 지극히 없으되 지극히 있음을 포함하고, 지극히 허虛하되 지극히 실實함을 거느렸으니 대개 그 홀로 행行함의 성盛(치성)함이 극진함인져.

 

 

* 정자程子가 가라사대, ‘귀신鬼神은 천지天地의 공용功用이요 조화造化의 자최라’ 하시고, 장자張子가 가라사대, ‘귀신鬼神이란 것은 두 기운의 진실로 능能함이라’ 하시니, 우愚는 이르되 두 기운으로써 말한즉 귀鬼란 것은 음陰의 신령함이요 신神이란 것은 양陽의 신령함이요 한 기운으로 써 말한즉 와서 펴는 것은 신神이 되고 뒤집어 돌아가는 것은 귀鬼가 되니, 그 실상은 한 물건일 따름이라. 위덕爲德은 성정性情과 공효功效란 말과 같음이라. 

 

 

 

 

○ 視之而弗見하며 聽之而弗聞이로되 體物而不可遺이니라.

 

시視하려(보려) 하여도 견見치(보지) 못하며 청聽하려(들으려) 하여도 문聞치(듣지) 못하되, 물物에 체體하여 가可히 유遺치(버리지) 못하나니라.

 

【李範圭】 어찌 그 덕德의 성盛한 것을 볼까? 대저 형상이 있는 것은 다 가히 볼 것이로되 귀신鬼神은 형상이 없으니 보려고 하나 보지 못하고 소리가 있는 것은 다 가히 들을 것이로되 귀신은 소리가 없으니 들으려 하여도 듣지 못하나, 그러나 귀신은 형상과 소리는 없으되 실상 형상과 소리 가운데 두루 체體가 된 고故로 물物 위에 나아가서 보면 물物이 처음으로 남[生]에 기운이 날로 이르러서 불어나고[滋] 느는[息]것은 ‘신神’의 이르러서 폄이요, 물物이 나서 이미 차[盈]매 기운이 날로 돌이켜서 풀려 흩어짐은 ‘귀鬼’의 돌이켜서 돌아감이니, 음양陰陽의 기운이 합合함이 있고 흩어짐이 있어서 물物이 비롯함[始]이 있고 마침[終]이 있는 것이라. 고故로 귀신鬼神의 덕德이 물物의 체體가 되어서 모든 물物이 능히 유루遺漏된 것이 없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찬[盈] 것이 다 물物이로되 다 귀신鬼神의 체體하여 유루遺漏됨이 없음이라 덕德의 성盛함이 어떠하뇨?

 

* ‘귀신鬼神’은 다못 형상과 소리가 없으나, 물物의 마침과 비롯함[始終]은 음陰과 양陽이 합하고 흩어짐에 (귀신의)하는 바가 아님이 없으니 이것이 그 물物의 체體가 되어서 물物이 능히 유루遺漏치 못하는 바이라. 그 체물體物이라 말함은 역易에 이른바 ‘일에 주간主幹한다(맡아서 한다)’는 것과 같음이라. 

 

 

 

 

○ 使天下之人으로 齊明盛服하야 以承祭祀하고 洋洋乎如在其上하며 如在其左右이니라.

 

천하天下의 사람으로 하여금 재齊하며(가지런하며) 명明하며(조촐하며) 복服을 성盛히 하야 써 제사祭祀를 승承케(잇게)하고 양양洋洋히(흘러 움직이고 차고 가득히) 그 상上(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左右에 있는 듯하니라.

 

【李範圭】 귀신鬼神이 물物에 체體가 되어 유루遺漏되지 아니함을 무엇으로 볼까? 또 나타나서 보기 쉬운 것으로 말하면 귀신鬼神의 신령神靈함이 능히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공경恭敬하고 받들어 이어서 각각 마땅히 제사祭祀할 바를 따라서 재계齋戒하고 깨끗하게 하여 안을 엄숙嚴肅히 하고 옷을 성盛히 하여 바깥을 엄숙히 하여 제사를 이어 받드니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의 지극함에 자기自己의 정신精神이 모인즉 저의 정신도 또한 모이나니, 다만 귀신鬼神의 신령이 양양洋洋히 흘러 움직이고 차고 가득하여 그 위에 있는 것 같으며 그 좌우左右에 있음과 같음을 깨달을지니, 이에 가히 그 발發하여 보임이 밝히 나타나서 간 데마다 있지 아니함이 없음을 볼지니 이것이 물物의 체體하여 유루遺漏되지 아니함의 한 징험徵驗이니라. 

 

 

 

 

○ 詩曰 神之格思를 不可度思이온 矧可射思아.

 

시詩에 가로되, 신神의 격格함(옴)을 가可히 도度치(헤아리지) 못하거늘 하물며 가可히 역射하랴(싫어하랴)?

 

【李範圭】 귀신鬼神의 물物에 체體 됨이 어찌 홀로 제사祭祀할 때에만 그러하리오? 시詩에 가로되, ‘신神의 옴을 가히 추측推測하여 헤아리지 못하겠으니 옥루屋漏의 땅(옥루는 방의 서남 모퉁이이니, 극히 유암幽暗하여 혼자 앉은 곳이라)에 극히 그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을 극진히 하더라도 오히려 성경誠敬(정성과 공경함)이 부족하여 부끄러움이 있을까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가히 싫어하여 공경恭敬하지 아니하리오?’ 시詩를 봄에 더욱 귀신鬼神이 물物에 체體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믿을지니라. 

 

 

 

 

○ 夫微之顯이니 誠之不可揜如此夫인져.

 

미微한 것이 현顯하니(나타나니) 성誠의 가可히 엄揜치(가리우지) 못함이 이 같은져.

 

【李範圭】 대저 귀신鬼神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심히 은미隱微하나 이에 물物에 체體하여 유루遺漏되지 아니함이 이같이 나타나서 가히 가리우지 못함은 어찌 함이뇨? 대개 귀신鬼神은 기운[氣]의 굽히고[屈] 펴는[伸] 것이 실상 이치[理]가 아님이 없으니 이른바 성誠이라. 한 성誠의 비롯함과 한 성誠의 마침인 고故로 만물萬物 사이에 흘러 행行하여 있는 데마다 나타나 보여서 가히 가리우지 못함이 이 같으니, 그 귀신鬼神의 덕德의 성盛함이 어떠하다 하리오? 

 

*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음은 ‘은隱’이요 물物에 체體함과 있는 것 같음은 또한 ‘비費’라. 귀신鬼神의 미微와 현顯함을 말함은 곧 이 道의 비費와 은隱을 말함이니, 하늘과 땅 사이에 찬[盈] 것이 한 기운 기틀의 펴고[伸] 굽히고[屈] 가고[往] 와서[來] 마지아니함이 이른바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함을 일러 도道라 한다[一陰一陽之謂道]」라 함이니, 물物에 있지 아니함이 없고 때에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라. 덕德은 곧 성실[誠]함이요 성盛은 곧 물物에 체體하여 유루遺漏치 아니함이라.

 

* 귀신鬼神: ‘귀鬼’는 ‘밭 전田’자에서 아래를 향하여 두 가닥으로 잠기는 형상이요 위로는 한 가닥 풀이 돋은 형상이며[隱, 陰], ‘신神’은 좌측에 ‘보일 시示’자로 하늘이 보여줌을 나타내고 우측은 ‘밭 전田’자에 아래위로 관통해 있음을 형상함이라[費, 陽]. 귀신鬼神은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그 마음을 공경히 하고 스스로 그 뜻을 정성스럽게 살피라는 말씀인 것이라. 

 

 

 

 

 

右第十六章

 

○ 子가 曰 舜은 其大孝也與이신져, 德爲聖人이시고 尊爲天子이시고 富有四海之內하샤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순舜은 그 큰 효孝이신져, 덕德은 성인聖人이 되시고 존尊은(높음은) 천자天子가 되시고 부富는 사해四海의 내內를 두시어 종묘宗廟를 향饗하시며 자손子孫을 보保하시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공자孔子의 말씀을 이끌어 가라사대, ‘대개 어버이를 섬기는 자가 다 마땅히 효도孝道를 다할 것이나, 그러나 오직 예전 제순帝舜(순임금)이 그 효도의 분량을 극진히 다하시어 큰 효孝가 되시니 무엇으로 써 그 큰 효孝됨을 볼까? 대저 사람의 아들 된 자가 덕德이 아니면 족히 써 어버이를 나타나게 하지 못하거늘 순舜은 나서 알고 편안히 행行하여 덕德이 성인聖人이 되시니 이것이 그 덕德의 지극함이요, 귀貴가 아니면 족히 써 어버이를 높이지 못하거늘 순舜은 요堯의 선위禪位함(왕위를 물려줌)을 받아서 높음이 천자天子가 되시니 이것이 그 높음의 지극한 것이요, 부富가 아니면 족히 써 어버이를 봉양奉養치 못하거늘 순舜은 부富함이 사해四海의 안과 만방萬方의 록祿을 두시니 이것이 그 부富함의 지극함이라. 또 그 위로는 종묘宗廟에 제사祭祀를 받들어서 어버이를 위하여 근본을 갚으시고, 아래로는 자손子孫이 그 업業을 보전保全하여 어버이를 위하여 넉넉함을 전傳하시니 이것이 그 효孝가 참 인정人情의 원하고 바라는 이외에 났으니[出] 그 큼이 어떠한고?

 

 

 

 

○ 故로 大德은 必得其位하며 必得其祿하며 必得其名하며 必得其壽이니라.

 

고故로 큰 덕德은 반드시 그 위位를 얻으며 반드시 그 록祿을 얻으며 반드시 그 명名을 얻으며 반드시 그 수壽를 얻나니라.

 

【李範圭】 순舜의 덕德과 복福이 겸하여 높으니 큰 효孝가 된 바이나, 그러나 덕德은 복福의 근본이 되고 복은 덕의 증험이 되는 고로 순舜이 이 성인聖人의 큰 덕德이 있으니, 반드시 귀貴함이 천자天子가 되어 그 위位를 얻은 것이요, 반드시 부富함이 사해四海를 두어서 그 록祿을 얻은 것이요, 또 반드시 사람 사람이 칭송稱頌하여 그 이름을 얻은 것이요, 반드시 많이 해[年]를 지나서 그 수壽를 얻음이니, 사람이 본연本然한 것과 부귀當然한 것을 하면 구求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응應하는 것이니라. 

 

 

 

 

○ 故로 天之生物이 必因其材而篤焉하나니 故로 栽者를 培之하고 傾者를 覆之니라.

 

고故로 하늘의 물物을 생生함이 반드시 그 재材(바탕)를 인하여 독篤(도탑게)하나니, 고故로 재裁한(심은) 자者를 배培(기운이 불어나 번식하게)하고 경傾한(기울어진) 자者를 복覆(기운이 흩어지게)하나니라.

 

【李範圭】 덕德이 지극하면 복福이 스스로 응應하나니 대저 이것이 다 하늘 뜻의 있는 바이라. 고로 하늘의 물物을 내심[生]이 반드시 그 근본 그러한 재질材質(바탕)을 인하여 도탑게 하고 후厚하게 하는 고로 물物의 심은[裁] 자는 근본이 완전하고 굳음으로 하늘의 화육化育함을 얻어서 북돋우어주고 만일 그 물物의 기울어진[傾] 자는 근본이 먼저 흩어져서 하늘의 화육化育을 받지 못하여 엎어지는[覆] 지라. 하늘이 다만 물物을 인하여 물物에 붙은 것이요 사사私事로운 뜻이 그 사이에 있음이 아니니, 진실로 그 스스로 취取함이니라. 

 

 

 

 

○ 詩曰 嘉樂君子의 憲憲令德이 宜民宜人이라 受祿于天이어늘 保佑命之하시고 自天申之라 하니라.

 

시詩에 가로되, 가락嘉樂한 군자君子의 현顯하며(나타나며) 현顯한 령덕令德(착한 덕)이 민民(백성)에 의宜하며(마땅하며) 인人(사람)에 의宜한(마땅한) 것이라. 록祿을 하늘게 수受하거늘(받았거늘) 보保(보호)하며 우佑하야(도와서) 명命하시고 하늘로부터 신申타(거듭하다) 하니라.

 

【李範圭】 시詩를 보지 못하였느냐? 시詩에 가로되, 가히 아름답고 가히 즐거운 군자君子여, 이 나타나고 나타나는 아름다운 덕德이 있으니 이미 아래에 있는 백성에게 마땅하고 또 위位에 있는 사람에게 마땅하여 이로써 능히 록祿을 하늘에 받으니 오직 그 몸을 보호하고 그 행함을 도와서 명命하여 천자天子가 될 뿐 아니라 또 하늘로부터 거듭하여 보전하며 도와서 명命함을 마지아니하여 길이 복록福祿을 무궁함에 누리게 하시니 대덕大德을 고념顧念하는(돌보아주는) 뜻이 이와 같은지라. 순舜의 덕德은 정히 하늘로부터 거듭함[申]이니 덕德으로 써 복福을 얻음이 어찌 요행僥倖으로 이룸이리오?

 

 

* 이 시詩는 대아가락大雅假樂 편篇에 나옴.

 

 

○ 故로 大德者는 必受命이니라.

 

고故로 큰 덕德은 반드시 명命을 수受하나니라.

 

【李範圭】 하늘의 뜻으로 말미암아 보건댄, 대저 큰 덕德을 둠이 순舜과 같은 자는 반드시 하늘의 신중申重한 명命을 받아서 천자天子가 되어서 써 록祿과 위位와 이름[名]과 수壽의 온전함을 누림은 진실로 이치가 반드시 그러하여 의심이 없는 것이라. 부자夫子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보면 효孝는 떳떳한 덕德이라 그 지극함을 극진히 하면 가히 써 하늘에 감동할지니 곧 도道의 비費함(쓰임)이 큰지라 도道를 그 가히 떠나리오, 하심이니라. 

 

 

 

 

 

右第十七章

 

○ 子가 曰 無憂者는 其惟文王乎이신져. 以王季爲父하시고 以武王爲子하시니 父가 作之어시늘 子述之하시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근심 없는 이는 그 오직 문왕文王이신져. 왕계王季로써 부父(아비를) 삼으시고 무왕武王으로써 자子(아들을) 삼으시니, 부父가 작作하시거늘 자子가 술述하시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부자夫子의 말씀을 이끌어 가라사대,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창업創業하고 수성守成함이 다 마음에 부족不足한 바가 있음을 면치 못하니 이 부족한 곳이 곧 근심이라. 만일 천륜天倫의 성盛함을 만나서 가히 우려할 것이 없음은 그 오직 문왕文王이신져. 무엇으로 써 볼까? 문왕文王이 왕계王季의 어지심으로 써 아비를 삼으시고 무왕武王의 성인聖人으로 써 아들을 삼으시니, 아비는 능히 왕가王家에 부지런하여 전前에 일으키고[作] 아들은 크게 그 뜻을 이어서 후後에 꾸미시니[述] 전과 후에 다 그 사람을 얻어서 작作하고 술述함이 다 의뢰依賴한 바가 있어서 이미 창조創造하는 수고로움이 없고 다시 폐廢하고 떨어뜨리는 근심이 없으니 대저 무엇을 근심하리오?

 

 

 

 

○ 武王이 纘大王王季文王之緖하사 壹戎衣而有天下하사되 身不失天下之顯名하사 尊爲天子이시고 富有四海之內하사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무왕武王이 대왕大王과 왕계王季와 문왕文王의 서緖[業]를 이으시어 한 번 융의戎衣하사(갑옷과 투구를 입으사) 천하天下를 두시되 몸소 천하天下의 현顯한(나타난) 이름을 잃지 아니하시어 존尊은(높음은) 천자天子가 되시고 부富함은 사해四海의 내內를(안을) 두시어 종묘宗廟를 향饗하시며 자손子孫을 보保하시니라.

 

【李範圭】 술述한 자者의 일로 써 말하면 태왕太王이 비로소 임금의 자최를 터 닦고 왕계王季가 그 임금의 집을 힘쓰고 문왕文王이 천하 天下를 삼분三分하여 그 둘을 두었으니 이것이 주周 나라의 세업世業이라. 오직 무왕武王이 능히 이으시되 본래 천하를 둠을 기필期必하심은 아니러니, 그 뒤에 미쳐서 주紂의 악惡함이 하늘에 꿰이고 땅에 차거늘 마지못하여 치신 것이라, 이에 융의戎衣를 한 번 입어서 드디어 천하天下를 두시니 대저 신하로써 임금을 치는 것이 그 일이 순하지 못하고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니 마땅히 나타난 이름을 잃어버리기 쉬우나, 그러나 천하가 다 그 하늘을 응應하고 사람을 순히 하는 거조擧措(행동거지)요 천하 얻음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이 없음을 믿는지라. 고로 몸이 천하天下에 나타난 이름을 잃어버리지 아니하여 이에 후後를 변變하여 왕王이 되어서 높음이 천자天子가 되시고 나라를 화化하여 천하가 되어서 부富함이 사해四海의 안을 두시어 종묘宗廟를 향饗하시되(여시되) 七廟(일곱 사당)가 외연巍然히 높고 자손子孫이 보존保存하여 해[年]를 지냄[歷]이 바야흐로 오래니 그 술述한 일의 빛나고 큼이 이와 같으니라. 

 

 

 

 

○ 武王이 末受命이어시늘 周公이 成文武之德하사 追王大王王季하시고 上祀先公以天子之禮하시니 斯禮也가 達乎諸候大夫及士庶人하니 父爲大夫이요 子爲士이어든 葬以大夫요 祭以士하며 父爲士이요 子爲大夫이어든 葬以士이요 祭以大夫하며 期之喪은 達乎大夫하고 三年之喪은 達乎天子하니 父母之喪은 無貴賤一也이니라.

 

무왕武王이 말末에 명命을 수受하시거늘 주공周公이 문무文武의 덕德을 이루사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좇아 왕王하시고 위로 선공先公을 제사祭祀하시되 천자天子의 예禮로써 하시니, 이 예禮가 제후諸侯와 대부大夫와 및 사士와 서인庶人에게 달達하니 부父(아비)가  대부大夫되고 자子가(아들이) 사士가 되었거든 장葬하되(장사를 지내되) 대부大夫로써 하고 제祭(제사)하되 사士로써 하며 부父(아비)가 사士가 되고 자子가(아들이) 대부大夫가 되었거든 장葬하되(장사를 지내되) 사士로써 하고 제祭하되(제사를 지내되) 대부大夫로써 하며 기期의 상喪은 대부大夫에 달達하고 삼년三年의 상喪은 천자天子에 달達하니, 부모父母의 상喪은 귀貴하며 천賤함이 없이 한가지니라. 

 

 

 

 

 

右第十八章

 

○ 子가 曰 武王周公은 其達孝矣乎이신저. 

 

자子가 가라사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그 달達(통달)한 효孝이신져. 

 

 

 

 

○ 夫孝者는 善繼人之志하며 善述人之事者也이니라.

 

효孝는 사람의 뜻을 선善히 계繼하며(이으며) 사람의 일을 선善히 술述함이니라.

 

 

 

 

○ 春秋에 脩其祖廟하며 陳其宗器하며 設其裳衣하며 薦其時食이니라.

 

춘추春秋(봄과 가을)에 그 조묘祖廟를 수修하며(닦으며) 그 종기宗器를 진陳하며(베풀며) 그 상의裳衣를 설設하며(베풀며) 그 시식時食을 천薦하나니라.

 

 

 

 

○ 宗廟之禮는 所以序昭穆也이오 序爵은 所以辨貴賤也이오 序事는 所以辨賢也이오 旅酬에 下가 爲上은 所以逮賤也이오 燕毛는 所以序齒也이니라.

 

종묘宗廟의 예禮는 써 소昭와 목穆을 서序(차례)하는 바요 작爵을 서序(차례)함은 써 귀貴(귀한 이)와 천賤(천한 이)을 변辨(분변)하는 바요 사事를 서序(차례)함은 써 현賢을 변辨(분변)하는 바요 모두 수酬함에 하下(아래)가 상上을(위를) 위爲함은 써 천賤(천한 이)에 미치는 바요 연燕(잔치)에 모毛(털)로 함은 써 치齒[年齒]를 서序하는 바이니라.

 

 

 

 

○ 踐其位하야 行其禮하며 奏其樂하며 敬其所尊하며 愛其所親하며 事死如事生하며 事亡如事存이 孝之至也이니라.

 

그 위位를 천踐하야(밟아서) 그 예禮를 행行하며 그 악樂을 주奏하며(아뢰며) 그 존尊하시던(높이시던) 바를 공경하며 그 친親하시던 바를 사랑하며 죽은 이 섬김을 산 이 섬김과 같이 하며 없는 이 섬김을 있는 이 섬김과 같이 함이 효孝의 지극함이니라.

 

 

 

 

○ 郊社之禮는 所以事上帝也이오 宗廟之禮는 所以祀乎其先也이니, 明乎郊社之禮와 禘嘗之義면 治國은 其如示諸掌乎인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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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郊[하늘을 제사함]와 사社[땅을 제사함]의 예禮는 써 상제上帝를 섬기는 바요 종묘宗의 예禮는 써 그 선先을(선조를) 사祀(제사)하는 바니, 교郊와 사社의 예禮와 체褅[天子의 宗廟大祭]와 상嘗[가을 제사]의 의義에 밝으면 나라 다스림은 그 장掌(손바닥)을 봄과 같은져.

 

 

 

 

右第十九章

 

○ 哀公이 問政한대

 

애공哀公[노魯나라 임금 장蔣]이 정政을 묻자온대.

 

 

 

 

○ 子가 曰 文武之政이 布在方策하니 其人이 存則其政이 擧하고 其人이 亡則其政이 息이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문무文武의 정사政事가 방方과 책策에 포布하여(펴서) 있으니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사政事가 거擧하고(들어 행하고)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정사政事가 식息하나니라(쉬나니라, 멸滅함이라).

 

 

 

 

○ 人道는 敏政하고 地道는 敏樹하니 夫政也者는 蒲盧也이니라.

 

인人(사람)의 도道는 정사政事에 빠르고 지地(땅)의 도道는 수樹(나무)에 빠르니, 정사政事는 포로浦盧(갈대)이니라.

 

【李範圭】 땅의 도道 됨이 발發하여 생生함을 주관하니 능히 나무에 빠른지라, 지질地質이 붓고[滋] 윤택하면 곧 백가지 물건이 북돋아지고 번식繁殖할지라. 문무文武의 정사政事는 가장 아름답고 착하여 행하기 쉬움이 곧 나무 가운데에 쉽게 나오는 갈대와 같으니 사람을 얻어서 들어 행하면 그 빠름이 다시 어떠하리오?

 

 

 

 

○ 故로 爲政이 在人하니 取人以身이오 修身以道이오 修道以仁이니라.

 

고故로 정政을 함이 사람[신하]에 있으니 사람을 취取하되 몸[임금]으로써 하고 몸을 닦되 도道로써 하고 도道를 닦되 인仁[천지天地의 물物을 생生하는 마음]으로써 할지니라.

 

 

 

 

○ 仁者는 人也이니 親親이 爲大하고 義者는 宜也이니 尊賢이 爲大하니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禮所生也이니라.

 

인仁은 인人(사람)이니 친親을 친親함이 크고 의義는 의宜니(마땅함이니) 현賢을(어진 이를) 존尊함(높임)이 크니, 친親을 친親하는 쇄殺와 현賢을(어진 이를) 존尊하는(높이는) 등等이 예禮가 생生하는 바이니라.

 

* ‘인仁’은 그 큼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만한 것이 없고, ‘의義’는 그 큼이 어진 이를 높이는 것만 한 것이 없다. 

 

 

 

 

○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故로 君子가 不可以不修身이니 思修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思事親인댄 不可以不知人이오 思知人인댄 不可以不知天이니라.

 

아래 위位에 있어 위에(성현의 뜻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가히 시러금 다스리지 못하리라. 고故로 군자君子가 가可히 써 몸을 닦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니, 몸 닦음을 생각할진댄 가可히 써 어버이를 섬기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요, 어버이 섬김을 생각할진댄 가可히 써 사람을(어진 이를) 알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요, 사람 알기를 생각할진댄 가可히 써 하늘을 알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니라. 

 

* 하늘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알고 사람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어버이를 섬기니, 인仁이 친親으로부터 비롯하고 도道가 인仁으로써 행하여 몸을 닦는 일이 온전할지니라. 

 

 

 

 

○ 天下之達道가 五에 所以行之者는 三이니, 曰 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也五者는 天下之達道也이오 知仁勇三者는 天下之達德也이니 所以行之者는 一也이니라.

 

천하天下의 달達한 도道가 다섯에 써 행行하는 바의 자者는 셋이니, 가로되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와 부부夫婦와 곤제昆弟와 붕우朋友의 교交함(사귀는) 다섯 가지는 천하天下의 달達한 도道이요, 지知와 인仁과 용勇 셋은 천하天下엣 달達한 덕德이니, 써 행行하는 바의 자者는 일一이니라.

 

【李範圭】 시험하여 모든 몸 닦는 일을 들어서 자세히 말하면 몸(자신)을 닦음이 진실로 도道로써 함에 있으나, 그러나 도道라는 것이 한끝[一端]이 아니라 천하가 한 가지로 말미암는 바의 달達한 도道가 대개 다섯이 있고 도道를 닦음이 진실로 인仁으로 써 함에 있으나, 그러나 또한 인仁에 그치지 아니하니 이 달達한 도道를 행行하는 자가 세 가지가 있는지라. 

 

다섯 가지라 함은 무엇인가? 가로되 조정朝庭에는 군신君臣이요 집에는 부자父子와 부부夫婦와 곤제昆弟요 바깥에는 붕우朋友의 사귐이라. 이 다섯은 사람의 큰 윤기倫紀이니 예와 이제에 한가지로 말미암는 것이라. 이에 천하天下의 달達한 도道이니 써 몸을(자기를) 닦는 바이요, 세 가지는 무엇인고? 마음의 밝은 슬기[睿]가 써 이 도道를 아는 것이 ‘지知’가 되고, 마음의 지극히 공변됨이 써 이 도道를 몸 받음이 ‘인仁’이 되며, 마음의 강건剛健함이 써 이 도道를 힘씀이 ‘용勇’이 되니, 이 세 가지는 하늘이 명命한 성性이요 사람이 같이 얻은 바이라. 이에 천하고금天下古今의 한가지로 있는 달達한 덕德이니 써 도道를 닦는 것이라. 

 

그러나 요要하건댄 세 가지 달達한 덕德이 써 다섯 가지 달達한 도道에 행行함은 곧 하나일 따름이라 이치가 다만 한 ‘성실誠實’함이니 사사私事로운 욕심이 사이하지 못하여, 아는 것이 이 실상實相 아는 것이라 도道를 이로부터 알고 인仁이 이 실상實相 인仁이라 도道를 이로부터 몸 받고 용勇이 이 실상實相 용勇이라 도道가 이로부터 강强할지니, 한갓 삼달덕三達德과 오달도五達道의 그 이름뿐이 되지 아니 하나니라. 

 

 

 

 

○ 或生而知之하며 或學而知之하며 或困而知之하나니 及其知之하야서는 一也이니라. 或安而行之하며 或利而行之하며 或勉强而行之하나니 及其成功하야서는 一也이니라.

 

혹或 생生하야 지知하며(나면서 알며) 혹或 학學하야 지知하며(배워서 알며) 혹或 곤困하야 지知하나니(괴로이 겪어 아나니), 그 지知함에(아는 데에) 미쳐서는 한가지니라. 혹或 안安하야(편안히) 행行하고 혹或 리利하야 행行하며 혹或 면강勉强하야(힘써) 행行하나니 그 공功을 이룸에 미쳐서는 한가지니라.

 

【李範圭】 달達한 덕德이 진실로 써 달達한 도道를 행하는 것이나 그러나 사람의 기품氣稟이 또한 같지 아니한 자가 있으니, 지知로 써 말하면 혹 자품資稟이 지극히 밝음을 잡아서 연구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나서 이 도道를 아는 자가 있으며, 혹 맑음이 많으나 능히 가리움이 없지 못하여 반드시 강습講習하고 토론討論함을 기다려서 배운 뒤에 이 도道를 아는 자가 있으며, 또 어둡고 가리어서 맑지 못하여 나서 밝지 못하고 배움에 달하지 못하여 반드시 마음에 곤困하고 생각에 빗겨서 반복하여 찾은 뒤에 이 도道를 아는 자가 있나니, 처음 알 때에는 그 일이 비록 다르나 그 의리義理가 꿰어 통通한 뒤에 미쳐서는 다 이 달達한 도道를 아는 것이 한가지요, 

 

행行함으로 써 말하면 혹 천부天賦의 바탕이 순수純粹하여 힘씀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편안히 이 도道를 행하는 자가 있으며, 혹 순수함이 많으나 능히 잡됨이 없지 못하여 마음이 그 이利로움을 알고 오로지 즐기고 독실篤實히 좋아하여 반드시 이 도道를 행하는 자가 있으며, 또 혹 박잡駁雜하고 수연粹然치 못하여 편안한 바를 얻지 못하고 그 이로움을 알지 못하여 반드시 힘써 바로잡은 뒤에 이 도道를 행하는 자가 있으니, 공功을 쓰는 처음에는 그 일이 비록 다르나 그 공력功力이 성취成就된 뒤에 미쳐서는 능히 이 달達한 도道를 행함은 한가지라 지知하고 행行함이 마침내 하나에 돌아가나니, 이것이 써 천하天下의 달達한 덕德이 되는 바이요 천하의 달한 덕이 되어서 이 달達한 도道를 행하는 바이니라. 

 

* 아는 자의 아는 바와 행行하는 자의 행行하는 바를 이르되 달도達道이니, 그 분수로 써 말하면 써 아는 바는 ‘지知’요 써 행行하는 바는 ‘인仁’이요 써 알아서 성공成功하여 한가지가 되는 바는 ‘용勇’이요, 그 등급等級으로 써 말한즉 생지生知와 안행安行은 ‘지知’요 학지學知와 리행利行은 ‘인仁’이요 곤지困知와 면행勉行은 ‘용勇’이니라. 

 

 

 

 

○ 子曰 好學은 近乎知하고 力行은 近乎仁하고 知恥는 近乎勇이니라.

 

학學을(배우기를) 좋이 여김은 ‘지知’에 가깝고, 힘써 행行함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까우니라. 

 

【李範圭】 달達한 도道의 행行함이 진실로 같으나 달達한 덕德은 혹 기운에 거리끼나니 덕德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가 어찌 할까? 대저 지知가 반드시 상지上智요 인仁이 반드시 지극한 인仁이요 용勇이 반드시 큰 용勇인 연후에 지극함이 될지니 어찌 거연遽然히(갑자기) 미칠 것이리오? 그러나 배우기를 좋아함은 이치를 밝히는 바이니 진실로 능히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리지 아니한즉 듣고 보는 것이 날로 넓을 것이요 밝고 깨달음이 날로 열릴지니 비록 전연全然히 이 지知는 아니나 또한 지知에 가까워서 가히 점점 지知에 나아갈 것이요, 힘써 행行함은 도道에 나아가는 바이니 진실로 힘써 행하여 마지아니한즉 몸(자기)의 사사私事는 점점 버리고 하늘 이치는 점점 회복回復될지니 비록 전연全然히 이 인仁은 아니나 또한 인仁에 가까워서 가히 점점 인仁에 나아갈 것이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뜻을 세우는 바이니 진실로 능히 사람과 같이 못함으로 써 부끄러워한즉 떨쳐 일어나는[奮] 뜻이 날로 생겨나고 겁내고 약함이 날로 없어질지니 비록 전연全然히 이 용勇은 아니나 또한 용勇에 가까워서 가히 점점 용勇에 나갈지니 이 곤困하고(괴로움을 겪어나가며) 힘써서 덕德에 들어감을 구하는 일이니라. 

 

 

 

 

○ 知斯三者則知所以修身이오 知所以修身則知所以治人이오 知所以治人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리라.

 

이 셋을 알면 써 몸 닦을 바를 알고 써 몸 닦을 바를 알면 써 사람 다스릴 바를 알고 써 사람 다스릴 바를 알면 써 천하국가天下國家를 다스릴 바를 알리라. 

 

【李範圭】 배우기를 좋아하며[知] 힘써 행하며[仁] 부끄러움을 아는[勇] 세 가지는 이에 몸(自身, 자신)을 닦는 종용從容한 도道이라. 군자君子가 진실로 이 세 가지를 알면 배움을 좋아함으로 말미암아 써 지知에 가까워서 몸(자신)을 닦음이 끝이 열릴 것이요, 힘써 행함으로 말미암아 써 인仁에 가까워서 몸을 닦는 실상이 될 것이요, 부끄러움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용勇에 가까워서 지知하고 행行함이 아울러 지극하여 몸(자신)을 닦지 아니함이 없음을 알지라. 이미 몸(자신) 닦는 바를 알면 사람과 내가 이 몸이 같으니 곧 이 이치가 같은지라 스스로 써 사람 다스릴 바를 알 것이요, 이미 사람 다스리는 바를 알면 천하天下와 국가國家가 다 이 사람이니 곧 다 이 몸이라 스스로 천하국가天下國家를 다스릴 바를 알지니, 대개 알기를 이미 밝게 하면 처處함이 스스로 마땅하여 다 몸을 닦음에 바깥하지 아니하니, 몸(자신)을 닦음이 진실로 정사를 하는 근본이 되나니라. 

 

 

 

 

○ 凡爲天下國가 家有九經하니 曰 修身也와 尊賢也와 親親也와 敬大臣也와 體群臣也와 子庶民也와 來百工也와 柔遠人也와 懷諸候也이니라.

 

무릇 천하국가天下國家를 함이 아홉 경經[떳떳함]이 있나나, 가로되 몸을 닦음과 현賢을(어진 이를) 존尊함(높임)과 친親한 이를 친親함과 대신大臣을 공경함과 군신群臣을 체體함[자신이 처한 곳에서 그 마음을 살핌]과 서민庶民을 자子함[부모가 자식 사랑함과 같음]과 백공百工을 오게 함과 원인遠人을 유柔함[손님과 나그네를 잊지 아니함과 같음]과 제후諸侯를 회懷케 함이니라.

 

 

 

 

○ 修身則道立하고 尊賢則不惑하고 親親則諸父昆弟가 不怨하고 敬大臣則不眩하고 體群臣則士之報禮가 重하고 子庶民則百姓이 勸하고 來百工則財用이 足하고 柔遠人則四方이 歸之하고 懷諸侯則天下畏之니라.

 

몸을 닦으면 도道가 서고 현賢을(어진 이를) 존尊하면(높이면) 의혹疑惑치 아니하고 친親한 이를 친親하면 제부諸父와 곤제昆弟가 원怨치(원망하지) 아니하고 대신大臣을 공경하면 현란眩亂치(일에 희미하지) 아니하고 군신群臣을 체體하면 사士의 예禮를 보報함(갚음)이 중重하고 서민庶民을 자子하면(자식같이 여기면) 백성百姓이 권勸하고 백공百工을 오게 하면 재용財用이 족足하고 원인遠人을 유柔하면 사방四方이 귀歸하고(돌아오고) 제후諸侯를 회懷케 하면(품으면) 천하天下가 외畏(두려워)하나니라. 

 

 

 

 

○ 齊明盛服하야 非禮不動은 所以修身也이오 去讒遠色하며 賤貨而貴德은 所以勸賢也이오 尊其位하며 重其祿하며 同其好惡는 所以勸親親也이오 官盛任使는 所以勸大臣也이오 忠信重祿은 所以勸士也이오 時使薄斂은 所以勸百姓也이오 日省月試하야 旣稟稱事는 所以勸百工也이오 送往迎來하며 嘉善而矜不能은 所以柔遠人也이오 繼絶世하며 擧廢國하며 治亂持危하며 朝聘以時하며 厚往而薄來는 所以懷諸侯也이니라.

 

재齋(재계)하며 명明(밝게)하며 복服(옷)을 성盛히 하야 예禮가 아니어든 동動치 아니함은 써 몸을 닦는 바요, 참讒을(참소를) 거去하고(버리고) 색色을 멀리하며 화貨를(재물을) 천賤히 여기고 덕德을 귀貴히 여김은 써 현賢(어짐)을 권勸하는 바요, 그 위位를 존尊히 하며(높이며) 그 록祿을 중重히 하며 그 호好(좋아)하며 오惡(미워)함을 한가지로 함은 써 친親을 친親함을 권勸하는 바요, 관官(벼슬)을 성盛히 하여 사使를(부림을) 임任케(맡게) 함은 써 대신大臣을 권勸하는 바요, 충신忠信으로(충성과 믿음으로) 하고 록祿을 중重히 함은 써 사士를 권勸하는 바요, 시時(때)로 부리며 박薄히 렴斂함(거둠)은 써 백성百姓을 권勸하는 바요, 날로 성省하며(살피며) 달로 시試하야(시험하여) ‘희旣와 름廩(녹봉으로 받는 쌀)’을 일에 맞게 함은 써 백공百工을 권勸하는 바요, 가는 이를 보내고 오는 이를 맞으며 어진 이를 아름다이 여기고 능能치 못한 이를 어여삐 여김은 써 원인遠人(먼 데 사람)을 유柔(부드럽게)하는 바요, 끊어진 세世를 이으며 폐廢한 나라를 거擧하며(들며) 난亂(어지러움)을 치治하고(다스리고) 위危를(위태함을) 지持하며(가지며), 조朝와 빙聘을 때로써 하며 왕往(가는 것)을 후厚히 하고 래來를(오는 것을) 박薄히 함은 써 제후諸侯를 회懷하는 바이니라. 

 

 

 

 

○ 凡爲天下國家가 有九經하니 所以行之者는 一也이니라.

 

무릇 천하天下와 국가國家를 함이 아홉 경經이 있으니 써 행行하는 바는 일一(하나, 誠實)이니라.

 

【李範圭】 대저 천하국가天下國家를 다스림이 구경九經이 있어서 그 조목과 그 사실과 그 효험이 이와 같이 자세하나, 써 이 구경九經을 행하는 바는 한 ‘성誠’이라 다 진실한 뜻으로 써 함이오 한갓 허문虛文이 아니니 이것이 구경九經의 실상實相이니라. 

 

 

 

 

○ 凡事가 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나니 言前定則不跲하고 事前定則不困하고 行前定則不疚하고 道前定則不窮이니라.

 

무릇 일이 예豫하면(미리하면) 립立하고(서고) 예豫하지 아니하면 폐廢하나니, 말씀이 전前에 정定하였으면 겁跲하지(쓰러지지) 아니하고 일이 전前에 정定하였으면 곤困하지 아니하고 행行이 전前에 정定하였으면 구疚하지(병되지) 아니하고 도道가 전前에 정定하였으면 궁窮하지 아니하나니라. 

 

* 跲: 竝足難行, 두 발을 나란히 하여 걷기 어렵다.

 

 

 

 

○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獲乎上이 有道하니 不信乎朋友이면 不獲乎上矣리라. 信乎朋友가 有道하니 不順乎親이면 不信乎朋友矣리라. 順乎親이 有道하니 反諸身不誠이면 不順乎親矣리라. 誠身이 有道하니 不明乎善이면 不誠乎身矣리라.

 

아래의 위位에 있어 위에 획獲하지(얻지) 못하면 민民(백성)을 가可히 시러금 다스리지 못하리라. 위에 획獲함(얻음)이 도道가 있으니 붕우朋友에 미쁘지 못하면 위에 획獲하지(얻지) 못하리라. 붕우朋友에 미쁨이 도道가 있으니 어버이께 순順하지 못하면 붕우朋友에 미쁘지 못하리라. 어버이께 순順함이 도道가 있으니 몸(자신)에 반反하여(돌이켜서) 성誠하지(성실치) 못하면 어버이께 순順하지 못하리라. 몸을 성誠(성실히)함이 도道가 있으니 선善(착함)에 밝지 못하면 몸을 성誠하지 못하리라. 

 

 

 

 

○ 誠者는 天之道也이오 誠之者는 人之道也이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이오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이니라.

 

‘성誠’이라 함은 천天(하늘)의 도道요 ‘성誠하여 오는 것’은 인人(사람)의 도道이니, ‘성誠’이라 함은 힘쓰지 아니하여서 중中하며(들어맞으며) 생각지 아니하여서 득得하여(얻어서) 종용從容히 도道에 중中하나니(들어맞나니) 성인聖人이오, ‘성誠하여 오는 것’은 선善을 가려서 굳게 집執하는(잡는) 것이니라.

 

【李範圭】 그러나 그 반드시 먼저 성誠을 세운다 함은 무엇인고? 그 천리天理에 나서 인사人事에 간절懇切한 것이라. 대저 사람이란 처음에 이 이치가 몸으로 더불어 같이 와서 근본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眞實無妄]이 이른바 성誠이라. 이 성誠이란 것은 이에 천도天道의 근본 그러한[本然한] 것이요 닦아서 함을 기다리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하늘 이치가 비록 성誠치 아니함이 없으나 사람의 마음이 기품氣稟(기질과 성품)과 물욕物欲의 누累가 되어 혹 성誠치 못함이 있는지라, 이에 그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어서 그 근본 그러한[本然한] 처음을 회복回復하고자 함이 이른바 성誠 하는 것이라. 이 성誠하여 오는 것은 인도人道의 당연當然한 것이니 공功을 마땅히 스스로 다할 것이라. 

 

오직 능히 천도天道의 성誠을 온전히 한 자는 그 ‘행함[行]’인즉 편히 행行함이니 도道에 힘씀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맞지[中] 아니함이 없음이요 그 ‘앎[知]’인즉 나서 앎이니 생각하여 찾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도道에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으니 이것은 이에 종용從容히 도道에 합合하는 성인聖人이라 성인聖人이 본래 성誠치 않음이 없어서 하늘로 더불어 하나가 됨이니 곧 또한 하늘의 도道[天道]이요, 만일 성誠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의 도道를 다하여 써 성誠하여 오는 자는 그 아는 것인즉 능히 생각지 아니하면 얻지 못하므로 반드시 모든 이치를 가려서[擇] 착함을 밝히고 그 행함인즉 능히 힘쓰지 아니하면 맞지 아니함으로 반드시 얻은바 착함에 굳게 지켜서 진실무망眞實無妄함에 이름을 구한 후에 마는지라 이것이 힘을 쓰고 닦아서 사람의 일을 다 하여서 하늘 이치에 합함이니 이른바 사람의 도道[人道]이니라.  

 

* 「擇善而固執」, ‘선善’을 택擇하여 잡음을 굳게[固執] 한다: ‘선善’은 곧 주경主敬이요 존성存誠이니, 그 방법은 이른바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의 ‘택선擇善(선을 택함)’과 독행지篤行之의 ‘고집固執(잡음을 굳게 함)’이라.  

 

 

 

 

○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辨之하며 篤行之니라. 

 

널리 배우며 살펴 물으며 삼가 생각하여 밝히 분변分辨하며 도탑게 행行할지니라. 

 

 

 

 

 

○ 有弗學이언정 學之인댄 弗能을 弗措也하며 有弗問이언정 問之인댄 弗知를 弗措也하며 有弗思이언정 思之인댄 弗得을 弗措也하며 有弗辨이언정 辨之인댄 弗明을 弗措也하며 有弗行이언정 行之인댄 弗篤을 弗措也하며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니라.

 

배우지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能치 못한 것을 조措하지(놓지, 그만두지) 아니하며, 묻지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한 것을 조措하지(놓지) 아니하며, 생각지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득得하지 못한 것을 조措하지(놓지) 아니하며, 분변分辨치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밝지 못한 것을 조措하지(놓지) 아니하며 행行하지 아니함이 있을지언정 행行할진댄 도탑지 못한 이를 조措하지(놓지) 아니하야, 인人(남)은 한 번에 능能히 하거든 기己는(자신은) 백百을 하며 인人(남)은 열 번에 능能히 하거든 기己는(자신은) 천千을 할지니라. 

 

【李範圭】 곤困히(수고로이) 알고 힘써 행行하는 자에 이르러서는 그 가려서[擇] 잡는[執] 공功이 또 어떠한고? 배우지 아니함이 있은즉[天性之道]은 말려니와 배울진댄[修道之敎] 반드시 힘을 극진히 하여 몸 받아 생각하여 그 능能하기를 구求할지니 만일 하나라도 능能치 못함이 있으면 이 마음을 정定히(반드시) 놓지 아니하며[博學], 묻지 아니함이 있은즉은 말려니와 물을진댄 반드시 반복反覆하고 질정質正하여 그 알기를 구할지니 만일 하나라도 알지 못함이 있으면 이 마음을 정定히 놓지 아니하며[審問], 생각하지 아니함이 있은즉은 말려니와 생각할진댄 반드시 융회融會(자세히 앎)하고 관통貫通하여 얻음에 이른 뒤에야 말지니 만일 하나라도 얻지 못함이 있으면 이 마음을 정定히 놓지 아니하며[愼思], 분변分辨하지 아니함이 있은즉은 말려니와 분변定할진댄 반드시 기미機微를(기틀의 미세함을) 분석分析하여 밝음에 이른 뒤에야 말지니 만일 하나라도 밝지 아니함이 있으면 이 마음을 정定히 놓지 아니하며[明辨], 행行하지 아니함이 있은즉은 말려니와 행行할진댄 반드시 독실篤實함을 구하여 능히 그 이치를 밟은 뒤에야 말지니 만일 하나라도 도탑지 아니함이 있으면 이 마음을 정定히 놓지 아니할지니[篤行], 오직 이 놓지 아니하는[弗措, 固執] 마음을 둔지라. 

 

고故로 배워 알고 이롭게 행하는 사람이 가리고 잡는데 일배一倍의 공부로 써 능히 하거든 나는 곧 그 공功을 백배百倍가 되게 하고, 배워 알고 이롭게 행하는 사람이 가리고 잡는데 십배十倍의 공부로 써 능히 하거든 나는 곧 그 공功을 천배千倍가 되게 할지니, 이것이 곤困히 알고 힘써 행하는 일이라. 이른바 미리 성誠에 정定한 자가 그 공功을 마땅히 이와 같이 할지니라. 

 

* 弗措: 놓지 말라. 그만두지 말라.

 

 

 

 

○ 果能此道矣면 雖愚이나 必明하며 雖柔이나 必强이니라.

 

과果연히 이 도道를 능能히 하면 비록 우愚하나(어리석으나) 반드시 명明하며(밝으며) 비록 유柔하나 반드시 강强하나니라.

 

* ‘명明’은 택선擇善의 공功이요, ‘강强’은 고집固執의 효험效驗이라.

 

 

 

 

 

右第二十章

 

○ 自誠明을 謂之性이오 自明誠을 謂之敎이니 誠則明矣오 明則誠矣니라.

 

성誠으로 말미암아 명明함(천성天性의 성誠으로부터 명明에 이름)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明으로 말미암아 성誠함(명明으로부터 천성天性의 성誠에 이름)을 교敎라 이르나니, 성誠하면 명明하고 명明하면 성誠하나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윗글을 이어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겸兼하여 말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부자夫子의 성誠한 것과 성誠하여 오는 것의 나눔을 인하여 성性과 교敎를 알았노라. 그 안에 얻은 바의 실리實理를 온전히 하여 밝은 지혜智慧가 비추는 바에 자연自然히 가리움[蔽]이 없는 것을 말미암아서 말하면 곧 성性이라 이르나니, 대개 ‘성誠하여 명明함’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힘쓰지 아니하여 하늘의 부여賦與하신 것을 온전히 하여 천성天性으로 둔 바이니 하늘의 도[天道]이오, 그 궁리窮理하고 치지致知하여 그 사사私事욕심을 버려서 그 얻은 바의 실리實理를 회복[復]하여 온전히 한 것을 말미암아서 말하면 곧 교敎라 이르나니, 대개 ‘밝아서[明] 성誠한’ 것은 착한 것을 가려[擇] 굳게 잡아서 몸(자신)의 배워 익힘을 이룬 것이라 교敎로 말미암아 들어간 것이니 사람의 도[人道]이라. 

 

대저 가로되 ‘성性’이라 하고 ‘교敎’라 함이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비록 다르나 그 귀숙歸宿함인즉은 하나이라. ‘성誠하여 밝은[明]’ 것은 성誠을 말미암은 뒤에 밝음[明]에 이름이 아니라 성誠이 곧 밝은[明] 것이요, ‘명明하여 성誠한’ 것은 오히려 밝음[明]으로 말미암은 뒤에 성誠함에 이르는 것이나 그러나 밝은즉 또한 성誠할 것이라. 성誠이 밝지 아니함이 없음은 하늘이 진실로 사람에게 기다림이 없음이요 명明하여 가히 성誠함에 이름은 사람이 어찌 마침내 하늘과 다르리오? 이러하므로 군자君子는 스스로 힘씀을 귀貴히 여기나니라.

 

* 「천도지도天道之道[頓悟]」 - 성誠으로부터 명明에 이름. 「수도지교修道之敎[漸修]」 – 명明으로부터 성誠에 이름.

 

* ‘천성天性의 성誠’은 천명지성天命之性인 성덕본유性德本有의 묘명妙用으로서 본각本覺의 영명靈明한 근본지根本智요, ‘지극한 성[至誠]’은 자성自性을 시각始覺한 이후 자성에 의지하여 닦음을 일으켜서 모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갖가지 차별差別의 작용作用을 명오明悟한 것으로 시각始覺이후의 차별지差別智이다.  - 南懷瑾.

 

 

 

 

 

右第二十一章

 

○ 惟天下至誠이라야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이오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오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오직 천하天下의 지극한 성誠이라야 능能히 그 성性을 진盡(다)하나니, 능能히 그 성性을 진盡(다)하면 능能히 인人(사람)의 성性을 진盡(다)하고, 능能히 인人(사람)의 성性을 진盡(다)하면 능能히 물物의 성性을 진盡(다)하고, 능能히 물物의 성性을 진盡(다)하면 가可히 써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찬贊하고(돕고), 가可히 써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찬贊하면(도우면) 가可히 써 천지天地로 더불어 참參하나니라(천지인天地人의 셋이 되느니라, 참여參與하여 찬贊할 수 있느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성誠으로부터 명明한(밝은)’ 것으로써 말씀하여 가라사대, 하늘이 명命한 성性은 본디 진실眞實하고 망령됨이 없으니 오직 성인聖人의 마음이 진실무망眞實無妄 함이 지극하여 천하天下가 능히 더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천하天下의 지성至誠이라 본연本然한 성性에 능能함이 되나니 나서[生] 알고 편안히 행行하여 한 이치의 다 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그러나 이 성性이란 것은 인人과 물物을 거느리고 천天과 지地에 근원根源한 것이라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또한 나의 성性이니, 그 성性에 능能히 하여 살피고 말미암아서 다 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사람의 성性에 능能히 함이라 아는 것이 밝지 아니함이 없고 처處함에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천天下의 지智와 우愚와 현賢과 불초不肖한 이를 합하여 하여금 각각 그 성性의 근본 그러한 것을 회복[復]하여 사람의 성性을 다하게 하니, 사람의 성性을 다하면 물物의 성性에 능히 다 할지라 아는 것이 밝지 아니함이 없고 처處함에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천하天下의 날고[飛] 잠기고[潛] 움직이고[動] 심은[植] 것을 합하여 하여금 각각 그 성性의 자연自然함을 이루게 하여 물物의 성性을 다할지니, 대저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곧 천지天地의 화육化育함이라. 

 

천지天地가 능히 인人과 물物을 생生하되 능히 하여금 각각 그 성性을 다하게 못함은 곧 이 화육化育함이 미치지 못한 곳이 있음이라, 지성至誠이 그 성性을 다 하여 써 사람의 성性을 다하고 능히 물物의 성性을 다함에 이르러서 천지天地의 공용功用으로 하여금 일일一一이 두루하고 펴서 유감遺憾이 없게 하면 마루(어떤 사물의 첫째, 또는 어떤 일의 기준)를 재裁서 이루고[成] 돕고[輔] 도와서[相] 가히 써 천지天地의 화육化育함을 찬조贊助(도울, 參)할 것이니, 이미 가히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우면 하늘은 위에 위位하여서 물物을 덥고 땅은 아래에 위位하여서 물物을 싣고[載] 지성至誠은 가운데에 위位하여서 물物을 이루어서 곧 가히 더불어 천지에 참여[參]하여 셋이 되리니, 가히 하나라도 없지 못할 것이라. 지성至誠이 성誠을 다 하는 공용功用이 그 큰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천도天道이니라. 

 

 

 

 

 

右第二十二章

 

○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이니, 唯天下至誠이라야 爲能化이니라.

 

그 다음은 곡曲으로(작디 작은 일로, 자세함으로) 치致하나니(이르나니) 곡曲하면(자세하면) 능能히 성誠함이 있나니, 성誠하면 형形하고, 형形하면 저著하고(나타나고), 저著하면(나타나면) 명明하고(밝고), 명明하면(밝으면) 동動하고, 동動하면 변變하고, 변變하면 화化하나니, 오직 천하天下의 지극한 성誠[至誠]이라야 능能히 화化하나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명明으로부터 성誠함’을 말씀하여 가라사대, 지至극한 성誠이 성性을 다하면 전체全體가 다 보여서 진실로 능히 사람과 물物의 성性을 다하여 참여[參]하여 돕는 공功을 거둘지라. 그 대현이하大賢以下 지성至誠에 다음한 자는 기품氣稟의 거리낀 바가 됨을 면免치 못하여 착한 끝이 한편을 지어서 온전하지 못하면 곧 이르되 곡曲이니, 만일 사람의 기질氣質이 온후溫厚하면 발發하여 보임이 많이 인仁하고 기질氣質이 강剛하고 굳세면[毅] 발發하여 보임이 많이 의義하니, 오직 그 착한 끝이 발發하고 보이는 곳을 따라서 가려잡는 공功으로 써 더[加]하여 일일一一이 미루어 이루어서 각각 극진極盡한 데에 나가기를 요要구함이 이것이 곡曲을 이룸이니, 곡曲이 이루지 아니함이 없으면 덕德이 실實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이치의 내게 갖춘 것이 한 사사私事도 섞이지 아니하여 능히 그 전체全體의 성誠을 두어서 곡曲에만 그치지 아니할 것이요, 성誠이 능히 완전히 이루어서 흠궐欠闕함이 없으면 그 전체대용全體大用에 드러나서 가운데로 말미암아 밖에 달하여 형形상할 것이요, 형상한즉 적은 것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서 나타날 것이요, 나타난즉 발월發越하고 광휘光輝하여 명明할지니, 성誠이 몸에 성盛한 것이 이 같은지라. 

 

이 한 몸의 밝음을 말미암아 만물萬物에 미치면 감동感動함이 있어서 그 착함을 하고 악惡함을 버리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요, 동動한즉 악惡함을 버리고 착함[善]에 옮겨서 그 구습舊習을 변變할 것이요, 이미 변變한즉 착함에 옮기고 악함을 버리되 누가 한 줄을 알지 못하리니, 대개 스스로 알지 못함에 화化함이라. 성誠이 물物에 성盛한 것이 이 같으니 화化함에 이르면 실리實理가 융액融液하여 물들임을 씻는 공功이 깊을지니 화化는 참 쉽게 능히 못할 것이요 오직 천하天下의 지성至誠이라야 몸에 있는 덕德이 존신存神함에 극진極盡하여 물物에 미치는 공功이 능能히 화化함에 이를지니, 이제가 곡曲을 치致함에 능히 성誠이 있는 것이 쌓여서 능히 화化함에 이르면 지성至誠의 묘妙함이 성인聖人에 다름이 없으리니 어찌 시러금 그 다음으로써 이름하리오? 이것은 인도人道로 써 천도天道에 합合한 것이니라. 

 

* 치致는 미루어 이름이오, 곡曲은 한편을 짐이오, 명明은 광휘光輝에 발월發越하는 성盛함이 있음이오, 동動은 성誠이 능히 물物을 동動함이오, 변變은 물物이 좇아 변變함이오 화化는 써 그것이 그러한 바를 알지 못함이 있음이라. 

 

* 치곡致曲: 발현된 한쪽(한편)의 선善한 단서를 미루어 넓혀나가 지극至極히 하는 것.

 

「致至也 曲猶小小之事也」: ‘치致’는 이름이요, ‘곡曲’은 작디작은(자세한) 일과 같음이라. - 鄭玄

 

「곡성만물이불유曲成萬物而不遺」: ‘곡曲’은 만물을 이루되 빠뜨리지 아니한다. - [繫辭] 上傳

 

 

 

 

 

右第二十三章

 

○ 至誠之道는 可以前知니 國家將興에 必有禎祥하며 國家將亡에 必有妖孼하야 見乎蓍龜하며 動乎四體라 禍福將至에 善을 必先知之하며 不善을 必先知之니 故로 至誠은 如神이니라.

 

지성至誠의 도道는 가可히 써 전前에 아나니 국가國家가 장차 흥興함에 반드시 정상禎祥(복福의 조짐)이 있으며 국가國家가 장차 망亡함에 반드시 요얼妖孼(화禍의 싹)이 있어 시蓍[筮]와 귀龜[卜]에 현見하며(보이며) 사체四體(動作威儀)에 동動하는지라 화禍이며 복福이 장차 이름에 선善을 반드시 먼저 알며 불선不善을 반드시 먼저 아나니, 고故로 지극한 성誠은 신神같으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이르사대, 일이 천하天下에 있음이 진실로 먼저 보이는 기미幾微가 있고 이치가 사람에 있음이 혹 사사私事와 거짓[僞]함에 가리움이 있나니, 오직 지성至誠한 사람은 하늘 이치가 혼연渾然하여 한 터럭 끝의 사사私事와 거짓이 없는지라. 고로 그 마음이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신령神靈하여 다만 이미 그러한 것만 볼 뿐이 아니라 또 능히 장차 그러할 것을 보아서 그 도道가 가히 써 전지前知가 되나, 그러나 써 전지前知하는 바는 지해知解와 꾀의 사사私事를 빎이 아니라 요要하건대 한 이치에 바깥하지(벗어나지) 아니함이니, 국가國家가 장차 흥興함에 화和한 기운이 상서祥瑞를 이루어서 반드시 정상禎祥이 때를 먼저 하여 남이 있고 국가가 장차 망亡함에 어기어진 기운이 이상異常함을 이루어서 반드시 요얼妖孽이 틈을 먼저 하여 지음이 있나니, 다만 이 뿐이 아니라 멀리 물物에 취取하면 변화變化가 시蓍와 귀龜에 보여서 길吉함도 있고 흉凶함도 있으며 가까이 몸에 취하면 운위云爲가 사체四體에 동動하여 얻음[得]도 있고 잃음[失]도 있나니, 그 정상禎祥의 길함과 얻음은 다 복福이 장차 이름에 이치의 먼저 보이는 것이요 그 요얼妖孽에 흉함과 잃음은 다 화禍가 장차 이름에 이치의 먼저 보이는 것이라. 

 

지성至誠은 맑고 밝음이 몸에 있어서 복福이 장차 이르러서 착한 것이 됨에 반드시 일을 먼저 하여 써 앎이 있고 화禍가 장차 이르러서 착하지 아니한 것이 됨에 또한 반드시 일을 먼저 하여 써 앎이 있나니, 착하고 착하지 아니함이 이미 이름을 기다린 뒤에 아는 것이 아니라. 대저 귀신鬼神은 능히 화복禍福의 기틀을 운전運轉하고 지성至誠은 능히 화복禍福의 기미幾微를 아나니 은미隱微함을 현저顯著한데 밝힘은 귀신[神]이요 현저顯著함을 은미隱微한데 아는 것은 지성至誠이라 진실로 유명幽明을 통通하여 한 도道가 되고 하늘과 사람을 합合하여 한 이치가 되는 것이 있는지라. 고故로 지성至誠은 그 귀신[神]과 같은져. 이것이 성誠으로부터 명明한(밝은) 일이니 하늘의 도[天道]이니라. 

 

 

 

 

 

右第二十四章

 

○ 誠者는 自成也이오 而道는 自道也이니라.

 

성誠은 스스로 성成하는(이루는) 것이오 도道는 스스로 도道할 것이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이르사대, 성誠이란 것은 하늘이 명命한 성性이 형形상과 바탕 가운데 주재主宰하니 이는 모든 물物이 다 얻어서 써 스스로 이루는 것이니 원래原來 이지러지고 부족不足함이 없는 것이요, 성性을 좇는 도道는 인륜일용人倫日用 사이에 보임이니 이는 사람의 마땅히 스스로 행行할 바이니 하는 것이 온전히 사람에 있는 것이니라. 

 

 

 

 

○ 誠者는 物之終始니 不誠이면 無物이니 是故로 君子는 誠之爲貴니라.

 

성誠은 물物의 종終(마침)이며 시始(비롯함)이니 성誠치 아니하면 물物이 없나니, 이런 고故로 군자君子는 성誠함을 귀貴히 여기나니라.

 

【李範圭】 무엇으로써 성誠은 스스로 이룸이 되며 도道는 스스로 도道가 됨을 볼까? 대개 성誠이란 것은 물物의 마침이며 비롯함이니, 한 물物이 있으니 그 통通함이 반드시 비로소 하는 바가 있으니 실상이치의 비롯함이 있는 데로 향向함이요 그 돌아감에 반드시 마치는 바가 있으니 실상 이치의 다함이 없는 데로 향함이라. 머리로부터 꼬리까지 도무지 이 실상이치의 하는 바이니 물物이 진실로 능히 성誠을 바깥하고(벗어나서) 스스로 이루지 못하거니와 써 체體하는 것이 그 책임이 더욱 사람에게 있으니, 무릇 사람이 일[事]을 지음에 머리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이 한낱 성실[誠]한 마음이라야 바야흐로 이 일이 있을 것이요 만일 성실한 마음이 간단間斷하여 하나라도 성실[誠]하지 아니함이 있으면 비록 이 일을 지을지라도 짓지 아니함과 일반一般이니 곧 물物이 없는 것과 같은지라 어찌 가히 스스로 그 당연當然한 도道를 다 하지 아니하리오? 이런 고故로 군자君子는 착함을 가려서[擇善] 굳게 잡아서[固執] 실상의 마음으로써 실상의 이치를 체體하여 성誠하는 것이 귀貴함이 되니, 써 스스로 도道하는 공功을 다함이니라. 

 

 

 

 

○ 誠者는 非自成己而已也이라 所以成物也이니 成己는 仁也이오 成物은 知也이니 性之德也이라 合內外之道也이니 故로 時措之宜也이니라.

 

성誠은 스스로 기己를(몸을) 성成할(이룰) 따름이 아니라 써 물物을 성成하는(이루는) 바이니, 기己를(몸을) 성成함(이룸)은 인仁이오 물物을 성成홈(이룸)은 지知이니 성性의 덕德이라 내외內外를 합合한 도道이니, 고故로 시時(때)로 조措함에 의宜(마땅)하나니라.

 

【李範圭】 군자君子가 성誠을 귀貴하게 여김은 이미 몸[己]을 이룸으로써 성誠이 됨이 있으나, 그러나 성誠이란 것은 스스로 몸[己]만 이룰 따름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 진실眞實하여 거짓함이 없으면 자연自然히 물物에 미침이 있으리니 써 물物을 이루는 바이라. 대저 몸[己]을 이루어서 한 터럭의 사사私事와 거짓함이 없으면 이는 실상의 이치가 혼연渾然함이니 곧 이른바 인仁이요, 물物을 인因하여 성취成就하여 하여금 각각 그 곳을 얻게 하면 이는 앎이 밝고 처치함이 마땅함이니 곧 이른바 지知이라. 인仁과 지知는 이에 성품 가운데 고유固有한 덕德이니 이미 성性의 덕德이 되면 체體와 용用이 구비具備하여 나누고 다름이 없으리니 이에 바깥과 안이 하나에 합合하는 도道이라. 고故로 그 덕德을 몸에 얻은 것으로 써 일에 보여서 때로 써 놓아서 각각 그 마땅함을 얻게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스스로 몸만 이룰 따름이 아니라 써 물物을 이룬 바이니 이것이 인도人道이니라. 

 

* 인仁이라 함은 ‘체體의 존存함’이요 지知라 함은 ‘용用의 발發함’이라. 

 

 

 

 

 

右第二十五章

 

○ 故로 至誠은 無息이니, 不息則久하고 久則徵하고, 徵則悠遠하고 悠遠則博厚하고 博厚則高明이니라.

 

고故로 지극한 성誠은 식息함이(쉼이) 없으니, 식息하지(쉬지) 아니하면 구久하고(오래고) 구久하면(오래면) 징徵하고, 징徵하면(징험하면) 유원悠遠하고(길며 멀고) 유원悠遠하면(길며 멀면) 박후博厚하고(넓으며 두텁고) 박후博厚하면(넓으며 두터우면) 고명高明하나니라(높고 밝으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이르사대, 지극[至]한 정성[誠]의 성盛한 덕德이 있으면 반드시 지성至誠의 공용功用이 있는지라. 이런고故로 지성至誠이란 것은 성실한 이치에 순전하여 사사욕심私事欲心이 사이하지(끼어들지) 못하여 그 성誠이 스스로 그치고 쉬는 때가 없나니라. 사람 마음의 이치가 혹 사이하고 쉼이 있으면 어찌 능히 징험徵驗함이 있으리오? 지성至誠이 쉬지 아니하면 시종始終이 한결같아서 항상 오래하여 변變하지 아니하나니, 오랜즉 도리道理가 안에 충실하여[久] 자연自然히 바깥에 나타나 보여서 징험[徵]이 있어서 가히 가리우지 못하나니라. 지성至誠이 오램으로써 징험徵驗하여 다만 그 공업功業이 나타나면 길고 멀어서 아침과 저녁의 가까움이 아니요, 이미 유원悠遠하면 광박廣博하고 심후深厚하여 얕고 좁은 량量이 아니요, 이미 박후博厚하면 고준高峻하고 광명光明하여 낮고 어두움이 아니라 대개 덕德이 가운데 있는 것이 이미 그 순전함을 극진히 한지라. 고故로 업業이 밖에 징험徵驗함이 스스로 그 성盛함을 극진極盡히 하니라. 

 

 

 

 

○ 博厚는 所以載物也이오 高明은 所以覆物也이오 悠久는 所以成物也이니라.

 

박후博厚는(넓고 두터움은) 써 물物을 재載하는(싣는) 바요 고명高明(높고 밝음)은 써 물物을 부覆하는(덮는) 바요 유구悠久는(길고 오램은) 써 물物을 성成하는(이루는) 바이니라.

 

【李範圭】 지성至誠의 공용功用이 이미 그 성誠함을 극진極盡히 하면 그 물物에 미치는 것을 어찌 쉽게 헤아리리오? 지성至誠이 오직 넓고 두터우면 함홍含弘의 량量이 용납容納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스스로 써 크게 창생蒼生을 건져서 천하天下를 들어서 깊은 인仁의 지경에 들일[納]지니 곧 써 물物을 싣는 바요, 지성至誠이 오직 높고 밝으면 크게 덮는[冒] 나머지에 건지지 아니함이 없어서 스스로 써 창생蒼生을 덮음이 있어서 천하天下로 하여금 다 우러러 의뢰依賴함이 있을지니 곧 써 물物을 덮는 바요, 지성至誠이 오직 넓고 두텁고 높고 밝아서 길고 오램에 극진하면 덕德과 업業이 항상 새로워서 길이 의뢰依賴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스스로 써 창생蒼生을 덮고 실음[載]이 있어서 비롯함으로부터 마치기까지 꺾어지고 무너짐에 이르지 아니할지니 곧 써 물物을 이루는 바이니라. 

 

 

 

 

○ 博厚는 配地하고 高明은 配天하고 悠久는 無疆이니라.

 

박후博厚는(넓고 두터움은) 지地를(땅을) 배配(짝)하고 고명高明(높고 밝음)은 천天(하늘)을 배配하고 유구悠久는(길고 오램은) 강彊(지경)이 없나니라.

 

【李範圭】 대저 좇아옴으로 오직 땅은 실음[載]이 직분職分이어늘 이제 지성至誠이 물物을 실으니 이는 그 넓고 두터움이 곧 땅을 짝함이요, 오직 하늘은 덮는 것이 직분職分이어늘 이제 지성至誠이 물物을 덮으니 이는 그 높고 밝음이 곧 하늘을 짝함이요, 오직 하늘과 땅이 내고[生] 이룸이 예와 이제에 뻗쳐서 지경地境이 없거늘 이제 지성至誠이 물物을 이루니 이는 그 넓고 두텁고 높고 밝음의 길고 오램이 천지天地의 지경 없음과 일반一般이니라. 

 

 

 

 

○ 如此者는 不見而章하며 不動而變하며 無爲而成이니라.

 

이렇듯한 자者는 현見[示]치 아니하여서 장章하며(나타나며) 동動치 아니하여서 변變하며 함이 없이 성成하나니라(이루나니라). 

 

【李範圭】 대저 지성至誠이 천지天地와 같음이 이 같은 것이 어찌 뜻이 있어서 그러하리오? 지성至誠의 넓고 두터움이 이미 땅을 짝하면 표시表示하는 바가 있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공용功用이 스스로 찬연燦然하여 가히 볼만할지니 이것이 보이지 아니하여서 나타남이요, 지성至誠의 높고 밝음이 이미 하늘을 짝하면 떨치고 짓는 바가 있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공용功用이 스스로 감화感化함이 자최가 없을지니 이것이 동動하지 아니하고 변變함이요, 지성至誠의 길고 먼 것이 곧 천지天地의 지경地境이 없는 것이니 편안히 배비排備하여 펴서 두는 바가 있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공용功用이 스스로 시종始終이 혼연渾然히 온전하여 폐단弊端이 없을지니 이것이 함이 없이 이루는 것이니라. 

 

 

 

 

○ 天地之道는 可一言而盡也이니 其爲物이 不貳라 則其生物이 不測이니라.

 

천지天地(하늘과 땅)의 도道는 가可히 한 말에 진盡(다)할 것이니 그 물物됨이 이貳치 아니한지라 곧 그 물物을 생生함이 측測지(측량하지) 못하나니라. 

 

【李範圭】 지성至誠의 공용功用이 이미 천지天地와 같으니 천지天地의 공용功用을 보면 곧 가히 지성至誠을 볼지라 천지天地가 지극히 크니 가히 언어言語로 써 형용形容하지 못할 것 같으나, 그러나 그 주재主宰하는 도道를 가히 한 말로 포함包含하여 다 할지니 이른바 한 말로 가히 다 한다 함은 다만 이 한낱 ‘성誠’일 따름이라. 

 

대개 ‘하늘의 도道를 세움’을 가로되 음陰과 양陽이니, 낮과 밤과 위와 아래와 고요함과 전일專一하고 움직임에 곧은 것이 한낱 실상의 이치가 화육化育하는 밖에 흘러 행行함에 지나지 아니하고 다시 다른 물物이 와서 섞임이 없으니 이것이 하늘의 물物 됨이 둘로 아니하는 곳이라 천도天道의 써 성誠한 바이고, 

 

‘땅의 도道를 세움’을 가로되 유柔와 강剛이니, 남南과 북北과 높고 깊고 고요함에 합合하고 움직임에 열리는 것이 한낱 실상의 이치가 천지天地 안에 흘러 행行함에 지나지 아니하고 다시 다른 물物이 와서 섞임이 없으니 이것이 땅의 물物 됨이 둘로 아니한 곳이라 지도地道의 써 성誠한 바이니 오직 둘로 아니하는 고로 쉬지 아니하는지라. 한 번 통通하고 한 번 회복함에 그 화化함이 방소方所가 없어서 그 물物을 냄이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덮고[覆] 실은[載] 사이에 채우고 가득하여 그 써 그러한 바를 알지 못함이 있을지니 어찌 가히 측량測量하리오?

 

 

 

 

○ 天地之道는 博也厚也高也明也悠也久也이니라.

 

천지天地(하늘과 땅)의 도道는 박博(넓은 것)과 후厚(두터운 것)와 고高(높은 것)와 명明(밝은 것)과 유悠(긴 것)와 구久(오랜 것)이니라.

 

【李範圭】 천지天地의 도道는 오직 그 둘이 아닌 고故로 능히 각각 그 성盛함을 극진極盡히 하나니, 땅의 도道를 말하면 이미 그 넓음이 극진하고 또 그 두터움이 극진하며, 하늘의 도道를 말하면 이미 그 높음이 극진하고 또 그 밝음에 극진하며, 천지天地의 도道를 합合하여 말하면 이미 그 긺이 극진하고 또 그 오램이 극진하니, 하늘과 땅이 각각 그 공용功用의 성盛함을 극진極盡히 함이니라. 

 

 

 

 

○ 今夫天이 斯昭昭之多이니 及其無窮也하야는 日月星辰이 繫焉하며 萬物이 覆焉이니라. 今夫地가 一撮土之多이니 及其廣厚하야는 載華嶽而不重하며 振河海而不洩하며 萬物이 載焉이니라. 今夫山이 一卷石之多이니 及其廣大하야는 草木이 生之하며 禽獸가 居之하며 寶藏이 興焉이니라. 今夫水가 一勺之多이니 及其不測하야는 黿鼉蛟龍魚鼈이 生焉하며 貨財가 殖焉이니라.

 

이제 천天(하늘)이 이 소소昭昭의 다多함이니 그 무궁無窮함(궁진함이 없음)에 미쳐서는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계繫하였으며(매였으며) 만물萬物이 부覆하였나니라(덮혔나니라). 이제 지地가(땅이) 한 촬撮의 토土의 다多함(많음)이니 그 광후廣厚함(넓고 두터움)에 미쳐서는 화악華嶽을 재載하였으되(실었으되) 중重치(무겁지) 아니하며 하해河海를 진振하였으되(거두었으되) 설洩치(새지) 아니하며 만물萬物이 재載하였나니라(실렸나니라). 이제 산山이 한 권卷의 석石(돌)의 다多함이니 그 광대廣大함(넓고 큼)에 미쳐서는 초목草木이 생生하며(나며) 금수禽獸가 거居하며 보장寶藏이 흥興하나니라(일어나나니라). 이제 수水가 일작一勺(한 잔)의 다多함이니 그 측測량하지 못함에 미쳐서는 원타黿鼉와 교룡蛟龍과 어별魚鼈이 생生하며(나며) 화재貨財가 번식[殖]하나니라. 

 

【李範圭】 시험하여 천지天地의 물物을 생生함에 측량測量하지 못함으로 써 말하면 하늘을 한 곳만 보면 이 소소昭昭함에 많음이 또한 하늘이나 그 전체全體의 궁진窮盡함이 없음에 미쳐서는 날과 달과 천궁天官의 실은[載] 바 모든 성진星辰이 매이지 아니함이 없고 만 가지의 가지런하지 아니한 물物이 다 그 아래에 덮혔으니 하늘의 물物을 생生함이 어찌 그리 성盛하며, 땅을 그 한 곳만 가르치면 한 줌 흙의 많음이 또한 땅이나 그 전체全體의 넓고 두터움에 비쳐서는 산山의 화악華嶽 같은 것을 싣되 무거움을 보지 못하고 물[水]의 하해河海 같은 것을 거두되 넘쳐 새지 아니하고 만 가지의 가지런하지 아니한 물物을 다 그 안에 실으니 땅의 물物을 생生함이 어찌 그리 성盛하며, 천지天地 사이에 나서 능히 천지天地를 대신하여 써 물物을 생生하는 것이 또 산山과 물[水]이 있으니 산은 한 갈피 돌의 많음이 또한 산이나 그 넓고 큼에 미쳐서는 모든 초목草木이 다 나고 모든 금수禽獸가 다 거居하고 왼 세상의 보배를 감추어서 가히 써 의복衣服의 꾸밈과 그릇의 쓰임이 되는 것이 다 이에서 일어나며, 물[水]은 한잔의 많음이 또한 물[水]이나 그 측량치 못함에 미쳐서는 원타黿鼉와 교룡蛟龍과 어별魚鼈의 붙이와 재화財貨의 쓰이는 것이 다 그 가운데에 나서 기르며 심어서 모이니 산山과 물[水]의 물物을 생生함이 어찌 그리 성盛하뇨? 어느 것이 천지天地의 물物을 생生함의 성盛함이 아니리오? 그 물物을 생生함의 측량치 못함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라.

 

 

 

 

○ 詩云 維天之命이 於穆不已라 하니 蓋曰 天之所以爲天也이오 於乎不顯가 文王之德之純이여 하니 蓋曰 文王之所以爲文也이니 純亦不已니라.

 

시詩에 이르되, 「천天(하늘)의 명命이 오於홉다(감탄스럽다) 목穆하야(깊고 멀어서) 이已치(말지) 아니하다.」 하니 천天(하늘)의 써 천天(하늘)된 바를 이름이오, 「오於홉다(감탄스럽다) 현顯치(나타나지) 아니하냐 문왕文王의 덕德의 순純하심(순일純一하여 섞이지 아니하심)이여)」 하니 문왕文王의 써 문文되신 바를 이름이니 순純전함이 또한 이已치(말지) 아니함이니라. 

 

【李範圭】 이로 말미암아 지성至誠이 천지天地의 합合함을 알지니, 시詩에 이르되 「하늘의 명命이 기운으로 화化함에 주재主宰하는 자가 실상 깊고 멀어 측량하기 어려우나 만고萬古에 흘러서 행行함을 말지(그만두지) 아니한다.」 하니 시詩의 뜻은 대개 가로되, 높고 밝아서 위에 덮은 자를 가히 써 하늘이라 말할지나 이 말지(그만두지) 아니함이 이에 하늘의 써 하늘 된 바요, 또 이르되 ‘아름답다 어찌 나타나지 아니하냐 문왕文王의 덕德이여. 하늘 이치에 혼연渾然하여 순일純一히 잡雜되지 아니하다.’ 하니, 시詩의 뜻은 대개 가로되, 이 순전純全함이 이에 문왕文王의 써 문文이 된 바이라. 요要컨대 ‘하늘의 명命이 말지(그만두지) 아니하고 문왕文王의 덕德의 순전純全함이 또한 말지(그만두지) 아니하니 문왕文王의 써 문文 된 바가 곧 하늘이 써 하늘 된 바이라’ 하니, 이것을 보건댄 ‘천지天地의 지성至誠의 도道’가 ‘사람의 지성至誠이 쉬지 아니함’과 동일同一함이 아니냐?

 

 

 

 

 

右第二十六章

 

○ 大哉라 聖人之道이여. 洋洋乎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

 

크다 성인聖人의 도道여. 양양洋洋히 만물萬物을 발육發育하야 준峻함(높음)이 천天에(하늘에) 극極하였도다. 

 

【李範圭】 ‘도체道體의 큼으로 써 천지天地 사이에 흘러서 있지 아니한 바가 없음이니, 양양洋洋히 흘러 움직이고 차서 가득함이 한량이 없으니 그 공용功用은 만물萬物을 발육發育함이라. 봄에 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감춤이 다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이치가 흘러 행行하는 바이니 그 체단體段은 높고 큼이 하늘에 극極하니 하늘의 하늘 됨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혼륜방박渾淪磅礡한(혼돈渾沌으로 섞여 하나된) 이치의 충색充塞(충만)함에 지나지 아니하니, 물物이 지극히 많되 이 도道가 써 발육發育함이 있고 하늘이 지극히 높되 이 도道가 써 높고 극極함이 있으니 어찌 그리 큰고!’ 함이니라. 

 

 

 

 

○ 優優大哉라 禮儀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

 

우우優優히 크도다. 예의禮儀 삼백三百과 위의威儀 삼천三千이로다.

 

【李範圭】 ‘도체道體의 큰 것으로 써 사위事爲(일과 행위)의 끝에 흩어져서 있지 아니한 바가 없는지라, 우우優優히 충족充足하여 남음이 있어서 섬실纖悉함(세세細細함에도 두루 미침)이 다 갖추었으니 크도다. 경례經禮는 관冠과 혼婚과 상喪과 제祭와 조朝와 근覲과 회會와 동同 같은 류類가 큰 절목節目이 삼백三百이 있으되 하나도 도道가 아님이 없고, 곡례曲禮는 진進하고 퇴退하고 승昇하고 강降하고 부俯하고 앙仰하고 읍揖하고 손遜하는 것 같은 류類가 적은 절목節目이 삼천三千이 있으되 하나도 도道가 아님이 없으니, 대개 도道 가운데에 포함하고 온축蘊蓄하여 적은 데에 들어가서 사이가 없으니 어찌 그리도 큰고!’ 함이니라. 

 

 

 

 

○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

 

그 사람을 기다린 후後에 행行하나니라.

 

【李範圭】 대저 커서 싸지[包] 아니함이 없고 적어도 들어가지 아니함이 없으니, 도道가 진실로 큰지라 어찌 헛되이 행行함이리오? 요要하건대 다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할지니 반드시 이와 같은 사람을 얻은 뒤에 가히 이와 같은 도道를 행할지니라. 

 

 

 

 

○ 故로 曰 苟不至德이면 至道가 不凝焉이라 하니라.

 

고故로 가로되, 진실로 지극한 덕德이 아니면 지극한 도道가 응凝치 아니한다 하니라. 

 

【李範圭】 도道는 오직 사람을 기다려서 행行하는 지라. 고故로 가로되, 진실로 그 사람이 흉금胸襟이 천루淺陋하고(얕으며 좁고) 식견識見이 추소粗踈하여 지극한 덕德이 아니면 도道의 큰 것은 능히 그 온전함을 알지 못하고 도道의 적은 것은 능히 그 자세함을 다하지 못하여, 발육發育하고 준극峻極하고 삼천三千과 삼백三百의 지극한 도道가 나에게 판단하여 두 물物건이 되어서 써 몸과 마음에 모여 이루지 못할지니 모여 이루지 못하면 또 어찌 써 행行하리오?

 

 

 

 

○ 故로 君子는 尊德性而道問學이니, 致廣大而盡精微하며 極高明而道中庸하며 溫故而知新하며 敦厚以崇禮니라.

 

고故로 군자君子는 덕성德性을 존尊하고(높이고) 문학問學을 도道하나니(말미암나니), 광대廣大를(넓고 큼을) 치致하고(이루고) 정미精微함을 진盡하며(다하며) 고명高明(높고 밝음)을 극極(극진히)하고 중용中庸을 도道하며 고故를(옛것을) 온溫하고(익히고) 신新을(새것을) 지知하며(알며) 후厚를(두터움을) 돈敦(두터이)하고 써 예禮를 숭崇하나니라(높이나니라). 

 

【李範圭】 덕德을 닦고 도道를 모아서 이루는 일이 어떠하뇨? 고故로 군자君子가 도체道體가 커서 바깥이 없는 자는 마음을 둠이 아니면 능히 용납하지 못하고 도체道體가 적어서 안[內]이 없는 자는 앎을 이룸이 아니면 좇아 들어감이 없음을 아는지라, 덕성德性을 높여서 보전하여 지키고 잃어버리지 말아서 그 마음 체[心體]의 근본 그러함[본연本然함]을 두는 자는 그 도체道體의 큼을 온전히 함이요 또 문학問學을 말미암아서 나아가 함이 차례가 있어서 사리事理의 당연함을 궁구窮究하는 자는 그 도체道體의 자세仔細함을 다 함이니 이것은 덕德을 닦는 큰 뜻이라. 

 

그 자세함이 어떠하뇨? 덕성德性의 가운데에 만물萬物이 다 갖추어서 근본 광대廣大하나 써 가리움이 있으면 좁고 적을지니 반드시 사사私事로운 뜻으로 써 스스로 가리지 아니하여 그 광대廣大함을 이룰 것이라. 그러나 광대廣大한 자는 소략踈略함에 이르기가 쉬우니 또 반드시 문학問學(묻고 배움)의 공功으로 말미암아서 사리事理의 정精하고 추粗하지 아니한 것과 적고 나타나지 아니한 것을 들어서 분석함을 반드시 다하여 호리毫釐의 어그러짐이 있지 아니하게 할 것이요, 덕성德性의 가운데에 한 물物도 잡雜되지 아니하여 근본 고명高明한 것이나 써 루累함이 있으면 낮고 더러울지니 반드시 사사로운 욕심으로 써 스스로 루累하지 아니하여 써 그 고명高明함을 극진極盡히 할 것이라. 그러나 고명高明한 자는 중中에 지남[過, 지나침]에 이르기가 쉬우니 또 반드시 문학問學의 공功을 말미암아 사리事理의 중中하고 편偏지지(치우치지) 아니함과 평상平常하고 의지함이 없는 것을 말미암아 써 행行하여 지나가고[過] 미치지 못함[不及]의 어그러짐이 있지 아니하게 할 것이요, 

 

마음에 덕성德性이 갖추어서 근본 그러한 양지良知가 있으니 이른바 ‘고故’라는 것이라 반드시 함영涵泳하여 써 익혀서 흘려[遺] 잊어버리지 않게 할 것이나 그러나 의리義理가 무궁無窮하여 날로 새로움[新]이 말지(멈추지) 아니하니 또 반드시 문학問學으로 써 하여 날로 그 알지 못하는 바를 알 것이요, 마음에 덕성德性이 갖추어서 근본 그러한 양능良能이 있으니 이른바 ‘후厚’라는 것이라 반드시 배양培養하여 써 더 두터이 하여 그 놓아 지내지[방일放逸하지] 아니하게 할지나 그러나 절문節文의 체禮를 있는 데마다 가히 홀忽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 또 반드시 문학問學으로 써 날로 그 삼가지 못한 바를 삼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덕德이 닦고 도道가 모여서 이루리라. 

 

 

 

 

○ 是故로 居上不驕하며 爲下不倍라 國有道에 其言이 足以興이오 國無道에 其黙이 足以容이니, 詩曰 旣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라 하니 其此之謂與인져.

 

이런 고故로 위에 거居하야 교驕하지(교만하지) 아니하며 아래가 되어 배倍하지(배반하지) 아니한 지라. 나라가 도道가 있음에 그 언言(말)이 족足히 써 흥興하고 나라가 도道가 없음에 그 묵黙(잠잠함)이 족足히 써 용容(용납)하나니, 시詩에 가로되, 「이미 명明하며(밝으며) 또 철哲하여 써 그 몸을 보保(보존)한다.」 하니 그것이 이를 이름인져.

 

【李範圭】 대저 군자君子가 이미 덕德을 닦아서 써 도道를 모아서 이루면 도道가 몸에 갖추어서 스스로 처處하는 바의 마땅하지 아니함이 없는지라. 이런고로 위의 지위에 거居하면(있으면) 위位하고 육育하고 경례經禮와 곡례曲禮의 도道로써 천하天下를 이롭게 건지되 교만驕慢하고 자랑함에 이르지 아니하고, 아래의 지위에 거居하면 위位하고 육育하고 경례經禮와 곡례曲禮의 도道로써 좇아 헌장憲章을 삼아서 어기고 배반함에 이르지 아니할지라. 

 

나라가 도道가 있는 때를 당함에 덕德이 있는 말이 말마다 다 경제經濟의 말이라 스스로 족히 써 일어나서 위位에 있어서 위位하고 육育하고 경례經禮와 곡례曲禮의 도道가 크게 쓰임에 보일 것이요, 나라가 도道가 없는 때를 당함에 거두고 물러가 잠잠하여 위태危殆하고 과격過激한 의론을 하여 화禍를 취取하지 아니하니, 스스로 족히 써 세상에 용납하여 위位하고 육育하고 경례經禮와 곡례曲禮의 도道를 한 마음에 감출지니, 대개 위와 아래와 다스리고 어지러움에 마땅하지 아니한 바가 없음이 이와 같은지라. 

 

대아증민大雅烝民의 시詩에 중산보仲山甫를 아름다이 여기며 이름[云]이 있으되, 「이미 밝아서 이치에 다하고 또 밝아서 일에 살핀지라 이에 이치[理]에 순順하게 행行하여 그 몸을 보존하여 재해災害가 없다.」 하니 이는 덕德이 닦이고 도道가 모여서 이루어서 위와 아래와 다스리고 어지러움에 다 마땅함을 이름인져. 대저 이 공功이 있고 이 효험效驗이 있으면 군자君子요 성인聖人이니, 크다! 성인의 도道가 써 덕德을 닦고 도道를 모아서 이룬 군자君子를 기다려서 행行함이니 이것이 인도人道이니라. 

 

 

 

 

 

右第二十七章

 

○ 子가 曰 愚而好自用하며 賤而好自專이오 生乎今之世하야 反古之道이면 如此者는 烖及其身者也이니라.

 

자子가 가라사대, 우愚하고(어리석되) 자용自用함(스스로 씀)을 좋이 여기며, 천賤하고(천하되) 자전自專함(스스로 오로지 함)을 좋이 여기고, 이젯 세世(세상)에 나서 옛 도道를 반反하려(돌이키려)하면 이 같은 자者는 재烖가(재앙이) 그 몸에 미칠 자者이니라. 

 

【李範圭】 자사子思가 이르사대, 아래가 되어 배반하지 아니함은 무엇을 말함인고? 공자孔子가 일찍이 가라사대, ‘대저 사람이 어리석은 자는 마땅히 몸(자신)을 지킬 것이어늘 이에 총명聰明함을 지어서 써 스스로 쓰기를 좋아하며, 천賤한 자는 마땅히 분수를 편안히 할 것이어늘 이에 망령되이 권세 자루[柄]를 도적질하여 써 스스로 오로지 하고, 지금의 세상에 나서 마땅히 지금의 법도를 좇아 지킬 것이어늘 이에 돌이켜서 예전 도道를 행行하기를 요要구하면, 이 같은 자는 이치에 어기고 분수를 범犯함이라 왕법王法에 용납하지 못할 바이니 재화災禍가 반드시 그 몸(자신)에 미칠지라’ 부자夫子의 말씀이 이와 같으시니라. 

 

 

 

 

○ 非天子이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천자天子가 아니면 예禮를 의議(의론)하지 못하며 도度(법도)를 제制하지(짓지) 못하면 문文을 고考(詳考, 상고)하지 못하나니라. 

 

 

 

 

○ 今天下가 車同軌하며 書同文하며 行同倫이니라.

 

이제 천하天下가 거車(수레)가 궤軌가 동同하며(같으며), 서書가(글이) 문文이 동同하며(같으며), 행行이 륜倫이 동同하니라(같으니라). 

 

【李範圭】 오직 예禮를 의론하고 법도法度를 짓고 문文을 상고함이 천자天子에게 나온지라 오늘의 천하天下가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창조創造한 뒤를 이어서 그 법제와 전장典章(법칙과 규칙)을 좇아 지켜서 다름이 없으니, 수레로 써 말하면 지은[造] 자가 한 사람이 아니로되 수레바퀴의 자최가 땅에 있는 것이 상거相距의 넓고 좁음이(두 바퀴의 서로의 간격이) 한결같고, 글씨로 써 말하면 쓰는[筆] 자가 한 사람이 아니로되 점點과 획畫과 형상形象의 문文이 사방四方이 한결같고, 행실로 써 말하면 행行하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로되 상하上下가 서로 접接하는 차서次序의 륜倫이 등급等級과 절문節文이 다 한결같으니, 대개 같이 이 주周의 나라 천자天子의 정定하신 바가 그러하니라. 

 

 

 

 

○ 雖有其位나 苟無其德이면 不敢作禮樂焉이며 雖有其德이나 苟無其位면 亦不敢作禮樂焉이니라.

 

비록 그 위位(지위)가 있으나 진실로 그 덕德이 없으면 감敢히 예禮와 악樂을 작作하지(짓지) 못하며, 비록 그 덕德이 있으나 진실로 그 위位가 없으면 또한 감敢히 예禮와 악樂을 작作하지(짓지) 못하나니라. 

 

 

 

 

○ 子가 曰 吾說夏禮나 杞不足徵也이오 吾學殷禮호니 有宋存焉이어니와 吾學周禮호니 今用之라 吾從周호리라.

 

자子가 가라사대, 내 하夏 나라의 예禮를 설說하나(말하나) 기杞가 족足히 징徵치 못하고 내 은殷 나라의 예禮를 학學호니(배우니) 송宋이 있거니와 내가 주周 나라의 예禮를 학學호니(배우니) 이제 쓰는지라 내가 주周를 좇으리라. 

 

 

 

 

 

右第二十八章

 

○ 王天下가 有三重焉이니 其寡過矣乎인져.

 

천하天下를 왕王홈이 세 중重한 것이 있으니 그 허물이 적을인져.

 

【李範圭】 자사子思가 이르사대, 위에 거居하여 교만驕慢하지 아니함을 무엇에 볼까? 성인聖人이 비로소 명命을 받아서 천하天下에 왕王하는 자가 ‘예禮를 의론하고’ ‘법도法度를 짓고’ ‘문文을 상고’하는 세 가지의 극히 중대重大한 일이 있으니, 이로써 천하의 보고 듣는 것을 새롭게 하고 천하의 마음과 뜻을 한결같이 하면 정사를 조정에 봄에 나라의 정사가 다르지 아니하고 풍속을 들[野]에 봄에 집이 풍속이 다르지 아니하여 궤軌가 같고 륜倫이 같고 문文이 같은 다스림이 한결같아서 모다 도道를 좇고 의義를 좇으리니 천하天下의 사람이 다 허물이 적을진져. 

 

 

 

 

○ 上焉者는 雖善이나 無徵이니 無徵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下焉者는 雖善이나 不尊이니 不尊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상上인 자者는 비록 선善하나(착하나) 징徵홈(증거함)이 없으니 징徵홈(증거함)이 없는지라 신信하지(믿지) 아니하고 신信하지 아니하는지라 민民(백성)이 좇지 아니 하나니라. 하下인 자者는 비록 선善하나(착하나) 존尊하지(높지) 아니하니 존尊하지(높지) 아니한지라 신信하지(믿지) 아니하고 신信하지(믿지) 아니하는지라 민民(백성)이 좇지 않나니라. 

 

 

 

 

○ 故로 君子之道는 本諸身하야 徵諸庶民하며 考諸三王而不謬하며 建諸天地而不悖하며 質諸鬼神而無疑하며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이니라.

 

고故로 군자君子의 도道는 신身(몸)에 본本(근본)하여 서민庶民(모든 백성)에 징徵하며(증거하며) 삼왕三王에 고考(상고)하여도 류謬치(어그러지지) 아니하며 천지天地에 건建하여도(세워도) 패悖치(어그러지지) 아니하며 귀신鬼神에 질質(質定)함에 의疑가 없으며 백세百世에 써 성인聖人을 사俟하여도(기다려도) 혹惑치(의혹하지) 아니 하나니라. 

 

 

 

 

○ 質諸鬼神而無疑는 知天也이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知人也이니라.

 

귀신鬼神에 질質(질정)하여도 의疑가(의심이) 없음은 천天(하늘)을 앎이오, 백세百世에 써 성인聖人을 사俟하여도 혹惑치(의혹지) 아니함은 인人(사람)을 앎이니라. 

 

 

 

 

○ 是故로 君子는 動而世爲天下道이니 行而世爲天下法하며 言而世爲天下則이라 遠之則有望이오 近之則不厭이니라.

 

이런 고故로 군자君子는 동動함에 세世로 천하天下에 도道가 되나니 행行함에 세世로 천하天下에 법法이 되며 언言(말)함에 세世로 천하天下의 칙則이 되는지라 원遠하면(멀면) 망望함(바람)이 있고 근近하면(가까우면) 염厭치(싫지) 않나니라. 

 

 

 

 

○ 詩曰 在彼無惡하며 在此無射이라 庶幾夙夜하야 以永終譽이라 하니 君子가 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이니라.

 

시詩에 가로되, 「저에 있어서 오惡함(미워함)이 없으며 이에 있어서 역射함(싫어함)이 없는지라 숙야夙夜하여(밤낮으로 바라여) 써 예譽를(기림을) 길이 종終타(마친다).」 하니 군자君子가 이 같지 아니하고 일찍이 예譽를(기림을) 천하天下에 둘 자者가 있지 아니하니라. 

 

* 庶幾: 거의, 바라건대, 바람.

 

 

 

 

 

右第二十九章

 

○ 仲尼는 祖述堯舜하시고 憲章文武하시며 上律天時하시고 下襲水土하시니라.

 

중니仲尼는 요순堯舜을 조술祖述하시고(멀리 그 도를 높이시고), 문무文武를 헌장憲章하시며(가까이 그 법을 지키시며), 위로는 천시天時를 율律하시고(그 자연自然의 운運을 법法하시고) 아래로는 수토水土를 습襲하시니라(그 일정한 이치를 인因하심이니라).

 

 

 

 

○ 辟如天地之無不持載하며 無不覆幬하며 辟如四時之錯行하며 如日月之代明이니라.

 

비辟유컨댄 천지天地(하늘과 땅)의 지재持載치(가지고 싣지) 아니함이 없으며, 부도覆幬치(덮고 덮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으며 비辟컨댄 사시四時의 착錯하야(번갈아) 행行함과 같으며 일월日月(날과 달)의 대代(대신)하여 명明함(밝음)과 같으니라. 

 

【李範圭】 대저 조술祖述하고 헌장憲章하고 상률上律하고 하습下襲하심이 고금古今과 상하上下의 도道를 겸하야 몸 바쳐서 유루遺漏됨이 없으심이 비유컨댄 천지天地의 한 물건도 가지고 싣지 아니함이 없으며 한 물건도 덮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으며, 그 고금古今과 상하上下의 도道를 거느려서 번갈아 운전運轉하야 궁진窮盡하지 아니하심이 비유컨댄 천지 가운데 사시四時의 서로 번갈아 행行함과 같으며 날과 달의 서로 대신하야 밝음과 같은지라. 중니仲尼의 크심이 이 같으니 이는 중니가 한 천지天地시니라.

 

 

 

 

○ 萬物이 並育而不相害하며 道가 並行而不相悖라, 小德은 川流이오 大德은 敦化이니 此가 天地之所以爲大也이니라. 

 

만물萬物이 아울러 육育하여(길러서) 서로 해害하지 아니하며 도道가 아울러 행行하야 서로 패悖하지(어그러지지) 아니하는지라, 소덕小德은 천川(내)의 류流홈이오(흐름이오) 대덕大德은 화化를 돈敦하니(도탑게 하니) 이것이 천지天地(하늘과 땅)의 써 큰 바이니라. 

 

【李範圭】 시험하여 천지天地로 써 보면 더욱 중니仲尼를 알지라. 하늘이 덮지 아니함이 없으며 땅이 싣지 아니함이 없으니 만물萬物이 아울러 그 사이에 길러서 성性과 명命이 각각 바르니[正] 서로 침해侵害하지 아니하고 사시四時와 일월日月이 한 번 차고[寒] 한 번 더우며[暑] 한 번 낮이며[晝] 한 번 밤[夜]이어서 아울러 그 가운데 행行하되 고쳐서 번갈아 차례를 따름이 서로 어그러지지 아니함이니, 대저 그 해害하지 아니하고 어그러지지 아니하는 것은 이에 이 천지天地에 흩어져 다름의 적은 덕德이 있으니 냇물이 흐름에 천지만파千支萬派가 분명分明하여 쉬지 아니함과 같고, 대저 그 아울러 기르고 아울러 행行하는 것은 이에 이 천지天地의 다 모이는 큰 덕德이 있으니 화化하는 근원根源의 돈후성대敦厚盛大함이 때로 나와서 궁진窮盡하지 아니함이라. 적은 덕德이 있어서 써 나눔[分]이 되고 큰 덕德이 있어서 써 합[合]함이 되니 이것이 천지天地의 도道가 지극히 큼이 되어서 가히 미치지 못하는 바이라. 참 이것이 중니仲尼의 도道가 지극히 큼이 되어서 가히 미치지 못할 바인져. 

 

 

 

 

 

右第三十章

 

○ 唯天下至聖이라야 爲能聰明睿知가 足以有臨也이니 寬裕溫柔가 足以有容也이며 發强剛毅가 足以有執也이며 齊莊中正이 足以有敬也이며 文理密察이 足以有別也이니라.

 

오직 천하天下의 지극한 성聖이라야 능能히 총聰이며 명明이며 예睿이며 지知가 족足히 써 임臨함이 있나니, 관寬(너그러움)이며 유裕(관대함)이며 온溫(온화함)이며 유悠가(부드러움이) 족足히 써 용容(용납)함이 있으며, 발發이며 강强이며 강剛이며 의毅가(굿셈이) 족足히 써 집執함이 있으며, 제齊며(단정하며) 장莊(엄숙함)이며 중中이며 정正이 족足히 써 경敬(공경)함이 있으며, 문文이며 리理이며 밀密(자세함)이며 찰察(살핌)이 족足히 써 별別(분별)함이 있나니라. 

 

 

 

 

○ 溥博淵泉하야 而時出之니라.

 

보溥(두루)하고 박博하며(넓으며) 연淵하고(고요하고) 천泉하야(깊어서 근본이 있으니) 시時로 출出[發現]하나니라.

 

 

 

 

○ 溥博은 如天하고 淵泉은 如淵이라 見而民莫不敬하며 言而民莫不信하며 行而民莫不說이니라.

 

보박溥博(두루하고 넓음)은 천天(하늘) 같고 연천淵泉은 연淵(못) 같은지라. 견見함(보임)에 민民(백성)이 공경하지 아니할 이 없으며 언言함(말함)에 민民(백성)이 믿지 아니할 이 없으며 행行함에 민民(백성)이 기뻐 아니할 이 없느니라. 

 

 

 

 

○ 是以로 聲名이 洋溢乎中國하야 施及蠻貊하야 舟車所至와 人力所通과 天之所覆와 地之所載와 日月所照와 霜露所隊에 凡有血氣者가 莫不尊親하니 故로 曰 配天이니라.

 

이로써 성명聲名이 중국中國에 양일洋溢하야(넘쳐서) 만맥蠻貊(주변나라)에 이급施及하야(뻗어 미쳐서) 주거舟車(배와 수레)의 이르는 바와 인력人力(사람의 힘)의 통通하는 바와 천天(하늘)의 부覆한(덮은) 바와 지地(땅)의 재載한(실은) 바와 일월日月(날과 달)의 조照하는(비치는) 바와 상로霜露(서리와 이슬)의 추隊하는(떨어지는) 바에 무릇 혈기血氣 있는 자者가 존尊하며(높이며) 친親하지 아니할 이 없나니, 고故로 가로되 천天(하늘)을 배配함이니라(견주니라).

 

 

 

 

 

右第三十一章

 

○ 唯天下至誠이라야 爲能經綸天下之大經하며 立天下之大本하며 知天地之化育이니 夫焉有所倚리오.

 

오직 천하天下의 지극한 성誠이라야 능能히 천하天下의 큰 경經(오품五品의 인륜人倫)을 경經하며 륜綸하며, 천하天下의 큰 본本(근본)을 입立하며(세우며), 천하天地의 화육化育을 아나니, 어찌 의倚한 바가 있으리오?

 

【李範圭】 대저 이치가 천하天下에 있음이 인륜人倫에 흩어지고 성性과 명命에 근원하여 다 한 성誠에 갖춤을 이름이니, 오직 성인聖人의 마음이 극히 성誠하여 망령됨이 없으니 이것이 천하天下의 지성至誠이 됨이라. 오품五品인 인륜人倫에 능히 하여 천하天下의 대경大經이 될 자를 경經하여 그 나눔을 분변分辨하여 서로 어지럽지 아니하고 륜綸하여(다스려) 그 류類를 합合하여 서로 어그러지지 아니하게 하여 스스로 그 당연當然한 실상을 다 함이니 가히 천하후세天下後世의 표준標準이 될 것이요, 성性한 바의 전체全體에 능히 하여 천하天下의 큰 근본이 될 자를 세워 한 이치가 혼연渾然하여 편의(偏倚, 치우침)함이 없어서 변화變化하는 이치가 다 이로 좇아 나오고 일원一元의 번갈아 운전運轉함에 능하여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이 될 자를 또 앎이 있으니 대개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다 이 실상 이치라 지성至誠의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가 천지天地의 원元과 형亨과 이利와 정貞으로 더불어 근본 서로 합合하여 사이가 없으니 또 어찌 융회融會하고 관통貫通하지 아니하리오? 이것은 다 그 공용功用이 자연自然하여 생각지 아니하고 힘쓰지 아니함이니 어찌 물物에 의착倚着한 바가 있어서 함이리오?

 

 

 

 

○ 肫肫其仁이며 淵淵其淵이며 浩浩其天이니라.

 

준준肫肫한 그 인仁이며 연연淵淵한 그 연淵이며 호호浩浩한 그 천天(하늘)이니라.

 

【李範圭】 내가 지성至誠의 공용功用으로 말미암아 지성至誠의 심체心體를 생각하니, 그 경륜經綸함[經綸天下之大經]에 의착倚着한 곳이 없음은 사랑하고 사랑함이 협흡浹洽하고 은혜恩惠의 뜻이 두루 흘러서 준준肫肫히 간절하고 도탑고 지극함에 곧 성인聖人마음의 ‘인仁’이요, 그 근본을 세움[立天下之大本]에 의착倚着한 곳이 없음은 사사로운 욕심이 사이함이 없어서 일만 이치가 잠기고 젖어서[沉涵] 연연淵淵히 고요하고 깊음을 측량할 수 없음에 곧 성인 마음의 ‘연淵’이요, 그 화化를 앎[知天地之化育]에 의착倚着한 곳이 없음은 마음이 조화(造化)를 통하여 통通함이 다시 방위[方]가 없어서 호호浩浩히 광대廣大하여 측량할 수 없음에 곧 성인 마음의 ‘천天’이라. 지성至誠의 덕德이 그 지극히 성盛함인져. 

 

* 이범규의 주석에는 「그 화化의 의착倚着한 곳이 없음을 앎은」으로 해석되어 있으나, [知天地之化育, 그 천지의 화육을 앎]의 원문에 의거해서 「그 화化를 앎에 의착倚着한 곳이 없음은」으로 교정하였음.

 

* ‘준준肫肫’: 간절하고 지극한 모양, 경륜經綸. ‘연연淵淵’: 고요하고 깊은 모양, 근본根本을 세움. ‘호호浩浩’: 넓고 큰 모양, 화化를 앎. 

 

 

 

 

○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이면 其孰能知之리오.

 

진실로 짐짓 총聰하며 명明하며 성聖하며 지知하야 천덕天德을 달達(통달)한 자者가 아니면 그 누가 능能히 알리오?

 

【李範圭】 지성至誠의 도道가 이와 같으니 아는 자는 그 오직 성인聖人인져. 진실로 실상 총聰하고 명明하고 성聖하고 지知한 자품이 있어서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의 천덕天德을 달達한 자가 아니면 마음이 지성至誠의 마음이 아니요 밝음이 지성至誠의 밝음이 아니니 그 이른바 ‘경륜經綸’과 ‘입본立本’과 ‘지화육知化育’을 또한 누가 능히 알리오? 성인聖人이 천도天道의 극진히 이룸이 이에 이르러서 써 더함이 없으리라. 

 

 

 

 

 

右第三十二章

 

○ 詩曰 衣錦尙絅이라 하니 惡其文之著也이라. 故로 君子之道는 闇然而日章하고 小人之道는 的然而日亡하나니 君子之道는 淡而不厭하며 簡而文하며 溫而理니 知遠之近하며 知風之自하며 知微之顯이면 可與入德矣리라.

 

시詩에 가로되, 「금錦(비단)을 의衣하고(입고) 경絅(홑옷)을 상尙하다(더한다).」 하니 그 문文(문채)의 저著홈(나타남)을 오惡홈이라(미워함이라). 고故로 군자君子의 도道는 암연闇然호되 날로 장章하고(빛나고) 소인小人의 도道는 적연的然호되 날로 망亡하나니, 군자君子의 도道는 담淡호되 염厭치(싫치) 아니하며 간簡(간략)호되 문文하며 온溫(온화)호되 리理하니(조리條理가 있으니), 원遠(먼 것)의 근近으로(가까운 데로) 함을 알며 풍風(바람)의 자自홈(붙음, 비롯함)을 알며 미微(미세함)의 현顯홈(드러남)을 알면 가可히 더불어 덕德에 입入하리라(들어가리라). 

 

[덕德에 들어감[入德]이 몸[己]을 위하고 기미幾微를 아는 데서 나옴을 말하고 공부에는 미치지 아니함]

 

【李範圭】 자사子思가 지성至聖과 지성至誠의 공용功用이 그 지극함에 극진함을 말씀하시고 또 배우는 자가 높고 먼 데에 치달아 힘써서 하학下學의 공功을 잊을까 염려念慮하신지라 고故로 이 글장에 다시 하학下學의 마음 세우는 처음으로부터 미루어서 그 극진함에 이르시니, 국풍國風 시詩에 있어 가로되 「비단을 입고 홋옷으로써 더한다.」 하니 시詩의 뜻은 대개 비단의 문채文彩가 밖에 드러남을 미워하여 그 안에 거두고자 함이니, 이것이 예전 사람의 마음을 세움에 구차苟且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음이 있으니 옛 사람의 마음 세움을 보면 군자君子의 몸[己] 위하는 마음을 가히 미루어볼지라. 

 

고故로 군자君子의 도道는 오로지 몸 위함을 힘쓰고 사람의 앎을 구求하지 아니하나니 외면外面은 암연闇然하여 빛이 없으나 가운데는 아름다운 것이 쌓여서 자연自然히 날로 빛나고 밝음에 향하여 가리우지 못할 것이요, 만일 소인小人의 도道는 전혀 사람이 앎을(알아주기를) 힘써서 적연的然히 바깥에 보이나 가운데는 실상이 없어서 날로 사라지고 없어짐에 나아가니 어찌 가히 군자君子로 더불어 말하리오? 

 

그러나 이른바 ‘암연闇然하여 날로 빛난다’ 함은 어찌 함인고? 군자君子의 도道는 그 일용日用의 말하고 행行함이 외면外面은 비록 평담平淡하나 그 가운데 맛[味]을 찾으면 도리어 스스로 싫치 아니하고, 외면外面은 비록 간박簡朴하고 질소質素하나 그 가운데는 도리어 문채文彩가 찬연燦然하여 가히 볼만하고, 그 일을 응應하고 물物을 접接함에 외면外面은 비록 온연溫然하여 혼후渾厚하나 그 가운데는 도리어 스스로 조리條理가 있으니, 이것이 다 ‘비단을 입고 홋옷을 더하여 몸을 위하는’ 마음이라. 

 

그러나 또 기미幾微를 아는 학學이 있으니 ‘먼 데의 기미幾微가 가까운 데에 있음을 안다[知遠之近]’ 함은 멀리 집과 나라와 천하의 다스리고 다스리지 못함에 있음이 가까이 내 몸의 얻고 잃어버림이 있음으로 말미암음이요, ‘바람[風]의 기미幾微가 붙음(비롯함)이 있음을 안다[知風之自]’ 함은 풍화風化가 몸에 있는 것이 그 얻고 잃어버림이 있음이 내 마음의 간사奸邪하고 바름이 있음에 말미암음이요, ‘은미隱微한 것이 나타남에 기미幾微함을 안다[知微之顯]’ 함은 간사하고 바른 것이 안에 있는 것이 심히 은미隱微하나 착하고 악한 것의 가운데로 말미암아 바깥에 달한 것이 심히 나타나니, 진실로 능히 이 세 가지를 알면 가히 써 그 몸 위하는 근본을 맑게 하고[淸] 그 몸[己] 위하는 마음을 채울지니[充] 더불어 덕德에 들어감이 거의 그 가可하니라. 

 

 

 

 

○ 詩云 潛雖伏矣나 亦孔之昭이라 하니 故로 君子는 內省不疚하야 無惡於志니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唯人之所不見乎인져.

 

시詩에 이르되, 「잠潛한(잠긴) 것이 비록 복伏하나(엎드렸으나) 또한 심히 소昭타(밝다).」 하니, 고故로 군자君子는 내內로(안으로) 성省하야(살펴서) 구疚치(병되지) 아니하야 지志(뜻)에 오惡홈(미움)이 없나니, 군자君子의 가可히 미치지 못할 바는 그 오직 사람의 보지 못하는 바인져.

 

[신독愼獨하는 일을 말하니 써 몸[己]을 위하는 공功을 나타냄]

 

【李範圭】 덕德에 들어가는 일로 써 말하면 小雅正月의 시詩에 이름이 있으되, 「사람 마음이 한 생각의 일어남이 잠기어 안에 감추어서 비록 은복隱伏하였으나 그러나 그 이치가 심히 소명昭明한지라. 고故로 덕德에 들어가는 군자君子는 삼감을 한 생각의 홀로 아는 땅에 이루나니 안으로 이곳을 살펴서 그 착하고 악함을 살펴 마음에 이치만 있고 욕심이 없음을 기약期約하여 일호一毫의 병됨이 없어야 바야흐로 마음에 편안하여 미워함이 없을지라. 대저 병되지 아니하고 미워함이 없으니 군자君子를 진실로 가히 미치지 못할지니 다 안에 살핌으로 말미암음이라. 군자를 가히 미치지 못할 바는 다만 능히 사람의 보지 못하는 곳에 써 홀로를 삼감이니 이것이 성찰省察하여 위기爲己하는 공功이니라. 

 

 

 

 

○ 詩云 相在爾室혼대 尙不愧于屋漏이라하니 故로 君子는 不動而敬하며 不言而信이니라.

 

시詩에 이르되, 「네 실室(집)에 재在홈(있음)을 상相혼대(보건대) 거의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아니하다.」 하니, 고故로 군자君子는 동動하지 아니하여서 경敬하며 언言하지 아니하여서 신信하나니라.

 

[존양存養하는 일을 말하여 공功의 더욱 주밀周密함을 보임]

 

【李範圭】 다만 그것 뿐 아니라 대아억大雅抑의 시詩에 이름이 있으되, 「너의 네 집 가운데 있는 것을 보건댄 거의 항상 긍긍兢兢하고 업업業業함을 두어서 옥루屋漏의 귀신鬼神에게 부끄럽지 아니하다.」 하니, 고故로 덕德에 들어가는 군자君子가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함을 때에 혹 잊어버림이 없어서 동動함에 진실로 경敬하나 비록 동動하지 아니하여도 또한 반드시 이 경敬하는 마음을 두며, 말함에 진실로 신실信實하나 비록 말하지 아니하여도 또한 반드시 이 신실信實한 마음을 두니, 이것이 존양存養하는 공功이니 몸[己]을 위爲함이 더욱 주밀周密하니라. 

 

 

 

 

○ 詩曰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不賞而民勸하며 不怒而民威於鈇鉞이니라. 

 

시詩에 가로되, 「주奏하야(나아가서) 격假함(이름)에 언言(말)이 없어 시時에 쟁爭할(다툴) 이 있지 아니하다.」 하니, 이런 고故로 군자君子는 상賞하지(상주지) 아니하여서 민民이 권勸하며 노怒하지 아니하여서 민民이 부월鈇鉞(작두와 도끼)보다 위威(두려워)하나니라. 

 

[백성百姓 화化하는 일을 말하니 써 위기爲己하는 효험을 나타냄]

 

【李範圭】 군자君子의 존양성찰存養省察하는 공功이 주밀周密하니 그 효험이 어떠하뇨? 상송열조商頌烈祖의 시詩에 가로되, 「제사를 주장하는 자가 나아가서 신명神明을 감격感格케 하되 성각誠恪하여 말이 없으나 묘廟에 있는 자가 화化하여 다투어서 실례失禮함이 없다하니 이에 가히 이 덕德이 있으면 이 화化가 있음을 볼지라. 이런고로 군자君子가 몸[己]을 위하는 공부工夫가 성덕成德한 지위地位에 이르러서 이로 말미암아 몸[己]의 덕德이 백성에게 더하면 비록 상賞을 주어서 써 권勸함을 보이지 아니하여도 백성이 그 덕德을 입은 자가 자연自然히 크게 우러름이 있어서 착함에 권勸할 것이요, 비록 노怒하여 써 위엄威嚴을 보이지 아니하여도 백성이 그 덕德을 입은 자가 자연히 부월鈇鉞(작두와 도끼)보다 두려워하여 감히 악惡함을 하지 아니하리니, 대개 덕德이 사람에게 미침이 이와 같으니라. 

 

 

 

 

○ 詩曰 不顯惟德을 百辟其刑之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篤恭而天下가 平이니라.

 

시詩에 가로되, 「현顯하지(나타나지) 아니한 덕德을 백벽百辟(백명의 임금)이 그 형刑하다(법한다, 본받는다).」 하니, 이런 고故로 군자君子는 공恭(공손함)을 독篤히(두터이) 함에 천하天下가 평平(태평)하나니라. 

 

[화化가 이룬 일을 말하여 효험의 더욱 먼 것을 보임]

 

【李範圭】 다만 그 뿐 아니라 주송열문周頌烈文 시詩에 가로되, 「천자天子가 유원幽遠한 덕德이 있거늘 백百 임금이 다 법 받는다(본받는다).」 하니 이에 가히 덕德이 더욱 성盛하면 화化가 더욱 넓음을 볼지라. 이런고로 군자君子가 존存하고 성省하는 공功을 말미암아 그 극極함에 나아가니 이 마음이 혼연渾然한 천리天理라 생각 생각이 이 공손함으로 하고 때때로 이 공손함으로 하여 도탑고 두터움이 혼연渾然히 깊어서 가히 엿보아 측량하지 못할지라. 천하天下의 사람이 스스로 법에 순順하여 알지 못하되 홉연翕然히 평平하게 다스려서 자연히 권勸하고 위엄스러운 자최가 아울러서 없어지나니, 이것이 성신聖神의 공功과 화化의 극진히 이름이니라. 

 

 

 

 

○ 詩云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 하거늘, 子가 曰 聲色之於以化民에 末也이라 하시니라. 詩云 德輶如毛이라 하니 毛猶有倫이어니와 上天之載가 無聲無臭至矣니라.

 

시詩에 이르되, 「내 명덕明德(밝은 덕)의 성聲과(소리와) 다못 색色(빛)을 크게 아니함을 회懷하노라(생각하노라).」 하거늘, 자子가 가라사대, ‘성聲과(소리와) 색色(빛)이 써 민民(백성)을 화化함에 말末(끝)이라.’ 하시니라. 시詩에 이르되, 「덕德의 유柔함이 모毛(털) 같다.」 하니 모毛는 오히려 윤倫이 있거니와 상천上天의 제載가(일이) 성聲이(소리가) 없으며 취臭(냄새가) 없다 함이라야 지극하니라.

 

[불현不顯의 묘妙함을 찬贊함]

 

【李範圭】 군자君子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공경恭敬을 도탑게 하여 천하天下가 스스로 평平(태평)하면 그 덕德의 미묘微妙함이 어떠하뇨? 대아황의大雅皇矣 시詩에 이르되, 「상제上帝가 문왕文王에게 이르사대 내가 너의 밝은 덕德이 그 소리와 얼굴빛을 크게 베풀지 아니함을 생각한다.」 하니, 이 말이 가히 나타나지 아니한 덕德을 형용形容할 것 같으나, 그러나 공자孔子가 일찍이 말씀하시되, 정사政事를 하는 자가 백성을 화化함이 근본이 있으니 소리와 빛 같은 것은 써 백성을 화化함에 특히 끝[末]의 힘씀이라. 이제 다만 시詩의 크게 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잡은[執] 즉 오히려 소리와 빛을 떠나서 자최 없는 데에 민멸泯滅치 못함이니 일찍이 이것으로 가히 그 묘妙함을 형용形容하랴. 증민蒸民 시詩에 이르되, 「덕德의 세미細微함이 털과 같다.」 하니 가히 나타나지 아니한 덕德을 형용할 것 같으나 그러나 털[毛]이 비록 적으나[微] 털로 써 덕德에 비比하면 덕德은 오히려 비할 류類가 있으니 이것이 비유한 류類를 초월超越하여 형상이 없음에 들어가지 못함이니 일찍이 이것으로 가히 그 묘妙함을 다하겠느냐? 

 

오직 문왕文王의 시詩에 이르되, 「상천上天의 일[事]이 소리를 가히 들을 것이 없고 냄새를 가히 들을(맡을) 것이 없다.」 하니, 대저 소리와 냄새인즉 기운은 있고 형상은 없으니 이미 이 미묘微妙하거늘 또 없다 이른즉 천하天下의 미묘微妙하여 그 자최를 보지 못하여 그 그러함을 알지 못할 것이 이에 지남이 없을지라. 이로 써 형용하면 바야흐로 군자君子의 나타나지 아니한 덕德이 같이 하늘에 부합符合됨을 볼지니 참 가히 지극하여 더할 수 없음을 이름이라. 덕德이 이에 이르면 하늘로 더불어 덕德을 같이하여 중용中庸의 극極한 공功이 되리니 마음을 세우고 몸을 위하여 그 공功에 나아감이 아니면 또한 어찌 능히 이에 이르리오?

 

 

 

 

[중용中庸] 이범규李範圭 해解 

 

종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