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分)에 넘치는 복수용(福受用)】

2021. 3. 26. 15:14카테고리 없음

【이인유밀불수지(利刃有蜜不須舐)、날카로운 칼끝에 꿀이 묻어있어도 그것을 핥지 말아라.】

 

 

 

인인자유충천기(人人自有衝天氣)허니

일념회광시장부(一念廻光是丈夫)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막도염화소식단(莫道拈花消息斷)하라

우여산조갱상호(雨餘山鳥更相呼)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인인자유충천기(人人自有衝天氣)하니

일념회광시장부(一念廻光是丈夫)니라.

사람 사람마다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한 생각 빛을 돌이키면 이것이 대장부(大丈夫)다.

 

 

막도염화소식단(莫道拈花消息斷)하라.

꽃을 드는 소식(消息)이 끊어졌다고 말하지 말아라. 

 

 

우여산조갱상호(雨餘山鳥更相呼)로다. 

비 개인 뒤에 산새가 다시 서로 부르는구나.

 

 

부처님 열반(涅槃)하신 뒤 삼천년, 열반하신 뒤 지끔 이천오백삼십구 년(2539년)이라고 허지만 언필층(言必稱) ‘삼천년’ ‘삼천년’ 그렇게 말을 허지요. ‘열반하신 뒤 삼천년이 지냈으니 말세(末世)가 되아서 부처님의 정법(正法), 법(法)에 등(燈)이 끊어졌다’고 말허지 말아라. 사람 사람마다 다 가슴 속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다 가지고 있어. 한 생각만 탁 돌이켜버리며는 대장부(大丈夫)가 되는 것이여.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를 못하기 때문에 중생(衆生)의 탈을 쓰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허고 있는 것뿐이여.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보살(佛菩薩)이나 조사(祖師)와 똑같은 대장부(大丈夫)에 기상(氣像)과 자격(資格)을 가지고 있더라. 

 

비 갠 뒤에 산새가 서로 부르느니라. 

이것은 글만 새기지 ‘비 갠 뒤에 산새가 서로 부른다’고 허는 뜻을 해설을 헐 수가 없습니다. 

 

_____

.......

방금 조실스님의 법문을 해제법문(解制法門)으로 우리는 잘 들었습니다. 오늘 해제를 맞이한 마당에 인연(因緣) 따라서 걸망을 지고 또 다른 선지식(善知識)과 도반(道伴)을 찾기 위해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어디를 가시건, 차를 타고 가시건, 걸어서 가시건, 물을 건너가나, 산길을 올라가거나, 또 어느 절에 들어가서 객실(客室)에서 머물거나, 도량(道場)을 거닐거나, 항상 우리는 모름지기 선우(善友)를 여의지를 말어야 한다. 선우는 선지식도 선우요, 도반도 선우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선우(善友)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우(善友)는 보통 말하면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정법(正法)을 신(信)하고, 여법(如法)허게 수행하고, 더 욕심을 내면 종지(宗旨)를 깨달라서 언제나 바른 말을 나를 위해서 충고해줄 수 있고 지도해줄 수 있는 그러헌 도반(道伴)을 우리는 선우(善友)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건 또는 얻지 못했건, 행실(行實)이 옳건 그르건, 내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을 보고는 그분의 눈과 그분의 말과 그분이 행동을 통해서 내 마음속에 스스로 자기를 바로잡고 자기에게 채찍을 가하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을 내서 정진하고 분발심(奮發心)을 내게 된다면 그러헌 분도 선우가 되는 것이고, 그 분의 입에서 욕이 나오고 행동이 머트럽고 거칠고 여법(如法)허지 못한 그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보고 나 스스로를 반성(反省)하고 나를 바르게 잡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머트럽고 거칠고 그러헌 사람도 나에게는 좋은 벗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내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자기 손으로, 자기 마음으로 자기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자기의 잘못된 걸음을 바로잡고, 자기 마음속에 붙어있는 어리석고 머트러운 생각을 스스로 털어내고, 그렇게 나간다면 어디를 가건, 동쪽으로 가건 서쪽으로 가건 남쪽으로 가건, 산에 가건 들로 가건 장바닥을 가건, 거기에는 환하게 밝은 길이 트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촌보(寸步)도, 한걸음 반걸음도 내 마음 속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의단(疑團)이 떠나지 않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학자(禪學者)에 청춘과 가정과 부모형제와 고향을 다 버리고 인생 일생(一生)에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린, 털어버리고 출가한 수행자에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_____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호되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烟霞味)하고

즉(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남북동(南北東), 동서(東西) 무정착(無定着)이여.

출가(出家)해서 걸망을 지고 나온 선객(禪客)이 남북동서(南北東西), 동서남북이 있을까보냐 그거여. 인연(因緣) 따라서 선지식(善知識) 따라서 도반(道伴)을 찾어서, 동쪽으로 가서 정진(精進)하기도 하고 서쪽으로 가서 정진하기도 하고, 이 철에는 남쪽으로 가기도 하고 다음 철에는 북쪽으로 가기도 해.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 그런 선방(禪房)에서는 한번 그 선방에 어떤 선지식이, 선지식을 찾아가면 그 선지식이 정말 자기 마음으로 믿어지고 존경심이 나면 그 선방에 -그래가지고 방부(房付)를 그 쉬웁게 들여진 것이 아니고 매우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방부를 들이게 되는데- 한번 방부를 들였다하며는 신참(新參)이건 구참(舊參)이건 선착순(先着順)으로 자리를 앉게 되는데, 아무리 구참납자(舊參衲子)도 저 맨 끝에 앉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그 앞에 우(위)에 앉은 선객이 떠나며는 또 한자리가 위로 올라가고 또 떠나면 한자리가 올라가고, 안 떠나고 그 자리에 있으면 밤낮 구참이라도 저 끝에 앉게 되는데, 한 번 들어가서 견성(見性)헐 때까지 오 년(5년) 내지 십 년(10년)도 안 떠나고 그 선방에서 그렇게 지낸다 그 말이여. 한철 지냈다고 해서 금방 걸망을 짊어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그렇게 허지를 않아. 

 

우리나라는, 물론 다 마음에 믿어지는 훌륭한 선지식이 계시면 일년(1년) 이태(2년) 삼년(3년) 내지 십년(10년)씩 그 큰스님 슬하(膝下)에서 그렇게 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대체적으로 한국선방(韓國禪房)은 한철 지내면 벌써 걸망을 지고 툭, 오란데도 없건만 갈 곳은 많아서 그저 해제(解制) 무렵이 되며는 어디로 갈 것을 그거 생각허느라고 화두(話頭)를 놓쳐버려. 그래서 겨울 안거(安居)에는 ‘납월 팔일(음력 12월 8일) 용맹정진(勇猛精進)이 끝나며는 걸망귀신이 들썩들썩 헌다’고 옛날부터 그런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그 도량이 좋고 또 좋은 도반도 있고 그러며는 그렇게 철철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꼭 그럴, 그러기보다는, 한번 들어가면 ‘석상(石上)에도 과삼년(過三年)’이라고 항상 조실스님께서 말씀허셨는데, 돌 우에도 한번 앉았다 하며는 턱 삼년 정도는 거기서 한바탕 버티고 정진을 해봐야 공부가 그래도 자리가 잡히고, 인자 한철 겨우 지내다가 뚝 떠나고 뚝 떠나고 그러거든. 동서남북이 정착, 탁 정해가지고 집착할 것은 없지마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여. 

걸망을 지고 다니는 납자(衲子)의 생애(生涯)가 한 가지 지팽이, 주장자(拄杖子)에 달려있다 그 말이여. 걸망을 지고 주장자를 턱 들면 퍼떡허면 천리(千里) 밖에로 날아가게 된다 그 말이거든.

 

 

먹는 것을, 설두(舌頭)에는 새작연하미(細嚼烟霞味)여. 

혀끝에는 연기와 안개의 선미(禪味)를 가늘게 잘 저작(咀嚼)을 허라 그 말이여. 

 

‘밥을 먹고 나물을 먹지 어떻게 연하(煙霞), 연기와 안개를 어떻게 먹느냐?’ 이건 신선도(神仙道)에서 나오는 말인데, 보통사람은 밥에다가 고기에다가 모다 이런 거 먹지마는, 산중(山中)에 들어가서 도 닦는 사람은 차츰 뭐 주육(酒肉)은 말할 것도 없고 곡식(穀食), 쌀이니 보리니 그런 곡식까지 다 끊어. 그걸 벽곡(辟穀)이라 그러는데, 벽곡을 하고, 솔잎이나 칡이나 산마나 그런 풀뿌리 약 뿌리 그리고 산에 모다 과일 그런 것만 먹고 생식(生食)을 하다가, 거기에서 더 수행이 깊어지면 그러헌 것까지도 다 끊어버리고 물만 마셔. 물만 마시고 그리고서 평상시에는 이 허공(虛空)에 가득 차있는 그 정기, 정기(精氣)를 들어마시는 거여. 그래 순-, 아침부터 저녁, 저녁부터 아침까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가지고 허공 속에 가득 차있는 정기를 들어마시는데, 그러다보면 산에 끼어있는 안개와 연하(煙霞)를 마시게 되니까, 그것이 바로 그러헌 수행을 허는 사람의 식생활이, 의식주(衣食住)문제가 거기에 다 포함이 되아있는 거지.

 

우리는 ‘벽곡을 헌다’, ‘생식을 헌다’, ‘단식을 헌다’, 모다 그런 것을 도에 가장 좋은 수단으로 여기진 않지마는, 설사 밥을 먹고 나물을 먹고 그렇게 정진허더라도 정신만큼은 먹는데 집착이 없기 때문에, 항상 호, 심호흡(深呼吸)을 허고 단전호흡을 허면서 화두(話頭)가 독로(獨露)허도록 잡두리 허니까 그냥 정신적(精神的)으로는 연하(煙霞)를 씹어 묵는 거와 같다 그 말이여. 

 

 

즉입천, 청봉, 즉(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여.  

바로 천 봉우리 만, 다시 만 봉우리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간다. 

 

우리의 공부는 무슨 조그만한 소견(所見)이 나면 득소위족(得少爲足), 쪼끔 무슨 빠꿈허니 소견 난 것을 그것을 자기 살림을 삼고 그런 것이 아니고, 조사(祖師)와 같은 경지(境地)에 올라가지 아니하면, 요새 흔히 말하는 초견생(初見性)이니 무엇이니 허고 쪼끔 무슨 의리선(義理禪)으로 뭐 쪼금 보, 보이며는 그 자기도 한 소식(消息) 했다고 뽐내고 큰소리치고 그런 것이 아니거든. 어쨌든지 고(古) 조사(祖師)의 경지에 아, 경지가 아니면 스스로 탁 그까잇거 버려버리고, 없었던 걸로 해버리고 계속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가야 할 것이여. 그것이 바로 한 봉우리 두 봉우리 천 봉우리를 넘고 다시 또 만 봉우리를 향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 말이여. 

 

이 선방에서 한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허다보면, 가행정진을 허고 용맹정진 허다보면 반드시 사람에 따라서는 해갈수록 꽉 맥혀서 전혀 아무것도 알아진 것도 없고 보인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어요.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뭐 스스로 가남(가늠)이 가고, 옛날에는 못 알아들었던 말을 알아듣기도 하고, 옛날에는 어떤 법문(法門)이나 경전(經典)을 보면 깜깜하게 몰랐었는데 나름대로 뭣이 짐작이 가고 또 뭣이 보이기도 하고 알아지기도 하고 그러는 수가 있어. 그러나 정말 확철대오 허기 전에는 그러헌 것들을 언제라도 그런 것을... 에 집착하지 말고 딜여다(들여다) 보고 그놈을 살림을 삼지를 말아라. 

 

그래서 학자(學者)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되 그 공안(公案)을 한 무데기 불덩어리와 같이 생각을 해야 혀. 불덩어리라 하는 것은, 잘못 가까이 허면, 훨훨 타는, 무섭게 타는 그 불무데기를 어리석게 가까이 허며는 얼굴을 갖다 확 디어버리거든. 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허고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 이론으로 철학적으로 그놈을 분석해서 알아들어가는 공부가 아니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해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 옳게 해가는 것이지, 알아들어가는 것이 있고 거기에다가 재미를 붙여가지고 마냥 속으로 그놈을 따지고 앉었으면 그건 잘못헌 것이여. 얼굴만 태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生命)까지 타죽을 수가 있어. 불법(佛法)은 ‘하하 이런 것이로구나.’ 벌써 그렇게 생각허면 그 사람은 그 불에 화상(火傷)을 입는 거고, 다맛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만이 하늘을 뻗지르도록 그런 간절한 의심이 일어나야 하거든. 

 

처음에는 화두를 든다고 해도 딴 생각이 나기도 하고, 또 다른 망상(妄想)이 일어나기도 하고, 이 생각 저 생각, 또 ‘이 뭣고?’ 챙길 때는 잠깐이고 금방 또 다른 생각 다른 법문이 생각나고 다른 화두가 또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게 다 의식적으로 어떠, 어찌 허기는 어려워. 속에서 자기도 모른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나 냉큼 그냥 일어났던 다른 모든 생각들은 그냥 고대로 놓아둔 채 냉큼 자기에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와야 하거든. ‘이 뭣고?’ 자꾸 허다보면 딴 생각 일어나던 것은 차츰 줄어지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의심을 드는 시간이 차츰차츰 불어나게 된다 그 말이여.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방선(放禪)중이거나 입선(入禪)중이거나.

 

입선중에는 많이 방이 뜨시고 공기가 탁(濁)하며는 조는 사람이 많아. 해나 졸다가 방선허면 그때사 졸음이 달아나고 방선헌 뒤에 화장실에 한번 갔다 와서 떠억 앉았으면 방선시간에 앉어보며는 졸음도 안 오고 참 성성허게 잘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지 입선중이거나 방선중이나 그것도 따질 것이 없고, 어느 선방이건 큰방 선방(禪房)에서는 누구를 막론(莫論)하고 잡담(雜談)은 안허도록 그렇게 묵언구역(默言區域)을 만들고, 방선중이라도, 방선시간이라도 큰방에 들어가면 언제라도 정진(精進)헐 수 있도록 누군가, 몇 사람인가는 항상 앉어서 떠억 정진을 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아야 정진하는데 참 좋다고 생각하고, 부득이해서 말을 헐 사람은 나가서 저 먼 디로 가서 말을 하고, 어쨌든지 선방 안이나 선방 근처에서는 큰소리나 작은 소리나 일체 잡담을 안허도록 그렇게 허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애를 써서 입방(入放)산에...선(禪)에도 걸리지 않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도 걸리지 않고 잡두리를 해 나가다보면, 터억 화두(話頭)가 면면밀밀(綿綿密密)하고 밀밀면면(密密綿綿)해서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저절로 타악 화두가 들어지거든.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땅을 봐도 땅을, 땅이 보이지 않고, 밥을 먹어도 그저 죽비(竹篦)치니 대중이 따라서 밥을 먹되 밥이 쓴지 단지 맛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도,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그렇게 해서 아침부터 점심까지, 점심부터 저녁까지, 밤에 아홉 시(9시)에 소등(消燈)을 하고 모두가 다 자더라도 처음에는 같이 떠억 누웠다가 가만히 옆에 사람도 모르게 일어나서 잠이 올 때까지 떠억 정진을 허다가 정 잠이 오면 또 가만히 누워서 한 숨 자고 일어나고. 

 

밤에 정진을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그런데 남 자는 시간에 밖을 나왔다 들어갔다 그래 싸는 그겐... 그건 못 쓰는 거고, 또 밤에 잠을 안 잔다고, 정진헌다고 밤에 앉어서 그러다가 그 이튿날 낮에 입선시간에 노상 코가 땅에 닿도록 꼬부리고 앉아서 코를 골고, 그것은 별로 바람직허지 못하고. 낮에 정말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정진하고 밤에 잠이 안 오는 시간에, 안 오며는 정진을 하고 잠이 정 오며는 그저 여섯 시간(6시간)으로 되아 있지마는 최소한도로 다섯 시간(5시간)은 자야, 그래야 그 이튿날 또 성성(惺惺)허게 정진(精進)을 헐 수가 있어. 

 

그렇게 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남이야 떠들거나 말거나, 밥이 나오면 밥을 먹고, 죽이 나오면 죽을 먹고, 국수를 허면 국수를 먹고, 찰밥이고 허면 찰밥을 먹고, 반찬이 좋으면 좋은 대로 먹고, 반찬이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먹고, 일단 자기의 모든 생각은 오직 자기의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 하나만을 가지고 잡두릴 해나가는 거거든. 그렇게 해서 차츰차츰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거든. 그래도 ‘아 인자 공부가 잘된다.’ 그런 좋은 생각을 내, 내지를 말아야 혀. 기쁜 생각을 내면, 환희심(歡喜心)을 내면 환희(歡喜)의 마군(魔軍)이가 들러붙는 거고, 화두가 잘 순일무잡하게 되며는 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몸도 가볍고 머리도 개운허고,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그 경계(境界)를 어찌 말, 말로써 표현헐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 말로써 표현헐 수 없는 그러헌 경계가 오더라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의심(疑心)이 없으믄 안되거든. 그러헌 가운데에도 터억 알 수 없는 화두가 성성허게 있어야 되거든. 조용하고 편안허고 맑고 깨끗한 경지에 빠져가지고 화두를 놓쳐버리고 그냥 그 맑고 깨끗한 경계에 집착해가지고 그놈을 맛보고 앉었으면 그건 공부를 잘못 헌거여. 그래가지고서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순일무잡허고 성성적적한 가운데 화두가 더욱 성성허도록 잘 잡두리허는데,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를 넘지 안 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허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통 밑구녘 빠지듯 화두를 타파허게 되면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보게 되고 불조(佛祖)에 과구(窠臼)를 보게 되는 것이여. 불조에 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인데, 그때는 바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點檢)을 맡어야 해. 그렇게 해서 선지식의, 바른 선지식의 간택(揀擇)을 받어가지고 정말 그때부터 다시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거여.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意)를 불구이원득(不求而圓得)이여. 구허지 안 해도 스스로 다 갖추게 되는 것이거든. 한 소식 했다고 미쳐 날뛰고 견성했다고 돌아댕이고, 그게, 거기서 끝난 것이 아... 그것은 얼음, 얼음덩어리를 녹여... 얼음인줄, 물이, ‘얼음이 바로 물이다’ 헌것만 알어가지고서는 그 얼음가지고 무엇을 헐 것입니까? 얼음은 열(熱)을 가자(假藉)해서 녹여야, 녹여서 물로 되... 만들어야 그 물을 가지고 먹기도 하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헐 수 있듯이 녹이는 과정이 필요헌거고, 견성, 보통 ‘견성했다’, ‘공안을 타파했다’ 또 그것은 애기를 낳아놓은 것 정도에 지내지 못해. 

 

애기 핏덩어리 주먹만 한 거 낳아놨다고 해서, 물론 애기 낳면 모다 기쁜 일이고 모두가 다 축복을 하고 그러기는 허지만 그때부터서 그 벌건 핏덩어리를 젖을 맥이고 그놈이 한 살, 두 살, 돌 넘어갈 때까지 길르기가 얼마나 공력(功力)이 들며, 그놈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되믄, 지금은 뭐 유아원(幼兒園)이다, 유치원으로 보내고, 그놈이 더 크며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보내서 결혼을 시킬 때까지, 그래서 제 몫을 헐 수 있을 때까지 길르는데 부모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얼마나 많은 공력(功力)이 거기에 들어가는지. 어머니가 뱃속에 열 달을 담어가지고 그 열 달 동안의 고생도 말로 헐 수 없고 그 핏덩어리가 똥오줌 싸서 그런 것을 그 밤이나 낮이나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면서 그 기, 길르는 그 고통을, 고생을, 물론 부모는 오직 사랑과 기쁨으로 길러주시겠지마는 그것을 어떻게 다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정진(精進)을 여법(如法)허게 해서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과거(過去)에 무량겁(無量劫)에 쌓인 습기(習氣)가 있어가지고, 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달은 것뿐이지,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해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수용(受用)헐 수 있게까지는 우리는 일생(一生)을 거쳐서 정진(精進)을 해야 하고 몸을 바꿔가면서도 정진을 해서 삼명(三明)과 육통(六通)과 팔해탈(八解脫)과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헐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공부는 이렇게 허기고 어렵고 궁극에 목적에까지 이르른 데에는 끝도 없고 한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꼭 해야만 되는 일인 것입니다. 내가 몰랐으면 모르려니와 알고서는 믿지 않을 수 없고, 한번 믿었다하면 실천을 해야 하고, 실천허기 시작했다 하며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끝까지 해나가야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공부인 것입니다. 

 

_______

 

 

이인유밀불수지(利刃有蜜不須舐)하고

고독지가수막상(蠱毒之家水莫嘗)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하고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인유밀불수지(利刃有蜜不須舐)하고 

고독지가(蠱毒之家)에 수막상(水莫嘗)이다. 

날카로운 칼끝에 꿀이 묻어있어도 그것을 핥아먹지 말아라. 아주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칼끝에 꿀이 있는데 그 꿀이 달다고 해서 그것을 혀로 이렇게 핥아먹지 말어라. 그 꿀에 욕심나가지고 그거 핥아먹다 혀가 잘라지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고독지가수막상(蠱毒之家水莫嘗)이여.

아무리 목이 말라도 사람을 죽게허기 위해서 그 우물에 독약(毒藥)을 타놓은 것을, 그것을 마시지 말라 이거거든. 

 

칼날 끝에 꿀은 무엇이냐? 우리는, 우리 수행자(修行者)는 분(分)에 넘치는 복수용(福受用)이라든지, 어떤 신심(信心)있는 신도(信徒)가 그 스님의 정진을 잘하고 고상한 인격을 갖추고 여법(如法)허게 수행을 하신 스님을 보면 신심을 내서 좋은 옷도 해드리고 좋은 약도 해드리고 좋은 필요한 돈도 많이 드리고 모다 여러 가지로 잘 해드리는 그런 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고 어디다 또 토굴(土窟)도 지어드리고 여러 가지로 해드리는데, 그것이 잘못 수용을 받아서 그것을 수용을 하다보면 칼끝에 묻은 꿀과 같은 결과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

그런데 그 청정한 마음으로 병든 스님의 그 병 수발을 하고 약을 지어드리고 헌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부처님께서도 “내게 잘해주고 싶은 공양을 올리고자하거든 병든 수행자에 약을 공양을 해서 병을 치료를 해라. 그러면 나한테 공양헌거 보다도 몇 배 더 공덕이 수승허다”고 이런 말씀을 부처님께서 허셨습니다. 근디 병든 스님네의 그 병을 치료해드리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마땅히 그리야(그리 해야)하는데, 옛날에는 그 수용(受用)어머니니 뭐이니 해가지고 그런걸 정해가지고 했는데, 그런걸 정허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잘 해드리야 하는데 수용어머니를 정해가지고, 해가지고 나중에 잘못되았다고 허는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너는 수용어머니니 뭣이니, 니가 중노릇 허다보면 나중에 ‘수용아들허자’ 인자 그런 사람이 나올런지도 모르니 그런 거 해서는 안 된다.” 맨 처음에 출가했을 때 조실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래서 여러 사람이 수용아들허자고 그런 청탁(請託)을 받었어도 조실스님한테 들은 바가 있어서, 아 그걸 참 좋게 잘 이렇게 사양(辭讓)을 했습니다마는, 수좌(首座)시님네나 비구니(比丘尼)스님네나 더러 비구(比丘)스님네나 다 참 청정하게 계율(戒律)을 지키고 도를 열심히 닦다보면 참 좋은 신심 있는 신도가 여러 가지로 잘 해드리는 그런 경우를 만날 것입니다마는, 행여나 수용어머니니 그런 거 정허지 않는 것이 좋고, 다 아무리 그 신도가 청정한 마음으로 참 모든 것을 잘해드리더라도 분에 넘치게 받어서 수용을 허는 것은, 그것은 나중에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정도를 잘 알아서 허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고독지가(蠱毒之家)에 수막상(水莫嘗)이다.

사람 죽으라고 독(毒)을 타 논 집이 어디가 있을까마는, 우리 수행자는 항상 그러헌 것이, 그러헌 것을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행을 열심히 허면, 여법허게 허면 반드시 도를 통하게 되고 깨닫게 되아서 헌데, 그 도를 깨닫고 견성성불(見性成佛)헌 것을 싫어하는 것이 있어. 무엇이냐? 마군(魔軍)이들이여. 한 수행자가 도를 성취하면 마군(魔軍)이의 궁전(宮殿)이 흔들리거든. 그래서 이 마군이는 항상 도 닦는 사람의 주변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훼방(毁謗)을 놓아. 그래가지고 온갖 방법으로 가장을 해가지고, 수용아들을 해가지고 한 수행자를 파멸(破滅)을 헌 것도 관점(觀點)을 달리해서 보면 그러헌 경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군이는 마군이의 탈을 쓰고 와서 ‘내가 마군이다’그러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그 수행자를 타락(墮落)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착한 사람으로, 신심 있는 사람으로 가장을 해가지고 접근을 허는 법이여. 요새 도처에 사기꾼이 만한(많은)데, 처음부터 ‘내가 사기꾼이다’ 달라들지 않습니다. 절대로 자기는 정직하고 정말 누구든지 그 사람을 믿, 믿을 수밖에 없도록 옷차림새나 얼굴표정 짓는 것이나 모든 행동을 그 사람의 호감(好感)을 사도록, 그 사람이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그렇게 가장을 해가지고 접근허는 법이여. 요새 뭐 제비족이니 뭔 족이니 헌 것도 처음에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 나타나는 거여. 그래가지고 처녀를 갖다가 유혹을 허거든. 

 

이 칼끝에 묻은 꿀이라든지, 사람을 죽인 독이 묻은 집에 물이라든지, 그런 것이 다 그러헌 등속(等屬)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검박(儉朴)한 것을 좋아하고, 지나친 복수용(福受用)을 바래지 말고, 그러헌 경우를 만나더라도 항상 마음을 수습(收拾)해서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자기를 단속(團束)을 헐 줄 알아야 명실공(名實共)히 훌륭한 수행자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할 납자(衲子)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시비해리(是非海裏)에 횡신입(橫身入)이여.

시비(是非)의 바닷 속에 몸을 비켜서 들어가.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다.

표범과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그런 무리 가운데에서도 그런 디에(데) 공포심을 내거나 그런 디에 걸리지 아니하고 자재(自在)헐 수 있는 그러헌 대장부(大丈夫)가 되아야 할 것이다. 

 

_______

 

오늘은 해제일을 맞이해서 많은 도반(道伴)들이 모였기 때문에, 내가 조실스님께 내가 처음 출가했을 때 들었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조실스님을 대신을 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이제 입춘(立春)이 벌써 지난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되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차츰 더워질 것입니다. 인자 춥도 더웁지도 않는 이 산철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허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창찬헌 것도 좋아허지 말고, 나를 비방허는 것도 싫어허지 말고, 칭찬(稱讚)허는 디에 빠져서 우쭐대는 것도 답지 못한 일인 거고, 나를 비방(誹謗)헌다고 해서 진심(瞋心)을 내고 원수를 삼을랴고 헌 것도 수행자답지 못한 일이여. 그래서 영가(永嘉)스님께서는 “남이 나를 비방하거나 험담(險談)을 허더라도 그냥 그 사람한테 맽겨버리고, 맽겨버려라” 그거거든. 싸우지를 말아라. “불을 가지고 하늘을 태운 거와... 태울랴고 허는 거와 같애서, 지 스스로 저만 피로헐 뿐이지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남이 나를 비방하는 말을 듣고서 감로수(甘露水)처럼 그놈을 잘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러면 그놈이 녹아서 나한테는 도업(道業)을 성취(成就)하는 부사의(不思議)의 약(藥)이 된다” 그거거든. 

 

역경(逆境)에 처(處)했을 때 그 역경을 잘 내가 수용을 헐 줄 알아야, 그래야 거기서 나에 정진력(精進力)과 도력(道力)은 증장(增長)을 허는 것입니다. 제방(諸方) 모다 여러, 여러 군데 선방(禪房)에서 정진허던 도반들, 또 용화사에서 도반, 정진하던 도반들, 또 시민선원이나 이 보살선방에서 정진허신 모다 거사(居士)님 보사(菩薩)님네들도, ‘아, 해제했으니까 이제 다 됐다. 이제 집에 가서 실컷 자고 실컷 먹고 그래 허리라’ 허고 지금부터서 빨리 법회(法會)가 끝나기를 기다리시진 않겠지만, 집에 가시는 걸음걸음 화두(話頭)를 놓치지 않도록. 댁에 가셔도 여(여기) 절에서 공부허시듯이 떠억 시간을 정해놓고 알뜰히 정진을 허시다가, 또 다음 철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

‘인생은 뭐 짧고 예술은 멀다’던가. 정말 우리는, 우리 이 몸띵이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여.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될는지, 금방 밥 잘 먹고 숫갈 놓으면서 그냥 갈는지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갈 때 가더라도 오늘을 정말 알뜰허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여. 이 시간, 이 시점을 알뜰하게 단속헐 줄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 정말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달라주지 안는다고 했습니다. 사소한 일에 속 썩고 오장(五臟)이 뒤집어지고 누구를 미워하고 이뻐하고 헐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당허면 ‘허허’ 웃으면서 속으로는 ‘이 뭣고?’ 허고, 언짢은 일을 당허며는 ‘아 그렇게 되았구나.’ 터억 그 자리에서 바로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좋은 일을 당허거나 궂은 일을 당허거나 귓전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생각하고 항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서 정말 알뜰히 정진(精進)허시길 부탁합니다. 

 

_____

 

이 결제 중에 사무실(事務室)에서, 또 후원(後院)에서 소임(所任)을 맡아서 애를 쓰시는 모든 도반들. 원주(院主)다 도감(都監), 별좌(別座), 채공(菜供), 공양주(供養主), 모다 서기(書記), 모다 콤퓨타(computer), 여러 가지 소임을 맡어가지고 그 소임을 맡은 가운데에 그렇게 열심히 해주었기 때문에 이 한 철을 이 많은 대중(大衆)이 또 정진(精進)을 헐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게 참 보통 일이 아니지요. 

 

옛날에 저 옛날에 정광여래(定光如來)와 같은 그런 불회상(佛會上)에서도, 그렇게 외호(外護)하는 대중(大衆)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가지고 다시 외호한 사람, 다섯 사람이 같이 공부를 허는데 “우리가 다섯 사람이 다 발우(鉢盂)를 가지고 걸식(乞食)을 헐 게 아니라 한 사람이 가서 얻어오고, 걸식을 해서 얻어오고 네 사람은 계속해서 정진(精進)을 허자.” 그래가지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자원(自願)을 해서 자기가 큰 바릿대를 가지고 가서 걸식을 해가지고 얻어 날으고 네 사람은 계속해서 정진을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한 사람은 큰 부자가 된, 장자(長者)가 되아가지고 출가(出家)를 헌 그런, 그래가지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단밀’이라고 허는 아라한이 있고, 한 사람은 아난존자(阿難尊者)가 되고, 한 사람은 또 서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되아서, 그런 경우도 있고,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녹야원(鹿野苑)에 가서 교진여(憍陳如) 등(等) 오비구(五比丘)를 만나서 그 제도(濟度)를 허실 때도, 한 사람이 가서 걸식(乞食)해오고 나무지기는 계속해서 부처님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정진(精進)을 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헌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백 명, 백여 명의 대중이 모여서 정진을 하고, 누군가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고, 또 후원에서 그 어려운 소임을 맡아서 발등이 얼고 손이 불어 트도록 그렇게 소임을 봐줌으로 해서 이렇게 백여 명 대중이 정진을 헐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후원에서, 사무실에서 애쓰는 그 도반들은 공부도 못하고 애만 썼다’ 그런 게 아니고, 그분 네들이 더 먼저 도업(道業)을 성취헐 수가 있고, 도업을 성취허되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성취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애쓰는 그런 도반들을 치하(致賀)험과 아울러서 동시에 격려(激勵)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또 그러헌 분들이 애쓴 그 공덕(功德)으로 우리가 이렇게 원만하게 동안거 해제를 맞이했으니, 마음으로라도 고마와, 고마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런 마음으로 또 우리는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야 헐 줄 생각합니다. 

 

- 송담선사 법문 546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법문 내용]

 

* ‘부처님 열반(涅槃)하신 뒤 삼천년이 지났으니 말세(末世)가 되어서 부처님의 정법(正法), 법(法)의 등(燈)이 끊어졌다’고 말하지 말아라. 사람 사람마다 다 가슴 속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다 가지고 있어. 한 생각만 탁 돌이켜버리면 대장부(大丈夫)가 되는 것이여. 그 한 생각을 돌이키지를 못하기 때문에 중생(衆生)의 탈을 쓰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고 있는 것뿐이여.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보살(佛菩薩)이나 조사(祖師)와 똑같은 대장부(大丈夫)에 기상(氣像)과 자격(資格)을 가지고 있더라. 

 

* 학자(學者)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되 그 공안(公案)을 한 무데기 불덩어리와 같이 생각을 해야 혀. 불덩어리라 하는 것은, 잘못 가까이 허면, 훨훨 타는, 무섭게 타는 그 불무데기를 어리석게 가까이 하며는 얼굴을 갖다 확 디어버리거든. 공안(公案)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 이론으로 철학적으로 그놈을 분석해서 알아들어가는 공부가 아니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해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 옳게 해가는 것이지, 알아들어가는 것이 있고 거기에다가 재미를 붙여가지고 마냥 속으로 그놈을 따지고 앉았으면 그건 잘못한 것이여. 얼굴만 태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生命)까지 타죽을 수가 있어. [學者 所叅活句如一團火 近之則燎却面門]

 

불법(佛法)은 ‘하하 이런 것이로구나.’ 벌써 그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은 그 불에 화상(火傷)을 입는 거고, 다맛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만이 하늘을 뻗지르도록 그런 간절한 의심이 일어나야 하거든. [無佛法措著之處 只有大疑 如烈焰亘天]

 

순일무잡하고 성성적적한 가운데 화두가 더욱 성성하도록 잘 잡두리하는데,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를 넘지 안 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통 밑구녘 빠지듯 화두를 타파하게 되면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보게 되고 불조(佛祖)에 과구(窠臼)를 보게 되는 것이여. 불조에 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인데, 그때는 바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點檢)을 맡아야 해. 그렇게 해서 바른 선지식의 간택(揀擇)을 받아가지고 정말 그때부터 다시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거여.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意)를 불구이원득(不求而圓得)이여. 구하지 안 해도 스스로 다 갖추게 되는 것이거든. [忽若打破漆桶 則百千法門無量妙義 不求而圓得也]

 

* 한 소식 했다고 미쳐 날뛰고 견성했다고 돌아다니고, 그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여. 그것은 ‘얼음이 바로 물이다’ 한 것만 알아가지고서는 그 얼음가지고 무엇을 할 것입니까? 얼음은 열(熱)을 가자(假藉)해서 녹여서 물로 만들어야 그 물을 가지고 먹기도 하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할 수 있듯이 녹이는 과정이 필요한 거고, 견성, 보통 ‘견성했다’, ‘공안을 타파했다’ 또 그것은 애기를 낳아놓은 것 정도에 지내지 못해. 그와 같이 정진(精進)을 여법(如法)하게 해서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과거(過去)에 무량겁(無量劫)에 쌓인 습기(習氣)가 있어가지고, 우리가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달은 것뿐이지, 생사 없는 도리를 증(證)해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수용(受用)할 수 있게까지는 우리는 일생(一生)을 거쳐서 정진(精進)을 해야 하고 몸을 바꿔가면서도 정진을 해서 삼명(三明)과 육통(六通)과 팔해탈(八解脫)과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우리 수행자(修行者)는 분(分)에 넘치는 복수용(福受用)이라든지, 어떤 신심(信心)있는 신도(信徒)가 그 스님의 정진을 잘하고 고상한 인격을 갖추고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하신 스님을 보면 신심을 내서 좋은 옷도 해드리고 좋은 약도 해드리고 좋은 필요한 돈도 많이 드리고 모다 여러 가지로 잘 해드리는 그런 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다 또 토굴(土窟)도 지어드리고 여러 가지로 해드리는데, 그것이 잘못 수용을 받아서 그것을 수용을 하다보면 칼끝에 묻은 꿀과 같은 결과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 조실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수용어머니니 뭣이니, 니가 중노릇 하다보면 나중에 ‘수용아들하자’ 인자 그런 사람이 나올런지도 모르니 그런 것 해서는 안 된다.” 맨 처음에 출가했을 때 조실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래서 여러 사람이 수용아들하자고 그런 청탁(請託)을 받았어도 조실스님한테 들은 바가 있어서, 아 그걸 참 좋게 잘 이렇게 사양(辭讓)을 했습니다마는, 수좌(首座)스님네나 비구니(比丘尼)스님네나 더러 비구(比丘)스님네나 다 참 청정하게 계율(戒律)을 지키고 도를 열심히 닦다보면 참 좋은 신심 있는 신도가 여러 가지로 잘 해드리는 그런 경우를 만날 것입니다마는, 행여나 수용어머니니 그런 것 정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다 아무리 그 신도가 청정한 마음으로 참 모든 것을 잘해드리더라도 분에 넘치게 받아서 수용을 하는 것은, 그것은 나중에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정도를 잘 알아서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마군(魔軍)이는 마군이의 탈을 쓰고 와서 “내가 마군이다” 그러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그 수행자를 타락(墮落)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착한 사람으로, 신심 있는 사람으로 가장을 해가지고 접근을 하는 법이여. 요새 도처에 사기꾼이 많은데, 처음부터 ‘내가 사기꾼이다’ 달려들지 않습니다. 절대로 자기는 정직하고 정말 누구든지 그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옷차림새나 얼굴표정 짓는 것이나 모든 행동을 그 사람의 호감(好感)을 사도록, 그 사람이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그렇게 가장을 해가지고 접근하는 법이여. 이 칼끝에 묻은 꿀이라든지, 사람을 죽인 독이 묻은 집에 물이라든지, 그런 것이 다 그러한 등속(等屬)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검박(儉朴)한 것을 좋아하고, 지나친 복수용(福受用)을 바래지 말고, 그러한 경우를 만나더라도 항상 마음을 수습(收拾)해서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자기를 단속(團束)을 할 줄 알아야 명실공(名實共)히 훌륭한 수행자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할 납자(衲子)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이여.

 

* 어디를 가시든지 창찬하는 것도 좋아하지 말고, 나를 비방하는 것도 싫어하지 말고, 칭찬(稱讚)하는 데 빠져서 우쭐대는 것도 답지 못한 일인 거고, 나를 비방(誹謗)한다고 해서 진심(瞋心)을 내고 원수를 삼으려고 한 것도 수행자답지 못한 일이여. 그래서 영가(永嘉)스님께서는 “남이 나를 비방하거나 험담(險談)을 하더라도 그냥 그 사람한테 맡겨버려라. 불을 가지고 하늘을 태울려고 하는 것과 같애서, 지 스스로 저만 피로할 뿐이지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남이 나를 비방하는 말을 듣고서 감로수(甘露水)처럼 그놈을 잘 받아들이고 그러면 그놈이 녹아서 나한테는 도업(道業)을 성취(成就)하는 부사의(不思議)의 약(藥)이 된다” 그거거든. 역경(逆境)에 처(處)했을 때 그 역경을 잘 내가 수용을 할 줄 알아야, 그래야 거기서 나에 정진력(精進力)과 도력(道力)은 증장(增長)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