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8. 13:28ㆍ송담선사 법문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이요
의래의거의자간(疑來疑去疑自看)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로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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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六祖)스님께서 부처님으로부터 가섭존자(迦葉尊者), 아란존자(阿難尊者), 상나화수(商那和修) 이렇게 해서 달마(達磨)스님까지 이십팔 대(28代) 조사(祖師), 또 육조스님까지 합해서 삼십삼 대(33代)까지 오셔서 정법(正法)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육조스님께서, “한 물견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괴우고 아래로는 땅을 괴우며 일월(日月)보다도 더 밝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해서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가 없으니 이것이 무슨 물견이냐?” 이렇게 법문을 허셨습니다. 그때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허는 사람이 나와서 떠억 절을 허고, “제불(諸佛)에 본원(本源)이며 이 신회(神會)에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스님께서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을 그릴 수도 없다 했거늘, 어찌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며 하택에 불성’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이느냐? 나중에 니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知解宗徒)밲에 못되겠구나.” 이렇게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남악회양(南嶽懷讓)이라고 허는 사람이 나와서 대답을 허기를, 남악회양선사(南嶽懷讓禪師)가 나오니까, “무슨 물견이 이렇게 왔는고?” 육조스님께서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남악회양선사가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길로 꽉 맥혀가지고 물러서갔다가 팔 년(8년) 만에 깨달음을 얻어가지고 육조스님께 왔습니다. 떠억 절을 하고, “설사 한 물견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即不中)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가지고 육조스님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어서 육조스님의 대(代)를 잇게 되았습니다.
처음에 대답헌 하택신회는 북종(北宗)에 종사(宗師)가 되고, 남악회양선사는 육조스님 밑에 남종(南宗)으로 그렇게 이 대가 이어 내려오는데, 오늘 조실스님께서 불, 법문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하택신회의 그런 계통(系統)에 종풍(宗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니 ‘하택 본인 불성’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고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남악회양선사가 꽈악 맥혀가지고 팔 년(8년) 만에 ‘설사 한 물견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러헌 종풍이 바로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께서도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가야 공부를 옳게 헌 것이라’ 이런 법문이 있었습니다마는, 지금도 우리 한국에도 하택신회 선사와 같은 북종에 그러헌 계통에 참선을 허고 있는 그러헌 부류(部類)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온, 육조스님으로, 남악회양선사로 이렇게 내려오는 그러헌 종풍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은 구참, 신참, 청신사, 청신녀를 막론(莫論)하고 참선을 의리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공안(公案)을 분석(分析)허고 알아들어가는 그러헌 계통에 참선은 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이요.
천 가지 만 가지 우리가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의심, 생활상에 되았건, 부처님 경전을 보다가 의심이 나건, 법문을 듣다가 의심이 나건, 어떠헌 종류에 의심이 나더라도 그런 모든 의심을 한, 한데로 뭉쳐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의심(疑心)이라하는 것은 가령 ‘이 무엇고?’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화두를 탄 사람은 ‘이 뭣고?’ ‘이 뭣고?’ 뿐인 것입니다.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걸어가거나 앉었거나 무슨 일을 허거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다맛 ‘이 뭣고?’ 슬픈 일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당하거나 누구한테 욕을 먹고 나쁜 소리를 들어서 부회가 나거나, 바로 그리 따라가지 말고 거기에 즉(即)해서 ‘이 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해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아하 이렇구나!’ 하고 알아들어가면 벌써 비끄러지는 것입니다.
‘이 뭣고?’ 화두는 육조스님께서 아까 말한 ‘무슨 물견이 이렇게 왔느냐?’ 이 시심마물(是甚麽物)이냐? 심마(甚麽), 이 뭣고를 한문으론 삼, 시삼마(是甚麽) 화두라고 그러는데, ‘이 뭣고?’ 해갈수록, 허다보면 잊어버리지만 잊어버린 줄 알면 퍼떡 또 돌이켜서 ‘이 뭣고?’ 이, 이렇게 해서 남악회양선사 같은 그런 대도인(大道人), 대선지식(大善知識)도 팔 년(8년) 만에 깨달랐거늘, 우리가 일 년, 이태, 삼 년 해가지고 잘 안된다고 고민하고, ‘화두가 잘못 되아서 그러나?’ 화두를 바꽈, 바꿔야 할, 이 선지식한테 타놓고 또 다른 데 가서 화두를 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 화두를 했다 저 화두를 했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정말 참다운 수행자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의래의거의자간(疑來疑去疑自看)이다.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서 그 의심을 스스로 관(觀)하라 이겁니다. ‘이 뭣고?’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
모름지기 용(龍)을 때려잡고 봉(鳳)을 뚜드러 잡는 그러헌 대용기와 분심을 일으켜야 하는 거고, 그러헌 주먹으로 철성관(鐵城關)을 한 주먹으로 쳐서 거꾸러트릴 만한 용기(勇氣)와 분심(憤心)이 필요헌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헐라면 자세(姿勢)를 바르게 해서 온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 떠억 허고서 허리를 쭉 펴고, 그리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코로 들어마셨다가 후~ 하고 내쉬면서 ‘이 뭣고?’ 골이 날 때에도 골나는 그, 그 자리에서, 거기에 즉(即)해서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 뭣고?’ ‘이 뭣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것을 「삼요(三要)」라고 하는데, ‘신심’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이 몸을 받아났으니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해다가... 윤회하다가 사람 몸 받기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행히 부모를 만나서 이 몸을 받았으니 참 부모에게 감사하고, 그래가지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종교가 없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종교를 믿을 수도 있는데 불교(佛敎)를 만나고, 불교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종파(宗派)가 있는데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을 만났으니 그것도 대단히 고맙고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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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심 위에 분심, 분심 위에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의심으로 화두를 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 이 「삼요(三要)」를 갖추었을 때 저절로 공부가 되아지는 것입니다. 안된다고 허는 사람은 이 신심과 분심 의심 이 삼요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 동안에 그럭저럭 지내 와서 삼요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지 못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 삼요를 갖춘다, 갖춘다며는 저절로 화두가 독로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이 삼요를 갖추어야, 삼요 중에 무엇이 부족허거나 부족허기 때문에 공부가 잘 안 되는 것이니, 공부가 잘 안된다고 느껴질 때에는 자기를 반성(反省)을 해봐야 합니다. 내가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가? 쓸데없는 시비(是非)에 걸려 들어있지 않는가? 그럭저럭 시간을 낭비허고 있지 않는가? 가끔 자기를 돌이켜보고 반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허면서 화두(話頭)를 떠억 든다면 저절로 되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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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당인안첩리(道在當人眼睫裏)라
서래면목지여금(西來面目只如今)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갈음기손상현로(渴飮飢飡常現露)라
하용구구별처심(何用區區別處尋)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도재당인안첩리(道在當人眼睫裏)라
서래면목지여금(西來面目只如今)이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각자 당인(當人)의 눈초리 속에 있다. 눈 안에 있다.
서래면목(西來面目)이 지여금(只如今))이다.
달마스님이 인도(印度)에서부터 중국(中國)으로 오신 것이 서래의(西來意)ㄴ데, 달마스님이 전(傳)하신 최상승법 그 면목(面目)이 어디에 있냐면 다못 우리가 눈 깜박거리고 숨 쉬고 허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입니다.
도라고 허는 것이 저 먼 디에 있는 것도 아니요 경책(經冊)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은 큰 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당인의 눈 감었다 떴다 한 바로 거기에 도가 있다 이것입니다.
갈음기손상현로(渴飮飢飡常現露)요.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허는 바로 거기에 달마스님께서 오신 그 면목과 부처님께서 전하신 그 도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목마를 때 물만 마실게 아니라 물마시면서 ‘이 뭣고?’ 배고프면 정신을 놓아버리고 밥 먹는 데에만 팔리고 반찬이 있고 없고, 맛이 있고 없고 그런 디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밥 먹으면서 ‘이 뭣고?’ 바로 거기에 달마(達磨)스님의 면목(面目)이 바로 거기에 있으니 거기를 놓치지 말고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들어라 이것입니다.
하용구구별처심(何用區區別處尋)고,
어찌 구구(區區)하게 다른 곳에서 도를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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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竹篦)를 치고 몇 분간 같이 입선(入禪)을 허고 싶습니다. 여러 선방(禪房)에 결제중에 다 가서 ‘도반(道伴)들이 공부를 잘 허고 있는가?’ 궁금해서 몇 번 가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사실은 가보지를 못해서 항상 미안허게 생각헌데, 오늘 결제일(結制日)을 기(期)해서 같이 입선을 잠깐 허십시다.
[입선죽비 세 번 침]
- 대중이 함께 참선.
방선(放禪).
[방선죽비 세 번 침]
이렇게 삼십 분(30분) 내지 한 시간(1시간)도 같이 허면 좋겠습니다마는, 정심공양도 있고 법요식도 있어서 간단히 방선을 했습니다.
각 선방마다 결제해제를, 그 선방에서 결제해제 법요식을 해도 되는 것이지마는, 이렇게 저 먼 데에서 이렇게 와서, 이 용화선원에 와서 결제 법요식 해제법요식을 갖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각 선방마다 다 조실스님 법문을 듣고 그렇게 결제를 해도 되지만, 이 자리에 이렇게 오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엄숙(嚴肅)함과 경건(敬虔)한 그러헌 마음을 우리가 모두 같이 느끼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한 철 동안 장애 없이 잘 지낼라면 아침에 예불 다 같이 나와서 쇳 치고 도량석(道場釋)하고 그리고 예불(禮佛) 젓숫고 그리고 축원(祝願)허고 그리고 입선(入禪)을 허는 것은, 신심(信心)을 다지고 분심(憤心)을 다지고 의단(疑團)이 독로허도록 그렇게 긴장(緊張)을 갖자는 것입니다. 까딱허면 하루 ‧ 이틀 ‧ 열흘 ‧ 스무날 지내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어져서 자기도 모르게 해태(懈怠)에 들어가고 방일(放逸)허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敬虔)함과 엄숙(嚴肅)함과 긴장(緊張)이라고 허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에 꼭 필요한 것이고, 특히 수행하는 데에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헌 긴장함을 석 달 내내 늦추지 말고 그렇게 생활을 하시고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 송담선사 법문 72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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