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4. 21:19ㆍ송담선사 법문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분별심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법문(法門)은 뭣 허러 들을 것이냐? 또 입으로 설할 수도 없다며는 뭣 허러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說)하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그 많은 법어(法語)를 남기시고, 또 오늘 이 송담(松潭)은 뭣허러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입을 열고 있느냐?’
이러헌 질문을 허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법은 입으로 가히 설할 수 없으되, 목... 눈썹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 도리를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어떠한 일이 있고 일이 바쁘고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다 물리치고, 백사(百事)를 다 물리치고 이 법을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說)해야 하고,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백사(百事)를 물리치고 이 법을 들어야 한 까닭은 무엇이냐?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의고 찾는 법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진리법(眞理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여지없이 여러분 앞에 확 헤쳐 놓았습니다.
중생의 분별망상(分別妄想)을 통해서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놈을 여의고도 찾아서는 아니 된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智慧)의 눈이 있는 사람이면, 이 정법(正法)에 조그마한 인연(因緣)이라도 있는 분이면 이렇게 말씀드린 이 말씀의 근본 의도를 마음속에 와 닿는 것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參禪)을 허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헐 수가 없습니다.’
이러헌 호소를 하신 분이 있는데, 망상을 여의고 찾을랴고 허는 디에서 그러헌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妄想)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妄想)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무엇고?’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망상, 일어나는 망상을 없앨랴고 허거나 누를랴고 허거나 쫓을랴고 허면 그 ‘쫓을랴고 허는 또 하나의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때문에 벌써 한 생각 딴 생각, 따른... 다른 또 하나의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공부의 길에서는 천만리(千萬里) 멀어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의 업식(業識), 업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천만가지 번뇌망상(煩惱妄想)이, 깨달은 분에게는 그 망상이 바로, 업식(業識)이 바로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망상을, 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것이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떡 화두(話頭)를 들으면 그것이 바로 망상(妄想)을 여의지도(離) 아니하고 망상에 즉(即)하지도 아니하고서 참 나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15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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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於至元十八年 蔡提領請長老說法時 我聞說生老病死苦 人人皆有 不論男女貴賤貧富 生不知來處是生大 死不知去處是死大 出息不保入息 是無常迅速 人能於此省察 發心回道者 但提撕話頭 云見性成佛 那个是我性 但恁麽叅究看 叅來叅去 忽然悟明 便知生來死去 十二時中 自有主宰 生死岸頭 可以轉業 我從此持戒叅究 那个是我性 今經二十年 曉得些子見聞 又聞長老云 道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至今疑着 那个是道 今日望因便敎我 山僧云正好叅究 不可放捨此疑 何耶 大疑之下 必有大悟
또 지원至元 십팔 년에 채제령蔡提領이 장로長老께 설법을 청하였을 때, 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은 남녀와 귀천과 빈부를 논하지 않고 사람마다 다 있다. 나되 난 곳을 알지 못하니 생生의 큰 일이요, 죽되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사대死의 큰 일이다. 숨을 내시되 들이쉬는 숨을 보장하지 못하나니 이렇게 무상無常은 신속迅速하니라. 사람이 능히 여기에서 성찰省察하고 발심發心해서 도道로 돌이킬 수 있는 자는, 다만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고 하는데, 어떤 것이 이 나의 성품인가?’ 하는 화두를 들지니, 다만 이렇게 참구叅究하여 간看하여서 참구叅究하여 오며 참구하여 감에 홀연히 밝게 깨달으면, 곧 태어나서 오고 죽어서 감[生來死去]에 열두 때(24시) 가운데에 스스로 주재主宰함(주인공)이 있음을 알아 생사生死의 언덕에서 가히 그 업業을 전환轉換하게 되리라.“ 라고 하시는 설법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를 좇아 계戒를 지니면서 ‘어떤 것이 이 나의 성性인가?’를 참구叅究하되, 이제 이십년(20년)이 지나서야 조그마한 보고 들음[些子見聞]을 깨달아 얻었습니다.
* 些子見聞: 此二見聞。
또한 장로께서 이르시되, “도道는, 보고 듣고 앎[見聞覺知]에 속하지도 않으며, 또한 보고 듣고 앎을 떠나 있지도 않나니라[道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라 하셨으니, 저는 지금에 이르도록 ‘어떤 것이 이 도道인가[那个是道]?’ 하고 의심疑心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방편으로 인因하여 저를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산승山僧이 이르되, “정正히 잘 참구叅究하고 있구나. 가히 이러한 의심을 놓아버리지 말지니라. 왜 그런가? 큰 의심 아래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느니라.”
- [직지] 백운경한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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