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라는 꿈, 몽상夢想、그리고 각성覺醒】

2021. 2. 28. 12:48카테고리 없음

발심(發心) ‧ 출가(出家) ‧ 수행(修行) ‧ 각성(覺醒)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하니
뇌진풍치해악경(雷震風馳海岳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허니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부처님 출세(出世)허셔서 성도(成道)허셔가지고 열반(涅槃)하신 뒤로 오늘날 까지 삼철련(3000년). 많은 불제자(佛弟子)들이 그래도 출가수행(出家修行)을 헐라며는 고행이 자연히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먹는 거, 입는 거, 거처(居處)허는 것이 세속(世俗)에 호의호식(好衣好食)헌 것과는 달라서, 걸식(乞食)을 하고, 그래서 먹는 것도 제한이 되고 입는 것도 제한이 되고 주처(住處)도 제한이 되아서 그 모두가 다 자발적(自發的)인 의사(意思)에 의해서 허는 일이라 이것을 다 감내허고 살지,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서 독신생활(獨身生活)을 하면서 먹을 거 입을 거 모든 것이 마음대로 허들(하지를) 못하니까 자연히 그것이 구속(拘束)된 생활이고 고행(苦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은 허지 말아라. 그렇다고 해서 호의호식하고 지나친 사치(奢侈)도 훌륭한 수행인의 생활이 아니다”고 허는 것을 말씀을 허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王宮)에 부귀(富貴)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셔서 그런 고행(苦行)을 다 겪으시고 결국은 그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우리도 부처님처럼 어떠헌 계기, 계기(契機)를 통해서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또 출가(出家)를 해야 하고 또 수행(修行)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면 출가라고 허는 것은 반드시 세속(世俗)을 버리고 산중사찰(山中寺刹)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것 만을 의미헌 것이 아닙니다. 그러헌 것은 스님네들이고, 세속에 몸 담아 사신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도 세속에 몸이, 몸담아 생활허면서도 출가를 허셔야 합니다. 몸만 출가하고 마음은 출가하지 못한 그런 스님네도 있습니다.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면서도 그 정신은 출가한 그런 청신사 청신녀도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출가한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출가하지 않고 완전히 세속에 있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이 출가(出家)에도 두 가지가 있고 재가(在家)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되 그 정신은 출가한 그런 분이야 말로 참으로 훌륭한 것이고, 몸도 마음도 다 출가한 그러헌 스님도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심(發心) ‧ 출가(出家) ‧ 수행(修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멀리 보며는 무량겁 중에, 이것이 무량겁(無量劫) 중에서도 볼 수가 있고 일생(一生) 동안에도 볼 수가 있고 일 년(1년) 사이에도 볼 수가 있고 하루(一日) 사이에도 볼 수가 있고 한 생각(一念) 가운데에도 발심해서 출가해서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발심(發心) ‧ 출가(出家) ‧ 수행(修行) ‧ 각성(覺醒)이 찰나 찰나에 우리는 있어야 합니다. 한 시간 전이나 한 시간 후나 하루 전이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냥 그냥 고대로, 아무런 발심도 없고 아무런 출가도 없고 아무런... 그리고 타성, 타성(惰性)에 빠져서 그냥 그런대로 밥 먹고 이렇게 똥 누고 입선(入禪)허고 방선(放禪)허고, 어제도 그러고 오늘도 그러고, 그렇게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내가고 이 년이 지내가고 삼 년이 지나가고 십 년이 지내가고. 이걸 고인(古人)은 ‘금일야임마(今日也恁麽) 명일야임마(明日也恁麽)’ 이런 표현을 허셨습니다마는, 그래가지고서는 우리는 확철대오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항상 발심(發心)을 하고, 찰나(刹那)찰나에 출가(出家)를 하고, 찰나찰나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이렇게 해서 구경의 깨달음, 구경각(究竟覺)을 얻을 때까지 그렇게 항상 새롭게, 항상 발심(發心)한 초학자(初學者)의 그러헌 마음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헌 찰나 찰나에 발심하고 시간 시간이 발심하고 하루 하루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양취하고 부처님 앞에 서서 예불(禮佛)하고 참회(懺悔)하고 축원(祝願)한 것이, 이것이 바로 발심(發心)의 계기(契機)를 삼는 것이고 깨달음에 나아가는 찰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헌 찰나 찰나에 발심 ‧ 출가 ‧ 수행이 아니며는, 까딱허면 자기 나름대로는 여법(如法)허게 수행한다고 생각을 하고 남 봄에도, ‘참 저분은 여법하게 수행하신다’ 이렇게 보여질 지 모르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惰性)에 빠지고 혼침(昏沈)에 빠지고 무기(無記)에 빠져서 십 년, 삼십 년, 일생을 선방(禪房)을 여의고 살아도 그저 마냥 그럴 뿐인 것입니다.

비록 고행이라고 허는 것이 고행을 위한 고행, 그 단식허는 고행, 잠을 안자는 고행,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는 장좌불와에 고행, 또는 말을 안 허는 고행, 그런... 그러고 남을 위해서 몸을 갖다가 바치는 가지가지 고행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런 고행만을 위한 고행을 부처님께서는 거룩한 수행이 아니라고 허셨을망정,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그러헌 고행의 과정도 겪으시고, 겪으신 다음에사 정말 이 고행을, ‘고행만을 위한 고행이 정말 훌륭한 수행이 아니라’고 허는 깨달음을 허신 것입니다. 고행도 해보지도 않고, 고행만을 위한 고행이 참다운 수행이 아니라고 미리서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잘 잠 다 자고 그리고서 이 수행을 헐랴고 헌다면 언제 부처님과 같은 그러헌 확철대오의 그러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목적하는 깨달음은 물론 생사해탈을 해서 구경각(究竟覺)을 얻은 그것이 구경의 목표이지만, 천구백구십일 년(1991년), 또 불기(佛紀) 이천오백삼십육 년(2536년)의 성도재를 맞이해서 우리 국민들은 정말 각성(覺醒)을 해야 할 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각 종교계나 또 국가 모다... 적으로 볼 때, 정부나 또는 모든 정치인이나, 또 경제계 경제인들, 또 교육자나 또 교육을 받는 학생이나, 노동자나 농부나 상인이나, 또는 가정적으로는 가장이나 주부나 또 아들딸들도 전부가 다 각성을 해야 할 해라고 생각을 합니다. 금년 성도재(成道齋)를 기(期)해서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반성(反省)을 하고, 각자 자기가 처해있는 위치에서 지나온 자기를 반성하고 오늘 이 시간부터서 내가 무엇인가 바로 잡고 새롭게 나아가는 지표(指標)를 세워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헌, 앞에 말헌 그러헌 여러 계층 ‧ 종류에 사람들이 각자 각성을 허지 않고서는 우리나라는 정말 정치적으로 혼돈(混沌)을, 정... 경제적으로 혼돈을, 전 국민이 지표 없는 혼돈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앞길이 망망(茫茫)할 따름인 것입니다.

지끔 말한 이 각성(覺醒)이란 말과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헌다 허는 그 각성이나, 글자는 같지마는 내용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글자가 같다고 허는 뜻에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헌 것도 결국은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참나를 깨닫는 것이고, 지끔 우리 국가나 정부나 국민들이 모두 각계각층(各界各層)에서 낱낱이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각성을 헌 것이나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 공통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서는 개인적인 발전도 있을 수가 없고,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에 발전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 먼 사람도 한 생각 돌이켜서 정말 반서... 자기반성(自己反省)을 해가지고 발심(發心)을 하면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가 있고, 경제인도 마찬가집니다. 교육자도 마찬가집니다. 학생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부 다 말을 시켜보면 지가(제가) 말 허고 있는 보담도 몇 십 배 더 훌륭한 말씀들을 다 합니다. 정치인도 교육자도 경제인도 다 말을 합니다. 들어보면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부 다른 사람한테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반성을 하고 발심을 하고 그리고 노력을 헌다면 전체가 다 되아... 제절로 되아갈 텐데, 전부 다른 사람이 잘 못허니까 이렇게 된다고만 생각을 허는 것입니다. 그러는 한은 말만 시끄럽고 복잡허지 조끔도 발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비근(卑近)한 예로 가정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그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고 화합(和合)하지 못하고 전부가 속에 불평불만(不平不滿)이 차있습니다. 아내는 남편, 남편은 아내, 아들은 부모, 부모는 애들. 그래가지고는 세월이 가면서 점점 상태가 악화될 뿐이지 좋아질 가능성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각자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 속에서 문제를 찾아야 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고, 그럴 때에 자연히 상대방, 상대방도 역시 자기,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발심해서 그래서 노력을 헌다면 일시에 가정이 딴, 분위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반성(自己反省)하고 각성(覺醒)을 허면.

아내는 아내가 헐 일, 남편은 남편이 남편으로서 해야 할 직분(職分)과 도리(道理)를 다하고, 행동으로도 그렇고 마음가짐도 그렇고,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부모를 원망하고 가정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 여건 속에서 학생으로서 아들로서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헌다면, 부모 원망한다고 해서 그것이 좋아질 리도 없고 세이(사이)만 더욱 벙거로워지는 거고... 벌어지는 거고, 가정의 문제도 집집마다 정말 일가족이 화합해서 살아가는데 행복을 느끼고 보람을 느끼고 그러헌 가정이 과연 몇 집이나 되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대로 그저 살아가고 그런대로 다 지내가지만, 속속들이 알고 보면 불평이 없는 집안이 없고,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이럴랴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이렇게 살아서 뭣 헐 것인가?’ 나름대로의 다 불평이 있고 불만이 있고 한, 한스러움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런 문제는 불평, 불만, 한탄 그것에 끝나서는 되지를 않고, 또 그러헌 책임을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한테 몰아붙이고 전가(轉嫁)를 헌다고 해서 조끔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계속 ‘권리(權利)는 주장(主張)을 하... 해야 한다’ 해가지고 계속 주장을 허다보면 싸움 밲에는 일어나지 않고, 싸움이 계속되면 점점 악화가 되아서 결국은 파탄(破綻)되고 마는 것입니다. 현재 주어진 그 여건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자기의 도리를 헐랴고 노력을 하고, 조끔 자기가 좀 해볼랴고 허면 상대방이 이해를 안 해주고 상대방이 조끔도 안 해주며는 ‘해봤자 소용없다’고 금방 포기를 허는데, 한번 두 번 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상대방은 그렇게 안하는데 나만 그렇게 해야’ 하고, ‘그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가 있느냐’ 허지만, 금생에 그러한 여건, 그러헌 상태로 자기가 놓여지기까지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자기가 그렇게 지어가지고 현재 그 자리에 있는 거여. 사람이나 짐승이나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자기가 지어서, 지은 업연(業緣)에 따라서 금생(今生)에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지금 살아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무량겁을 그렇게 살아왔어. 발심(發心) ‧ 출가(出家) ‧ 수행(修行) ‧ 그리고 각성(覺醒)이 없는 한, 무량겁을 또 점점 악화되아 가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 말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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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무상찰나실난측(無常刹那實難測)헌디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다.
꿈 가운데에 한 알갱이 쌀을 탐착(貪著)하다가, 저 금선대(金仙臺)에 만겁(萬劫)동안 먹고도 남을 양식(糧食)을 잃어버리는구나.

이 ‘한 알갱이 쌀’이라고 허는 것은, 세속(世俗)에 물질적인 모다 재산 그런 것만이 아니고, 오욕락(五欲樂), 재산이나 또 여색... 색(色)이나 또 맛있는 음식(飮食)이나 명예(名譽) 권리(權利)나 또는 안락(安樂)이나 이런 오욕락,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오욕락이겠고, 우리 참선(參禪)을 허는 사람에게는, 참나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오욕락을 허라고 해도 안 헐 것이고 그것이 다 허망한 것인 줄 너무너무 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自尊心)이라고 허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어요.

자존심.
‘내가 잘났다’고 허는 자존심, ‘내가 옳다’고 허는 자존심, ‘내라’고 허는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치(我癡). 쪼끔만 그것을 건드리며는 못 견디거든. ‘감히 지가 나를 무시허다니.’ 그 자, 자존심(自尊心)을 상(傷)한 것을 일반 사람들은 굉장히 마음에 상처를 입, 입습니다. 사실을 알고 보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하심(下心)하고 항상 마음을 비운 사람에게는 누가 자기를 좀 알아주거나 누가 자기를 좀 업신... 알아주지 않거나 자기를 업신여기거나 그래봤자 탁! 화두(話頭) 들고 그저 이해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공부를 허지 아니헌 사람, 참선공부를 허지 아니한 사람은 그 한 생각 돌리기가 태산(泰山)을 움직이기보담도 더 힘이 들어서 굉장히 속을 상해. 그래가지고 아주 그 사람허고는 웬수를 맺어. 부부간에도 그렇고, 친구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그렇고, 그 자존심을 건드린 것을 그렇게 못견뎌허는데, 오욕락이나 자존심 그런 것들이 ‘한 알갱이 쌀’에다가 비유된 것이여. 그 한 알갱이 쌀을 탐착(貪著)허다가, 그것도 생존(生存) 생시(生時)에가 아니라 꿈속에서.

이 세상에 우리가 낳아서 살아가는 이 지구... 이 세계(世界)가 전부(全部)가 이것이 꿈속의 일이거든.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졌다가 그, 그 조건(條件)이 흩어지면 언젠가 없어져버리는 거여. 또 그 하나도 그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여. 주체성(主體性)이 없는 것이거나 인연 따라서 모여졌다 인연 따라서 흩어지는, 영원히 그런 것이 계속될 영원성이 없는 그러헌 것들이니, 그러헌 것에 탐착을 헌다 그 말이여. 저 사막에 가며는 그 진기... 진... 진기루(蜄氣樓, 신기루蜃氣樓)라고 허는 그런 게 있는데, 실제는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여. 그 목마를 때는 그 출렁거리는 호수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도 가도 가보면 없는데 뭐 저 멀리 큰 도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몇 백리(百里)를 가도 나타나지 않는 거여.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錯覺)을 하는 것’이여. 우리가, 일반사람들이 추구하는 오욕락도 사실은 자기 마음껏 충족허기도 어렵고 또 일시적으로... 충족 되았다 해도 일시적(一時的)이고,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또 그 속에 빠져놓고 보며는 별로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 것이여. 그 이거 꿈속에서 한 알갱이 쌀을 탐착한 거여.

‘그러헌 것에 탐착을 허다가,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보금자리인 금선대(金仙臺), 영원히 먹고 먹고도 남을 그 양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말은, 서푼어치도 못된 그 자존심(自尊心) 때문에 자기를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원결(怨結)을 맺고, 명예 ‧ 권리 ‧ 지위 ‧ 부귀 ‧ 영화 그런 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나 경제나 심지어는 사법계나 교육계가 전부, 종교계까지 전부가 이 한 알갱이 쌀을 탐착하다가 만겁량을, 금선대(金仙臺)에 만겁량(萬劫糧)을 잃어버리는 그러헌 상황 속에 지금 놓여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각성 ‧ 발심 ‧ 출가해서 ‧ 수행해가지고 ‧ 각성하는 그러헌 계기(契機)를 갖지 않고서는 이러헌 악순환(惡循環)은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무상찰나(無常刹那)라 실난측(實難測)이여.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죽음을 향해서 지금 다가가고 있어. 그 죽음이 삼십 년(30년) 후에 올지, 이십 년(20년) 후에 올지, 십 년(10년) 후에 올지, 오 년(5년) 후에 올지, 삼 년(3년) 후에 올지, 사흘(3일) 후에 올지, 하루 후에 올지 우리는 그걸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한 번 죽음을 당하며는,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탐착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이 몸을 잃고 나면 갈 곳은 빤합니다. 그래도 이 몸띵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띵이, 비록 무상(無常)하고 더럽고 추한 몸띵이지만, 그래도 이 몸띵이 있을 때, 이 육체가 생존해 있을 때 발심 ‧ 출가 ‧ 수행을 해서 ‧ 자아를 각성을 헐랴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이 찰나(刹那)라 실(實)로 언제 올는지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오.
어찌 맹렬히 반성(反省)을 해서 급히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할까보냐.

한 생각 돌이키면 악마가 천사(天使)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한 생각 놓치며는 악마(惡魔)가 되는 것이거든. ‘중생성불찰나간(衆生成佛刹那間)이라’ 그랬어. 중생이 성불허는 것도 찰나간이거든. 그 찰나(刹那)라고 허는 것은 일념(一念)이거든. 한 생각.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데, 그 구백분의 일(1/900)의 생각이니까 그 얼마나 짧은 시간이냐 그 말이여. 그 짧은 시간에 성불(成佛)헐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얼굴은 그냥 고대로 있으면서. -사실은 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초에, 일초 동안에도 시시각각으로 변(變)해가고 있는 것이지만, 우선 우리 육안(肉眼)으로 볼 때에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마치 하늘에 해가, 해나 달이 이렇게 쳐다볼 때는 공중에 그냥 그대로 먹궈(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얼굴도 역시 마찬가지, 우리 육체도 마찬가지거든-

무상(無常)한 속에서 정말 발심(發心)을 해서, 우리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발심 ‧ 출가 ‧ 수행이 단계적으로 따로 따로 있을... 가 아니라 찰나간에 이 세 가지가 동시(同時)에 발동(發動)이 되아야 하거든. 떠억 화두를 들면, 바로 그 ‘화두(話頭) 드는 그 찰나(刹那)가 발심 ‧ 출가 ‧ 수행이 동시에 발동이 된 것’이거든. 그렇게 한 시간을 지내고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그렇게 일 년을 지내라 그거거든. 별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진 것, 무엇이 나아졌는가 따져보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마는, 항상 그렇게, 요새 말로 긴장된 상태라고 허까, 그렇게 경건(敬虔)하고 엄숙(嚴肅)하게 그렇게 자기를 채찍하고 단속(團束)해나간다면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굉장한 발전(發展)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새해를 맞이해서 자기를 반성(反省)을 하고 묵은해를 보내면서 반성을 헐 때에 반드시 발전이 있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사람이 다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무상(無常)한 속에서 영원(永遠)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인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에 너무도 간곡하게 참 말씀을 해주셔서 구태여 산승(山僧)이 되풀이 할 것은 없습니다마는, 정말 세상이 사회문제나 국가문제나 세계문제가 어떠헌 점에서는 희망적인 면도 있고 어떠헌 면에서는 절망적인 면도 있으나, 희망적(希望的)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성취가 될는지 알 수가 없고 절망적(絶望的)이라고 해서 영원히 포기헐 수도... 해서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활구참선 하는 이 법보제자(法寶弟子)는 항상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좋은 일을 보나 궂은일을 보나, 기쁜 일을 당하나 슬픈 일을 당하나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정신(精神) 차리고 항상 화두(話頭)를 들고, 들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誠實)히 해나갈 때, 사회에, 썩어가는 사회에 소금이 될 것이고 암흑(暗黑)으로 치닫는 세계에 광명(光明)이 될 것입니다. 비록 말세(末世)라고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이렇게 경건(敬虔)하고 엄숙(嚴肅)하게 시간 시간이 새로운 마음으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반드시 정법시대(正法時代), 지상(地上)에 낙토(樂土)를 건설하는 위대한 작업이 도처(到處)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이 세계가, 이 세상이 몽중(夢中)에 허망한 세계라고 하지만, 몽중 꿈도 기왕 꿀 바에는 좋은 꿈을 꾸어야 좋지 않습니까? 그 꿈이나 생시(生時)나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에 내나 그 몸띵이로 꿈을 꾸고 또 꿈을 깼을 때에도 역시 내나 그 몸띵이인 것입니다. 꿈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렇게 생존시(生存時)에 깨어있을 때 생각, 생각으로 온갖 과거사(過去事)도 생각하고 미래사(未來事)도 생각하고 현재(現在) 닥치는 일도 생각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썽도 내기도 헌 바로 그놈이, 잠잘 때는 육체는 가만히 누웠지만 그, 그놈이 내나 활동을 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통 ‘꿈’이라고 허는 것인데,

-“나는 꿈을 잘 안 꾼다.” 사람이 한 시간, 잠들어서 한 시간쯤 지내며는 다 꿈을 꾸게 되아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살아있을 때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자기, “지금 뭣 생각했소?” 하고 물으면, “나 아무것도 안 생각했다.” 허지만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어. 있으면서 자기가 잊어버리거나 꾸... 생각하면서도 뭣 생각헌지도 모르고 그렇게 있었거나 하는 것이여. 잠들면 반드시 잠이 깊이 들면 꿈을 꾸는데 깨고 나면 잊어버려. 잊어버리고 “너 어제 밤에 꿈꾸었냐?” 하면 “안 꾸었다”그러는데 사실은 꾸었거든. 잠이 깊이 들었을 때 따악 관찰을 해보면 눈을 깜작 깜작 깜작 깜작 하면서 꿈꾸기 시작하는 증거여 그게. 그래서 그때 잠을 못 자게 깨거든... 깨우거든. 또, 또 조끔 있으면 잠이 들어. 깊이 잠이 들면 또 눈을 깜박 깜박 깜박하면 또 그때 잠을 못 자게 해. 꿈을 못 꾸게 깨와. 밤새도록 꿈을 못 꾸게 깨왔다가 도로 자고 깨왔다... 깼다 도로자고, 그러면 그 이튿날 골치가 아프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러기를 이틀 사흘만 허면 완전히 미칠라고 그래. 그래서 잠 잤을 때 깨우지 않고 푹 잠자면서 꿈을 꿀, 꾸도록 가만히 놔두면 그 이튿날은 일어나면 머리가 개운하고, 꿈만 못 꾸게 방해만 쳤다 하며는 그 이튿날 그렇게 정신이 불안하고 골치가 아프고 앉아도 앉으나 서나 아무 정신이 없어. 그 비실비실 비실. 이틀 사흘째는 그 실험을 헐 수가 없을 정도라.-

그래서 기왕 우리가 눈을 떠있을 때도 우리는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거고, 잠을 잘 때에는 진짜 꿈속에서 또 다시 이중(二重)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이거든. 그러니 꿈속에 돈을 벌어보면 부자가 되았다고 해서 꿈 깨고 보면 그 많은 재산이 간 곳이 없는데, 꿈속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좋아하다가 꿈 깨버리면 어디로 가. 가고 흔적이 없지.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거든. 꿈속에 자기가 되고자 하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장관이 되거나 왕이 되았다고 헌들 꿈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이여. 그러나 기왕 꿀 바에는 좋은 꿈을 꾸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러기는 허나 그런 줄 까지 알면서 구태여 탐착(貪著)할 것은 없거든. 하, 하도 보고 싶으며는 ‘하~ 꿈속에라도 좀 보고 싶다’고 허는 사람이 있는데 보면 뭐할 겁니까 그게.

그래서 그럴 바에는 확실히 허망(虛妄)한 줄 알고 확실히 무상(無常)한 줄 알면 거기에 집착심(執著心)을 좀 놓고, 떠억 발심(發心)해서 출가(出家)해서 그리고 화두(話頭)를 들고 열심히 ‘이 뭣고?’를 허자 이거거든. ‘이 뭣고?’를 해서 그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존심(自尊心)도 자연히 담박(淡泊)해져. 누가 자기를 무시허고 좀 그런, 그렇더라도 하나도 마음에 동요(動搖)가 되지 않거든. 자기에게 누가 좀 욕을 하고 물질적으로 손해를 끼쳐도, ‘하, 내가 전생(前生)에 지 것을 거져 묵은 일이 있었나 부다.’ 빚 갚은 요량하고 그냥 또 ‘이 뭣고?’허고. 이렇게 살면 가정도 편안해질 것이고 사회도 편안해질 것이고 국가도 편안해질 것이고, 온통 그 한 생각 비위에 거슬리면 웬수가 되아가지고 피차(彼此) 죽이고 다시 보복(報復)하고 또 죽이고 허기를 무량겁(無量劫)을 해왔거든. 개인과 개인도 그렇고 국가와 국가도 마찬가지여.

보통 부모 자식 간에는 ‘혈육지간(血肉之間)’이라 해가지고, 참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해가지고 굉장히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아까울 것이 없고 그런데, 자식 생각은 또 달라요. 물론 자식도 효자(孝子) 효녀(孝女)가 있어가지고 부모를 굉장히 잘 봉양(奉養)을 하고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랴고 노력을 하고 그런 분도 있습니다. 있으나, 대체적으로 자식은 부모가 자식을 생각허는 십 분에 일(1/10)? 아니 백 분에 일(1/100)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자식대로 으레히, ‘부모는 자식한테 다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부모가 자기를 낳았기 때문에, 안 낳았으면 자기가 이 세상에 안 태어날 텐데 낳았으니까 잘 믹이고 잘 입히고 대학도 보내고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한다 이거거든. 어렸을 때 자기가 부모가 되아 보기 전까지는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결혼을 해서 아들딸을 낳아놓고 보면 생각이 달라져. 그때는 자식이 아니라 부모가 되니까 자꾸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불효(不孝)허면 “이놈아 너도 자식 낳아봐라. 그래야 부모 생... 부모 마음을 알 것이다.” 보통 다 그러지요. 그 부모가 죽으면 다시 또 몸을 바꽈서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그놈이 커서 장가가면 또 부모가 돼.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관계도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무량겁을 두고 그렇게 그러헌 위치, 그러헌 상황이 반복(反復)이 된 줄을 전혀 모릅니다. 속담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던가, ‘올챙이가 개구리 속을 모른다’던가?(웃으심) 그래서 부모 자식, 또 할머니 할아버지, -요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참 옛날에는 나이 묵으며는 나이 값으로 어디를 가나 큰 소리 친 때가 있었지만, 대접을 받고 그러는데- 늙으면 참 고약하게 되았습니다. 그 손자가 어디 딴 데서 온 것이 아니고 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난 아들 피를 받아서 손자가 태어났는데, 그 손자가 가만히 생각해보며는 자기의 뿌리가 할머니 할아버진데 그 뿌리가 썩어버리며는 나무 가지와 잎이 시들어버린 법인데, 전혀 자기 아버지 어머니는 자기를 낳아주니까 그래도 좀 고맙게 생각허면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혀 고마운 중을 모르고 냄새난다고 같이 살기를 싫어헙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래서 지금은 참 양로원에, 양로원(養老院)이나 가까 갈 곳이 없어. 노인정, 노인정(老人亭)이나 양로원이나 가, 다른데 갈 곳이 없는데,

참, 참선(參禪)을 허신 분은 아들 며느리가 불효를 허거나 손자 손녀가 냄새난다고 싫어허거나 그럴 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서 ‘이 뭣고?’ 열심히 하고, 그저 죽지 않을라니까 먹어야 하고 한 숟갈 먹었다하면 ‘이 뭣고?’만 허면 괄세(괄시)를 허거나 잘 맥여주거나 그까짓 거 상대할 거 없, 상관할 게 없거든. 그것도 ‘자기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서 받는 것이다’ 생각하고 아들 며느리 원망할 것도 없고 손자 손녀 싫다고 헌다고 해서 서, 서러워 헐 것도 없어요. 내나 그놈이 크면 또 할머니 할아버지 될 테니까 그때 가서 보, 보면 알 것이고. 그러니까 정말 늙어서 참선을, 그러헌 악조건(惡條件) 속에서도 원망허지 않고 슬퍼허지 않고 바람... 보람을 느끼면서 흐뭇허게 살아갈라면 젊어서 참선을 해놔야 하거든. 그러헌 풍파(風波)에, 팔풍경계(八風境界)에 흔들림이, 흔들림을 받지 않을 만큼 젊어서부터 수행을 쌓아놔야, 뿌리를 깊이 깊이 박아놔야 폭풍우에 넘어지지 않듯이, 나무가. 젊어서 충실히 공부를 해놔야 늙어서 힘없고 늙어서 재력(財力)도 없고 늙어서 언권(言權)이 없어서 별 대우를 못 받아도 하나도 외롭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남녀노소(男女老少) 여러분들이 다 젊은 분도 얼마 안 있으면 다 늙을 것이고, 그래서 이것이 전부 남의 일이 아니거든. 이미 흰 머리가 나신 분도 지금도 늦지 안했으니까, 발심(發心)허고 출가(出家)해서 수행(修行)을 쌓는 일 밲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금생을 그래도 이 몸띵이를 지탱해나갈랴면 그것이 필요하고, 더군다나 머지 안 해서 이 몸띵이를 버리고 새 몸을 받을 때에 ‘이 뭣고?’ 해놓지 아니한 사람은 그때 갈, 갈 곳이 없어. 수망각란(手忙脚亂)해서 어느 귀신이 어디로 잡아갈란지 모르거든. 임종(臨終)헐 때 터억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숨을 딱 거둘라며는 지끔 해놔야 그것이 되는 거여.

신미년도 이제 다 저물어가고 섣달 초여드레가 되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섣달 초여드레 성도재를 맞이해서 정말 새로운 반성 ‧ 발심 ‧ 출가수행 ‧ 그래서 깨달음을 향해서 한 발을 내디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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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춘막수향동거(尋春莫須向東去)하라
서원한매이파설(西園寒梅已破雪)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자가옥리천진불(自家屋裏天眞佛)이
절기구구향외구(切忌區區向外求)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심춘막수향동거(尋春莫須向東去)하라,
서원한매이파설(西園寒梅已破雪)이니라.
봄을 찾기 위해서 모름지기 저 동쪽으로 멀리 찾아 나가지 말아라. 너희 집 서쪽 정원(庭園)에, 뜨락에 차운 매화가 눈 속에서 이미 피어있느니라.

겨울에는 북풍(北風)이 불다가 봄이 돌아오면 동풍(東風)이 불거든. 그러면 동풍이 불면 봄이 온 것으로 봐서, ‘저 동쪽으로 동쪽으로 멀리 찾아가면 거기에는 봄이 있거니’ 이렇게 생각하고 동쪽으로 가지 말아라 그거거든. ‘너희 집 뜨락에 이미 눈 속에서 매화(梅花)가 요렇게 피어있느니라’ 이거거든. 자기 집 뜨락에 매화가 피었다며는 벌써 자기 집 뜨락에 봄이 와 있는데 왜 그 봄을 놓아두고 저 먼 디로 찾아갈 게 뭐 있느냐 이거거든.


자가옥리천진불(自家屋裏天眞佛)이니,
절기구구향외구(切忌區區向外求)니라.
자기 집에 천진불(天眞佛)이 있어. 천진불은 이제 새로 깨달라 갖고 부처님이 아니라 원래(元來)부터서 부처님, 부처님이 계신다 그 말이거든. 원래 이... 원래 깨달라 있는 부처님이 계셔, 자기 집에. 그러니 절대로 밖으로 애써서 부처를 구허지 말아라.

그 자기 집에 있는 부처님이 무엇이냐? 누구냐? 가정적으로는 부모님이 부처님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처님이고,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들이 부처님이고 며느리가 부처님이고 손자 손녀가 부처님이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서로 받들고 서로 생각하면, 그 집안은 온통 부처님세계가 될 것이다 그거거든. 그러니 그 부처님 놔두고 무슨 딴 부처님을 찾을 것이 뭐 있느냐? 이렇게도 보고,

자가옥리천진불(自家屋裏天眞佛)은, 우리 참선(參禪)허는 사람에게는, 또 참선 할 때에는,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놈, 부르면 대답헐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허면 기뻐헐 줄도 알고, 근심 걱정 헐 줄도 알고, 그러헌 정신작용(精神作用)이 나오는 근본당처(根本當處)가 있어. 우리가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그러헌, 무엇이 들어서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냐 그 말이여. 보는 작용, 듣는 작용, 썽 내는 작용, 슬퍼허는 그 작용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그 뿌리를 찾으면, 거기서 천진불(天眞佛), 자기에 부처님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여. 썽날 때 왜 썽이 싸이는가... 썽, 자기로 하여금 썽나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욕하고 그럴 것이 아니라, 누가 자기를 썽나게 했거나 그밖에 있는 그 상대를 탓할 것이 없고, ‘지금 썽 내고 있는, 썽 낼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를 찾어야 한다’ 그거거든. ‘이 뭣고?’ 이렇게 살아가자 이거거든.

조실스님 법문에, ‘부처님은, 실달태자는 설산(雪山)에서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참나를 깨달랐다.’ 보통 말로 그렇게 합니다마는, 조실스님께서는,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본 것이다.” 이렇게도 말씀을 허셨습니다. 대단히 이것은 이론으로 설명 헐 수가 없습니다.

‘이 뭣고?’
썽날 때도 ‘이 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미운 사람을 봐도 ‘이 뭣고?’
이쁜 사람을 봐도 ‘이 뭣고?’
배가 고파도 ‘이 뭣고?’
배가 아파도 ‘이 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 뭣고?’를 앞세우고 ‘이 뭣고?’로써 모든 것을 살아간다면 깨달음은 결코 먼 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가죽주머니. 해부(解剖)해봤자 피, 창자 속에는 똥오줌, 모다 그런 것이 콱 차있지 아무것도 쓸 만한 것이 안 들었습니다. 참,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찾아서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 몸띵이에는 참 부처님이 깃들어 있는 것이여. 우리가 그것을 찾는 이외에는 이 목숨 바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을랴고 노력을 해야 그것이 진짜 불자(佛子)요 법보제자(法寶弟子)입니다. 부디 우리 사부대중은 다시 한 번 발심(發心)을 해서 이 한 일에 충실허도록 노력합시다.

  • 송담선사 법문 46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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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겹의 꿈>

* 한 겹의 꿈, 백일몽白日夢
낮에 눈을 뜨고 꾸는 꿈.

* 두 겹의 꿈, 흑야몽黑夜夢
밤에 눈을 감고 꾸는 꿈.

* 세 겹의 꿈, 몽중부몽夢中復夢.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꿈.

흑야몽黑夜夢에서 깨어나면 백일몽白日夢이요,
백일몽에서도 거듭 깨어나야 참으로 꿈을 깬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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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다섯 종류>

者,有五種:何等五?
꿈이라는 것은 다섯의 종류가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一者實夢;二者不實夢;三者不明了夢;四者夢中夢
五者先想而後夢,是為五。
하나는 실다운 꿈이요, 둘은 실답지 않은 꿈이며, 셋은 명료하지 않은 꿈이요, 넷은 꿈 가운데 꿈이며, 다섯은 먼저 생각하고 뒤에 꿈꾼다 하는 것이다.

何者實夢?所謂如來為菩薩時,見五種夢如實不異,是名實夢。
무엇이 실다운 꿈인가? 이른바 여래가 보살이 되었을 때, 다섯 종류의 꿈이 다 여실如實해서 다르지 아니한것, 이것이 실다운 꿈이다.

不實夢者,若人見夢,覺不實,是名不實夢。
실답지 않은 꿈이라는 것은, 사람이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실답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것이 실답지 않은 꿈이다.

不明了夢者,如其夢不記前後中間,是謂不明了夢。
명료하지 않은 꿈이라는 것은, 그 꿈이 전과 후와 중간을 기억하지 못함과 같으니, 이것을 일러 명료하지 않은 꿈이라 한다.

夢中夢者,如見夢即於夢中為人說夢,是名夢中夢。
꿈 가운데 꿈이라는 것은, 꿈 가운데에서 남에게 꿈을 설하는 꿈을 꾸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꿈 가운데 꿈이다.

先想而後夢者,如晝所作想夜便輒夢,是名先想後夢。
먼저 생각하고 뒤에 꿈꾼다 하는 것은, 낮에 생각을 지었던 것이 저녁에 문득 꿈이 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먼저 생각하고 뒤에 꿈꾼다 하는 것이다.


- 摩訶僧祇律-東晉-佛陀跋陀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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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是以로 先須識道코ᅀᅡ 後乃居山홀디니 若未識道ᄒᆞ고 而先居山者ᄂᆞᆫ 但見其山이오 必忘其道ᄒᆞ리며 若未居山ᄒᆞ야도 而先識道者ᄂᆞᆫ 但見其道ᄒᆞ고 必忘其山ᄒᆞ리니 忘山ᄒᆞ면 則道性이 怡神ᄒᆞ고 忘道ᄒᆞ면 則山形이 眩目ᄒᆞ리니 是以로 見道忘山者ᄂᆞᆫ 人間도 亦寂也^ㅣ어니와 見山忘道者ᄂᆞᆫ 山中이 乃喧也ㅣ니라

이런 까닭으로 먼저 모름지기 도道를 알고난 후後에 산山에 살지니, 만약 도道를 알지 못하고 먼저 산山에 사는 이는 오직 그 산山을 보고 반드시 그 도道를 잊을 것이며, 만약 산山에 살지 아니하여도 먼저 도道를 아는 이는 오직 그 도道를 보고 반드시 그 산山을 잊을 것이니, 산山을 잊으면 도성道性(도의 본성)이 신神(정신)을 기쁘게 하고, 도道를 잊으면 산형山形(산의 형체)이 눈을 어지럽게 하리니, 이런 까닭으로 도道를 보고 산山을 잊은 이는 인간人間도 또한 고요하거니와, 산山 보고 도道 잊은 이는 산중山中이 떠들썩 하니라.


迷則見出忘道ᄒᆞ야 事事이 紛馳ᄒᆞ려니와 悟則見道忘山ᄒᆞ야 塵塵이 本寂ᄒᆞ리니 楞伽애 云ᄒᆞ샤ᄃᆡ 未達境이 唯心ᄒᆞ면 起種種分別ᄒᆞ고達境이 唯心己ᄒᆞ면 分別이 則不生이라 ᄒᆞ시니라

미迷하면 산山을 보고 도道를 잊어 사사事事가(일마다) 어지럽게 되려니와, 알면 도道를 보고 산山을 잊어 진진塵塵이 본래적本來寂(본래 고요)할 것이니, <능가경楞伽經>에 이르시되, ‘경境(경계)이 오직 마음인 줄을 알지 못하면 종종種種(갖가지) 분별分別이 일어나고, 경(境경계)이 오직 마음인 줄을 알면 분별分別이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만약 도를 알지 못한 채 산에 먼저 사는 사람은 오직 그 산을 보면서 도를 잊을 것이며, 산에 살지 않아도 도를 아는 사람은 그 도를 보고서 반드시 그 산을 잊을 것이네. 산을 잊으면 도의 본성이 정신을 기쁘게 하지만, 도를 잊으면 산의 모습이 눈을 어지럽힐 것이네. 그래서 도를 보고 산을 잊은 사람은 인간 세상(세속)조차도 고요하게 여길 것이지만, 산을 보고 도를 잊은 사람은 산속이 시끄러워질 것이네. 반드시 오음五陰이 무아無我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없을 것이니 인간人間 세상에 머무는 것은 누구인가?-

- [선종영가집] 도반에게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