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리(我這裏)에는 석상재화(石上栽花)다.】

2022. 1. 28. 13:07전강선사 법문

아자리(我這裏)에는」... 응, 허! 이거 법문(法門)이 하도 오래오래 됐는디, 「아(我) 자리(這裏)에는, 내 이 속에는」, 이 속은 내 마음 속이란 말이지? 내 가슴 속이라고도 되고 잉? 또 이 도 닦는 응? 그 속이라고도 되는디, 아 자리에는, ‘그 공부인의 공부헌 사람에 가슴 속은’ 그 말이지 잉? 이 자리(這裏)란 건? 아자리(我這裏)에는, 내 이 자리에는, 「언어동용(言語動用)으로는 교섭(交涉)헐 수가 없다.」 그 도 닦는 자체(自體)니까. 도를 닦는 그 자체 속에는 언어(言語)와 동용(動用)으로는 교섭헐 수가 없다.

그건 무슨 말인고? 말과 언어, 언어, 말허는 그 말과 동용, 동(動)허고 용납(用納)허는 거. 그저 우리가 인생에 모도 동요(動搖) 용납(用納) 아닌가? 갔다 왔닥 하고, 밥 먹고 옷 입고, 운수급반(運水及般)하고 그거 아닌가? 말과 무슨 움직이고 동용(動用)허고 그런 것 가지고는 교섭(交涉)헐 수가 없다. 그러니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며는, 도(道)가, 참선법, 내가 나를 떠억 찾는 법이 말로 찾거나 동용으로 찾거나 그럴 수 없다 그 말이여. 그런 걸로는 안 된다 그 말이여. 내가 나를 찾는 법이.

도대체 도무지 거 무슨, 거 뭐 뭐 무슨 마음으로써 찾아야 할 것인가? 일체 언어망담(言語妄談), 말해서 거짓말 망담 그런 것 가지고는 더 말할 것도 없다마는, 꿈적거리고 동용가지고도 안 된다.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일체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붙지도 못허지마는, 거 무슨 뜻이 움직이고 뜻이 무슨 일어나고 그러헌 무슨 그 우리의 인생의, 인생의 망념이라는 것은 도무지 쉴 새 없이 퍼 일어나는 것이 마침 똑 산골차구니(산골짜기)에 안개 일어나듯기 별별 그 응, 중생념(衆生念)이 일어나지 않어? 고러헌 것으로는 안 된다 그 말이지. 일체 번뇌망상, 일체 언어 응? 망어(妄語), 그런 거 가지고 될 수가 없느니라. 참으로 망생(妄想)이 없는 마음, 참말로 진실헌 마음으로써 닦아야 할 것이니라. 그렇게 밖에는 헐 수가 없어. ‘언어동용(言語動用)으로는 교섭헐 수 없다.’ 그 말이여.

또 그러니 큰스님 한 분이 듣고선, 「무언어동용(無言語動用)이라도 몰교섭(沒交涉)이니라. 언어동용이 없는 도리(道理)로써 더라도 교섭헐 수가 없느니라.」 언어동용으로는 교섭헐 수 없다니까, 언어동용 없는 도리로도 교섭헐 수가 없다 이랬네. 그러니까 또 한 스님은 있다가, 아자리(我這裏)에는, 내 이속은, 내나 인자 아까 말 했으니까 더 헐 것 없고, 「아자리(我這裏)에는 석상재화(石上栽花)다. 돌 우에 꽃을 심었느니라.」 그랬거든. 돌 우에 꽃을 심었느니라.

법문이 이렇게 되아있으니, 그러헌 법문을 그 어떻게 들어야사 바로 듣고 바로 볼까? 법문이라는 게 이렇게 딱딱 하니, 공안이란, 공안법문(公案法門)이란 건 이렇게 되아 있어. 허지마는 이렇게 되았닥 해서 안 헐 수가 있어야지. 아무리 딱딱하고 아무리 뭐 바로 볼 수 없고 바로 들을 수 없닥 하더래도 법문을 해줘야지 어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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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허니 만공(滿空)큰스님께서는 떠억 이러헌 법문(法門)을 허시더니, 대중을 모아놓고 물되,  -그때 요렇게 된 법문이여. 어저께 내가, 어저께 했나? 무슨... 그건 다, 뭔 그... 어디서 그것을 내가 가서 들었나 내가? 똑 그 뭐 헌 것도 같고 들은 것도 같고 그렇군. 녹음해서 들은 것도 같고 그려-  뜻밖의 대중을, 오십 명(50명) 대중(大衆)을 모아놓고 여름날 칠 월(7월)달에 인자 해제(解制), 오늘도 해제법문인디, 이건 겨울 해제법문(解制法門)인데 만공 큰스님은 그때 여름 해제법문이여. 여름 해제법문이니깐 칠 월 달 아니여? 칠 월 달 법문인데 해젯날 법문이여.

“매미란 놈이 저렇게 냉긔에서 우니,  -‘매엠 매엠 맴.’ 고런 게 있더만? 그런 매미 있지?-  저렇게 우니, 매미란 놈이 저렇게 울기는 운다마는 저 매미 소리는 우리 귀에까장 들어왔다. 허지마는 저 매미 마음을 잡아오자. 매미 마, 매미, 매암 마음을 잡아오는데,  -이상스럽게 물었어-  저 매미 마음을 먼첨(먼저) 잡아온 사람은 한택(한턱)을 먹고, 저 마음을 나중에 잡아온 사람은 한택을 내기로 허자.”

이렇게 물었어. 그래 별 답을 참 다 해도 매미 마음을 머냐(먼저) 잡아왔다고 허락을 해주지 안 혀. 별 소리 다 답(答)했지. 그 ‘매미를 먼첨 잡아오면 한택을 먹게 허자.’ 거, 그 말씀이 보통 어떻게 헐 수 없는 말이여. 도저히 먼첨 잡아올 수 없는 말이여.

이러헌 이 참 법댐(法談)이라 하는 것은 묻는, 선사(禪師)에 묻는 뜻을 봐야하거든! 선사에 묻는 뜻을 바로 보지 못허며는 거 소용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안 될 일이다 그 말이여. 대중이 한 오십 명(50명) 대중이 다 답을 했는디, 매미 먼첨 잡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이여. 나는 그때 법문 들을 때 맨 꽁무니, 아무것도 모른 천추여. 긍게 뭐, 우리는... 나는 매미 머냐 잡아올라고도 안했지마는 거기에 모도 모여서 도 닦는 분들은 다 구참(舊參)이고 모도 한 마디썩 허는디, ‘아, 저런 스님네는, 모도 저 선객(禪客) 스님네는 큰스님네 법에 낱낱이 와서 저렇게 답을 척 허고 헌디, 원 나는 이 주제 넘는 것이 말 한 마디를 답 못허고 있으니 웬일인가?’ 아, 대체 부끄럽더란 말이여. 다 한 마디썩 허는데 나는 못허고 있거든!

그러면 ‘어쩧게 해야사 나도 저런 말을 듣고 한바탕 대답을 해보꼬?’ 나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절대 없었어. 그런 ‘내가 만약 거기에 눈이 없고 귀가 없고, 답을 헐라고 헐 것이 뭐냐?’ 그저 내 본참화두(本參話頭)만 들고 참 맹렬히 했습니다. 흔히 그 법담을 내가 못해서 ‘나도 한마디 해봤으면 어쩌고...’ 이래가지고는 그 내 본참화두는 내던져버리고 엉뚱한 것을 가지고는 며칠씩 그만 따지고 그만 그럽니다. 그것 참 못쓰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법문이기 따문에 간단한 말씀으로써, 그 내 본참(本參) 내버리고 무슨 공안법문(公案法門)이 나오며는 그 공안법문 그것을 대답헐랴고 자꾸 그 상량(商量)하는 거, 그것 참 적지 않는 손해(損害)ㅂ니다. 크게 해독(害毒)이니까, 도 닦아나가는데 그게 참 해로우니까 부디 그러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 전강선사 법문 5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