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6. 08:22ㆍ송담선사 법문
【몸은 ‘정법장正法藏’, 마음은 ‘무애등無礙燈’】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욕식구년묵(欲識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산월(山月)이 투창백(投窓白)이요
계성(溪聲)이 입호명(入戶鳴)이다.
산에 뜬 달이 창(窓)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까지 울려오는구나.
욕식구년묵(欲識九年黙)인댄,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구 년(9년) 동안을 묵무언(默無言)하시고 면벽관심(面壁觀心) 하신 그 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다.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힐지니라.
조사(祖師)가,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쪽에서 오셔가지고 소림굴(少林窟)에서 구 년(9년) 동안을 묵묵히 면벽관심(面壁觀心)하신 그 깊은 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혀라. 「이 가운데」 라 하는 것은, 「산달이 창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까지 울려오는 바로 그 속을 향해서 밝혀라.」
이 게송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이신 소요(逍遙)스님의 게송인데,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든지 불법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라던지, 이것이 우리가 참선수행(叅禪修行)하는 사람의 중대(重大)한 과제(課題)고 그것을 바로 깨달아야 자성(自性)을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대단히 뜻 깊은 소중한 문젠데, 그것은 경(經)을 연구하고 파고 그래가지고 그 진리(眞理)를 깨닫, 깨달을 수가 없고, 「산달이 창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 까지 들리는 그 속을 향해서 밝혀라」
아까 조실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는데, 「즉심(即心)이 시불(是佛)이다, 곧 마음이 이 부처다」하는 그 말을, ‘짚신이 부처다. 신, 짚으로 만든 짚신 짚세기가 부처다’고 그렇게 알아듣고 계속 그것을 화두(話頭) 삼아서 ‘어째서 짚신이 부천가?’ 그러다가 결국은 깨달았다고 허는 그런 말씀을 허셨는데, 화두(話頭)라고 허는 것은 아무 따져봤자 아무 재미도 없는 지극히 간단한 한마디지마는, 신심(信心)으로 그 화두를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한테 받아가지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헐 때까지 그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참구(叅究)해 나가면, 처음에는 화두를 드는 가운데에도 자꾸 온갖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또 좀 잠잠해질 만 허며는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졸음이 오고 혼침과 산란(散亂)이 뒤범벅이 되아가지고 해갈수록 알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재미가 없고 그렇지만, ‘정말 내가 헐 일은 오직 이것밖에는 없다, 오직 이 조사관(祖師關)을 타파(打破)해야만 나의 생사(生死)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허는 철저한 신심으로 한결같이 중단(中斷)하지 않고 해나가면,
결국은 더 이상 의심(疑心)이 커질 수 없고,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리고, 나아가서는 이 몸이 이 세상에 있는 것까지도 아지 못하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오직 의단만이 독로해서 더 이상 의심이 간절헐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빨리 깨닫기를 바래거나 누가 이럴 때 깨닫게 해주기를 바래지도 아니하고 오직 알 수 없는 의단만을 한결같이 참구해 나가면, 어떠헌 찰나에 그 의단이 통 밑구녘 빠지듯이 툭 터져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함과 아울러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게 된다고 허는 것은, 활구참선(活句叅禪), 간화선(看話禪)의 요제(要諦)요,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으로 철저허게 해나가면 결국은 자기를 깨달을 수 밲에는 없다. 틀림없이 깨달을 수 있다고 허는 신렴(信念)을 가지고 이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해나가다 보면 이 몸띵이와 마음과 화두가 혼연(渾然)히 일체(一體)가 되아가지고 그럴 때에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야 하느냐?” 어떤 수좌(首座)가 그러헌 의심이 나서 물어온 사람이 있는데,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았다’고 허는 생각 가질 때 이미 하나가 아닌 것이고, 또 ‘화두가 하나가 되았다’고 헌 생각을 냈다면은 그 화두가 온전히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헌 것이 아닌데, 본인은 ‘몸과 마음과 화두가 하나가 되았을 때 어떻게 허느냐, 어떻게 공부를 허면 좋으냐’ 그런 질문은 인자 공, 어떻게 해서 그러헌 생각을 냈는가, 정말로 몸과 마음과 화두가 혼연히 일체가 되었다면 알 수 없는 의단만이 독로헐 뿐이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 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단을 관(觀)해 나갈 뿐이지 ‘하나가 되았을 때 어떻게 허느냐’ 그런 생각을 왜 일으키느냐 그 말이여.
처음에는 화두를 들어도 금방 없어지고 딴 생각이 일어나고, 또 챙기면 또 잠깐 있다가 딴 생각이 침범해 버리고, 그저 번뇌와 망상과 뒤범벅이 되아가지고 되다가 안 되다가 되다가 안 되다가 이제 누구나 다 그러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중단허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해나가면 결국은 화두가 의단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서 그렇게 끊임없이 일어났던 망상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오직 의단만이, 알수 없는 의단만이 독로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았다’ 는 그런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앉으나 서나 밥을 먹을 때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静)간에 순수무잡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헐 때까지 한결같이 공부를 해나가는 것뿐입니다.
망상(妄想)도 가라앉고 번뇌(煩惱)도 가라앉고 혼침(昏沈)도 없어지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맑고 말로 표현 헐 수 없는 그런 조용하고 그런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아! 인자 공부가 잘 되는구나.’ 그런 생각도 헐 필요가 없는 것이여. 그럴 때일 수록에 오히려 화두를 잘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뿐이어야 허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되아간다고 좋아허는 생각을 내면, 벌써 좋아허는 ‘환희(歡喜)의 마군(魔軍)이’가 들어붙은 거고, 그러다가 뚝 변해가지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영~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괴롭고 모다 그런다 하더라도, 그런 경, 때가 온다 하더라도 또 번뇌심을 내거나 그래서도 안 된다 그 말이여. 번뇌심을 내며는 ‘번뇌의 마구니’가 그것이 벌써 들어붙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는 이 공부는, 잘 되아도 잘 되았다는 생각 내면 그것도 안 될 일, 잘 안 된다 하더라도 안 된다고 생각을 내면 벌써 곁길로 빠진 것이다 그 말이여.
‘눈으로 볼 때, 귀도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온갖 생각으로 생각이 일어날 때, 육근(六根)을 통해서 마군이가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고인(古人)네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왜 마군이가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엿보고, 기회를 엿보고 있느냐 하면은, 공부가 잘 되아가지고 툭 터져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도(道)를 이루면 제일 무서워 허는 것이 누가 무서워 허냐 하면 마군이, 마군이들이 무서워한다 그 말이여. 도인(道人)이 태어나고 부처님이 태어나면 마군이가 소탕(掃蕩)이 되기 때문에 마군이들은 도인이 도를 이루지 못허도록,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하도록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어떠헌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도(道)를 방해(妨害)치는 것이 마군인데,
마빡에 뿔이 나고 아금니가 흡혈귀처럼 그렇게 생기고 입이 쭉 째지고 손톱은 독수리 손톱처럼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니고, 예쁜 여자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권리가 있는 사람이나 또 가장 신심이 있는 사람처럼 가장해 가지고 그 도 닦는 사람을 유혹하고 흔들어 놓기 위해서 가장 묘한 방편을 써가지고 접근을 해오게 되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간 철저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그런 마군이의 교묘한 수단과 방편에 걸려들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누구를 사기를 칠 때에, 가장 정직하고 순수하고 그 사람을 가장 위하는 것처럼 접근해 와야 사기가 먹어, 먹혀 들어가는 것이지, ‘내가 사기꾼이다’ 흉악무도(凶惡無道)허게 생겨가지고 와서 사기를 칠랴고 하면 누가 그 수단에 넘어가서 사기를 당하겠습니까?
도문(道門)에 있어서의 마군이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도 닦는데 마군(魔軍)이와 장애(障礙)가 없다며는 누가 도를 못 통하겠습니까? 정말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을랴고 허면은 그럴 수록에 온갖 종류의 마군이가 들어붙어 가지고, 미인계(美人計)도 쓰고 온갖 수단을 다 쓰게 되는데, 그런 디에 안 빠질랴며는 항상 선방(禪房)에서,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 지내는 것이 가장 좋고, 또 좋은 도반(道伴)과 같이 도를 닦는 것이 그러헌 마군이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에 옛날부터서 대중처소에서 모여서 결제(結制)를 하고 도를 닦도록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다 그렇게 지도(指導)를 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道라고 허는 것은, 어떠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평상시(平常時)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눈을 통해서 뭣을 보거나, 귀를 통해서 뭣을 듣거나, 육근을 통해서 모든 바깥경계와 접촉헐 때에, 자기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진(六塵)을 만나면은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이 생기는 그 찰나’가 바로 내가 나를 찾는, 나로 돌아가는 가장 좋은 기회(機會)라 이것입니다. 눈으로 뭣을 보았을 때 이 공부를 헐 줄 모른 사람은 눈으로 보는 데, 보이는 디에 따라가가지고 거기에서 망상을 일으키는데, 공부허는 사람은 눈으로 뭣을 보는 찰나에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叅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이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듣는 데에 따라가서 거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듣는 그 찰나에 ‘이 뭣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叅公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뭣이 보인다고 성화(成火)를 댈 것도 없고 무슨 소리가 잡음이 들리고 시끄럽다고 해서 성화를 댈 것이 아니라, 그 찰나찰나, 산에 비추는 달빛을 볼 때에 그, 그 찰나, 그걸 보고서 ‘야! 달이 밝구나.’ 달이 밝아서 낮보다 더 밝고 휘향창 밝으면 시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시를, 시심(詩心)이 발동(發動)을 헐 것이나, 우리 참선(叅禪)을 헌 사람은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이거거든. 시냇물 소리가 들려오면, 그것을 시냇물 소리를 듣고 옛날을 생각헌다든지 고향을 생각헌다든지 또는 그 시냇물이 맑고 그 시냇물 소리가 너무너무 좋다든지 이런 쪽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시냇물 소리를 들은 그 찰나에 떠억 자기의 본참화두 ‘이 뭣고?’ 이렇게 들면, 산달을 보아도 ‘이 뭣고?’요 시냇물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아까 조실(祖室)스님 법문 가운데에, 산중(山中)에 본산(本山) 그 깊은 산중에 있는 큰 절은 옛날에는 모다 선방(禪房)도 있고 지금도 역시 선방이 있으나 그런 절들이 모다 관광지(觀光地)로 되아가지고 오히려 더 복잡허고 시끄럽다. 그래서 <멸의경滅義經>에 보며는 「진승(眞僧)은 하야(下野)하고 가승(假僧)이 입산(入山)이다, 진짜 참으로 도를 닦을 중은 들로 내려가고 가짜 중은 산으로 들어온다」고 <멸의경滅義經>에 그러헌 말씀 있는 것을 봤습니다마는, 조실스님 법문에도 요새 모든 깊은 산중들은 다 관광객들로 인해서 몹시 소란스러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관광객이 들어와서 시끄럽거나 시냇물 소리가 들려서 시끄럽거나 산새가 울어서 시끄럽거나 달이 휘향창 밝어서 마음이 산란(散亂)하거나, 그러헌 것이 참으로 발심을 해서 올바르게 수행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아니헐 것이고, 또 여기 용화사(龍華寺)처럼 도회지(都會地) 한가운데 있어가지고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전차, 전철 소리가 들리고 또 뭐 과일이나 채소장수가 마이크로 외치고 댕이는 그런 소리가 들리거나 그런 것이,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올바르게 수행해나가는 자세가 되아 있는 사람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냄새가 나고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없, 없으려니와, 공기가 탁(濁)한 것은 정말 화두를 자꾸 든, 들고 열심히 정진精進헌다고 해서 꼭 공기가 맑아지는 것은 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나쁜 공기로 인해서 기관지가 나빠지기도 허고 모다 이 머리가 깨끗허지를 못허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있어서, 인제(麟蹄)에다가 인제용화선원(麟蹄龍華禪院)을 지어서 개원(開院)했습니다마는, 이 용화선원에서 한철 두 철 여법(如法)허게 수행을 잘 하신 그런 수행자로서 그 공기 좋은데 가서 또 공부허고 싶어, 싶어한 그러헌 원(願)을 가지신 분은 또 거기에도 몇 분을 방부(房付)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한 선방(禪房)을 지었습니다. 또 거기서 지내다가 또 인자 이 또 여기 와서 또 지내고 그러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공부는 [선요(禪要)]에, 고봉(高峰)스님 법문에 「대한(大限)은 구순(九旬)이요 소한(小限)은 칠일(七日)」 이라고 허는 그런 말씀이 있으나, 고인(古人)네도 석 달 동안에 깨달으신 분도 있고 일주일 만에 깨달으신 분도 있고 사흘 만에 깨달으신 분도 있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허신 분도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부가 그렇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깨달을 때에는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로 한번 뛰어서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간다고 그런 말씀도 있기는 허나 이 공부가 그렇게 일조일석에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일언지하에 깨달랐다 하더라도,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과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허게 갖추신 부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깨달은 뒤에도 끝없는 보림수행(保任修行)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그렇게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아닙니다.
조급한 생각을 내가지고 말뚝 신심을 내가지고 이를 악물고 밥을 굶고 밤잠을 안자고 그렇게 헌다고 해서 꼭 크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자세(姿勢)와 호흡(呼吸)과 또 화두(話頭) 드는 법을, 그러헌 기초(基礎)를 올바르게 배와가지고, 급한 생각도 내지 말고 너무 늘어진 생각도 내지 말고, 항상 여법(如法)허게 행주좌와...좌와간에 여법허게 수행을 해나가면 반드시 깨달을 때가 온다고 허는 신렴(信念)을 가지고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젊고 패기가 있는 그러헌 분은 처음에 발심을 해가지고 아주 말뚝 신심을 내가지고 우격다짐으로 이것을 막 몰아붙이다가 오히려 중간에 병(病)을 얻어가지고 고생하는 분도 내가 가끔 봤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그렇게 헐 것이 아닙니다. 이 공부는 어피차 내가 해야 할 공부이고, 언제 허드라도 내가 해야 할 공부이기 때문에, 고조사(古祖師)의 바른 법문과 지도에 의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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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환자사(居然還自思)허니
불병기유수(不病其有誰)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가석백년사(可惜百年事)여
이아동일구(爾我同一丘)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거연환자사(居然還自思)호니
불병기유수(不病其有誰)오.
곰곰히 돌이켜 스스로 생각해 보니 병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말이여.
다 병을 앓다가 결국은 다 죽어간다 그 말인데,
가석백년사(可惜百年事)여.
백년의 일이, 인생 오래 살아봤자 백년인데, 백년(百年) 사는 그 인생이라 허는 것이 정말 가석(可惜)허다 그 말이여.
이아(爾我)로 동일구(同一丘)로구나.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결국은 공동묘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구나.
이러헌 고인(古人)의 시(詩)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면 차츰차츰 나이가 먹어 들어가고, 나이가 먹어 들어가면 무슨 병을 앓던지 오장육부(五臟六腑)에 또 병(病)이 나고, 병이 나지 아니허면 어떤 사고로 다쳐서 불구자(不具者)가 되기도 허고 고생도 허게 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고생을 허다가 죽게도 된다 그 말이여.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병을 한 번도 앓지도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또 어떤 사고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그럭저럭 허다보며는 결국은 또 죽게 되는데, 근자(近者)에도 많은 스님네도 여그서 저그서 돌아가시고 많은 거사님들도 돌아가시고 보살님네들도 돌아가시는데, 그런 분은 좀 더 오래 사셔도 될 만한 그런 분이 여그서 저그서 툭툭 이 세상을 하직(下直)을 헌다 그 말이여.
현재 고혈압이라던지 간경화증이라던지 온갖 무슨 각종 암이라던지 고생을 하신 분들도 참 많은데, 그러헌 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여. 바로 그것이 바로 자기의 일이여. 아직까지는 이만큼 건강하고 아직까지는 젊다하더라도 병고(病苦)와 죽음이 언제 닥쳐올 줄을 모르는 것이 사바세계(娑婆世界)요 인생(人生)이라 하는 것인데, 그래서 앓는 사람을 봐, 보아도 그것을 그냥 범연(泛然)히 지낼 것이 아니라, 바로 저것이 나한테도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거고, 누가 돌아가셨단 말을 들으며는 물론 위로(慰勞)도 해주고 조문(弔問)도 가고 그, 그러지만 그것이 또 금방 자기 가정에도 일어날 수 있고 자기 가까이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 닥쳐올 수도 있고, 바로 자기에게도 그런 병과 죽음이 닥쳐올 수 있는 것이라고 허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서, 거기에서 무상(無常)을 느끼고 거기에서 오히려 신심(信心)을 돈독(敦篤)히 해 가지고 자기 공부해 나가는데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누구나 건강허기를 바래고 그리고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살면서 좋은 일도 더 많이 허고 자기가 목적헌 바를 성취허기도 하고, 참선허는 사람은 더욱 참선(叅禪)을,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났을 때 공부헐 줄 알았을 때 더 공부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정말 도를 닦아서 성불(成佛)을 헐랴면은 좋은 일, 희로애락(喜怒哀樂)과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발심(發心)헐 수 있고 무상(無常)을 느낄 수가 있고 분발심(憤發心)을 내서 더욱 도를 잘 닦을 수가 있다. 그래서 사바세계를 선택 헌다’고 허는 말씀도 들었는데, 어피차 우리는 과거에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던지 업(業)으로 인(因)해서 사,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든지 간에, 우리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우리는 이렇게 만났고 불법(佛法)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사바세계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흥망,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범벅이 되아 있는 세계이기는 하나,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만났기 때문에, 불법은 바로 흥망성쇠와 생로병사 속에서 생사(生死)없는 도리(道理)를 깨닫는 공부가 바로 이 불법이고 보면, 우리는 가장 좋은 세계에 좋은 곳에 좋은 때를 만났다고 생각헐 수가 있고, 우리가 이 좋은 도반(道伴)들과 한 도량(道場)에서 불법 법문을 듣고 이렇게 이런 기회(機會)를 갖게 되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른 방법으로 무상(無常)을 철저히 깨닫고서 열심히 공부허는 것 밲에는 없습니다.
부자(富者), 사바세계에는 돈, 재산도 필요허지요. 명예도 필요허고 권리도 필요헐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을 살아가는 맛도 있고 사업허는데도 좋고 자, 자녀를 길르는데도 다 그런 것이 필요헐 것입니다마는, 그래봤자 그것들이 다 꿈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하니, 그런 것이 필요허기는 허되 그것을 위해서 나의 인생과 생명을 거기다 다 바칠만한 것이 못됩니다. 필요허니까 그런 것을 유지허기 위해서,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의 노력은 해야 하겠지만, 그러헌 속에서 정말 나에 인생과 나의 생명까지 바치기 위해서는, 바칠만한 것은, 내가 나의 자성(自性)을 찾는 것이요 참 나를 깨닫는 것 이상이 없는 것이다.
부귀영화(富貴榮華), 오욕락(五欲樂)이라 하는 것은 영원성도 없는 것이고 추구헌다고 해서 제마다 다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나를 찾는 이 수행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헌다면 다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다고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가 한결같이 보증(保證)을 허셨습니다. 그래서 잘 안 될 수록에 이것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고, 어려울 수록에 더욱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해봐도 별로 효과가 없고 별로 재미도 없지만 이것은 한결같이 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속(世俗)에 오욕락(五欲樂)은 재미도 있고 허면은 헌 만큼 뭣이 얻어진 것이 있지만, 이것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고 맛도 없고 재미도 없으나, 그러나 목숨을 바칠 것은 이것 밖에는 없다고 하면은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판치생모’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이 뭣고’를 허신 분은 「이 뭣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해나가야지, 이걸 가지고 좀 해보다 안 되면 저것 가지고 해보다 그거 안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법문들을 때마다 이 스님은 ‘이 뭣고’ 허라, 어떤 스님은 ‘전정백수자(庭前柏樹子)’를 하라, 어떤 스님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을 허라, 천칠백 개(1700개)나 되는 화두를 스님네 마다 다른 화두를 일러주시니까 이것 갖고 해보다 저것 갖고 해보다 이건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한번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한테 화두 하나를 딱 간택(揀擇)을 받았으면 한 달을 해도 잘 안되고 일 년(1년)을 해도 잘 안되고 삼 년(3년)을 해도 별로 잘 안 된다 하더라도 자꾸 화두를 바꾸면 점점 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더라도 한결같이 한 화두를 가지고 바른 자세로 호흡을,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꾸준히 해나가면 반드시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니까 그러헌 신렴(信念)을 가지고 이 공부를 지어 나가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니, 깊은 땅속이나 바닷 속에 들어가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옷 입고 눈으로 보고 들을 때 허는 것이니 그때그때 떡! 챙겨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을 거각(擧却)해서 해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단지불회(但知不會)」여, 다만 아지 못허게 되아야지 알아 들어가 놓면 그 공부 잘 못한 거여. ‘이 뭣고?’ 알수 없는 의단(疑團)만 챙겨나가면 그게 공부가 바로 되아가는 것이여. 알아 들어가거나 보인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공부 잘못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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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음력 오월(5월)로 접어 들어서 오월에는 삼, 오뉴월에 삼복(三伏)이 돌아오니까 앞으로 낮, 차츰 더워질 것입니다. 또 장마철이 돌아왔습니다. 더울 때는 더웁고 습기가 차면 그것을 ‘불쾌지수(不快指數)가 높다’ 그러는데, 공부를 안 헌 사람은 신경질 내기 좋을 때가 왔습니다. 공부허는 사람은 그렇다고 신경질 낼 것이 아니라 떠억 자세를 바래고, 정 더우면 부채질을 살살 허면서 ‘이 뭣고?’ 를 허면 참 공부가 잘되는 것입니다. 거 에아콘(air conditioner) 틀어놓고 그런 속에 있으면 공부가 잘될 거 같지마는 건강에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니까 에아콘 보다는 부채질을 살살 허면서 ‘이 뭣고?’ 를 허면 그 공부가 잘 되거든.
근데 요새 덥다고 바다로 많이 가고 산으로 많이 가시는데, 장마철에는 폭우(暴雨)가 오기도 하고 그러니까 너무 그런 걸 지각(知覺)없이 그런 데 가다가 어려운 일이...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오늘 같은 날도 바다로 가시거나 산으로 가신 분들도 꽤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렇게 절에 오셔서 법문을 들으러 오셔서 참 감사하고, 더울 수록에 자기를 찾는 공부에 열중을 헌다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믿는 수행자의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바다로 가봤자 뭐 재미있는 일도 있으나 그 고생이 막심한 거고, 찻길도 위험하고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바다로 산으로 갈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덥다고 공부를 등한(等閑)히 하고 춥다고 등한히 하고 몸이 괴롭다고 등한히 헌다면 공부헐 기회는 점점 놓치고 마는 것이니까 그렇게 아시고, 더울 때 신경질 나고 불쾌지수 내면 그렇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허시기를, “무릇 「중생(衆生)」이라고 허는 것이 무엇이 중생이냐. 곧 이 자기, 자기의 몸이, 몸에 낮이나 밤이나 일어나는 끝없는 망상(妄想)이 바로 그것이 중생이다” 그러셨습니다. <대집경(大集經)>에 보며는 “낮이나 밤이나 생각 생각, 생각이 항상 일어나는데, 그 끝없이 일어나는 백 가지 천 가지 생각이 바로 무량백천중생(無量百千衆生)이다” 이렇게 말씀허셨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은 한 중생(衆生)의 몸을 받는 거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천상(天上)에 잠깐 태어난 것이고, 악한 생각을 내면 삼악도(三惡道)에 몸을 받아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백(百) 생각이 일어나면 백, 백에 중생衆生의 몸을 받는 거고 천(千) 생각이 일어나면 천에 중생의 몸을 받아난 것이다. 하룻낮 하룻밤에 수 없는 생사(生死)를, 생사의 뿌리를 심어가지고 후생(後生)에는 팔억오천만(八億五千萬)의 잡(雜)된 중생(衆生)의 몸을 받게 되아가지고, 되는데, 백 년(100년) 중에 얼마나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일어나면, 일어났던지 간에 그것이 바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몸을 받아 나가지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손바닥 만헌 공간도 없이 자기가 태어날, 중생(衆生)의 몸으로 태어날 장소를 마련헌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그러니 무슨 생각이 일어나지거나 그 생각을 없앨라고 헌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생각이나 궂은 생각이나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 생각에 즉(即)해가지고 화두(話頭)를 턱 추켜들어라 그거거든. 두 번째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화두를 떡 들며는 중생(衆生)의 몸을 받아날 그 기회(機會), 그 찰나(刹那)에 부처님으로 태어날 종자(種子)를 심은 것이 되, 되기 때문에, 화두를 든다고 허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고 소중헌 것이다 그 말이여.
우리가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데 어찌 속상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무량겁(無量劫)을 오면서 지어놓은 업(業)이 있어놓으니, 온갖 속 썩을 일도 생각을, 만나, 생각이 일어날 것이나, 불법(佛法)을 안 믿는 사람은 그때그때 다시 내생(來生)에 받어날 -물론 가깝게 보면 그 찰나가 벌, 벌써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천상에 태어난 것이고 삼악도에 태어난 것이지만, 그냥 평범허게 에 ‘내생에 태어난다’고 이렇게 일반적으로는 생각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지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그 찰나에도 우리는 화두를 듦으로 해서 깨달음의 몸을 받아나게 되는 그런 우리는 좋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오뉴월 삼복성염(三伏盛炎)에 불쾌지수가 높다 야단들이지만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도반들은 그러헌 때를 당해서 턱 숨을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해나가시자 이것입니다.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으로 뭉쳐진 똥이 가뜩 들은 가죽 주머니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불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몸을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헐 수 있는 좋은 이것이 법당(法堂)이요, 이것이 바로 이 몸이 있어야만 도(道)를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 말씀 허시기를, “이 몸은 정법장(正法藏)이요, 정법을 담아 논 법당(法堂)이요, 이 우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허는 그런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우리의 마음은, 마음자리는 걸림이 없는 등(燈)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 如華嚴經頌云。“身為正法藏。心為無礙燈”。] 조료제법공照了諸法空하면,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태양과 별과 달과 우주법계와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한마디로 말 허면 그것이 제법諸法인데,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면 다 실지(實地)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서 있는 허공(虛空)의 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가루가 되아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태양도 없어지고 별도 없어지고 달도 없어지고 이 지구도 결국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데, 몇 억 광년 뒤에는 다 없어지는데, 몇 억 광년(光年)이나 일찰나(一刹那)간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다 공(空)했다고 허는 그 이치를 믿어야 하고 그것을 깨달라야 하는데, 그것을 깨닫고 보면 바로 그것이 자기가 자기(自己)를 제도(濟度)헌 것이요.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헌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 照了諸法空。名曰度眾生。]
자기를 제도하고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허는 법(法)이 찰나찰나 화두(話頭)를 드는 데에 있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듦으로 해서, 찰나찰나 화두를 들어서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허도록 그렇게 다구쳐 나감으로 해서 무량억겁의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는 법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헌 불법을 만난 것을 감사허게 생각허고 기쁘게 생각허고, 부처님과 역대조사와 이 몸을 낳아주신 우리의 부모와 이 만큼 가르켜주신 우리의 모든 스승들에게 감사허면서 또 오늘 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소중하게 지내게 되기를 바래고, 그렇게 살아가야 비록 사바세계를 살면서도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서 사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을 죽어서만 꼭 갈라고 생각헐 것이 아니라 찰나 찰나를 도솔춘...도솔천에서 살고 극락세계를 사는 길이 ‘이 뭣고?’ 를 턱 거각을 허는데 있다고 허는 그렇게 믿는 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은 찰나를 ‧ 영원을 사는 것이고, 영원한 삼악도(三惡道)도 찰나간에 끊어가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것이고 그래서 사는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봤자 삼생(三生)에 원수를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허셨습니다. 돈을 벌면서 죄를 짓는 거고, 그것을 유지허고 쓰느라고 죄를 짓고 고통을 받는 것이요, 그것이 없어질 때는 암이 생기고 오장이 썩어 문드러지고 웬수가 되니 그것이 돈 때문에 재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은보화(金銀寶貨)가 뭉쳐있는 것을 보고 ‘이크! 독사’ 라고 이렇게 놀래셨고 그 제자들도 그것을 보고 ‘독사’라고 고함을 지르고 지내갔다고 허는 것이 경에 있습니다.
그런 말은 우리에게는 ‘그것이 있으면 왜 그것이 독사겄냐? 없어서 못 쓰지 있기만 험사 얼마든지 좋은 곳에 쓰면 되지 않냐!’ 허지마는, 사실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는 죄 안 짓고는 얻어지지 않은 것이고 얻어놓고 보면 욕심이 점점 커져서 또 죄를 짓는 거고 그것이 없어질 때에 또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큰 부자로 살던 사람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사업이 망해가지고 부도가 나서 그리고도 마음이 편안헐 수가 있다고 생각허십니까? 아마 여기에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叅禪)을 허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있으면 있는대로 좋고 또 여의치 못해가지고 없어지더라도 더욱 무상을 깨닫고 공부허실 수 있는 그런 경지에까지 이르신 분이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헙니다. 여러분 자손들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오욕락(五欲樂)이라 허는 것은 영원헌 것이 아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허기는 허나 그것이 우리가 정말 목숨을 바쳐서까지 그것을 위해서 인생을 바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고 허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실 필요가 있고, 돈을 많이 유산(遺産)을 냄겨 주시기보다는 그러헌 말 한마디씩 해 주신 것이 훨씬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 좋은 유산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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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금생(今生)에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이 말씀을 깊이 명심(銘心)을 허고 그것을 실천허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 하리라.
후생에 염라대왕 앞에서 또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을 때에 후회를 한만,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이러헌 고인네의 게송(偈頌)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65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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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도道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평상시(平常時)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거나, 귀를 통해서 무엇을 듣거나, 육근을 통해서 모든 바깥경계와 접촉할 때에, 자기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진(六塵)을 만나며는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이 생기는 그 찰나’가 바로 내가 나를 찾는, 나로 돌아가는 가장 좋은 기회(機會)라 이것입니다. 눈으로 뭣을 보았을 때 이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눈으로 보는 데에, 보이는 데에 따라가가지고 거기에서 망상을 일으키는데, 공부하는 사람은 눈으로 뭣을 보는 찰나에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叅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이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듣는 데에 따라가서 거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듣는 그 찰나에 ‘이 뭣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叅公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 <멸의경滅義經>에 보며는 「진승(眞僧)은 하야(下野)하고 가승(假僧)이 입산(入山)이다, 진짜 참으로 도를 닦을 중은 들로 내려가고 가짜 중은 산으로 들어온다」고 <멸의경滅義經>에 그러헌 말씀 있는 것을 봤습니다마는, 조실스님 법문에도 요새 모든 깊은 산중들은 다 관광객들로 인해서 몹시 소란스러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관광객이 들어와서 시끄럽거나 시냇물 소리가 들려서 시끄럽거나 산새가 울어서 시끄럽거나 달이 휘향창 밝아서 마음이 산란(散亂)하거나, 그러한 것이 참으로 발심을 해서 올바르게 수행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아니할 것이고, 또 여기 용화사(龍華寺)처럼 도회지(都會地) 한가운데 있어가지고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전차, 전철 소리가 들리고 또 뭐 과일이나 채소장수가 마이크로 외치고 다니는 그런 소리가 들리거나 그런 것이,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올바르게 수행해나가는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면 차츰차츰 나이가 먹어 들어가고, 나이가 먹어 들어가면 무슨 병을 앓던지 오장육부(五臟六腑)에 또 병(病)이 나고, 병이 나지 아니하면 어떤 사고로 다쳐서 불구자(不具者)가 되기도 하고 고생도 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결국은 고생을 하다가 죽게도 된다 그 말이여.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병을 한 번도 앓지도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또 어떤 사고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그럭저럭 하다보며는 결국은 또 죽게 되는데, 현재 고혈압이라든지 간경화증이라든지 온갖 무슨 각종 암이라든지 고생을 하신 분들도 참 많은데, 그러한 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여. 바로 그것이 바로 자기의 일이여.
*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니, 깊은 땅속이나 바다 속에 들어가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밥 먹고 옷 입고 눈으로 보고 들을 때 하는 것이니 그때그때 떠억 챙겨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을 거각(擧却)해서 해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단지불회(但知不會)」여, 다만 알지 못하게 되어야지 알아 들어가 놓으면 그 공부 잘 못한 거여.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 챙겨나가면 그게 공부가 바로 되어가는 것이여. 알아 들어가거나 보인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공부 잘못한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중생이냐. 곧 이 자기, 자기의 몸에 낮이나 밤이나 일어나는 끝없는 망상(妄想)이 바로 그것이 중생이다” 그러셨습니다. <대집경(大集經)>에 보며는 “낮이나 밤이나 생각 생각, 생각이 항상 일어나는데, 그 끝없이 일어나는 백 가지 천 가지 생각이 바로 무량백천중생(無量百千衆生)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며는 한 중생(衆生)의 몸을 받는 거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천상(天上)에 잠깐 태어난 것이고, 악한 생각을 내면 삼악도(三惡道)에 몸을 받아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百) 생각이 일어나면 백에 중생衆生의 몸을 받는 거고 천(千) 생각이 일어나면 천에 중생의 몸을 받아난 것이다. 하룻낮 하룻밤에 수 없는 생사(生死)의 뿌리를 심어가지고 후생(後生)에는 팔억오천만(八億五千萬)의 잡(雜)된 중생(衆生)의 몸을 받게 되는데, 백 년(100년) 중에 얼마나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일어났던지 간에 그것이 바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몸을 받아 나가지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손바닥 만한 공간도 없이 자기가 태어날, 중생(衆生)의 몸으로 태어날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무슨 생각이 일어나지거나 그 생각을 없앨려고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생각이나 궂은 생각이나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 생각에 즉(即)해가지고 화두(話頭)를 턱 추켜들어라 그거거든. 두 번째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화두를 떡 들며는 중생(衆生)의 몸을 받아날 그 기회(機會), 그 찰나(刹那)에 부처님으로 태어날 종자(種子)를 심은 것이 되기 때문에, 화두를 든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그 말이여.
*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으로 뭉쳐진 똥이 가뜩 든 가죽 주머니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불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몸을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좋은 이것이 법당(法堂)이요, 이것이 바로 이 몸이 있어야만 도(道)를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 말씀 하시기를, “이 몸은 정법장(正法藏)이요, 정법을 담아 놓은 법당(法堂)이요, 이 우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런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우리의 마음은, 마음자리는 걸림이 없는 등(燈)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 如華嚴經頌云。“身為正法藏。心為無礙燈”。] 조료제법공照了諸法空하면,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보면 다 실지(實地)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서 있는 허공(虛空)의 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태양도 없어지고 별도 없어지고 달도 없어지고 이 지구도 결국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데, 몇 억 광년 뒤에는 다 없어지는데, 몇 억 광년(光年)이나 일찰나(一刹那)간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다 공(空)했다고 하는 그 이치를 믿어야 하고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을 깨닫고 보면 바로 그것이 자기가 자기(自己)를 제도(濟度)한 것이요.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照了諸法空。名曰度眾生。] 자기를 제도하고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하는 법(法)이 찰나찰나 화두(話頭)를 드는 데에 있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듦으로 해서, 찰나찰나 화두를 들어서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다구쳐나감으로 해서 무량억겁의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는 법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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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華嚴經頌云。
身為正法藏。心為無礙燈。
照了諸法空。名曰度眾生。
故知身為法聚。無一法出我身田。
心為慧光。無一智離我心海。
若迷之者。則身為苦聚病原。心作無明怨賊。
<화엄경> 송에 이르기를,
몸은 정법장(正法藏)이요, 마음은 무애등(無礙燈)이다.
제법(諸法)이 공(空)함을 깨달아 비추면, 이름하여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그런고로 ‘몸은 법취(法聚, 법의 모임)라 한 법도 내 신전(身田, 몸 밭)을 떠난 것이 없고, 마음은 혜광(慧光, 지혜 광명)이라 한 지혜도 내 심해(心海, 마음 바다)를 여읜 것이 없다’ 는 것을 알아야한다.
만약 그것을 미혹한 자라면, 몸은 고취(苦聚)의 병원(病原, 병의 원천)이 되고, 마음은 무명(無明)의 원적(怨賊, 도적)을 만든다.
- 宗鏡錄-宋-延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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