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0. 09:13ㆍ카테고리 없음
황앵상수일지화(黃鶯上樹一枝花)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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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은 조실(祖室)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잘 들었습니다. 조실스님께서 법문을 시작허신 최초에, 금방 산승(山僧)이 주장자(拄杖子)를 떠억 들었다가 텅! 하고 법상(法床)을 치듯이 조실스님께서도 주장자를 들어서 대중(大衆)에게 보이고 그리고서 법상을 탁! 치시고서 게송(偈頌)을 읊으셨습니다. 그리고 조실스님께서 법문하시기를, 삼천 년(3000년) 전에 서가여래(釋迦如來)부처님께서 백만억(100만억)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백만억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설법(說法)을 허실 때에 연꽃 한 송이를 떠억 높이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셨습니다. 백만억 대중이 아무도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시는 뜻을 몰르... 몰랐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 마하가섭(摩訶迦葉) 한 분만이 삐긋이 웃으셨습니다. 그러함으로 해서 부처님께서 ‘가섭존자가 오직 이 법을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하셔서 부처님의 법(法)이 가섭존자에게 전(傳)해졌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연꽃을 떠억 드신 그 도리(道理)가 바로 조실스님께서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는 뜻과 같다’고 말씀을 하시고, ‘주장자를 떠억 들어 보이는 그 뜻이 벌건 석양(夕陽)에 해가 푸른 산에 걸려있고 기러기 때가 자질을 허면서 석양의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도리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은 주장자를 여러분께 들어 보이고, 그리고서 게송을 읊기를, ‘노란 꾀꼬리가 나무 가지에 올라가니 한 송이 꽃이요, 하얀 해오리가, 백로(白鷺)가 논에 내려앉으니 천점(千點)에 눈송일러라.’ 이렇게 게송을 읊었습니다. 조실스님 법문에,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은 도리가 조실스님께서 주장자를 들은 도리와 같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조실스님께서 드신 주장자와,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들으신 연꽃을 드신 뜻과, 산승이 오늘 주장자를 들고서 읊은 게송에 뜻이 같으냐? 다르냐?
같다고 해도 맞지 않고 다르다고 해도 맞지 않으니, 이 도리는 중생(衆生)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같다’, ‘다르다’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오직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철두철미(徹頭徹尾) 참(參)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함으로써만이 바로 이 도리(道理)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론적으로 따져서, 사량심으로 따져서 ‘같다’, ‘다르다’ 말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조사공안(祖師公案) 상(上)에 어떠헌 조사에 공안이나 화두나 법문을 대하더라도 바로 깨닫지 못했으면 자기의 본참화두(本參公案)를 바로 거각(擧却)헐지언정 이리저리 사량심을 움직여가지고 알랴고 그러고 따져서 무슨 해답을 구하는 그러헌 마음가짐은 옳지 않는 것입니다.
비단 조사공안 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經典)에 있는 모든 말씀, 비단 경전에 있는 부처님에 말씀뿐만이 아니라 사회에 모든 사건(事件),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제기되는 일체의 문제에 관해서도 바로 자기에 본참화두로 돌아올 줄 아는, 돌아올 때에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단축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어데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번갯불보다도 더 빨리 자기의 본참화두로써 모든 일을 대해나가고 일상생활을 영위해나간다고 하며는 우리의 도업(道業)이 늦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면 보는 데 끄달리고, 귀로 들으면 듣는 데 끄달리고, 무엇을 느끼면 느낌으로 해서 자기의 생각들이 연속적으로 그 연상(聯想)이 가지를, 가지에 가지를 뻗쳐서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나감으로 해서 계속 쉴 사이가 없이 뻗어나갈 때에 우리는 우리 본참공부에 많은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마는데,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정말 발심(發心)한 수행인(修行人)은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느끼던지 간에 두 번 생각, 세 가지 생각으로 뻗어나가기 이전에 바로 그 생각에서 한 걸음도, 한 생각도 옮기지 아니하고 나에 본참화두로 의심(疑心)을 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허며는 우리의 공부는 즉일성지(即日成之)여. 하루하루 공부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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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허며는 그 죄를, 과거에 지은 죄(罪)를 소멸(消滅)을 하고, 어떻게 하면 새로 죄를 짓지 아니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영생(永生)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하던지 무엇을 생각허던지 간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 뭣고?’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고?’ ...(녹음불량)... 썽이 날 때는 ‘이 썽낼 줄 아는 놈이 무엇인고?’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엇인고?’ 항시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서 ‘이놈이 무엇인고?’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놈. 웃을 중도 알고 울 중도 알고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썽낼 줄도 알고. 아,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놈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이 뭣고?’ 헌 그 생각으로써 일체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일체슬픔을 ‘이 뭣고?’로써 대항(對抗)해나가고 일체기쁨을 ‘이 뭣고?’로써 단속(團束)하고 일체 썽내는 생각을 ‘이 뭣고?’로써 되돌려서, ‘이 뭣고?’가 바로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 잠시도 여의지 않도록.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면 과거에 지은 죄도 ‘이 뭣고?’ 한번 듦으로써 소멸이 되고 ‘이 뭣고?’로써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때에 새로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마침내 인격을 완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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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활구참선법은 온갖 길 중에서 최고에 길이요 온갖 방법 중에서 최고에 방법입니다. 가장 쉬웁고 가장 간단한 길인 것입니다. 일상생활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바로 내가 나를 찾는 길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내 몸 밖에서 찾는 것은 그것은 방법 중에서 가장 먼 방법이 되는 것이고, 유치원 애들한테 일러주는 방법에 지내지 못합니다.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쉬운 길은 가장 가까운 데서 찾는 것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 땅 속을 뒤져가지고 보물을 찾을라고 허는 것, 영생(永生)을 얻기 위해서 내 몸밖에 저 하늘에서 진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어리석기가 한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눈으로 볼 때 볼 줄 아는 놈을 찾고 썽이 날 때 썽낼 줄 아는 놈을 찾는다면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가 없고 거리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계시다’ 하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저 수 억만 키로(km) 우(위)에 저 허공 속에 계신 줄 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바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헐 수 없다’고 말한 그 말을 바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바로 찾을 수, 찾은 사람은 우리가 언제나 어데서나 하나님 품에 있다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가까운 데 계신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도망갈라야 하나님의 품안을 도망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우주에 가뜩 차 계시고 우리의 가슴 속에 언제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있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저 멀리 허공 속에서 찾고 저 푸른 하늘 저 밖에서 찾는다고 허며는 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부처님이 삼천 년(3천년) 전 인도에 계시,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안 계신 줄 안다면 그 사람은 불교를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 우주 속에 충만(充滿)해 계시고 우리가 말하고 듣고 있는 그 찰나(刹那)에도 부처님을 여의고는 우리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보고 듣는 가운데에 소소영영(昭昭靈靈)헌 그곳에 부처님은 계신 것입니다. 그 보고 듣는 그놈을 여의고 우리의 자성(自性)을 찾는다던지 부처님을 찾는 동안에는 영원히 부처님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속에 있으면서 부처님을 찾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을 뵙지 못한 것뿐이고 부처님은 언제나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잠시도 여읠 수 없는 그 부처님 찾는 방법이, 사량심(思量心)을 버리고 ‘이 뭣고?’ 이론으로 찾을려 허지 말고 다맛 꽉 맥힌 마음으로 본참화두(本參話頭)에 충실헐 때에 우리는 언제나 부처님 품안에 있는 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뭣고?’ 이론으로 풀랴고 아니헐 때 우리는 참선을 바로 허고 있는 것이고, 참선을 바로 헐 때에 바로 거기에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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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담선사 법문 세등 15번.
* 하느님, 하나님: 법문에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옮기고자 해서, ‘하느님’ 때로는 ‘하나님’으로 위와 같이 채록하였습니다. (세등 15번 19분 55초)
“하느님은 <이 우주에> 가뜩 차 계시고 <우리의 가슴 속에> 언제나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있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저 멀리 허공 속에서 찾고 저 푸른 하늘 저 밖에서 찾는다고 허며는 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