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自己) 인연법(因緣法)에 의해서 만나지는 것】

2021. 3. 17. 16:17카테고리 없음

【진리(眞理)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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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精進)을 허는 가운데에 그 식(識)이 맑아져서 그 맑아진 정신상태에서 한 생각 일으키면 곧바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여. 중국(中國)에 운문선사(雲門禪師)도 한 생각 일으켜가지고 삼생(三生)동안을 임금 노릇을 했고, 그 한 생각 일으킨다도 허는 것이 좋은 생각을 일으키며는 좋게도 되고 나쁜 생각을 일으키면 나쁘게도 되고, 그 한 생각이라고 허는 것이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허지만 그 한 생각은 결과적으로 무서운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조그마한 씨 하나를 심은 것이, 그것이 습기(濕氣)를 만나고 태양에 열(熱)을 만나면 그것은 눈이 떠가지고 저 엄청난 은행나무라든지, 용문산(龍門山) 은행나무, 천년(千年) 묵은 은행나무라든지 큰 몇 아름씩 되는 괴목나무 정자(亭子)나무라든지, 그 씨는 조그만한 씨거든. 그것을 땅에다가 떨구며는 인연(因緣)을 만나서 싹이 트며는 그렇게 엄청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천자가 되고 왕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요(堯)ㄴ임금 순(舜)임금이나 도척(盜跖)이가 되거나 모다 그런 것도 전부가 그 근원을 따져보면 한 생각 탓이거든. 우리가 육되...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허는 것도 한 생각으로 인해서 윤도윤회를 무량겁(無量劫)을 해오고 있는 것이고, 금생에 우리가 이렇게 이러헌 환경 ‧ 이러헌 가정 ‧ 이러헌 일생을 살게 되는 것도 한 생각 탓이거든. 한 생각이 조... 그 작은 것 같지마는 바로 무량겁으로 연결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同時)에 한 생각이 무량겁이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即是無量劫)이고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即一念)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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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나가세나(Nāgasena), 나선비구(那先比丘)라고 허는 그 도인(道人)이 있었는데, 한, 유럽(Europe)에 한 왕(王)이 질문을 했습니다. 

 

“‘임종시(臨終時)에 일념(一念)으로 염불(念佛)을 허면, 염불을 일념으로 열  번(10번)을 허면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을 헌다’ 그러니,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아니해. 어떻게 해서 그 경(經)에는 그런 말이 쓰여 있습니까? 나한테 그걸, 그 이치(理致)를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오.” 

 

“그것은 마치 백 덩어리나 되는 큰 돌을 큰 배에다 실어도 그것이 가라앉지를 안는 거고, 조그만한 돌이라도 배에 실지 않고 그냥 물에다 넣으면 ‘퐁당’하고 저 밑으로 가라앉은 거와 같습니다. 백 덩어리의 큰 바윗돌은 그놈이 합치면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고 주먹만 한 돌은 그 가볍디 가벼운 거지만, 아무리 가벼워도 배에 의지허지 아니허면 가라앉고, 엄청난 무거운, 그러고 그 많은 바윗덩어리도 배에다가 실으면 가라앉지 않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죄(罪)가 많고 그렇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이라고 허는 진리(眞理)의 배에 의지허면 가라앉지 않는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고, 별로 큰 죄를 안 지은 것 같지만 쪼끄만 한 죄를 지었어도 불법에 의지허지 않고 그럭저럭 살면 반드시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칠십 년(70년) 팔십 년(80년) 그 세월도 중요허지만, 마지막 죽을 때의, 마지막 숨이 질라고 헐 때의 막바지에 그 간절(懇切)한 생각은 무서운 힘을 발휘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평상시에는 그 무거운 다듬잇돌이라든지 무거운 그 농짝이라든지 들지 못하지만, 불이, 불이 날 때에는 그 무거운 것을 들어 옮길 수도 있고 그렇다 그 말이여.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는 정말 간절한 생각으로 부르기 때문에 열 번 아니라 단 한번이라도 간절하게 부르면 찰나간(刹那間)에 일생동안 지은 죄(罪)를 소멸(消滅)을 하고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갈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뭐 일생동안 염불(念佛) 헐 것도 없고, 일생동안 참선(參禪)헐 것도 없고, 그저 그럭저럭 허고 싶은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되나 깨나 살다가 마지막 죽을 때 가서 관... ‘아미타불(阿彌陀佛)’ 열 번을 부르던지 ‘이 뭣고’ 한 번을 해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 요새는 하도 힘은 적게 들이고 효과는 빨리 보고자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다 햇빛을 보고 그러니까 그럴 거 같지만, 일생동안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던지 ‘이 뭣고?’를 열심히 해놔야 마지막 죽을 때에 턱 간절하게 화두(話頭)를 들 수도 있고 아,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평상시에 자꾸 불르고 불러서 그것이 습관(習慣)이 되고 그것이 체질화(體質化)가 되아서 무심결에도 그것이 되게 되아야 마지막 죽음에 가서도 그것이 되는 것이지, 해 놓지 안 허면,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이 뭣고?’고 평상시에 살아있을 때 해놓지 아니허면 죽을 때 아무 생각이 없어. 죽을 때 내 자식, 내 재산, 그러헌 탐진치(貪瞋癡) 삼, 삼독심(三毒心) 밲에는 일어날 것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평상시에 항상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일념단속(一念團束)을 해서, 속이 상해도 ‘이 뭣고?’ 슬퍼도 ‘이 뭣고?’ 부회가 나도 ‘이 뭣고?’ 원망스러워도 ‘이 뭣고?’ 몸이 아퍼도 ‘이 뭣고?’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걸어가나 앉으나 서나 일체처 일체시에 챙기고 또 챙기고. 잘 되고 안 되고 헐 것을 왜 따지냐 그 말이여. 잘 안될 수록에 더 챙기고, 잘 된다고 좋아할 겨를이 어디가 있어. 잘될 수록에 더 잘 단속을 해나가고. 

 

군대에 가서도 ‘행여나 총을 맞을까’, ‘행여나 화살을 맞을까’, 겁을 집어묵고 이리 피허고 저리 피허고 하다가 맞어 죽는 거고, 죽음을 무릅쓰고 막 돌진을 허고 그렇게 허면 무서운 것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렇게 험으로써 결국은 그 싸움에 이길 수가 있는 것이여. 자꾸 이리재고 저리재고 뒤로 미루고, ‘이렇게 해갖고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참으로 이렇게 공부해서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인자사 해갖고 뭐이 내가 될 것인가? 근기가 하열(下劣)한 내가 참선(參禪)을 해서 될 것인가?’ 밤낮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가지고 결국은 공부에 전력투구(全力投球)를 못허게 되면 밤낮 해봤자 죽 떠묵, 죽 떠묵은 자리다 그 말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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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홍도비구(弘道比丘)는 암자(庵子)에서 공부를 허고 있었어요. 몸이 정진을 어떻게 잠을 덜자고 무섭게 정진을 했던지 병(病)이 났다 그 말이여. 병이 나서 문턱에다가, 문을 열어놓고 문턱에다가 손을 떠억 요렇게 잡고서 얹어놓고 바깥 경치를 요렇게 바람을 쏘이면서 저 바깥 산 구경을 허고 있었어. 산턱에 파랗게 잎이 피고 빨갛게 잎이 피고 흰 구름이 이렇게 지내가는 것을 이렇게 보면서 그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가지고 문이 텅! 닫힌 바람에 손가락이 깨져서 피가 났다 그 말이여. 아, 자기도 모른 사이에 순간적으로 속에서 진심(瞋心)이 났습니다. 그래가지고 문을 확! 열어 재끼면서 “빌어묵을 놈의 바람에 손을 다쳤다.”고 이랬는데, 

 

그러다가 홍도비구가 죽었어. 그래서 모다 화장(火葬)을 해서 다 했는데, 하룻날은 그 모래를 요렇, 판판한 모래밭에다가 글씨를, 글씨가 있었어. 뭐라고 써졌냐하면,

 

 

 

 

아석비구주차암(我昔比丘住此庵)하야

다겁근수근성불(多刧勤修近成佛)일러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송풍취타병중좌(松風吹打病中座)타가 

일기진심수사신(一起嗔心受蛇身)이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석비구주차암(我昔比丘住此庵).

내가 옛날에 비구(比丘)로서 이 암자에 살다가,

 

 

다겁근수근성불(多刧勤修近成佛)이라.

다겁(多刧) 동안 부지런히 닦아서 머지안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되았더니,

 

 

송풍취타병중좌(松風吹打病中座)여.

병중(病中)에 이렇게 있다가 솔바람이 불어서 자기 손을 쳤어.

 

 

일기진심수사신(一起嗔心受蛇身)이다.

한번 진심(瞋心)을 버럭 낸 바람에 이렇게 뱀 몸이 되았다.

 

 

이 게송(偈頌)을 필두(筆頭)로 해서 주욱 썼는데 그 내용은, ‘이 게송을 벽에다가 써 붙여놓고 대중스님들은 어쨌든지 진심(瞋心)을 내지 말고 정진을 잘허라’고허는 그런 당부(當付)에 말을 썼는데, 그것이 홍도비구가 죽어서 무엇이 되았냐 하며는 뱀이 되았거든. 팍! 진심(瞋心) 내는 그 과보(果報)로 뱀이 되아가지고, 뱀이 되았어도 어떻게 다겁을 수행을 허고 했던지 꼬리로 글씨를 써서 대중에게 그렇게 충고를 했다 그 말이여. -보통 뱀이야 무슨 글을 알며 무슨 글씨를 꼬리로 쓰겠습니까마는, 다겁으로 수행을 해가지고 머지안해서 견성 헐 단계에까지 왔었기 때문에- ‘그러면 진심 한번쯤 내가지고 곧 견성성불 헐 사람이 뱀이 될 수가 있느냐?’ 그렇지만 수행을 잘 해서 맑아진 사람일 수록에 그동안에 죄업(罪業)은 거의 녹았기 때문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행동, 한 말 한 것이 즉각 결과로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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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은 첫째 철저하게 인과법(因果法)을 믿어야 합니다. 인과법은 과학적(科學的) 사실이여. 말 한마디 헌 것, 행동하나 헌 것, 생각한 번 일으... 속에서 발표를 허지 않고 마음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한 생각까지라도 어김이 없이 그 결과가 다 나타난 것이여. 그래서 어쨌든지 화두(話頭)를 들고 모든 일을 화두로써 다 해나가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를 지팽이 삼고 화두로 무기를 삼고 화두를 등불을 삼아서 일초 일초를 그렇게 살아가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고 그런다면, 과거에 아무리 업(業)이 많아도 결국은 그 화두(話頭)의 그 일념(一念)으로 해서 다 대처해나갈 수가 있는 것이여. 

 

화두 한 생각은 팔만사천(八萬四千) 번뇌(煩惱)도 그놈으로 이겨나가고, 팔만사천 마군(魔軍)이도 그놈으로 이겨나가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워낙 과거로부터 무량겁을 돌고 돌면서 온 지은 업(業)이 지중(至重)허기 때문에 참 인생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정법(正法)을 믿지 않고 이 화두(話頭)라고 허는 것이 없다면 정말 살아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법을 믿고 화두 하나로써 자기를 다스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팔만사천의 마군이도 문제가 없거든.

 

용화사 보살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공부허시는 분 가운데 “정진을 헐라고 있으면 마군이가 턱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가끔 마군이가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그 마군이가 옆에 사람들도 모다 해(害)를 끼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니 이렇게 어떻게 해야겄습니까?” 이런 질문을 헌 분이 있는데, 그분이 꽤 정진을 헐랴고 애쓰신 분 같애요. 

 

바로 팔만사천 마군이가 밖에서 오는 마구니도 물론 있겠지만 거의 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마군이여.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마군이로서 자기한테 이렇게 달라드는 것이거든. ‘마군이가 팔, 마왕파순(魔王波旬)이가 저 밖에가 있어가지고 그렇게 해서 자기한테 이렇게 자기를 괴롭힌다’ 그렇게 생각 헐 일이 아니고, 인연(因緣) 없이 마군이가 나타나는 법이 없어. 불보살(佛菩薩)을 만나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만나고,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만나지고, 마군(魔軍)이를 만나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만나지기 때문에, 자기와 무관(無關)헌 것이 자기를 해꼬자 하는 법도 없고 우연히 남이 나를 도와주는 법도 없어. 반드시 자기(自己) 인연법(因緣法)에 의해서 만나지는 것이기 때문에, 밖에 모든 경계가 자기가 다 맨들아 논 것이고 자기 안에서 맨... 나온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그놈을 다스릴라며는 자기를 다스리면, 자기 안에서 나온 것... 뿌러... 뿌리가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그 뿌리인 자기(自己)를 단속(團束)을 허면 밖에 모든 경계는 그 지엽적(枝葉的)인 것이라, 거기서 나오는 가지의 이파리이기 때문에 저절로 다스려지는 법이여. 번뇌망상은 말헐 것도 없고, 가족, 내나 이웃이나 모든 사회 국가가 전부 자기가 벌여 논 것이여, 다. 자기가 벌여 논 것이 아니면 이 땅에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날 까닭도 없고 이 시대에 자기가 태어날 까닭이 없어. 자기가 다 만들아서 다 해놓고서 적... 인연이 맞추어서 자기가 이 세상에 와서 모든 부모도 만나고 형제간도 만나고 이웃도 만나고 국가 사회도 만나게 된 것이여. 

 

그래서 조끔도 다른 사람을 원망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어. 어리석은 사람이 부모 탓하고 자식 탓하고 며느리 탓하고 이웃 탓하고 나라 탓하고 시대를 탓하는 것이지, 지혜 있는 사람은, 이러헌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을 잘 믿고 인식(認識)헌 사람은 아무도 원망하고 미워하고 탓할 필요가 없고 오직 자기로 돌아가야 돼. 자기로 돌아가서 모든 것의 뿌리인 자기를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여. ‘이 뭣고?’‘이 뭣고?’ 썽이 날 때도 ‘이 뭣고?’ 괴로울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억울하고 분헐 때도 ‘이 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어찌 괴로운 생각 속에 잠신들 얽매어 있을 까닭이 있으며, 원망스럽고 미운 생각 속에, 왜 그 속에 잠신들 머물러 있어. 몸, 이 몸이 더러운 흙탕물이나 변소 같은데 빠지면 빨리 나올라고 굉장히 허우대지요? 소리를 지르고 ‘사람 살리라’ 그러고 뭐 붙잡을 거 있으면 금방 붙잡고 기어 올라올 것이여. 그 속이 좋아서 ‘천천히 나가자.’ 누가 건져줄라고 해도 ‘아, 나 요 속에 좀 더 있다 올라오겠다’고, 그런 미련헌,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거여. 그런데 왜 마음속에 똥보다도 더 더럽고 피고름보다도 더 더럽고 독사 구뎅이보다도 더 무서운 마음속에는 왜 나올랴고 생각을 않고 그 속에 더 있을랴고 허냐 그 말이여. 즉각 ‘이 뭣고?’를 챙기면 바로 그 구뎅이에서 나오는, 나올 수 있는 것인데 왜 ‘이 뭣고?’를 안 챙기고 뒤로 미루고 계속 그 속에서 더 이 생각 저 생각 허면서 더 시간을 연장을 헐랴고 허냐 그 말이여. 

 

그 괴로운 생각은 헐수락 더 괴로운 거고, 미운 생각도 이 생각 저 생각을 더 생각헐수록 더 미웁고, 원망스러운 생각도 이리저리 생각허면 생각헐수록 더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 말이거든. 슬픈 생각도 역시 마찬가지여. 이 생각 저 생각허고 생각을 헐수록 더 슬프거든. 슬퍼도 퍼뜩 ‘이 뭣고?’를 챙겨봐. 금방 눈물이 뚝 근치고, 원망스럽고 얄미운 때도 퍼~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 뭣고?’ 해봐. 그냥 원망스러운 생각도 스르르 녹아 없어지거든. 그것이 우리가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벗어난 법이여. 이런 말, 우리는 밤낮 허는 소리고 ‘아이고 또 그 소리헌다’고 여러분들 그러시지만, 인연 없는 사람은 이런 말 별로 듣기 어려운 것입니다. 모르고 안 헌 사람은 차라리 쯧, 그러리라 허지만, 귀에 딱갱이가 앉도록 듣고 또 듣고 법회 때마다 또 듣고 그런데도 열심히 안 헌 사람은, 그 사람을 바보라고 해야 할까요? 불쌍하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우리는 헐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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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담선사 법문 476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