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법(法)에 의지해서 공부허까요?】

2021. 10. 9. 12:18카테고리 없음

【송담선사 법문 복전암 45번의 간략한 내용】


[게송]


○ 장상명주일과한(掌上明珠一顆寒) 자연수색변래단(自然隨色辨來端)
기회제기친분부(幾回提起親分付) 암실아손향외간(暗室兒孫向外看)
손바닥 위에 밝은 구슬 한 알갱이가 차웁고 영롱(玲瓏)하구나. 자연(自然)이 모든 색상(色相)에 따라서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밝히고 있구나. 몇 번이나 이 구슬에 대한 뜻을 들어서 친(親)히 분부(分付)해주었건만, 컴컴한 방안에 있는 중생들은 밖을 향해서 찾고 있구나.


○ 삼계유일심(三界唯一心)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는 오직 한 마음이요, 마음 밖에는 딴 법이 없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이 세 가지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일체가 다 평등한 것이다 그거여.


○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금생에 이 말을 깊이 믿고 명심(銘心)하고 이것을 실천을 해서 해나가지 아니하면, 내생(來生)에 지옥에 가서, 또는 금생(今生)에 감옥에 가서 ‘내가 왜 그때 그 말을 깊이 명심하고 열심히 「이 뭣고?」 안했던가?’ 그때 가서 후회하고 한탄(恨歎)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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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내용]


* “무슨 법(法)에 의지해서 공부할까요?” 그것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파사나(Vipasyana)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라.”

비파사나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사염주관(四念住觀)’이다. 사염주관인데, 첫째 ‘몸뚱이는, 요 육체(肉體)는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고, ‘모든 밖의 경계(境界)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을 하고, 세 번째 신수심(身受心),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금방 무슨 생각을 해도 일 초도 안 가서 금방 마음이 변해버려. 더군다나 우리 중생들은 좋은 생각이고 나쁜 생각이고 생각을 했다 하며는 일 초 일초가 지내감에 따라서 변해, 변해버리기 때문에 그 믿을 수가 없고 무상한 것이다. 신수심법(身受心法), 마지막에 법(法)에 대해서는, ‘법이라 하는 것은 이 우주법계(宇宙法界)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그것이 모두 법인데, 그 법이라 하는 것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내라고 하는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염주관이고 범어(梵語)로는 비파사나(Vipasyana)라 하는 것입니다. 그 사염주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라.

[身] ‘무슨 법에 의지해서 하냐? 사렴주관(四念住觀), 비파사나(Vipasyana)에 의지해서 공부하라.’ ..... 이 육체가 자긴 줄 착각을 하고 어쨌든지 자기 이 몸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참 모든 것을 많은 정성과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그걸 투자해가지고 이 몸뚱이를 아주 금옥(金玉)같이 소중히 여기고 그렇지만, 이 육체라 하는 것은 아홉 구멍으로부터서 때도 없이 더러운 것을 흘려 내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 내부는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과 온갖 더러운 것이 속에 가뜩 차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오느니 더러운 것만 나올 수 밖에 없고, 그 더러운 것을 얇은 가죽으로 싸놓은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인데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잘 먹이고 해봤자 숨 한 번 내쉬었다 들이마시지 못하며는 금방 10분도 못 되어서 속에서부터 버글버글버글 썩어서 문드러지는 것입니다. ..... 그래서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受]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거. 색상이나 냄새나 맛이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받아들임으로 해서 온갖 생각이 거기서 일어나고 거기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일어나고 온갖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일어나고 좋고 나쁜 생각이 거기서 일어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이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心]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
우리의 마음은 내 마음이나 다른 사람 마음이나 수시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부처님 성현의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가 생활을 해나가고 우리의 마음을 닦아나가야만 자기 마음도 행복하고 상대방의 마음도 행복하고, 그래서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고, 그러한 가정이 많이 모이면 그런 사회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세계의 평화도 그 간단한 문제를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세계평화도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法] ‘모든 법은, -법(法)이라 하는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을 법이라고 하고 또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법(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법이 어째서, 우리는 법을 소중히 여기고 법이라 그러는데 사실은 우주법계 두두물물이 다 하나하나가 다 ‘법’입니다. 그것은 무아인 것입니다.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 ‘이 뭣고?’는 스님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을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할 줄 알고 ‧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 욕하면 성낼 줄 알고 ‧ 칭찬하면 기뻐할 줄 알고, 눈으로는 모든 색상을 보고 ‘붉다’ ‧ ‘파랗다’ ‧ ‘노랗다’ 그것을 분별할 줄 알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는 ‘저것은 새소리다’ ‧ ‘저것은 개소리다’ ‧ ‘저것은 음악이다’ ‧ ‘저것은 자동차소리다’ 귀로는 모든 것을 분별할 줄 압니다. 그 분별할 줄 아는 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경전에 따라서는 ‘실상(實相)’이라고 하기도 하고 ‘법계(法界)’라 하기도 하고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여러 가지 이름이 수천가지 이름이 있습니다마는, 그 자체(自體)는 원래 이름이 없습니다. 또 모양도 없습니다.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러건만 우리는 각기 사람마다 다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과거에 지은 습기(習氣)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한 생각에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독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방법이,

속이 상할 때 ‘이 뭣고?’
진심이 날 때 ‘이 뭣고?’
슬플 때 ‘이 뭣고?’
괴로울 때 ‘이 뭣고?’
미운 생각이 날 때 ‘이 뭣고?’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상(無常)하기 때문에,무상하지 않고 한 번 굳으면 그대로 간다면 우리는 여간해서 도(道)를 닦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속만 잘하면 중생이 성현이 될 수 있는 길이 환희 열려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단속한다면, 올바르게 단속할 줄만 알면 우리는 얼마든지 견성(見性)해서 성불(成佛)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出現)하신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깨달아서 영원히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 부처가 되라.’ 이것입니다. 우리 불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신 이유도,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탄생하신 까닭도,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각자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을 깨달아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아서 영원한 극락세계를 수용(受用)을 하고 일체중생을 이 법으로 안내해서 수없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욕계 색계 무색계에 있는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려는 까닭인 것입니다.


* 바닷물이, 엄청난 바닷물이 많지마는 그 바닷물을 다 둘러 마셔야만 바닷물 맛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한 숟갈만 먹어봐도 아는 것이고 한 컵만 먹어봐도 아는 것이고 손가락으로 조끔 찍어서 맛만 봐도 바닷물의 짠 맛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경을 많이 읽을수록 좋지 나쁜 것은 아닙니다마는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야만 불법을 아는 것이 아니고 불법을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다 무량겁을 다 닦고 닦아서 깨달은 분이 다 조사이신데, 그 조사의 말씀 한 마디만 옳게 믿고 그대로 닦으면 우리는 팔만대장경을 다 읽지 안 해도 불법을 깨달을 수가 있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아서 우리가 해탈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뭣고?’입니다. ‘이 뭣고?’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공부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무조건 하고 ‘이 뭣고?’


* ‘이 뭣고?’는 그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알 수 없는 의심, 『의심(疑心)을 일으킨 방법(方法)입니다.』 ‘이 뭣고?’ ‘이것이 무엇이냐?’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는 ‘이 뭣고?’ ‘이 ‧ 것 ‧ 이 ‧ 무 ‧ 엇 ‧ 인 ‧ 고?’허면 일곱 자(字)ㄴ데 간단하게 하면 ‘이 뭣고?’가 됩니다. ‘이 뭣고?’는 ‘이것이 무엇이냐?’하는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이 뭣고?’의 목적(目的)인 것입니다.』 몇 번이고 ‘이 뭣고?’를 해도 알 수 없는, ‘이 뭣고?’ 한 뒤에 남는 것이 알 수 없는 의심입니다.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 뭣고?’


* 이것은 머리가 좋은 사람만 할 수 있고 머리 나쁜 사람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만 하고 여자는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나 여자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며는 다 자성불(自性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른 방법으로 찾기만 하면 그것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믿고 끊임없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이 뭣고?’를 하며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기 때문에 못 찾는 법이 없습니다. 저 깊은 땅속에 들었거나 바다 속에 들었다면 여간해서 찾기가 어렵겠습니다마는, 눈을 통해서 볼 줄 아는 놈이요 귀를 통해서 모든 걸 들을 줄 아는 놈을 자기가 찾기 때문에 언제나 찾으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항상 찾고 또 찾고 하다보면 반드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는 공부를 해야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걸 자기가 찾기 때문에 찾다가 중단만 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찾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찾아서 깨달은 사람을 그것을 성현이라 그러고 그걸 부처라고 하는 것이지 부처가 어디서 딴 데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원래는 중생이었었고 그 중생이면서 자기에게 있는 자기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과 조끔도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얼마나 좋으냐? 나 같은 도반을 가졌으니 너희들은 얼마나 좋으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항상 ‘도반(道伴)’이라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49년 동안 열반(涅槃)하실 때까지 그 많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모든 제자들 모든 중생들을 당신의 도반이라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생(衆生)의 근기(根機)가 다르고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결국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부터서 부처님이 우리의 선배요 도반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그 부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그 부처님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나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이나 노사나(盧舍那)부처님이나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여러 가지가 아닙니다. 다 하나요 한 마음이요 한 부처님이요 우리의 도반(道伴)이요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부처님이 있고 모든 다른 사람 몸속에도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면서 서로 아껴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