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심衆生心을 보아야】

2022. 2. 17. 09:33송담선사 법문

중생심을 보아야.mp3
8.31MB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꽉 맥힌 상태에서 자기의 화두(話頭)를 관조(觀照)허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또는 ‘이 뭣고?’ 다못 그것뿐인 것입니다. 앞도 없고 뒤도 없고, 그 동안에 자기가 경(經)을 읽었다던지, 법문을 들었다던지,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知識)이라도 여기에 동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못 ‘이 뭣고?’ 뿐인 것입니다. 다른 화두와 비교헐라 하지도 말고, 다른 데서 들은 말씀을 여기다 끌어대가지고 이리저리 따질라 허지도 말고, 다못 바보처럼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 뭣고?’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어데서 언제 무엇을 허고 있던지 간에 다못 ‘이 뭣고?’ 인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홑으로 홑으로 간절히 해나감으로써만이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가지고 홀연(忽然)히 통 밑구녁 빠진 경계(境界)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큰 간장독에다가 간장을 담아 논 것을 그걸 갖다가 메갱이, 돌... 쇠 메겡이로 쳐서 그 항아리가 쩍! 갈라지면서 항아리 속에 있는 장이 우르르- 한목 쏟아지듯이,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쌓였던 그 의심이 점점 커져가지고 그 의심 덩어리가 우리의 가슴속과 이 허공계(虛空界)에 가뜩 차서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때, 풍선이 터지듯이 대의단(大疑團)이 타파(打破)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하나에 충실함으로써만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았을 때에 천칠백 공안(1700공안)은 따져서 알라고 허지 안 해도 한 눈에 환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서 결단코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 갖고 되아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봤자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여. 중생심만 더욱 조장(助長)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은 우리에 이르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경(經)을 보고 연구하고 어록(語錄)을 보고 이리저리 따져봤자 중생심(衆生心)을 조장(助長)하고 시간을 낭비헌 것뿐인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허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 뭣고?’를 헌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속에서 중생심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하자면 깨달음이라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슬픈 생각도 중생의 하나의 감정이요, 기쁜 생각도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요, 괴로운 생각도 역시 하나의 중생의 감정입니다. 그러헌 슬프고, 괴롭고, 외롭고, 쓸쓸하고, 썽 내고 허는 그러헌 모든 중생심이 전부가 다 한 생각도 등한(等閑)히 방치해서는 아니 될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중요한 계기인 것입니다.

괴롭다고 화두(話頭)를 놓아버리고, 슬프다고 화두를 놓아버리고, 기분이 나쁘다고 화두를 놓아버리고, 몸이 괴롭다고 화두를 놓아버린다고 허면 우리는 화두를 들 때가 과연 언제인 것입니까?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 일어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 많은 수 없는 생각들, 그것이 바로 중생무진... 번뇌무진입니다. 중생무변(衆生無邊)이요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그러헌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중생(衆生)이 다 할 날이 없는데, 중생계(衆生界)를 다 할라며는 번뇌(煩惱)가 다 해야 합니다. 그 번뇌는 다할 길이 없습니다.

다할 길이 없는 그 번뇌가 그러면 나쁜 것이냐?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중생심 그놈을 놓치지 아니하고 잘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慈悲)로운 손길이 되아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 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觀照)해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해서 자기에 본참 화두로 돌어 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바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直前)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뀌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로써 뀌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 보리(菩提)의 과(果), 보리과(菩提果), 깨달음의 과를 성취하는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法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헌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 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10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