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 05:41ㆍ카테고리 없음
[1883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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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는 말했지. “난 예술가답게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라고. 즉 솔직하고 숨김없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니, 어린아이처럼 사는 게 아니라 예술가다운 열의를 갖고 산다는 거지.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든 난 거기서 무언가를 발견할 테고, 또 최선을 다할 거야.
틀에 박힌 행동과 상투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은 모든 걸 알고 모든 게 자기 생각대로 될 거라 믿는다면 그는 정말이지 잘난 체하는 우스꽝스런 사람일 거야. 세상만사에는 늘 무언가 아주 선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악한 것도 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느낄 수 있지. 우리를 넘어서는 무한한 것, 우리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한 무언가가 있음을.
자신이 작다는 사실을 못 느끼는 사람, 자기가 단지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야.
만일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주입받은 어떤 개념들, 즉 채면을 차린다거나 일정한 행동방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기를 포기한다면 무언가를 잃게되는 걸까?
나 자신의 경우, 그렇개 해서 무언가를 잃게 되건 말건, 별 관심이 없단다. 이런 형식이나 개념들은 정당하지 않을 뿐더러 흔히 치명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저 경험으로 알고 있을 따름이야.
결국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우리의 삶이 그토록 큰 신비임에 비해 ‘예의범절’의 체계는 지나치게 편협한 것이 분명해. 나로 말하면 이 체계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어버렸단다.
[188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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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따금 깊이 생각해본단다. 그리고 난 사상가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어. 사물들의 이치를 철저히 따져볼 필요를 느끼는 사람에 대해서는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의 화살이 돌아갈 뿐 아니라 몽상가로 분류되어버리기 때문에, 또 이런 편견이 사회에서 통념이 되어 있으므로, 불행히도 난 퇴박을 당하기 일쑤였단다. 이런 생각들을 나 자신 안에 꼭꼭 숨겨두지 못한 불찰 때문이겠지.
사고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전혀 없단다. 동시에 데생을 하고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말이지.
내 삶의 계획은 좋은 데생과 그림을 가능한 한 많이 그리는 거야. 그래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도 삶을 뒤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단다.
“아, 내가 그릴 수 있었을지 모르는 다른 그림들도 있는데!” 라고.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못한다는 말이 아니야. 나를 대신해, 혹은 너 자신을 위해 이 말에 반박할 생각은 없니?
테오야. 나라면 차라리 팔이나 다리, 머리가 어떻게 몸에 붙어 있는지를 생각하겠다. 내가 예술가인지 아닌지, 아니면 그럭저럭 괜찮은 예술가인지, 그런 문제를 묻기보다는 말이야.
너 역시 네 자신의 문제 속에 함몰되기보다는 질척한 시골길 위의 하늘과 반짝이는 테두리의 회색 구름을 생각하겠지.
- Vincent van Gogh 빈센트 반 고흐 지음|
H. 안나 수 엮음| 이창실 옮김.
[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