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4. 20:33ㆍ카테고리 없음
【사람을 위한다는 것】
가기철선입해래 駕起鐵船入海來하야
조간휘처월정명 釣竿揮處月正明이로구나
창명과래혼불각 滄溟過來渾不覺하고
종일행행부지행 終日行行不知行이로구나.
가기철선입해래駕起鐵船入海來,
쇠배, 쇠로된 밴데 밑구멍이 없는 배여. 밑구녁이 없는 쇠 배를 타고서 떠억 바다에 들어갔다 그말이여. 조간휘처월정명釣竿揮處月正明이여.
그래가지고 낚시대를 떠억 드리우는데 그 낚시대 박주舶主가 번쩍 거리는 곳에 달이 정正히 밝았더라. 창명과래혼불각滄溟過來渾不覺이여.
푸른 바다 물결이 계속 이렇게 물결을 치고 지내가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혀.
얼마나 바다를 지내왔는지 모르는 가운데,
종일행행부지행終日行行不知行이다.
종일토록 가고 갔건만 가는 줄을 아지 못하더라.
밑없는 쇠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간 것은, 납자가 참선 수행하는 사람이 공문空門에 들어와서 활구참선에 발심을 해가지고 정진을 시작한 것에다가 비유하고, 낚시대 빛나는 곳에 달이 정히 밝은 것은, 자기의 본참공안을 터억 거각해 가지고 성성적적하게 그 의단이 타성이 되도록, 타성일편이 되도록 그 관해나가는 경지를 밝힌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창명과래혼불각滄溟過來渾不覺은, 시간이 가는줄을 몰라. 낮이 되었는지 몇시가 되았는지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세월이 가는줄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는 거여.
어떻게 성성적적허게 화두를 들고 의단이 독로허도록 순일무잡하게 단속을 해 가던지 전혀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종일행행부지행終日行行不知行이다,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고 날씨가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잡드리를 해 가야할 것이다.
금년 삼동에 결제를 한지 한 일주일밖에 안 되았지만 벌써 선방에 스님네나 또 보살님네나 시민선원의 모다 이 대중들도 모두가 이러한, 이렇게 단속을 해 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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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生怨債起於親
莫若多生不識人
向我佛門如廣濟
無緣眞箇大悲恩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이여.
다생에 웬수빚이 다 친한 데에서 일어난거여.
막역다생莫若多生에 불식인不識人이다.
다생에 사람 아지 아니한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을 알게 되면 거기서 친해지고 친해지면 그것이 웬수요 빚쟁이가 된다 그말이여.
웬수 빚쟁이가 친하지도 않고 아지 못한 사람과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여.
반드시 친한데서 일어나는 거여.
친한 것은 사람을 알고 잘 알고 가까워지니까 친해지는 것이고 친해지니까 거기서 웬수가 생기는 것이다 그말이여. 온 세상은 참 인격적으로 믿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마는 뵈기 싫은 사람 미운사람 웬수 또 빚쟁이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웬수와 빚쟁이는 금생에도 잘 아는 사이고 금생에 퍽 가까웠던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여.
또 전생에 무척 가까왔기 때문에 금생에 웬수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이 이 세상에는 제일 가까운 사이여.
부모. 자식이 부모로 인해서 이 몸을 받아나고 부모가 아니면 이몸을 받아날수가 없는데, 정말 그 자식이 참으로 그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그런 사람도 더러는 있습니다.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자식과 부모 사이는 이 세상에는 더군다나 불효자가 90 프로이상, 99 프로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웬수가 자식으로 태어나고 또 웬수까지는 아니라도 전생에 빚진 놈이 빚 받으러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말이여.
그래서 몸띵이도 부모를 의지해서 태어났지마는 갓난 애기때부터서 줄곧 부모로 인해서 부모한테 빚을 받아가면서 자라고 배우고 커가지고 장가가고 학교 가고 장가가고 일생동안을 물심양면으로 부모한테 무서운 빚을 받아냈다 그말이거든.
전생의 빚쟁이가 왔기 때문에 부모는 꼼짝 못허고 다 그것을 갚어야 해.
옛날에는 부모가 자식을 꾸짖기도 하고 호령도 하고 말을 안 들으면 종아리도 때리고 그렇게 해서 자식을 가리켰는데, 지금은 절절매. 유치원 때부터서 절절맨다 그말이여. 해 달란대로 해 줄수만 있으면 다 해 주고.
자식이 무엇을 잘못해도 함부로 꾸짖기도 어려워 무서워서 잘못 꾸짖는다 그말이여. 만일에 하나 꾸짖거나 종아리 때리면 막 대들고 포악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출을 해 가지고 무진장 부모 속을 썩힌다 그말이여.
그러면서도 그 부모는 절절매면서 과잉보호를 하고 그렇다고 해서 남, 형편이 어려운데도 형편 넉넉한 사람처럼 다 해 줄랴고 노력을 하고, 그래가지고 그놈을 가리켜서 키워놔서 장가를 보내면 부모한테 효도하냐 하며는 다 핵가족이 되어가지고 자기끼리 잘 살려고 그러고, 부모는 점점 자식이 많은 사람일 수록에 재산이 넉넉해서 잘 가리켜논 경우 재산을 많이 분배해줄, 해준 자식일수록에 더욱 부모를 버리고 부모한테 불효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자식은 왜 그러면 부모는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잘 해주고도 불효한 자식 속에서 늙으막을 한숨과 눈물속에서 지내야 하느냐 하며는, 과잉보호를 했기 때문에 그런거야.
옛날 부모는 부모를 자식을 엄격하게 해서 바로 살아갈수 있는 길을 가리켰는데, 지금은 부모가 바로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치기 보다는 제 요구하는대로 무엇이든지 해 주고 잘 맥이고 잘 입히고 조금도 뜻을 좋은 생각이나 나쁜 생각이나 자식허라는 대로 다 해주고 거기에서 바로 자식은 잘못 길러진 것이다 그 말이여.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니 나만 안그러기도 어려워.
그래서 이것은 교육, 옛날에 봉건시대교육이라고 덮어놓고 그것을 우리는 다 버리고, 버렸습니다.
그리고 서양 교육방법을 도입을 해 가지고 우리의 교육은 가정교육도, 물론 특수한 가정에서는 잘 하신분도 있겠지요. 있으나 대체적으로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아있지를 못하고 학교교육도 제대로 되어있지를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교육이라는 것이 지식을 가리키고 기술을 가리키고 그러한 교육이지 사람이 되게 하는 교육은 전혀하고 있지 않습니다.
국민학교부터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사람되는 교육은 과목에 없어.
가정교육도 사람되는 길을, 길로 가리키는 것이 없어.
그러니 대학을 졸업을해서 사회에 나가 봤자 그 인간이 제대로 된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말이여.
그 가운데는 특수한 몇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 그말이여.
그러한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서 정치도 하고 교육도 하고 뭐... 허니 그것이 다 세상이 이렇게 참 말세가 될 수 밲에는 없는 근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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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람을 잘 알면 친해지고 친한사람은 그것이 웬수가 된다.
그러면 부모가 당연히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해야지 어떻게 허느냐.
정으로 키우면 못쓴다 그거야.
부모가 자식이 자기 배속에서 자식이니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자식이 아프며는 부모가 대신 아프고 자식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그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으로 자식을 어려서부터서 길러 놓으면 그 자식이 불효자가 되는 거여.
정이라하는 것이, ‘사람은 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는데 정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자비와는 전혀 본질적으로 다른거여.
보통 관세음보살을 대성자모大聖慈母다, ‘자비스러운 어머니다’ 이렇게 표현도 합니다마는, 자비慈悲라고 하는 것은 정情으로 정과는 다른 것이다 그말이여.
정으로 자식을 다루고 정으로 사람을 다스리면 나중에는 결국은 웬수가 되는 것이여.
부처님의 자비는 무연자비無緣慈悲여. 인연없는 자비여.
정으로, 인간의 세속의 정이라 하는 것은 상相이 있거든. ‘내가 이렇게 너한테 잘해준다. 그러니 너도 나중에 나한테 잘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상相이 있고 나는 너를 ‘어떻게 내가 너를 키운 줄 아느냐!’ 잘 해 주었다고 하는 상 공투세. 그러헌 것이 결국은 결과적으로는 돌아온것이 웬수로 돌아오는 거야.
어떤 고학생을, 참 가난한 고학생을 학비를 대주고 식량을 대주고 해서 잘 가리켰는데, 그래가지고 그 덕에 학교를 졸업하고 법관이 되었다 그말이야.
그런데 당연히 평생동안 그 은혜를 안 잊어버려야 할텐데, 그리고 그렇게 잘 해준 편에서는 ‘그렇게 잘 해주었으니까 무엇이든지 자기 일이라며는 다 잘 해줄것이다’ 그렇게 믿을 것이고, ‘나중에 언젠가는 저도 인간이니까 은혜를 알아야 할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여. 성공을 한 것은 ‘허는 과정에서 잘 봐준 것은 인정을 하나 결국은 자기가 공부를 잘해가지고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그이를 만나기를 꺼려해.
일년에 한번 두번은 찾아가서 인사도 드리고 문안도 드리고 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가서 봐드리고 그럴 것 같은데 사람은 유주상有住相으로 베푼, 받은 그 은혜는, 그렇게 해서 입은 은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거다 그말이여.
누나가 부모가 없는 동생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직장에 나가서 고생을 해 가지고 벌다가 그것 가지고는 안되니까 술집에 나가 가지고 돈을 더 많이 받아가지고 이렇게 했는데, 그 동생이 그걸 알았다 말이야.
알아가지고는 막 포악을 하면서 공부도 안하고 “내가 그런 더러운 돈을 누가 나 달라고 했느냐”고 막 대들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인간세상에는 이러한 경우가 참 많이 있는데, 자기의 길은 자기가 가고 자기의 행복은 자기가 추구하면서 누나로서의 동생을 도와주는 것은 좋지마는, 자기의 행복을 희생하고 그리고서 동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옳지않다 그말이야.
부모도 역시 부모는 부모로서의 삶이 있고 행복이 있는것이다 그말이여.
물론 ‘부모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고 어떻게 자식을 돌불 시간이 여유가 있겠느냐.’ 그렇게도 생각이 되겠지만,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할지언정 부모 자신이 자기의 다른 삶과 행복을 희생하면서 자식한테 다 바친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게 허셨지만 노래老來에 가서 반드시 그것은 불효자식을 만들고 한탄과 후회를 가져오는 것이여.
그래서 인연없는 자비라고 하는 것이 자비의 최고의 차원이 높은 자비인데, 이것은 정이 아니여.
정이 아니고 ‘나의 자식이니까 내가 다 해준다’ 그게 아니거든. 인연이 없어도, 가까운 인연이 아니라도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은 도와 줘야 하는거고, 내 배속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정으로써 분에 넘치게 과잉보호를 헌 것은 그것은 자비가 아니여. 자식에게는 물론 먹이고 입혀야 할 책임도 있고 가르쳐야 할 책임도 있지마는 과잉보호는 정에서 나온것이라 그것은 역효과만을 가져오는 것이다.
자식에게 정말 부모로써 주어야 할 것은,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해.’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면 어려서는 듣기 싫어하거든. 무엇이든지 저 하고 싶은대로 해주시를 바래지만 그래도 도에 지나친 분에 넘친 과잉보호는 자식을 버리고야 마는거고 불효자식을 맨드는 것이여. 그래서 먹는 것이고 입는 것이고 돈이고 필요이상으로 과도하게 쏟아주는 것은 좋지 않다. 부모도 노래에 자기가 쓸수 있는 돈은 스스로 간직을 해야 돼. 죽을 때까지. 다 자식한테 잘해주고 노래老來에 자식이 잘해주길 바랬다가 자식이 어렸을 때는 어머니 아버지 하더니 장가가고 자식나면 지자식 지 지집(계집)이 가까우니까 부모돌아보는데 등한히 하기가 일쑤다 그말이여. 그때가서 자식을 원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래서 부처님은 무연자비여.
전혀 자기가 가까운 인연이 아니라도 모든 중생을 다 평등하게 생각을하셨다 그말이여.
부처님이 이세상에 오실 때에 그러한 무연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진리의 세계로부터 이 사바세계에 오신것이다 그말이여.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소중히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법문을 듣고 공부하고 읽고 쓰고 그럽니다마는, 정말 부처님으로부터 배울 것은 이 무연자비를 배와.
무연자비는 상이 없기 때문에, 무주상이기 때문에 아무리 베풀어도 부작용이 없어. 왜 그러냐.
내가 원래 베풀 때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여.
베풀때 베풀었다는 상이 없고 교환조건, 베풀었으니까 이러이러한 것을 바래는 요구조건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식에게나 형제간이나 친척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인연없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럴라며는 항상 우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본참공안本叅公案,
‘이 뭐꼬?’,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공안을 일분 일초도 놓치지 않고 항상 그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보고 듣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에게 무엇을 줄 때나 무엇을 받을 때나 항상 그 화두를 드는 의단이 순수무잡한 화두가 독로하는 그러한 상태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면 무주상無住相이 될것이고 무연자비無緣慈悲가 될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520번.
·終日行行不知行
·無緣慈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