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아름다움]

2021. 3. 29. 19:54짧은 글

[고독의 아름다움]
 
내가 보기에 우리의 가장 커다란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정말로 분명히 보는 일’이다. 그것은 바깥 사물뿐만 아니라 내적 삶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가 나무나 꽃이나 사람을 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말 그들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 말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는 것일까? 즉 당신이 나무를 보거나 어느 날 저녁 빛나는 구름을 보면서 기뻐할 때, 당신은 그것을 단지 눈이나 머릿속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전적으로 보는 것일까?
 
당신은 가령 나무 같은 객관적 사물을 아무런 연상 작용 없이, 그것에 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지식도 없이, 아무런 편견이나 판단 없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어떠한 말도 없이 그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그렇게 해보라.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다해, 자신의 에너지 전부를 기울여 나무를 볼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라. 
 
그 강렬함 속에서 당신은 관찰자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오직 주의력만이 있을 뿐이다. 부주의가 있을 때 거기엔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 있다. 당신이 어떠한 것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볼 때, 거기엔 개념, 공식 또는 기억이 끼여들만한 여지가 없다. 이것은 이해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매우 조심스런 연구가 필요한 어떤 것을 구명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기 포기와 함께 나무나 별 또는 반짝이는 강물을 보는 마음만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며, 우리가 정말로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랑의 상태에 있게 된다. 흔히 비교를 통해서 또는 사람들이 짜 맞춰 놓은 생각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아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어떤 대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떤 건물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건축에 대한 나의 지식과 더불어 그 건물을 그전에 보아온 다른 건물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대상 없는 아름다움이 있을까?”
 
.......
 
 
아름다움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의 전적인 포기가 있을 때 존재하며, 자기 포기는 완전한 엄격함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 엄격함이란....... 
완벽한 겸손함으로 완전히 순진하게 되는 엄격함을 말한다. 즉 거기엔 언제나 첫발만이 있을 뿐이며, 이 첫발이 영원한 걸음인 것이다. 
 
가령, 당신이 혼자 걷고 있거나 누구와 같이 걷고 있다가 하던 말을 멈췄다고 하자. 당신은 자연에 둘러싸여 있고, 거기엔 개 짖는 소리도, 차 지나가는 소리도, 새가 나는 소리조차도 없다. 당신은 전혀 말이 없고 주위의 자연도 전혀 말이 없다. 관찰자나 관찰되는 것이 다 같이 그런 침묵 상태에 있을 때 –관찰자가 자기가 관찰한 것을 생각으로 해석하지 않을 때- 그 침묵 속에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엔 자연도 관찰자도 없다. 있는 것은 완전히 고독한 마음상태 뿐이다. 그것은 고립이 아닌 ‘고요 속의 고독’이며, 그 고요가 ‘아름다움’이다. 
 
.......
 
아무런 선입견이나 이미지 없이 볼 때에만 우리는 삶 속의 어떤 것과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사실 가공의 것들이다. 다시 말해 생각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에 기초해 있다. 만일 내가 당신에 관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당신은 나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전혀 보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 관해 만든 이미지이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관계를 그르치게 한다. 
 
내가 당신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어제의 당신을 알았다는 얘기다. 나는 지금의 당신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당신에 대한 이미지일 따름이다. 그 이미지는 당신이 나를 찬양하거나 모욕하려고 한 말, 당신이 나에게 한 일 등으로 짜 맞춰진 것이고 –내가 당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기억으로 짜 맞춰진 것이다- 당신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또한 같은 방식으로 짜 맞춰진 것이다. 관계를 갖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며,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하나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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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이 먼저 있고 나서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끝이 아니라 맨 처음에 있는 것이다. 이 자유를 이해하는 것이 훈련이다.
 
.......
우리가 오직 알고 있는 고요는 소음이 멈출 때의 고요, 생각이 멈출 때의 고요뿐인데, 그것은 고요가 아니다. 고요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처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고요는 조용한 마음의 산물이 아니며, 그 전체 구조를 알고 "제발 좀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뇌세포의 산물이 아니다. ....... 
당신은 그 고요가 무엇인지에 대해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을 비교하고 설명하고 가져다가 묻어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는 것이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는 것에 대해, 마음의 상처와 감언이설에 대해, 당신이 만든 모든 이미지와 체험들에 대해 매일 죽을 때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매일 죽어야만 뇌세포들이 새로워지고, 젊어지고, 순수해진다. 그러나 그 천진함, 그 새로움, 그 유연함과 부드러움이라는 성질은 사랑을 낳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아름다움이나 고요의 성질이 아니다. 
 
소음이 끝남으로써 생기는 고요가 아닌 진정한 고요는 다만 작은 시작일 따름이다. 그것은 거대하고 광대하고 넓은 바다로 가기 위해, 측량할 길 없고 영원한 상태로 가기 위해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당신이 의식의 전 구조와 쾌락, 슬픔, 절망의 의미를 이해했을 때에만 그리고 뇌세포들이 조용해졌을 때에만 당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 말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때 아마도 당신은 아무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고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없는 신비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마음은 고요한 마음이며, 아무 중심도 없고 공간, 시간도 없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무한하고 유일한 진리이며, 유일한 실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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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 대하여]

명상은 어떤 체계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는 되풀이도 아니고 모방도 아니다.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어떤 선생이 학도들에게 집중을 배우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가르치기 시작할 때 애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즉 마음을 한 가지 생각에 고정시키고 다른 모든 생각은 몰아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초등학교 학생도 강제로 시키면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고 추악한 일이다. 이것은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과 여러 다른 것들 속을 헤매는 마음 사이에서 당신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명상은 놀랄 정도로 기민한 마음을 요구한다. 즉 명상은 삶의 전체성에 대한 이해이다. 명상은 생각의 통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통제될 때 그것은 마음속에 갈등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의 구조와 그 근원을 이해할 때, 생각은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모든 생각과 감정을 느껴 아는 것이며, 옳다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다만 생각과 느낌을 바라보고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관찰 속에서, 당신은 생각과 느낌의 모든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해로부터 침묵이 나온다. 생각을 짜맞추는 데서 오는 침묵은 정체이고 죽음이지만, 생각이 그것 자체의 처음을 이해하고 그 자체의 본질을 알고 모든 생각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고 항상 낡은 것인가를 이해했을 때 오는 침묵은 명상이다. 이 명상 속에는 명상자가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그것의 과거를 비웠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읽었다면, 그것은 명상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나중에 생각해 보기 위해 다만 몇 몇 말들을 가져가고 또 약간의 생각을 모았을 뿐이라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명상은 모든 것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보는 것, 즉 그것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하게 보는 마음의 상태다.

아무도 당신에게 깊이 주의를 기울이는 법에 대해 가르칠 수 없다. 만일 어떤 체계가 당신에게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체계에 대해 주의 깊은 것이지 그것이 주의가 아니다. 명상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무에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는데, 그 것이 바로 그것의 아름다움이다.

명상은 기술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권위가 없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배우고 자신을 관찰할 때, 당신이 어떻게 걷고 어떻게 먹는지를 관찰하고, 당신이 말하는 것, 가십, 증오, 질투를 관찰할 때, 그 모든 것을 아무 선택 없이 당신 자신 안에서 알아차릴 때, 그것이 명상의 일부다. 
 
그러므로 명상은 버스에 앉아 있거나 빛과 그림자로 가득 찬 숲속을 걸어갈 때, 또는 새가 노래하는 걸 듣거나 당신의 아내나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다. 
 
명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사랑이 있으며, 사랑은 체제나 습관 따위의 산물이 아니다. 사랑은 생각에 의해 심어 키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아마도 완전한 침묵이 있을 때 존재하게 되는데, 그 침묵이란 그 속에 명상자가 완전히 없는 그런 침묵이다. 그리고 마음은 생각과 감정으로서 자신의 움직임을 이해할 때에만 고요해질 수 있다. 이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관찰할 때 비난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훈련이며, 그런 종류의 훈련은 순응 훈련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자유롭다.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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