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22. 07:58ㆍ카테고리 없음
【不即不離, 不住不著, 縱橫自在無非道場임을,
일념지간一念之間에 실천할 수 있는 방법,
'다맛 알수없는 의심, 이뭣고?'】
육조스님께서 '시삼마是甚麽, 이 뭣고' 법을 처음으로 조사祖師 가운데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러는데,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황벽黃檗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황벽黃檗스님은 [전심법요傳心法要]라고허는 법문法門에,
<但於見聞覺知處認本心>
다맛 견문각지처에 본심本心을 볼 수가 있는데,
-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혀로 맡보고 몸으로 차웁고 더웁고 헌 것을 촉각으로 느끼고 그리고 우리의 뜻으로 모든것을 좋다 나쁘다 썽도 내고 기뻐도 하고 그래서 뜻으로 안다 그말인데 -
견문각지처見聞覺知에 우리의 본심本心을 인득認得을 할 수가 있는데,
<然本心不屬見聞覺知>
그러나 그 우리의 본심本心은 견문각지처見聞覺知處에 소속所屬, 견문각지에 소속 된 것이 아니다.
<亦不離見聞覺知, 但莫於見聞覺知上起見解, 亦莫於見聞覺知上動念>
또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여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견문각지 우(上)에 견해見解를 일으키지 말라.
견문각지의 상上에 생각을 움직이지 마라.
<亦莫離見聞覺知覓心, 亦莫捨見聞覺知取法>
견문각지를 여의고 마음을 찾지도 말라.
견문각지를 버리고 마음을, 법을 취허지도 말아라.
<不即不離, 不住不著, 縱橫自在無非道場>
그래서 부즉불리不即不離하고 부주불착不住不著하고
종횡자재縱橫自在하야 무비도량無非道場이니라.>
앞에 말한 쭈욱 헌 것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자세히 말씀허셨는데, 사실은 알아 듣기는 해도 우리가 실천을 허기로 허면 어떻게 허는것이 - 견문각지를 여의고 찾고, 견문각지를 견해를 일으키지 말며, 생각을 움즉거리지 말며, 견문각지를 여의고 마음을 찾지도 말고, 견문각지를 버리고 마음을, 법을 취하지도 말라 - 그런말 들어봤자 참선叅禪을 많이 헌 사람은 '아! 무슨 뜻이로구나' 알지만, 처음으로 참선叅禪을 헐랴고 헌 사람은 이 여러가지 말을 밤낮 외우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이것을 일념지간一念之間에 그 딱 실천할수 있는 방법方法이 바로 '이 무엇고?' 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무슨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제자에게 말씀을 허셨지만, '이뭣고'란 말을 정식으로 화두話頭로서 어... 이 공부허는 법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분은, 임제臨濟스님이, 달마達磨스님 이후로 육조六祖스님 밑으로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위앙종潙仰宗 이렇게해서 오종가풍五宗家風이 있는데 그중에 임제종臨濟宗에서 화두話頭를 가지고 정진 허도록 간화선看話禪이라고허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하셨습니다.
화두는 '이뭣고?' 허되, 앞에 말한 여러가지 조목 조목이 ‘이뭣고’ 한 마디 속에 다 들어있어요.
이 중에 하나라도 범犯하면 그것이 제대로 허는 것이 아닌데, 활구참선活句叅禪이라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거기에 가미加味되, 되지 않은 것입니다.
다맛 '알수없는 의심, 이뭣고?'
하루에 딴 생각이 날 때마다, 견문각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맡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생각에 온갖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떠오르는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일곱(여섯)가지 경계를 만날 때는 우리는 거기에서 육식六識이 발생을 하는데 우리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밖에 경계境界를 만나자 마자 무슨 생각이 날려고 하면,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론적理論的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철학적哲學的으로 분리分離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알수없는 의심, 이뭣고?'
화두話頭에는 문헌文獻에 오른것만 해도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이라고합니다마는 이공안 저공안을 낱낱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하나만 가지고, 무자無字가 되았거나 판치생모版齒生毛가 되었거나 무엇이고 자기가 믿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탔으면 그 화두 하나만 가지고 허는데, 산승山僧은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신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또 임제臨濟스님과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그렇게 알뜰히 설說하신 '이뭣고'
조실스님께서도 말년末年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많은 학자들에게 주셨지만 그래도 근본根本은 항상 '시심마 是甚麽이뭣꼬' 화두를 많이 주셨습니다.
산승山僧은 그런 조사스님과 조실스님의 뜻을 받들어서 오늘 ‘이뭣고’ 화두를 권하고자 합니다.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 쉬면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귀에 들리자 마자 ‘이 뭣고.’
<코>로 무슨 냄새, 반찬 냄새가 들어오거나 똥 냄새가 들어오거나 무슨 향내가 들어오거나 무슨 냄새가 코로 들어오거나 말거나 들어오자 마자 그리 따라가지 말고 ‘이뭣고?’
<혀>로 음,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거나 밥을 먹으며는 바로 맛이 좋다 나쁘다 쓰다 달다 이러고 느낄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리 따지고 따라가지 말고 나는 바로 ‘이뭣고?’
<몸>이, 몸으로 참 바람이 불고나 서늘한 바람이 불거나 방에 들어가면 방이 뜻뜻허거나 난로를 피면 뜨겁거나 몸으로 항상 행주좌와간에 그러헌 감각을 느낄것입니다마는, 그때 그리 따라가지 말고 ‘이뭣고?’
우리의 <마음>에도 썽이 나면 이 뭣고, 슬퍼도 이 뭣고,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이뭣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73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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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심識心, 식심識心을 나로 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인줄 착각錯覺을 헐까 두려운 것】
달마스님께서 혈맥론에 말씀허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이러하신 말씀을 허셨습니다.
- 왜 스승 없이, 없이는 바르게 공부를 헐 수가 없고 왜 바르게 깨달을 수가 없느냐.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깨닫는 것인데 밖에 있는 것을 찾고 먼디에 있는 것을 찾아 나선다며는 스승이 필요허겠지만 자기에게 있는거 지금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을 줄 알고 입으로 짜고 싱거운 것을 분별헐 줄 알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낄줄 알고 생각으로 슬프다, 기쁘다, 괴롭다, 속이 상한다 이런 걸 느낄 줄 아는 바로 그 놈을 자기가 보는 것 뿐인데 거기 무슨 스승이 꼭 필요할 것인가 - 그렇게도 생각이 들겠지만 달마達磨스님께서 말씀허시기를,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저 혼자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왜 자기와 단 일분 일초동안도 무량겁을 통해서 여의어보지를 못한 여읠라야 여읠 수가 없는 자아를 깨닫는데 어째서 스승 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는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눈으로 볼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아는 그 놈이라 하니까 우리의 식심識心, 식심識心을 나로 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인줄 착각錯覺을 헐까 두려운 것입니다. 도적놈을 갖다가 자기 아들로 착각錯覺을 하고 생선의 눈알을 갖다가 보배구슬로 착각헌거와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나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오니, 그러면서 자기가 "내가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아! 워낙 어려서 나갔다가 커서 돌아오니까 -지가 자식이라고 허니까 자식인가보다- 하고 착각을 하고 두었는데, 그 놈이 처음에 들어와서는 자식인척 하고 효도를 허는척 하고 집안 부모님께 말도 잘 듣고 살림도 잘 허고 그래서 믿었는데, 그 놈이 옴막 재산을 다 털어가지고 도망쳤다 그 말이여.
우리가 우리의 중생衆生의 식심識心을 잘못 착각하고 그것이 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인줄 그릇 인식을 허는 것에다가 비교한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 보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감각하고 뜻으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고 허는 그 놈을 여의고 존재헌 것은 아니여.
그 놈을 여의고 찾는 것은 아니지만, '그 놈이 바로 그 놈이다'하고 착각錯覺을 헌다면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경지에서는 전 오식前五識, 육식六識, 칠식七識, 팔식八識이 그 놈이, 그놈이 바로 지智로 변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놈이 바로 그 놈이라- 해도 그것은 중생의 알음알이를 가지고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그 놈은 사량 분별심思量分別心이요 식심識心이요 무명업식無明業識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샤량분별思量分別과 무명업식無明業識 그 놈을 여의고 찾어서는 세상없이도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놈에 즉即해서 화두를 관조觀照해 나가야지 그 놈을 여의고 찾는다든지 그 놈을 없앨랴고 헌다든지 그 놈을 없애고 텅빈 어떤 공空을 들여다보고 앉았다든지 이래가지고서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헐 때까지 공부를 해서 멸진정滅盡定에 이르른다 허더라도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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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吟
松榻鳴山雨
傍人詠落梅
一場春夢罷
侍者點茶來
- 淸虛 청허
송탑松榻에 명산우鳴山雨 헌디,
소나무 정자에 산비가 울어 산에 비가 우수수 지내가니까 그 소나무 이파리 가지에 산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그 말이지.
그런데, 방인傍人이 영락매詠落梅로구나,
봄이 오면은, 봄을 재촉하기 위해서 봄비가, 산에 봄비가 내리는데 옆에 앉은 사람은 매화꽃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시를 읊고 있구나.
일장춘몽파一場春夢罷 헌디 시자侍者가 점다래點茶來라.
한바탕 그 뜨뜻한 봄날의 양지 볕에 앉어서 한오쿰 낮잠을 자고 그 봄비 소리에, 비, 산비 내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마치 시자가 따끈한 차를 한 잔을 떡 끓여가지고 왔구나.
- 송담선사 법문 19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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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會是菩提、諸入不會故。
만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6근과 6진이 서로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 <유마경> 보살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