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념이전(一念以前)에 중생(衆生)이 일념후(一念後)에 여래(如來)의 땅에】

2021. 6. 26. 19:50카테고리 없음

[송담선사 법문 세등선원 7번의 간략한 내용]


* 부처님이 고행을 하시다가 가만히 생각해보시니까, 그 ‘굶고 잠을 안자고 그 고행을 해서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을 조복(調伏)받아야만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시고 하시다가, ‘이 몸뚱이를 이렇게 먹여주지 아니하고 재워주지 아니하고 이렇게 들볶음으로 해서 도(道)를 성취(成就)한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는 먹여줘야 하고 어느 정도는 재워줘야 하고 그럼으로써 맑은 정신으로 도를 닦아야만 도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드셨다 그 말이여.....

부처님은 목욕(沐浴)을 하시고 수자타가 바친 그 죽을 잡숫고는 아주 원기(元氣), 기운을 차리셔가지고 몸이 기운이 생기니까 정신도 깨끗해지고 그렇게 되셨다 그 말이여. 그래가지고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 가서 다섯 교진여들이 떠나거나 말거나 그까짓 거 상관이 없고, 보리수나무 밑에 떠억 앉아서 정진(精進)을 하시는데 그렇게 참 개운하고 아 여태까지 6년 동안 고행한 가운데 맛보지 못한 그렇게 성성(惺惺)한 그러한 기분으로 떠억 보리수나무 밑에 가부좌(跏趺坐)를 떠억 틀고 앉으셨다 그 말이여. 그래가지고 납월 팔일(臘月八日, 음력 12월 8일) 새벽에 뜨는 샛별을 보시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어.


* 조실(祖室)스님께서는, 당신께서는 소싯(少時)때 100일 용맹정진을 여러 사람이 짜고 하다가 다 중간에 다 나자빠져버리고 조실스님과 또 한 분, 두 분인가가 딱 백일기도를 참 원만(圓滿)히 성취(成就)하신 그러한 일까지 다 있으신 어른이시지마는, 당신이 이렇게 조실로 계시면서 학자(學者)를 제접(提接)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그러한 용맹정진을 그렇게 시행(施行)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안 하고 마냥 조실스님께서는 평소에 하루하루를 여법(如法)하게 알뜰히 정진한 것 그것이 바로 참으로 정진을 위해서 좋은 효과를 거둘 수가 있지, 평소에 그럭저럭 잡담(雜談)과 취두한화(聚頭閒話)로써 입선(入禪)하며는 시간 맞춰 정진(精進)하다가 방선(放禪)하며는 잡담(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일용중(日用中)에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그 용맹정진한다고 일주일 동안 잠 안자고 그러한 정진은 평소에 좋아하시질 안했습니다. 그래서 8일에 용맹정진을 별로 그렇게 강요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천 용화사(龍華寺)도 그동안에 별로 8일 용맹정진을 하지 아니하고 평소에 알뜰하게 공부하는 방향을 취택(取擇)을 하고 있습니다.


*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해나가느냐.’ 우리는 어릴 때부터서 죽을 때까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그러한 연속(連續) 속에서 일생을 보내는데, 그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도 있고 악한 생각도 있고 부질없는 생각도 있고 아무 선(善)도 악(惡)도 아닌 그런 주책없는 생각도 있고 그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것을 무심코 모든 사람들이 지내고 있지마는 ‘그것이 원인(原因)이 되어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게 된다’고 하는 엄청나고 무서운 사실을 우리는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그것을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참으로 불법(佛法)을 진실로 믿고 정법(正法)을 신(信)하는 사람은 ‘생사(生死)가 바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고, 생사,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바로 났다 죽었다 났다 죽었다 한 생사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임(臨)했을 때, 그 생사심(生死心)에 우리가 당(當)해가지고 어떻게 마음을 가다듬어나가느냐.’ 공부를 할 줄 모른 사람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점점 조그만한 성냥불 하나에 거기에 점점 기름을 붓고 마른 나무를 갖다가 넣고 해가지고 불을 점점 키워가지고 자기 집도 타고 남의 집도 타게 하는 것이 중생(衆生)의 세계(世界)라면, 우리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 한 생각 폭 일어나는 그 생각이 멀리 크게 퍼지기 전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온단 말이여.


* ‘이 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 하지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을 그 자리에서 바로 돌려서 자기 본참화두를 들어나가는 그것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사람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에 휩쓸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 생사심(生死心)을 그놈을 되잡아서 보리도(菩提道)로 돌리는 묘방(妙方)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낱낱이 화두를 들어서 보리(菩提)로 향하는 좋은 계기(契機)가 된다고 하는 것이 정법(正法)을 신(信)하지 아니한 사람과 정법을 신해서 참선(參禪)을 한 사람과의 차이가 거기에서 있는 것이다.


* 도(道)라 하는 것이 「한 생각 돌이키면 일념이전(一念以前)에 중생(衆生)이 일념후(一念後)에 여래(如來)의 땅에 뛰어 들어가는 것」인데,


*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점진적(漸進的)이 아니라 이것은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여. 화두(話頭)가 순일(純一)해지면 자연히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없어지게 되고, 일어났다 꺼졌다 한 생각이 다 없어진 것을 뭐라고 하냐 하며는 「적적(寂寂)」하다고, ‘적(寂)’이라고 하는 것이단 말이여. 「적적(寂寂)하다」그런 것인데, 그 적적한 가운데에 까딱 소홀히 하며는 화두를 놓아버리기가 쉬워. 너무 조용하고 편안하기 때문에 화두를 놓쳐버리기가 십상팔구(十常八九) 쉬운데 화두를 놓쳐버리면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기(無記)」라고 하는 것이여. 무기(無記)는 아무리 하루 종일 까딱을 않고 앉았다 하더라도, 또는 십 년(10년) 이십 년(20년)을 고대로 만들어 놓은 부처님처럼 앉아서 지낸다 해도 그것은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요 그 공부는 진실한 공부가 아니여.


* 그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는 것.」 깨끗하게 화두가 그대로 들려야 돼.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한 그것을 ‘영(靈)’이라 그래. ‘신령(神靈)스러운 경지(境地)’라, 신령스럽다는 영(靈)이다 그 말이여. 「영지(靈知)」라 그런 거지, 영지. ‘신령스럽게 안다.’ 영지. 그 공적(空寂), 적적한 가운데에 영지(靈知)라야 되거든. 「공적영지(空寂靈知)」라야 한다 그 말이여. 공적(空寂)하면서 그 가운데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그것이 정진(精進)이 옳게 되어가는 것이여.


* 그래가지고 「무괴무잡(無壞無雜)」이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걸어가거나, 소지(掃地)를 하거나, 조금도 무너짐이 없고 조끔도 섞임이 없어. 무엇을 하거나, 어떠한 행동을 하거나, 누웠거나, 앉았거나, 걸어가거나, 밥을 먹거나, 소지를 하거나, 그대로 그 물결 없는 깨끗한 호수에, 바람 없는 호수에 하늘에 뜬 쟁반 같은 밝은 둥근 달이 물에 비추었을 때에 그대로 하늘에 달이 바로 물에 비추듯이,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가운데에 자기의 화두일념(話頭一念), 화두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이 그대로, ‘이 뭣고?’ ‘이 뭣고?’ 안 해도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 뭉탱이가 떠억 현전(現前)해갖고 있는, 그렇게 해서 그러한 단계에 공부가 접어 들어서 하루 이틀 사흘 하며는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반드시 확철대오 할 수 있다고 고조사(古祖師) 스님네가 한결같이 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 차라리 이 법을 모르면 몰라도, 이 법이 깨달을 수 있는 바른 법이라는 것을 알고서 핑계를 대고 안 하는 것은 자기가 정말 깊이 믿지 못하는 소치(所致)고, 믿고도 아니하는 것은 그것은 해태(懈怠)에 빠진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 화두(話頭), 처음에는 잘 안되지마는 화두를 들어나가는데 화두에 대한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그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을 「진의(眞疑)」라, ‘참된 의심이다.’ 그리고 화두 의심이 조끔 있다가 또 조끔 있으면 또 없어졌다. 있어졌다, 없어졌다. 화두를 들면 잠깐 있다가 금방 없어졌다, 이렇게 그 연속(連續)을, 화두에 의심이 계속을 하지를 못하고 의심이 있다 없다 끊어진 것은 이것은 참마음으로 의심을 발(發)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진심발의(眞心發疑)가 아니다.’ 이것은 「주작(做作)」이다 그 말이여. 억지로 그저 지어서 그저 한 것이여.


* 정말 참의심이 돈발을 하고 참신심으로 분심으로 그놈이 삼위(三位)가 일체(一體)가 되어가지고 의심이 저절로 속에서 솟구쳐 나올 때에는 절대로 혼침(昏沈) 도거(掉擧), 졸음 끄벅 끄벅 졸거나 산란심(散亂心)이 침범(侵犯)을 못하는 것이여. 그것을 지어서 억지로 하기 때문에 혼침이 오고, 혼침이 아니며는 산란심이 오고, 산란심이 쪼끔 가라앉을 만 하면 혼침에 빠지고, 내동 끄벅 끄벅 하다 잠이 쪼끔 깰라 그러면, 깰라 하며는 산란심이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그래서 일 년(1년) 이태(2년) 삼 년(3년) 이렇게 지내가도 참 공부가 조끔도 나아간 것 같지를 않고 그런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진을 아니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냐. 억지로라도 바르게 앉아서 심호흡(深呼吸)을 하면서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 뭣고?’ 금방 들기가 무섭게 딴 생각이 침노(侵擄) 하지마는 또 의심을 들고 억지로라도 계속해서 간절히 간절히 억지로라도 밀고 나가며는 나중에 참의심이 돈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 이 정진을 해나가는 데는 심호흡(深呼吸)을 꼭 해야 합니다. 심호흡을 안 하고 ‘이 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머리로, 눈썹 사이에다가 의심을 모으고 그 머리로 의심을 짜서 나가며는 전신(全身)에 기운이 두상(頭上)으로, 머리로 모여들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상기(上氣)가 되어가지고 골치가 아파지고 맑은 정신이 없어지고 그렇게 되며는 공부에 장애(障礙)를 초래(招來)하는 것이여.


* 생각이 또 잠깐 일어났다 꺼졌다 해도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은 간단(間斷)이 없고 화두는 그대로 들어지면서 잠깐 번갯불보다도 더 빠른 시간에 딴 생각이 잠깐 스쳐 가버리고 그러한 것은 우리는 뭐 별로 공부해나가는데 장애가 없는 것이여. 그런 것은 관심가질 필요도 없는 것이여. 그대로 놔둬. 저가 그냥 잠깐 들어왔다 나가버린 것은 신경을 전혀 거기다가 쓰지를 말고, 자기가 들고 있는 그 화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아랫배에다가 화두(話頭)를 떠억 거기다가 두고 ‘이 뭣고?’ 하는 그 가운데에 배는 조용하니 불렀다가 조용하니 홀쪽해졌다 한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나가면 혼침, 졸음 오는 것도 그것으로써 극복을 헐 수가 있는 것이여.


* 공부가 그렇게 잘되아갈수록에 더 조심을 하고 행동과 말과 생각을 더욱 근신(謹愼)을 하면서, 조심하면서 잘 공부를 지혜스럽게 다잽이를 해나가는 것이여. 그렇게 공부가 잘 되아가다가 또 뚝 변해가지고 영 몸이 괴롭고 가슴이 답답하고 영 화두가 잘 잽히지를 않고 그렇게 애를 먹는 경우가 또 찾아온다 그 말이여. 잘되면 계속해서 잘되아야 하겠는데 잘되아가다가 또 뚝 변해가지고 영 정신이 안정이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고 그렇게 깨끗지를 못하고 이러는데, 그럴 때에 아주 그때가 참으로 중요한, 중대한 곳이여. 그러한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지루하고 몸이 뒤틀리고 맑은 정신이 없고 그것이 공부가 잘 못될려고 그런 게 아니라 공부가 한고비 넘어서려고 그러한 경지가 찾아오는 것이여. [서장(書狀)]에 보각대혜선사(普覺大慧禪師) 법문 가운데에도 여러 차례 그런 말씀이, 법문이 나오지마는,


* 공부가 한 고비 넘을려고 하는, 아주 그 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대가(對價)로 해서 그 한 고비 넘을려고 하는 그러한 좋은 단계를 살리지를 못하고 심술을 부리고 공부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말이여. 어린애를 길러본 보살님네는 잘 아시겠지마는, 잘 크다가 그놈이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따끈따끈 하거나 무슨 병을 잠깐 앓게 되는데, 병을 한 번 앓고 나며는 그 그동안에 하지 않던 재주하나를 부리고 재롱을 부린다 그 말이여. 말도 못하던 것이 말도 한 자리씩 하고. 한번 앓고 나면 어린애는 부쩍 그 살은 좀 빠진 것 같아도 푹 크면서 안 하던 재주를 부리게 되는 것을 경험허신 분이 계실 겁니다. 이 공부도 한바탕 그런 어려운 고비를 당했을 때에 그것을 잘 고비를 넘기며는 한결 정진 공부가 수월해진 그러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 잘되어도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고, 환희심을 내며는 환희(歡喜)의 마군(魔軍)이가 내 마음으로 들어온 것이여. 또 공부가 잘 안되더라도 그 성을 내고 모다 그러며는 성내는 마군이가 내 마음에 벌써 침범한 것이여. 마군이는 환희에 마군이도 내 마음에 들어오며는 진실한 공부가 아니고, 그러한 성내는 그런 마군이가 들어와도 그것이 공부에 지장을 초래한 것이여.


* 우리는 아무리 좋은 조건에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고 백만 가지가 좋은 조건에만 놓여지면 공부가 잘 될 것 같지마는, 사실은 너무 좋고 편안하고 조건이 좋으며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방일(放逸)에 빠지기 쉽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불편한 점도 있고 여러 가지가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방사(房舍)나 주위환경이 좋기도 하고 때로는 언짢은 일이 있기도하고 해서 이런 변화(變化)가 있어야, 변화 있는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채찍질을 하면서 공부를 지어나간 그 공부라야 진짜 산 공부를, 그리고 보다 더 빨리 성취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법성게(法性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即是無量劫)」이거든. 「일체즉일(一切即一)」, 일체가 곧 하나거든. 하나를 여의고 일체가 없는 것이고 일념(一念)을 여의고 무량겁(無量劫)이 없는 것이여. 그래서 그 일념(一念) 무서운 줄을 알고 그것을 잘 단속(團束)할 때에 무량겁(無量劫) 생사해탈(生死解脫)은 우리에게 찰나(刹那) 동안에, 일 초 동안에 한 번 뛰어서 여래(如來)의 땅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그 묘리(妙理)가 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 송담선사 법문 세등 7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