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7. 13:04ㆍ카테고리 없음
【不生 · 無念 · 解脫】
선가귀감禪家龜鑑에,
경계境界를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을 불생不生이라한다.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또 불생不生은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무렴無念이라한다.
(不生이 名無念이요)
무렴無念을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그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라 이름 하느니라.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경계境界를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중생衆生은, 이 참선叅禪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항상 경계境界를 보고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기 마음에 합당合當한 경계를 보고는 기쁜 마음을 내고 좋아서 못견디고, 자기 마음에 어긋나는 일을 당當하면 썽, 썽을 냅니다. 진심瞋心을 일으킵니다.
좋은 물견을 보면 탐심貪心을 내고 자기를 조끔 해롭게 하는 사람을, 경계를 만나면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이래가지고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몸띵이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만나는 육진六塵 경계에 있어서 항상 육식六識이 발동을 해가지고 끈임없는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경계境界를 보고 그러헌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그것을 불생不生이라 그래.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것이다.
이 몸뚱이가 부모를 인연因緣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것만 생生이 아니라, 경계境界를 보고 한 생각 일어난 것이 바로 그것이 생生이여.
그런데 경계를 보고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불생不生이다 그거거던. 그 불생不生이 바로 무념無念이고 무념이 곧 해탈解脫이다 그거거든.
그런데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경계境界를 두고서 경계를 볼 때마다 생각을 일으켜 왔다 그말이여.
그것이 아주 몸에 배 가지고 아무리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려고 해도 일어나고야 말어.
어떻게 허면 경계境界를 보고도 생각을 안일어 나게 헐수가 있느냐.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께서는 그래서 이 참선법叅禪法을 설說하시게 된것입니다.
참선법叅禪法이 옛날에는 관법觀法, 사무렴처관四無念處觀이라던지 십이인연관十二因緣이라던지 또는 해와 달빛을 관하는 일월관日月觀이라던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어. 있는데 중생의 근기根機가, 차츰차츰 근기는 참을성이 없으면서 그 영리한 기운은 매우 예리하게 이렇게 발달을 했다 그말이여.
그래서 무슨 말을, 법문을 들으면은 이리저리 영리한 그 알음알이가 발동을 해가지고 따져서 그럴싸허니 결론을 내리고, 자기도 모다 깨달은것처럼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한 것을 그것을 갖다가 증상만인增上慢人 이라 그래. 증상만인增上慢人.
그래가지고 그러헌 증상만인增上慢人이 되어버리면 도道는, 참 도는 깨닫지 못하고 그냥 수박 겉핥기로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되는거여.
그래서 이 말세末世의 중생들도 정말 올바르게 닦아서 참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 계발헌 방법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이거든.
간화선看話禪. 화두話頭를 참구叅究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함으로서 자기의 참 면목面目을 보게 하는 방법이여.
지금 어떠헌 분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육조六祖스님 때 까지 삽삼조사三三祖師에 이르기 까지 화두話頭라는 것이 없었다.
화두話頭해 갖고는 참으로 깊은 정定에 들수도 없고 깊은 정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참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신통神通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이라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무렴처관이나 십이인연관을 닦아서, 닦아야사 깨달을 수가 있고 정말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멸진정滅盡定을 얻고 나아가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는다' 이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육조六祖스님 이후로 수 천년을 내려 오면서 모든 조사와 선지식들이 사무렴처관이나 십이인연관을 몰라서 화두법話頭法을 설하셨겠습니까?
'그러면 사무렴처四無念處나 십이인연관十二因緣觀을 이렇게 관하는 것과 이렇게 화두話頭,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 하도록 이렇게 관조觀照하는것과는 어떠한 점에서 다르기에 우리의 말세에 있어서는 이 화두話頭를 참구叅究하는 참선叅禪을 해야 되는가?'
여러분 가운데는 매우 궁금하게 생각이 드실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무량겁無量劫을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살림살이를 해왔기 때문에,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은 끊을려고 할수록에 점점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번뇌를 아니하리라' 마음 먹어도 '그 아니하리란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번뇌여.
'썽을 내지 말리라'마음 먹어도 썽이 더 일어나.
'미워하지 말리라' 마음먹어 콱 참고 일어나도 미움을 억누를 수록에 미운 생각이 더 솟구쳐 올라.
참으면 참을수록 더 일어나고 누르면 누를수록 더 일어나.
어떠헌 경계境界를 당當하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항상 단전호흡을 하고, 무슨 말을, 억울한 말을 들어서 확 속에서 주먹탱이 같은 놈이 가슴에 치밀으고 오르거든 숨을 깊이 들어 마셔. 들여 마셨다가 후- 하고 내쉬어.
그렇게 한 두 서너 번 하고 난 다음에 숨을 수루루 허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 성내는 이놈이 무엇인가?'
간절히 관을 해보라 이말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숨은 깊이 들이마셨다가 잠깐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뭤고?
이렇게 두번 세번 네 번 열 번 스무번 허다보면 성내는 마음을 없앨려고 안해도 벌써 저절로 성내는 마음이 간곳이 없어져.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육진경계六塵境界를 만났을때 육근六根을 통해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려고 허자마자 바로 이렇게 다스려 나가면 그 앞에 무슨 팔만사천八萬四千 독한 마구니가 달려 들려고 한들 들어올 구녁이 이미 맥혀 버렸는데 어디로 들어오며, 아무리 중생의 피를 빨아먹고 목숨을 노리는 야차夜叉가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엿보고 있은들 어느틈이 있어서 침범해 들어올 것이냐 이말이여.
- 송담선사 법문 38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