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전일념(現前一念) 전후제단(前後際斷)】

2021. 4. 2. 11:03송담선사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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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열아홉(19세)에 출가(出家)허셔가지고 육 년(6년), 또 십이 년(12년) 고행(苦行)을 허셔가지고 삼십오 세(35세)에 성도(成道)를 허셨다. 또는 삼십 세(30세)에 성도허셨다’, 경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법화경(法華經)> [수량품(壽量品)]에 “내가 실로 성불(成佛)한 이래로 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을 지내왔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적(歷史的)으로 볼 때에는, ‘인도(印度)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에 실달태자(悉達太子)로 태어나셔서 열아홉(19세)에 출가(出家)허셔가지고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허셔가지고 처음으로 도(道)를, 납월팔일(臘月八日, 음력 12월 8일)에 별을 보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셨다.’ 그렇게 보지마는, 부처님께서 <법화경>에 말씀허신, [수량품]에 말씀허신 바에 의하면, ‘진묵겁전(塵墨劫前)에 이미 성불(成佛)을 허셨다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신’ 걸로 되아있습니다. ‘화현, 화현불(化現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렇게 봐도 우리는 좋고, 또 역사적으로 ‘가비라왕궁에 태자로 태어나셔가지고 왕궁에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허셔서 고행해가지고 대도를 성취했다’고 봐도,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진묵겁전에 성불허셔가지고 자비심(慈悲心)으로 우리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化身佛)로 오셨다고 해도 그래도 감사허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신명(身命)을 바치고 그런 신심(信心)이 날 수가 있고, 인간서가(人間釋迦)로, 태자(太子)로 태어나서 왕궁(王宮)에 부귀(富貴)를 버리시고 발심(發心)해서 출가(出家)해가지고 그 갖인 고행(苦行)을, -부처님 말씀에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나만큼 이렇게 뼈에 사무치는 고행(苦行)과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헌 부처님은 일찍이 없었다.”고 이렇게까지 술회(述懷)허신 바도 있습니다- 그러헌 무서운 용맹정진을 통해서 견성(見性)을, 성불(成佛)을 허셨다고 그렇게 우리가 믿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더 인간서가(人間釋迦)로서 그렇게 우리가 부처님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우리에게 더 큰 신심(信心)을 일으키게 해주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그 ‘과거(過去)에 성현(聖賢)들이 피기장부(彼旣丈夫)다, 그분도 장부고 나도 또한 장부다[彼旣丈夫我亦爾]’. ‘부처님이나 모든 그런 성현들은 우리하고는 종자(種子)가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태어날 때부터 다르신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헌 성현이 되셨다.’ 이렇게 현애상(懸崖想)을 짓고, ‘나는 중생(衆生)이요 하근기(下根機)요 우리...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그 도(道)를 닦는다 허더라도 그렇게는 못된다’고 이렇게 자굴심(自屈心)을 내는 경우가 있는데, 부처님이 인간서가(人間釋迦)로 그렇게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와 너무나도 가까운,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가깝게 느껴짐으로 해서 ‘우리도 허면 될 수 있다’고 허는 그러헌 긍지와 자신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납월팔일(臘月八日) 터억 도(道)를 깨닫고 첫 번째 하신 말씀이, “기재(奇哉)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로구나. 기특, 참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중생이 모두가 다 여래의 지혜의 덕상을 다 갖추고 있구나.” 탄생허셔가지고서는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할파(喝破)를 하셨는데, 대도(大道)를 성취(成就)허고서는 “기재(奇哉)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로구나.” 이렇게 설파(說破)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마디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여래(如來)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갖추고 있다’고 허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내지 일생을 고향을 버리고 부모 형제를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인생을 버리고 이렇게 도를 닦는다고 닦은... 닦는데도 불구하고 왜 부처님처럼 그러헌 대도를 성취하지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가? 많은 도반(道伴)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헐라고 해도 영 공부가 잘 안됩니다”,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지를 않습니다”, “일여(一如)허지를 않습니다”, “순일무잡(純一無雜)허지를 않습니다.”, “될듯허다가 안되고 이렇습니다.” 그러헌 하소연을 하는 도반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나름대로 공부허는 방법이 틀려서 그럴 수도 있고, 용맹심이 부족할 수도 있고, 신심과 분심이 박약(薄弱)헐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첫째는 신심(信心)이 박약(薄弱)한 것이여. 근본신심(根本信心)이 투철(透徹)허지를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분심(憤心)이 약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약허기 때문에 무슨 대의단(大疑團)이 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의정거처요분명(疑情擧處要分明)인데
막파심량중복탁(莫把心量重卜度)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당하지귀아시수(當下知歸我是誰)오
일성고안야청지(一聲孤雁夜聽遲)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의정거처요분명(疑情擧處要分明)이여.
알 수 없는 화두(話頭)에 의정(疑情)이 터억 들면,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턱 추켜들면 그 의... 드는 곳이 분명(分明)해야 하거든. 흐리멍덩. 의정거처(疑情擧處)가 분명해, 또록또록하고 성성(惺惺)해야 혀. 그러면서도 간절(懇切)하면서도 간결(簡潔)해야 혀.


막파심량중복탁(莫把心量重卜度)이다.
생각을 가지고 복탁(卜度)을 허지 말어.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하지 말아라 그 말이여.

조실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리고 공부허는 학자(學者)는, 이 점에 있어서 철저하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공안(公案)을 의리선(義理禪)으로, 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져서, 그래가지고 공안을 따져서 ‘이러이러허고 이러이러허다’고 그렇게 앎으로 해서 그런 것으로서 공부를 삼는 그러헌 학자는 한사람도 없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당하(當下)에 지귀아시수(知歸我是誰)여.
당하에, 당장 이 무엇이냐? ‘이 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몸띵이 끌고다니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놈이 무엇이냐?’ 그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해서 탁! 거각(擧却)했다 하며는 앞뒤가 끊어져버리고 의단만 터억 독로돼.

이 의, 화두(話頭)를 드는데 ‘분명(分明)허고 간절(懇切)해야 하고 성성(惺惺)허고 적적(寂寂)허다’ 하는 것은 용을 쓰라는 말과는 다르거든.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들이고 용을 쓰고, 용을 쓴 것과 의단(疑團)이 분명(分明)헌 것과는 다르다. 그것을 잘못 착각을 허면 안 된다 그 말이여. 용을 쓰지 말고 힘을 들이지 말라허니까 또 흐리멍덩허니, 의심인지 의단인지 무기(無記)ㄴ지 분간(分揀)허지 못하고 흐리멍덩, 그게 안 되거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의단이 독로허면 눈으로 무엇을 봐도 보는 디에 끄달리지 아니허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거기에 끄달리지 아니해. 현전일념(現前一念). 눈이 떠있고 귀가 열려있으니까 뭘 보며는 눈에 보이지, 보이지만 보이는 디에 끄달리지 않고, 귀가 열려있으니까 무슨 소리가 들리지만 그냥 거기에 끄달리지 아니허면 그 소리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이나 자극을 주지 아니하고 그냥 바람처럼 스쳐 가버리니까 그까짓 거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현전일념(現前一念)이 전후(前後)가 끊어져. 전후제단(前後際斷)해서 밥을 먹어도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고 종일 걸어도 한 조각 땅도 밟음이 없어야 한다’고 고인(古人)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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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굴중무이수(獅子窟中無異獸)하고
상왕일지... 행처절호종(象王行處絶狐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갱파일지무공적(更把一枝無孔笛)하야
등한취출만년환(等閑吹出萬年歡)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사자굴중(獅子窟中)에 무이수(無異獸)여.
사자굴 속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가 없어.

부처님을 믿는,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는 사자 굴 중에 있는 사자새끼들이다 그 말이여. 불법문중(佛法門中)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들어와가지고 사자새끼로 우리는 태어났다 그 말이여. 김가(金家)나 이가(李家)나 박가(朴家)나 일단 출가(出家)했으면 전부가 석가모니(釋迦牟尼)에 석종(釋種)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사자새끼여. 양자(養子) 온 것이 아니라 발심(發心)을 해서 정법(正法)을 믿으면 그냥 고대로 사자새끼가 되는 것이여. 출가 헌 출가승(出家僧)뿐만이 아니라 설사 세속(世俗)에 몸 담이 있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정법을 믿으면 그냥 고대로 그 또 석종(釋種)이요 사자(獅子)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을 사자새끼다 그 말이여.


상왕행처절호종(象王行處絶狐蹤)이다.
상왕(象王)이, 코끼리가, 코끼리는 모든 짐승에 참 왕이라 하는 것인데, 그 코끼리에 왕이 가는 곳에는 여우같은 그러헌 째째한 짐승의 발자죽이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한다 그 말이여.

부처님을 사자(獅子)로 비유하고 또 상왕(象王)으로 비유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철저하게 발심을 하고 대의단(大疑團)으로 정진(精進)을 해간다면 거기에 무슨 외도(外道)의 소견(所見), 삿된 소견이 거기에 어리댈 수가 있느냐 그 말이거든.


갱파일지무공적(更把一枝無孔笛).
다시 한 가지 구멍 없는 젓대를 들고,


등한취출만년환(等閑吹出萬年歡)이다.
등한(等閑)히 만년(萬年)의 기쁨을 노래하리라.

무공적(無孔笛)이라 하는 것은, 젓대는 반드시 구멍이 있어야 그 구멍을 띠었다 닫혔다 허면서 한량없는 미묘(微妙)한 곡(曲)을 부는 것인데, ‘구멍이 없는 젓대라’. 구멍 없는 젓대라 하는 것은 불불(佛佛)이 서로 보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또한 알 수 없는, 천성(千聖)도 역불식(亦不識)이요 불불(佛佛)이 불상견(不相見)하는 그러헌 도리(道理)를 「무공적(無孔笛)이다」구멍 없는 젓대다, 또 「무저선(無底船)이다」밑바닥 없는 배다, 또「무영수(無影樹)다」그림자 없는 남긔(나무)다. 또 여러 가지 수백 가지 수천 가지의 표현으로 표현하지만, 이 ‘무공적’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허면 그 구멍 없는 젓대를 우리가 불수가 있느냐? 이론적으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는 영겁(永劫)을 따져도 그것은 볼 수가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불수도 없는 거여.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현전일념(現前一念)을 터억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단속(團束)해나감으로 해서 전후(前後)가 끊어져. 그래가지고 본참공안(本參公安)을 타파(打破)험으로써만이 이 무공적(無孔笛)을 잡을 수가 있고 그 무공적을 불을 수가 있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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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을해년(乙亥年) 성도재일(成道齋日)을 맞이해서 우리는 여기에 모이신 남녀노소(男女老少)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우리의 형제요, 자매요, 선배요, 후배요, 모두가 다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도반(道伴)들에게 고인(古人)에 우리를 당부하시는 말씀을 소개하고자합니다.


단능착파의(但能著破衣)허고,
다맛 능히 헤어진 옷을 입고,


손추손(飱麁食)하며,
거칠은 음식을 먹고,

맛있고 그러헌 음식이 아니라 그저 거칠고 맛없는 음식, 옷도 부드럽고 가볍고 좋은 옷이 아니라 그저 떨어지면 기워 입고 팔 들어가면 입고, 이게 헤어진 옷이요, 부처님께서는 분소의(糞掃衣)라고 허셨는데, 똥을 닦아내버린 그런 옷을, 또 걸레 뭐 여러 가지 그런 것들을 줏어 모아가지고 빨아서 성헌 데를 골라서 이렇게 깁, 기워서 중중(重重)으로 기워서 입는 그게 누데기 옷인데, 그런 것이 다 이게 파의(破衣), 헤어진 옷에 속할 것입니다. 음식도 내가 직접 농사를 짓고 돈을 벌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허는 것이 아닐 바에는,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채소면 채소, 맛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대로 그렇게 먹으면서,


요연수본진심(了然守本真心)이여.
요연(了然)히 자기의 근본(根本) 참마음을 지킨다고 허는 것은,

근본 참 마음이 무엇이냐? 철저하게 발심을 해서 대분심(大憤心)으로 대의단(大疑團)을 거각(擧却)해서 나가면 반드시 어떠헌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성숙(成熟)허면 반드시 깨닫게 되아있는 것인데, 깨닫기 전에도 한 눈 팔지 아니하고 여법(如法)허게 정진(精進)해나가면 수본진심(守本真心)의 도리(道理)가 그 속에 다 갖추어져있는 것이여. 한눈 팔고 해찰하고(게으름 부리고) 그게 바로 해태(懈怠)에 빠진 것이여. 불방심(不放心), 무방심(無放心), 무방일(無放逸), 무방일허면 그 속에 수본진심(守本真心)이 고대로 갖추어지게 되는데,


양치불해어(佯癡不解語).
양치(佯癡)라 하는 것은, 인(亻)변에 염소 양(羊)한 자가 거짓 양(佯)잔데, 병을 앓지 아니 허면서도 병을 앓은 척 허고 끙끙 앓고 그러니 그거 양병(佯病)이라 하는 것이여. 거짓 병을 허는 거고, 양치(佯癡)는 거짓양(佯)자 어리석을 치(癡)자, 양치는 거짓 어리석은 거여. 그래가지고 불해어(不解語)여. 말을,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처럼.

사람들은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남이 자기를 조끔만 무시헌 듯하고 자기를 알아주지 아니하고 자기를 대우를 안 해주면 대번에 그냥 기분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데, 정말 발심을 해서 도 닦는 사람은 일부러 바보노릇을 해야 하는 거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고 바보취급을 하고, ‘내가 법랍(法臘)도 있고 이러이러허고 훌륭한데 감히 지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냐’ 그래가지고 기분이 상해가지고는 주먹다짐을 하고 욕을 퍼붓고 그런 사람을 아주 못된 놈으로 취급을 하고 상대를 아니 하고 이래서는 아니 된다 말이여. 그래서 정말 발심헌 수행자는 일부로라도 바보행세를 허는 건데, 남이 다행히 자기를 바보로 취급을 허고 대우를 안 해준다며는 아주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말이여. 말귀도 못 알아들어. 뭔 말을 물어봐도 “예, 소승(小僧)이 잘 모르겠습니다.” “아 그까짓 것도 몰라? 중노릇을 이십년, 삼십년 허면서 그것도 모르냐?”고, “예, 소승이 뭐 압니까.”

‘양치불해어.’ 헤어진 옷을, 누데기를 입고 먹는 것도 그저 되는대로 그저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찰밥이면 찰밥, 국수면 국수, 해다 주는 대로 한 숫갈 그것도 감지덕지(感之德之)허게 맛있게 잘 먹고, 그러면서도 그저 바보 비슷허게, 어느 선방(禪房)에 가서 지내더라도 법랍 따져서 다 차례차례 앉지마는 어중간허니 저만큼 앉었으면 “아 이리 오라고”, “예, 소승이 여기 좋습니다.” 기어니 오라그러면 또 북북북 기어서 또 그 가서 앉아. 웃자리에다가 안 앉히고 아랫자리에다가 앉혔다고 해가지고 한 철 내 속이 상해가지고 그러다가, 자기가 웃자리 앉었는데 나중에사 법랍이 밝혀져가지고 “왜 뭣 때문에 거가 앉었느냐? 저 밑으로 가라.” 그러면 그 속이 상해가지고 나 그런 사람도 봤는데, 그게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냐 그 말이여. 일부로라도 바보짓을, 바보취급을 허며는 그냥 그것도 감지덕지하고,

세 가지. 옷은 헤어진 옷을 입고, 먹는 것은 인연 따라서 되는대로 먹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철저하게 딱! 자가철주(自家鐵柱)가 있어서 오직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가지고 터억 나가는데, 겉으로는 바보, 이렇게 해야만,


최생기력(最省氣力)하야 능유공(能有功)이여.
가, 가장 힘은 적게 들이고 공부해나가는 데에 효과는 백배(百倍)다 그 말이여. 이렇게 해나가는 수행학자라야,


이것이야말로 대정진인야(大精進人也)라.
이렇게 되아야 정말 큰 정진(精進)허는 사람이다 이거거든.

  • 송담선사 법문 563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