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7. 17:59ㆍ카테고리 없음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경
松溪道人 無垢子 註 송계도인 무구자 주
<<반야심경 무구자 도인 주해>>
- <불광출판사> 한암대원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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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這點靈光道上來
只因逐妄墮塵埃
君今要見還鄉路
悟得心經道眼開」
이 한 점의 신령스런 빛이 도 위에서 오건만
단지 망령된 것을 따름으로 인해 티끌에 떨어졌도다.
그대는 지금 고향에 돌아가는 길을 보고자 하는가!
마음의 경을 깨달으면 도의 눈이 열릴 것이다.
「摩訶。」
【西天梵語也東土翻為大且大者廣無邊際之謂
也廣大無邊者莫過虗空大道也 川老云虗空
境界莫思量大道清幽理更長 又云十方無壁
落八面亦無門大道無邊際虗空難度量 道云
迎之不見其首隨之不見其後 儒云仰之彌高
鑽之彌堅瞻之在前忽錯在後 諸賢聖皆如此
稱揚廣大也
‘마하’는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크다大’라고 변역했다. ‘크다’고 하는 것은 끝이 없이 넓음을 말한다. 광대무변한 것에는 허공과 대도를 지나는 것이 없으니, 야보도천 스님은 “허공의 경계는 사량하지 못하며, 대도는 맑고 깊으며 이치가 또한 크다.”고 하였고, “온 우주 법계에는 벽이나 울타리가 없고 팔면八面에 문도 없다. 대도는 가장 자리가 없고 허공은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도가에서는 “맞아들여도 그 머리를 보지 못하고, 따라가도 그 뒤를 보지 못한다.” 고 하였고,
유가에서는 “우러러봄에 더욱 높고, 뚫어 봄에 너무 견고하며, 멀리 앞에 있음을 보았는데 홀연히 뒤에도 있다.”고 하였다. 모든 성현께서 이와 같이 크고 넓다고 말씀하셨다.
日月雖明難比其光乾坤雖大難
包其體能生萬有而不見其形徧周沙界而不覩
其跡雖是如此廣大玄妙誰知更有一物過於此
者且道是何物還識這箇○麼寬則包藏法界窄
則不立纖毫顯則八荒九夷無所不至隱則纖芥
微塵無所不入
해와 달이 비록 밝다고 하나 그 빛에 비유할 수 없고,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하나 그 실체를 싸안을 수가 없다. 능히 만유를 만들어 내나(生) 그 모양을 볼 수 없고,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 있으나 그 자취를 보지 못한다. 비록 이와 같이 광대하고 현묘하나 누가 다시 이보다 더 수승한 한 물건이 있는 줄 알겠는가.
자 말해보아라!
무슨 물건인가?
이 물건을 알겠는가? ○
넓기로 마하면 우주법계를 싸안고, 좁기로 마하면 털끝 하나도 세우지 못한다. 나타나면 온 세상에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고, 숨으면 작은 겨자씨, 그보다 더 작은 티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今者不避罪𠍴分明漏泄乃人之
本源也 僊師有云為甚此心開大道只因元向
道中來 世人不能返本者蓋因錯認色身為巳
被六根所瞞七情遮蔽自失本真以致流浪生死
也
비록 죄가 될지라도 이제 분명하게 사람들의 근원을 누설할 것이다.
선사僊師는 “어찌하여 이 마음이 대도를 여는 것인가? 다만 원래 도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근본을 돌이켜 보지 못하는 것은 대개 색신을 잘못 인식하여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육근에 속임을 당하고, 칠정七情에 가려져 스스로 근본자리를 잃어버리고 생사의 바다에 떠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要見本真麼 尋不見覔不見十二時中遶
身轉 省得麼。
근본 진여자성을 보고자 하는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나
하루종일(十二時中) 몸에 지니고 굴리고 있다.
알았는가?
「 法身體若太虗空
性道元來總一同
只因逐妄迷真性
所以輪迴六道中」
】
법신의 체는 태허공과 같으며
성품과 도 또한 원래가 하나이다.
다만 사람들이 허망한 것을 따르는 까닭에 진실한 본성이 가려져 육도 가운데 윤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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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
【西天梵語也東土翻為智慧且智慧者正知正解
審察之謂也脩行之人須用智慧之力降伏身心
不令放肆以習靜定 道云能以智慧之力攝伏
諸魔精 蓮經云慧日破諸闇能伏災風火 儒
云智能破邪慧能破暗
‘반야’는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지혜’라 번역한다. 또한 ‘지혜’란 바로 알고 바로 해석하여 모든 것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모르지기 지혜의 히으로 몸과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니, 제멋대로 놓아두지 말고 정定을 익혀야 한다. 지혜에 대해 도가에서는 “지혜의 힘으로 모든 마정魔精을 다 항복받는다.”하였고, <묘법연화경>에서는 “지혜의 해(日)는 모든 어둠을 깨뜨리며, 재앙과 풍화를 굴복시킨다.”하였으며, 유가에서는 “지智는 확실하게 삿됨을 깨서 없애고, 혜慧는 분명하게 어둠을 깨뜨려 없앤다.”고 하였다.
且無智愚人作事麤惡
不肯三思惟務廣學多聞念在誇談講論不究自
家生死好覔他人是非不親真實道人愛近虗頭
禪客空談聖人經典心地全不用功圖名貪利我
慢貢高只說眼下時光不想腦後之事如此之人
乃聰明外道也 古德有云外道聰明無智慧。
僊師云口說心不行非是精細漢 儒云先治身
心後治家國
지혜(智)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하는 일마다 세밀하지 못하고 세 가지 사유를 즐기지 않는다. 널리 배우고 많이 듣는 데 힘쓰며 강의하고 토론하는 것을 자랑하는 데만 생각이 가 있을 뿐 자기의 생사를 궁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시비를 좋아하고 진실한 도인을 친견하지 않으며, 허두선객을 좋아하고 가까이 해, 성인의 경전을 쓸데없이 지껄이며, 마음자리를 찾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명리만을 도모하고 이익을 탐하며 아만만 높아 다만 눈 아래 보이는 시광時光만 이야기할 뿐 머리 뒤의 일은 생각하지 않으니, 이러한 사람들이 곧 총명외도이다. 그래서 고덕은 “외도는 총명하나 지혜가 없다.”고 하였고, 선사僊師는 “입으로만 말하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자세하고 정밀한 자가 아니다.”라 하였다. 유가에서는 또 “먼저 몸과 마음을 다스린 후에 가정과 나라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且有智慧之人作事安詳不肯造
次識因果顧罪福親近知識參問至人窮性命之
根元究生死之大事制伏身心收斂神氣念念在
道息息歸真一日功成行滿㘞地一聲透出三界
此虗空混為一體若到此地造化不能移易陰陽
不能陶鑄四時不能遷五行不能役鬼神不能拘
劫火不能壞作箇逍遙自在物外閑人
또 지혜 있는 사람은 일을 행함에 편안하고 침착하며, 거동이 조용하고, 급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과를 알고 죄와 복을 돌아볼 줄 알며, 선지식을 가까이 하고 지인을 참배하여 묻고, 성명性命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 생사 대사를 연구하고, 심신을 제어하여 굴복시켜 정신을 거둬들이니 생각 생각마다 도가 있고 호흡 호흡이 진리에 돌아간다.
어느 날 공이 이루어지고 행이 원만해지면 한 번에 바로 삼계를 투출透出하여 허공과 섞여 일체가 된다. 만일 이런 경지에 이르면 조화로도 그를 옮기지 못하며, 음양으로도 만들 수가 없다. 사시四時도 변화시킬 수 없고, 오행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한다. 귀신도 얽어 맬 수 없고, 겁화劫火도 쉽사리 무너뜨리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소요자재하여 물질의 얽매임을 벗어난 한가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要見物外閑人麼 六座門頭常出入雖然相近不相親 開著眼休得蹉過
省得麼。
물질의 얽매임을 벗어난 한가로운 사람을 보고자 하는가?
육근의 머리에 항상 출입한다. 아주 가까이 있긴 하지만 서로 친하지는 않다. 착안해 보되 실패하지 말지어다.
알겠는가?
「 智慧聰明路兩差
聰明枝葉慧根芽
若改愚痴生智慧
多年枯木自開華」
】
지혜와 총명은 두 갈래 다른 길이니
총명은 지엽이고 지혜는 뿌리와 싹이다.
만약 어리석음을 고쳐서 지혜가 나면
오래된 고목에 저절로 꽃이 피리라.
-------ㅇ
「波羅。」
【西天梵語也東土翻為彼岸 此岸者生死之際
也彼岸者出生死之岸也迷者此岸悟者彼岸世
人若迷本性即愚痴顛倒認四大六根為巳爭名
競利謀千年之活計積萬劫之冤𠍴背覺合塵迷
真逐妄忙忙而不知休息念念而心境不除忽朝
大限到來臨行手無所措這裡脫下濕布衫那裡
穿上虱虱襖去去來來改頭換面似蟻循環何日
是了生死苦海幾時得渡如是之者只在此岸
‘바라’는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피안’이라 번역한다. 차안此岸은 생사의 고통이 있는 곳이며, 피안은 생사를 벗어난 곳이다. 우치하여 어리석은 것은 이 언덕(此岸)이며, 깨달은 것은 저 언덕(彼岸)이다.
세상 사람들이 본성을 미혹하면 우치하고 전도되어 사대, 육근을 자기라고 착각한다. 명리를 다투고 천년의 살림살이를 계획하며, 만겁의 원수를 쌓아 깨다음을 등지고 껍데기들만 모여 진실한 자성 자리를 가리며 허망한 것들만 쫓아다닌다. 바쁘고 바빠 휴식할 줄 모르고, 생각하고 생각하여 마음의 경계를 제거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죽음(大限)이 닥쳐온다. 어떻게 막아 보려고 해도 촉급하여 손을 쓸 여가가 없다. 여기에서 젖은 베옷을 벗어 버리고, 저기에서 이가 설설 기어 다니는 가죽옷을 입는다. 가고올 때마다 머리가 바뀌고 얼굴이 바뀌는 것이 마치 개미가 쳇바퀴 돌 듯 윤회하니 어느 날에 이 생사를 마치며 어느 때에 이 고해를 건너겠는가.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이 언덕(차안)에 있는 것이다.
若有人猛然自悟從前所為所作盡是虗假棄假循
真窮根究本常近至人常親知識求過岸之舟覔
方便之篙渡過愛河苦海而登彼岸得脫生死洪
波更不拖泥帶水作箇脚乾手燥清淨自在閑人
也
만일 어떤 사람이 이전에 했던 일들이 다 헛된 것임을 확연히 깨닫고, 헛된 것을 버리고 진여로 돌아가 근원을 궁구하고 근본을 규명하며, 지인至人을 가까이하고 항상 선지식을 친견하며, 저 언덕으로 건네주는 배를 구해서 방편의 삿대를 찾아 애욕과 고통의 바다를 건너 저 열반의 언덕에 오른다면 생사의 큰 파도를 벗어나 다시는 죽고 사는 진흙탕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리도 마르고 손도 건조한, 청정하고 자유롭고 한가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且道如何得達彼岸 咦 他人難用力自渡自家身
會麼。
자, 말해 보아라! 어떻게 해야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에잇!
다른 사람이 힘을 쓰기는 어려우니 스스로 자기 몸을 건네주어야 한다.
알겠는가?
「 智慧為船精進篙
靈臺用力出波濤
翻身直上菩提岸
撒手歸來明月高」
】
지혜는 배가 되고 정진은 삿대가 되어
신령스런 집에서 힘을 쓰니 파도를 벗어났도다.
몸을 날려 바로 보리의 언덕에 오르며
손을 털고 돌아오니 달이 밝고 높구나.
-------ㅇ
「蜜多。」
【西天梵語也東土翻為無極又蜜者和也多者眾
聚也且無極者至高至大難極之謂也 釋云無
極 道云太極 儒曰皇極皆謂○此也今分明
說開蜜之一字亦比於大道虗空多者謂萬彚也
譬道能包含萬類有情無情盡在大道之中人之
真性一同亦能包藏萬法萬法盡在一性之中太
虗之內有八萬四千異類種性說不可盡皆在人
之一性之內一性譬如蜜種性喻於多情行人以
一性均和種性合而為一故曰蜜多 道云識得
一萬事畢 釋云萬法歸一 儒云吾道一以貫之
‘밀다’는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무극無極이라 번역한다. ‘밀蜜’은 섞여 있다(和)는 의미이며 ‘다多’는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무극이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높아 끝나는 곳을 알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무극’이라 하고, 도가에서는 ‘태극太極’이라 하며, 유가에서는 ‘황극皇極’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두 ○을 말하는 것으로, 이제 분명하게 열어 설명하겠다.
밀蜜이라는 한 글자는 대도 또는 허공에 비유할 수 있고 다多는 많은 무리를 의미한다. 이 도道가 만 가지 무리를 포함하여 유정 무정이 다 대도 가운데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의 참 성품도 동일하여 만법을 포함하고 있으며, 만법은 모두 한 성품 가운데 있다. 태허 가운데에는 팔만 사천 가지의 다른 종성이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모두 사람의 한 성품 안에 있다. 한 성품은 ‘밀蜜’에 비유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종성은 ‘다정多情’에 비유할 수 있다. 이치로 행하는 사람은 한 성품으로 균등하게 종성에 화합하며, 합해져 하나가 되므로 이를 밀다蜜多라고 한다. 도가에서는 “하나를 알면 만 가지 일(事)을 끝낸다.”라 하였고, 불가에서는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라 하였으며, 유가에서는 “나의 도는 하나로 꿴다.”고 하였다.
且道如何是一 還識這個○麼 咄 五行不到處 父母未生前 雖然說破不行
難到直須去盡塵垢方見 省麼。
자, 말해 보아라! 하나란 무엇인가? 저 하나 ○를 알겠는가?
돌!
오행이 이르지 못하는 곳,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이다. 비록 말로 설명해 주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도달하기 어려우니 바로 버려야 한다. 티끌을 다 없애면 그제야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이다.
알겠는가?
「 一性為蜜眾為多
先將覺性普均和
坐成一片真如性
一性圓明赴大羅」
】
한 성품이 밀蜜이 되고 많은 것이 다정多情이 되니,
먼저 성품을 깨닫고 널리 균등하게 종성에 화합하라.
앉아서 진여의 성품과 하나가 되면,
한 성품이 원만하게 밝아서 대라大羅에 나아가리라.
-------ㅇ
「心。」
【心者人之本源也一切萬法盡在一心之內有八
萬四千等動則無窮無盡定則不變不移 釋云
心生種種法生心滅種種法滅 道云心死則性
月朗明心生則慾塵遮蔽 儒云制之一心則止
謀於多事則亂 是以古聖教學人收攝其心歸
於一處喚作萬法歸一又名一字法門
마음은 사람의 본원, 생명의 원천이다. 일체 만법이 다 한 마음 안에 있고, 팔만 사천 가지 모든 법이 다 마음에 있다. 움직이면 무궁무진하며, 고정시키면 변함도 없고 이동하지도 않는다. 불가에서는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고, 도가에서는 “마음이 죽으면 성품의 달이 밝고, 마음이 나면 욕망의 티끌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하였으며, 유가에서는 “한마음을 다스리면 모든 것이 그치고, 많은 일을 도모하면 모든 것이 어지러워진다.”고 하였다. 그런 가닭에 옛 성인은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잘 거두어 섭수함으로써 한 곳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것이 ‘먼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며, 또 이것을 ‘일자법문’이라고 한다.
因人不信是心是佛是心作佛所以多種方便指示世人見
自本性豈不見古云三點如星象橫鈎似月斜披
毛從此得作佛也由他是也上天入地皆在自心
所為非他處所得 經云在於閑處收攝其心。
又云制之一處事無不辦
이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드는 것임을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여 자기의 본성을 바로 보게 했건만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가? 옛 사람이 “마음 심心 자 세 점은 별 모양과 같고 옆으로 뻗은 갈고리는 달이 기울어진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털을 덮어 쓰고 윤회하는 것도 여기에서 시작되며, 부처가 되는 것 또한 마음을 의지해서”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늘에 오르거나 땅에 들어감은 다 자기의 마음의 소행이지, 다른 곳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경에서는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그 마음을 섭수하라.”고 하였고, 또 “한 곳을 제어하면 판단하지 못할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不能歸一者因識心者
少亂性者多故失真道矣為何不識其心因其多
惑其性皆緣失神昏昧逐境迷心六根內盲著物
亂性不生智慧愚暗之故也若肯脩心窮性命究
生死親近明師參求法藥療治心病念茲在茲步
步行行坐臥不忘語默動靜不離這箇○忽然眉
毛竪起眼睛露出便見本來面目
사람들이 하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아는 자가 적고 성품이 어지러운 자가 많아 진실한 도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 미혹됨이 많아 성품이 그것을 다 반연하기 때문에 맑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혼미하여 경계를 따라 마음을 미혹하게 한다. 육근에 눈이 멀어 물질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성품이 어지러워져 지혜가 생기지 않으니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마음을 기꺼이 닦아 성명性命을 궁구하고 생사를 연구하며 사리에 밝은 스승을 가까이해 법약法藥을 참구한다면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고 여기에서부터 걸음 걸을 때나 앉거나 누울 때 잊지 않고, 어묵동정에 이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면, 저 ○이 눈썹을 똑바로 세운 눈동자 위로 홀연히 드러나 문득 본래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且道本來面目如何形狀 川老有云火不能燒水不能溺風
不能飄刀不能劈軟似兜羅硬如鐵壁天上人間
古今不識 咄 知道麼 終朝常對面 不識
是何人。
자, 말해 보아라! 본래면목은 어떤 형상인가?
야보도천 스님은 “불이 이것을 태우지 못하며, 물도 이것을 잠기게 하지 못하고, 바람도 이것을 흔들지 못하며, 칼도 이것을 베지 못한다. 부드럽기가 도라와 같고 견고하기가 철벽과 같다. 천상이나 인간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돌!
알겠는가?
종일토록 항상 대면하고 있지만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 這輪心鏡本無塵
因塵難照本來真
塵盡鏡明無一物
自然現出法王身」
】
이 둥근 마음의 거울은 본래 티끌이 없으니,
다만 티끌로 인해 비추기 어려울 뿐 본래 참이다.
티끌이 다하면 거울은 밝아져 한 물건도 없어
자연히 법왕의 몸을 나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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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
【經者徑也是世人脩行之路徑也學人得此不疑
擬休要悞了工程驀直便行須有到家時節只怕
路頭不真差行錯認
경經은 곧 바른 길이다. 세상 사람들이 수행하는 지름길이다. 배우는 사람이 이것을 얻으면 의심하거나 헤아리려 하지 말고, 그릇된 공부 방법을 구하려 하지 말라. 곧바로 실천하면 자기 집에 도달하는 시절이 있을 것이다. 다만 수행과정에서 참이 아닌 것을 잘못 행하고 잘못 인식할까 그것이 두렵도다.
且道向甚處去是予今明
說向寸草不生處纖塵不立處無泥水無坑坎淨
躶躶赤洒洒平穩穩處去猛然逢著一顆○圓陀
陀光爍爍亘古不壞如意光明寶珠親手拈來得
大利用不受困苦 釋云摩尼寶珠 道云黍米
玄珠 儒云九曲明珠
자, 말해 보아라! 오느 곳을 향해 가는가?
내가 지금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풀 한 포기도 나지 않는 곳, 미세한 트끌도 세우지 못하는 곳, 진흙탕도 없고, 함정도 없으며, 모두 벗어서 알몸처럼 드러나 있는, 물을 뿌린 듯 깨끗하고, 평온한 곳을 향해 용맹스럽게 가면 한 알의 구슬○을 만날 것이다. 이 구슬은 둥글로 아름다우며 빛나고 빛나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이 여의광명의 보배 구슬을 손수 손으로 잡으면 큰 이익과 공능이 있으며 어려움이나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마니보주’라 하였고, 도가에서는 “기장쌀 같은 현묘한 구슬”이라 했으며, 유가에서는 “아홉 구비 밝은 구슬”이라 하였다.
要見此珠麼 一心象外覔。休向世間求。
이 구슬을 보고자 하는가?
한 마음을 형상 밖에서 찾되 세간을 향해 구하지 말지어다.
「 這卷真經本在心
自家藏寶不須尋
猛然檢著無生品
迸出明珠耀古今」
】
이 한 권의 진경真經은 본래 마음에 있으니
자기 집에 감추어진 보배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
용맹한 마음으로 ‘생겨남이 없는 경론’을 점검하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밝게 빛나는 구슬이 솟아나오리니.
-------ㅇ
「觀自在菩薩。」
【自在菩薩人人皆有只因六根諸境遮障不能觀
看情欲萬緣所牽不得自在若有智慧之人信得
及放得下但於幽靜閑處打併身心坐令極靜靜
中更靜無纖毫異念一心清淨守至靜極
자재觀自在보살은 사람마다 다 있으나 다만 육근으로 인해 모든 경계가 막혀 있어 정욕을 깊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만 가지 인연에 이끌려 자재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믿어 놓아 버리고 그윽하고 고요한 곳에서 몸과 마음(身心)을 추스르고, 앉으매 고요함의 한께에 이르게 해, 고요한 가운데 다시 고요하여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이 없으면 한 마음이 청정해져 지극히 고요한 자리에 이를 것이다.
猛然一動有一真人在自巳靈宮往往來來縱橫無礙這
裡方見自巳菩薩優滿自在一剎那間徧周沙界
隨處現法身到處不留跡光明普照觀之不見諸
人若要見此菩薩觀之不用其目聽之不用其耳
去耳目之用纔識自在菩薩
용감하게 한 번 움직임에 한 진인이 자기의 신령스러운 궁전에 있어 가고 옴에 종횡으로 걸림이 없다. 이 속에서 비로소 자기 보살이 모든 곳에 유유히 노닐고 자재하여 한 찰나 사이에 무한한 우주세계에 가득 참을 보게 될 것이다. 가는 곳마다 법신을 나타내지만 이르는 곳마다 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광명을 널리 비추나 보려고 하면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이 만일 이 보살을 보고자 한다면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로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귀와 눈을 쓰지 않는다면 비로소 관자재보살을 알게 될 것이다.
道云視不見我聽不得聞離種種邊名為妙道
金剛經云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
儒云視不用目聽不用耳離耳目之用自然得性。
如是之者方知一切處此真仙菩薩未甞不在同
坐同行同歡同笑寸步不曾相離只是自家昧了
도가에서는 “보고자 하되 나를 보지 못하고, 듣고자 하되 들을 수 없으며, 여러 가지 견해를 여의었으므로 묘도라 이름 한다.”고 하였고, <금강경>에서는 ‘만약에 모양 있는 것(色)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고 하면 이 사람은 잘못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고, 유가에서는 “보되 눈을 사용하지 않으며 듣되 귀를 사용하지 않는다. 귀와 눈의 작용을 떠나 있으면 자연히 성품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자라야 비로소 모든 곳에 이 진선보살이 없는 곳이 없으며, 같이 앉고 같이 행동하며 같이 기뻐하고 같이 웃으며, 촌보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으나, 다만 자기가 우매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要見此菩薩麼 咦 雖然出入無踪跡爍爍
光明見也麼。
이 보살을 보고자 하는가?
에잇!
나가고 들어오지만 흔적이 없다.
반짝이며 빛나는 밝은 광명을 보았는가!
「 菩薩從來不離身
自家昧了不相親
若能靜坐回光照
便見生前舊主人」
】
보살은 본래부터 몸을 떠난 적이 없으나
스스로 우매하여 서로 친하지 못하도다.
만약 고요히 앉아 빛을 돌이켜 반조해 보면
문득 생전의 옛 주인을 만나게 되리라.
-------ㅇ
「行。」
【行者脩行也路徑崎嶇不脩難行 且脩是脩心
向道行是行善歸真如人修路相似去礙路荊棘
除當道頑石高者斷之低者填之打掃潔淨便坦
然平穩
‘행行’은 수행을 말하니, 길이 험준하여 닦지 않으면 행하기 어렵다. 또한 ‘닦는다(修)는 것’은 마음을 닦아 도道로 향하는 것이며, ‘행行하는 것’은 선을 행하여 진여眞如에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길을 닦아 평평하게 하고 길을 막는 가시덩굴을 치우고 길에 박혀 있는 단단한 돌을 제거하고 높은 것은 깎아서 낮게 하고 낮은 곳은 메워서 돋우고 치우고 쓸며 깨끗이 하면 문득 평탄하고 편안한 길이 되는 것과 같다.
人之心地亦要如此下功去一切損人利
巳之心如去礙路荊棘相似礙登途穩步除一切
襍念障道因緣如除當道頑石一同得進身平正
損大過補不及令得均平屏垢心絕染污打併清
淨此乃脩行初入門之要也
사람의 마음자리도 또한 이와 같이 공력을 들여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가시덩굴을 치우는 것과 같고, 길을 걷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치워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든 잡념과 도에 장애가 되는 인연을 제거하는 것은 길에 박혀 있는 단단한 돌을 제거하여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것과 같고, 몸이 바르고 곧아서 큰 허물을 덜어 냄은 미치지 못하는 곳을 메워 평평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때 묻어 더러운 마음을 막고 번거로움을 끊어 버리는 것은 가지런히 정리하여 청정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처음 수행에 입문하는 데 있어서 요점이 된다.
非在口說亦非足行
全憑心地下功 仙真云心地下功全拋世事。
釋云心地法門非在舌辨 儒云說不如行行不
如到此也又要看這一步從何而起若知起處便
知生死根源
입으로 말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발로 행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니 오로지 마음에 의지하여 공력을 써야 한다. 선진仙真은 “마음자리에 공력을 쓸 뿐 세상일은 모두 버려라.”라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심지법문은 혀로 말하는 데 있지 않다.”고 하였으며, 유가에서는 “말하는 것은 행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여기에 이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한 이 한 걸음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를 보고자 하는가? 만약 일어난 곳을 알면 바로 생사의 근원을 알게 될 것이다.
昔日劉海月參白雲師父拜而問
曰弟子念慮降伏不住如何師問云是誰念慮答
弟子師云是誰降伏海月似省不省沉吟微笑師
云來去都由你閙好沒主宰若是敵他不過即便
放下更要知他放下的是誰若識得自有主宰便
不被他瞞過海月遂省禮謝而巳 又石霜和尚
問石頭和尚舉念不停時如何石頭咄云是誰舉
念石霜於此大悟
옛날에 유해월이 백운 사부를 찾아 뵙고 절한 뒤에 여쭈었다.
“제자가 염려하건대 항복하여 머무르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누가 염려하는 것이냐”
“제자입니다.”
“누가 항복하는 것이냐?”
해월은 안 듯하였으나 알지 못하고 신음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에 스승이 다시 말씀하셨다.
“오고 감에 모두 너로 인해 시끄러워 주재하는 이를 없애 버렸다. 만약 저를 만나면 지나치지 말고 곧바로 놓아 버려라, 놓아 버리는 저것이 누구인지 또 알고자 하는가? 만약 스스로 주재한 것인 줄을 알면 다른 이에게 속지는 않으리라.”
해월이 드디어 깨닫고 감사의 예를 올렸다.
또 석상 스님이 석두 스님에게 물었다.
“생각이 일어나 멈추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석두 스님이 꾸짖으셨다.
“누가 생각을 일으키는가?”
석상 스님이 여기에서 크게 깨달았다.
但只如此體究念念不離於當
處舉意思慮語言知覺細細審觀從何而出 古
云欲知佛去處只這語言是 道云要知本性根
由不離言語動靜 寶公云未了之人聽一言秪
這如今誰動口
다만 이와 같이 궁구하여, 생각 생각에 당처를 여의지 말고, 모든 뜻과 생각과 언어와 지감함이 어디로부터 나왔는지를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 가신 곳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이렇게 말하는 이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도가에서는 “본성의 뿌리를 알려고 하면, 언어와 동정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고, 금릉보지金陵寶誌화상은 “요달하지 못한 사람은 이 한마디를 들어보라. 다만 지금 누가 입을 움직이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然雖如是說開向上更有妙處不
脩不行不能自到若果到家鄉則罷問程矣 且
道家鄉遠近 迷則千山萬水隔 悟則回頭便
是家 理會得麼。
이와 같이 입을 열어 말하지만, 향상에 다시 묘처가 있어 닦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스스로 도달하지 못한다. 만일 고향에 도착하게 되면 다시는 길을 묻지 않을 것이다.
자, 말해보아라!
고향은 멀고도 가까우니 미혹한즉 천산만수가 가로막혀 있고, 깨달은즉 머리를 돌이키는 그 자리가 바로 자기 집이다.
알았는가?
「 起初行處認教真
若還失脚喪其身
踏得故鄉田地穩
做箇逍遙自在人」
】
처음 행을 일으킨 곳에서 가르침의 진의를 알지니
만약 다시 발을 헛디딘다면 몸을 잃게 되리라.
고향 땅을 밟아 평온해지면
소요자재한 사람이 될 것이다.
-------ㅇ
「深。」
【深者幽微玄妙徹骨徹髓處也若要到此田地須
是打併輕快方可 道云損之又損之以至於無
為 釋云放下又放下自然身心輕快 儒云苟
日新日日新又日新 要如此者須去靜坐日夜
打掃直至掃無可掃寸絲不掛如父母未生前燒
了一般 古云貼體汗衫都脫却反求諸巳廓然
無自然到家
‘심深’은 아주 그윽하고 현묘하여 골수까지 사무친다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마음을 하나로 고르게 하고 경쾌하게 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도가에서는 “버리고 또 버려서 무위에 이른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놓아 버리고 또 놓아 버리면 자연히 신심이 경쾌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유가에서는 “진실로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날마다 새롭게 다시 새롭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되고자 하면 모름지기 놓아버리고 고요히 앉아 밤낮으로 깨끗하게 쓸고 닦을지니, 이렇게 하면 곧바로 쓸어도 쓸 것이 없는 곳에 도달할 것이며, 실오라기 하나도 걸리지 않아 마치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과 같이 모두 없어져 버릴 것이다. 옛사람은 “몸에 달라붙은 땀 젖은 적삼을 모두 벗어 버리고, 돌이켜 자기에게서 구하면 확연히 없어져서 자연히 집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且道不得還家者何也 呀 日晚程途遠 身困擔兒沉 省也麼。
자, 말해 보아라!
어찌하여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가?
아~!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기만 한데
몸은 고단하고 등에 업힌 아이는 자꾸 내려간다.
알았는가?
「 大道家鄉本不深
世人擔重自難尋
若能放下渾無物
便見靈山佛祖心」
】
대도의 고향은 본래 숨겨져 있지 않은데
세상 사람들은 무거운 것을 지고 스스로 찾기 어렵다 하네.
그대로 잘 놓아 버리면 혼연히 물건이 없어서
문득 영산회상의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마음을 보게 되리라.
-------ㅇ
「般若。」
【般若者西天梵語也東土翻為智慧 大凡為人
須要自生智慧若無智慧真是愚人空過一生甘
伏死門有一等無智之人以聰明謂之智慧大錯
矣且聰明之人賣弄精細役使心神出言如飛龍
俊鷂行持如跛鱉病龜貪利圖名以麤作細看世
財如骨如髓棄性命若糞若土只知明日後日今
年後年不知老之將至死限臨頭可惜空過時光
虗勞一世似此所為生死輪迴如何脫得
‘반야’란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지혜라 번역한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가 없으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헛되이 일생을 보내다가 죽음의 문에 이르러 꼼짝없이 항복하게 될 것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 총명함을 지혜라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총명한 사람은 정밀하고 세밀한 것을 업신여겨, 심신을 이용하여 말을 할 때는 마치 날아다니는 용과 같고 뛰어난 새매와 같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다리 부러진 금계와 같고 병든 거북이와 같으며, 명리를 도모하고 탐하여 거친 것을 세밀하다고 하고, 세상의 재물 보기를 골수와 같이 여겨 성명性命 버리기를 똥 버리듯, 흙 버리듯 한다. 단지 내일, 모레, 올해, 내년만 알 뿐, 늙어 죽음에 이르려 하고 임종에 가까운 줄은 알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부질없이 일생을 수고롭게 하는 등등 이렇게 행동하는데 생사 윤회를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有智之人外如愚魯內默安詳識有生有死悟無得
而無失常自諦觀生從何來死從何往發此一念
親近知識參問至人求出世之法逃生死之路避
過惡如避錐刀顧性命如顧寶貝動則安人利物
亦不被境瞞靜則入定觀空更不滯莾蕩如是之
者一旦果完擺手還家得大自在
지혜 있는 사람은 밖에서 보면 어리석은 듯하나 안으로는 묵묵하고 침착하여 생사가 있음을 안다. 얻을 바도 잃을 바도 없음을 깨달아 항상 태어날 때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을 때는 어디로 가는지를 스스로 세밀히 관찰한다. 이 한 생각을 일으켜 선지식을 가까이 할 뿐 아니라 지인至人을 찾아 뵙고 질문하며 세간에서 벗어나는 법을 구해 생사의 길을 피한다. 세상의 모든 허물과 악을 송곳과 칼날 피하듯이 하고, 성명 돌아보기를 자기 보배를 돌아보듯이 한다. 움직일 때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며, 또한 어떤 경우에도 속지 않는다. 고요할 때는 정定에 들어 공을 관하여 다시는 어리석고 흐리멍텅한 데 빠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일단 완전히 손을 털고 자기 집에 돌아와 대자재를 얻은 사람이다.
先師云一日得還鄉不作飄蓬客 釋云撒手到家人不識更
無一物獻尊堂 川老云孤舟到岸遠客還鄉
선사先師는 “어느 날 고향에 돌아온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쑥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손을 툭툭 털고 자기 집에 돌아왔건만 다른 사람들이 몰라본다. 새롭게 존당에 드릴 물건이 하나도 없네.”라고 하였다. 야보도천 스님은 “외로이 표류하던 배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멀리 갔던 객이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且道如何是鄉 咄 遠後十萬八千 近後不
離當處 會得麼。
자, 말해 보아라! 어떤 것이 고향인가?
돌!
멀기로 말하면 십만 팔천리이고 가깝기로 말하면 지금 이 자리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알았는가?
「 智慧聰明總是心
智人脩內蠢傍尋
若人有智超三界
無智愚夫生死臨」
】
지혜와 총명은 모두 이 마음이니
지혜 있는 사람은 안으로 닦아 가장 가까운 데서 찾으라.
만약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삼계를 뛰어날 것이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생사에 다다를 것이다.
-------ㅇ
「波羅。」
【波羅者西天梵語也東土翻為到彼岸 且迷者
有生死墮輪迴只在此岸也悟者超生死脫輪迴
到彼岸也若要到彼岸須是自生智慧過此生死
苦海如人過水水深難過須用船橋或用木牌竹
筏多種方便盛載過此苦海而到彼岸既達彼岸
前者船橋木牌等物盡皆無用
‘바라’는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도피안到彼岸이라 번역한다. 본성이 미혹한 범부는 태어나고 죽는 윤회에 떨어져 이 언덕에 있는 것이며, 깨달은 자는 생사를 초월하여 윤회를 벗어나므로 저 언덕에 이른 것이다.
만약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지혜를 내어 깨달아야 이 생사고해를 건너갈 수 있다. 마치 사람이 물을 건널 때 물이 깊어서 지나가기 어려우면 배나 다리를 이용하거나 또는 나무나 대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을 사용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방편으로 배를 타고 고해를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저 언덕에 도달하고 나면 이전의 배와 다리, 나무 뗏목 등의 물건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見性悟道者亦復
如是 大顛云如盲人求醫遠路不能自行須假
人牽兼手中有杖方可無此二物不能得到既到
醫家醫師與他點眼大見光明其杖與牽人都無
用處頓悟涅槃正道亦復如是
성품을 보아 깨닫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대전 조사는 “눈먼 사람이 의원을 찾아감과 같다. 먼 길을 혼자 가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 인도해 주거나 손에 지팡이가 있어야 가능하며,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찾아가지 못한다. 의원의 집에 도착하여 의사가 그의 눈먼 것을 고쳐 광명을 보게 하면, 지팡이와 인도하는 사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열반의 바른길을 깨닫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且道甚是牽人
柱杖予今說破信者便行不得外行難成內功須
用廣作福田福至心靈自然有箇道徑只此便是
牽人也然後可以坐禪脩道辨取內功求見性之
法了生死大事一日功圓得見本來面目便是柱
杖也
자 말해 보아라! 인도하는 사람과 지팡이는 무엇인가?
내가 지금 말할 때 믿는 자는 바로 행동할 것이며, 부득이 밖으로는 실행하기 어렵고 안으로는 공을 이루기가 어렵거든 널리 복을 지아라. 복이 지극하면 마음이 영명해져 자연히 방법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그런 다음에 좌선을 하고 도를 닦아 안으로 공을 가리고 취해 견성하는 법을 구하면 생사 대사를 마치게 된다. 어느 날 공이 원만해지면 본래면목을 보게 되리니 이것이 지팡이이다.
更要參訪明眼師真大德高僧求其印證印
證師真便是醫人也一日頓悟從前多種方便盡
皆無用惟柱杖不可棄 道云得魚忘筌得兔忘
蹄 釋云過河須用筏到岸不須船 儒云得意
忘言得米忘田
다시 눈 밝은 스승, 대덕 고승을 참방하여 인증을 얻어야 하니, 인증하는 스승은 바로 의사이다. 어느 날 몰록 깨달으면 이전의 갖가지 방편이 다 필요 없지만 지팡이만은 버릴 수 없다. 도가에서는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으면 올무를 잊는다.”고 하였으며, 불가에서는 “강을 건널 때 뗏목을 사용하나 언덕에 이르면 뗏목은 필요 없다.”고 하였고, 유가에서는 “뜻을 얻으면 말을 잊고, 쌀을 얻으면 밭을 잊으라.”고 하였다.
且道都教忘却因甚只不教棄
了柱杖 未到水窮山盡處 且存作伴過時光
理會也未。
자, 말해 보아라! 모두 잊어버리라고 하면서 무슨 까닭으로 지팡이는 버리지 말라고 하는가?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우선 도반을 삼아 수행으로 세월을 보내야 한다.
알았는가?
「 這根柱杖本無相
元與虗空無兩樣
若人提起透三天
遍界邪魔不敢望」
】
이 근본 지팡이는 본래 상이 없으며
원래 허공과 같아 두 가지 모양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잡아 일으켜 삼십삼천을 뚫으면
온 세계의 삿된 마군이 감히 넘보지 못하리라.
-------ㅇ
「蜜多。」
【蜜多者西天梵語也東土翻為無極 且無極者
無極而太極者○乃虗空妙道也古云無極而太
極太極分二儀二儀分三才三才生四象四象生
五行因有五行漸漸滋生萬類萬類盡在妙道之
中包含也
‘밀다’는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무극無極이라고 변역한다. 무극은 무극이면서 곧 태극이니, 이는 허공의 묘도이다. 옛사람은 “무극이 태극이니, 태극은 두 가지 의儀로 나뉘며, 두 가지 의는 삼재三才로 나뉘고, 삼재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오행五行을 낳으며, 오행이 있음으로 인해 점점 불어나 만유를 낳는다.”고 하였으니 만유는 묘도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是以蜜之一字喻於虗空妙道多者比
於諸品眾類有情無情皆屬道之含攝且如蜂採
百華醞造成蜜未成之時有醎酸甘苦辛之眾味
青黃赤白之眾色其味不等其色不一一日功成
蜜就種種之味釀成一味般般之色混同一色馨
香美味一無差別到此則蜂得養生人得受用
‘밀蜜’이란 한 글자는 허공의 묘도에 비유하고, ‘다多’는 모든 품류에 비유한 것이니, 유정 무정이 모두 묘도에 포함된다. 이는 벌이 백 가지 꽃의 꿀을 따서 섞어 꿀을 만드는 것과 같다. 숙성되기 전에는 짜고 시고 달고 쓴 여러 가지의 맛이 있고 청, 황, 적, 백의 여러 색을 지니고 있어서 맛도 고르지 않고 색도 한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날 공로가 이루어져 꿀이 완성되면 여러 가지 맛이 뒤섞여 한 가지 맛이 되고, 갖가지 색이 섞여 한 가지 색이 되며, 향기와 아름다운 맛이 한결같아 차별이 없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벌도 양생함을 얻고 사람도 수용함을 얻는다.
脩行之人亦復如是 且如脩行之人調伏身心朝
磨暮煉功行未成之際有慳貪心利名心嫉妬心
計較心勝負心貢高心我慢心殺害心狼毒心三
毒心怕怖心邪心妄心無明黑暗心種種不善之
心又有暴惡性麤躁性風吹性隨邪性愚濁性見
趣性乖劣性虗詐性好閧性撅強性顛狂性浮華
性謟曲性自無始劫來一切習性八萬四千有餘
說不可盡
수행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마치 수행하는 사람이 몸과 마음을 조복시키려고 아침에 연마하고 저녁에 단련하나 공행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는 간탐심, 명예심, 질투심, 계교심, 승부심, 교만심, 아만심, 살해심, 낭독심, 삼독심, 파포심, 사심, 망심, 무명흑암심 등 갖가지 착하지 못한 마음이 있으며, 또 포악한 성품, 거칠고 조급한 성품, 바람처럼 종잡을 수 없는 성품, 삿된 것을 따라가는 성품, 어리석고 탁한 성품, 모든 것을 따라가는 성품, 모든 곳에서 어긋나는 성품, 속이는 성품, 누구든지 좋아하는 성품, 강산 성품, 미치고 전도된 성품, 들뜨고 겉으로만 환히 빛나는 성품, 남을 왜곡하고 의심하는 성품 등이 있다. 무량겁 이전부터 모든 습성이 팔만 사천여 가지여서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一日功圓頑心自盡煆成一味清淨最
上無礙真心種種自和煉就一片萬劫不壞圓明
法性到此並無差別之心亦無異類之性眾惡自
消眾惡自滅一真獨露得大自在 古德云眾星
朗朗不如孤月獨明 道云百川流不盡一海納
無窮 仙師云千思萬慮終成妄獨守一真道自親
어느 날 공功이 원만해지면 완고한 마음이 저절로 다해 청정하고 최상이고 걸림이 없는 진심을 단련해 이루게 되며, 갖가지가 스스로 화합해서 하나를 이루어, 만겁에 무너지지 않는 원만하고 밝은 법성이 된다. 여기에 이르면 차별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다른 종류의 성품이 없고, 많은 악이 저절로 소멸된다. 모든 악이 저절로 없어지니 하나의 진심이 홀로 드러나 대자유자재를 얻는다. 고덕은 “하늘에 많은 별들이 각자 빛을 발하지만 둥근 달 한 개의 밝음만 못하다.”고 하였고, 도가에서는 “백천 개 냇물이 끊임없이 흐르지만 한 바다는 이를 다 받아들이면서도 넘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선사仙師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마침내 망상을 이룬다. 오직 하나의 참된 것을 지켜야 도가 스스로 친하리라.”고 하였다.
且道如何得見一真 咄 開眼被他瞞諸人拿不著 省也未。
자, 말해 보아라! 어떻게 해야만 하나의 참된 것을 볼 수 있는가?
돌!
눈을 뜬 채 다른 이에게 속았다. 모든 사람이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한다.
알았는가?
「 若干種種恐難同
休教差別走西東
收來安放丹爐內
煉得金烏一樣紅」
】
갖가지가 같지 않을까 두려움이 없지 않으나
차별하여 동서로 달아나지 마라.
안으로 거둬들여 붉게 타는 화로 속에 놓으면
달궈진 금가마귀가 한 모양으로 붉다.
-------ㅇ
「時。」
【時者正見之時也言見亦無可見言時未可定時
仙師云一陽纔動之時自有無窮消息 古德
云清風颯颯透心懷此時快樂人難識
시時란 바르게 볼 때를 말한다. 본다고 말했지만 또한 볼 것이 없으며, 때(時)라고 말했지만 정해진 때가 아니다. 선사仙師는 “한 개의 양陽이 조금 움직일 때 다함이 없는 무궁한 소식이 있다.”고 하였고, 고덕은 “맑은 바람이 불어 우리 마음속을 뚫는다. 이때의 쾌락함을 다른 사람은 알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玄之又玄無東西南北無四維上下無過去未來見在
虗空平等與大道混然無有二處共歸一時 川
老云時時清風明月鎮相隨桃紅李白薔薇紫問
著東君總不知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동서남북이 없고, 네 간방間方도 없고, 상하도 없으며, 과거 현재 미래도 없다. 허공의 평등함과 대도의 혼연함은 두 곳이 없어 일시에 함께 돌아간다. 야보도천 스님은 “때때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서로 쫓고 따르며, 복숭아꽃은 붉고 오얏꽃은 희며 장미꽃은 붉다. 동군에게 물어 봤지만 모두 알지 못하네.”라고 하였다.
且道東君在何處安身○見麼
打不離 割不死 在桃紅李白 在薔薇黃
紫 呵呵 模得著也未。
자, 말해 보아라! 봄바람은 어디에 있는가? 봄바람의 몸을 보고자 하는가?
그대가 몽둥이로 쳐도 떠나가지 않으며, 칼로 끊는다 해도 죽지 않는다. 복숭아꽃은 붉고 오얏꽃은 희며, 장미꽃은 붉고 노란 데 있도다.
하하하!
찾았는가?
「 若問端的是何時
清風明月自家知
東君昨夜傳消息
綻出紅梅第一枝」
】
만일 명백하게 어느 때냐고 묻는다면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스스로 알며
동군이 지난밤에 소식을 전하니
매화의 첫 가지가 붉게 터져 나왔다 하리라.
-------ㅇ
「照見五蘊皆空。」
【五蘊者色受想行識也此五等因積習而不散妄
認色身是我故長劫輪迴若人猛省借此幻身須
教脩行常自返照照見五蘊淨盡清淨本然 且
道如何是色受想行識怎生得此五蘊皆空予今
直說分明若有解悟之者休生疑惑信受奉行必
有契道之日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이다. 이 다섯 가지를 오랫동안 익혔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으며, 허망한 이 색신을 나라고 오인하여 오랜 겁에 걸쳐 윤회를 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허깨비와 같은 몸을 임시로 빌린 것임을 명확히 알고 수행하여, 스스로 항상 돌이켜 비추어 보면 오온이 깨끗이 다 없어져 청정한 본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자, 말해 보아라! 수 상 행 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오온이 모두 공해질 수 있는가?
내가 지금 바로 분명하게 말하겠다. 만약 알아들은 사람이 있거든 믿고 받아 지녀 받들어 행하라. 반드시 도에 계합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且色者窒礙之義若見境逢物不著
不染是無窒礙色蘊自空也受者領納之義若遇
一切聲色境界心不領納得受蘊空也想者妄想
思慮之義若過去不思未來無想現在自如得想
蘊空也行者心念不停遷流之義若十二時中心
不外遊念不煩亂不被物轉不被境留一念不離
當處得行想空也識者別無親疎之義亦乃著物
之理若見一切境物一無分別辨認一槩平等見
如不見識如不識無親無疎來則應之去則不思
得識蘊空也
‘색色’이라는 것은 ‘꽉 막혀 방해가 됨’의 의미이다. 만일 경계를 보고 사물을 만났을 때 집착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막혀 방해가 됨’이 없는 것이니, 색온이 저절로 공해진 것이다.
‘수受’라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만일 일체의 색이나 음성의 경계를 만났을 때 마음에 조금도 받아들임이 없으면 수온이 공해진 것이다.
‘상想’이란 ‘항상하고 헤아린다’는 의미이다. 만일 과거도 생각하지 않고, 미래도 생각함이 없고, 현재에도 자연히 여여하면 상온이 공해진 것이다.
‘행行’이란 ‘마음이 머무르지 않고 옮겨 다닌다’는 의미이다. 만약 24시간 가운데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고, 생각이 번거롭지 않으며, 사물(物)에 휘말려 흔들리지 않고, 경계에 머무르지 않으며, 한 생각으로 당처를 여의지 않으면 상을 행함(行想)이 공해진 것이다.
‘식識’이란 ‘달리 친하고 멀다는 뜻이 없음’이라. 또한 물의 이치에 착着해서 일체 모든 경계의 물건을 보아 한 개도 분별하고 판단하고 아는 것이 없음이라. 한 개의 평등한 것이니 알되 알지 않는 것과 같고 친함도 없고 먼 것도 없다. 오면 맞이하고, 가면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은 식온이 공해진 것이다.
既得到此田地自然照見五蘊皆空
六窓明淨淨躶躶赤洒洒沒可把又有甚四大五
蘊名字亦不可得 道云惟見於空 釋云虗空
獨露
이미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자연히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아 육창이 밝고 깨끗하며, 옷을 모두 벗은 것처럼 드러나 물을 뿌린 듯 깨끗하여 잡을 수가 없다. 다시 무슨 사대, 오온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이름조차도 얻을 수 없으니, 도가에서는 “오로지 공을 본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허공이 홀로 드러났다.”고 하였다.
昔歌利王遊獵遇一仙人問語不答先却
左膊次卸右膞節節支解仙人面無懼怒之色與
恒常一同並不改顏
옛날에 가리왕이 사냥하러 갔다가 한 선인을 만나 질문을 했는데 선인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왼쪽 어깨를 자르고 다음에는 오른쪽 어깨를 베고 사지를 마디마디 잘랐다. 그런데 선인의 얼굴은 성을 내거나 두려운 기색도 없었으며, 평상시와 똑같이 얼굴 색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罽賓國王問獅子尊者曰
在此做什麼尊者答曰在此蘊空王問得蘊空否
尊者答曰巳得蘊空法王曰求師頭得否尊者答
曰身非我有何況頭乎
계빈국 왕이 당시의 제24대 사자 존자에게 물었다.
“무슨 공부를 하였습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오온이 공함을 공부했습니다.”
왕이 물었다.
“오온이 공함을 얻었습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이미 오온이 공한 법을 얻었습니다.“
왕이 물었다.
“그대의 목을 쳐도 되겠는가?”
존자가 대답했다.
“이 몸이 내가 아닌데 더군다나 머리이겠습니까?”
又肇法師云四大元無我五蘊悉皆空將頭臨白刃猶如斬春風
又舍利弗見天女問云何不變却女身去天女答曰我
十二年覔女身了不可得教我變個什麼從上祖
師皆得蘊空法 又鏡清和尚住院三年本院土
地要見師顏不能得
또한 승조(僧肇, 384~413) 법사는 “사대는 본래 나라고 할 것이 없고 오온도 모두 공하다. 머리를 칼날에 대니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사리불이 천녀를 보고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천녀가 대답했다. “나는 12년 동안 여자의 몸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바꾸라고 하는 것입니까?”
위의 조사들은 모두 오온이 공한 법을 얻었다.
또 경청도부(鏡清道怤, 864~937) 화상은 절에 머문 지 3년이 되었는데 본원의 토지신이 스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又太古郝真人在趙州橋
下辦道忽一夜聞眾鬼於河畔共語云明日有一
戴鐵帽人替我言訖杳無音耗至次日將暮大雨
忽作見一人頭頂一鐵鍋遮雨至橋下欲洗脚過
橋太古一見喝云不可洗其人聽真人之言扶欄
上橋而去至夜眾鬼皆至一鬼言我三年等得一
箇替頭被這先生將我底來破了眾鬼欲害真人
來往尋覔不得不知真人在於何處嗟嘆而去其
時真人只在橋下鬼不能見
또 태고학 진인이 조주의 다리 밑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문득 귀신들이 물가에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내일 머리에 철모를 쓴 사람이 나를 대신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다음날 날이 저물 때 큰 비가 왔는데 갑자기 머리에 큰 무쇠 솥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비를 피해 다리 아래로 와서 발을 씻은 뒤 다리를 지나가려고 했다. 태고학 진인이 이것을 보고 “발을 씻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니, 그 사람은 진인의 말을 듣고서 난간을 잡고 다리 위로 올라가더니 그냥 지나가 버렸다.
밤이 되자 다시 귀신들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한 귀신이 말했다.
“내가 3년 동안 나를 대신해 줄 머리 한 개를 기다렸는데 저 선생 때문에 허사가 되어버렸다.” 귀신들이 진인을 해치려고 찾아왔으나 진인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몰라 탄식하면서 갔다. 그때 진인은 다리 아래 있었는데 귀신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又弘覺和尚住菴
天厨送食及再參洞山和尚後皈菴天神三日送
食到菴不見菴主菴主只在菴中為何不見皆得
圓頓之法隱身之訣所以神鬼俱不得見
또 홍각(弘覺, ?~902) 화상이 암자에 머물러 있을 때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 주었다. 다시 동산양개(洞山良, 807~869) 화상을 참배한 후 암자에 돌아갔다. 천신이 음식을 드리기 위해 사흘간 암자에 왔었지만 천신은 암주를 보지 못했다. 암주는 암자 안에 있었는데 어찌하여 보지 못했는가?
두루 미치는 원돈의 법을 얻은 것이 은신의 비결이니, 그래서 신이나 귀신이 보지 못한 것이다.
且道 四大不實色身非有五蘊盡空甚是本來面目
咄 這一句從那裏出來照見五蘊空底是阿誰
瞎漢當面蹉過 咦 一心只在絲綸上
不見蘆華對蓼紅○見麼。
자, 말해 보아라! 사대는 실다운 것이 아니며, 색신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온은 모두 공하니 무엇이 본래면목인가?
돌!
이 한 글귀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는 이것이 누구인가?
눈먼 사람이 마주치게 되면 넘어지리라.
에잇!
한 마음이 다만 실타래 돌아가는 위에 있어서 갈대꽃이 붉은 여뀌꽃에 대면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을 보고자 하는가?
「 識破回頭便下功
了然脫洒悟心空
從他四大都零落
其中別有一神通」
】
머리를 돌이켜 곧바로 공력을 들일 줄 알면
분명히 모든 것을 벗어나 마음이 시원해져 공함을 깨달으리라.
저 사대에서 모두 떨어져 나가니
그 가운데 신통 하나가 따로 있더라.
-------ㅇ
「度一切苦厄。」
【若得五蘊空便出生死界得免輪迴苦 太上云
吾有大患為吾有身及吾無身吾有何患 釋云
身是眾苦之本 儒云有身有患無執無憂 經
云三界無安猶如火宅眾苦充滿甚可怖畏
오온이 공해지면 문득 생사의 경계에서 벗어나 윤회의 고통을 면하게 된다.
태상은 “나에게 큰 근심(患)이 있으니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몸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몸은 모든 고통의 근본이다.”라고 하였으며, 유가에서는 “몸이 있으면 근심이 있고 집착이 없으면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묘법연화경>에서는 “삼계는 편안하지 못하니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온갖 고통이 꽉 차 있어 너무 두렵다.”고 하였다.
若是有智之人反照自巳悟得自身皆虗幻非為真實
何況他物一日無常盡皆拋撒百無一用念念如
此心境自除襍念自少更須參訪知識親近智人
求出身之路了生死大事忽朝爆地一聲脫下漆
桶底便見本來面目
만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반조해 자기의 몸이 다 헛되어 진실되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니, 더군다나 자기 몸 아닌 다른 물건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루하루가 무상하니 모든 것을 다 던져 두어라.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쓸 것이 없다. 생각 생각을 이와 같이 하면 마음의 경계가 저절로 제거되어 잡념이 적어질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다시 선지식을 찾아 뵙고 지혜 있는 이를 가까이 하여 출신활로를 찾아 생사 대사를 마쳐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 아침 홀연히 툭 터지는 한 소리에 캄캄한 칠통 속을 벗어나 본래의 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要見本來面目麼○ 古
今無改變人自認不真。
본래 면목을 보고자 하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사람이 스스로 진실 아닌 것을 알도다.
「 若得心空苦便無
有何生死有何拘
一朝脫下胎用襖
作箇逍遙大丈夫」
】
만일 마음이 공해지면 곧 고통이 없어지리니
무슨 생사가 있고 무슨 구속이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태에서 쓰는 가죽을 벗어 버리고
마음대로 노니는 한 대장부가 되었도다.
-------ㅇ
「舍利子。」
【舍者屋舍也比四大五蘊色身利子者舍中之本
來一點真靈即主張形骸者是也如客店主人暫
住主若離舍屋即倒塌利子常在只是換了房舍
居住 道云身是氣之宅心是神之舍久而神氣
散又是移屋住 釋云無始劫來賃屋住至今誰
識主人公 藥山又云皮膚脫落盡惟有一真實
사舍는 집을 말하며, 사대 오온으로 이루어진 색신에 비유한 것이다.
리자利子는 본래 집 안에 있는 한 점 진실하고 신령스러운 것이니, 형체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주인이 여관에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 버리는 것과 같다. 그 집은 무너지지만 리자는 그대로 존재하니 다만 거주하는 집만을 바꾼 것이다.
도가에서는 “몸은 기氣를 담는 집이며, 마음은 정신(神)의 집이다. 오래 되면 혼과 기가 흩어져 또 집을 옮겨서 머문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무시겁 이래로부터 방을 빌려 생활하였다. 지금 누가 주인공을 알았는가?”라 하였으며, 약산유엄 스님은 “껍질은 다 떨어져 나가고 오직 하나의 진실만 있다.”고 하였다.
要見真實底麼 還識這箇○也未 來來往
往畿千遭只是世人模不著。
저 진실한 자리를 보고자 하는가!
저 하나의 진실○을 알았는가?
오고 가고 또 오고 가는 가운데 몇천 번이나 만났던가!
다만 세상 사람은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하네.
「 莫道房兒又不多
包藏天地及山河
其中有箇真仙子
不染纖塵鎮大羅」
】
방안에 아이들이 많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안으로 천지와 산하를 감싸고 있다.
그 안에 하나의 진실된 선자仙子가 있으니
티끌만큼도 물들지 않고 일체의 세계를 진압한다.
-------ㅇ
「色不異空。」
【道性無二色空一等只在目前應物現形人皆不
識長者長空短者短空 方者方空圓者圓空白
者白空赤者赤空小者小空大者大空遠者遠空
近者近空 道云人人本有箇箇不無 釋云蠢
物含靈皆有佛性 儒云一切含靈各具一太極
도의 성품은 두 가지가 없으며 색과 공은 한 가지이다. 다만 눈 앞의 사물에 대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데 사람들은 모두 알지 못한다. 긴 것은 긴 공이요 짧은 것은 짧은 공이며, 모가 난 것은 모가 난 공이요 둥근 것은 둥근 공이다. 흰 것은 흰 공이요 붉은 것은 붉은 공이며, 작은 것은 작은 공이요 큰 것은 큰 공이다. 먼 것은 먼 공이요 가까운 것은 가까운 공이다.
도가에서는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으며, 각자가 없지 않다.”고 하였으며, 불가에서는 “꿈틀거리는 미물이나 함식含識을 간직한 존재, 즉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고, 유가에서는 “모든 함령含靈이 각기 한 태극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古德又云塵塵是道塵塵是佛 仙真云何物
不稟道生何處不是道化隨處現形隨所自在道
不遠人人自遠之反觀自身是色色中須有真空
覺性應現種種相即是真空覺性所現
고덕은 또 “티끌 티끌이 다 도이고 티끌 티끌이 다 부처님이다.” 라고 하였고, 선진仙真은 “어떤 물건이 도를 받아서 나오지 않았으며, 어느 곳이 도가 교화하는 곳이 아니리오?” 하였다. 가는 곳마다 모양을 나투고 가는 곳마다 자유자재하다. 도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멀리할 뿐이다. 자신이 색임을 돌이켜 관할지니 색 가운데 진공각성이 있어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이는 진공각성에서 나타난 것이다.
永嘉云
幻化空身即法身法身覺了無一物本源自性天
真佛 僊真云有形假相內包無相真形 寶公
云有相身中無相身
영가현각 스님은 “환화의 빈 몸뚱이가 곧 법신이다. 법신을 깨달으면 한 물건도 없으니, 본원자성이 곧 천진불이로다.”고 하였고, 선진僊真은 “형체가 있는 거짓 모습 안에 모습 없는 참 형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금릉보지 스님은 “모양이 있는 몸 가운데 모양이 없는 몸이 있다.”고 하였다.
咄 理會得麼 桃紅柳綠紅柳綠梅華白 總是東君造化成。
돌!
알았는가?
복숭아꽃은 붉고 버드나무는 푸르고 매화꽃은 희니 모두 동군의 조화로 이루어진 것이다.
「 虗空造化自然工
大地山河體混融
隨處現形人不識
自家昧了主人公」
】
허공의 조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며
대지산하의 체는 한 뭉치이다.
가는 곳마다 모양을 나타내나 사람이 알지 못하니
스스로의 주인공을 매했기 때문이다.
-------ㅇ
「空不異色。」
【色空無一種世人自分別 道云大方無隅混然
一體 釋云總三千界成一世界 儒云登東山
而小魯登泰山而小天下撒去蕃蘺何彼何此。
古云賢聖常行平等智不生分別相 三教賢聖
亦是空四生六道亦是空上至仙佛下至混蟲草
木各各元本總是空
색과 공은 하나이건만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색과 공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도가에서는 “대방大方은 구석이 없고 뒤섞여서 한 몸이다.”라고 하였으며, 불가에서는 “삼천대천세계를 합하여 한 세계를 이룬다.”고 하였고, 유가에서는 “동산에 올라보니 노나라가 조그맣고, 태산에 올라보니 천하가 작더라.”고 하였다.
앞에 있는 우거진 울타리를 치워 버리면 이쪽과 저쪽의 구별이 어디 있겠는가?
옛사람은 “현성들은 항상 평등한 지혜를 행하며 분별상을 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교의 현성도 또한 공하며, 사생 육도도 또한 공하다. 위로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미물, 곤충, 초목까지도 각각 본래 모두 공하다.
且大朴未散陰陽未判二儀
未分三才未立有甚作我元來皆一箇道理因大
朴散天地合三才成立萬有滋生直至如今不能
返本為何只因眾生執著不知元來是空迷巳逐
物心生倒見隨物流轉不能歸一機見不同著色
著空隨色空二見
또한 대박이 아직 흩어지기 이전, 음양이 나뉘기 이전, 두 가지 의儀가 나뉘기 이전, 3재가 세워지기 이전에 무슨 나라고 하는 것이 있겠는가? 원래 다 하나의 도리이다. 대박이 흩어졌기 때문에 천지가 합해지고 3재가 성립되고 그래서 우주만유가 번식되어 생겨났다. 지금에 이르러서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무엇 때문인가? 다만 중생이 집착하기 때문에 원래 공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미혹해 대상 경계를 따라 마음에 전도된 견해를 내며, 대상경계를 따라 유전하며 하나에 돌아가지 못한다. 근기와 보는 것이 같지 않아 색에 집착하고 공에 집착하여 색이다, 공이다 하는 두 가지 견해를 따르게 된다.
若人於此廓然悟空平等身心
內外無餘不見空色不被物使不被境瞞一槩平
等有何一也便得歸一只這一也是多了重陽祖
師云抱元守一是功夫地久天長一也無 古德
云萬法歸一一何歸
만약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확연히 공을 때달으면 몸과 마음이 평등하고, 안과 밖이 둘이 없어 공과 색을 보지 않으며, 사물에 끄달려 다니지 않고, 경계에 속지 않을 것이다. 모두 평등한데 어떻게 하나가 있겠는가. 문득 하나에 돌아가면 다만 하나가 또한 많음(多)이다.
중양 조사는 “근원을 껴안아 하나를 지키는 것이 공부이고, 땅은 오래되고 하늘은 높고 커서 하나조차도 없다.”고 하였고, 고덕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고 하였다.
一歸之處要君知 且道一歸何處 咦 狗㖭熱油鐺 理會麼。
그대는 하나가 돌아간 곳을 알고자 하는가?
자, 말해 보아라!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가?
에잇!
개가 펄펄 끓는 기름 솥을 핥는구나.
알았는가?
「 人牛不見杳無踪
盡道空來不是空
一片白雲歸去也
惟留明月照玄穹」
】
사람과 소를 인식하지 못하며 아득히 자취조차 없고
도의 끝까지 이르러 공이 와도 공이 아닐 때
한 조각 흰 구름으로 돌아가니
오직 밝은 달만 남아 하늘을 비추더라.
-------ㅇ
「色即是空。」
【空在色中世人難見眼是色不能見物只是真空
妙性能見耳是色不能聽聲只是真空妙性能聽
鼻是色不能知香臭只是真空玅性能知舌是色
不能言語只是真空妙性能言身是色不能覺觸
只是真空妙性能覺觸脚是色不能行走只是真
空妙性能行走手是色不能拈掇只是真空妙性
能拈掇且去真空妙性無眼能見無耳能聞無鼻
能嗅無舌能言無脚能行無手能拈意根有名無
形分為八萬四千見聞知覺總歸六根
색 가운데 공이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눈은 색이라 사물을 볼 수 없으며, 다만 진공의 묘한 성품만이 볼 수 있다. 귀는 색이라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다만 진공의 aly한 성품이 듣는 것이다. 코는 색이라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다만 진공의 묘한 성품이 아는 것이다. 혀는 색이라 말을 할 수 없으며, 다만 진공의 묘한 성품이 말을 하는 것이다. 몸은 색이라 촉감을 느낄 수 없으며, 다만 진공의 묘한 성품이 촉감을 느끼는 것이다. 다리는 색이라 걸을 수 없으며, 다만 진공의 묘한 성품이 걷고 달리는 것이다. 손은 색이라 잡을 수가 없으며, 다만 진공의 묘한 성품만이 가려잡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성이 없으면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혀로 말을 할 수 없으며, 다리로 걸을 수 없고, 손으로 물건을 잡을 수 없다. 의근은 이름만 있을 뿐 모양이 없지만 쪼개 나누면 팔만 사천 가지의 견문각지가 되며, 그것은 모두 육근으로 돌아간다.
徧身互用神通玅用 古云通身是徧身是 道云不須他
處遠搜尋十二時中遶徧身 色空不異妙理全
彰色可色非真色空可空非真空總歸大空
몸에 두루해서 신통묘용을 다 쓰고 있다. 옛사람은 “몸을 통해 있는 것이 이것이고 몸에 두루한 것이 이것이다.”라 하였고, 도가에서는 “다른 곳에서 멀리 찾으려 하지 마라.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온몸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색과 공이 다르지 않은 묘한 이치가 모두 드러나니, 색을 색이라 하면 참다운 색이 아니며, 공을 공이라 하면 진공이 아니어서 모두 대공에 돌아간다.
且道此理如何 川老有云有相有求皆是妄無形
無影墮偏枯堂堂密密何曾間一道寒光爍太虗
道經云知空不空知色不色名為照了
자, 말해 보아라! 이 이치가 어떠한가?
야보도천 스님은 “모양이 있고 추구함이 있는 것은 다 망령된 것이며,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은 편고偏枯에 떨어진 것이다. 당당하고 세밀한데 어찌 틈이 있겠는가? 한 길 차가운 빛이 태허공에 빛날 뿐이다.”고 하였고, <도경>에서는 “공과 공 아닌 것을 알고, 색과 색 아닌 것을 아는 것을 비춤(照了)이라고 한다.” 하였다.
予今不免饒舌說破若見一切有相境物休教染著若到
情忘念絕之處休教迷真著相則著有迷真則落
空若不著空不著有方是了事底人 省麼 休
得瞌睡惺惺著。
나는 지금 장황하게 말하고자 한다. 만약 일체의 모양이 있는 대상 경계를 보면 집착하지 않게 하며, 망정을 잊고 생각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진眞에 미하지 않게 하라. 상에 집착하면 있음(有)에 집착하고, 진에 미혹하면 공에 떨어진다. 만약 공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비로소 ‘일을 마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알았는가?
졸지 말고 성성하라.
「 萬竅都因一竅通
一竅能納太虗空
若還拿住玄中竅
擺手皆歸大道中」
】
만 개의 구멍이 모두 한 구멍 때문에 통하니
한 구멍은 능히 태허공을 받아들인다.
고요한 가운데 한 구멍을 붙잡아 머문다면
손을 털고 다 대도 속으로 돌아가리라.
-------ㅇ
「空即是色。」
【色在空外人被境瞞 僊真云道無萬彚則不能
顯萬彚無道則不能生 釋云見色便見空無色
空不見 是以三教聖賢不見有色有空色空雙
泯內外無分別如如常自然光明洞耀周徧沙界
색은 공 밖에 있는데 사람들이 경계에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선진僊真이 말하기를 “도는 만물이 없으면 나타날 수 없고, 만물은 도가 없으면 생겨날 수 없다.”고 하였다. 불가에서는 “색을 보면 곧 공을 보며 색이 없으면 공도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로써 살펴볼 때 삼교의 성현은 색이 따로 있고 공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색과 공 둘 다 없어져 안과 밖의 분별이 없고, 여여하여 항상 그대로이고 광명이 훤하게 비추며 온 우주 세계에 두루하다.
世人則不然也分內分外論彼論此著相分別見
種種相隨聲逐色迷真不覺出殻入殻展轉不知
改頭換面無有了期非干他事是自尋得底何不
及早回頭自救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안과 밖을 나누어 이것을 논하고 저것을 논한다. 모양에 집착하여 분별심을 내어 갖가지 모양을 보고 소리를 따라가고 빛깔을 따라가 미혹하여 참을 깨닫지 못한다. 이 껍질에서 나와 저 껍질로 들어가 전전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머리를 고치고 얼굴을 바꾸어 윤회하여 마칠 기약이 없다.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치 말고 자신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어찌하여 일찌감치 머리를 돌이켜 스스로 구하려 하지 않는가.
且道怎生救得 咄 放下從
前惡水瓶 楝著痛處便金鍼。
자, 말해 보아라! 어떻게 구하는가.
돌!
이전의 썩은 물이 담긴 병은 놓아 버리고, 아픈 곳을 찾아내어 바로 금침을 놓아라.
「 一槩均平有甚差
本來元是一人家
只因著在枝稍上
迷了從前太道芽」
】
모든 것이 균등한데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본래 이 한 사람의 집이다.
단지 나뭇가지 끝에 집착하고 있어서
종전의 대도의 싹을 미혹했을 뿐이다.
-------ㅇ
「受想行識。」
【因眼見故受色因受色心有思想因思想念行因
念行有識解有六根因六根生六塵一識便有四
大五蘊有此五蘊色身便明著相分別隨聲逐色
憎愛憂恐從茲而起以致流浪生死而無停息
눈으로 보는 까닭에 색을 받아들이게 되며, 색을 받아들인 까닭에 마음에 생각이 있고, 생각하는 까닭에 행동을 마음에 두며, 행동을 마음에 두는 까닭에 식이 있고 육근이 있음을 알며, 육근으로 말미암아 육진이 생긴다. 한 식識에 문득 사대와 오온이 있고, 오온의 색신이 있으므로 문득상이 나타나 집착하고 분별하여 소리를 따르고 색을 따른다. 미워하고 사랑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여기에서 일어나, 생사에 떠돌아 다니면서 잠시도 쉴 겨를이 없다.
若要生死斷輪迴止但從起處一根照破令四大五
蘊淨盡廓然無我當下空寂直下承當空劫巳前
自巳○寂而常照照而常寂
만약 생사를 끊고 윤회를 그치고자 하면 일어난 곳, 즉 한 뿌리를 비추어 사대와 오온을 깨끗하게 하면 확연히 ‘나’라는 것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공적해져 바로 공겁 이전의 자기에 승당할 것이다. ○ 고요하되 항상 비추고 비추되 항상 고요하다.
太上云寂無所寂
慾豈長生慾既不生即是真靜 又云唯見於空
觀空亦空空無所空所空既無無無亦無無無既
無湛然常寂 釋云人亦空法亦空二相本來同
태상은 “고요하면서도 고요한 바가 없으니 욕심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 욕심이 이미 나지 아낳는다면 이는 참으로 고요함(眞靜)이다.”라고 하였고, 또 “오직 공만을 보지만 공을 보는 것 역시 공하므로 공이 공되게 하는 바가 없다. 공되게 하는 바가 이미 없으므로 또한 무가 무로 되는 것도 없다. 무가 무로 되게 하는 바가 없으므로 이미 담연하고 항상 고요하다.”고 하였다. 불가에서는 “나(人)라고 하는 것도 공하고, 대상 경계(法)라는 것도 공하여 두 가지 모습이 본래 한 가지.”라고 하였다.
且道人法俱空必竟何處住○諸境萬緣留不
住 混然隱在太虗空。
자, 말해 보아라! 나라는 것과 대상 경계가 함께 공하니 필경 어느 곳에 머물겠는가?
모든 경계의 만 가지 인연이 머무르지 못하며, 뒤섞여 태허공 속에 숨어 있다.
「 眼界牽連眾界忙
不見可欲萬緣忘
忘無可忘全身出
便見靈山大法王」
】
눈이 모든 것을 이끌어 내어 많은 세계가 바빠졌으니
보지 않으면 하고자 하는 만 가지 인연이 다 잊혀진다.
잊어서 더 잊을 것이 없어야 전체 몸이 드러나
문득 영산회상의 대법왕을 보게 될 것이다.
-------ㅇ
「亦復如是。」
【既無我則萬法皆無復歸於空便得返本還元也
佛家喚作萬法歸一 道家喚作復命歸根
儒家喚作復遂元初天理到這裡言語道斷心行
處滅若動念即乖張安排即不是所以 川老云
退後退後看看頑石動也
이미 ‘나’라고하는 것이 없으면 만법도 다 없어져 다시 공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바로 근본을 돌이켜 근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불가에서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였고, 도가에서는 “본래의 생명의 뿌리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유가에서는 “원래 처음 태극의 이치를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 이곳에 이르면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다. 만약 생각을 하게 되면 곧 어긋나 버리며, 법을 잘 펴서 이리저리 적당히 꿰어 맞추어도 옳지 않다. 그런 까닭에 야보 도천 스님은 “뒤로 물러서서 보라. 감각이 없는 돌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理會得麼 咄 休得胡走動著三十棒。
이치를 알았는가?
돌!
어지러이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30방을 치리라.
「 一念纔興相便成
述真逐妄昧歸程
若能放下空無物
穩向如來藏裡行」
】
한 생각이 잠깐 일어나면 문득 모양이 이루어진다.
참을 따르고 거짓을 따르다가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
만약 네가 놓아 버려 공해서 한 물건도 없으면
편안히 여래장 속을 향해 가리라.
-------ㅇ
「舍利子。」
【當面不識火不能燒水不能溺箭不能傷刀不能
劈風不能飄日不能炙雨不能洒描畵不出毒藥
不能害惡蟲不能螫只因行走路頭差所以失却
波羅蜜見舍利子麼亘古到今不曾改變只是來
往賃屋居住或時朱樓畵閣或時草舍茅堂或時
金屏朱戶或時破廟窑龕
이 자리는 바로 눈앞에 있어도 알지 못하고, 불로 태우지도 못하며, 물로 적시지도 못하고, 화살이 상하게 하지도 못하며, 칼로 쪼개지도 못한다. 바람이 흔들지도 못하고, 태양이 그을리지도 못하며, 비로 적실 수도, 그림으로 묘사할 수도 없다. 독약으로 해치지도 못하고, 독충이 물지도 못한다. 다만 걷고 치달림으로 인해 길에서 어긋나 바라밀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사리자를 보았는가? 옛날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일찍이 자신을 고치지 않고 다만 오고 가면서 어느 때는 전셋집에 거주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림같이 좋은 누각에서 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붉은 문에 금으로 만든 병풍이 있는 집에서 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무너진 묘나 감실에서도 지냈다.
省得麼 川老云雲
起南山雨北山馬名驢子幾多般請看浩渺無情
水幾處隨方幾處圓 若要不來不去須得諸漏
巳盡以歸寂滅如此者未出三界外天地不能拘
作箇物外閑人
알겠는가?
야보도천 스님은 “남쪽 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쪽 산에 비가 내린다. 말의 이름과 나귀의 아들로 살아감이 몇 번이었던가. 청하노니, 광대하고 정이 없는 물(無情水)를 보라. 어느 곳에서는 모가 나고 어느 곳에서는 둥글다.”라고 하였다. 만일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려면 모든 번거로움이 다해 적멸로 돌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자는 삼계를 벗어났으므로 하늘과 땅이 속박하지 못하며, 낱낱 물질의 구속을 벗어난 한가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會麼 向前不如退步 紐揑不如自然。
알았는가?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뒤로 물러나는 것만 같지 못하며, 끈으로 잡아맬 것이 자연스런 것만 같지 못하다.
「 自家房內主人公
同居共住不知踪
若能退步回頭望
物物頭頭總得逢」
】
자기 집 방 안의 주인공과
동거하며 함께 머물러도 자취를 알지 못한다.
만약 한 걸음 물러나 머리를 돌려 바라보면
두두물물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ㅇ
「是諸法空相。」
【諸法皆空本非實際 仙真云法本無法形本非
形有形終是假無相是真人 金剛經云法尚應
捨何況非法 又云一切有相皆是虗妄若見諸
相非相即見如來 從上諸師一味談空者只為
眾生直下是空擔負不行起種種假名引導有情
無情皆歸空寂得返本原
모든 법은 다 공하여 본래 실제가 아니다. 선진仙真은 “법은 본래 법이 아니며, 형체는 본래 형체가 아니다. 형체가 있는 것은 마침내 거짓이며, 모습이 없는 것이 진실이다.”라고 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법이라는 것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그릇된 법이겠는가.”라고 하였고, 또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모양을 보되 모양이 아닌 줄을 알면 보는 것이 곧 여래”라고 하였다. 과거로부터 모든 스님들은 한결같이 공을 말씀하셨다. 다만 중생들이 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역량이 되지 않으므로 갖가지 가명을 붙여 유정 무정을 인도하여 다 공적에 돌아가 본원에 돌아가게 하신 것이다.
若信未及但去靜坐反
照照見五蘊實無所有自然忘形忘體得其人空
既得人空如病安去藥其法亦空人法俱空自然
休去歇去
만약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직접 여러분이 가서 고요히 앉아 반조해 보라. 오온을 비추어 보면 정말로 있는 바가 없어서, 자연히 모양을 잊고 몸이라는 체를 잊어 나라는 것이 공함(人空)을 얻게 될 것이다. 이미 나라는 것이 공해지면, 마치 병든 사람이 병이 나으면 약을 버리는 것처럼 그 대상 경계(法)도 역시 공해진다. 나라는 것과 대상 경계가 함께 공하게 되면 자연히 모든 것을 쉬게 된다.
經云我身本不有憎愛何由生 既
得忘形忘體有甚念慮可牽到這地面自然放下
無仙佛可做無生死可斷無脩無證若更有絲毫
可脩可證則墮生死界永劫受沉淪若能徹底脫
洒無所依倚不落有無二邊如虗空獨立直下承
當空劫巳前○圓陀陀光爍爍底有何不可
경에서는 “나의 몸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생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미 모양도 잊었고 몸도 잊었으니 무슨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히 모든 것을 놓아 버릴 것이다. 부처를 이룰 것도, 생사를 끊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다. 만약 다시 털끝만큼이라도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면 생사에 떨어져 영겁 동안 윤회에 빠져 있을 것이다. 만약 근본 바닥까지 철저하게 다 벗어나게 되면 깨끗하여 의지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있다’ ‘없다’ 하는 두 가지 견해에도 떨어지지 않으므로 마치 허공이 홀로 서 있는 것과 같다. 바로 그 자리에서 공겁 이전의 둥글고 둥글어 빛나고 빛나는 것에 한 뜻으로 돌아가 깨달으리니, 그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會麼 乾坤兩朵海中蓮 一切眾生虗出沒。
알았는가?
하늘과 땅 두 가지가 바다 가운데 떠 있는 한 떨기 연꽃으로, 모든 중생이 하릴없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구나.
「 人法皆空心自休
也無歡喜也無愁
風平浪靜雲歸去
月照寒江一色秋」
】
사람과 법이 다 텅 비었으니 마음이 저절로 쉬어져
기뻐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다.
바람이 평온해지고 파도도 고요해져 구름도 돌아가고
찬 강에 달이 비치니 가을빛이 한 색이로다.
-------ㅇ
「不生不滅。」
【有成有壞是事相不生不滅是理性此直言直說
眾生具足法身真空妙性亘古今不曾生不曾滅
不變不移無來無去無舊無新巍巍如是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 현상계 사물의 모습이며,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은 진리의 본질이다. 이것은 바로 말한 것이다. 중생은 법신의 진공묘성을 갖추고 있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생겨난 적도 없었고 없어진 적도 없었으며, 변하지도 않았고 옮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는 것도 없었고 가는 것도 없었으며, 오래 된 것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이, 이처럼 우뚝하게 높았다.
大上云寂兮寥兮獨立而不改周行而不殆 又云寂
然不動感而遂通四大五蘊任他虗生虗沒於自
巳法身總無交涉 且道既無交涉如何步步不
離 古德云和光塵不染三界獨為尊 川老又
云得優游處且優游雲自高飛水自流只見黑風
飜大浪未聞沉却釣魚舟
태상은 “고요하고 고요하다. 홀로 서 있으되 고치지 않으며 두루 행하되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고, 또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다가오면 순응하여 통한다.”고 하였다. 사대와 오온은 제멋대로 부질없이 났다 부질없이 없어지지만 자기 법신자리에는 전혀 교섭이 없다.
자, 말해 보아라! 이미 교섭이 없는데 어떻게 걸음걸음마다 여의지 아니하는가.
고덕은 “화광(불성, 법신)은 티끌에 물들지 않고 삼계에 홀로높다.”고 하였고, 야보도천 스님은 또 “마음대로 노니는 곳에서 다시 마음대로 노니니, 구름은 스스로 높이 떠 있고 물은 스스로 흐른다. 검은 바람이 큰 물결 일으키는 것만 보고, 낚싯배 침몰시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如是者且道有交涉也無交涉 若得五蘊皆空有甚離與不離
理會得麼 水流常不住 青山鎮日閑。
이와 같을진대 자, 다시 말해 보아라! 교섭이 있는가? 없는가?
만약 오온이 모두 텅 비었다면 무슨 여의고 여의지 않음이 있겠는가.
알았는가?
물은 항상 흘러 머무르지 않으며, 청산은 늘 한가롭다.
「 任他四大往來奔
雲來雲去鎮常存
竹影掃堦塵不起
月穿潭底水無痕」
】
저 사대가 분주하게 오고 가는 데 맡겨 두니
구름이 오고 가도 오래도록 항상 존재한다.
대나무 그림자가 뜨락을 쓸어도 먼지는 일어나지 않고
둥근 달이 연못 바닥을 뚫어도 물은 흔적이 하나도 없다.
-------ㅇ
「不垢不淨。」
【亦說眾生本來清淨法身無名無相無痕無瑕無
染無活不長不短不方不圓壞不得燒不得如虗
空似蓮華不著水也不垢穢亦不淨潔常劫如然
如水中月
또한 중생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청정한 법신을 말해 보면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흔적도 없고 티도 없다. 물듦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모나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다. 무너뜨릴 수도 없고 태울 수도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고, 연꽃이 물에 젖지 않음과 같다. 더럽지도 않고 또한 정결하지도 않으며, 무량한 겁 동안 언제나 한결같으니 마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
要見麼 隨處放光 幾人能得見。
이 자리를 보고자 하는가?
가는 곳마다 방광을 하지만 몇 사람이나 능히 볼 수 있을까.
「 清淨無瑕一法身
如蓮出水不沾塵
分身應現千江水
千月還同一月真」
】
청정하여 티가 없는 한 법신이여!
마치 연꽃이 물에서 자라지만 티끌에 젖지 않음과 같다.
몸을 나누어 천 개의 강물에 나투나
천 개의 달은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진짜 달과 같다.
-------ㅇ
「不增不減。」
【謂混沌虗空之體迢迢空劫之身如何增得如何
減得也害不得也益不得 道云在聖而不餘在
凡而不欠 釋云如如自然無欠無餘 又云經
歷劫而不壞至亘古而不遷 古德云體似虗空
沒崖崖上乘菩薩信無疑中下聞之必生恠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 허공은, 아득히 멀고 먼 옛적의 내 몸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증가하고 감소함이 있겠는가?해를 끼치려 해도 할 수 없고, 이익을 주려 해도 할 수 없다.
도가에서는 “성인에게 있다하여 남는 것이 아니며 범부에게 있다고 하여 모자란 것도 아니다.” 하였다. 불가에서는 “여여하고 늘 그대로여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하였고, 또 “오랜 겁을 지내도 무너지지 않고,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도 변화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고덕은 “체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다.”고 하였다. 상승 보살은 이 말을 들으면 바로 믿어 의심이 없으나, 중 하근기는 들으면 반드시 의아하게 생각한다.
且道因何如是 呵呵 自家繩子短倒怨井水深 正是自家味了
咄 靈山會上曾相識今日因何不認人。
자, 말해 보아라!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하하하!
자기의 법은 짧은데 무너뜨릴 원수의 우물물은 깊다. 그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어리석기 때문인 것이다.
돌!
영산회상에서 일찍이 서로 알았거늘, 오늘은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을 알지 못하는가?
「 法身與色身
不必論疎親
皆賴東君力
華柳一般春」
】
법신과 색신의
멀고 가까움을 논할 필요가 없네.
모두 동군의 힘을 의지하여
꽃과 버드나무가 똑같이 봄이로다.
-------ㅇ
「是故空中。」
【妙法真空不生不滅無垢無淨增不得減不得清
淨本然古今不改萬劫常存刀割不斷箭射不穿
繩繫不住火燒不燃雨洒不濕推擁不偏擊之不
痛捉之難拈
묘한 법 참된 공(妙法眞空)의 자리는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증가됨도 없고 감소됨도 없다. 청정 본연의 모습은 이ᅟᅨᆺ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으며, 만겁에 항상 존재한다. 그것은 칼로 베어도 끊어지지 않고 화살로 쏘아도 뚫어지지 않는다. 노끈으로 잡아매도 머무르지 않고 불로 태워도 타지 않으며 비를 뿌려도 젖지 않는다. 밀거나 잡아당겨도 치우치지 않고 때려도 아프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기 어렵다.
因何如是物不礙虗空虗空不礙
物也 仙真云真空不掛物大道不沾塵 川老
云虗空不閡絲毫念所以彰名大覺仙 文始真
經云天地雖大不能芽空中之核陰陽雖妙不能
卵無雄之雌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사물은 허공을 장애하지 않으며, 허공은 사물을 장애하지 않는다. 선진仙真은 “진공 자리에는 사물을 걸 수 없고 대도자리에는 티끌을 더하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야보도천 스님은 “허공은 털끝만큼의 생각도 막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대각선이라는 이름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시진경>에는 “천지가 크다고는 하나 허공 가운데 씨앗을 싹 틔워 내지 못하고, 음양이 묘하다고는 하나 수컷이 없이는 암컷이 알을 낳지 못한다.”고 하였다.
且道天地因何不能生發陰陽其
生不能造化空中之物不能生芽者不沾地土不
著境界也無雄之卵不能造化者內空無物也
省得麼 內外徹底空 鬼神拿不著。
자, 말해 보아라! 천지는 무엇 때문에 발아시키지 못하며, 음양은 태어남에 있어 수컷 없이 태어나지 못하는가. 공중의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은 땅의 흙에 젖어 있지 않고 경계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수컷이 없이는 알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안이 공하여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알았는가?
안과 밖이 철저히 공하여 귀신이 잡으려고 해도 잡지 못한다.
「 真空元不立纖塵
纔有微塵便不真
泥水布衫都脫下
分明便見裡頭人」
】
진공 자리는 본디 털끝만한 것도 세우지 못하니,
아주 조그만 티끌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
진흙탕물에 젖은 베적삼을 모두 벗어 버리면
그 안의 사람을 분명하게 바로 보게 된다.
--------ㅇ
「無色無受想行識。」
【既是空中有甚五蘊積習虗空之體安色不受色
安聲不受聲安受不受受安想不受想安行不受
行安識不受識六道四生一切假名假相都無納
受清虗妙道纖塵不立必竟無形行如鳥道坐若
太虗
이미 공인데 그 가운데 무슨 오온이 익히어 쌓임이 있겠는가?
허공의 본체는 빛깔(色을) 두나 빛깔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소리를 두나 소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으며, 받아들임(受)을 두나 받아들임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생각함(想)을 두나 생각함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행함(行)을 두나 행함을 받아들이지는 않으며, 인식함(識을) 두나 인식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육도와 사생, 일체가 거짓된 이름이고 거짓된 모양이라 어느 것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청허하고 묘한 도는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세우지 않으며, 필경에는 모습도 없다. 행함에 마치 새가 날아다니는 길과 같고, 앉음에 태허와 같아 흔적이 없다.
且道如何謂之鳥道太虗 咦 鳥道雖行而不見跡
真空雖露而不見相 會麼。
자, 말해 보아라! 어떤 것을 새의 길, 태허라 하는가?
에잇!
새가 공중에 날아간 발자취를 볼 수가 없듯이, 진공은 앞에 드러나 있으나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알았는가?
「 五蘊俱無便見空
何須他覔主人公
既得水清魚自見
頭頭不昧有神通」
】
오온이 함께 없어지면 문득 공을 볼 것인데
어찌 다른 곳에서 주인공을 찾으려 하는가!
물이 깨끗해지니 고기가 저절로 보이고
매사가 어둡지 않으니 저절로 신통이 있더라.
「無眼耳鼻舌身意。」
【且道無眼耳鼻舌身意是箇甚麼 休呆看蹉過
了 予今明說有此六根是色身無此六識名法
相 如此之者只是數脩行人眼雖看不要著在
色上耳雖聽不要著在聲上鼻雖嗅不要著在香
臭上舌雖甞不要著在滋味上雖有身體休要著
在相上須要忘形忘體意雖應事不要著在境物
上要應應常靜
자, 말해 보아라!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뜻이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릇되이 잘못 보지 말라. 내가 지금 명확하게 말할 것이다. 육근이 있는 것은 색신이며, 육식이 없는 것은 법상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은 것은 다만 수행하는 사람이 헤아리는 것이다. 비록 눈으로 보나 색에 집착하지 않으며, 귀로 들으나 소리에 집착하지 않고, 코로 냄새를 맡으나 향취에 집착하지 않으며, 혀로 맛을 보나 맛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몸이 있지만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모름지기 모양을 잊고 체를 잊는다. 뜻(意)은 비록 일에 임하나 대상 경계에 집착하지 않으며 응하고 응하되 항상 고요하다.
道云眼不觀色耳不聽聲舌不
躭味鼻不嗅香身不妄動意不狂亂 儒云非禮
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便是無眼耳
鼻舌身意也
도가에서는 “눈이 생김새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귀가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다. 혀가 맛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코가 냄새를 맡는 것도 아니다. 몸이 쓸데없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뜻이 광란한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유가에서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안 이 비 설 신 의 육근이 없다’는 의미이다.
亦是六根清淨便是六塵不染又是
六識皆空總而言之十八界靜也又名六耗消亡
六賊死一真不動六門關總而言之十八獄空也
斷也若此則天堂近也便見本來法身
또한 ‘육근이 청정함’이 바로 ‘육진에 물들지 않음’이며, 또한 ‘육식이 다 공함’이니, 이를 종합해서 말하면 ‘십팔계가 다 고요해짐’이다. 더 나아가 ‘여섯 가지 어지러운 것이 다 없어지고, 육적이 죽어, 하나의 진도 움직이지 않고 육문이 닫힌다’고 일컬으니, 이것을 종합해서 말하면 십팔 지옥이 공해져 끊어진 것이라고 한다. 만일 이렇게 되면 천당이 가까워지고, 곧바로 본래의 법신을 볼 것이다.
要見本來法身麼 在眼曰見在耳曰聞在鼻曰臭在舌
談論在手拈掇在足運奔全體起用全體法身非
是六根四大五蘊見聞知覺切忌休認四大六根
為巳 金剛經云凡所有相皆是虗妄 道云悟
者忘念歸真迷者著相失本 盡是假名引導眾
生不可知得便了
본래 법신을 보고자 하는가?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고 하며,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는다고 하고, 혀에 있으면 담론한다고 하고, 손에 있으면 잡는다고 하고, 발에 있으면 움직인다고 한다. 온몸이 움직이면 온몸이 다 법신이다. 그러나 육근과 사대, 오온이 보고 듣고 지각하는 것이 아니니 삼가고 조심하며, 사대와 육근을 오인하여 자기라 여겨서는 안 된다. <금강경>에서는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라 하였고, 도가에서는 “깨달은 자는 생각을 잊고 참에 돌아가고, 어리석은 자는 모습에 집착하여 근본을 잃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 거짓된 이름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일 뿐, 알아서 바로 요달하게 하지는 못한다.
須是親見法身若得親見轉凡
成聖若聽人言說或文字上知解如畫餅充饑似
說酒止渴終不濟事 虗實云華藥欄莫顢頇星
在秤弓不在盤 重陽祖師云休教錯認定盤星
법신을 친히 보고자 하다가 만일 친견하게 되면 범부가 바뀌어 성인이 된다. 다른 이의 말을 듣거나 문자상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그림 속의 떡이 굶주린 배를 채워 줄 것이라는 기대와 같고, 술이라는 말 한 마디에 목마름이 그친다는 말과 같아서 결국은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허실은 “화단의 울타리(청정법신)이니 속지말라. 저울의 눈금(星)은 저울대에 있는 것이지 물건을 올리는 저울쟁반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양 조사는 “정반성을 잘못 알지 말라.”고 하였다.
且道此句如何說 謂盤只可等物知輕別重
者皆在星上 祖師又恐人錯認定盤星討準定
盤星是死物不知輕重是以休教錯認定盤星
一般都是星有用得著底有用不著底此皆喻法精
細審察休執著一邊
자, 말해 보아라! 이 문구는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저울 쟁반은 모든 물건이 다 같다. 가볍고 무거운 것을 아는 것은 저울 눈금에 있다. 조사는 사람들이 저울의 첫 번째 눈금인 정반성을 잘못 오인하여 기준으로 삼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정반성은 죽은 물건이라 물건의 가볍고 무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반성을 잘못 오인하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모두가 이 눈금인데 이 눈금을 쓸 수도 있고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이 다 법을 비유한 것이니, 자세하고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며 한 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且道此理如何 真性與
識性真神與識神一般同住止一假一成真 牢
著眼 鷺鶿藏雪內飛起却纔知。
자, 말해 보아라! 이 이치가 어떠한가?
진성과 식성, 진신과 식신은 모두 같이 머무른다. 하나가 거짓이면 하나는 진이 된다. 한번 용감하게 착안해 보라!
하얀 백로가 눈 속에 숨어 있다가 날아가니 그때서야 겨우 알더라.
「 六箇門頭一箇關
五門不必更遮欄
從他世事紛紛亂
堂上家尊鎮日安」
】
여섯 개 문에 하나의 관문이여!
다섯 문은 다시 울타리를 칠 필요가 없도다.
저 세상의 일을 따라 분분히 어지럽지만
집 안의 아버지는 언제나 편안하도다.
-------ㅇ
「無色聲香味觸法。」
【此乃六塵也皆從一根上起但去一根上反照從
何而起若識起處從根本生起處是妄休教生苗
仙真云揚湯點沸不如釜底抽薪 釋云要伐
其樹先去其根枝稍自墜
이것은 육진이다. 모두 한 뿌리에서 일어나니 다만 한 뿌리가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반조해 보라. 만약 일어난 곳을 알면 처음 일어난 곳에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선진仙真은 “찬 물을 들어 올려 끓는 물에 붓는 것보다는 가마솥 밑의 땔나무를 꺼내는 것이 낫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나무를 베고자 할 때 먼저 뿌리를 잘라내면 가지는 저절로 제거된다.”고 하였다.
既識根本棄假歸真
識得我身非有我身尚無萬法皆空自然清靜觀
身無身觀法亦然都歸空寂更去靜坐觀過去所
作多種色聲香味觸法在於何處既無所有還如
昨夢我心本空福罪無主何者是罪何者是福。
經云諦觀心罪本來空是則名為真懺悔
이미 근본을 알면 거짓을 버리고 참 속으로 돌아가 나의 몸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나의 몸이 없으니 만법이 모두 공해져 자연히 청정하다. 몸을 관해 보니 몸이 없고, 법을 관해 보니 법도 또한 그러하여 모두 공적한 데로 돌아간다. 다시 가서 고요히 앉아 과거에 지었던 여러 가지 색성향미촉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관해 보라. 이미 있는 바가 없다면 마치 어젯밤 꿈과 같다. 나의 마음이 본래 공하여 죄와 복의 주체가 없으니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복인가? 경에서는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니 죄가 본래 공하므로 이것이 곧 진정한 참회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且道懺箇甚麼悔箇甚麼懺則懺其前非悔則再不重
犯 咄 既得諸根斷 何處可生苗 只有虗
空在 要見虗空麼 看不見 模不著 對面
如常光爍爍 認得也未。
자, 말해 보아라! 참懺은 무엇이고 회悔는 무엇인가?
참은 이전의 잘못된 것을 뉘우치는 것이고, 회는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다.
돌!
이미 모든 뿌리가 끊어짐을 얻었거늘 어느 곳에 다시 싹이 날 수 있겠는가. 다만 허공만이 있을 뿐이다. 허공을 보고자 하는가!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고,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한다. 대면하면 평상시와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알아 얻었는가?
「 萬法皆空罪福無
更須靜坐嘴羅都
驀然拿住毗盧手
做箇男兒大丈夫」
】
만법이 다 공하여 죄도 복도 없으니
다시 고요히 앉아 묵묵히 하라.
갑자기 비로자나의 손을 잡아 머무르니
한 사람의 남아 대장부가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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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眼界乃至無意識界。」
【若眼界淨竟識安十八界自然平安此十八界因
執有眼界連累十八界不安但去眼根反究虗假
古德云眼是障道魔軍著境自迷回路 仙真
云眼觀心動著物迷真
만일 눈(眼界)이 깨끗하면 마침내 식도 편안해져, 십팔계가 자연히 편안하다. 이 십팔계는 눈이 있다고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십팔계에 연결이 되어 편안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눈에서 돌이켜 궁구해 보면 헛되고 거짓된 것이다. 그래서 고덕은 “눈은 도를 장애하는 마군이며, 경계에 집착하면 스스로 돌아오는 길을 어둡게 한다.”고 하였고, 선진仙真은 “눈으로 보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고, 사물에 집착해 진을 미혹한다.”고 하였다.
吾身非入六根皆歸敗壞
靜審四大都無實義惟有真空妙性長劫不壞之
體湛然常在亦無脩證 釋氏云那伽長在定無
有不定之時 先師云定中境界靜裡乾坤自然
而然做作又不是也
나의 몸이 육근에 들어가지 않으면 대개 무너져서 사라져 버리며, 사대를 조용히 살펴보면 참으로 옳은 것이 없다. 오직 진공묘성만이 존재하는데 이는 무량한 시간 동안 무너지지 않는 채로, 고요하고 깨끗하여 항상 존재하므로, 크게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다. 불가에서는 “나가는 오랫동안 선정에 들어 있었으며, 선정에 들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하였고, 선사先師는 “선정 속의 경계이고, 고요함 속의 하늘과 땅이니 그대로 그러한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既得定力有甚散亂如同
秋月圓陀陀光爍爍普天匝地無有不照著處說
箇照著亦是自然非安想故 拾得又云吾心不
比月比月有圓缺一盞無油燈照得十方徹 山
河大地不能隔礙光明洞耀逈脫根塵體露真常
太無染污但離諸緣便是仙佛
이미 선정의 힘을 얻었는데 마음에 무슨 산란함이 있겠는가? 마치 가을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과 같이 둥글고 빛이 나서 온 천지에 가득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비추는 것을 말하자면 또한 자연적인 것이지 일부러 생각하여 비추는 것이 아니다. 습득은 또 “나의 마음을 달에 비유하지 말라. 달에 비유할 것 같으면 달도 차고 기울어짐이 있다. 한 등잔에 기름 없는 등불이 켜져 있어 시방을 환히 비춘다.”고 하였다. 산하대지가 있어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광명이 환하게 빛나니 일체의 근진에서 멀리 벗어나 항상 참된 실체가 드러나 크게 물듦이 없다. 단지 모든 인연을 떠나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理會麼○光明無少欠只怕起雲遮。
알았는가? 광명은 모자람이 없지만, 다만 구름이 일어나 막을까 두렵도다.
「 遇境無心眼便明
反觀自巳見前程
靈光射透長安道
獨向蓬萊路上行」
】
경계를 만나 마음이 없으면 바로 눈이 밝아지니
자기를 돌이켜보고 앞길을 바로 보라.
신령스런 빛이 장안의 길을 비추고 통과하여
홀로 봉래산을 향해 길을 떠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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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無明。」
【無無明者萬緣不生也無明是黑暗不停之念一
切眾生盡有無明因有無明起多種差別百般煩
惱皆是暗昧之心故令如是 道云暗昧心不止
地獄畜生本 釋云無明不見菩提路不覺將身
落火坑 儒云寸心不昧萬法皆明 又廣成子
云木去火則不灰人去情則不死
무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온갖 인연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무명은 어둡고 멈추지 않는 생각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다 무명이 있으며, 무명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차별된 생각을 일으킨다. 온갖 번뇌가 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한 까닭에 그와 같다고 하였다.
도가에서는 “어둡고 사리에 맞지 않은 마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지옥, 축생의 근원이다.”라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무명 때문에 보리의 길을 보지 못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불구덩이에 던진다.”고 하였다. 유가에서는 “한 치의 마음이 어둡지 않으면 만법이 모두 분명해진다.”고 하였고, 또 광성자는 “나무에 불을 없애면 재가 되지 않으며, 사람에게 망정을 없애면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大顛云心處六情如鳥投網造罪惡業如蛾赴燈出殻入殻轉
轉不覺流浪經劫皆因無明而起因有無明有行
因行有識因識有名色因名色有六入因六入有
觸因觸有受因受有愛因愛有取因取有有因有
有生因生有老死憂悲苦惱皆因無明為始於此
親見無明降伏令死死中更死欺人不得諸漏自
盡煩惱永斷三毒自滅惡根自除須是直裁根源
莫顧枝稍華葉根若截斷華葉自死掃除心地不
見其身身盡無明盡塵垢亦盡萬劫塵沙數罪一
時頓息輪迴生死一時脫兔
대전 조사는 “마음이 육정, 즉 육근에 머무르는 것은 새가 그물 속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으며, 죄악의 업을 짓는 것은 나방이 등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다. 껍질에서 나왔다가 다시 껍질로 들어가 윤회하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랜 세월 동안 유랑하니 이것은 모두 무명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무명이 있음으로 인해 행이 있고, 행으로 인해 식이 있고, 식으로 인해 명색이 있고, 명색으로 인해 육입이 있고, 육입으로 인해 촉이 있고, 촉감으로 인해 받음(受)이 있고, 받음으로 인해 애착이 있고, 애착으로 인해 취함이 있고, 취함으로 인해 존재(有)가 있고, 존재로 인해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으로 인해 늙음, 죽음, 근심, 슬픔, 고뇌가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무명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이 무명을 보고 무명을 항복받아 없어지게 하며, 업어진 가운데 다시 없어지게 하면 다시는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번뇌가 저절로 다하여 영원히 끊어지면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고, 악의 뿌리가 저절로 제거된다. 여기에서 모름지기 뿌리를 절단해야 하며 가지와 꽃과 잎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뿌리가 바로 끊어지면 꽃과 잎은 저절로 죽으며,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하면 그 몸을 보지 않게 된다. 몸이 다하면 무명이 다 없어지고 때도 다하며, 만겁의 티끌수와 같은 많은 죄가 한꺼번에 없어지며, 생사에 윤회하는 고통도 일시에 벗어난다.”고 하였다.
且道似個什麼
嗄 𧏙蜋離糞彈 脫殻化金蟬 會麼。
자, 말해 보아라! 이러한 것은 무엇인가?
애-!
쇠똥구리가 똥무더기를 떠나고, 껍데기에서 벗어나 금매리로 변했다.
알았는가?
「 心間不昧性圓明
徧界空空一坦平
寸草不生塵土盡
一輪日向海中生」
】
마음속이 매하지 않아 성품이 둥글고 밝으며
온 세계가 공하고 공하며 한결같이 평탄하도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다가 그 흙마저 다하니
커다란 둥근 해가 바다 속에서 나오도다.
「亦無無明盡。」
【既掃除心地十八界必然清淨身尚忘却更有甚
無明盡迷則顛倒妄想是無明業心悟則轉凡成
聖是圓明覺性都是一般心地只曾明與不明。
太上云同出而異名 永嘉云無明實性即佛性
幻化空身即法身
이미 마음을 다 슬어 버려 십팔계가 모두 청정해졌다. 몸도 잊었는데 다시 무슨 무명이 다할 것이 있겠는가? 미혹하면 전도되어 망상을 하게 되니 이것이 무명의 업심이다. 깨달으면 범부를 바꾸어 성인이 되니 이것이 둥글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이다. 모두 하나의 마음이지만 다만 밝히고 밝히지 못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태상은 “나오는 것은 같지만 이름이 다르다.”고 하였고, 영가현각 스님은 “무명의 참 성품이 그대로 불성이요, 환화의 빈 몸뚱이가 그대로 법신이다.”고 하였다.
若執幻身是我即有無明有無
明即生三毒起三惡業三業昏暗六根內盲因此
不見不知背覺合塵墮三惡道如有智慧之人能
轉慳貪心為喜捨心轉瞋怒心為歡喜心轉愚痴
執著心為圓融脫洒心更改六賊為神通
만약 허깨비와 같은 몸이 나라고 집착하면 무명이 있게 되고, 무명이 있으면 삼독이 생겨나고 삼악업을 일으킨다. 삼업이 너무 어두워 육근이 안으로 눈멀게 되며, 이로 인해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해, 깨달음을 등지고 세상살이에 영합해 삼악도에 떨어진다.
만약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끼고 탐내는 마음을 돌이켜 기쁘게 보시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화내는 마음을 도이켜 즐거운 마음이 되게 하며, 어리석고 집착하는 마음을 돌이켜 원융하게 하고 벗겨져 깨끗한 마음이 되게 하며, 다시 육적을 바꾸어 육신통이 되게 한다.
於是一一轉得改得自然轉凡成聖凡夫即是聖人若轉
不得改不得聖人即是凡夫如何凡人被物轉聖
人能轉物百姓日用而不知終日忙忙被物所引
日久月深離家漸遠不得還鄉迷真失本也
여기에서 하나하나 돌이켜 바꾸면 자연히 범부를 바꾸어 성인이 될 것이므로 범부가 곧 성인이다. 만약 돌이키지 못하고 바꾸지 못하면 성인이 곧 범부이다. 어째서 범부는 사물의 굴림을 당하며, 성인은 자신이 사물을 굴리는가. 사람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고 하루 종일 바쁘게 치달리며 사물에 끄달림을 당한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자기 집에서 점점 멀어져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진성을 미하고 근본마음 자리를 잃어버린다.
若是會萬物歸於自巳豈得迷失真本矣 川老云終
日忙忙那事無妨不求解脫不樂天堂但能一念
歸無念高步毗盧頂上行 又云終日吃飯不曾
咬著一粒米終日著衣不曾掛著一縷絲 道云
居塵不染塵在慾而無慾
만일 만물이 자기에게 돌아가는 것을 안다면 어찌 미혹하여 진성을 잃겠는가. 야보도천 스님은 “종일토록 바쁘고 바쁘더라도 그 무엇도 방해되지 않으며, 해탈을 구하지도 않고 천당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생각이 무념에 돌아갈 뿐이며, 비로자나 부처님의 높은 이마 위를 활보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종일토록 밥을 먹었지만 곧 쌀 한 톨 씹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옷을 입었지만 일찍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도가에서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욕심 가운데 있어도 욕심이 없다.”고 하였다.
身心一如內外無餘
須是打成一片與空劫齊形影不存體露堂堂纔
有纖塵徧界空生便墮生死但去反觀巳身我身
不實餘者皆空我身尚假有甚無明
몸과 마음(身心)이 일여하고 안과 밖이 다름이 없다. 모름지기 하나가 되니 공겁 이전과 같아 모양도 그림자도 없으며 본성의 체가 당당히 드러난다.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있게 되면 온 세계에 부질없이 태어나 전전하다 문득 생사에 떨어지게 된다. 다만 자기의 몸을 돌이켜 관해 보면 나의 몸은 실다운 것이 아니며 나머지도 다 공한 것이다. 나의 몸도 거짓인데 다시 무슨 무명이 있겠는가?
且道如何迷失真道 咦 雪迷樵子路雲遮採藥人。
자, 말해 보아라! 미혹하여 진실된 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잇!
내리는 눈이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없애고, 구름이 약초꾼의 길을 막았도다.
「 前途路逕黑漫漫
無限江河萬嶺巑
若解轉身些子力
堂堂大道坦然寬」
】
앞길이 너무나 캄캄하고 질척질척하여
강과 시내가 끝이 없고 만산이 높이 솟았다.
만약 몸을 굴리는 조그마한 힘을 안다면
당당한 대도가 평평하고 넓게 펼쳐져 있을 것이다.
-------ㅇ
「乃至無老死。」
【既得無更有甚憂苦老死脩行之人須要忘形忘
體我身既無有何無明無明既無生死亦斷 太
上云內觀其心心無其心外觀其形形無其形遠
觀其物物無其物三者既悟惟見於空 金剛經
云無我相無人相無眾生相無壽者相 三者既
無四相皆空有何無明老死萬法自空即是仙佛
只這仙佛兩字也是多了亦乃強名
이미 없어졌는데 다시 무슨 근심 걱정, 괴로움, 늙고 죽는 것이 있겠는가? 수행하는 사람은 몸뚱이도 잊고 모양도 잊어야 한다. 나의 몸이 없는데 무슨 무명이 있겠는가?무명이 이미 없으므로 생사도 또한 끊어진다.
태상은 “안으로 마음을 보면 마음에는 그 마음이랄 것이 없고 바깥으로 형체(形)를 보면 형체에는 그 형체랄 것이 없으며 멀리 사물을 보면 사물에는 사물이랄 것이 없다. 이 세 가지를 깨달은 사람만이 오직 공을 본다.”고 하였고, <금강경>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고 하였다. 세 가지가 이미 없어지고 네 가지 상이 모두 공해졌는데 여기에 다시 무슨 무명이나 늙음, 죽음이 있겠는가? 만법이 저절로 공해지니 이것이 바로 부처이다. 이 부처라는 두 글자도 많으며, 또한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且眾生顛倒
被目前幻境所惑習性所牽形影變動不能作主
隨物流轉因執有我妄心不滅人我不除執著聲
色墮落生死若是見性之人目前無法亦無眾生
心佛及眾生本無差別平等真法界一體同觀萬
法歸一
또한 중생들은 가치가 전도되어 눈앞의 허깨비와 같은 경계에 현혹된다. 습성에 끄달려 모양과 그림자가 바뀌며, 주인이 되지 못하고 물질을 따라 유전한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망령된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인.아 등 사상四相을 제거하지 못하여 소리와 색에 집착해 생사에 떨어진다.
만일 성품을 본 사람은 눈앞에 법이라는 것이 없다. 또한 중생도 없고, 본래 마음 부처 중생이 차별이 없다. 평등하고 진실한 법계를 한 몸으로 똑같이 보기 때문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且道怎地同觀為 仙真云雖則枝分
稍異到了萬葉歸根然則派列流差必竟百川還
海 且太極未判混然一氣豈有二耶天地既分
而有高下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皆一無所化
天也是道地也是道人也是道有情無情皆受道
氣所生觀梢末則萬彚不等知根本則一槩無殊
釋云是法平等無有高下 仙真云平等不二
老是全真之丈夫
자, 말해 보아라! 왜 똑같이 본다고 하였는가.
선진仙真은 “비록 나무 위 가지가 나누어져 나뭇가지의 끝이 다르나 결국 모든 잎은 뿌리로 돌아가 끝난다.”고 하였다. 그것은 곧 물의 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뉘고 흐르는 모양도 다르지만 결국에는 모든 강물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또 태극이 나누어지기 전에는 뒤섞여 하나의 대기였는데 어찌하여 둘이 되었는가? 천지가 이전에 나누어져 높고 낮음이 있어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고 모두가 하나여서 교파할 바가 없다. 하늘이 도이며, 땅이 도이며, 사람이 도이다. 유정 무정이 다 도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것이다. 나뭇가지의 끝을 보면 모든 가지가 같지 않으나 근본을 알면 하나일 뿐 다를 것이 없다. 불가에서는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였고, 선진은 “평등하여 둘이 아닌(不二) 노인이 온전히 참된 장부”라고 하였다.
若識破這個道理生則從他
生老則從他老病則從他病死則從他死生老病
死不曾礙著我漚生漚滅○波飜浪瀼水本常然
大顛云到家底人不見有生死亦無生滅天堂
地獄六道四生一切幻化於徹底人總無交涉自
然全身放下 古云諸行無常一切空即是如來
大圓覺
만약 이 도리를 알면 태어나매 그것으로부터 태어나고, 늙으매 그것으로부터 늙고, 병들매 그것으로부터 병들고, 죽으매 그로부터 죽어 생로병사가 일찍이 장애되지 않는다. 나에 집착하여 거품이 생겼다가 없어진다. 파도가 치고 물결이 일렁거려도 물은 본래부터 언제나 그대로이다. 대전조사는 “집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생사가 있음을 보지 않으며 또한 생멸이 없음을 보지 않는다. 천당, 지옥 등 육도와 사생, 모든 환화를 철저히 본 사람(徹底人)에게는 모두 교섭하지 못하며 자연히 온몸을 다 놓아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옛사람은 “모든 법은 영원하지 않으며 일체가 다 공하다. 이 자리가 곧 부처님의 대원각의 경지.”라고 하였다.
且道死了向其處去 會得麼 一輪
無影日 端在太虗中。
자, 말해 보아라!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알았는가?
한 개의 그림자 없는 둥근 해가 태허 속에 단정하게 있다.
「 既太執分身
無明幻境盡
觀空亦是空
生死無由近」
】
이윽고 큰 집착에서 몸을 떼어 내니
무명의 헛된 경계가 다한다.
공하다고 관하는 것 또한 공이니
나고 죽는 생사가 가까울 까닭이 없도다.
-------ㅇ
「亦無老死盡。」
【既無老死常劫如然豈有窮盡有盡者是幻境色
身無老死者是真空法相既不著有亦不滯空活
鱍鱍地轉轆轆地圓陀陀地光爍爍地豈有盡耶
且初行行人先要打當乾淨方有些兒相應處
太上云損之又損之以至於無為無為而無不為
처음부터 늙고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서 무수한 겁이 다 여여한데 어찌 ‘다한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다함이 있는 것은 이 허깨비 같은 경계의 색신이고, 늙고 죽음이 없는 것은 진공의 법상이다. 이미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공에도 막히지 않으니, 물고기처럼 활발발한 자리이며 수레바퀴처럼 잘 굴러가는 자리이며, 둥글고 아름다운 자리이며, 빛나고 빛나는 자리이다. 어찌 ‘다한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처음 수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정결하게 해야만 비로소 조금 상응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태상은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함이 벗는 경지(無爲)에 이르니 함이 없으되 하지 않음도 없다.”고 하였다.
大顛云學道之人如剝芭蕉一般去一層又
去一層直至去盡無下手處自然返本還源得五
蘊空如未生相似燒了一般到空不空處脫體全
忘不存踪跡要通身手眼不立纖塵名字猶不可
得何況其他十二因緣六度萬行頭陀苦行一時
頓脫如枯木死灰如百無一會底人
대전 조사는 “도를 배우는 사람은 파초를 벗기는 것과 같아서 한 겹을 벗겨 내고 다시 한 겹을 벗겨 내면 바로 다 벗겨져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곳에 다다른다. 자연히 근본을 돌이켜 본래의 근원에 돌아가면 오온이 공함을 얻어 태어나기 이전과 같고, 모든 것을 태운 것과 같다. 공하되 공하지 않은 곳에 이르게 되면 이 몸을 벗어났다는 것마저 모두 잊으므로 자취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온몸과 손과 눈에 티끌 하나 세우지 못한다. 이름도 붙이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다른 것은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십이인연과 육바라밀행, 만행, 두타행을 일시에 한꺼번에 벗어나니 마치 고목 같고 식어 버린 재와 같고 백 가지 중 한 가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古云不是
息心除妄想都緣無事可思量 若更說生說死
說因說果說心說性 永嘉云心是根法是塵兩
種猶如鏡上痕痕垢盡除光始現 心法雙忘方
到無生死之地
옛사람은 “마음을 쉬거나 망상을 제거하지 않고 모두 반연하나 사량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다시 삶을 말하고 죽음을 말하며, 인을 말하고 과를 말하며,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하겠는가. 영가현각 스님은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이 두 가지는 마치 거울에 묻어 있는 때의 흔적과 같다. 흔적이 다 제거되면 광명이 비로소 나타나니, 마음과 법 두 가지가 다 잊혀져야 비로소 생사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且道人法俱忘復是何物 理
會麼 灰飛烟滅家何處 水遠天長一色秋。
자, 말해 보아라!
사람과 법을 모두 잊으면 다시 어떤 물건인가?
알았는가?
재는 날아가고 연기는 사라지니 집이 어느 곳인가?
물은 깊고 하늘은 높으니 가을이 일색이로다.
「 人法雙忘萬事休
百川四海會源流
猛然迸出寥天月
照徹乾坤四大川」
】
사람과 법을 둘 다 잊으니 만 가지 일이 쉬어지고
모든 냇물과 사방의 바다가 원류를 만난다.
맹렬히 솟아오르는 하늘의 고요한 달은
하늘과 땅, 사대해를 비춘다.
-------ㅇ
「無苦集滅道。」
【既忘其形即得生死斷更無窮盡有甚苦集滅滅
道 先師云因有身心招眾苦能忘心體苦何生
釋云身是眾苦之本心是惡業之根若能放下
身心便登菩提彼岸
이미 모양을 잊고 생사가 끊어져 더는 다할 것이 없는데 어찌 고집멸도라 할 것이 있겠는가?
선사先師는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부르는 것이다. 마음과 몸을 잊으면 무슨 고통이 생기겠는가.”라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몸은 모든 고통의 근본이며, 마음은 악업의 뿌리이다. 만약 몸과 마음을 놓아 버리면 문득 보리의 저 언덕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大顛云小乘之人日夜精
進六度萬行心外求法免此四諦出三界免輪迴
無有是處諸佛為大事因緣出現於世不以小乘
法濟度於眾生
대전 조사는 “소승의 법을 닦는 사람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진을 하고 육도만행을 하며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해 이 사제를 면하고, 삼계를 벗어나 윤회를 면하고자 하나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은 일대사인연을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절대로 소승의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셨다.
大乘之者學無為法端坐念實相
眾罪如霜露慧日能消除存於閑處收攝其心端
坐不動觀一切法皆無所有及觀四大有身非覺
體無相乃明真自知空寂頓觀淨盡無功之功長
劫不壞無為之為而不為如如不動湛然常寂。
대승의 법을 닦는 자는 함이 없는 법(無爲法)을 배운다. 단정히 앉아 실상을 생각하니 많은 죄가 마치 서리나 이슬 같아서 지혜의 해(日)가 모두 녹여 제거한다.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마음을 거둬들여 굳건히 해,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일체의 법을 관해 보니 모두 있는 바가 없고, 사대로 이루어져 있는 몸을 관해 보니 깨달음의 체(覺體)가 아니다. 모양이 없어져야 진실된 것을 밝히며 스스로 공적한 줄을 안다. 일시에 관함까지도 청정해지니 그것은 공력(功)이 없는 공력이며, 그것은 무수한 겁을 지내어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며, 함이 없이 하되 하지 않는 것이며, 여여부동하고, 맑고 깊어 늘 고요한 것이다.
蓮經云諸法從本來常自寂滅相佛子行道巳來
世得作佛 定慧力莊嚴無迷無悟無苦無樂無
集無滅無道無得無慧無失本來無一物明鏡亦
非臺到這裡脩證即無染污不得一超直入如來地
<묘법연화경>에서는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제나 스스로 적멸한 모양이다. 불자가 진실한 수행을 하면 온 세상에서 부처가 되리라’고 하였다.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장엄되니, 미혹함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고통의 원인(集)도 없고 고통의 소멸(滅)도 없다. 고통을 소멸하는 방법(道)도 없고 그것을 얻을 것도 없고 지혜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닦아 증득할 것도 없고 물들거나 더럽혀짐도 없으며, 한 번 뛰어 곧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要見如來麼 如來似來不來似去不去送
之即不得留之亦不住 會麼 竹密不妨流水
過 山高豈礙白雲飛。
여래를 보고자 하는가?
여래는 온 것 같으나 온 것이 아니며, 간 것 같으나 간 것이 아니다. 보낼 수도 없으며 머물게 할 수도 없다.
알았는가?
대나무가 빽빽이 우거져 있어도 흐르는 물은 막힘이 없으며, 산이 아무리 높아도 흰 구름을 막지는 못한다.
「 無苦集滅道幽哉
頓然淨盡見如來
愚人外覓三十二
共汝同行你不猜」
】
고집멸도가 없어서 깊고 고요하다.
일시에 다 깨끗해져 보는 것이 여래이나
어리석은 사람은 32상을 밖에서 찾는다.
너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ㅇ
「無智亦無得。」
【自身尚假豈有得乎 道云實無所得為化眾生
名為得道 釋云亦無人亦無佛大千沙界海中
漚一切聖賢如電拂 又云不是心不是佛不是
物 大顛云到這般田地如賊入空室無物得偷
道經有云離種種邊名為妙道 釋又云自性
清淨實無一法可當情
자기의 몸도 거짓된 것인데 어찌 얻을 것이 있겠는가?
도가에서는 “실제로는 얻을 바가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도를 얻는다(得道)고 일컫는다.” 하였고, 불가에서는 “사람도 없거니와 부처도 또한 없다. 삼천대천의 모래알같이 많은 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며, 일체 모든 성현들도 허공의 번갯불과 같다.”고 하였고, 또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대전 조사는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면 마치 도둑이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들어갔는데 훔칠 물건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도경>에서는 “갖가지 입장을 떠난 것을 묘도라 이름한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자성이 청정하여 참으로 한 법도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하였다.
本來付有法付了然無法
各各心自悟悟了無無法 無得無失無進無脩
胸次纔有絲毫有得有失我能我會我悟我達我
聰明我智慧盡是增上慢人我不除皆墮生死若
是真實道人總不如是自有出身之路
본래 법이 있어 부촉한 것이나 부촉한 뒤에는 법이 없다. 각자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니, 깨닫고 나서 보면 법이 없다고 하는 것 조차도 없다.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나아감도 없고 닦음도 없다. 가슴속에 털끝만큼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 ‘잃은 것이 있다’ ‘나는 능하다’ ‘나는 알았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통달했다‘ ’나는 총명하다‘ ’나는 지혜가 있다‘는 등의 생각이 있으면 이것은 모두 증상만增上慢이다. 인상과 아상 등 사상四相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모두 생사에 떨어져 버린다. 만일 진실한 도인이라면 모두 이와 같지 않으며, 스스로 모든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且道如
何是出身之路 打教四邊淨 自好向前行。
자, 말해 보아라! 어떤 것이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인가?
동서남북 사방을 깨끗하게 하고 스스로 기꺼이 앞을 향해 갈지어다.
「 本來這箇沒纖塵
只怕時人錯認真
放下了然無一物
何方不是武陵春」
】
여기에는 본래 작은 티끌도 없으나
다만 세상 사람들이 진실을 잘못 알까 두렵다.
놓아 버리면 명백하게 한 물건도 없으니
어느 곳인들 무릉도원의 봄이 아니겠는가.
-------ㅇ
「以無所得故。」
【得無所得一體空虗 脩行人到這裡入大乘之
位眾生因甚輪轉不能休息因不曾見性尠於智
慧不能廣悟無量空義執著自巳胸次學解悞却
本心 大顛云從外入者不是家珍 仙真云學
他心內言終是別人語
얻었지만 얻은 바가 없어서 일체가 공허하다. 수행하는 사람은 여기에 이르면 대승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중생은 어찌하여 윤회하면서 윤회를 쉬지 못하는가? 일찍이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혜가 적어, 무량한 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자기에게 집착하면서, 가슴속에 배워서 아는 것이 있으므로 도리어 본심을 그르친다. 대전 조사는 “밖에서 들어온 것은 집안의 진귀한 보배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선진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 말을 배우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眾生被乾慧學解廣覽
積習在心遂成我慢 古云若有絲毫便是塵塵
若不消只知傳說事塵若消盡諸境親見諸事親
知如明眼人登高山無所見脩行人須是究竟到
空劫齊不落第二見歸根得旨方有相應
중생은 얕은 지혜를 가지고 이해하기 때문에 널리 열람하여 그것이 마음에 쌓이면 결국 아만이 된다. 옛사람은 “만일 조금의 티끌이라도 마음에 있으면 그것은 곧 허물”이라고 하였으니 만약 티끌을 제거하지 못하면 다만 전해져 내려오는 일만 알 뿐이다. 티끌이 다 제거되면 모든 경계를 친히 보고 모든 일을 친히 알게 되니, 마치 눈 밝은 사람이 높은 산에 올라가면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 수행인은 결국에는 공겁에 도달해야 하며, 제2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근본으로 돌아가 뜻을 얻어야 비로소 상응한다.
若是執著人我便生輕易 善星比丘講得維摩經增上
慢人我不除生陷地獄 雲光法師講得天華亂
墜貪嗔不改墮落堰牛若要超佛越祖須是念念
空寂世間幻化一切客塵惟太虗之體聲色不存
纖塵不立如虗空相似便是了事清淨安樂道人
만약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면 증상만이 제거되지 않아 문득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생겨난다. 선성비구는 <유마경>을 강의했지만 증상만이 있어 인상과 아상을 제거하지 못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고, 운광 법사는 강의를 할 때 하늘에서 꽃이 어지러이 떨어졌지만 탐심과 진심을 고치지 못해 연못가의 소로 태어났다. 만약 부처님을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고자 할진대 모름지기 생각이 다 공적해야 한다. 세간은 환화이며 일체는 객진이다. 오직 태허공의 체만 있으니 그 자리에는 형색과 소리를 두지 못하며 털끝만큼의 먼지도 세우지 못한다. 마치 허공과 같으니 이런 사람을 일컬어 일을 완전히 다해 마친 청정하고 안락한 도인이라고 한다.
要見清淨安樂道人麼 不掛一縷絲 頭頭
自相遇。
청정하고 안락한 도인을 보고자 하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고, 모든 것에서 저절로 서로 만난다.
「 赤膊條條不掛絲
同行同坐阿誰知
只認張三并李四
不識你是甚家兒」
】
붉은 몸 위 어디에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으니
같이 걷고 같이 앉아도 누가 알겠는가.
다만 장씨가 셋 이씨가 넷이라는 것을 알 뿐
그대가 뉘 집 아이인지 아무도 모른다.
-------ㅇ
「菩提薩埵。」
【菩提薩埵者西天梵語也東土翻為人空法空。
大顛有云了得人空名曰菩提了得法空名曰薩
埵人法俱空名曰玅覺 若四果小乘著相脩行
精進苦行及至脩無漏斷塵沙惑果行圓滿得四
果阿羅漢如獐獨跳神通狹劣墮在聲聞辟支佛
果不能接物利生
‘보리살타’는 인도말이며, 중국에서는 ‘인공’ ‘법공’이라 번역한다.
대전 조사는 “아견이 공함을 깨닫는 것을 보리라 하며, 법견이 공함을 깨닫는 것을 살타라 한다. 아견과 법견이 함께 공해진 것을 묘각이라 한다.”고 하였다.
아라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 4과의 소승들은 상에 집착하여 수행하고, 정진하고 고행하며, 무루지를 닦아 티끌과 모래알처럼 많은 번뇌를 끊어 과행이 원만해지면 제4과인 아라한을 얻는다고 한다. 이는 마치 노루가 홀로 뛰노는 것과 같아 신통이 크지 않고 수승하지 않아, 성문.벽지불에 떨어져 중생을 만나도 그다지 이롭게 하지 못한다.
若不見性不得到圓頓之位須
是見性若見性巳反掌之間轉凡成聖自然機緣
悟佛三昧知大道根源惟無師智自然智多種種
方便度諸迷悟同登彼岸更不受生教外別傳不
勞寸刃入圓頓無礙法門
만일 견성하지 못하면 원돈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한다. 원돈의 지위에 들어가고자 하면 견성해야 하며, 견성하고 나면 손바닥을 뒤집는 사이에 범부를 돌이켜 성인이 된다. 근기와 인연을 부처님의 삼매로 깨달아 대도의 근원을 알며, 오직 ‘스승이 없이 혼자서 얻은 지혜(無師智)’인 ‘자연지’만 있게 된다. 여러 가지 방편으로 모든 미오迷悟들을 모두 제도하여 함께 피안에 올라 다시는 생을 받지 않는다. 교밖에 따로 전하여 한치의 칼날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바로 원돈의 걸림 없는 법문에 들어간다.
且道如何是無礙法門 緬平一等七通八達。
다시 말해 보아라! 어떠한 것이 무애한 법문인가?
멀고 평평하고 동일하여 사방팔방으로 통한다.
「 眾水相合不分清
眾火相聚一同明
果必到家無異路
坦然大道一般平」
】
많은 물이 서로 합해지니 어느 것이 더 맑은지 가릴 수 없고
많은 불이 서로 모여 있으니 똑같이 밝을 뿐이다.
결국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갈 뿐 다른 길이 없으니
평평한 대도는 모두가 동일하게 평평하다.
-------ㅇ
「依般若波羅蜜多故。」
【此中間六箇字依前涅槃解說脩行得大智慧既
有智慧必登彼岸而復太虗最尊最勝悟性般若
天上天下無有及之 道云一日有為不如一時
無為 又云一年學教不如一日脩道 古德云
千日學慧不如一日學般若
이 가운데 여섯 글자 ‘반야바라밀다’는 앞의 갖가지 해설을 의지해 수행하면 큰 지혜를 얻을 것이다. 원래 지혜가 있으므로 반드시 피안에 올라 태허로 돌아간다. 이 지혜는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하며, 성품을 깨달은 지혜로서 천상이나 천하에 이것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도가에서는 “하루 동안 함이 있음이 잠깐 동안 함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고, 고덕은 “천일동안 지혜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반야를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大顛云般若通透
大光明藏如人入海轉入轉深開佛知見悟佛知
見有大神通變化多般方便應現種種相隨機利
物不落第二一體同觀平等真法界無眾生可度
亦無佛可做
대전 조사는 “반야를 통찰해 보니 대광명이 숨겨져 있다. 마치 사람이 바다에 들어갈 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것처럼, 부처님의 지견을 열고 부처님의 지견을 깨달음에 큰 신통과 변화, 수많은 방편이 있으므로 갖가지 모양을 나투어 근기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한다. 그래서 제2견에 떨어지지 않고, 일체를 똑같이 관하여 평등하고 진실한 법계이니 중생을 제도할 것도 없고 또한 부처를 이룰 것이 없다.”고 하였다.
理會得麼 水流異派 到海同
源 呵呵 只怕漫散了收拾不來 破鏡不重
照落華難上枝。
알았는가?
물이 여러 갈래로 달리 흐르지만 바다에 이르면 같은 근원이다.
하하하!
다만 어지러이 흩어져 결국에 수습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울 뿐이다. 깨진 거울은 다시 비추지 못하고, 떨어진 꽃잎은 나뭇가지에 다시 붙이지 못한다.
「 了得般若波羅蜜
調和種性皆歸一
默然參透一何歸
半夜虗空如白日」
】
반야바라밀을 요달하면
숨어 있는 본성을 조화하여 다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묵묵히 참구하여 꿰뚫어 보라.
한밤중에 허공이 대낮과 같이 밝으리라.
-------ㅇ
「心無罣礙。」
【依此般若波羅蜜多脩行即得心無罣礙即悟真
如妙理廓徹太虗清淨本然常得自在 仙師云
心若太虗不染一物 釋云心同虗空法示等虗
空法證得虗空時無是無非法 既然與虗空混
為一體有何差別是與不是外清淨內清淨內外
清淨外空內空當體即空未有天地先有此空。
太上云有物混成先天地生 又云無名天地之
始有名萬物之母 視之不見聽之不聞摶之不
得迎之不見其首隨之不見其後五目不覩其蹤
二聽絕聞其響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마음에 걸림이 없어서 바로 진여의 묘한 도리를 깨닫는다. 마음이 탁 트여 태허에 통하며, 그대로 청정본연의 상태여서 항상 자재함을 얻는다. 선사仙師는 “마음은 태허와 같아 한 물건도 물들이지 못한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마음은 허공계와 같아서 허공과 같은 법을 보인다. 허공을 증득할 때 옳은 법도 없고 옳지 않은 법도 없다.”고 하였다. 이미 허공과 혼연일체가 되었는데 여기에 무슨 옳고 옳지 않다고 하는 차별이 있겠는가?
안팎이 다 청정할 뿐 아니라, 안이 공하고 밖이 공하니 당체가 곧 공한 것이다. 하늘과 땅이 있기 이전에 먼저 이 공이 있었는데, 태상은 “혼돈상태에 있다가 천지에 앞서서 생긴 물物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이름이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요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고 하였다. 태시와 태초는 보려고 해도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해도 듣지 못한다. 붙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고, 맞아들이려고 해도 그 첫머리를 볼 수 없고, 따라가 그 뒤를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다. 눈이 다섯이어도 그 자취를 볼 수가 없고, 두 귀로 들어도 그 메아리조차 들을 수가 없다.
川老云堂堂大道赫赫分明人
人本具箇箇圓成只因差一念現出萬般形 六
祖云我有一物上拄天下拄地無人識得若親見
一面超過佛祖出三界不墮輪迴為人自肯自信
自能保養得無碍法決定無礙
야보도천 스님은 “당당한 대도는 대단히 밝고 분명하여 사람마다 본래 구족해 있고 각자 원만히 이루어져 있다. 다만 한 생각 그르침으로 인해 만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였고, 육조 스님은 “나에게 한 물건이 있어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고 있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몸소 직접 한 번 보게 되면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고 삼계를 벗어나 윤회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수긍하고 스스로 믿어 스스로 보호하면 걸림이 없는 법을 얻어 결정코 방해됨이 없을 것이다.
理會麼 扯破幔天網 去了當頭召。
알았는가?
하늘을 덮은 그물을 찢어 제거해 버리니 바로 앞에서 부른다.
「 虗空難著物
有甚罣與礙
打破沐桶底
便見觀自在」
】
허공에는 물건을 두기 어려운데
무슨 걸리는 것이 있겠는가?
새까맣게 어두운 칠통 속을 타파하니
곧바로 보는 것이 관자재이다.
-------ㅇ
「無罣礙。」
【想念不斷謂之罣著境不回謂之礙重說無罣礙
者內外清淨諸緣脫洒也如麗天杲日光滿大千
無所不照一切虗妄境界總無罣礙東去無窮西
去無極縱橫自在幻境不能所拘本源自性天真
長劫不壞之體無去無來無變無異
생각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걸린다(罣)’고 하며, 경계에 집착하여 돌이키지 못하는 것을 ‘장애(碍)’라고 한다. 두 번씩이나 ‘걸림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안과 밖이 청정하고 모든 반연이 벗겨져 깨끗해진 것을 말한다. 마치 저 하늘의 밝은 태양빛이 대천세계에 가득 차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일체의 허망한 경계에 전혀 장애됨이 없다. 동쪽으로 가도 다함이 없고, 서쪽으로 가도 다함이 없으며, 종횡으로 자유자재하고, 허깨비 같은 경계에 구속됨이 없다. 본원 자성은 천진하여 무수한 세월을 지내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체體이며 감도 없고 옴도 없고 변함도 없고 달라짐도 없다.
要見長劫不壞之體麼 霧散晹初見 塵盡鏡自明。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체를 보고자 하는가?
안개가 벗겨지면 비로소 해가 보이고, 티끌이 없어지면 거울이 저절로 밝아진다.
「 本來空沒礙
著相自家迷
若人回得轉
僊佛一般齊」
】
본래 공하여 걸릴 것이 없으나
모양에 집착하여 스스로 미한 것이다.
만약 사람이 돌이켜 바꾼다면
부처와 같아질 것이다.
-------ㅇ
「故。」
【故之一字圓滿極則亦是真常之理不可言說因
說不得故曰故 金剛經云無法可說是名說法
儒云道本無言言生理喪 仙師云道難說須當自悟
‘고故’라는 한 글자는 원만하고도 지극한 법칙이며, 또한 참되고 항상한 이치이므로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고’라고 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법을 가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이 설법이다.”라고 하였다. 유가에서는 “도는 본래 말이 없다. 말로 하게 되면 이치가 사라진다.”고 하였고, 선사仙師는 “도는 말로써 설명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且道如何得悟 咦 一撞金鐘響驚醒夢中人。
자, 말해 보아라! 어떻게 깨닫는가?
에잇!
한 번 금종을 치니 그 메아리가 꿈꾸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해 깨운다.
「 真常圓滿極則故
到處周圓難染活
應變隨機有萬千
坦蕩逍遙常獨步」
】
참되고 영원하고 원만하고 한께가 없는 법칙이므로
가는 곳마다 두루 원만하여 물들이기 어렵다.
근기에 따라 천만 가지로 변화에 응하나
평안하고 느긋하게 소요하면서 항상 홀로 거닌다.
-------ㅇ
「無有恐怖。」
【既心無罣礙真常自然圓滿更有甚麼恐怖之心
若到此地悟得性空東西不辨南北不分不被明
暗所瞞不被坊隅所當不被陰陽所拘不被造化
所役似此有甚憂苦可怕有甚生死可怖
이미 마음에 걸림이 없어 참되고 영원하고 부족함이 없이 저절로 여여한데 새삼스럽게 무슨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성품자리가 공한 것을 깨달으면 동서를 분별할 수 없고 남북을 나눌 수도 없으며 밝고 어두운 것에 속지 않는다. 방우에 맞닥뜨리지 않고, 음양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조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은데 무슨 근심과 고통을 두려워하며, 어찌 생사를 두려워하겠는가?
不與萬法為伴當自獨行獨步上天仰之無窮入地去之
無極山河石壁地水火風於此往來總無罣礙側
掌行千里回程轉似飛天地莫能拘鬼神莫能測
喚作自在大覺金仙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고, 맞닥뜨려 스스로 홀로 가고 홀로 걷는다. 하늘에 올라 우러러보아도 다함이 없고, 땅으로 들어가 본다 해도 다함이 없다. 산과 강, 석벽, 지수화풍이 여기에 오고 가지만 모두 걸림이 없다. 손바닥을 기울이는 사이에 천 리를 가고, 발을 한 번 돌이키는 것이 마치 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구속하지 못하고, 귀신도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이를 자유자재한 대각금선이라 한다.
要見自在金仙麼 不須覓火把燈尋 渴飲饑飡常對面。
자유자재한 대각금선을 보고자 하는가?
등불을 잡고 불을 찾으려 하지 말라. 목마르면 마시고 주리면 밥을 먹으며 항상 마주 보고 있다.
「 去來自在任優游
也無恐怖也無愁
幻化境中留不住
獨行獨步是瀛洲」
】
가고 옴에 자유자재하며 여유롭게 노니니
공포도 없고 근심도 없다.
꿈 같은 경계 속에 살고 있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홀로 가고 홀로 걸으니 이곳이 영주로다.
-------ㅇ
「遠離顛倒夢想。」
【若罣礙無恐怖絕自然遠離顛倒夢想 仙師云
日間無想念夜後少夢寐 釋云夢因想生想因
念起世人只知合眼有夢不識開眼也有夢如何
是開眼有夢先師有云假饒金銀過北斗大限來
時一夢中豈不是開眼也做夢若要夢覺直待無
常方省生前所作所為所愛所貪一切萬緣盡是
一場春夢只是自巳一身也顧官不得到此省時
晚矣若是有智之人忽然自省自覺無常到來此
貪欲愛樂盡是輪迴之種地獄之因遠離顛倒悟
本性空即知此自必無
만일 걸림이 없고 공포가 끊어지면 자연히 전도몽상을 멀리 여읠 것이다. 선사는 “낮에 상념이 없으면 밤에 꿈이 적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꿈은 생각(想)으로 인해 생기고, 생각은 기억함(念)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있을 때만 꿈이 있는 줄을 알지, 눈을 뜨고 있을 때도 꿈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떤 것이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인가? 선사는 “설사 금은보배가 북두칠성보다 높이 쌓여 있더라도 수명이 다할 때는 하나의 꿈속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이것이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꿈에서 깨어나려면 무상함을 기다려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생전에 지은 바 행위와 애착, 탐냄 등 일체의 모든 인연이 일장춘몽이며 다만 자기 한 몸뿐임을 깨닫는다. 관직을 돌아다보아도 여기에 이르지 못하며, 깨달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버린다.
만약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문득 무상함을 스스로 깨닫고, 탐욕과 애락은 윤회의 종자이자 지옥의 원인임을 알고 전도됨을 멀리 여의며, 성품이 본래 공한 것임을 깨달아 이 몸 자체가 필경에는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古云聖人無巳無固無
必無我無依無倚無晦無明無名無相無強無弱
無穢無淨無止無作無任無滅無默無言絕思絕
慮一切語言道斷心行處滅 太上曰實無所得
為化眾生 釋云道妙幽微不可得見
옛사람도 “성인은 마친다는 것도 없고, 고정된 것도 없고, 필연적이라는 것도 없으며, 나라고 하는 것도 없고, 의지하거나 기대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 어두운 것도 밝은 것도 없고, 이름이나 모양도 없고, 강함도 약함도 없다.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고, 행동하고 그치고 유지하고 없어지는 것도 없고, 묵묵한 것도 말하는 것도 없다. 그것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며 일체 언어가 끊어지고 마음이 일어나는 것마저 없어진 자리”라고 하였다. 태상은 “실제로는 얻는 바가 없으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라고 하였고, 불가에서 “도는 미묘하고 그윽하여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大顛云死了燒了無饑無渴無寒無熱無起無倒無坐無
眠無六根無九竅無四百四病無八萬四千蟲永
無顛倒夢想若不如是悟去清淨界中纔一念閻
浮早通八千年會得剎那間不會塵沙劫死死生
生展轉不覺睡長夢而不醒萬劫顛倒而無止顛
顛倒倒死了又生生了又死夢醒又夢睡覺又睡
迷中更迷終無了期若有人打得徹透得過永免
顛倒夢幻頓脫
대전 조사는 “죽이고 태워 버리면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다. 추위도 더위도 없으며, 일어남도 넘어짐도 없다. 앉음도 누워 잠을 자는 것도 없으며, 육근도 아홉 구멍도 없다. 사백사병도 팔만 사천의 벌레도 없으며, 꿈처럼 전도된 생각도 영원히 없다. 만일 이와 같이 깨닫지 못하여 청정법계 가운데 자칫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면 염부제에서는 벌써 팔천 년이란 세월을 지내게 된다. 이것을 알면 잠깐 동안이지만, 모르면 모래알같이 오랜 세월이다. 세세생생토록 죽고 또 태어나기를 반복하며 잠시도 머물지 않겠지만 깨닫지 못하면, 오랜 꿈을 꾸면서도 깨어나지 못해 오랜 세월 한량없이 전도되어 끝날 날이 없다. 전도되고 또 전도되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태어났다 또 죽고, 꿈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꿈꾸고,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자며, 미혹한 가운데 다시 미혹하여 마침내 끝마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바닥까지 철저하게 사무쳐서 통과하면 전도됨을 영원히 벗어나 꿈이나 허깨비를 단박에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且道頓脫了向甚處去 脫籠俊鷂撲天飛 一任諸人近不得。
자, 말해 보아라! 바로 벗어나 어느 곳을 향해 갔는가?
세상을 벗어난 새매가 하늘을 박차고 날아오르면 다음은 모든 사람에게 맡겨 두고 가까이하지 않는다.
「 日間無想夜無夢
不被顛倒境物弄
一拳打破上頭關
飜身直上朝元洞」
】
낮에 생각이 없으므로 밤에는 꿈도 없다.
전도된 경계에 희롱당하지 않고
한 주먹에 상두관을 깨니
몸을 뒤집어 바로 조원동에 오른다.
-------ㅇ
「究竟涅槃。」
【究者反自窮究巳身盡是虗假一日無常盡皆敗
壞難以留戀如是究竟則何矣本來無此四大因
世人皆執有身迷巳逐物棄親向疎認賊為子妄
將四大六根為實作種種業受種種苦輪迴萬劫
不覺不知不能解脫
‘구究’는 자기를 돌이키는 것이다. 자기 몸을 궁구해 보면 다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 하루하루가 모두 무상해서 무너져 버리는데 그 무너짐을 지연시키거나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마치면(究竟) 어찌하겠는가.
본래 이 사대란 없는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몸이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경계(物)를 따라간다. 친근하게 해야 할 것은 버리고 멀리해야 할 것을 향하며, 도둑을 아들이라 여기고 허망한 사대 육근을 진실이라 여겨 갖가지 업을 지어 갖가지 고통을 받으며, 만겁토록 윤회하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해 해탈을 못한다.
默然自省於此日夜不離當
念自覺自照細細參究此六根五蘊從塵劫巳來
本自無有名相皆不可得亦無成僊成佛亦無六
道四生種種皆不可得
침묵하며 스스로 살피고, 밤낮으로 이 한 생각을 여의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비추며 세밀하게 참구해 보라. 이 육근과 오온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본래 없었으며, 이름과 모양도 없었으며, 또한 신선을 이룬다거나 부처를 이룬다는 것도 없었으며, 나아가 육도와 사생도 없고 가지가지가 다 없다.
老者盡也到這裡一槩平
等盡底掀翻萬緣頓息餘外無餘 川老云如斬
一握絲一斬一齊斷 又云一拳打破化城關一
脚趯翻玄妙塞南北東西任往來休覓大悲觀自在
‘경竟(老)’은 다한다는 뜻이니, 여기에 이르면 모두 평등하다. 바닥까지 다 뒤집어엎으니 만 가지 인연이 곧바로 쉬어지고 안과 밖이 다름이 없다. 야보도천 스님은 “한 타래의 실을 자르는 것과 같아서 한 번 자르면 한꺼번에 끊어진다.”고 하였고, 또 “한 주먹으로 화성의 관문을 타파하고, 한 다리로 현묘한 요새를 쓰러뜨려 동서남북 사방을 마음대로 가고 오니, 대자대비 관자재보살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하였다.
大顛云離四句絕百非知見無見斯到涅槃
且涅槃無生非死也乃是寂滅無生無死之謂
也 太上云湛然常寂 佛經云生滅滅巳寂滅
為樂寂者寂然不動滅者諸法不生實無生死也
대전 조사는 “사구를 떠나고 백비百非를 끊어, 보되 보는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열반에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열반은 태어남도 없고 죽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적멸이니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을 말한다. 태상은 “담연상적湛然常寂”이라 하였고, <대반열반경>에서는 “생멸이 없어지니 적멸의 즐거움만 있다.”고 하였다. ‘적寂’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멸滅’은 모든 법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말하니 실로 생사가 없는 것을 적멸이라 한다.
且道無生無死底怎生模樣 咄 莫聽聲不是相 識得虗空還一樣。
자, 말해 보아라!
생겨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데 어떻게 모양이 생기겠는가.
돌!
소리를 듣는 것도 모양 아닌 것이 없다. 허공이 바로 이와 같음을 알라.
「 究竟自身元不有
便須放下莫愚痴
涅槃路上無朋伴
大道無人我是誰」
】
필경에는 자기의 몸이 본래 없으니
문득 놓아 버리면 우치함도 없다.
열반의 길에는 벗이 없고
대도에는 사람도 없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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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諸佛。」
【大顛云過去莊嚴劫一千佛未來星宿刼一千佛
現在賢劫一千佛三世三千佛更有窮劫佛不可
說不可說數量不可盡此諸佛皆從脩證所得。
川老云種瓜得瓜種菓得菓 又云一佛二佛千
萬佛各各眼橫兼鼻直昔年曾種善根來今日依
前得渠力 道經云種蘭得香種粟得粮為善降
祥作惡降殃
대전 조사는 “과거 장엄겁의 일천 불과 미래 성수겁의 일천 불과 현재 현겁의 일천 불을 합해 삼세三世 3천 불이 계시고, 그리고 궁겁의 부처님이 계시는데 불가설 불가설수여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모든 부처님들은 다 닦아서 증득한 것이다.
야보도천 스님은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열리고 과일을 심으면 과일이 열린다.”고 하였다.
또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천만 부처님이 각기 눈은 가로로 놓여 있고 코는 직각으로 뻗어 있다. 지난 날 일찍이 선근을 심었더니, 오늘에야 지난날을 의지해 부처의 힘을 얻었구나.”하였다. 또 <도경>에서는 “난초를 심으면 향기를 얻고 벼를 심으면 양식을 얻는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이 내리고 악행을 하면 재앙이 내린다.”고 하였다.
且三世諸佛不脩不得成人身中
亦有如此諸佛變化不一因習氣所昧境物所障
自家迷了却不認得若於心無心便是過去佛寂
然不動便是未來佛應物不昧隨機又便是現在
佛清淨無染便是離垢佛出入無礙便是神通佛
到處優游便是自在佛一心不昧便是光明佛道
念堅固便是不壞佛各各諸佛自身俱有說亦不
能盡變化多般惟一真耳
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닦지도 않으며 이루지도 않는다. 사람 몸 가운데 또한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이 계시며 신통변화가 하나가 아니다. 익혀 온 습기로 인해 어둡게 되었고, 모든 경계에 장애를 받으며 스스로 미하여졌지만 도리어 알지 못한다.
마음이 무심한 것이 곧 과거불이고, 적연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 미래불이며, 상대편을 대할 때 어둡지 않고 근기를 따르는 것이 곧 현재불이다. 청정하여 물들지 않는 것이 이구불이고, 출입에 걸림이 없는 것이 신통불이며, 가는 곳마다 자유자재한 것이 자재불이다. 한 마음이 어둡지 않은 것이 광명불이고, 도에 대해 생각이 견고한 것이 불괴불이다. 각각의 모든 부처님을 자기의 본질에 갖추고 있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그래서 신통변화가 다양하나 오직 하나의 진신일 뿐이다.
但去靜坐觀過去現在
未來皆同一體如虗空不異相不自相不他相非
無相非取相不此岸不彼岸不中流觀其寂滅永
不斷滅若人於此頓悟直下承當迢迢空劫盡在
如今放光動地人法俱忘不見有過去未來現在
究竟到盡無盡地即是空空我無我我我尚不可
得空色亦無三世自空非識不滅識性自空前際
後際中際亦空不落空見
다만 고요히 앉아서 관해 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 하나의 체로서 마치 허공과 같다. 다른 모양도 아니고 자기의 모양도 아니며 다른 이의 모양도 아니다.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이 언덕도 아니고 저 언덕도 아니며, 중간의 흐름도 아니다. 몸을 고요히 하여 적멸해진다고 끊어지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영원히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곧 깨달아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면 까마득히 멀고 먼 옛적도 모두 지금 그 자리에서 광명을 놓고 땅을 움직인다. 사람과 법을 둘 다 잊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필경에는 다하되 다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니 이것이 곧 공공空空이다. ‘나(我)’라는 것은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나이니, ‘나’라는 것도 얻을 수 없으며 공과 색 또한 없다. 삼세가 저절로 공하니 이는 식이 멸한 것이 아니며 식의 성품이 스스로 공한 것이다. 전제와 후제, 중제 또한 공하니 공이라는 견해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要見三世諸佛麼
咄 沿河休害渴 把餅莫言饑。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보고자 하는가?
돌!
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목마르다 말하지 말고, 떡을 가지고 있으면서 배고프다고 말하지 말라.
「 過去未來并現在
近在人身人自昧
千變萬化少人知
混合虗空成一塊」
】
과거, 미래, 현재가 다
우리들 곁에 있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어두워
천변만화가 허공과 혼합되어
한 덩어리인 줄 거의 알지 못한다.
-------ㅇ
「依般若波羅蜜多故。」
【脩行人須要智慧百種方便去無始劫來習性調
和成一真之性而登彼岸若不見性卒難成就此
句是三世諸佛之母十方諸佛依此脩行果行圓
滿成等正覺若離此句修行雖經多劫久守勤苦
望成大道者鮮矣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지혜를 추구해야 하니 백 가지 방편으로 무시겁 이래의 습성을 제거하고 대립이나 어긋남이 없이 하나의 진실된 성품을 이루어 피안에 올라가야 한다. 이는 견성하지 못하면 성취하기 어렵다.
이 글귀는 삼세 모든 부처님의 모체이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의지해 수행하여 과행이 원만해져 등정각을 이루셨다. 만약 이 글귀를 등지고 수행하게 되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부지런히 공부한다 해도 대도를 성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屬小乘法墮在聲聞緣覺辟支
佛鬼仙人僊地仙有為之法終不成就一切聖果
須當精進存有能所依般若波羅蜜多法得無上
正真之道唯此一事若別脩行過此法者無有是
處此是教外別傳此法親見自性方乃傳授千聖
不傳自悟自信不容授記
이 글귀를 근본으로 삼지 않으면 소승법에 속해 있어 성문. 연각. 벽지불. 귀선. 인선. 지선에 떨어지게 된다. 유위법은 결국 모든 성인이 얻으신 결과르르 성취하지 못한다. 그것은 정진함에 있어서 틀림없이 주관과 객관을 두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다법을 의지하여야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얻을 수 있으니, 오직 이 한 가지가 가장 수승하다고 한 것이다. 이 밖에 따로 수행할 것이 있다든가, 이 법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교법 밖에 따로 전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 법으로 몸소 자성을 보아야만 비로소 전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천 분의 성인도 전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믿어야 하며 수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圓頓之位獨孤標法參
善知識求問至人憑師指示有緣契悟圓頓教沒
人情若有私心傳授是外道法
원돈의 지위는 홀로 법을 드러내니, 선지식을 참예하고 높은 경지에 다다른 사람(至人)에게 묻고 스승의 가르침에 의거하는 인연이 있어야 깨달음에 계합한다. 원돈의 가르침은 인정이 없으니, 만약 사심을 가지고 전수한다면 그것은 외도의 가르침이다.
有分咐有傳授有
得即有失有教有授盡是外道邪見生死根本。
仙師云法有三千六百門修行路徑此為真須知
有箇玄微處不在三千六百門
나누어 주는 것이 있고 전수해 주는 것이 있으며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고 가르침이 있고 전수받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 외도의 사견이며 생사의 근본이다. 선사는 “법에는 삼천육백 가지의 문이 있는데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진실이라 여기기도 한다. 현묘하고 미묘한 것은 있으나 삼천육백 가지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仙佛祖師自修自證本無語句亦無一法與人若有一法授記不
名釋迦不喚道人道本無言只是教人自脩自悟
說著不真除非自見見無可見若被人教壞急須吐去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은 스스로 닦아 증득하였으며, 본래 말이 없고 또한 한 법도 사람들에게 전해 줌이 없다. 만약 한 법이라도 수기해 준 것이 있다면 석가모니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고, 도인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는 본래 말이 없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닦고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하여 말한 것이지 말 자체가 참은 아니다. 누구나 스스로 본 것이 아닌 것을 제거해 버리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만약 사람의 가르침 때문에 병들었다면 급히 서둘러 토해 내야 한다.
大凡為人須從自巳流出無價寶珠用之無
盡上根之人一聞千悟具大總持中下之機多聞
多不信 太上云上士聞道勤而行之中士聞道
若存若亡下士聞道大笑之此乃難信之法希有
之事
사람을 위하고자 하면 자기로부터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구슬(無價寶珠)을 꺼내야 하니, 그렇게 되면 무진장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상근기의 사람은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를 갖추지만, 중.하 근기의 사람은 많이 들어도 많이 불신한다. 태상은 “상근기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중근기는 도를 들으면 기억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며, 하근기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어 버린다.”고 하였다. 이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진실이며, 세상에 드문 일이다.
理會麼 世人只知隨影轉不知離影到
家鄉 嗄。
알았는가?
세상 사람들은 다만 그림자를 따라 유전하는 것만 알 뿐, 그림자를 떠나 고향에 이르는 것은 알지 못한다.
애-!
「 脫落衣裳見本形
寸絲不掛得安寧
若人要趓渾身影
便向無陰樹下行」
】
옷을 벗음에 본래의 형상을 보았으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음으로 편안함을 얻었다.
만약 사람이 온몸의 그림자를 던지고자 하거든
곧바로 그림자가 없는 나무 아래로 가라.
-------ㅇ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此是西天梵語也阿言無耨多羅言上三藐言正
三菩提言真東土翻為正真 又云成等正覺此
四箇字須是親見 古云見道方脩道不見復何
脩 一大藏經說此四字不能盡諸佛亦說不盡
三教聖賢皆脩此四箇字盡歸聖道成等正覺今
人若能依此般若波羅蜜多三藐三菩提法脩行
廓然頓悟親見無上正真自知當來仙佛直超聖果
이것은 인도말이다. ‘아阿’는 무無라는 의미이고, ‘욕다라耨多羅’는 높은 것(上)이라는 의미이며, ‘삼먁三藐’은 정正이라는 의미이고, ‘삼보리三菩提’는 진眞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바르고 진실됨’이라 번역하였고, 또 ‘등정각을 이룸’이라 번역하였으니, 이 네 글자(無上正眞)를 새롭게 보아야 한다. 옛사람은 “도를 보고 난 후에 비로소 도를 닦아야 한다. 도를 보지 못했는데 무엇을 닦겠는가!” 하였다.
무한 광대한 대장경 속에서도 이 네 글자를 다 설하지 못하였고, 모든 부처님도 또한 다 설하지 못하셨으며, 삼교의 성현도 모두 이 네 글자를 닦아 성인의 도에 들어 등정각을 이룬다. 지금 곧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다 삼먁삼보리법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확연히 단박에 깨달아 무상정진無上正眞을 새롭게 보아, 스스로 미래의 부처이을 알아 성인의 단계를 바로 초월할 것이다.
要見無上正真麼 頭頭顯露 物物周圓。
무상정진을 보고자 하는가?
존재 하나하나에 모두 나타나고 모든 존재에 두루 완전하다.
「 妙道虗空是祖宗
分明應化不相同
若人悟得真常道
便識從前舊主公」
】
묘도와 허공은 조사가 전한 종지로
부처님의 몸 나투어 보이심이 서로 같지 않다.
만약 사람이 참되고 영원한 도를 깨달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옛 참모습을 만나리라.
-------ㅇ
「故知般若波羅蜜多。」
【因脩行得見無上正真之道知般若波羅蜜多之
神力也且過去諸佛慈悲憐憫眾生百種智慧方
便之力隨之利物接引後來設像化人使泥塑木
雕黃卷赤軸說因說果但以假名引導有情將善
惡報應之事天堂地獄之說使人改惡向善離假
歸真聲聞緣覺十聖三賢諸佛地位次第接引。
僊師云千里程途逐步而進 釋云千仞寶臺非一圾而上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무상정진의 도를 보고, 반야바라밀다의 위신력을 안다. 또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자비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백 가지 지혜방편을 써서 근기에 따라 대상을 이롭게 하고, 나중에 오는 이들을 인도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진흙을 이기거나 나무를 조각하여, 또는 종이로 엮어서 만든 경전 속에서 원인을 설하고 결과를 설하는 것은 단지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마음 때문이다. 선악, 과보의 실제와 천당, 지옥의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것을 고쳐 좋은 방향으로 가게하며, 거짓을 버리고 진실한 것으로 돌아가게 해, 성문, 연각, 십성,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삼현, 제불의 지위를 차례대로 이끌어 인도해 주기 위한 것이다. 선사는 “천 리 길도 한 걸음으로부터 나아간다.”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천 길이나 되는 보배 집에 하나도 위태롭지 않게 올라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 하였다.
忽然自悟自見本性超過諸佛位次
一超直入如來地若不見性向外馳求終不成就
悟有年月有日有時 古云學道先須有悟由
若無悟離文字外行住坐臥火急自救一同頓悟
道云千日學道悟在一時只這一時便得輕快
諸上善人同歸一處
홀연히 스스로 깨닫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모든 부처님의 지위에 오르는 차례를 건너 뛰어, 한 번에 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 만약 견성하지 못하고 밖을 향해 치달리면서 구한다면 결국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니, 깨달음에 무슨 연월이 있고 날짜가 있으며 때가 있겠는가. 옛사람은 “도를 배우려거든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깨닫지 못했다면 문자를 떠나서 걷고 머물고 않고 누울 때 내 집에 난 불을 끄는 것처럼 화급히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 단박에 깨달을 것이다. 도가에서는 “천일 동안 도를 배우지만 깨달음은 찰나에 있으며, 바로 그때 문득 경쾌해져 가장 뛰어난 어진 이와 함께 한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若是學解就古人唾津盡是
外道邪見生死各路隨業受報不可共語豈不聞
須菩提塵點劫前脩行直至釋迦會下解空第一
方等會中金剛請問四句偈廓然頓悟涕泪哭泣
自歎云前所得慧眼未聞此經
만약 배워서 안다면 이것은 옛사람들이 뱉어 놓은 침에 나아가는 것으로 모두 외도의 사견이다. 생사의 길이 각각 다르고 업에 따라 과보를 받기 때문에, 서로 말을 나눌 수 없게 된다.
어찌 듣지 못했는가? 수보리는 티끌 수처럼 많은, 오랜 겁 이전부터 수행하였지만 석가모니 부처님 회상에 이르러서 공을 가장 잘 아는 제자(解空第一)가 디었다. 방등회 가운데 <금강경>에서는 수보리가 주로 질문하였는데 사구게를 듣고 확연히 깨달았다. 깨닫고 나서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전에 얻은 혜안으로는 일찍이 이 경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스스로 탄식하였다.
三世諸佛皆從此經流出 如何是此經 看時無一字 當處放光明。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 이 경에서 나오셨다고 했는데, 이 경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볼 때는 한 글자도 없지만 가는 곳마다 항상 광명을 놓는다.
「 不憑智慧渡深河
萬劫沉淪溺浪波
既登彼岸歸真道
何須更念薩婆訶」
】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깊은 강을 건너면
만겁 동안 잠겨 파도에 휩쓸려 다니게 된다.
이미 저편 언덕에 올라 진실한 도에 돌아갔는데
어찌 다시 사바하를 생각하는가.
-------ㅇ
「是大神呪。」
【若會波羅蜜多便見是大神呪此神咒人人俱有
不脩不見亦是眾生心地法門有大神通 道云
心有主宰萬邪難侵 儒云心正可以辟邪 度
人經云萬邪不干神明護門
만약 바라밀다를 안다면 이것은 곧 대신주를 본 것이다. 이 신주는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으나 닦지 않으면 보지 못한다. 이것은 중생의 심지법문이며, 이 법문을 얻으면 커다란 신통이 있게 된다. 도가에서는 “마음에 주재하는 것이 있으면 만 가지 삿된 것이 침입하기 어렵다.”고 하였고, 유가에서는 “마음을 바르게 해야 삿된 것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도인경>에서는 “만 가지 삿된 것이 간섭하지 않으며, 밝고 신령스러운 것이 문전을 호위한다.”고 하였다.
能驅邪立正變死人作活人改魔境為仙境頭頭示現物物全彰信
手拈來百無妨礙此大神呪舉心動念鬼神滅爽
返本還源外道魂驚精靈伏罔此蜜呪也
이 신주는 삿된 것을 몰아내고 바른 것을 세우며, 죽은 사람을 변화시켜 산 사람으로 깨우며, 마군의 경계를 고쳐 신선의 경계로 만든다. 존재 하나하나에 모두 나타나고 모든 존재가 확연히 밝게 드러난다. 믿음의 손으로 잡아옴에 그 어떤 것도 방해될 것이 없다. 이 대 신주는 마음을 들어 생각이 움직이면 구신이 없어져 상쾌해진다. 근본을 돌이켜 근원에 돌아가면 외도들이 놀라 혼비백산하고, 정령을 항복시켜 얽어맨다. 그래서 이것을 비밀한 주라고 한다.
識此呪麼 神通并妙用 何處不相隨。
이 신주를 알겠는가?
신통과 묘용이 어느 곳에선들 서로 따르지 않겠는가.
「 有大威神力
伏劍邪魔息
何處不相隨
同居人不識」
】
대위신력이 있어
삿된 마군이 자진하여 칼 위에 엎어져 버린다.
어느 곳에선들 서로 따르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ㅇ
「是大明呪。」
【既有大威神力一點靈光自然晃耀照徹十方射
透三界山河大地無有隔礙過於日月無處不照
呂祖云一點心燈焰焰生不勞挑剔朗然明得
來照破人間暗獨放寒光滿太清 雖然說破自
不了不明
원래 대위신력이 있어 한 점의 신령스런 빛으로 자연스럽게 밝게 빛나 시방 법계를 두루두루 환하게 비춰 삼계를 통과한다. 산하대지가 막히거나 걸림이 없고, 해와 달보다 뛰어나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여조는 “마음의 한 점 등불이 끊임없이 새차게 타오르니, 수고롭게 심지를 돋우거나 바르게 하지 않아도 환하게 밝다. 그것을 얻으면 인간의 어두운 것을 비추어 깨뜨리고, 홀로 찬 빛을 놓으니 빛이 하늘에 가득하다.”고 하였다. 비록 말하긴 하였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면 밝혀내지 못한다.
要明麼 拂却鏡上塵 便見本來面。
밝히고자 하는가? 거울 위의 먼지를 털어 내라. 그러면 곧 본래면목을 보리라.
「 燁燁光輝滿大千
愚人不見被情牽
若能放下渾無物
依舊心天性月圓」
】
번쩍 번쩍 빛나는 광명이 대천세계에 가득 차 있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보지 못하고 제 형편에 끌려 다닌다.
만약 놓아 버린다면 확실하게 한 물건도 없어서
마음이 본래와 다름이 없어 본 성품의 달이 둥글 것이다.
-------ㅇ
「是無上呪。」
【得見自巳光明照見從前黑暗無有能極者此神
呪最上無過於此是為第一一切諸法皆不出於
心呪是無上呪也 道云心是眾之王 釋云心
是法中王 所以無上也 只一件 王不動萬
姓自安心不亂諸邪不起
자기 광명을 친히 보아 깨달아서 종전의 어둠을 비추어 보니 더욱 분명해져 더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신주는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한 것으로 이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일체 모든 법이 다 이 심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이것을 위없는 주문이라고 한다.
도가에서 “마음은 모든 것의 왕이다.”라 하였고, 불가에서는 “마음이 법 가운데 왕이다.”라 하였기에 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한 번이라도 왕이 동요하지 않으면 만백성이 스스로 편안해지고,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며, 모든 삿된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理會麼。
알았는가?
「 心呪最無上
要去閑思想
人牛不見時
便是靈山長」
】
심주는 최상이라 더 이상 위가 없으니
부질없는 생각을 모두 버려라.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을 때
이때가 바로 영산의 어른이더라.
-------ㅇ
「是無等等呪。」
【此神呪無有等齊者不可說不可比無有邊際此
呪世間少時說著難信須是親見此呪
이 신주는 같은 것이 없어서 말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고, 또한 끝 간 데도 없다. 세간에 이 주문은 드물며, 말해 주어도 믿기 어려우니 반드시 이 주문을 몸소 보아야만 한다.
要見此呪麼 放開包裹太虗空 收來難立纖毫物。
이 주문을 보고자 하는가?
열어 놓으면 태허공을 싸안으며, 거둬들이면 털끝만 한 물건도 세우기 어렵다.
「 本來無等件
神性獨為尊
乾坤難覆載
萬古鎮常存」
】
본래 같은 것이 없으니
신묘한 성품만 홀로 높다.
하늘과 땅을 덮거나 싣기가 어려워
만고에 항상 오래오래 그대로 존재한다.
-------ㅇ
「能除一切苦。」
【若得見性有甚苦厄 佛意慈悲愍眾生墮在世
間流浪經劫受苦無窮不能返本是以應現種種
相出現於世設種種方便救度群迷同出火院
만약 견성을 했다면 무슨 고액이랄 것이 있겠는가? 부처님의 마음은 자비로우셔서 중생이 세간에 떨어져 무한한 세월을 유랑하면서 끝이 없는 고통을 받고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모양을 나투시어 세상에 출현하시며, 여러 방편을 시설해 일체의 미한 중생을 구해 내고 제도하여 불타는 집에서 함께 나오도록 한다.
若有智慧之人諦聽大道之言只究心地莫去旁求
初則打掃潔淨去累劫之習性 大顛云開池不
待月池成月自來 脩行人先要心地清淨自然
道生
만약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도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듣고 다만 마음자리만을 꿰뚫어 연구하라. 옆으로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처음부터 쓸고 닦아 정결하게 하면 오랜 겁 동안 쌓아 온 습성이 제거될 것이다. 대전 조사는 “달을 기다리지 말고 연못을 만들어라. 연못이 완성되면 달은 저절로 온다.”고 하였으니 수행인이 먼저 마음자리를 깨끗하게 하면 자연히 도가 생겨난다.
儒云以禮制心 釋云在於閑處收攝其
心 道云降心絕念三教聖人只教眾生心閒清
虗心若無染自然見性若得見性永免輪迴更不
受得不死不生之道且從上諸佛諸聖久受勤苦
方得見性心心念念處處逢源
유가에서는 “예로써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였고, 불가에서는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그 마음을 거두어 섭수하라.”고 하였다. 또 도가에서는 “마음을 항복받고 생각을 끊으라.”고 하였으니, 삼교의 성인은 다만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이 한가롭고 깨끗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만약 마음에 물듦이 없다면 자연히 견성할 것이며, 견성하면 영원히 생사윤회를 벗어나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 도를 얻을 것이다. 또한 위의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도 오랫동안 부지런히 수행한 끝에 비로소 견성을 하였으니, 마음과 마음, 생각과 생각, 곳곳에서 근원을 만나게 된다.
且道末後向甚
麼處去 不省處處迷歸路 悟來時時在本鄉。
자, 말해 보아라!
최후에 어느 곳을 향해 가겠는가?
살피지 못하면 처처에서 돌아가는 길이 어두워지나, 깨달으면 항상 본 고향에 있다.
「 仙佛出世為何因
皆因慈愍眾沉淪
若人肯到船頭上
免做拖泥帶水人」
】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 세상에 나오셨는가?
윤회 속에 빠져 있는 중생을 사랑하여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옳게 여겨 뱃머리에 도달하면
진흙물에 빠진 물 묻은 사람이 되는 것을 면하리라.
-------ㅇ
「真實不虗。」
【是真實法語非虗華之言一切諸佛說此神呪度
脫有情不是異語不是謙言 永嘉云證實相無
人法剎那滅却阿毗業 凡所有相皆是虗妄惟
此無相之相是真實之相大千俱壞此相不壞因
甚不壞 道有云有形終是假無相是真人 又
云百骸俱消散一物鎮長靈 道經云元始懸一
寶珠在空玄之中 佛經云我有無價寶珠繫在
衣裡日夜推究忽然見牟尼寶珠 又云牟尼珠
人不識如來藏裡親收得 然雖如是見道易守
道難
이것은 참으로 진실한 법의 말씀이며 허황되게 꾸민 말이 아니다.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이 신주를 설하시어 중생을 제도하셨다. 이것은 다른 말도 아니며, 겸손하게 하는 말도 아니다. 영가현각 스님은 “실상을 증득하고 나니 인(我)과 법이 없어져서 아비지옥의 업이 찰나 사이에 사라진다.”고 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모양은 다 허망하며, 오직 모양이 없는 모양만이 진실한 모양이다. 삼천대천세계가 다 무너져 없어져도 이 모양은 무너지지 않으니 어찌하여 그러한가?
도가에서는 “모양이 있는 것은 결국 거짓이며, 모양 없는 것이 진인이다.”라 하였고,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뼈는 스러져 흩어지나 한 물건만은 영원히 남아 신령스럽다.”고 하였다.
<도경>에서는 “처음에 한 보배 구슬을 달아 놓았는데, 그것은 텅 비어 현묘한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법화경>에서는 “나에게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보배 구슬이 있어 옷 속에 매달아 꿰매 두었는데 밤낮으로 찾다가 어느 날 홀연히 마니보주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마니보주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므로, 여래장 속에서 몸소 거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도를 보기는 쉽지만 도를 지키기는 어렵다.
要見此珠麼 圓陀陀 光爍爍 轉轆轆 活鱍鱍 常對曰 不可棺音斡援之。
이 구슬을 보고자 하는가?
둥글고 아름다우며 빛나고 빛난다. 수레바퀴가 구르듯 자유자재로 굴러가는데, 마치 고기가 활발하게 헤엄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항상 앞에 두고 있으나 “관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한다.
「 真實光明無價珠
人人分上沒差殊
只因些子誵訛處
雲起青天月色無」
】
진실한 광명이 나오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구슬은
사람 사람이 다 갖추고 있어서 없어지거나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단지 조금 그릇되고 잘못된 것 때문에
푸른 하늘에 구름이 인 것처럼 달빛이 가려졌을 뿐이다.
-------ㅇ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因脩行到此知般若神呪之功最大此句結前多
種方便總歸為一具大總持同歸一心之法 古
云應觀法界性一切惟心造 仙真云善惡存亡
總在心 大顛云迷者為含藏識死後作毒蛇悟
者為秘蜜神呪得無生法如來有密語迦葉不隱
藏語此神呪若人專心受持功行圓滿常持此咒
鬼神遠離諸天寂聽常懽喜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야 신주의 공이 가장 큼을 안다. 이 글귀는 앞의 여러 가지 방편을 매듭지어 모두 하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니, 대총지를 갖추어 함께 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법이다. 옛사람은 “법계의 성품을 관해 보라.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하였고, 선진은 “선과 악의 있고 없음이 모두 마음에 있다.”고 하였다. 대전 조사는 “깨닫지 못한 자는 함장식이라 하니 죽은 뒤에 독사가 된다. 깨달은 자는 비밀신주라 하니 태어남이 없는 법을 얻는다. 여래께서 비밀한 말씀을 하셨고, 가섭은 장식을 덮이지 않았으므로 이 신주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로지 한 마음으로 이 주를 마음에 새기어 지키면 공덕과 수행이 원만해지며, 항상 이 주문을 지니면 귀신도 멀리 떠나 버리고, 모든 하늘이 귀 기울여 조용히 들으며 항상 기뻐한다.”고 하였다.
理會得麼 非是
口誦要心受持大開著眼休教走了○要見此咒麼
不在外 不在內 不在中間與內外
且道在甚麼去處會會麼 不離當處 休教迷了。
알았는가?
수지하라는 것은 입으로외우라는 것이 아니니 마음으로 바다아 지녀야 하며, 마음을 크게 열어 쓰되 치달리지 말아야 한다.
이 주를 보고자 하는가?
밖에 있는 것도 아니요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이나 안팎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자, 말해 보라! 어떤 곳에 있는가?
알았는가?
내가 있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니 미혹하지 말라.
「 性海寬洪怕起風
風纔起處浪飜空
一朝風定波濤靜
一輪月印水晶宮」
】
성품의 바다가 넓고 크니 바람이 일어날까 두렵다.
바람이 조금만 일어나도 파도가 허공까지 밀어 닥친다.
하루아침에 바람이 자고 파도도 고요해져
한 개의 둥근 달이 수정궁에 자취를 남긴다.
-------ㅇ
「即說咒曰。」
【舉起四句偈擁護持經人不離左右順念逆念世
間一切所求無不果遂十二時中不可忘却
사구게를 들면 경을 가진 사람을 옹호하여 좌우를 떠나지 않는다. 순리대로 생각하든 거꾸로 생각하든, 소망하는 세간의 모든 것을 이루어 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會麼 休教錯認了。
알았는가?
착각하거나 오인하지 말지어다.
「 萬聖千賢在巳身
休教昧了本來真
因何苦勸重重舉
一番提起一番新」
】
만 분의 성인과 천 분의 현인이 자기 몸에 있으니
어두운 것을 쉬면 본래가 참이다.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권장하고 거듭 거듭 예를 드는가?
한 번 잡아 일으켜 쓰면 한 번 더 새롭다.
-------ㅇ
「揭諦揭諦」
【揭諦者人空又揭諦者法空人法俱空二空全忘
也 道云自心不動之後復有無極真機 洞仙
云人牛不見杳無踪月色光含萬象空
아제揭諦는 주관인 ‘나’가 공해진 것(人空)이며, 또 아제는 대상경계가 공해진 것(法空)을 말한다. 나와 대상 경계가 함께 공해지고 두 가지가 공했다는 것마저 전부 잊는다.
도가에서는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 다음에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그것마저 없는 참 기틀이 있다.”고 하였고, 동선洞仙은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고 자취도 없는데 달빛이 비치니 만상이 공하다.”고 하였다.
且人空者只是教人忘形忘體法空者只是教人忘情絕
念萬法俱捐善惡俱混不執巳身不著於相忽然
外不知有巳身內不省有巳心遠不知有諸物到
這里脫體全忘自然見箇消息說箇消息又是執
於事也 大顛云不勞懸古鏡天曉自分明
또한 ‘나’가 공해졌다는 것은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형상을 잊고 체를 잊게 하는 것이며, 대상 경계가 공하다고 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리를 잊고 생각이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만법을 다 버리고 선악이 섞여, 일체가 되어 자기 몸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모양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느 날 문득 밖에 자기 몸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안에 자기의 마음이 있는 줄을 살피지 못함며, 모든 물건이 멀리 있는 줄도 모르게 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몸을 벗어나 모든 것을 다 잊으며, 자연히 이 소식을 본다. 이 소식을 말하면 또한 일에 집착하는 것이다. 대전 조사는 “수고롭게 옛 거울을 매달아 놓지 않아도 날이 새면 저절로 분명해진다.”고 하였다.
且道如何是天曉 金鷄三唱罷 擁出一輪紅。
자, 말해 보라! 어떤 것이 날이 밝은 것인가?
금닭이 세 번 울고 그치니 붉고 둥근 것 하나가 껴안고 나온다.
「 人法雙忘萬事休
香爐無火冷颼颼
一聲新雁遼天外
遠水長天一色秋」
】
나(人)와 대상 경계(法)를 둘 다 잊으니 만사가 고요하다.
향로에는 불이 없고 바깥에는 차가운 바람소리
하늘가에 새 기러기 한 소리에
물은 깊고 하늘이 높으니 가을이 한 빛이로다.
-------ㅇ
「波羅揭諦」
【波羅揭諦者到空無所空是也 仙師云既無所
空徹底淨 虎眼禪師云不識亦空著所空 若
是既無所空得到彼岸若到彼岸其彼岸亦須離
而再進則永不受生輪迴斷生死息
바라아제波羅揭諦는 공하나 공한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선사는 “이미 공한 것이 없어서 바닥까지 다 깨끗하다.”고 하였고, 호안 선사는 “모르겠는가! 또한 공이라고 하는 것도 공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만일 이미 공한 바가 없다면 피안에 도달한 것이다. 그대로 피안에 이르렀다면 그 피안도 모두 떼어놓고 다시 나아가야 영원히 태어나지 않게 되며, 윤회가 끊어지고 생사가 그치게 된다.
且道無生無死是箇甚麼 認得麼 休睡著
咦 他也轉 你也轉 對著面 尋不見 若要見 待成片。
다시 말해 보아라! 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이것이 무엇인가?
알았는가?
잠자지 말라.
에잇!
너도 저넌하고 그 밖에 모두도 전전한다. 그래서 서로 대면하여 찾아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 만약 보고자 한다면 타성일편이 되기를 기다리라.
「 空無所空徹底除
坦然歸去合清虗
莫煉頑空休失本
自然體道契真如」
】
공하되 공한 바가 없으니 바닥까지 모두 제거되어
편안히 안정되어 돌아가니 맑고 비어 있는 곳에서 만난다.
완공을 단련하지 말고 근본을 잃지 말라.
자연히 도를 체득하면 진여에 계합할 것이다.
-------ㅇ
「波羅僧揭諦」
【波羅僧揭諦者是諸佛清淨境界也五慾塵勞染
污不得如仙佛慈愍眾生隨機應化救度群迷在
異類中行龍蛇混襍凡聖同居逆行順行聖賢莫
測如月在水應現千江如同一月其真月本在天
端拿捉不得染污不得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경계이며, 이 경계는 오욕락의 번뇌가 물들이지 못한다. 부처님과 같이 중생을 사랑하고 아끼며 모든 곳에서 근기에 따라 교화한다. 어리석은 모든 중생을 구원하고 제도하기 위해 다른 종류(異類) 속에 들어가서 실행한다. 마치 용과 뱀이 섞여 있듯, 성인과 범부가 같이 살며, 사리에 맞는 행위를 하기도 하고 거스르는 행위를 하기도 하므로 성현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마치 물에 있는 달처럼 천강에 나투지만 하나의 같은 달인 것이다. 그 진짜 달은 본래 하늘 끝에 있으며, 잡지도 못하고 물들이지도 못한다.
要拿捉得麼 雖然親見應難捉 除非身在太虗中。
잡고자 하는가?
비록 친히 보긴 하였지만 잡기 어려우며, 그렇기는 하나 몸은 태허 가운데 있다.
「 清淨境界沒思量
不染纖塵是道場
試觀十五三更月
影現千江百不妨」
】
청정한 경계는 사량이 없으며
티끌만큼도 이 도량을 물들이지 못한다.
시험 삼아 보름날 밤 삼경에 밝은 달을 보라.
달 그림자가 천 강에 나투지만 어느 것 하나 방해되는 것이 없다.
-------ㅇ
「菩提薩婆訶」
【大顛云菩提是初薩婆訶是末 且脩行入起初
先須發菩提心勇猛精進日夜為道 古云道念
若還比雜念成仙成佛巳多時 只是學人不肯
驀直便行三心二意故不能到 仙師云數他堠
堠音後封堠五里一堠子却不行口念長安心不徹
대전 조사는 “모지菩提는 처음이요 사바하薩婆訶 마지막 회향이므로 수행인은 처음 수행을 할 때, 먼저 보리심을 일으켜 용맹정진하는 것으로 도를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옛사람은 “도에 대해 생각하기를 만약 잡념 일으키듯이 한다면 이미 오래 전에 신선이 되고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학인은 곧바른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곧 세 가지 마음(6식, 7식, 8식, 觀經, 至誠, 深心)과 두 가지 의(천지, 음양)를 행한다. 그래서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선사는 “저 이정표를 분별하느라 가지 않고, 입으로만 장안을 말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거두지 못한다.”고 하였다.
若是有志底人一刀兩段脩道學佛更無退轉又守不
怠忽然悟道達本性空即得菩提超出三界了無
所了得無所得蕩然清淨則到極樂之所受用無
盡故曰薩婆訶
만일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도양단하여 도를 닦아 부처를 배워 다시는 퇴전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것을 지켜서 게을리하지 않는다. 홀연히 깨달아 본성이 공함을 요달하면 바로 보리를 얻어 삼계를 벗어날 것이니, 요달하되 요달한 바가 없고 얻었지만 얻은 바도 없다. 텅 비어 청정하니 극락에 이른 것이며, 그것은 수용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므로 사바하薩婆訶라고 한다.
且道行到甚地面是徹頭處水窮山極處 寸草不生時 省麼。
자, 말해 보아라!
수행하여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가?
이 머리까지 사무친 곳은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이며, 풀 한 포기도 나지 않는 시간이다.
알았는가?
「 先發菩提一片心
次教萬慮不相侵
直教鑽透虗空髓
拔出從前治病鍼」
먼저 한 조각 보리심을 일으켜
그 다음에 만 가지 생각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라.
곧바로 허공의 뼈를 뚫어 투득하면
이전의 병을 치료하던 침을 뽑아내라.
註經巳畢更留一篇請晚學同志詳覽研窮二十
年後有出身之路休要忘了老何到岸
高師不在此限。
<반야심경> 주해하는 것을 마쳤다. 새롭게 책 한 권을 뒤져 과거에 같이 공부하던 도반들을 청해 자세히 열람하고 연구하느라 20년이 지나 비로소 출신지로 가 있었으니 결코 잊어버리지 말라. 늙은이가 어떻게 저 언덕에 오르겠냐고 하겠지만 덕 높은 스승은 이러한 한계를 두지 않는다.
「 法本從心生
還是從心滅
生滅盡由誰
請君自辨別
既然皆巳心
何用他人說
直須自下手
扭出䥫牛血
戎繩暮鼻穿
攙定虗空結
絟在無為柱
不使他顛劣
莫認賊為子
心法都忘絕
休教他瞞我
一拳先打徹
觀心亦無心
觀法法亦輟
人牛不見時
碧天清皎潔
秋月一般圓
彼此難分別」
】
법은 본래 마음에서 나오며
또한 마음에서 없어진다.
생멸이 다 누구 때문인가?
그대에게 청하노니 스스로 판별해 보라.
처음부터 다 자기의 마음인데
어찌 타인의 말을 쓰겠는가?
바로 손을 내려 쇠소의 피를 뽑아내라.
느끈을 꼬아 코를 잡고 콧구멍을 뚫으니
그제야 허공을 잡아 묶는다.
가는 배가 함이 없는 기둥에 있으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지 말라.
도적을 잘못 알고 자식을 삼지 말고
마음과 법을 모두 끊어 버려라.
다른 것으로 나를 속이게 하지 말고
먼저 한 주먹으로 쳐부숴 버려라.
마음을 관해 보니 또한 마음이 없고
법을 관해 보니 법 또한 끊어졌다.
사람도 소도 보지 못할 때
푸른 하늘이 맑고 밝고 깨끗하다.
가을달은 한결같이 둥글어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기 어렵더라.
「般若波羅蜜多心經終」
夫般若心經者諸佛肝心眾聖命脉也以故自唐
以降釋家甚多比偶得無垢居士張九成之所註
一本於書林禪教竝舉內外兼明真暗夜明灯霧
海南針也仍加和点命工繡梓欲廣其傳豈非佛
法良財色空之妙處哉。
旹正保二巳酉中冬日書
於東山圓通峯之[艸-屮]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