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잎이 떨어지고 풀이 마른 뒤를 따라서]

2023. 10. 18. 16:30카테고리 없음

吾人適志於花柳爛漫之時 得趣於笙歌騰沸之處 乃是造化之幻境 人心之蕩念也 須從木落草枯之後 向聲希味淡之中 覓得一些消息 纔是乾坤的槖籥 人物的根宗.

 

[독해] 사람이 그 뜻을 꽃이나 버들잎이 난만한 계절에 적응適應하고, 그 취미를 생황笙篁이나 노랫소리가 높이 울리는 곳에서 얻으면, 이는 곧 조화造化의 환경幻境이고 인심人心의 탕념蕩念이다. 모름지기 잎이 떨어지고 풀이 마른 뒤를 따라서, 또 가악歌樂이 그쳐 즐거움이 시든 상태를 향하여 하나의 참다운 소식을 터득한다면, 이것이 가까스로 우주건곤宇宙乾坤의 이치를 깨닫는 관건關鍵이고, 인격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신념이다. 

 

[강의] 꽃이 붉고 버들이 푸름은 한때 화려함이 이를 데 없지마는 그것은 금시에 변하고 이내 사라져 버려 가을 바람을 견디지 못하며, 생황을 불고 노래를 부름은 한때 흥미를 돋우나, 그 즐거움이 얼마나 갈 것이냐. 이런 것은 다 조화造化 가운데의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사물의 한 경지境地인 것이다. 이러한 환상과 같은 사물의 경지, 곧 꽃이 난만하고 노랫소리가 드높은 곳에 의지와 기개를 가까이 하여 취미를 얻으면, 마음 가운데 방탕한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상의 경지가 아닌,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꽃은 다 시든 뒤를 좇고, 모든 소리가 잠잠하고 모든 맛이 담박한 가운데를 향하여 뜻을 맞추고 취미를 얻는 외에, 따로이 한 가닥의 참 이치를 찾아 얻는다면, 이것은 천지간의 탁약橐籥[풀무, 곧 우주의 기미를 헤아리는 관건]이요, 인간과 사물의 근본이다. 

 

 

 

看破有盡身軀 萬境之塵緣自息 悟入無壞境界 一輪之心月獨明.

 

[독해] 사람의 몸이란 언젠가는 소멸된다는 이치를 간파하면, 이 세상의 온갖 부질없는 인연이 절로 휴식하고, 무심한 경지를 깨달아 돌아가게 되니, 마음이 이륜一輪의 달과 같이 홀로 밝아진다. 

 

[강의] 인간의 몸은 반드시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니, 이 이치를 깨달아 알면 몸뚱이의 생사生死와 고락苦樂에 대한 집착이 갑자기 풀리고, 온갖 속세의 번거로운 인연이 저절로 잦아들어 마음이 활달하고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는 인격을 이루게 되고, 깨달아서 욕망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하나의 심월心月[마음을 둥글고 밝은 달에 비유함]이 홀로 밝게 비쳐 복잡하고 허황한 망상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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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之有生也 如太倉之粒米 如灼目之電光 如懸崖之朽木 如逝海之一波 知此者如何不悲 如何不樂 如何看他不破而懷貪生之慮 如何看他不重而貽虛生之羞

 

[독해] 인간의 생명은 큰 창고에 든 한 알의 쌀과 같고, 눈부신 번갯불과 같고, 낭떠러지에 썩은 나무가 걸린 것 같고, 바다에 출렁이는 파도와 같다. 이러한 실상을 깨달은 자는 어찌 슬프지 아니하고, 어찌 즐겁지 아니할 것인가. 또 어찌 그러한 생명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서 여전히 삶을 탐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며, 어찌 그러한 자각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헛된 삶의 부끄러움을 남길 것인가.

 

[강의] 사람이 우주간에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 몸이 매우 작고도 약하고, 그 살아가는 동안이 빨리 지나가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겨우 일곱 자밖에 안 되는 몸으로 가이없이 넓은 공간에 처해 있어서 그 작기가 큰 창고 안의 한 개 쌀알과 같고, 백 년의 생명을 영원한 시간에 의지하고 있어서 그 빠르기가 눈에 번쩍 지나가는 번갯불과 같고, 그 위태롭기가 천인 절벽에 외로이 서 있는 다 썩은 나무와 같고, 그 덧없이 변함이 바다 가운데 도도히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큰 물결과 같다. 인생이 이와 같이 덧없음을 알면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이와 같이 덧없는 가운데 다행히 삶을 얻었음을 생각하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이와 같이 덧없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찌 부질없이 삶에 집착하는 생각을 품어 구구하게 죽음을 피하고자 하며, 이와 같이 덧없는 가운데 다행히 살아 있음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여 절대한 도덕이나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여 그 빛나는 명예를 길이길이 전하려 하지 아니하고, 시일만 천연시켜 헛되이 살다가 헛되이 죽어가는 부끄러움을 남길 것이냐. 

 

- [정선강의 채근담] 한용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