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이 다시 눈을 잃다. ]

2023. 4. 23. 19:02짧은 글

[분별分別에서 본분本分으로 돌아오다]


【이야기 하나】


[答蒼厓]

還他本分。豈惟文章。一切種種萬事摠然。花潭出。遇失家而泣於塗者曰。爾奚泣。對曰。我五歲而瞽。今二十年矣。朝日出往。忽見天地萬物淸明。喜而欲歸。阡陌多歧。門戶相同。不辨我家。是以泣耳。先生曰。我誨若歸。還閉汝眼。卽便爾家。於是。閉眼扣相。信步卽到。此無他。色相顚倒。悲喜爲用。是爲妄想。扣相信步。乃爲吾輩守分之詮諦。歸家之證印。


본분本分으로 돌아옴이 어찌 문장文章 뿐이겠습니까? 일체의 온갖 일들이 다 그러합니다.


화담花潭(徐敬德)이 외출하였다가 제 집을 잃고 길가에서 우는 자를 만났는데,

“너 왜 우느냐?“ 하고 물으니,

“제가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입니다. 아침에 밖을 나섰다가 홀연히 천지 만물이 깨끗하고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밭둑에 갈림길이 많고 대문마다 서로 같아서 제 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하기에 선생이 말하길,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마.
네 눈을 도로 감으면 곧 네 집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눈을 감고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제 걸음을 믿으니, 곧 집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색상色相(색과 형상)에 전도顚倒되고(거꾸러지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하여 이것이 망상妄想이 된 것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제 걸음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본분本分을 지키는 전제詮諦가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이 되는 것입니다.


- [연암집燕巖集] 제 5권.


* ‘앎으로 인해 길을 잃어버렸을 땐 다시 ‘알수 없음’의 지팡이를 두드려 그 걸음을 믿고 나아가는 것[扣相信步],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분本分을 지키는 전제詮諦가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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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

是日鴻臚寺少卿趙光連。聯椅觀幻。余謂趙卿曰。目不能辨是非察眞僞。則雖謂之無目可也。然常爲幻者所眩。則是目未甞非妄而視之明。反爲之祟也。趙卿曰。雖有善幻難眩瞽者。目果常乎哉。余曰。弊邦有徐花潭先生。出遇泣于道者曰。爾奚泣。對曰。我三歲而盲。今四十年矣。前日行則寄視於足。執則寄視於手。聽聲音而辨誰某則寄視於耳。嗅臭香而察何物則寄視於鼻。人有兩目而吾手足鼻耳。無非目也。亦奚特手足鼻耳日之早晏。晝以倦視物之形色。夜以夢視无所障礙。未曾疑亂。今行道中。兩目忽淸。瞖瞙自開。天地寥廓。山川紛鬱。萬物礙目。群疑塞胷。手足鼻耳。顚倒錯謬。皆失故常。渺然忘家。無以自還。是以泣爾。先生曰。爾問爾相。相應自知。曰。我眼旣明。用相何地。先生曰。還閉爾眼。立地汝家。由是論之。目之不可恃其明也如此。今日觀幻。非幻者能眩之。實觀者自眩爾。

-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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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홍려시 소경(鴻臚寺 少卿) 조광련(趙光連)과 의자를 나란히 하고 요술을 구경했는데, 내가 조광련에게 말하기를,

“눈으로 능히 시비를 판단치 못하고 진위眞僞를 살피지 못할진댄 비록 눈이 없다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요술쟁이에게 속는 것은 눈이 일찍이 헛되게 보여 그런 것이 아니라 눈으로써 밝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탈입니다.” 하였더니 조광련은,

“비록 요술을 잘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소경에게는 눈속임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눈이란 과연 떳떳한 것일까요?” 하였다. 나는,

“우리나라에 서화담 선생(徐花潭先生)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밖을 나가는데 길에서 우는 자를 만나 ‘네 어찌하여 우느냐?’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세 살에 소경이 되어 이제 40년이 되었는데, 예전에는 걸음을 걸을 때는 발을 의지해서 보고(발에 보는 것을 보내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을 의지해서 보고(손에 보는 것을 보내고), 성음(聲音, 소리)을 들어서 누구인지 분별함은 귀를 의지해서 보고, 냄새를 맡아 무슨 물건인지 살핌은 코를 의지해서 보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두 눈만 가졌지만 나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모두 눈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한 하필이면 수족과 귀와 코뿐이겠습니까? 해가 빠르고 늦은 것은  낮에 몸이 피로한 것으로 보고(알고), 물건의 형용과 빛깔을 밤에 꿈으로 봅니다(압니다). 아무런 장애도 없고 일찍이 의심과 혼란이 없었는데, 이제 길을 걸어오다가 홀연히 두 눈이 맑아지고 동자가 스스로 열려 천지가 넓고 크며, 산천이 요란하게 엉켰고, 만물이 눈을 가리고 모든 의심이 가슴을 막아서, 수족과 귀와 코는 착각을 일으키고 전도顚倒되어서 모두 떳떳한 것을 잃고 보니, 묘연渺然히 우리 집조차 잊어버려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웁니다.’ 하더랍니다.

화담 선생은 말하기를, ‘네가 네 지팡이에게 물어보면 지팡이가 응당 스스로 알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그는 말하기를, ‘내 눈이 이미 밝았으니 지팡이에게 물으면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도로 네 눈을 감으면 네가 서 있는 곳이 곧 네 집일 것이다.’ 했으니, 이로써 논한다면, 눈이란 그 밝은 것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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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둘】


昔에 異見王이 問婆羅提尊者曰 何者是佛이잇고.  尊者曰 見性이 是佛이이다. 王曰師見性否이잇가. 尊者曰 我가 見佛性호이다. 王曰 性在何處이잇고. 尊者曰 性在作用하나이다. 王曰 是何作用인고 我今不見하야이다. 尊者曰 今에 現作用하샤되 王自不見하시나이다. 王曰 於我에 有否이잇가. 尊者曰 王若作用이신댄 無有不是코 王若不用이신댄 體亦難見이니이다. 王曰 若當用時에 幾處에 出現이니잇고. 尊者曰 若出現時가 當有其八하나이다. 王曰 其八出現을 當爲我說하쇼셔.

尊者曰 在胎曰身이오 處世曰人이오 在眼曰見이오 在耳曰聞이오 在鼻曰辨香코 在舌談論코 在手執捉하고 在足運奔하야 徧現하면 俱該沙界코 收攝하면 在一微塵하나니 識者는 知是佛性커든 不識者는 喚作精魂하나니이다. 王聞하고 心卽開悟하니라.


옛날에 이견왕異見王이 바라제존자波羅提尊者께 물어 이르되, “어느것이 이 부처입니까?” 존자尊者가 이르시되, “성性을 보는 것(見性)이 이 부처입니다.”

왕이 존자께 묻되, 성품을 봅니까 못봅니까[見性]?
존자尊者가 이르되, 불성을 봅니다.

왕이 이르되, 성품은 어느곳에 있습니까?
존자尊者가 이르되, 성품은 작용하는데에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이 어떤 작용이기에 저는 보지를 못합니까?
존자尊者가 이르되, 지금 작용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왕이 스스로 보지를 못하십니다.

왕이 이르되, 나에게도 (불성의 작용이)있습니까 없습니까?
존자尊者가 이르되, 왕께서 만약 작용을 하시면 이 작용이 아닌것이 없고, 왕께서 만약 작용을 안하시면 그 본체 또한 보기가 어렵습니다.

왕이 이르되, 만약 마땅히 작용하여 쓰는 때에는 몇 군데로 출현합니까?
존자尊者가 아르되, 만약 출현하는 때라면 마땅히 여덟 군데가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그 여덟 군데로 출현함을 마땅히 저를 위해서 설명해주십시오.


존자尊者가 이르되,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에는 ‘몸’이라고 부르고,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라고 부르며,
눈에 있어서는 ‘봄’이라 하고,
귀에 있어서는 ‘들음’ 이라 합니다.
코에 있을 때에는 ‘향을 맡음’이라고 하고,
혀에 있어서는 ‘담론(말)’이라고 말하며,
손에 있을 때에는 ‘움켜쥠’ 이라고 하고,
발에 있어서는 ‘걷고 달림’이라고 부르는데,
널리 나타나면 항하사 모래수와 같이 많은 우주를 끌어안고,
섭수하면(거둬들이면) 하나의 원자(티끌) 속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佛性’이라는 것을 아는데, 모르는 사람은 ‘정혼情魂’이라고 말합니다.

왕이 듣고서 마음이 크게 열리게 되었다.


- [牧牛子修心訣] 보조국사 목우자 수심결.


* 是何作用인고 我今不見하야이다.
“이 무엇의 작용인가를 내가 지금 보지 못하나이다”

是甚麽?이 무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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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若有所貴,必有所賤。心若有所是,必有所非。心若善一箇物,一切物即不善。心親一箇物,一切物作怨家。心不住色,不住非色。不住住,亦不住不住。心若有住,即不免繩索。心若有所作處,即是繫縛。心若重法,法留得你。心若尊一箇法,心必有所卑。

마음이 만약 귀貴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천賤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마음이 만약 옳게(是)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르게(非) 여기는 것이 있다. 마음이 만약 하나의 어떤 것을 선善으로 여긴다면 다른 일체의 어떤 것들은 곧 선善하지 않음이 된다. 마음이 하나의 어떤 것을 친親하게 여기면 일체의 어떠한 것들은 원가怨家(원수의 것들)가 된다.

마음은 색色에 머물지 아니하며, 색 아님(非色)에도 머물지 않는다. 머무는(住)데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머물지 않는(不住) 데에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만약 머무는(住) 바가 있게되면 곧 노끈과 새끼줄의 얽매임을 면할 수가 없다. 마음이 만약 짓는 처소處所가 있다면 즉시即是(바로 이것이) 얽매이는 것이다(繫縛). 마음이 만약 중시重視하는 법法이 있으면 그 법法이 그대를 잡아 가둔다. 마음이 만약 하나의 법을 존중히(尊) 여기면 마음은 반드시 천히(卑) 여기는 것이 있다.


- [달마이입사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