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8. 15:27ㆍ카테고리 없음
【송담선사 세등 63번, 간략한 법문의 내용】
[게송]
○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
내하유자부지반(乃何遊子不知返)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백운(白雲)의 자식은, 백운이라고 하는 애는 만리(萬里)를 나부껴. 만리를 바람 따라서 날아 댕기지만, 그렇게 만리(萬里)를 돌고 돌다가도 마침내 청산(靑山)이라고 하는 아버지를 잊어버리지 않고 돌아오더라. 어찌 부모 슬하(膝下)를 떠난 객지(客地)로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내 자식은 돌아올 줄을 모르고, 그 오랜 세월 동안을 길을 잃어버리고 풍파(風波)를 쫓는구나.
○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바로 그것이 원래 간격이 없다. 막힌 것이 아니다. 낮에는 밝고 밤에 어두운데 거기서 상량(商量)을 끊을지어다. 본래원만구족(本來圓滿具足)하게 이루어져서 바로 거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니, 무슨 일이 거기에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어떠한 기틀에 당(當)해서 스스로 그놈을 덮어 감추어버릴려고 하지 말아라.
○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三界) 가운데에 분요요(紛擾擾)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생사(生死)의 업(業)바람이 불어서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내 살려고 남을 짓밟고 또 저쪽에서는 자기 살려고 나를 짓밟고,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와 빈부귀천(貧富貴賤)이 그저 비비고 이리비비고 그래가지고는 그 분요요(紛擾擾)한 것이 마치 문틈으로 햇살이 비출 때 그 방 안에 먼지가, 그 수 없는 문지가 이리 날으고 저리 날으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며는 무명(無明)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그 무명업식(無明業識) 때문에 그렇다. 한 생각이 남이 없어가지고 그 마음이 깨끗해버리면,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생(生)도 없고 멸(滅)함도 없더라.
○ 가기철선입해중(駕起鐵船入海中) 조간휘처월정명(釣竿揮處月正明)
창명과래혼불각(滄溟過來渾不覺) 종일행행부지행(終日行行不知行)
쇠로 만든 쇠 배를 타고서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는데, 그 낚싯대 그 박주舶主 꼭대기 빛나는 곳에 달이 정(正)히 밝았더라. 그 낚시 그 박주 꼭대기만을 보고서 떠억 바다물결에 맡겨놓고 그렇게 가는데 언제 어디를 얼마만큼 지금 그 배가 가고 있는지를 몰라. 종일토록 가도 가도 가는 줄을 모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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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내용]
* 이 공부가 어찌,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방법은 천하에 간단하지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다맛 화두(話頭) 하나만을 거각(擧却)하고, 깨닫기를 바래지도 말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쫓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맛 화두만을 들어라. 재미가 없어도 들고 재미가 있어도 들고, 화두가 잘 들려도 화두를 들고 화두가 잘 안 들려도 화두를 들어라.」 이렇게는 알고 있지마는, 그 혼침이 들어왔다가 번뇌망상이 들어왔다가 이놈이 혼침과 산란심(散亂心)이 번갈아가면서 들어오지만 결국은 그놈과 더불어, 이 몸뚱이 생겨난 것이 벌써 그놈 때문에 생겼고 ‧ 그놈과 더불어 뭉쳐졌고 ‧ 그놈과 더불어 살 수 밖에는 없게 되어있어.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번뇌망상이 한 생각 일어난 그 원인으로 해서 이 몸뚱이를 받아났고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흐름 속에 이 몸뚱이를 받아났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 공부의 묘(妙)는, ‘그놈을 여읠려고 하지도 말고 그놈을 따라갈라고 하지도 말고’, 그것이 이 공부해나가는 데 가장 묘(妙)한 법(法)이다 그 말이여.
* 눈으로 청황적백(靑黃赤白) 대소장단(大小長短)을 보고, 귀로 궁상각치(宮商角徵), 큰 소리 작은 소리 ‧ 새소리 ‧ 닭소리 ‧ 기차소리 ‧ 비행기소리 그 듣는 놈, 바로 거기에서 조금도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여. 그러니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이나 상량(商量)을 하지 말어라.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놈을 여의고 찾을려고 하지를 말어. 바로 거기에서 즉(即)해가지고 있는 것이다.
*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 ‘스스로 그놈을 덮어 감춘다’ 하는 것은,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바로 거기에서 깨달음을 구하지도 말고 번뇌를 물리칠려고 하지도 말고, 바른 것을 찾고 삿된 것을 버리고 그런 짓을 하지를 말아라. 상식으로는 ‘삿된 것은 버리고 바른 것을 구해야, 정법(正法)을 구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이 되겠지만, 이 공부를 해나가는 데 있어서는 삿된 것을 버릴려고 하는 것이나 바른 것을 구할려고 하는 생각이 둘 다 삿된 것이여 그게.
‘번뇌를 끊어버리고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모두 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만, 실지(實地)로 실다웁게 공부하는 바로 그 자리, 그 마당에 있어서는 번뇌를 끊은 것이나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모두가 다 번뇌(煩惱)여 그것이. 그래서 빨간 꽃을 보아도 나는 ‘이 뭣고?’ 뿐이고, 파란 이파리를 보아도 나는 ‘이 뭣고?’ 뿐이여. 조실(祖室)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을 때에도 나는 들으면서도 ‘이 뭣고?’ 뿐이여. 비행기소리를 들어도 나는 ‘이 뭣고?’ 뿐이고, 비행기소리를 들으나 자동차소리를 들으나 저 새 우는 소리를 들으나 개 짖는 소리를 들으나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건 간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한 것뿐이다 그 말이여. 그래야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고, 비행기 소리나 닭소리나 개소리나 새소리나 일체가 바로 최상승법문(最上乘法門)이여.
* 누가 나에게 분(粉)을 발라주고 향수(香水)를 뿌려주나, 누가 나에게 욕(辱)을 하고 험담(險談)을 하고 억울한 소리를 하나, 참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수행해나가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분발라주고 향수를 뿌려준다고 해서 좋아하고 나를 험담하고 욕하고 비방(誹謗)한다고 해서 진심(瞋心)을 낸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발심한 사람이 아니요 참으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 아니여.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나가야 거기에서 소분(小分), 조금 그 사람은 정진(精進)을 할 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청춘을 버리고 부모형제와 고향을 버리고 인생을 다 버리고서 들어온 이 마당에 무슨 시비(是非)가 거기에 붙을 것입니까? 벌써 시비에 놀아나고 시비에 말려든 사람은 발심(發心)을 한 사람이 아니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여기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지내가지고 시비에 말려들고 남이 시비를 하고 남의 시비에 내가 말려든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 중생(衆生)의 은혜(恩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수없는 중생들이 있는데 그 중생의 은혜야말로 국왕(國王)의 은혜나 국가 민족의 은혜나 부모의 은혜나 신도단월의 은혜나 스승은혜, 그 다 ‘오종대은(五種大恩)’이라 그러지만 그 오종대은 보다도, 우리 눈으로도 잘 보이지 아니하고 그렇게 나타나지도 아니하지만 한량없는 중생(衆生)의 은혜(恩惠)가 정말 참 한량이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크고 큰 것이 허공(虛空)인데 허공만큼 그 은혜가 큰 것이 바로 중생(衆生)의 은혜(恩惠)라 이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무량겁을 두고 오면서 그 한량없는 중생 속에 우리도 한 사람이지만 그 한량없는 중생으로 더불어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선망부모도 그 중생이요 부처님도 과거는 중생이었었고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우리의 선지식(善知識)들도 전부가 한때는 우리와 같은 중생이었었고,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우리는 중생을 여의고 살 수가 없습니다. 중생을 위해서 있고, 중생과 더불어 있고, 중생 때문에 불법(佛法)이 필요하고, 중생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불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출현을 하는 것이고 불법도 바로 중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는 것도 결국은 중생(衆生)을 위해서 도(道)를 닦는 것입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결국은 중생(衆生) 때문에 나왔고 중생 때문에 있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自身)을 위해서 지혜(智慧)를 닦는 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요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는 것은 바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인데, 그것이 바로 중생(衆生)을 위하는 것입니다. 위로 지혜를 구하는 것도 중생(衆生)을 위함이요 법을 설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도 또한 이것이 중생(衆生)을 위하는 것입니다.
* 중생의 목숨을 먹고 살고 ‧ 중생의 목숨을 입고 살고 ‧ 중생의 수없는 목숨을 우리는 밟고 살고 있었어. 그러니 우리가 중생(衆生)의 은혜(恩惠)를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승불법(大乘佛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중생(衆生)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 지금 중생(衆生)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마는, 그 자기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바로 생(生)이고 한 생각 멸(滅)한 것이 죽음인데, 자기의 일념(一念)의 그 한 생각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한 생각이 끊어져버리면,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어. 자기 한 생각 끊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육도법계(六道法界)의 한량없는 중생이 그렇게 먼지처럼 생사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얼키고설키고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자기 한 생각 끊어지며는, 자기 일념(一念) 속에의 생사(生死)가 끊어져버리면 삼계(三界)도 거기에는 끊어져버리고 육도법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도법계가 그렇게 벌어져서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은 결국은 자기 한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다. 육도법계 중생을 제도할려며는 자기의 마음속에 한 생각을 제도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제도해야할 중생도 없고 제도 받을 중생도 없는 것을.
_______ + 이 음식이 어디서 왔나?
모든 생명들의 죽음에서 왔구나.
저 죽음이 이 생명의 근원이 되는 세상 속을 우리는 살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