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사람은 뒤를 바래본다】

2021. 4. 11. 10:00카테고리 없음

 

【‘부처다’, ‘불성이다’, ‘진여다’라고 허는 것이 육근(六根)을 통해서 활동(活動)을 한다는 사실】

 

 

수행수시용심진(修行須是用心眞)하고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미오이도(迷悟二途)는 단재아(端在我)하고

시비양자막수인(是非兩字莫隨人)이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수행(修行)은 수시용심진(須是用心眞)이다.

수행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마음 씀을 참되게 해야 하느니라.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時道易親)이다.

마음이 참될 때에 도(道)는 쉽게 친(親)해지느니라.

 

 

미오이도(迷悟二途)는 단재아(端在我)하고

미(迷)하느냐 깨닫느냐 이 두 길은 그 단서(端緖)가 오직 내게 있다 그 말이여. 

 

내 마음을 미(迷)해가지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느냐, 내 자성(自性)을 바로 깨달라가지고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느냐, 이 두 갈래 길은 오직 나한테 달려있다 그 말이여. 

 

 

시비양자(是非兩字)를 막수인(莫隨人)하라.

옳고 그르고, 시비(是非) 이 두 글자는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다른 사람이 시비를 허거나 말거나 거기에 끌려 들어가지 말라 그 말이거든.

 

이건 고인(古人)의 시(詩)ㅂ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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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하시기를, 

 

“불자(佛子)들아! 나를 수 천리(千里) 멀리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나에 법(法)을 생각헐, 항상 잊지 않고 기억(記憶)하면서 수행을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도(道)에 결과를 얻을 것이고, 비록 내 좌우(左右)에 있어서 항상 나를 보고 지낸다 하더라도 나에 법(法)을 따르지 아니하면 마침내 도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신 지 삼천 년(3000년)이 되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부처님의 계(戒),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깊이 마음에 새겨서 그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수행(修行)을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왕림(枉臨)해 계신 것이고, 부처님을 믿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절에서 산다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목숨, 목숨이 얼마 동안이나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허기를, 

“수 일 간에 있습니다. 수 일 간에도, 이삼 일 간에도 사람 목숨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허시기를, 

“그대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또 한 사람에게 물으시기를, 

“사람의 목숨이 얼마동안에 있는고?” 

 

대답허기를, 

“밥 먹는 사이에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허기를, 

“그대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또 다시 물으시기를, 

“그대는 사람의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는고?” 

 

대답허기를, “호흡지간(呼吸之間)에도 있습니다. 숨 한번 내 쉬, 그 호흡, 한 호흡 간에도 목숨이 있습니다.” 

 

“선재(善哉)라! 좋다. 착하다. 그대는 도를 닦을 만 하다.” 

이러헌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생사가 얼마나, 생사(生死)의 무상(無常)의 살귀(殺鬼)가 호시탐탐(虎視眈眈)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노리고 있다고 허는 절박(切迫)하고 그러헌 긴박(緊迫)한 상황에 우리가 놓여있다고 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무상(無常)의 불이 사면(四面)에서 나를 향해서 타들어오고 있다. 어떻게 허면 이 훨훨 타들어오는 불을 피해서 목숨을 보존(保存)헐 것인가? 잠시도 머뭇거릴 사이가 없다”고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 

 

 

고봉, 중국(中國)에 천목산(天目山) 고봉(高峰)스님께서는 [선요(禪要)]에 말씀허시기를, “금일야임마(今日也恁麽) 명일야임마(明日也恁麽),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그렇게 지내면, 그러헌 사람들은 일일천천만만(一日千千萬萬)을 타살(打殺)해도, 하루에 천명 만 명을 쳐 죽인다 하더라도, 유심마죄과(有甚麽罪過)리오,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이렇게까지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절에 와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선방(禪房)에 지내면서 그럭저럭 지낸 것이 무슨 큰 살생(殺生)허고 도둑질허고 음행(淫行)을 허고 그런 것도 아니고 다못 쯧, 그냥 그럭저럭 지낸 것뿐인데, ‘그런 사람을 천명 만 명을 때려죽여도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허신 뜻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사십 년(40년) 동안 받으실 복(福)을 우리 말세(末世)의 제자(弟子)들에게 유산(遺産)으로 냄겨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그것을 받을만한 복이 없어도, 다못 부처님 계(戒)를 받고 부처님 제자가 되았다고 허는 그 조건 하나로서 우리는 부처님의 유산에 의해서 의식주(衣食住)문제를 해결허고 있기는 허지만, 철저하게 목숨을 걸고 도를 닦음으로 해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유산을 우리가 수용(受用)을 헐 수가 있는 것이고,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그럭저럭 지낸다면 머지안해서 이 목숨이 끊어지자마자 소가 되아가지고 시주(施主)에 은혜(恩惠)를 갚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은 사람들에게, 그 시주자(施主者)들에게 고기로서 빚을 갚고, 뼈는 고아서 먹도록 또 갚어야 하고, 가죽은 옷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고 가죽 신발도 맨들고 그렇게 해서 또 갚어야 하고, 대소변은 비료가 되도록 갚어야 하고, 내장...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다 빚을 갚는데 쓰여 지는 것입니다. 한 생(生)만 소로 태어나서 갚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죽자마자 또다시 소가 태어나고 또 그렇게 해서 죽자마자 또 다시 태어나는데, 살만큼 살다가 목숨이 다해서 늙어서 죽는다면 모르지만 늙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젊어서 살이 연헐 때 그때 도살장(屠殺場)에 끌려가가지고 물을 몇 바케쓰를 강제로 맥여가지고 몽둥이로 쳐서 띵띵 붓도록 때려서 잡아가지고 그래가지고 사람들에게 팔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생각헌다면 우리는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그렇게 도저히 지낼 수가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스님께서 항상 말씀허시기를, “여러 가지, 발심헌 동기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포구발심(怖懼發心)이 제일(第一)이니라” 하셨습니다. 두려울 포(怖)자 두려울 구(懼)자. 지옥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소의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그 두려워... 두려움의... 으로 인(因)해서 발심(發心)을 해야 그 발심이 속에서 부터서 솟구쳐 나와가지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동시에 돈발(頓發)을 허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해나가는데 철저한 신심, 철저한 분심, 그리고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큰 의심, -이 세 가지 신(信) ‧ 분(憤) ‧ 의(疑) 이것을 삼요(三要)라고 하는데, 세 가지 요긴(要緊)한 것이라 하는데- 이 삼요가 돈발허지 않고서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헐 때까지 참선을 헌다해도 그럭저럭 해갖고는 도업(道業)을 성취허기가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

 

 

시간은 우리를 기달라주지 않습니다. ‘이번 철에는 시끌사끌이 그럭저럭 지내자, 이 다음 철에는 정말 잘 허자.’ 밤낮, 게으른 사람은 그날그날을 그럭저럭 지내고 뒤를 바래보는 것입니다. 진실로 발심헌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여건에서도 바로 그 찰나찰나(刹那刹那)를 자기단속(自己團束)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진발심(眞發心)을 한 사람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일호흡지간(一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달려있다’고 허는 그 제자에게 ‘너는 도를 닦을 만 하다’고 인, 인증(認證)을 허신 것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찰나찰나가 모여서 하루하루가 되고, 찰나찰나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석 달이 되는 것입니다. 한철이 그 찰나찰나를 정말 알차게 단속을 허지 아니하면 석 달이 금방 지나가는 것입니다. 바람이 좀 분다고, 비가 좀 온다고, 눈이 온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갈 길을 안 간다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은 점점 연장이 되고 말 것이고, 결국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수록에 더욱 조심하고 말조심하고 몸조심하고 생각을 단도리 해서 알뜰하게 정진허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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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결제를 맞이해서 강원에서, 강원(講院)을 졸업도 체 허기도 전에 첫 철을 나온 수행자도 있고, 또 이제 참선을 허기 위해서 나온 그런 초심자(初心者)를 위해서 간단히 화두(話頭)에 대한 말씀을 허겠습니다. 

 

화두는 문헌상(文獻上)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1700) 화두(話頭)ㅂ니다.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은 이 세상에 법계(法界)에 가득 찬 것이 전부(全部)가 화두(話頭)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아무것이나 하나 [염송(拈頌)]이나 [전등록(傳燈錄)]이나 책에서 아무거나 하나 골라가지고 제 멋대로 허는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하면, 제 마음대로 선택을 해서 허면 쪼끔 허다가 잘 안되면 금방 버리고 또 딴걸 가지고 하고, 몇 개를 가지고 허다가 안되면 세월만 지내가고 공부가 자리를 잡지를 못해서, 그래서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 믿어지는 선지식한테 화두(話頭)를 하나를 간택(揀擇)을 받아가지고 공부가 잘 안 되아도 그 화두로써 끝장을 보도록 하고 잘 되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해서 한 화두를 가지고 참구(參究)를 해나가되 이 화두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이나 이론(理論)이나 지식이나 상식이나 교리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닌 것입니다. 

 

아-, 아까 조실스님께서 간곡히 말씀허신 바와 같이, 간절(懇切)한 의심(疑心),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기의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는 것입니다. ‘이 뭣고?’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이 주인공.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 무엇고?’ 밥 먹을 때나 옷 입을 때나 걸어갈 때나 앉을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아까 ‘십이시중(十二時中)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고 허셨습니다마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헐 때라도 ‘이 뭣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독로허도록.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들랴고 안 해도 제대로 들어질 때가 올 때까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타성일편이 되도록 한결같이 화두를 거각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일은 불교(佛敎)에 핵심(核心)이며, 이것 허자고, 이것을 허게 허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을 허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물론 「화두」라고 허는 말이 없었습니다. 달마(達磨)스님께서 중국으로 오시고 거기서 육, 육조(六祖)스님까지 와가지고, 육조스님께서 비로소 「오유일물(吾有一物)하니, 내게 한 물견이 있으니...」 그러헌 화두, ‘이 뭣고?’ 시삼마(是甚麽) 화두에 시초(始初)가 될 만한 그런 법문을 설했었습니다마는, 「화두(話頭)」라고 허는 말은 없었어도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49년) 동안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신 가운데에 충분히 화두에 뿌리가 될 만한, 근간(根幹)이 될 만한, 핵심이 될 만한 법문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근기(根機) 따라서 설법(說法)을 허신 것입니다. 그것을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내려오시면서 차츰차츰 간화선(看話禪)으로 체계를 잡게 된 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량없는 선지식이 출현허시면 더 우리에게 좋은 방편(方便)이 나올는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시삼마(是甚麽)’, 알 수 없는 이 주인공(主人公) 이것이 무엇이냐? ‘이 뭣고?’  여기서 들고 또 들고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험으로 해서 망상(妄想)을 물리칠랴고 허지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물러가는 거고, 망상이 어디서 왔느냐 하며는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서 일어나는 파도(波濤)거든 이게. 그래서 그 ‘파도’를 버리고 ‘진여불성’이라고 허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그 파도가 물에서 나온 것이지 파도 내 놓고 물이 따로 없는 것처럼, 그 물 속에 습성(濕性)이라고 허는 본성(本性)이 있는데 그 습성은 물에 있고 물이 파도치며는 그것을 물결이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우리에게 진여불성이 있는데 눈으로는 확인헐 수도 없고 생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은 눈으로는 모든 것을 볼 수도 있고 귀로는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있고 코로는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혀로는 음식에 맛을 알아. 몸으로는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아는 그런 작용이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니, 「일어나는 그런 작용(作用)을 즉(即)해가지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어야만 본성을 깨달을 분이 있다」 그 말이여. 이론으로 따지며는 부처님께서 허시는 말씀, 부처님께서 허시는 생각, 모든 행동은 바로 그것이 진여불성의 나타남이지만, 우리 중생(衆生)은 나타나는 그 자체가 불성은 아니여. 불성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불성(佛性)이라고는 헐 수가 없어. 그것이 바로 망상(妄想)이요 망동(妄動)이다 그 말이여. 「망상심, 망, 망녕된 행동, 거기에 즉(即)해서 ‘이 뭣고?’를 찾는 이 미묘(微妙)한 수행법」, 이것은 참선(參禪)해 나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형제자매도반여러분은 이러헌 말씀을 귀에 더깽이(더갱이, 덩이)가 앉도록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제 때이기 때문에 처음 오신 분을 위해서도 이 말씀을 헐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 년 삼 년 십 년 이십 년 한 도반들도 항상 그 십이시중(十二時中)에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헐랴면, 「‘부처다’, ‘불성이다’, ‘진여’라고 허는 것이 육근(六根)을 통해서 활동(活動)을 허고 헌다는 사실」을 명심(銘心)을 헌다며는 도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보는 거기에 있는 것이며,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며, 행동헐 때 바로 그 찰나찰나(刹那刹那)에 있는 것입니다. 그거, 그 도리를 철저히 믿는다면 도는 그렇게 어렵고 먼 것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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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성성좌(盡日惺惺坐)한디

건곤무안중(乾坤無眼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유붕래초옥(有朋來草屋)하고

명월여청풍(明月與淸風)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진일성성좌(盡日惺惺坐)한디

날이 맟도록 하루 종일 성성(惺惺)허게 앉았으니,

 

 

건곤(乾坤)에 무안중(無眼中)이로구나.

하늘과 땅 천지간에, 천지간에 모든 것이 눈 가운데 없어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나무를 봐도 나무가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고 오직 화두(話頭) 하나만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니까 눈에 귀에도 아무것도 들어올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유붕(有朋)이 래초옥(來草屋)하니

그런데 벗이 있어서 자기 토굴에 찾아와.

 

 

명월여청풍(明月與淸風)이로구나.

밤에는 밝은 달이 찾아오고, 맑은 바람이,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시시(時時)로 찾아오더라 그 말이여. 

 

 

 

이것이 고인(古人)의 시(詩)입니다마는, 여기에 이렇게 철저허게 발심을 해서 십이시 중에 의단이 독로허도록 잡두리 해나가는 수행자에게 무슨 탐심(貪心)이 있으며 무슨 진심(瞋心)이 있으며 무슨 시비(是非)가 있겠습니까? 

 

- 송담선사 법문 59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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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자(佛子)들아! 나를 수 천리(千里) 멀리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나의 법(法)을 항상 잊지 않고 기억(記憶)하면서 수행을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도(道)에 결과를 얻을 것이고, 비록 내 좌우(左右)에 있어서 항상 나를 보고 지낸다 하더라도 나의 법(法)을 따르지 아니하면 마침내 도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망상이 어디서 왔느냐 하며는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서 일어나는 파도(波濤)거든 이게. 그래서 그 ‘파도’를 버리고 ‘진여불성’이라고 허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 그 파도가 물에서 나온 것이지 파도 내 놓고 물이 따로 없는 것처럼, 그 물 속에 습성(濕性)이라고 하는 본성(本性)이 있는데 그 습성은 물에 있고 물이 파도치며는 그것을 물결이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우리에게 진여불성이 있는데 눈으로는 확인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은 눈으로는 모든 것을 볼 수도 있고 귀로는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있고 코로는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혀로는 음식의 맛을 알아. 몸으로는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아는 그런 작용이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니, 「일어나는 그런 작용(作用)을 즉(即)해가지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찾어야만」 본성을 깨달을 분이 있다 그 말이여. 

 

이론으로 따지며는,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 부처님께서 하시는 생각, 모든 행동은 바로 그것이 진여불성의 나타남이지만, 우리 중생(衆生)은 나타나는 그 자체가 불성은 아니여. 불성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불성(佛性)이라고는 할 수가 없어. 그것이 바로 망상(妄想)이요 망동(妄動)이다 그 말이여. 「망상심, 망, 망녕된 행동, 거기에 즉(即)해서 ‘이 뭣고?’를 찾는 이 미묘(微妙)한 수행법」, 이것은 참선(參禪)해 나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 십이시중(十二時中)에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려면, 「‘부처다’, ‘불성이다’, ‘진여’라고 허는 것이 육근(六根)을 통해서 활동(活動)을 한다는 사실」을 명심(銘心)을 한다며는 도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보는 거기에 있는 것이며,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며, 행동할 때 바로 그 찰나찰나(刹那刹那)에 있는 것입니다. 그 도리를 철저히 믿는다면 도는 그렇게 어렵고 먼 것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