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7. 20:02ㆍ카테고리 없음
【자신의 수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소를 타고 소를 찾다. 】
인인자유충천기(人人自有衝天氣)하니
일념회광시장부(一念廻光是丈夫)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막도염화소식단(莫道拈花消息斷)하라
우여산조갱상호(雨餘山鳥更相呼)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인인자유충천기(人人自有衝天氣)하니,
사람 사람마다 모두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상(氣像)이 있으니,
일념회광시장부(一念廻光是丈夫)니라.
한 생각 광(光)을 돌이키면 이것이 바로 대장부(大丈夫)니라.
막도염화소식단(莫道拈花消息斷)하라.
부처님께서 꽃을 드심에 가섭(迦葉)이 미소(微笑)를 헌 염화소식(拈花消息)이 끊어졌다고 말허지 말아라.
우여산조갱상호(雨餘山鳥更相呼)니라.
비 개인 뒤 산새들이 다시 서로 부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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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천구백육(구)십칠 년(1997년) 불기 이천오백사십일 년(2541년) 일 월(1월) 첫째 일요법회(日曜法會)날입니다. 날씨가 몸씨 차운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법회(法會)에 참석(參席)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금년(今年) 새해를 맞이해서 국가나 정치 ‧ 경제 ‧ 노사(勞使)문제 여러 가지 문제가 국내외적(國內外的)으로 대단히 복잡허고 어려운 그러헌 상황 하(下)에서 새해를 맞이허게 되았습니다. 이러헌 어려운 해를 맞이했을 때 신문이나 기타 언론을 통해서 많은 높은 사람이나 모다 훌륭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러헌 위기(危機)를 극복(克服)하기 위한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서 국민이 모다 각성(覺醒)을 하고 단합(團合)허고 단결(團結)하고 화합(和合)해서 이런 고비 고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자고 야단들입니다. 어떻게 허면 이러헌 난국(亂國)을 타개(打開)해나갈 수 있느냐?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이러헌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새해를 맞이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 딸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손녀 며느리 이렇게 모두 세 식구 네 식구 다섯 식구 이렇게 한 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가정(家庭)을 이루고, 그 가정들이 모여가지고 사회(社會)가 이루어지고 국가(國家)가 이루어지고, 또 그런 국가들이 백여 개가 모여가지고 세계(世界)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번에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여. 반드시 세계(世界)가 이루어질 때는 여러 국가(國家) 민족(民族)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국가와 민족 가정이, 많은 가정들이 모여서 사회국가가 이루어지고, 그 가정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결국은 가정(家庭)이라고 헌 단위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儒敎)에 <대학(大學)>에 보며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금방 말한바와 같이 ‘평천하(平天下)를 헐라며는 결국은 수신(修身)으로부터서 시작해가지고 치가(治家)를 하고, 치가(治家)가 되아야 치국(治國)을 하고 치국(治國)이 되아야 평천하(平天下)가 된다’고 허는 그러헌 논리(論理)인 것입니다.
[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後天下平。]
이것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체제(體制)가 바뀌고 아무리 문명(文明)이 발달헌다 해도 이러헌 것은 변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헌 기본원리(基本原理)를 망각(忘却)하고 자꾸 입으로만 큰소리쳐서 국가 민족이 어떠니, 경제가 어떠니, 정치가 어떠니 소리소리 목청을 돋와서 큰소리를 쳐봤자 한 사람 한사람이 각성(覺醒)을 허지 않고서는 아무리 떠들어봤자 조끔도 나아질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다투어서 큰소리를 치기보다는, 우선 내가 먼저 자기를 정신을 가다듬고 자기를 반성(反省)하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찾어서 내가먼저 실천을 해나감으로 해서 가정이, 사회국가가 향상되아가고 난국(亂國)을 돌파(突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라고 허는 것이 가정마다 있고, 사회 ‧ 국가 ‧ 민족 ‧ 세계 각국이 한사람 한 사람이 모여가지고 오십억(50억) 내지 육십억(60억) 세계인구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 비유를 들자면, 한 장 한 장의 많은 벽돌이 모여가지고 한 집을 이루게 되고, 철근이나 목재나 기와나 여러 가지 건, 건축자재들이 적절히 뭉쳐가지고 결국은 튼튼하고 조화 있는 건물을 이룬 거와 마찬가지여서, 그 어느 것 하나 부실(不實)해가지고서는 훌륭한, 아무리 겉으로 그럴싸한 건물을 지어놔 봤자 오래가지 못하고 금이 가고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는 말을 많이 헌 것 보다는 말을 적게 하고, 심지어는 말 없이 묵묵히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자아(自我)를 깨닫는 수행을 청춘과 인생과 생명을 다 바쳐서 오직 그 한 가지 일을 향해서 다 바치고, 그 한가지 일을 위해서 시작해가지고 한 가지 일로 끝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험으로써 자기를 깨닫고 자기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할 수 있는 힘도 얻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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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첫해, 천구백육(구)십칠년(1997년) 첫 정월(正月), 일월(음력 1월)의 일요법회이기 때문에 그러헌 의미에서, 아까 조실(祖室)스님 녹음법문을 통해서도 우리가 들었지마는, 어떻게 우리의 참나를 깨닫기 위한 정진(精進)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만 바르게 그리고 똑바로 정진을 헐 수가 있는, 있을 것인가? 여러 번 들어서 알고 여러분이 직접 현재 고대로 실천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실 줄 알지마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대단히 쉬운 것이고 대단히 간단한 것입니다. 참선이 복잡허고 어려운 것이 아니고 너무 쉽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그것을 어렵다고 이렇게 착각(錯覺)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먼, 먼 디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높은 청, 허공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은 땅속이나 깊은 바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눈을 통해서 온갖 것을 볼 줄도 알고 귀를 통해서 온갖 것을 소리를 들을 줄도 알고, 몸 육체는 방안에 있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도 천리만리(千里萬里)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버릴라야 버릴 수 없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이 소소영영한 이 주인공(主人公),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그것을 챙기는 것이 이 참선공부여.
사람사람이 모두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상(氣像)을 갖추고 있다. 한 생각 돌이킬 줄 알면 이것이 바로 대장부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연꽃을 들은 그 진리가, 진리(眞理)의 소식(消息)이 이제 말세(末世)가 되았으니까 끊어졌다고 그렇게 말허지 말아라. 지금도 우리의 면문(面門)을 통해서, 육근(六根)을 통해서 언제나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우주법계(宇宙法界)가 바로 이놈에 표현이고, 그러기 때문에 볼 때 들을 때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바로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떠억 들어야 한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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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홀평침(一息忽平沈)하면
만사종두기(萬死從頭起)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당처불회모(當處不回眸)하면
조정공측이(祖庭空側耳)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식홀평침(一息忽平沈)하면
한 생각 문득 일어났다 꺼지면
만사(萬死)가 종두기(從頭起)니라.
만사만생(萬死萬生)하는 일만(一萬) 죽음이 여기로 좇아 일어나느니라.
생사윤회(生死輪廻)다 육도윤회(六道輪廻)다 삼악도(三惡道) 떨어진다. 이 만사만생(萬死萬生)하는 지옥(地獄)이 어디로 좇아 일어나느냐 하며는, 숨 한번 쉬는데,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데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당처불회모(當處不回眸)하면,
당처(當處), ‘당처’라 하는 것은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자최 없이 한 생각이 문득 일어날 때, 일어나서 일초도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일어날 그 찰나(刹那)가 바로 ‘당처(當處)’거든. 뭘 보면 ‘아 저것이 무슨 물견이다’, ‘빛깔은 무엇이다’, ‘모냥이 무엇이다’ 하고 생각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이렇게 둘째 셋째 넷째 번 생각으로 자꾸 요렇게 번져서 갈라져가지고 이상한 데로 끌고, 끌려가거든. 그게 아니라 일어나자마자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이전에, 시간은 일 초(1초)에 백 분에 일(1/100)도 시간이 지내가기 전에 바로 그게 ‘당처’거든. 당처에서 눈동자를 돌리지 아니하면, 이 눈동자는 마음에 눈동자거든. 탁 눈동자를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바로 당처를 말헐 것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참선(參禪)을 하고 있는 분상(分上)에는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생각을 돌릴 수밲에 없어. 본첨, 본, 자기 본참공안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의심,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의심(疑心), 그 공안(公案)의 의심당처(疑心當處)로 생각을 돌이키지 아니하면,
조정(祖庭)에 공측이(空側耳)니라.
조사(祖師)의 뜰에서 공연히 귀를 기울이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다. 바로 조사(祖師)의 방(房)에 바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저 뜨락 가장자리에 와가지고 이래저래 귀를 기울이고 행여나 뭔 좋은 얘깃거리가 없나하고 귀를 기울이고 기웃기웃허고 일생을 그러다 마는 것 밲에는 안 된다 이거거든.
대안선사(大安禪師)가 백장선사(百丈禪師)를 떠억 찾어가서, 회상(會上)에 찾어가서 뵈웁고 절을 떠억 하고 묻기를,
“학인이 부처를 알고자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어떻게 허면 부처를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백장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치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거와 같구나.”
대안선사가 다시 말하기를,
“안 다음에는 어떻게 허게... 해야겠습니까?”
백장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소를 탔으면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禮問百丈曰:「學人欲求識佛,如何是佛?」百丈云:「太似騎牛覓牛。」師云:「識得後如何?」百丈云:「如人騎牛至家。」
이것이 바로 참선의 모냥을 이해하기 쉽게, 간결하게 문답(問答)을 한 것입니다.
불교(佛敎)를 믿기 위해서, 불교의 신자(信者)가 되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법문(法門)을 듣고, 또 <금강경(金剛經)>이 좋다하면 <금강경>을 독송(讀誦)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에 공(空)의 진리(眞理)가 있으니 <반야심경>을 읽고 외우고 쓰고 또 그것을 해석을 하고 해석한 책을 읽고 그것을 설교(說敎)하는 스님네 법문을 듣고, 알쏭달쏭하고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원각경(圓覺經)>이 좋다하면 <원각경>을 또 공부허고 <법화경(法華經)>이 좋다하니까 <법화경>을 공부하고 읽고 독송하고, <화엄경(華嚴經)>이 좋다하니까 그 팔십 권(八十卷) <화엄경>을 그걸 다 읽고 외우고 쓰고, 경(經)마다 보면 그 경이 경 가운데 최고의 경전이라고 찬탄(讚歎)이 되아있어. 그러다보니 십 년(10년)이 가고 이십 년(20년)이 가고 삼십 년(30년)이 가도 갈수록 더 어려워. 마치 바닷가에 가서 모래알을 뒤지며 그 모래알 속에 무슨 좋은 구슬이 있을까 하고 뒤지는 사람. 무슨 좋은 조개껍질, 울긋불긋허고 예쁜 조개껍질을 줏기 위해서 그 많은 여기저기 돌아댕이면서 조개껍질을 줏으러 바다로 돌아댕이는 거와 같다 그 말이여.
물론 불교가 뭣인 줄 모르니까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장경(藏經) 공부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교리(敎理)가 무엇인가를 윤곽이라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고, 교리를 안 다음에, 그다음에 불교는 아는 디에 그쳐선 안 되고 그 법에 의지해서 자기를 깨닫는 참선(參禪)으로 들어가.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그러는데, 그것은 당연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으나, 불교에 가장 좋은 길은, 궁극에 목적은 자기의 자성(自性)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언제 우리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고 공부해가지고 참선을 허리라 헌 사람은 우리의 수명(壽命)이 너무나 짧고 불교경전(佛敎經典)이 너무 방대(尨大)해서 다 읽기도 어렵고 더군다나 다 해석(解釋)헐 줄 알기도 어렵고 해석을 헐 줄 안다고 해서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과거에 많은 강사(講師), 선사(禪師), 조사(祖師), 어떤 그러헌 선지식(善知識)들이 미리미리 다 공부를 해가지고 말세(末世)에 태어난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들도 고대로만 허면, 고대로만 그리고 열심히만 허면 자기가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거거든. 이 활구참선은 유식 무식도 상관이 없고, 남자 여자도 상관이 없고, 늙고 젊은 것도 상관이 없어. 영리허고 영리허지 못한 것도 상관이 없다 그 말이거든.
아까 조실스님 법문에, 신심, ‘신심(信心)이 철저(徹底)해야 한다’고 허는 말씀을 허셨는데, -이 활구참선은, 무슨 종교나 다 신심을 다 말허지만- 특히 이 활구참선은 철저한 신심이 없고서는 이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슨 신심이냐? 「내가 원래 부처다」고 허는 그 신심이 철저해야해. 잠시 매(昧)해서 그렇지 바로 나를 깨달르며는 ‘내가 바로 부처라고 허는 철저한 신심’이 선행(先行)되아야 한다 그 말이여.
부르면 대답헐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만 알면, ‘썽낼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바로 이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찾기가 좋아. 막연허게 어디 잡초 밭을 헤지고 돌아댕이는 것도 아니고, 저 깊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바다로 들어가서 바다, 잠수복을 입고 들어가서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앉었을 때는 앉은 대로 찾고, 누웠을 때는 누운 대로 찾고, 밥을 먹을 때는 밥 먹으면서 찾고, 뭘 볼 때는 보면서 찾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 나를 찾는 바로 선불장(選佛場)이거든.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일 분 동안 앉으면 일 분 동안 부처요, 십 분 동안 앉으면 십 분 동안 부처요, 한 시간 앉으면 한 시간에 부처요, 하루를 앉으면 하루에 부처요, 일 년을 앉으면 일 년에 부처요, 일생동안을 앉으며는 일생동안 부처다.」 물론 좌(坐)에만 국집(局執)해서 앉었기만 헌다고 부처, ‘아 그러면 주로 많이 앉어야겄다. 앉으면 부처라니까 앉었기만, 우두거니 앉었기만 허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허실 분은 안 계시겠습니다마는,
‘앉는다’고 허는 말 가운데에는,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척추를 주욱 바로 세우고, 어깨의 힘을 다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을 평상으로 뜨되 너무 뚝 부릅뜨거나 감지 말고 평상으로 따악 뜨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凝視)허거나 주시(注視)허는 것이 아니여. 눈을 뜨되 의식적(意識的)으로 아무것도 본 바는 없어야 돼.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허는 거고-
자세를 바르게 했으면 호흡(呼吸), -바른 호흡을 해야 하는데 단전호흡(丹田呼吸)이거든.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丹田) 하복부(下腹部)가 볼록해지도록 하면서 숨을 천천히 들어마시고, 다 들어마셨으며는 잠깐 멈추었다가 서서히 코로 숨을 내쉬되, 내 쉼에 따라서 볼록해진 배를 차츰차츰 홀쪽허게 맨들어. 다 나갔으면 또 수르르르허니 들어마셔. 들어마시는 것도 항상 그 들어마신 호흡에 따라서 배가 볼록해지고 내 쉴 때는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 진 것을 「의식허면서」 호흡을 허는 거여.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헌 것을 「의식허면서」 호흡을 허게 되면 우리의 생각이 머리에, 머리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복부로 생각이 내려가기 때문에 머릿속은 상기(上氣)도 가라앉고 머리가 복잡한 것도 없어지고 머리가 시원해지거든. 그래서 머리로 무엇을 많이 생각허고 연구를 허면 기(氣)가 위로 올라가서 상기증세(上氣症勢)가 있고 골치가 아프고 피로(疲勞)허는데,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함으로 해서... 허면 우리의 생각이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기(氣)가 내려가서 피로도 회복이 되고 머리도 시원해지고 편안해진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두 번째 호흡을 바르게 하고,
세 번째 가서 마음을 골라. -생각을 바르게 갖는 것인데, 생각을 바르게 허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의 생각을 바로 가질 수가 있느냐 하며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화두(話頭)를 들거든. ‘이 뭣고?’ 하고 생, 속으로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라.’ 사량분별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못 ‘이 뭣고?’하고 그 「의심(疑心)만을 거각(擧却)허는 것」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알... ‘이 뭣고?’한 글자 석 자(字)가 문제가 아니라 ‘이 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것을 관해야 하는 거여.
한번 들어서는 잘 이해가 안 되실 분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고대로 자꾸 허다보면 화두 드는 법을 스스로 터득을 허게 돼.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허는데, 이 호흡도 너무 무러허게 가뜩 들어마실라고 허지 말고 팔부(8/10)쯤만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너무 한 점도 없이 완전히 내뱉을라 하지 말고 팔부(8/10)쯤만 내, 내쉬어. 그래야 여러 번 또는 십 분(10분) 이십 분(20분) 삼십 분(30분)을 해도 호흡 때문에 호흡이 오히려 곤란해지거나 피로허지 않게 된다 그 말이여.
물론 이 단전호흡을 허기 전에 준비호흡(準備呼吸)을 꼭 두 번 내지 세 번을 해야 하는데, 그거는 어떻게 허느냐 하며는, 단전호흡은 주로 배를, 배로 허지마는 이 준비호흡은 가슴으로 허는 거여. 숨을 있는 대로 다 내뿜은 다음에 완전히 다 내뿜은 다음에 수르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는데, 배는 생각허지 말고 가슴을, 가슴으로 숨을 들어마시거든. 가슴이 벅차도록, 더 이상 들어마실 수 없을 만큼 가슴에 가득히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신 상태에서 정지를 하는 거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었다가 입을 쪼끔 열고 후~ 허고 가슴을 홀쭉이 허면서 완전히 다 내 뿜어버리는 거야. 다 내 뿜었으면 다시 코를 통해서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득 가슴을 드는 듯 허면서 들어마시는 거여. 아까 첫 번째 헌 거와 같이 두 번 허고 또 한 번 세 번을 허면 허파 속에 있는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다 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가슴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험으로써 오장육부(五臟六腑)와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과 사지백체(四肢百體)에 큰 충격을 주어서, 주기 때문에 새로운 기분으로 단전호흡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단전호흡은 아까 먼저 말한 거와 같이 가, 가슴은 고대로 가만 놔두고 들어마신 호흡에 따라서 배꼽 밑에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 허도록... 허게 만들, 그렇게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셔.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고 팔부쯤만 그렇게 들어마셔.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삼사초(3-4초). 다 들어마셔, 삼사초 들어마셨으면 또 삼사초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코로 내쉬어. 내쉬되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홀쪽헌 것을 「느끼면서」 코로 조용허게 숨을 내쉬는데, 내쉬는 것은 들어마신 시간보단 조끔 길게 사오초(4-5초) 조용하게 길게 내쉬거든.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 허니 들어마셔.
화두는 언제 드느냐하며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그때 드는 거여. 생각헌다고 허지 않고 「든다(擧却)」고 허는 것은 무슨 이유냐 허면, ‘생각헌다’ 허며는 이것저것을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는 것을 ‘생각헌다’ 그러고 이론적(理論的)으로 따지는 것을 ‘생각헌다’ 그러는데, 「화두(話頭)를 드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사량분별로 이렇게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그 의심을 일으켜서 관(觀)허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헌다고 헌 말... 단어는 적합허지 않다 그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든다」 그러지 ‘화두를 생각헌다’고 허는 것이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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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무엇고?’
여러분 다 같이 한번 해보십시다.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를 해서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챙기고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초단계에는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야겠지만, 나중에 익숙해지면 한 번 들었던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없어지지 아니허면, 고대로 있으면 있는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따악 관(觀)하는 거여. 숨은 계속해서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허지만, 알 수 없는 의심은,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의심(疑心)을 타악 관(觀)하는 거고, 의심이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들어오면 ‘이 뭣고?’허고 이렇게 다시 또 챙기는 것이고.
누구나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뭣고?’ 허고 있는 동안에도 별별 생각이 다 오락가락 허지만,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허는 건 내버려 두면 되는 것입니다. 귓전에 바람 스쳐가듯이 그냥 스쳐가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잊어버렸다하면 또 챙겨.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해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 공부가 바로 되아가는 거지, 요래조래 따져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뭣이 알아지는 것이 있고, ‘아! 바로 이것이로구나.’ 그러는 사람은 그러는 동안에 그 공부가 바로 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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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광음몽리신(百歲光陰夢裏身)이라.
기능장구막인순(豈能長久莫因循)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요지격외진소식(要知格外眞消息)인댄
수참본참공안인(須參本參公案人)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백세광음(百歲光陰)이 몽리신(夢裏身)이여.
인간이 오래 살아봤자 백세(百歲)미만인데, 백세를 산다 하더라도 백년(百年)동안의 그 시간이라는 것은 꿈속에 몸띵이다 그 말이여. 한 숨 한 호흡 들어마셨다 내쉬지 못하면 바로 그게 내생(來生)이요 죽음이거든.
기능장구막인순(豈能長久莫因循)이리오.
어찌 능히 오래 살 수 있다고, 있, 오래 살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니 어찌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느냐 그 말이거든.
요지격외진소식(要知格外眞消息)인댄,
격외선(格外禪), 활구참선(活句參禪), 확철대오(廓徹大悟)헌 조사관(祖師關)을 깨닫고자 하거든,
수시본참공안인(須是本參公案人)이라.
모름지기 본참공안(本參公案) ‘이 뭣고?’를 착실히 거각(擧却)해나갈 것이다.
이것으로써 새해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을 믿는 법보(法寶)가족 형제자매 도반여러분과 더불어 우리의 각오(覺悟)를 새롭게하자는 뜻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서 금년(今年) 일 년 동안을 착실히 정진(精進)을 해서 여러분 건강하시고 온 가정이 화합단결(和合團結)해서 어느 직장에 가시더라도 모든 사업이 뜻과 같이 원만히 성취되기를 부처님께 축원하고 자리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성불하십시오. (대중 박수)
- 송담선사 법문 58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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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知止而后有定이니 定而后能靜하며 靜而后能安하며 安而后能慮하며 慮而后能得이니라.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하니 知所先後면 則近道矣리라.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는 先治其國하고 欲治其國者는 先齊其家하고 欲齊其家者는 先修其身하고 欲修其身者는 先正其心하고 欲正其心者는 先誠其意하고 欲誠其意者는 先致其知하니 致知는 在格物하니라. 物格而后知至하고 知至而后意誠하고 意誠而后心正하고 心正而后身修하고 身修而后家齊하고 家齊而后國治하고 國治而後天下平이니라. 自天子로 以至於庶人이 壹是皆以修身爲本이니라. 其本이 亂而末治者否矣며 其所厚者薄이오 而其所薄者厚하리 末之有也니라. 此謂知本이며 此謂知之至也니라。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百姓)을 친(親)함에 있으며, 지선(至善)에 머묾에 있느니라. 지(知, 앎)가 멈춘 후에야 정(定)이 있고, 정(定)이 있은 뒤에야 능히 정(靜, 고요)하며, 정(靜)한 뒤에야 능히 안(安, 편안)하며, 안(安)한 뒤에야 능히 려(慮, 사려)하며, 려(慮)한 뒤에야 능히 얻느니라(得). 물物에는 근본(根本)과 말단(末端)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까우니라. 옛 부터 명덕(明德)을 천하(天下)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다스리고(齊家), 그 집안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자신을 수양하고(修身), 그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誠意), 의념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앎에 도달하였으니(致知), 앎에 도달함은 물(物)을 물리침(格物)에 있느니라. 물(物)을 물리친(格物) 뒤에야 앎이 지극해지고(知至), 앎이 지극한 뒤에야 뜻이 정성스럽게 되고(意誠), 뜻이 정성스러운 뒤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心正), 마음이 바른 뒤에야 자신이 수양이 되고(身修), 자신을 수양한 뒤에야 집안이 다스려지고(家齊), 집안이 다스려진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國治),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화평해진다(天下平). 천자(天子)로부터 일반 백성(百姓)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수신(修身)으로써 근본(根本)을 삼는다. 그 근본(根本)이 어지러운데도 말단(末端)이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었으며, 그 두텁게 해야 할 것을 얇게 하고 얇게 해야 할 것을 두텁게 한 경우는 아직 없었다. 이것을 일러 근본을 안다(知本)고 하며, 이것을 일러 앎의 지극함이라 한다.
• [禮問百丈曰:「學人欲求識佛,如何是佛?」百丈云:「太似騎牛覓牛。」師云:「識得後如何?」百丈云:「如人騎牛至家。」師云:「未審始終如何保任,則得相應去?」百丈云:「譬如牧牛之人,執鞭視之,不令犯人苗稼。」師從茲領旨,頓息萬緣。] - 祖堂集 卷第十七.
예배하고 백장선사에게 물어 말하길, “학인(學人)이 부처를 알고자 하나이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백장선사가 이르시되, “마치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과 같구나.” 대안선사가 다시 이르길, “안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백장선사가 이르시길, “소를 탔으면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대안선사가 이르되, “미심(未審)한 곳이 있으니, 시종(始終) 어찌 보림(保任)하면 상응(相應)함을 얻겠습니까? 백장선사가 이르시되, 비유하면 소를 먹이는 사람이 채찍을 잡고 소를 보다가 남의 곡식을 범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대안선사가 이를 좇아 뜻을 받들어 몰록 온갖 반연(緣)을 쉬어버렸다.
- 조당집 권 제 십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