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藥】

2017. 7. 31. 13:44카테고리 없음

【 '노상 찾기만 하면 노상 거기에 있는 것' 】


무오년戊午年 신수기도 입재일을 맞이해서 (조실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잘 들었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너무 간절懇切했습니다.
이러헌 간절懇切한 법문을 조실스님께서는 십년十年을 두고 거의 매일과 같이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위해서 법을 설說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다섯 사람을 놓고도 설법說法을 하시고 열 사람을 놓고도 설법을, 많이 모일때가 겨우 삼 사십명 사 오십명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래다가 차츰 차츰 조실스님의 법문의 그 간곡懇曲하신 자비慈悲에 법문法門을 듣고 수효數爻가 불어났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 주안朱安 염전鹽田가에 갯벌 황무지荒蕪地에다가 호미로 날마다 조금씩 밭을 일구어서 씨를 뿌리고 씨를 뿌리고 해서 십년간十年間을 두고 하루와 같이 정성精誠 드려서 파종播種을 해놓으신 것과 같습니다.
십년을 두고 밭을 이루어서 씨를 뿌려놨던 그 황무지荒蕪地 밭에서 오늘 이와 같이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정법正法을 믿고 구름과 같이 이렇게 모여서 법문法門을 듣게 된 것을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감개感慨가 무량無量합니다. (잠깐 울컥하심)
이러헌 간곡懇曲한 법문法門을 듣고 발심發心을 못하고 듣고 알기만 하고 열심히 닦지 않는다고 하면은 이것은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받어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 가지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불법 가운데에도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정법正法을 만났습니다.
정법은 책으로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어떠헌 물견으로 되아 있는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眞理를 깨달으신 선지식善知識을 만난 것이 그것이 정법正法을 만난것입니다.

정법正法은 약藥과 같은 것이어서 어떠헌 약藥을 먹어서도 고치지 못할 그러한 무서운 병病에 걸린 사람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그러헌 신령神靈스러운 약藥을 만난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헌 구하기 어려운 약을 만나 가지고 약을 손에 쥐고서도 그 약을 입에다 털어넣고 삼키기만 하면 병을 낫을 수가 있건마는, 손에다 잡았던 약을 입에 넣지 아니하고 손에다가 그럭저럭 들고 다니다가 방 구석에가 내던져 버리고, 심심하면 좀 만져 봤다가 먹을까 말까 하다가 다시 내 던져 버리고, 그러다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얼빠진 사람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정법正法을 만나서 이렇게 간곡懇曲히 일러주신 조실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도 뼈속 깊이 새겨듣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 그러다 보면 흰 머리가 나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나중에는 헐랴고 마음을 먹을 때에는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아니 하게 되는것입니다.

.......


이 몸띵이는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 그러헌 더러운 것으로 가뜩 차 있는 똥 푸대에 지내지 못합니다.
그러지마는 그 똥푸대 속에 신기하게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그러헌 묘妙한 보물이 담겨 있다고 하는 사실.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그 도리道理를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도리를 모든 중생衆生들에게 가르켜 주시기 위해서 80세를 일기로 열반涅槃에 드실 때 까지 앉을 자리 더워 질 겨를이 없이 그 법을 설파說破를 허셨습니다.
그 많은 말씀 가운데, 그 많은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要約해서 누구나 실천하기 좋도록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연마練磨하고 연마練磨해 내려온 방법.
그것이 바로 '이 무엇고(是甚麽)' 인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수십 질 깊은 땅 속에서 금金이나 은銀이나 보석 그러헌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건 깊이 파고 들어가 봤자 혹 찾을 수도 있고 혹 찾지 못헐 수도 있고, 찾어 봤댔자 투자한 금액 만큼, 금액 보다도 더 작은 양이 나오면 나와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더러운 똥 푸대 속에 노상 그 보물이 똥 푸대를 운전運轉을 하고 있고 똥 푸대 속에 들어있는 것 이것이야 찾기만하면 노상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찾을랴고만 하면은 노상거기에 있는것'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찾지 않기 때문에, 찾지 않기 때문에 발견發見을 못한 것이지 열심히 찾기만 한다면 언제나 거기에 있는것입니다.
'이무엇고?' 헐 때 바로 거기에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지기를 바래지만은 그런 것을 바랜다고 해서 빨리 발견 되는것이 아니라 다못 한결같은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이뭐꼬- 이렇게 할 때 이미 거기에 있는것이어요.
그래서 조급한 마음을 내지 말고 법 다웁게 한생각 한생각을 잘 단속해 나갈뿐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올바르게 닦아가는 것인 것입니다.

올바르게 닦지는 아니하고 공연히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툭 터지기만 바랜다고 하는 것은, 농사는 잘 짓지 아니하고 비료 관리도 잘 하지도 아니하고 잡초도 뽑아주지도 아니하고 그러면서 빨리 곡식이 익기만을 바래서 논두럭 가에로 발만 동동거리고 돌아 다니는 사람, 앉았다 섰다 안절부절헌 사람, 그러헌 농부가 있다면 그 사람은 농사 잘 짓기는 틀린 사람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차를 탈 때나 걸어갈 때나, 바로 그 놈이 차를 타는 것이고 그놈이 밥을 먹는 것이고 그 놈이 걸어가는 것이고 그 놈이 성을 내는 것이고 그놈이 우는 놈이요 그놈이 웃는놈이기 때문에, 웃고 울고 성내고 가고 오고 앉고 서고 헐 그 때 그 때를, [바로 '이 뭐꼬-' 이렇게 헐 때에 이미 자기를 찾은 것이며 자기를 발견헌 것이며 자기를 놓치지 아니한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빨리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이 정말 바로 알아드신다면은 '공부가 안되어서 못합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공부를 못합니다. 일이 복잡하고 살림이 복잡해서 공부를 못합니다.' 이러헌 말씀은 아니허실줄 생각합니다.

무엇이 복잡한줄 알며 무엇이 복잡하며 무엇이 망상이 일어나며 무엇이 망상이 일어난줄 아는 것입니까?
망상 일어난 놈이나, 망상 일어난 줄 아는 놈이나, 공부가 안 된다고 번민을 하고 심술을 내는 놈이 '그놈이 무엇이간대' 공부가 안 된다고 짜증을 내고 몸부림을 치고 한탄을 하고, -일이 복잡하다고 공부는 못허고 일 처리해 놓고 공부헌다고- 이러헌 말씀을 허는것입니까.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 '이것은 자기가 허지 아니할 지언정 못헌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을 허셨습니다.

항시 '어리석은 사람은 뒤로 미루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 고 고인古人이 경책警責을 하셨습니다.
'안 된다', '일이 복잡하다', '나중에 천천히 한다' 이 말은 어리석기 그지 없고 공부할 뜻이 없다고 하는 것을 여실如實히 증명證明한 말 밖에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덩어리 똥푸대에 지내지 아니하고 똥푸대에 지내지 않지만은 그 똥푸대 속에 누구나 영원히 행복幸福하게 살수 있는, 바로 자기가 부처가 될수 있는 충분한 보물을 낱낱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질 잘내고 욕심 투성이고 인간답지 못한, 비 인간 적인 모든 사람으로 부터서 몹쓸 사람이라고 지탄을 받는 그 사람도 역시 똥 푸대 속에 부처님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진리체眞理体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헌 고약하고 심술궂고 탐심많고 그러헌 사람 일 수록에 한 생각 돌이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누구못지 않게 용감하게 공부를 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헌 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무오년 새해 신수기도 입재일을 맞이 해서,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내가 나를 깨달라서 영원永遠한 행복幸福을 얻을수 있다고 하는 자각自覺과 자신自信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 자신自信을 가지고 가질 때에 우리는 희망希望이 생기고 그 희망希望이 생길 때 우리의 앞길은 휜허니 열릴수 밲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 입재를 맞이해서 조실스님께서, '주인공아!'
이것은 바로 내가 나에 이름을 불러서 깨우쳐 주는 말씀이라하셨습니다.
이 '내가 나를 불러서 경책 허는 이 한마디 말씀'이 바로 '기도 입재'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알고 가지 아니하고 가다가 중간에 쉬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한번 알았으면 실천을 해야 하고 실천을 하기 시작했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쉬지 아니해야만 그 사람은 성공합니다.

말로 표현 하자니까 간다고 허는 것입니다만은, 사실은 오고 갈것이 없고 앉은 그 자리에서, 언제나 있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허고 있던지 어디에서 무엇을 허고 있던지 때와 장소를 가릴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이 무엇고-헌 놈이 무엇고?
'이' 헌놈이 무엇고-

이렇게 가깝게 간절허게 화두를 들면, 공부되고 안되고 헐걸 따질것이 없습니다.
금방 들어도 없어지면 또 다시 이 무엇고-


【무엇이 안된다 된다 헐것이 없어요.】

무엇이 안된다 된다 헐것이 없어요.
《잘 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해서 잘 된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잘 안된다고 생각한다고해서 그것이 잘 안된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잘된다고 생각한 그 생각은 이 뭐꼬가 아니고 중생심衆生心이기 때문에 그것 못쓰는 것이고,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낸 것도 그것도 이뭐꼬 가 아니고 중생심衆生心이기 때문에 더욱 못쓰는 것입니다.》

잘 된다고 생각할것도 없고 잘 안된다고 짜증낼 것 없이 바로 이 무엇고-?
이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보처럼 목석木石처럼 이뭐꼬- 허라고 허면 이뭐꼬- 이렇게만 허면 되는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6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