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31. 12:39ㆍ카테고리 없음
【스위치, 파도가 그대로 물】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해서 대도(大道)가 밝고 분명(分明)해. 도(道)라고 허는 것이 저 우리 문밖에 나가며는 길이 있는디 그 길은, 반드시 그 길은 서울허고 통해져 있다. 나가서 걸어가면 어느 쪽으로 걸어가든지 결국은 좀 직선으로 가느냐, 좀 돌아가느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울과 통해 있는 거여.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여.
잘 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사람 사람,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본래원만(本來圓滿)허게 갖추어져 있어 그 도(道)가. 어느 집, 김가(金家)네 집이나, 이가(李家)네 집이나, 박가(朴家)네 집이나, 문 밖에 나가면 그 문 밖에 길은 서울에 통해져 있듯이, 김가나 박가나 ‧ 남자나 여자나 ‧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낱낱이 그 사람 사람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이미 부처가 무량억겁(無量億劫) 전(前)에 이미 다 성불(成佛)이 다 되아가지고 있는 거여.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긴 그 탓으로 해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여.
영겁(永劫)을 두고 만 가지의 모냥을 현출(現出)을 허고 있다. 그 지은 한 생각 어긋져가지고 그것이 원인이 되아가지고 사람도 되고, 짐승도 되고, 지옥(地獄)에도 가고, 천당(天堂)에도 가고, 축생(畜生)도 되고 그런데, 그런 가운데도, 사람이 된 가운데에도, 사람도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이 다 다르고, 또 사람 생김새가 천만 인, 억만 인이 모여도 그 얼굴이 다르다 그 말이여. 쌍둥이는 비교적 비슷하게 태어났다고는 하나 어디가 다르든지 다르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는 것이여. 그 왜 그러냐하며는 한 생각 어긴 이후로 지은 업(業)이 다 각기 다르기 때문에 다른 모냥을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참선(參禪)을 허는 것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자기의 마음, 자기의 부처를 갖다가 찾는 것인데, 본래 부천데, 지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이치(理致) 상(上)으로는 우리의, 우리의 불성(佛性)이 부처와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으니 나 자신도 부처라고 할 수가 있다 허지만, 양심적으로 생각헐 때 우리가 어디다 떳떳이 내놓고 ‘나도 부처님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다, 나도 여래(如來)다’.헐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거 헐 수 없는 것은 한 생각 어긴 탓으로 이렇게 되았어. 그러니 다시 정말 명실공(名實共)히 완전무결(完全無缺)한 불보살(佛菩薩)과 똑같은 불보살... 부처가 될라면 그 한 생각을 탁 돌이키는 데에 그 묘(妙)가 있는 거여. 한 생각 어긋나서 중생이 중생(衆生)에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다시 부처로 돌아갈라면 그 한 생각을 돌이키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전기 스위치(switch)를 탁 누름으로써 불이 꺼졌으면, 그 눌러진 스위치를 탁 위로 올리며는 불이 탁 켜진 거와 같다. 중생성불(衆生成佛)이 찰나간(刹那間)이거든.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닦아야 성불(成佛)을 할 수가 있다.’ 교리(敎理) 상(上)으로는 그렇게 되야 있는 데가 있지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는 한 생각에 중생성불이 달려 있는 것이여. 우리가 ‘본래부처’가 아니라면 지금부터서 삼아승지겁을 닦아간다 해도 그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본래부처’거든. ‘본래부처’라고 허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다못 한 생각 어긴 탓으로 그 업(業)으로 인(因)해서 지끔 이렇게 매(昧)해가지고 있는 것뿐이지, 한 생각 탁! 돌이켜 버리면 우리도 찰나간에 스위치 한 번 넣으면 불이 캄캄해졌던 방이 불이 환히 밝아지듯이, 불이 천천히 밝아진 게 아니예요. 스위치 탁! 넣으면서 일시(一時)에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듯이,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우리도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된다.’ 고 허는 말도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어서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라고 허는 것을 믿고 우리는 참선을 허는 것이지, ‘이렇게 험으로써 장차 부처님이 된다’고, 그거 벌써 틀린 것입니다. 방편(方便) 상(上)으로 그렇게 말허기도 하지만,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허는 사람은, 이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허는 사람은 ‘내가 부처’라고 처음부터서 그렇게 믿고 대드는 것입니다. 업(業)을 소멸(消滅)을 해가지고 차츰차츰 부처가 되는 것, 그것은 이 활구참선이 아닙니다. 소멸해야 할 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허는 그 본질(本質)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질은 부처인 것이지.
마치 저 파도가 따로 어디서 파도라고 허는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물이 바로 파도인 것입니다. 물이 움직이고 있으면 그것을 파도라고 허는 것이지 물을 내놓고 파도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파도를 여의고 물을 찾는 것이 아니고, 중생을 여의고 부처를 찾는 것이 아니고, 망상, 번뇌망상(煩惱妄想)을 여의고 보리(菩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고, 중생이 바로 부처라고 허는 것은, 파도와 물의 관계여. 파도를 띠어 내고 없애고서 물이 있는 것이 아니여. 파도가 바로 물이거든. 우리는 그렇게 처음부터서 믿고 들어가야 깨달을 수 있는 분(分)이 있는 것이지, 믿음이 잘못 되아 갖고 있으면 평생을 공부해도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 생각을 탁! 돌이켜 가지고 부처가 되느냐 하면, 바로 그것이 ‘이 뭣고?’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허는 분은,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를 허는 분은 ‘이 무엇고?’ 무자(無字)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한 생각 썽이 날 때 확 울화가 치밀 때에도 퍼뜩 돌이켜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 한 생각에 치밀어 오르던 울화는 간 곳이 없어져 버리거든. 억울한 말을 듣고 분한 생각이 날 때에도, ‘이 뭣고?’ ‘이 분(憤)한 생각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이 뭣고?’. ‘「이뭣고?」헌 바로 이놈이 무엇고?’, ‘「이」허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해보라 그 말이여. 한 생각에 억울한 생각도 간 곳이 없고, 분한 생각도 간 곳이 없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바로 파도, 파도거든. 우리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며는 물이 흐려지는 거고, 파도가 가라 앉으며는 물이 고요해지거든.
물이 고요해야 하늘에 뜬 달도 온전히 거기에 비추는 거고, 파도가 일어(나)버리며는 하늘에 뜬 달은, 달 자체는 둥글지마는 물에 비친 달은 산산조각이 나버리거든. 산산조각이, 물에 뜬 달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해서 하늘에 뜬 달마저 깨져 부서진 것은 아니여. 망상을 허나 썽을 내나 죄를 짓거나 우리의 각각 갖추어져 있는 우리의 본마음에 부처자리는 조금도 동요(動搖)가 없는 것이지만, 그 동요 없는 그 자체를 우리는 항상 관(觀)해 나감으로써 우리의 거기에 무량겁 지은 업(業)도 거기서 다 녹아져 버리고 새로 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간다고 해서 우리의 본성자리가 달라진 것이 없어. 천하 간단한 법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업(業)을 소멸(消滅)하고 다시 업을 짓지 아니험으로 해서 우리의 본성(本性)을 요달(了達)하는 도리는 너무나 간단허고도 분명한 것이어서, 이것은 제가 해야지 남이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세등 57번.
* 全波是水,全水是波.
파도 그대로가 이 물이요, 물 그대로가 이 파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