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설법]

2021. 3. 29. 19:53카테고리 없음

[풍탁이요설風鐸已搖舌]


보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며 –듣는 것도 그렇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같은 것이다. 만일 당신의 눈이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당신은 황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연과의 접촉을 잃었다. 문명은 점점 대도시를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도시인이 되어가고 있고, 밀집한 아파트촌에서 살고 있으며, 저녁 하늘이나 아침 하늘을 바라볼 공간조차도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상당한 아름다움과의 접촉을 잃고 있다.

우리가 해뜨는 거나 해지는 것, 달빛 또는 물 위의 빛의 반사를 얼마나 보지 못하며 살고 있는가에 대해 당신은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자연과 접촉을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게 된다.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미술관과 연주회를 가고, 텔레비전을 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고 예술에 관해 많은 생각과 말을 한다. 왜 우리는 예술에 그다지도 의존하는 것일까? 그것은 도피의 한 형태이자 자극의 한 형태일까? 

 

만일 당신이 자연과 직접 접촉한다면, 나는 새를 보고, 하늘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고, 언덕 위의 그림자들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그림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가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주위의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더 잘 보기 위한 자극을 얻으려고 약물에 의지하는 것이리라. 

 

매일 아침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종교 교사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강당에 올라가 막 얘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와 창가에 앉더니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새는 온 가슴을 다해 노래했다. 그러다가 노래를 그치고 날아가 버리자 선생은 말했다.

 

“오늘 아침 설법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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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滴水成氷 信有之、綠楊芳草色依依。
秋月春花無限意、不妨閑聽鷓鴣啼

說誼

此事、寒威威冷湫湫。滴水滴凍、江河絶流、纖塵不立、寸草不生。雖然如是、寒暄、不常。日煖風和、山川競秀、玄黃可判、黑白分明。伊麽則秋月春花無限事 各各自有無限意、事事一一天眞、着着可以明宗、可以向翠竹黃花邊、明得此事、可以向鶯吟燕語邊、明得此事。以至一見一聞、一一皆是發機的時節、一色一香、一一開我活眼的物事、須信道。山僧、未陞座、 風鐸、已搖舌。

이 일은, 사납게 냉랭하고 으스스하게 쌀쌀하다.
한방울 한방울 떨어진 처마에 물이 방울마다 얼어붙고, 강과 하천도 꽁꽁 얼어붙어 흐름이 끊어지고, 실오라기 하나 먼지 하나도 그 사이에 건립되지 못하며, 한치의 풀도 돋아나지 못하는 엄숙嚴肅한 경지境地다.

비록 이와 같다고 하나 추움과 따듯한 것은 항상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어서 날이 따뜻하고 바람이 화기和氣가 있으면 산천山川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하늘과 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검고 흰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게 되면 가을 달, 봄 꽃의 한 없는 일에 각기 나름대로 무한한 뜻이 있게 되고, 일마다 그 하나 하나가 천진天眞하며, 그 하나 하나에서 종지宗旨를 밝힐 수 있게 되어,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 피어있는 곳을 향해서도 이 일을 밝힐 수 있고, 꾀꼬리 노래하고 제비 재잘거리는 곳을 향해서도 이 일을 밝힐 수가 있다.

이로서 한 번 보고 한 번 들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기틀이 발發하는 시절時節이 되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기도 그 하나 하나가 나의 살아있는 눈(活眼)의 물건이며 일이니, 모름지기 내가 하는 이 말을 믿을지니라.

【이 산승이 법좌에 오르기 전에 이미 처마끝에 풍경소리가 잘 설해 주었느니라】

- [금강경 오가해 설의 第二十二 無法可得分- 함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