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 절切、 춘하추동(春夏秋冬)】

2021. 4. 15. 15:35카테고리 없음

 

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하고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멱시무물우무종(覓時無物又無蹤)호되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호되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로구나.

이 구슬이 크지도 않고 또한 작지도 않은 것이 밤과 낮에, 밤낮으로 그 광명(光明)이 모든 것을 다 밝게 비추고 있구나.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하시면 화두를 수여할 때에,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은 육체적(肉體的)인 모든 동작(動作)과 정신적(精神的)인 모든 작용(作用) 그것을 합해서 동, 「동용」이라 그러는데- 동용하는 가운데에 이 한 물견이 항상 소소영영(昭昭靈靈)허게 작용을 허고 있다. 그런데 그 동용(動用)허는 가운데에 수부득(收不得)하니, 그놈을 찾어보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랴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을 여기서는 ‘한 물견’이라 하는 것을 구슬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한 구슬이 있는데, 크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크다고 허자니 온 우주법계(宇宙法界)를 다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 크니 무엇에다 비교헐 수가 없어. 또 작다고 허자니 모든 띠끌 가운데에 가장 가는 띠끗을, 띠끌을 ‘투금진(透金塵)’이라 하는데, 금으로, 순금으로 판때기를 만들아가지고 그 위에다가 가는 띠끌을 놓고 치며는 그 판, 금판때기 사이로 걸러서 나오는 띠끌을 그것을 ‘투금진’이라 하고, 투금진보다도 더 가는 띠끌을 이웃 린(鄰)자 허공, 빌 허(虛)자 ‘인허(鄰虛)’라 그러는데, 인허야말로 띠끌 가운데에 거의 허공(虛空)에 바로 가까이 간 이웃이니까 완전한 허공은 아니고 띠끌은 띠끌인데 거의 허공에 이웃한 그런 가는 띠끌을 ‘인허’라 그러는데, 그러니 그것을 얼마나 작다고 또 표현헐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크다고 헐 수도 없고 작다고 헐 수도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밤낮 없이 그 작은 그 구슬로부터 광명이 온 우주법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두루 다 비추고도 남는다 그 말이여. 

 

 

맥시, 멱시무물우무종(覓時無物又無蹤)이여.

찾을 때에는 한 물견도 없어. 찾어, 찾으며는 한 물견도 없고 또한 그 자최조차도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그렇게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작용(作用)을 하고 있어서 온 우주법계에 꽉 차 있으면서도 대관절 그 구슬을, 그 한 물견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고 볼 수도 없고 손에 잡을 수도 없다 그 말이여. 

 

 

그런데 기좌상숭... 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잠시도 떠나지 않고 소소영영하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냐? 이 구슬이란 게 대관절 무엇이냐? 이 한, 한 물견이란 게 무엇이냐? 이름은 한 물견이라,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으니까 ‘한 물견’이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구슬’이라고도 비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진여(眞如)다’ ‘불성(佛性)이다’ ‘자성(自性)이다’ ‘법계(法界)다’ 여러 가지 경(經)마다 이름을 붙여놓았지마는, 그 이름이야 몇 억만 개라도 또 맨들아 붙일 수가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 이름에 집착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말이여.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 뭣고?’, 일 하면서도 ‘이 뭣고?’,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때도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기쁘고 슬플 때도 이, ‘이 뭣고?’, 괴롭고 힘들 때도 ‘이 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이 뭣고?’, 

 

잠시도 나와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여.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까. 그놈을 잘 쓰며는 천사(天使)가 되기도 하고 그놈을 잘못 쓰며는 찰나간(刹那間)에 아귀(餓鬼), 나찰귀신(羅刹鬼神)이 되기도 하고, 그것을 잘못 허, 허며는 지옥(地獄)에 가기도 하고, 그놈을 깨달으믄 부처님이 되기도 하고, 대관절 그러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 물견을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러헌 것이 내게 있는 줄 안다며는, 믿는다며는 참선을 안 헐라야 안 헐 수가 없고 화두를 안 들라야 안 들 수가 없어. 그것에 대한 확고(確固)한 신심(信心)이 없기 때문에 ‘공부가 안 된다’, ‘망상(妄想)이 일어난다’, ‘혼침(昏沈)이 일어난다’ 이렇게 모두 그런 말들을 허고 잇는 것입니다. 

 

중국(中國)에 대도인(大道人)이신, 박상... 박산무이선사(博山無異禪師)는 [선경어(禪警語)]에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주공부(做工夫)호되, 공부를 허되, 최요긴(最要緊)은, 가장 요긴한 것은, 「간절 절(切)」다 그 말이여. 간절한 거. 「간절 절(切)」자 이 한 자(字)가 가장 공부허는 데 큰 힘이 된다. 간절허지 아니한즉, 간절한 생각이 없으면 해태심(懈怠心)이 나고, 해태심이 나며는 방일(放逸)해가지고 그럭저럭 지내게 되고, 그럭저럭 지내다보면은 못 헐 짓이 없어. 온갖 잘못된 말, 잘못된 행동, 잘못된 생각을 허면서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업(業)을 짓고 그렇게 된다 그 말이여. 그런데 ‘대관절 이 한 물견이란 게 무엇이냐?’ 간절한 신심(信心)과 간절한 분심(憤心)과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마음을 쓰게 되면 그 마음이, 그 용심(用心)이 정말 진실(眞實)하게 간절(懇切)하게 된다 그 말이여. 그러니 방일(放逸)이니 해태(懈怠)니 그런 것이 어디서 일어날 수가 있으며, 이 간절한 한 글자를 항상 잊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날아가면... 나아가면 고인(古人)의 전지(田地), 불조(佛祖)의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그러헌 경지(境地)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헐 것이 없다. 또 생사심(生死心)을 타파(打破) 못헐까 근심헐 것도 없다. 

 

「간절 절(切)」자 이 한 글자야말로 당하(當下)에, 즉하(直下)에 선(善)도 초월하고 악(惡)도 초월하고 무기(無記)도 초월해서, 초월(超越)허게 된다 그 말이여. 우리가, 우리 중생들이 무슨 생각을 허거나 말로 몸으로 업(業)을 짓게 된 것은 ‘선’ 아니면 ‘악’이요 악이, 선도 악도 아니면 ‘무기’, 이 선 ‧ 악 ‧ 무기 세 가지의 성질로 업을 짓게 되는데, 간절한 마음이 가슴에 충만(充滿)하며는 선(善)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악(惡)도 생각할 겨를이 없고 무기(無記)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화두(話頭) 하나가 저절로 간절헐 수밲에는 없고,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간절허게 되며는 산란심(散亂心)이 거기에 발붙이지를 못헐 것이고, 혼침(昏沈)도 거기에 발붙이지를 못할 것이다. 간절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온갖 망상이 일어나고 까딱허면 무기력에 빠져가지고는 끄벅끄벅 졸게된다 그말이여. 이 「간절 절(切)」자 이 한 자가 가장 우리 수행을 해나가는데 있어서는 친절(親切)하고도 요긴(要緊)한 글자다 그 말이여. 

 

마음 씀이 간절한즉, 간절해가지고 이어졌다 끊어졌다 그러헌 간단(間斷)이 없, 없고, 간단이 없고 보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도 내 마음속에 침범해 들어올 수가 없고, 용심(用心)이 간절하게 되며는 사량복탁(思量卜度) 그런 것, 그러헌 것도 거기에 들어 붙이지를 못한다 그 말이여. 간절허지를 못허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지 못하기 때문에 공안(公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지고 의리(義理)로 따지고 그렇게 된 것이다 그 말이여.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가며는 외도(外道)에 떨어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 「간절 절(切)」자로 인해서 이렇게 간곡히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이미 화두를 대부분 다 타서 열심히 정진을 허고 계시겠지마는, 산란심(散亂心), 망상, 산란심 때문에 화두가 순일(純一)허게 안 들리신 분이나, 앉어서 정진만 헐랴고허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 허니 눈이 감기면서 끄벅끄벅 졸, 졸음이 온다거나, 그러헌 분들은 왜 그러냐? 이 ‘혼침’과 ‘산란’ 때문에 정진을 잘 못허겠다. 그러시는 분이 계시다며는 원인은 「간절 절」자 하나를, 그 간절한 그 용심(用心)을 그렇게 허지 못한 디에 원인이 있다고 허는 것을 확실히 깨달으셔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이면 거기에서 온갖 신심(信心)이 거기서 일어나고 온갖 분심(憤心)이 거기서 일어나서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신심과 분심과 대의단이 마음을 지어서 일으킬랴고 해서 일어난 게 아니라 자동으로 신심 분심 의심... 의단이 일어나게 되며는 화두(話頭) 들랴고 안 해도 화두가 들어지는 거고, 망상(妄想)을 끊을랴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지는 것이고, 혼침(昏沈)을 안 할랴고 안 해도 저절로 혼침이 없어져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들리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간절 절」자 하나가 있고 보면 깨닫지 못허까 걱정이 없고 빨리 깨달을랴고 생각을 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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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참공안몰심사(本參公案沒心思)하면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하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하리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몰심사(沒心思)하면

간절허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서 거기에 들어가게 되며는,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다.

앞도 좌우도 뒤도 없고 쇠로 맨든 벽(壁)과 은으로 된 산(山)으로 꽉 둘러싸여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맥히게 되니, 거기에 온갖 것을,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뿐이다 그 말이여. 백 가지를 다 아지 못할 뿐이여.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

그렇게 해서 의심해가지고 의심해오고,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간단(間斷)이 없으면 결국은 그 의단이 타파(打破)될 수 밲에는 없고, 의단을 타파해야 생사심(生死心)을 타파허고 마침내 자기 자성(自性)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

그동안에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도 지내가고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첩(驚蟄)을 맞이허게 되았습니다. 이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따뜻해져서 높은 산에 눈도 녹고 모,  얼어붙었던 땅도 녹아서 시내물이 졸졸 흐르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물이 올라가지고 잎이 피고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지난해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어려운 시기를 우리는 냄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그 어려운 모든 지경이,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무상(無常)을 깨닫게 하고 더욱 발심(發心)을 허게 해서 그러헌 것을 좋은 발판으로 해서 더욱 정진(精進)을 열심히 하게 되, 되,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겨울에 꽁꽁 얼어붙었을 때를 생각허면 온갖 풀은 다 말라 죽고 모든 나무는 고목(枯木)나무처럼 되아서 앙상허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돌아와서 차츰 날씨가 따뜻하고 보며는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잎이 무성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해도 사계절은 어김없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四季節)이 없는 지방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사계절이 있어서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계절을 그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四方)에다가 견주어서 말하면, 봄은 동(東), 동에 계절이고, 남쪽은 여름에 계절이고, 또 서쪽은 가을에 계절이고, 또 북쪽은 겨울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춘하추동이 동서남북인거고, 또 생로병사(生老病死)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생로병사가 따로 있고 동서남북이 따로 있고 또 춘하추동이 따로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근본(根本)에 진리(眞理)에 들어가서 보면, 이치에 들어가서 보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바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이고 동서남북(東西南北)인 것입니다. 

 

사람만 생로병사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세계(世界)에도 생,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습니다. 이루어졌다가, 얼마동안 그런 상태를 유지허다가, 나중에 가서는 파괴가 되아가지고, 다시 허공이 되는 것입니다. 성주괴공. 이 세계가 영원히 이 지구도 존재하고 태양과 달과 별들도 고대로 다 몇 억만 겁을 지내도 다 고대로 있을 줄 알지마는 그것도 서서히 다 변화해가다가 언젠가는 파괴가 되고 다시 허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맛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사람이 태어나서 생로병사, 태어나며는 하, 애기를 순산(順産)했다고 온 가족들이 다 축제분위기에 모다 축복을 하고 그러는데, 차츰차츰 자라게 됩니다. 다섯 살 열 살 이렇게 자라게 되아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면 또 인자 오십(50) 육십(60)이 넘으면 인자 늙어가지고 늙으면 천하 없는 사람도 병(病)들게 되고 병들고서는 백년(100년)을 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태어날 때는 기뻐하고, 병들고 늙어서, 늙으면 괴로와하고, 나중에 죽게 되면 모다 슬퍼합니다. 봄이 되면 잎 피고 꽃 피니까 모다 좋다고 야단들이고 가을이 되아서 단풍이 짙다가 겨울이 되아서 다 잎이 지고 추워지며는 모다 몸을 움츠리고 그 추와서 못 견디고 빨리 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됩니다마는, 알고 보면 봄만 좋은 것이 아니라 여름대로 좋고 가을은 가을대로 좋고 겨울대, 겨울대로 또한 좋은 운치(韻致)가 있는 좋은 계절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입각(立脚)에 의해서 이것을 생각해보, 인간 문제도 생각해보면, 생로병사도 꼭 생(生)만 좋고 죽음은 나쁘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또 입장을 바꽈서 보면 생(生) 자체(自體)가 좋기만 헌 것이 아니고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일생동안을 온갖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서 고통헐 일을 생각해보면 생(生) 자체가 벌써 고통(苦痛)의 시작이라고 말헐 수도 있, 있을 것입니다. 또 가을에는 단풍이 져서 모다 시든다고 허지만 가을이 없으면 어떻게 결실(結實)을 허게 되며, 겨울은 또 춥고 하니까 겨울은 없이 그냥 건너뛰면, 바로 가을에서 봄으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헐란지 모르지만 겨울철이 없게 되며는 풀, 좋은 봄을 맞이헐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겨울이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너무 더웁기만 허고 그러면 그 이듬 농사가 잘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겨울에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매화꽃이 피어도 향내가 진동하는 거고, 겨울에 강추위를 해야 그 이듬에 농사가 잘 되고 봄을 맞이해도 정말 환희스러운 봄을 맞이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확실히 몇 살에 죽을 것이다, 언제 죽을 것이다’ 그건 잘 모릅니다. 모르나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라고 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딱 진리에 입각해서 분명히 말씀을 허셨습니다. ‘생허되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죽되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다. 생사 속에 있으면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은 말씀을 허셨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생도 있고 죽음도 있는데 진리를 깨달으신 분들은 ‘생사는 없다’고 허셨습니다. 우리는 좀 믿기가 어렵지마는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지마는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속에 우리의 참된 성품이 가리워져 있는 사람에게는 생사가 있는 것으로 느껴질 뿐인 것입니다. 

 

마치 허공 속에는 공화(空華)라 허공 꽃이 없는 것이지만, 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허공 속에 무슨 꽃이 피어서 이리저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눈병이 낫고 보면 허공은 깨끗해서 아무것도, 꽃도 보이지도 않고 없는 것인데, 눈병이 나기 전에도 허공에 꽃은 없었던 것이고, 눈병이 나은 뒤에도 본래 없었던 것이 새삼스레 없어질 것도 없는 것이어서, 그래서 생사도 그와 같애서 분명히 이 세상에 어떠헌 인연에 의해서 이 몸띵이 육체를 부모로부터 받아났지마는 인연에 의해서 잠시 그 몸을 이룬 것뿐이지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렇게 썩 기뻐할 것도 없고, 살다가 인연(因緣)이 다해서 설사 이승을 하직(下直)헌다 해도 인연이 다했기 때문에 그 몸을 버린 것이고... 것뿐이지 그것이 죽음이라고 슬퍼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참선을 허게되면 ‘과연 부처님과 조사들이 생사는 본래 없다고 허더니 정말 생사는 없는 것이로구나.’ 그것을 우리가 즉접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를 버리고 생사 없는 깨달음의 세계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는 보고 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속에 기쁜 일을 당하며는 웃기도 하고 슬픈 일을 당하며는 울기도 하면서 그 속에서 생사(生死)가 없는 도리(道理)를 찾어야 되는데, 어떻게 찾느냐? ‘이 뭣고?’ 이거는 사량분별로,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라 무조건(無條件)하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거각해나가는 것입니다. 

 

앉을 때도 ‘이 뭣고?’ 걸어갈 때도 ‘이 뭣고?’ 누워서도 ‘이 뭣고?’ 어떤 분은 “변소에 가서도 ‘이 뭣고’ 해도 됩니까? 죄가 안 됩니까?” 변소 아니라 그보단 더 헌 디를 가서도 ‘이 뭣고?’는 들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를 면(免)하는 것이...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거고, 흥망성쇠 속에서, 그 속에서 흥망성쇠가 없는 영원한 참나를 깨닫는 공부가 바로 ‘이 뭣고?’다 그 말이여. 때와 장소를 가릴 것이 없어. 화, 억울한 말을 들으며는 분통이 터져서 막 가슴에서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올라오고 손에 잡히는 대로 그 막 유리창도 때려부시고 전화통도 들어서 방바닥에다 팽가칠 만큼 그렇게 화가 날 때에도 딱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헌다며는, 들었던 전화기도 놓고 들었던 물견도 땅에다 놓으면서 ‘아, 내가 이 경계에 속았구나.’ 탁! 그 전화통을 들고 물견을 누가 내다 칠랴고 들었을 때에는 그건 사람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벌써 나찰귀신이 되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들어서 매다, 사람한테 매다 치면 사람이 다칠 것이고 물견에다 내다 붙이며는 물견이 다 부서질텐데, 그러고 나서 후회허면 무슨 소용 있느냐 그 말이여. 다시 돈 주고 다 사다놔야 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때려 붓고 사람 얼굴에다 해서 아내나 자식의 얼굴이 깨져서 피가 나면 그 어떻게 허는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일어날랴고 헐 때 -원래 정진을 잘한 사람은 일어날 것도 없지만, 우리가 초학(初學)의 단계에서는 경계(境界)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허느냐 그 말이여- 일어나는 놈을 잽싸게 탁 숨을 들어마셨다가 후~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허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자기 마음을 돌이켰으니 후회할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들 딸 손자 아내 앞에 채, 어른으로서 채신을 깎이지 안 해서 좋고 친구 간에도 채신을 깪이지 안 해서 좋고 직장에서도 마음을 그렇게 돌리면 모든 직장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살아가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서 자기를 그렇게 다스려나가면, 자기 마음도 편안해서 좋고 어디를 가나 의젓하고 존경받아서 좋고, 큰일을, 큰 사고를 내지 안 해서 좋다 그 말이여.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해가지고 쇠고랑을 차게 되고 원결(怨結)을 맺게 되고 다 되아가는 일도 송두리째 다 뒤집어엎게 된다 그 말이여. 일생동안을 그러헌 어리석은 경계에 속고 자기에 속는 그런 생활을 해나가고 보며는 그 인생이 무엇이 되겄냐 그 말이여. 죽어서 갈 곳이 있다면 지옥 밲에는 갈 곳이 더 있느냐 그 말이여. 

 

이러헌 말은 산승(山僧)이 말씀을 안 해도 여러분은 천번 만번 다 익히 알고 계시는 일들입니다마는, 내가 왜 이런 말씀을 또 이렇게 말씀을 허냐하며는 세상이 너무 살기가 힘든 세상이 되아서 환경 때문에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어. 그러니 그것을 해결하고 이런 어려운 고비를 넘어가는데 있어서는 내 마음을 다스리고, 내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이 뭣고?’ 밲에는 없다 그 말씀이여. 천하에 간단한 일이면서 나의 장래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것을 미연에 막고 이 어려운 세상을 넘어가는데 좋은 등불이 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이렇게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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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담선사 법문 62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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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做工夫호대  最要緊이  是個切字이니  切字가  最有力하니라. 不切則懈怠生하고  懈怠生則放逸縱意가  靡所不至하리라. 若用心이  眞切하면  放逸懈怠가  何繇得生이리요. 當知하라. 切之一字는  不愁不到古人田地하며  不愁生死不破이니라

공부를 짓되 가장 요긴한 것은, 이 간절 절(切)자이니 절자(切字)가 가장 힘이 있느니라。 간절치 않으면 해태심이 생기고 해태심이 생기면 방종함이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만약 마음씀이 참으로 간절하면 방일 해태가 무엇을 말미암아 나리요? 마땅히 알라。 절(切)자 한 자는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으며,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느니라。

 

切之一字는  當下에  超善惡無記三性하나니  用心이  甚切則不思善하며  用心이  甚切則不思惡하며  用心이  甚切則不落無記하나니  話頭切이면  無掉舉하고  話頭切이면  無昏沈이니라.

간절 절(切)자 한 자는 당장에 선과 악과 무기(無記) 세 가지 성품을 뛰어넘나니,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선(善)을 생각지 않을 것이요,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악(惡)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나니, 화두가 간절하면 산란심도 없고 화두가 간절하면 혼침도 없나니라。

 

切之一字는  是最親切句이니  用心이  親切則無間隙故로  魔不能入하고  用心이  親切하야  不生計度有無等하면  則不落外道하리라.

간절 절(切)자 한 자는 이 가장 친절한 말이니, 마음씀이 간절한 즉 틈이 없으므로 마(魔)가 침노하지 못하고 마음씀이 간절하야 「있다, 없다」하는 등 계교하고 헤아림이 나지 아니하면 외도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몽산법어蒙山法語] -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