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을 듣는다는 것][스승]

2018. 6. 9. 14:31카테고리 없음

바로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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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수련이 어떻게 불리든 문제될 것은 없다. 호흡을 따르든, 지관타좌를 하든,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든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가지고 간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 삶은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삶에 대해 성찰하는 성숙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핵심적인 삶에 대한 질문이다.
먼저 앉아 있음에 필요한 기본적인 전략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에 앞서 참선에 대한 내 이 야기가 곧 참선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말로 전하는 것은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참선하며 앉은 가운데 우리는 현실, 잠재된 부처님의 마음, 신, 진정한 본성이 드러남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큰마음’이라고 부른다. 오늘 이 시간에 접근하고자 하는 주제에 매우 적절하게 들어맞는 단어는 ‘바로 지금 여기’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는 붙잡을 수 없고, 현재는 붙잡히지 않으며, 미래는 손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방에서 어디에 있는가?
과거에 있는가? 아니다. 미래에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현재에 있는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현재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이것 이 현재다.”라고 가리키며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를 구분 짓는 경계선은 없다. 다만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정도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재는 방 법도 없고, 정의하는 방법도 없으며, 고정시킬 수도 없다.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수량화하지 못하며, 경계도 없다. 그것은 무한대이며 그것이 우리가 있는 그 어디 이다.

간단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쉽게 들리는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진정으로 함께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여기 있으면서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쉽지 않을까? 우리는 왜 현재를 볼 수 없을까? 그러면 ‘바로 지금 여기’를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내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겠다.


학창 시절 나는 오벌린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 시절 나름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기보다 성실했다.
나는 당시 명성 높은 어느 교수님에게 간절히 레슨을 받기 윈했다. 그분은 의심할 여지없는 최고의 교수였으며, 평범한 학생을 환상적인 피아니스트로 변신시키곤 했다.
마침내 내게도 그 교수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레슨을 받으러 간 첫날, 그분은 내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저 피아노 앞에 앉아 다섯 음표만 들려주었다. 나는 교수님이 피아노를 두 대 놓고 지도한다는 사실을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학생, 연주하세요.”
교수님이 연주한 방식 그대로 쳐야 했다.
피아노를 그대로 따라 쳤더니 그분이 말했다.
“아니야.”
교수님은 다시 연주했다. 그리고 나도 반복했다.
교수님은 다시 말했다.
“틀렸어.”
우리는 이 행동을 한 시간이나 반복했다.
내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교수님은 말했다.
“아니야.”
그날 이후 석 달 동안 나는 딱 세 마디를 연주했다.
아마도 그 곡의 삼십초에 해당하는 분량 이었을 것이다.

그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내가 연주를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작은 심포니 오 케스트라와 독주자로 협연한 경험도 있었으니 말이다.
단순한 다섯 음을 연주하면서 석 달을 보냈는데, 나는 석 달 내내 울며 지냈다. 교수님은 진정한 스승이 갖고 있다는 모든 면모를 내게 보여 주었다.
학생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도록 하는 무시무시한 조련과 매몰찬 결정력이 그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그토록 대단하다고 알려진 이유였다.

석 달이 되어 갈 때 교수님이 말했다.
“좋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마침내 듣는 법을 배운 것이다.
당시 교수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들을 수 있다면 연주할 수 있어.”

석 달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시작할 때와 같은 귀를 가지고 있었다. 내 두 귀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배운 곡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듣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 피아노를 연주해 왔다. 나는 당시 교수님한테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학생들이 집중하도록 가르친 교수법이 바로 그분이 훌륭한 선생으로 평가받는 이유였다. 그와 공부하고 나면 학생들은 진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레슨이 끝나는 날, 아름다운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스튜디오에서 세상으로 나온다.

이런 집중은 참선 수행에도 필요한데, 이것을 사마디Samadhi(선정 혹은 삼매)라고 부른다.
이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집중은 비교적 쉽다. 이는 좋아하는 대상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보면 하나 됨이 무엇인 지 느낄 수 있다. 운동 경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식축구에서 패스를 멋지게 해내는 사람을 보면 그가 몰입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농구에서 멋진 플레이를 하는 선수도 그렇다. 이는 집중함으로써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결과다. 이것도 일종의 사마디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 역시 사마디의 한 종류이며 가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참선 수련에서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만 한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집중하기 싫은 이유는 그 일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집중하기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다. 아팠던 과거를 기억한다. 미래에 대해서도 끊임 없이 꿈꾼다. 멋진 것을 갖고자 욕망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꿈을 키운다. 그렇게 우리 는 이 모든 것을 상상하며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현실을 걸러 낸다.
“나는 그것이 싫어. 그런 이야기는 들을 필요가 없어. 그런 것은 잊고 앞으로 벌어질 일만 생각할 거야.”
지속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행동한다. 돌고, 돌고, 돌며 항상 즐거울 거라고 믿는 길 에서 우리 삶을 꾸려 내기 위해 애쓴다. 우리는 그 길이 안전하고 안심되는 곳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놓치는 것이 있다. 바로 지금 여기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현재 자신이 있는 그 자리를 볼 수 없다. 현실을 걸러 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은 실제와 확연히 다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 무작위로 열 명을 골라 책에 대해 물어보라. 모두 다르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크게 끌리지 않는 부분은 곧 잊어버리기도 하고, 같은 내용을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그냥 건너뛰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참선을 배우러 스승을 찾아가서도 오직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자신을 열고 스승을 맞으라는 의미는,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들으라는 뜻이다. 그리고 스승은 당신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려고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좌선할 때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지속적으로 아주 미미하지만 반드시 전진해 나가야 한다. 머릿속 생각에 사로잡혀 휘둘리는 세상을 떠나 바로 지금 여기에 함께하는 길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수련이다.
그런 능력을 기르고 힘을 키워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절대 벗어나지 않겠다.’ 라고 새록새록 다짐하는 마음을 계발해야 한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우리 수행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갈림길이다. 이쪽 길로 갈 수도 있 고, 저쪽 길로 갈 수도 있다. 늘 선택이다. 선택은 우리가 머릿속에 미리 만들어 놓은 근사한 세상과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상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참여하는 이 집중명상 시간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며칠씩 쉼 없이 참선하는 시간 속에는 피로와 지겨움, 고통스러운 다리 통증이 뒤따른다. 몸이 불편해도 바위처럼 앉아 있었기에 참선이 굉장히 가치 있다는 것을 배운다.

​통증이 머무는 동안 당신은 현실에서 분리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프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며 그곳에 있어야 했다. 그 자리엔 달리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아픔이란 참으로 귀하다.
지금 하는 참선 수행은 우리가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만들어졌다.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법도 알고 있다. 현재의 삶이 좋건 나쁘건, 멋지건 비루하건 상관하지 않는다. 골치가 아프다 해도, 골골대며 앓아야 해도 전부 겪으며 넘어간다. 행복에 젖어 있을 때도 다른 순간과 차이를 두지 않는다.

참선이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른 성숙한 수련자들한테서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런 사람을 보면 당신도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겪으며 살아 낸다.
삶을 환상적인 버전으로 조작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그들에게 불어오는 삶의 폭풍은 점차 약해지며 그저 스쳐 지나간다. 만약 발생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일이 어떤 일이건 분노에 떨며 속을 태우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 난다고 해도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질 것이다.

- 샬럿 조코 백 <가만히 앉다> 중에서.



* “​일단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연주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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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놈 간택할 것 같으믄 간택이 벌써 그른 놈】

요런 것도 들으시란 말이여. 이거 평상화平常話니깐,
이 평상화가 그 모도 도인의 말후구末後句인 것이여.
도인의 말후구인 것이 아니라, 중생이 말후구에 깨달라야 하거든! 이런 제-
밥 묵고 옷 입는 것이, 가고오는 것이 그 말후구여!
그게 참, 정말 법문인 것이여.
‘이거는 뭐 씨잘디 없는 말이다’ 듣고, 거그서 인자 좋은, 옳은 것을 간택揀擇하고... 뭣을 옳은 것을 간택해야!
옳은 놈 간택할 것 같으믄 간택이 벌써 그른 놈인디.

- 전강선사 법문 23번.(일대기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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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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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에 걸쳐 많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도 그들의 삶과 수행에서 문제가 생긴다 는사실이 여전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말로 내뱉는 것은 문제 가 되고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은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
석가모니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다.
“당신 스스로 밝히는 등불이 되라.”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
“이쪽 스승한테 달려가 안 되면 저쪽 스승한테, 이 선원이 아니면 저 선원으로 쫓아가라.”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당신 스스로 밝히는 등불이 되어라.” 여기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권위’의 문제다.
우리 스스로 (남들에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세우는 권위가 있다. 보통은 둘 다 갖는다. 만약 우리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면 결코 권위를 찾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는 기분이 심드렁하거나 당항스럽고 짜증나는 일이 생기면 스승 을 떠올리거나 자신에게 무엇인가 제시해 줄 수 있는 권위를 찾아가야 한다고 여긴다.
동네에 새로운 스승이 왔다고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나는 당혹스럽다.
새로운 스승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멀리까지 가는지 물어보면, 아무리 멀어도 이 방 저끝이다. 결코 멀리 가지 않는다!
내가 새로운 스승한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일까? 바로 나의 경험이다. 이것 말고 내게 권위를 내세울 수 있 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줄 스승이 필요해요. 지금 상처받았어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예요. 누군가가 나서서 제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필요해요.”
아니, 당신에겐 안내자만 있으면 된다. 당신의 삶을 끌어안고 수행하도록 분명하게 길을 잡 아 줄 역할을 하는 사람, 인생의 권위자는 바로 자신임을 분명하게 일려 줄 안내자 말이다. 당신의 진정한 스승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당신’을 깨닫기 위해 수련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스승이 있다. 그 스승은 누구일까? 삶 자체다. 우리 각자는 삶의 화현이다. 그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삶은 엄하면서도 한 없이 자애로운 선생이다. 당신이 믿어 야 하는 단 하나의 권위다. 이 권위는 삶의 모든 곳에 있다. 생활에서 마주하는 모두가 스승 이다.
그러므로 삶과 견줄 수 없는 스승을 보겠다고 특별한 장소를 발견하기 위해 더는 헤맬 필요 가 없다. 특별히 조용한 공간을 갖겠다는 것도, 이상적인 분위기를 꾸미는 것도 다 부질없다. 사실은 보다 어수선한 곳이 더 적합하다. 지극히 평균적인 사무실이야말로 위대한 수행처다. 보통의 가정 역시 완벽하다. 대부분 꽤 어질러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적인 경 험으로 그런 곳이야말로 권위와 스승이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이런 가르침은 매우 급진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편안하지는 않다. 사람들은 종종 따르길 그 만두고 돌아선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듣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준비되기 전 우리는 (일례로, 고통을 받다가 그로부터 뭔가 배우겠다고 마음 먹을 때) 둥지 안에 있는 아기 새들과 같다. 아기 새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채 먹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승님의 멋진 가르침으로 채워 주세요. 저희는 입을 벌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떠먹여 주세요.”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렇다.
“엄마 아빠는 언제 오나요? 위대한 스승, 최고의 권위를 가져오실 텐데 그건 바로 제 괴로움 과 아픔을 끊어 줄 양식이에요. 언제 와서 가르침으로 나를 채워 줄까요?”
엄마 아빠는 이미 당도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 있을까?바로 이곳이다. 우리 삶은 항상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은 불편하고, 처량하기 그지없고, 외롭고, 우울한 모습으로 서 있 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가 그런 삶을 반기겠는 가?
그러나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삶을 생생하게 경험하기 시작할 “때 삶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 인 ‘사마디’가 된다. 삶의 순간순간을 솔직하게 느끼며 그곳에 존재할 때 진정한 스승의 가르 침을 받들게 된다. 이런 경험은 신의 단어이며, 생의 기쁨인 ‘오직 여기’에 마침내 다다르는 것이다. 이것이 참선 수행이며, 그곳에서는 ‘참선’이란 단어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토록 기다려 온 엄마 아빠는 늘 여기 있어 왔다. 바로 이곳에 말이다. 아무리 피하고자 해도 그 권위를 피할 수 없다. 일터에 가도 거기에 있다. 친구랑 있을 때도 거기에 있다. 가족과 있어도 바로 거기에 있다.
“꾸준히 참선하자. 끈기 있게 기도하자.”
삶의 매 순간이 스승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길을 피해 갈 수 없다. 삶의 매 순간 진실로 머문다면 거기에는 외부의 영향이나 권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고통의 순간에 온전 히 그 고통을 품고 있다면 그 순간 진정한 권위는 무엇인가? 바로 집중이다. 체험해 내고 있 는 것이 권위다. 이 또한 마땅히 해야 하는 행동을 설명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권위의 문제를 잘 다루다가도 마지막에 자칫 관념적 유희로 흐를 수 있는 작은 환상 이 하나 있다.
“나의 권위는 오직 내게 있어. 고마운 일이지. 그럼 아무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해.” 이 말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이 안에 들어 있는 개념은 이것이다.
“나는 독보적인 권위를 갖겠어! 삶에 대한 나만의 개념, 참선 수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계발하겠어.”
참선을 하겠다는 우리는 이런 난센스로 가득 차 있다. 만약 나만의 권위를 (이런 좁은 사고속에서) 갖추려고 한다면, 이는 다른 누군가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또 그렇게 ‘나’라는 허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도 권위가 아니고 나도 권위가 아니라며 무엇이 권위인가? 우리는 앞서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직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허물어지는 모래 늪 속에서 허우 적거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보는가?

- 샬럿 조코 백. <가만히 앉다-Everyday 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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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하나의 스승:
새로운 스승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멀리까지 가는지 물어보면, 아무리 멀어도 이 방 저끝이다.
결코 멀리 가지 않는다!
내가 새로운 스승한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일까?
바로 나의 경험이다.
이것 말고 내게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스승:
세상에는 단 하나의 스승이 있다. 그 스승은 누구일까?
삶 자체다. 우리 각자는 삶의 화현이다. 그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삶은 엄하면서도 한 없이 자애로운 선생이다. 당신이 믿어야 하는 단 하나의 권위다. 이 권위는 삶의 모든 곳에 있다. 생활에서 마주하는 모두가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