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中 재중】

2017. 8. 19. 07:41카테고리 없음

【재중在中】

당堂에 올라서, 설법상說法床에 올라서 대중께 물되,
- 이건 육조스님이 한거 아니여. 똑같지마는 -
석상石霜스님께서 물되,

오유일물吾有一物이다, 내게 한 물건이 있다.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인디, 항상 동용動用 가운데 있다.

동용動用이, 동용動用 가운데 있을 것 없지.
동용動用이지, 동용動用!

밥먹고, 옷 입고, 가고, 오고, 잠자고 아- 그놈이란 말이여.
잠자는 놈, 밥먹는 놈, 옷입는 놈.
아- 명두래명두타明頭來 明頭打하고, 낮이오며는 밝은 놈을 치고, 암두래 암두타暗頭來 暗頭打하고, 밤이 오면 어둔 놈을 치고.
만물萬物을, 우주 삼라만상宇宙 森羅萬象 만물의 주인공主人公이지.
그 '이뭣고' 밖에 뭐가 있냔 말이여.
이 물건 밖에 뭐가 있어. 항상 이놈! 이놈이단 말이여.
그저 그 보는 놈, 뜨는 놈 그저 가고 오는 놈 이놈 뿐이여. 이 일물一物.
그 가고 오고 이놈, 뭐 별별 구백생멸장九百生滅藏 천하天下없는 도리회道理懷 다 갖다가 붙였자 그건 소용없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까장 때래, 한 물건도 없다고 때래 붙여 놓았자 안되아.
양구良久니 방棒이니 할喝이니 제일구第一句니 제삼구第三句니를 막 때려 써붙여 놨자 소용없어.

항상 이놈인디, 이놈!
이거 한 번 옳게 이를 것 같으면 바로만 네가 보아서 꼭 옳게만 이른다면 내가 대중大衆께, 옳게 이른 사람한테 참 크게 한 턱을 내고, 잘- 아주 공양供養을 내고, 공양供養을 올려. 견성見性했으니 견성見性헌 아 이러헌 큰스님한테 내가 잔치를 떠억 베풀고 한턱을 내고, '그래, 옳다'고 인가印可를 해 줄터이니 일러봐라!
무슨 물건인고 일러봐라!

.....
"조실스님! 조실스님!"

"불러서 뭣혀!!!
왜 이래!!
저를 부를 지언정 왜 나를 불러. 썩어진 놈으.
아나, 어서 가거라! (주장자로 법상을 크게 내려치심)
그 지랄 말고.
앉어!"

대오大悟로  위입문爲入門이다.
그러니 어째! 급이 참구해서 대오大悟로 위입문爲入門이여. 이 오조스님이, 이 석상石霜스님이, 이 물음!
“항상 재중在中에 있는데 무슨 물건이냐?”
천담만담千談萬談이 다 나왔어.

십년홍진객十年紅塵客이
일소청산중一笑靑山中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종명서악사鍾鳴西嶽寺허고
송죽벽운심松竹碧雲深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 전강선사 법문 47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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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한 물견이 있는데, 오유일물吾有一物이여.
내게 한 물건이.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이여, 항상 동용動用 가운데에 있어.
밥 먹는, 동용動用 가운데에 있는가?
동용動用이 시是지?

밥먹는 놈 옷 입는 놈 가는놈 오는 놈 그놈이 뭣이 가고 오는 놈이여. 송장이 가고 온가? 주인공이 가고오지?
이러고 있다가도 이놈이 턱 가자고 해야 가지?
이 물견! 이 물견 동용動用이거든.
동용자動用者가 심마甚麽냔 말이여!
가는놈 오는놈이 뭐냐 그말이여.

가는놈 오는 놈이 주인공이 가자오자 해야 가고오지 어디 송장이 가고 온가?
그 물견 하나 무엇이냐?

참 인생문제다. 인생이라는건 이 하나다.
동용動用 주인공 심마甚麽냐? 무엇이냔 말다 도대체.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인디, 왜 동용動用 가운, 동용動用이 시是인디 왜 거두아 얻덜 못하냐.
왜 그놈 하나를 모르고 있냐? 깨닫질 못하냐.
세상에 이것 봐! 이 외에 더 있어?

- 전강선사 법문 17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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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用】

보일 시示 자입니다 이게.
뭤을 보이냐? 원상圓相을 딱 그려서 보여드렸어.
보여드리고.

이 원상圓相이, 원상圓相은 그냥 보면 둥근런 달처럼 그렇게 그려 놨는데, 이것은 말로써 표현 할수 없는, 설명할수 없는 진리眞理를 이렇게 원상圓相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다 그 말이여.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허되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은 움직일 동動 자, 쓸 용用 자.

움직이는거(동動 자). 몸뚱이(肉體)를 움직이는 거.
안고 서고 눕고 일하고 밥먹고 옷 입고 하는 모든 육체肉體적인 동작을 말하는 것이고,

쓸 용用 자는 정신精神을 쓰는 거여.
과거過去 일도 생각하고 현재現在일도 생각하고 미래未來일도 생각하고, 좋은 일도 생각하고 나쁜일도 생각하고 슬픈일도 생각하고 기쁜일도 생각하고 근심 걱정하고허는 모든 정신작용精神作用을 말하는 거야.

그래서 육체肉體적인 모든 동작動作과 정신精神적인 모든 작용作用, 그것을 동용動用이라 그러는데, 그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항상 그 한 물견(一物)이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수부득收不得이여. 거두어 얻지 못헌다. 분명히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그 한 물견(一物)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작용作用을 하고 있는데, 그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그것을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볼래야 볼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래야 잡을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해도 알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것이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얻을수가 없으니 시심마是甚麽오?
이것이 무엇인고?

- 송담선사 법문 435번.(보살선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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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當來世後五百歲、其有衆生、得聞是經、信解受持、是人即爲第一希有】

冶父: <行住坐臥、着衣喫飯、更有甚麼事。>
佛法、只在日用、行住坐臥處、着衣喫飯時、一切時一切處、一一呈露靡遺、旣然如是、信解受持-何難之有、雖然信解、亦何希有。


【만약 내세 오백년이 지난 후를 당해서, 그때 어떤 중생이 있어 이 經의 설법을 듣고 이를 믿고 해득하여 받아들여 호지한다면, 이 사람은 곧 가장 희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옷 입고 밥먹는 일 이외에 다시 무슨 일이 있는가?>

불법이란 오직 일용생활의 행주좌와 하는 곳과 옷입고 밥먹고 하는 때에 있을 따름이니, 모든 시간 모든 처소에 하나하나 뚜렷히 드러나 남김이 없다.

이미 이와 같다면 이를 믿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간직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또 비록 그렇게 믿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희유한 일인가?


* 佛法、只在日用、行住坐臥處、着衣喫飯時.
불법은, 일용생활의 행주좌와 하는 곳과
옷입고 밥먹고 하는 때에 있을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