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허시기를】

2020. 3. 11. 13:00송담선사 법문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보며는,

“악惡한 사람 백명에게 공양하는 것 보단 착한 사람 한 사람한테 공양供養하는 것이 낫고, 착한 사람 천명에게 공양하는 것 보단 오계五戒를 지키는 사람에게 공양하는게 낫고, 오계를 지키는 사람 만명에게 공양하는 것 보단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證得한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수다원과를 증득한 백만명에게 공양한 것 보단 사다함斯陀含을 증득한 한 성현聖賢한테 공양한 것이 낫고, 사다함 천만인에게 공양한 것 보단 아나함阿那含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아나함 일억의 성현에게 공양한 것 보단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일억의... 십억의 아라한에게 공양한 것 보단 한 분의 벽지불辟支佛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백억의 백, 벽지불에게 공양한 것 보단 한 사람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의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천억의 삼세제불에 공양한 것 보단 한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供養한 것이 낫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는 “‘무념無念’ ‘무주無住’ ‘무수無修’ ‘무증無證’한 사람에게 공양供養한 것이 낫다” 그런데, 무념無念이요 · 무주無住요 · 무수無修요 · 무증無證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그말인데,

이 무심도인은 어떠헌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이냐?

‘생각을 하되 생각없는 생각을 하고, 행行을 하되 행이 없는 행을 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고, 증證허되 증헌바가 없이 증’허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하는데, 이 무심無心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헌 것이 무심도인이다’ 이렇게 말허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서 누가 무심도인無心道人인지 아닌지를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석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한 수행자修行者 가운데에는 몸도 마음도 청정淸淨해서 무심無心한 경계境界에 들어간, 들어갈 공부를 했고 그 가운데에는 이미 무심한 경계에 들어간 스님이 몇 분인가는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설사 오늘날 당장 완전히 진, 진무심경계眞無心境界에 들어가지 안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目的地를 향向해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도 준準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 해제 때 모이신 그 스님네 들에게 공양을 올리며는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비명횡사해서 거리 중천에서 갈 곳을 모르고 해매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와 가족들로 하여금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허는 공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무심도인無心道人.
‘내가 무심도인이다’하먼(하면) 그게 무심도인이 아니여.
‘내가 한 소식消息을 했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이믄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니고,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다’헌 생각을 가지믄(가지면) 이미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닌거여.

어떻게허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느냐?
본참공안本叅公案, ‘이 뭣고?’ 화두話頭가 되았건, ‘판치생모版齒生毛’ 화두가 되았건, ‘무無자’ 화두가 되었건,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指定받은 그 본참공안을 하나를 가지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은산철벽銀山鐵壁에 탁! 부딪힌 것처럼, 나아갈라야 나아갈 데도 없고 물러설라야 물, 물,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꽉 맥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도록 본참공안本叅公案에 실참實叅 실수實修 해 나감으로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마침내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것이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富貴를 버리시고 출가出家허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셔가지고 일생,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說하신 요점要點이, 목적目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해제법문解制法門은 조실祖室스님께서 설하신 녹음법문을 통해서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그것을 경청敬聽을 했음으로 해서 해제법문을 산승山僧이 설헐 것은 없습니다.
또 설헐 줄도 모릅니다.

다맛 석달 동안을 그 삼목, 삼복성염三伏盛炎을, 성염盛炎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고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을 만났으니 너무 반갑고, 고향故鄕에 일가친척一家親戚을 만난다고해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일가친척은 만나봤자 거북하고 신경쓰이고 별로 보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저기서 한철을 지내고 모인 도반道伴들은 안면顔面이 있는 분이나 안면이 없는 분이나 해제를 하고 만나면 수십년 보고싶었던 고향친구가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변이 없어서 내가 반가운 척은 못헙니다마는, 마음 속으로는 정말 반가운 것입니다.

나와 같이 한 목적目的을 향向해서 가는 도반道伴이요 현재 한 목적을 향해서 고행苦行을 해 나가는 형제兄弟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또 다시 만나야 할 도반이요 궁극窮極의 목적지目的地에서 다시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가지고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해야할 그러헌 도반이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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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二章經 [十一]》

佛言。
“飯惡人百。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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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허시기를,

“대저 도道를 닦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며는, 한 나무토막이 물에 있어서 흐름을 따라서 흘러 흘러가다보면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또 흘러가다가 어떠헌 사람한테 이케, 사람이 건져버리지 않고, 또 어떠헌 귀신이나 그런, 그런것에 의해서 차단을 당하지 아니하고, 또 소용돌이 치는 그런 물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빙빙 돌면서 떠내려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다가, 흘러내려가다가 썩어져서 없어져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나무토막은 결정코 바다에 도달허는 거와 같다.”

그러면 ‘양쪽 언덕에, 물이 흘러가다가 양쪽언덕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하는 그러헌 소견所見에, 그러헌 두 언덕에 집착執著을 허지 아니헌 것을 비유헌 것이고, 사람에게 건짐을 당하지 않는 것은 인천人天에, 사람의 세계나 하늘나라에 선업善業을 지어가지고 복福 받는데 빠져있... 빠지지 아니헌 것을 비유헌 것이여.

사람이 살아감에 악惡한 짓을 허지 말고 선업善業을 닦아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곳에 태어나고 하늘 나라에 태어나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이 도문道門에 있어서는 그렇게 복福받고 호강豪強하고 잘먹고 잘산거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복받고 잘먹고 잘입고 편안허고 그러면 자연히 사람이 교만해지고 거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고 편안헌데에 빠져가지고 도道 닦을 마음을 내기가 어려워서 그거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별로 그걸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귀신에 차단遮斷을 당하지 않는 것’은, 사견, 불법을 믿으면서도 정법正法에 대한 바른 사상思想이 백히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사견에 빠져놓면 겉으로는 열심히 도道를 닦은 것 같애도 속 마음에 사견邪見에 떠억 떨어져 있어 놓으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出現해도 그 사람은 제도헐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이미 그릇에, 아무리 그 그릇이 좋아도 못된 것이 가뜩 차갖고 있으면 다른 것을 아무리 그 그릇에다 담을랴고, 담어도 소용이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헌 것입니다. 이 사견邪見 가운데에 가장 으뜸가는 사견은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견空見에 집착執著해 빠지는 것이여.
공견에 빠지면은 인과법을 믿지 않고 막행막식 해가지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법도法度가 없어가지고 마구잽이 닥치는대로 허거덩.

인과법因果法을 철저히 믿으면 말 한마디가 얼마다 소중하고 무서운 것을 알며, 행동 하나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한 줄을 알며, 그러기 때문에 인과법을 철저히 믿어야 저절로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정법正法을 믿고서 정법에 대한 바른 사상思想이 백이게(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이 빙빙빙 도는 회오리 쏘에 한 번 빠지면 그 속에서 헤어나질 못혀’
삼계三界의 회오리거덩.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의 회오리 속에 빠지면 여간해서 거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혀.
그 속에는 오욕락五欲樂, 재산에 대한, 색色에 대한, 명예名譽 권리權利에 대한, 또 안락安樂과 수면睡眠에 대한 그런 오욕락에 빠져가지고, 그리고 서로 인연을, 악연惡緣과 선연善緣을 지어가지고 서로 좋아허고 미워허고 또 복수하고 은혜를 갚고 그러헌 업연業緣으로, 업연에 얽혀가지고 여간해서 헤어나지를 못헌다 그말이여.

인과법을 믿되, 믿기는 철저히 믿되, 거기에 ‘어떻게 허면 인과因果 속에서 해탈解脫헐 수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여.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정법에 의해서 수행修行을 해야 우리가 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얽히지 아니하고 해탈解脫허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즈막(마지막)에 ‘그 나무토막이 흘러가다가 썩어서 부폐해가지고 부서져버리면 바다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에다가 비유한 것이냐 하며는, 불교佛敎에 소승小乘과 중승中乘에, 이승二乘에는 멸진정滅盡定 외도外道, 멸진정이라고 허는 경계境界가 있는데 그 멸진정에 한 번 빠져 놓면(놓으면) 몇 만 겁劫이 지내도 거기서 헤어나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수행을 허되, 참선叅禪을 허되 무기無記에 빠져가지고 그 편안허고 깨끗하고 조용헌 그 경계에 빠져서 그것에 맛을 들여 가지고 거기에 빠진 체 공부를... 그것이 공분줄 알고 수행을 허면 결국은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져가지고 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을 허되 처음에는 화두話頭를 들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자꾸 일으켜 가지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허지만, 차츰차츰 망상妄想이 가라앉고 조용하고 깨끗해지면 화두話頭 드는 것도 귀찮애지고, 화두를 들며는 그 고용하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않고 가만-히 고요한 것을 맛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공無記空에 빠지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산승山僧이,
‘항상 화두가 끊어지거나 딴 생각이 들어와서 화두를 놓치거나 하면 다시 자기의 화두를 들되, 이미 들어진 화두가 성성惺惺허면서도 적적寂寂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거든 거기에서는 자꾸 거기다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그렇게 어거지로 거기다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말고, 이미 독로獨露한 그 의단疑團을 묘妙-하게 잘- 관觀해가도록’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허다가 보면 너무 고요하고 깨끗허다 보니까, 그 의심관疑心觀을 허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르 허니 의심이 성성惺惺허지를 못하고 그냥 의심이 없어져버리는 수가 있다 그말이여.
근데 그럴 때는 터-억 숨을 들어 마셨다가 내쉬면서 자기의 화두話頭를,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때는 또 한 번 챙겨야 하는거여.
챙겨가지고 또 성성惺惺허고 적적寂寂헌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면 그때는 그 독로한 의단을 타-악 관觀해나가는거여.

‘어떤 것이 무기야, 무기無記냐?’, ‘어떤 것이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화두話頭가 들려져갖고 있느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관찰을 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생사生灰니 열반涅槃이니 헌 소견에 집착執著하지 아니허고’,
‘인천人天의 선업善業에 걸리지 아니하고’,
‘사견邪見에 맥히지 아니하고’,
‘삼계三界의 회오리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를 거각擧覺해 가지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않해도 성성적적허게 의단이 독로헌 채로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撤大悟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고古 조사祖師가 한결같이 보증保證을 하시고 증명證明을 허신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헌 성성적적惺惺하게 화두話頭를 들어 갈 수 있도록 간곡懇曲케 설명을 해 주시는 선지식, 또 그러헌 선지식이 설해주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으면서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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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二章經 [二十七]》

佛言。
“夫為道者。猶木在水尋流而行。
不觸兩岸。不為人取。不為鬼神所遮。不為洄流所住。亦不腐敗。吾保此木決定入海。”

【不觸生死涅槃兩岸。不為人天有漏善業所取。
不為邪見鬼神所遮。不為三界洄流所住。
亦不腐敗於二乘滅定。決入薩婆若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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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허시기를,
“내 법法은 념 무렴념念無念念이요, 생각허되 생각없이 생각하고, 행 무행행行無行行好하며, 행허되 행하는 바가 없이 행하고, 말... 언 무언언言無言言하며, 말을 허되 말험이 없이 말하고, 수 무수수修無修修하야, 닦되 닦음이 없이 닦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바로 나의 정법正法이다.“
그말씀입니다.

이 무렴無念의 념念, 무행無行의 행行, 무언無言의 언言, 무수無修의 수修의 이 뜻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수행허는 요지要旨가 거기에 있어.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이 수행법을 아지를 못한 사람은, 미迷한 사람은 저- 멀, 멀다 그 말이여.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닦아가는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여, 말길이 끊어졌으며, 비물소구非物所拘여, 이것을 가로막을 아무 물견도 거기는 없는 것이며, 그런데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이것이 무렴, 무렴無念이요 이것이 무행無行이요 이것이 무언無言이요 이것이 무수無修요 이것이 무중, 무증無證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허고 있으면 그것이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수류에, 실지수류(유)失之須臾여. 수류(수유)須臾라고 허는 것은 잠깐, 번갯불 번쩍허는 그 찰나간刹那間을 ‘수류須臾’라 그러는데, 수류 동안에 놓쳐버리는 것이여.
긍게(그러니까) 도저히 이 도리道理는 여기에 나아갈랴며는 활구참선活句叅禪보다 더 요긴要緊한 방법方法은 없다 그말이여.

아까 조실스님께서도 녹음법문을 통해서 말씀허시기를,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아가야 거기에는 병폐病弊가 붙지를 못허고 사견邪見이 거기에는 붙지를 못허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요리조리 따지고 비교허고 분석해서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들어갈랴고 허며는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점점 도道에는 멀어져 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헌 결론을 얻었다고 해 보았자 그것은 사견邪見이요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佛法을 망亡해 묵을 외도外道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인데,

일생一生 동안을 알 수가 없고, 아무것도 얻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고, 느낀 바도 없어도 그 상관이 없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가며는 결정코 깨달음을 얻고야만 마는 것이고,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허지 아니해서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도 원망헐 것도 없고 그것은 별로 나쁜 것이 없어.

아무리 바르게 열심히 해도 인연이 도래到來허지 아니허면 더디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얼마 안 닦아도 퍼뜩 깨달은 사람은 전생前生에 많이 닦아놓은 사람이고, 전생에 닦아 놓은 것이 없으며는 금생今生에 비록 열심히 헌다고 해도 더디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마지막 죽어갈 때도 깨닫지 못허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체 터억 숨을 거둘 수 있다면 무엇이 원통헐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빨리 깨달라 가지고 '아무개는 견성見性했다', '내가 빨리 조실祖室도 한바탕 해야겄다', '천하天下를 향해서 큰소리도 한번 쳐봐야겠다”

"쯧!".
도道가 무엇인줄 모를 때에는 쯧!혹 그런 생각도 헐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먹을 것도 안 먹고 허고 싶은 것도 안 허고 청춘을 버리고 참 도道를 닦게 될 수도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해도 그것이 오히려 좋고, 누가 나를 무시를 허거나 업신여기거나 일생一生을 바보처럼 산다 해도 그 속에 한량없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이 있는 법이지, 누가 알아주고 그런다고 해서 그게 괴롭기만허지 그 별로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과거에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께서 말씀하신 [최상승(법)론最上乘論]이라든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선교석禪敎釋]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바보가 되아 가지고 참 말귀도 못알아 듣고 오직 배고플 때 밥이나 먹고 참 화장실이나 갈 줄이나 알제 아무것도 모르는 똥 멍칭이(멍청이)가 되아야 헌다’고 말씀을 허셨고, 만공滿空스님께서도 “그러한 바보가 되아서 썩은 나무둥치가 되아야 일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니라.”고 간곡히 말씀을 허셨습니다.

여러 도반들께서도 그러헌 마음으로 수행을 허신다며는, 결정코 ‘남에게 속지않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 진정한 수행자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러헌 많은 수행자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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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十二章經 [十八]》

佛言。
“吾法。
念無念念。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 송담선사 법문 593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