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각지見聞覺知]

2019. 9. 8. 18:01송담선사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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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於見聞覺知處認本心
다못 보고 들음을 깨달아 아는 곳(見聞을 覺知하는 곳)에서 본심本心을 인식할 수 있는데,

然本心不屬見聞覺知
그러나 본심本心은 견문見聞을 각지覺知하는 곳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亦不離見聞覺知
또한 견문見聞을 각지覺知하는 것을 여의고 있는 것도 아니다.

但莫於見聞覺知上起見解,
다못 견문見聞을 각지覺知하는 위에 견해見解를 일으키지 말며,

亦莫於見聞覺知上動念
또한 견문見聞을 각지覺知하는 위에 생각을 움직이지도 말라.

亦莫離見聞覺知覓心,
또한 견문을 각지함을 여의고 마음을 찾지도 말라.

亦莫捨見聞覺知取法
또한 견문을 각지함을 버리고 마음을, 법을 취하지도 말아라.

不即不離, 不住不著, 縱橫自在無非道場
그래서 즉即하지도 여의지도(離) 않으며, 머물지도(住) 집착하지도(著) 않으며, 종횡縱橫으로 자재自在하야 도량道場 아님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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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鶯上樹一枝花요
白鷺下田千點雪이로구나.



황앵상수일지화黃鶯上樹一枝花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송이 꽃이요,
하얀 해오리가 논에 내리니 천점에 눈송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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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승이 주장자를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고, 다시 그 주장자를 쳐서 법상을 울리게 헌 도립니다.
이 도리는 일천 성현도 일찍이 전할 수가 없었고, 역대조사도 이 도리를 능히 알았다고 헐 수가 없는 도리인 것입니다.

금일 가사불사 회향 법회를 맞이해서 외람되게도 산승은 천성이 전하지 못한 도리, 역대조사가 알았다고 할 수 없는 이 도리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를 증명으로 모시고 사부대중 앞에 보여 드렸습니다.

이 도리는 중생의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이 도리를 위해서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시방에 모든 납자들이 무량겁을 두고 몸과 목숨을 바쳐온 도리인 것입니다.
금년 기미년 하안거에 많은 대중이 모여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용맹, 가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것도 또한 이 도리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몇 천만생을 바쳐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그러냐! 이 도리를 깨달라야만 비로소 대자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도리를 모르는 채 높은 권리와 높은 명예와 한없는 재산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살았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물견이라고 한가지도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이 도리를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에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세등선원 원장 스님이 우연히 득병得病을 해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신 그러헌 동안에 이렇게 사부대중이 한마음 한뜻이 되야서 이러한 거창한 가사불사를 아무 장애 없이 원만히 성취를 허게 되얐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의 정성어린 신심으로, 나아가서는 금년 여름에 방부를 드리고 정진하고 있는 50여명에 대중스님들, 한마음 한뜻이 되야 가지고 뜨거운 신심과 정성으로 이 불사를 추진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장애 없이 불사가 원만히 성취 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공덕으로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재앙이 눈 녹듯이 다 소멸이 되얐을 것이며, 멀고 가까운 원을 낱낱이 다 성취되실 것을 산승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대중스님네는 정진하러 왔다가 뜻밖에 이런 불사를 맞이해서 이 불사에 조꼼도 괴롭고 싫은 생각이 없이 정진하는 그 마음으로 이 불사에 각각 성의를 다했으며, 이 정진을 하는 동안에 여러분들 몸도 건강하고 일체 마장이 다 소멸이 되야서 기필코 이 몸으로 견성성불헐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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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은 불법 가운데에 가장 높은 법이지마는 그 법은 우리로부터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도 옮기지 아니한 곳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허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산승이 말씀을 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듣고 있습니다.

그 듣고 있는 놈!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에 부처,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 옷을 입을 때, 법문을 들을 때, 듣고 보고 먹고 앉고 스는 그 가운데 우리의 자성불은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그 듣는 놈이며, 바로 그 먹는 놈이며, 바로 그 앉고 스고 눕고 걸어다닌 그놈이 바로 우리에 자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놈이 무엇인가, 어떻게 생겼으며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몸 가운데 잠시도 떠나 있지 아니하며, 바로 그놈이 먹고 입고 듣고 보는, 보고 있으면서 우리는 그놈 자신은, 자체는 볼 수가 없습니다. 만져 볼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만져 보면서도 그놈은 만져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도 바로 듣는 그놈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과 역대조사와 조꼼도 차이가 없는 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소이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허면 우리도 역대조사처럼 불보살처럼 깨달을 수가 있느냐? 이것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오직 참선법을 통해서 만이 우리는 나 자신에 부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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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승이 기미년 하안거 결제 때에도 참석을 허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결제 법문과 중결제, 중살림 법문을 아울러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석 달 동안 결제를 허는 것은 꼭 결제를 해야만 참선을 헐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제 해제가 없는 것이지마는, 인도에서는 더운 때, 열시 더울 열熱자 열시와 장마철이 거듭 계속해서 비가 쏟아지는 우시雨時와 추워서 숲속에서 지내기에는 적당치 못한 한시寒時, 열시 우시, 삼시가 있습니다, 인도에는. 그래서 이 삼시에는 신도들이 정성 드려서 지어드린 정사, 선원 정사에서 모여서 공부를 허게 되얐습니다.
그 모여서 허는 공부하는 기간을 안거라 이렇게 말을 해왔습니다.

그 안거安居 때에는 각기 숲 속에서 흩어져서 공부하던 스님네가 전부 정사에 모여서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여름 석 달과 겨울 석 달, 이 두 때를 하안거, 동안거로 이렇게 노나서 정진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 동안에는 너무 여름에는 더워서 숲속에나 행각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가 없고, 겨울철에는 눈이 오고 너무 추워서 한데서 공부를 헐 수 없기 때문에 모여서 공부를 허게 되얐습니다.

이 모여서 여러 대중이 공부를 허게 된 동안에는 청신사 청신녀들은 서로 서로 자기의 형편 따라서 쌀과 나물과 채소 과일 또 옷과 약 이러헌 것들을 서로 서로 형편 따라서 정성스럽게 갖다 바치고, 스님네들은 그 신도들이 바친 정성스런 공양을 의지해서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수용을 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므로 해서 하루라도 빨리 도업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그러헌 나라에 은혜, 스승에 은혜, 신도에 은혜, 일체 중생에 은혜에 보답허기 위해서 피나는 정진을 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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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허는 방법!
공부는 꼭 스님네만 허라는 공부가 아니고,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도 가정에서 사회에서 분 따라서 공부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스님네에게 바치고 이러헌 불사에... 물질적인 공양을 올리고 여러분들도 직접 몸으로 이 참선을 실천 수행한다면 여러분들은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모든 소원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여러분 자신도 견성성불할 수 있는 기간을 앞댕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법!
천하에 간단하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법,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이며 참선법입니다.

여러분들은 혹 어떠헌 경전에서 또는 어떠헌 스님의 입을 통해서 법문을 통해서 ‘우리는 말세 중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머리가 있는 속인이기 때문에, 또 여자이기 때문에 도저히 참선은 허기도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해봤자 도저히 성취할 가능도 없고 그러니 아미타불의 사십팔원 그 원에 의해서 아미타불이나 열심히 불르면 아미타불의 그 힘으로 죽어서 극락이나 가기를 바래고, 또 참선방에 신발을 벗어논 그 공덕으로 내생에는 남자의 몸을 받고 참선을 헐 수 있는 그러헌 인연이나 맺어야 겠다.
어찌 우리같은 죄많은 중생이 어찌 참선을 헌들 무슨 견성성불을 헐까 보냐?’ 이렇게 스스로 자포자기를 헌 분을 종종 만납니다마는, 그것은 최상승법이 어떻다고 허는 것을 잘 이해를 못한데에서 그러한 자포자기를 허게 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아 어렵다고 허지마는 실지로 이 최상승법을 잘 이해하고 본다면은 ​너무나 쉬웁기 때문에 어렵다는 표현을 쓴 것뿐입니다.

‘어찌 쉬우면 쉬웁고 어려우면 어렵지 쉬웁기 때문에 어렵다고 허는 것이 무슨 소리냐?’
이것을 나는 증거를 들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너무 쉬운 것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을 가지고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보는 그 눈은 여러분이 볼 수가 없습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의 눈을 본 분이 계신다면은, ‘아 내 눈은 쌍까풀이다. 내 눈은 고리눈이다. 내 눈은 귀가 밑으로 쳐졌다. 내 눈은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내 눈은 눈동자가 까맣다. 내 눈은 눈동자가 노랗다.’ 전부 여러분 자신의 눈이 어떻게 생긴 것을 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본, 볼 때에 그 눈은 여러분 자신들의 진짜 눈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거울을 통해서, 거울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눈의 영상, 그림자를 보았을 뿐 여러분의 진짜 눈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거울을 통해서 여러분의 눈의 그림자를 보았을 뿐, 여러분들의 눈 자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데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여러분의 자신의 눈은 보지 못합니까?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면서, 왜 여러분 자신의 눈은 보지 못한 것입니까?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모든 것을 눈을 통해서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코를 통해서 온갖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보고, 여러분 손을 가지고 ‘부드럽다, 까끄럽다, 뜨겁다, 차웁다’ 온갖 촉각을 통해서 느낄 줄 알면서, 왜 느낄 줄 알고,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맡을 줄 알고, 맛볼 줄 알고 모든 것을 생각헐 줄 아는 여러분 자신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맡지 못하며, 만지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하며,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가깝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을 아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까우면 여러분은 그것을 보지를 못하고 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 먼데 있는 산은 보고 알면서, 여러분 손을 눈에다 딱 갖다 대 보세요. 너무 가깝기 때문에 여러분의 손을 보지 못합니다. 멀리 떨어지면 보면서 딱 갖다 대면 보지 못합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여러분은 보지를 못한 것뿐입니다. 그 가까운 것, 너무 가까운데 있는 것 보는 방법이 이 참선법입니다.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성이 났을 때도 퍼뜩 생각해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슬플 때에도 ‘이뭣고’, 기쁠 때에도 ‘이뭣고’, 슬플 때 슬픈 생각을 억지로 참을라 허지 말고, 슬픈 생각 그 생각으로 ’이뭣고?’ 무엇이 대관절 이렇게 슬퍼허는가. 슬퍼헐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억울한 소리를 들을 때에는 우리는 불같은 노여움이 일어 납니다. 불같이 일어나는 이 노여움, 이것을 억지로 참을려고 허지 말고 불같은 노여운 그 생각으로 이뭣고? 무엇이 이렇게 성을 내는가? ‘이 성낼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이렇게 생각을 돌리고, 불같이 일어났던 노여움이 스르르 가라앉게 되고,

간장이 끊어질 것 같던 그런 슬픈 생각, 하염없이 눈물이 퍼일어 나더라도 ‘대관절 이 슬퍼할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들면 그 슬픈 생각이 스르르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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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헌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생각을 돌리는 것이 이것이 바로 참선허는 법입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사람, 하나에다 둘을 보태면 셋이 되는 줄도 모르는 그러한 바보라 할지라도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어떤 이는 어데서 아조 염주 하나를 얻었습니다. 항시 목에다 걸고 다니고 시간만 있으면 그 염주를 풀어서 돌리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변소에 갈 때는 꼭 그 염주를 딱 풀어서 놓고, 모셔다 어디다 잘 걸어 놓고 그리고 변소를 가고, 똥을 누고 그리고서는 손을 깨끗이 씻고 와서 다시 또 염주를 만지고 이렇게 염주를 소중하게 간직한 보살님을 봤습니다.
기가맥히게 참 신심도 있고 정성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는 변소에 가서도 이 똥누는 놈이 이뭣고 그래도 죄를 받지 않습니다.
똥눈다고 해서 이뭣고를 안하고, 성이 나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이뭣고를 안하고, 슬프다고 해서 이뭣고를 안하고, 욕을 했다고 해서 이뭣고를 안하고, 이 핑계 저 핑계 화두를 안들면, 중생은 생각 났다하면 죄 짓는 생각만 하고 못된 생각만 허는데 이리저리 죄질 때라고 해서, 더럽다고 해서, 성냈다고 해서, 슬프다고 해서 ’이뭣고’ 를 안하면 참선을 안하면, 그러면 언제해요?
잠 꼬박 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할 때나 되면 혹 못된 생각을 안헐까, 눈을 떴다허면은 못된 생각만 허는 것이 우리 중생들입니다.

개는 섰다하면 다름박질입니다.
중생은 생각을 냈다하면 탐심 아니면 진심 아니면 치심, ​이 탐진치 삼독심이 바로 중생의 살림살이입니다.

탐진치 삼독심 내놓고 참선할 시간은 없습니다.
탐진치 삼독, 성내고 탐심내고 어리석은 마음 일어나는 그곳이 바로 참선헐 때입니다.


왜 그러냐?

​탐진치 삼독이 어디에서 일어나냐 하면, - 어디 염불하고 좋은 마음은 우리의 불심에 불성에서 일어나고, 탐진치 삼독심은 저 어디 막통창시 똥 창자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

<탐진치 삼독심도 역시 우리의 眞如佛性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탐진치 삼독심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를 챙겨야 합니다. 그러면은 바로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 활구참선법입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에 많은 좋은 스님네로부터 좋은 법문을 들었을 것이며, 여러 가지 경전을 통해서 한량없이 좋은 법문을 들으셨겠지만은, 그 동안에 들은 법문은 전부 똘똘 뭉쳐서 한덩어리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뭉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 최상승 활구참선을 허셔야 합니다.

그러면은 여러분이 그 동안에 듣고 보고 익혔던 모든 법문은 한덩어리가 되야 가지고 완전히 썩어서 밑거름이 되야 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밑거름으로 인해서 최상승 활구참선을 철저히 헐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허는 마당에는 그 동안에 들었던 모든 법문은 이미 한덩어리가 되야서 썩어가지고 밑거름이 되얐기 때문에 다시는 그것을 생각해 낼 필요도 없고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참선 공부허는 마당에 그러헌 것을 생각해 내고 그런 것을 뜰먹인다면, 그 여러분들이 그 동안에 들었던 법문이 아직 삭지를 않했기 때문에 거름은 썩고 삭아 버려야 거름이 되는 것이지, 썩고 삭지 아니하면 아무 거름 기운이 제대로 발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러분이 오늘 가사불사에 동참한 그 공덕, 그 가사불사에 공덕한 그 공덕력까지도 한데 뭉쳐서 완전히 삭혀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은 무주상이 될 것이며, 무주상이 되어야만 최상승 활구법문에 들어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슬퍼서 억장이 무너질 때도 ‘이뭣고?’ 억울해서 주먹같은 놈이 치밀어 오를 때에도 ‘이뭣고?’
마치 팔십세 먹은 홀 할머니가 외아들이 먼데에 갔다가 온다는 날짜에 오지 않허고 밤이나 낮이나 기달려도 오지 아니한 그 아들 생각!
먼 하늘에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퍼런 산빛을 봐도 아들 생각, 새 우는 소리를 들어도 아들 생각, 젊은 청년을 봐도 아들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 생각, 좋은 옷을 봐도 아들 생각, 언제 어데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어떠헌 환경을 만나드라도 자나 깨나 아들 생각 밖에는 없듯이, 활구참선을 허는 사람은 바로 그와같이 ‘이뭣고?’

‘이뭣고?’
깊이 숨을 들이 마셔서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다 숨이 나가버리면 다시 또 스르르 들이 마셔서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나가시면 처음에는 깜빡 깜빡 잊어버려서 못하지만, 잊어버린 줄 알면 또 생각을 해내서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나가시면 여러분들은 차츰 차츰 질이 들어서 나중에는 챙기지 아니해도 제절로 화두가 잘 들어지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렇게 해서 공부가 차츰 차츰 익숙해지면 여러분에 모든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정헐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생길 것이며, 모든 노여움도 모든 슬픔도 어떠한 어리석은 생각, 죄 짓는 생각도 화두 한번 듦으로써 간단하게 그러헌 죄의 근원을 끊어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 짓는 그 마음을 돌이켜서 도를 성취하는 도를 성취할 수 있는 마음으로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입니다.

처음에는 별로 재미가 없고, 별로 맛이 없지만 자꾸 자꾸 하루 이틀 한달 석달 일년 삼년,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열심히 해 가노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여러분들이 옛날의 자기가 아닌 딴 사람이 되야 가고 있다고 허는 것을 발견허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마음은 안정이 되고, 너무 마음은 깨끗해지고,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내는 일이 없어지고 어떠한 걱정스러운 일을 당해서도 침착하고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은 인간을 새로 만드는 수행의 방법인 것입니다. 인격을 완성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30년 40년 절에 다니면서 그렇게 철저히 부처님을 믿는다고 다녀도 조꼼도 달라진 것이 없고, 내나 그 모냥이라면 불법을 믿어서 어디다 쓰는 것입니까?
여러분들 가운데는 그러헌 불법을 믿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젊은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들에게 아무런 설득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분이 많습니다.

“할머니가 그렇게 절에 다니지만 무엇을 얻었습니까?”
“내가 부처님 다녀서 너희들이 그렇게 건강하고 공부도 잘허고 그러지 않느냐?”
“이웃집 할머니는 절에 다니지 안해도 잘만 살대요?”

이렇게 해서 여러분의 손자와 손녀, 아들과 딸에 이렇다할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활구참선, 이 참선을 열심히 하므로써 옛날에는 신경질을 내던 분이 신경질을 내지 아니하고, 옛날에는 그렇게 아펐던 분이 아프지를 아니하고, 옛날에는 사소한 일에 마음이 동요했건만 참선을 험으로써 영- 딴사람이 되고 훌륭한 할머니가 되고, 이렇게 인간성이 달라지고 무엇인가 절에 다니므로 해서 달라진 것이 있어야 믿으라고 안해도 며느리도 믿게 되고, 믿으라고 안해도 손자도 믿게 되고 아들까지도 어머니를 따라서 참선을 허게 돼야 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세계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을 해서 불교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불교를 믿으면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간다. 불교를 믿으면 재앙이 없어진다. 이러한 말 가지고는 이빨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오직 최상승 활구참선만이 물질문명에 빠져 있는 20세기, 21세기에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산승은 석 달 동안에 걸쳐서 미국과 캐나다를 갔다 왔습니다만은, 거기 사람들은 정말 이 활구참선을 너무나도 좋아했고, 그것을 듣고 실천헐랴고 허는 역력한 모습을 보고 왔습니다.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이 활구참선을 지도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지만 ‘산승은 한국에 가지 아니하면 안될 일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돌아가야 한다’ 고 뿌리치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1600년, 불법이 한국에 들어와 가지고 1600년이라고 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로부터서 유산으로 불법을 전해 받았습니다. 한국엔 1500만이라고 하는 불교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활구참선을 철저히 믿는 사람이 과연 그 가운데에 몇 프로나 될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1600년에 깊은 역사를 가진 불법을 유산으로 받어 있으면서도 활구참선을 실천을 못하고, 기복 불교에만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은 서양 사람들을 향해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는지 조용히 가슴에 손을 대고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봐야 될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최상승 활구참선을 실천 수행함으로써 지혜를 닦아 얻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부처님과 불법과 스님네께 공양을 올리고 그리고 사회에 복지 기관에 희사를 험으로 해서 복도 아울러 닦음으로 해서 복과 지혜가 겸전한 불자가 되야 할 줄 생각합니다.

과연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가사불사 참석을 해서 그러한 한량없는 복 밭에 씨를 심으셨으며, 나아가서는 활구참선법을 들으셔서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신다면 복과 지혜를 겸전한 진정한 불자가 되신 것입니다.

앞으로 6월 17일 까지 남은 안거 동안 대중스님네들 아무리 더웁다 하드라도 우리가 한 생각 미끄러지면 삼악도에 불은 이러한 삼복의 더위에 몇 천배, 몇 만배 뜨거울 것을 생각을 허셔야 합니다.
더울수록에 더욱 생각을 가다듬어서 가행정진을 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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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에 말씀에 ‘가사 밑에, 가사 입은 사람으로서 사람 몸을 잃어버린 것처럼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은 없다’ 고 하셨습니다.

가사 입은 몸으로 사람 몸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 모든 것이 온전히 신도들의 피땀 흘려서 바친 공양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헌 신도에 정성스런 공양에 의지해서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도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한방울의 물도 녹이기 어렵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분 일초, 한방울 한알에 곡식이라 하드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도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 신도에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는 소에 몸을 받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소들이 그 무서운, 구리쇠물 보다도 더 무서운 신도에 공양을 받고도 등한히 세월을 보냄으로 해서 받은 몸이 바로 소에 몸인 것입니다.

어째서 그 소에 몸을 받느냐?
소에 몸을 받아야만 일생동안 쉴 사이 없이 일을 해서 은혜를 갚게 되는 것이며, 그 몸에서 나온 배설물도 거름으로써 제공되는 것이며, 죽어서는 그 살과 창자도 전부 사람들에 영양을 공급허기 위해서 제공되는 것이며, 그 가죽은 벗겨서 사람들의 옷과 구두를 만드는데에 제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가죽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서 절에서 침으로 해서,

“여러 대중들은 들으시오! 내가 전생에 중으로서 철저히 도를 닦지 못한 탓으로 해서 이렇게 소가 되얐습니다. 이 북소리를 듣고서 열심히 도를 닦아주옵소서. 여러 스님네들 어찌 등한히 놀고 잡담을 허고 세월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북소리를 듣고 이를 악물고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도를 닦아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북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맛있는 것만을 취택하지만 말며, 부드러운 옷만을 취택허지 말며, 편안한 잠자리만을 취택하지 말며, 옷은 팔다리 들어가면 족하고, 먹는 것은 배고프지 아니하면 족한 것입니다.
방이 좀 뜨겁거나 차거나 그러헌 것도 짜증을 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분 일초를 아껴서 철저히 분심을 내서 도를 잘 닦아주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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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하는 법은 화두 하나를 선지식으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그 화두 하나만을 들고, 들되 이리저리 분석을 허지 말며,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 몸뗑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무자 화두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무?’

‘어째서?’

다못 이렇게 화두를 들어서 관조할 뿐입니다.
정전백수자를 한다.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다못 천번이고 만번이고 이것 뿐입니다.
염불하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런 것이 아녀요.

‘이 뭣 고 ?’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드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지지 아니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이것을 든다고 하고 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뭣 고 ?’

그저 앉아서 너무 너무 졸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법당 뒤나 저 한쪽으로 가서 일직선으로 정해 놓고 왔다 갔다, 한 5분 내지 10분. 왔다 갔다 포행을 허다가 졸음이 깨지면 또 조용히 자기 자리에 와서 또 앉아서 깊이 숨을 들어 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처음에는 숨 들이쉬었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허지만 나중엔 숨 서너번 또는 대여섯번만에 한번씩만 ‘이뭣고?’ 이렇게 해도 됩니다.

나중에 참으로 익숙해지면 아침에 한번 일어날 때 이뭣고 들면 하루종일 한번만 들고도 다시 안들어도 됩니다마는, 그렇게 될랴면은 상당한 오랫동안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고, 처음에는 한번 들어서 한 5분씩, 한번 들어서 한 10분씩 이렇게 허다가, 일정하게 시간을 맞춰서 드는게 아니라, 한번 들어서 그 화두가 들어져 있으면 안들어도 되고, 딴 생각이 들어올 때면 그때 한번씩 챙겨.
화두가 들어져 있어도 희미허면 한번씩 들고 이렇게 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못알아 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드는 것이 아녀요.
그것을 명심을 허시고, 화두만 잘 들 줄 알면 그 사람은 공부 헐 줄 아는 사람여.

이 화두는 그래서 한번 이렇게 듣고는 쪼끔 납득허기가 어렵고, 자주 듣고 녹음법문이라도 자주 들어서 분명허게 화두만 들 줄 알면, 단전호흡하는 법과 화두드는 법만 잘 알면 여러분들은 올바르게 활구참선을 헐 수 있습니다. 화두만 올바르게 들고 나가면 반드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한 말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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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 송담선사 법문 세등선원 2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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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내가 내 마음을 모르다니.
내가 내 면목을 모르다니. 쓸수있어?
그 산 송장인가 뭣이여, 대관절.

눈을 뜨고 보지만 보는 놈을 모르고, 귀를 들고 듣지마는 들은 놈을 모르고, 코를 들고 냄새를 맡지마는 냄새 맡은 그, 그 자者를 모르고, 냄새 맡는 그 자者가 낸디, 냄새맡은 그 자는 도무지 알 수 없지.
쎄 끄트리고 맛을 보지마는 맛보는 그 자를 도무지 모르지. 뜻으로 생각하지마는 뜻으로 생각하는 아! 그, 그사람을 모른단 말이여.
그 어떤 사람인고 그런걸 몰라.
몸띵이로 갔다 왔닼하지마는, 발로 모도 운수허고, 손으로 모도 운수허고 발로 모도 급행을 허지마는 그자를 모른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것이 뭐냔 말이여.
그 눈깔만 사람 눈깔이요, 귀때기만 사람 귀때기요, 코만 사람 코요, 입만 사람 입이요, 몸띵이만 사람 몸띵이요, 오장만 사람 오장이면 되는가? 사람이면은 사람을 알아야지, 사람이면서 사람을 아지 못허고 그저 깜깜 칠통이다. 이렇게 칠통이 어딨어?
당장 지끔 이 뒷 시간 어떻게 될런지를 아는가?
이건 도대체 뭐가 이런것이 있냐 그말이여? 생각해 봐.

내가 나를 찾아야겠구나!
내가 내 낯빤대기를 한 번 알아야 하겄구나.
이까짓놈의 낯빤대기, 이까짓 놈의 살덤뱅이로 어머니 뱃속에서 핏덩거리로 모아서 맨들어진 고깥은 놈의 낯빤대기 그만 두고 말이여. 내 본 낯빤대기.
어머니 뱃속에 들어오기 전에 내 참다운 나빤대기 그놈을 봐야겄다.

-전강선사 법문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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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眼 - 빛 色 - 시각視覺(볼줄 안다)
귀耳 - 소리聲 - 청각聽覺(들을 줄 안다)
코鼻 - 냄새香 - 후각嗅覺(맡을 줄 안다)
혀舌 - 맛 味 - 미각味覺(맛볼 줄 안다)
몸身 - 느낌觸 - 촉각觸覺(느낄 줄 안다)
뜻意 - 현상法 - 지각知覺(생각할 줄 안다)



一覺: 한결같은 아롬 (生死없는 本覺). 是這箇, 이낱.

* 道不屬知不知: 도는 알고 아지 못함에 속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