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2. 19:08ㆍ카테고리 없음
【한 터럭 끄트리에서 비로자나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의 대법륜(大法輪)을 굴리는 것】
참선(參禪), 참선은 불법에, 불법(佛法)을 수행하고 불법을 실천해나가는데, 그래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는... 해나가는 가장 훌륭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을 하고자 한 사람은 먼저 대신심(大信心)을 내야해. 둘째는 대분심(大憤心)을 내야하고 셋째는 화두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면 대신심(大信心)이 무엇이냐?
보통 ‘신심(信心)’하면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또 부처님께 시주(施主)와 공양(供養)을 많이 하고, 염불(念佛)을 많이 하고 경(經)을 많이 읽고 보시(布施)를 많이 하고 모다 그러면, ‘참 그 분이 신심이 있다’고 보통은 다 얘기들 하지만, 이 활구참선(活句參禪)허는데 그런 신심도 좋지마는 활구참선을 해나가는 데에서 요구(要求)하는, 갖추어야 할 대신심은 무엇이냐? ‘나도 부처님이다.’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부처님이라고 허는 것을 우선 믿어야 되고, 믿더... 믿고서 공부를 해야지, 처음부터 ‘아이고 나는 죄 많은 중생이고 업이 많은 중생이고 또 무식하고 나이가 많고, 그러니까 참선해봤자 되지도 않고 해봤자 소용도 없다’고 그런 생각을 가져선 안 되아. 그것은 자살과 같애. 자살행위(自殺行爲)여. 스스로 성불(成佛)헐 수 있는 명근(命根)을 끊어버리는 것이여 그것이.
내 안에 비로자나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이 내 몸 안에 따악 안주(安住)하고 계신디 어째서 이 몸이, 몸띵이가 법당(法堂)이 아니고 무엇이며, 이 몸띵이 속에 있는 마음에 부처님이 왜 부처님이 아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허면, ‘내가 틀림없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한 것 뿐’이여. ‘내가 부처님’이라고 우선 믿어야 깨달음에 이르르는 것이여. 그래서 대신심(大信心)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죄(罪)가 많은 사람도, 어떠헌 흉악(凶惡)한 사람도 그 속에 부처님이 계신 것은 틀림이 없는 거여.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헌 것을 믿지 않고, 않기 때문에 그런 참 흉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그런 흉악한 일을 헐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우선 내 자신이 부처님이라고 허는 것을 믿어야 돼.
대분심(大憤心)은 무엇이냐?
과거에 불보살(佛菩薩)과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은 진즉(趁即)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了達)해가지고 다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한량없는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고 계시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을 허고 있었던가! 그러니 정말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느끼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이 화두(話頭)를 들고 정성(精誠)과 있는 역량(力量)을 다해서 정진(精進)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이 대분심이 없어가지고는 안 돼. 맼아리가 하나도 없이, 눈이 반짝반짝 빛나도록 정신을 채려야지 저 시장에 죽은 생선 눈처럼 개시무래 해가지고는 안되거든. 분심(憤心)을 내서 하~ 헐랴고 대드는 그런 열성(熱誠)이 있어야 하고, 그럴랴며는 분심을 내야 그런 열성이 나는 것이거든.
세 번째 대의심(大疑心)을 가져야 한다.
무슨 의심(疑心)이냐? 지금부터 설하는 화두(話頭)에 대한, 공안(公案)에 대한 의심(疑心). 공안(公案)은 ‘이론(理論)으로 풀 수 없는,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는 풀 수 없는, 오직 확철대오(廓徹大悟) 헐 때에만 볼 수 있는 하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수수께끼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 수수께끼는, 일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수수께끼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식, 지식, 이론을 총, 총동원해가지고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이렇게도 맞춰보고 저렇게도 맞추어보고, 비교해보고 분석도 해보고 또 종합도 해보고 허면, 그러다 보면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맞히거든.
예를 들면, ‘암만 먹어도 배는 안 부르는데 많이 먹으면 죽는다. 그런데 안 먹을라야 안 먹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수수께끼를 낸다면 아마 빠른 사람은 ‘아 그게 나이다’ 이렇게 알아맞힐 것이고, 아무리 좀 둔한 사람도 얼마동안 이리저리 따져보면 ‘공긴가? 물인가?’ 이것저것 생각해보다보면 ‘아 그거 나이다.’ 이렇게 알아맞힐 수 있다 말이여.
그런데 또 한 수수께끼를 내면, ‘눈은 허옇고 배는 둥그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물어보면 그렇게 쉽게 알아맞힐 수가 없거든. 눈은, 눈은 허옇고 배는 둥그런 것이 무엇인가? 암만 생각해봐도 몰라. 하루 종일 생각해봐도 모르고 몇 달을 생각해봐도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거란 말이여. 그런데 그것도 일종에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허옇고, 먹는 배는 둥그렇다.’ 그렇게 쪼끔만 누가 힌트(hint)를 주면 알아맞힐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이여. 근디 이런 수수께끼는 약간 알아맞히기가 어려웁다. 그러나 이것도 알아맞힐 수가 있어.
그런데 ‘병 속에다가 주둥이는 쬐끄맣고 밑에 몸뚱이는 툭 퍼진 유리병 속에다가 조그마한 오리 새끼를 새끼 때 작은 주댕이로 집어넣었어. 넣어가지고 매일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허면서 그 오리새끼를 몇 달을 키웠다 그 말이여. 제법 이렇게 어미가 되았어. 어떻게 허면 이 유리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상(傷)하지 아니허고서 그 오리를 밖으로, 병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까?’ 이런 수수께끼를 낸다면 그건 정말 알아맞히기가 어려울 거다 그 말이여. 이 ‘병속에서 오리를 꺼내는 것’도 지금 수수께끼라고 말은 했지마는 이것도 천칠백 공안(1700공안) 가운데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가서 있는 상식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따져봤자 이건 알아맞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승(山僧)이 오늘 여러분에게 일러드리고자 한 화두(話頭)는 오리 꺼내는 화두가 아니고, ‘이 무엇고?’ 한문으로는 ‘시심마(是甚麽)?’ 또 중국(中國) 발음으로는 ‘시 씀마?’ㄴ데, ‘이것이 무엇이냐?’ 그 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이라니, 그 무엇을 가리켜서 ‘이것’ 이라고 허냐?
‘내게, 여기에 한 물견이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호되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중(動用中)에 수부득(收不得)하니, 동용(動用)허는 가운데에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으니, 시심마(是甚麽)오? 이것이 무엇인가?’ 이거거든.
그믄(그러면) 항상 ‘이 한 물견이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다’ 그랬는데, ‘동용’이란 게 무엇이냐?
육체적인 모든 동작(動作), 그리고 정신적인 모든 작용(作用), 그래서 동, ‘동용(動用)’이거든. 행주좌와(行住坐臥),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하고 일하기도 하고 밥도 먹고 그런 거,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육체적(肉體的)인 동작(動作)’이고, 정신작용(精神作用)은 지나간 일도 생각하고 미랫 일도 생각하고 현잿 일도 근심걱정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기... 그런 것들이 전부다 이 ‘정신작용’인데, 그런 육체적인 동작과 정신작용을 허는 그 가운데에 한 물견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분명히 그놈이 들어서 가기도 허고 오기도 하고 근심걱정도 하고, 그놈이 착하게 작용을 허며는 천사(天使)와 같이 되기도 하고 악하게 작용을 허며는 찰나 간에 흉악한 악마(惡魔)가 될 수도 있다 그 말이여. 그 한 물견의 조화(造化)로 우리는 천사도 되았다가 악마도 되았다, 찰나간에 천상(天上)도 올라갔다 찰나 간에 지옥(地獄)에도 갔다가, 찰나간에 축생(畜生)도 되았다 아귀(餓鬼)도 되았다, 그 한 물견의 조화(造化)가 무궁무진(無窮無盡)허다 그 말이여. 그렇게 참 소소영영(昭昭靈靈)하고 무궁무진(無窮無盡)하고 묘(妙)한데, 아 그 찾어보면 자최가 없거든. 눈으로 볼랴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을랴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우리가 생각으로 아무리 따져서 알아볼랴고 해도 알 수가 없어.
물론 들은 풍월로 ‘아 그것이 마음이지 무엇이냐. 그것이 우리 자성(自性)이 아니냐.’ 물론 그, 그런 정도로는 다 알고 있을 것이고 들어서도 알겠지만 그런 이름이 문제가 아니고, 그 자체(自體)를 우리는 깨달라야 되아. 이름만 들어서 우리가 ‘마음이다.’ 해봤자, 마음... 진짜 추궁(追窮)해보면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가도 알 수가 없는 거여. 그러한 가르켜 줄 수 있고 배와서 알 수 있는 것을 요구헌 것이 아니라, 아무리 볼랴고 해도 볼 수가 없고 아무리 알랴고 해도 알 수가 없는 그 이 ‘이놈’, ‘이거’, 이 ‘이 한물견’ 이것이 무엇인가? 자나 깨나 앉아서나 서서나 ‘이 무엇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괴로울 때도 ‘이 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허고 그놈을 항상 찾는데,
이것을 찾는데 지식이나 이론이나 상식을 동용해... 동원해가지고 그것을 찾는 것이 아니여. 이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허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랴고 허면 안 되아. 알아질 수도 없고, 자기 나름대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아는 것이라 아무 소용이 없어. ‘이 뭣고?’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지고 전후좌우(前後左右)가 딱 끊어져버려야 되고, 꽉 맥힌 의심으로 ‘이 뭣고?’ 탁 그렇게만 지어나가는 거여. 그것이, 그렇게 허는 것을 ‘화두를 든다’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헌다’ 이렇게, 아까 조실스님께서 법문허실 때 ‘화두를 든다’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화두를 거각한다’고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무엇고?’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아 이런 것이로구나. 이런 것인가?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면 벌써 그 사람은 공부를 잘못 해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쨌든지 의심,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놈을, 화두(話頭)를 들고 거각(擧却) 해나가야 하는 거여.
그래서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이, -이것을 삼요(三要)라, 세 가지 요긴(要緊)한 것이다. ‘참선 헌 사람은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삼요라 한다’ 허는데- 이러헌 삼요를 가지고 인제 참선을 해나가는데,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해야 혀.
물론 참선은 앉아서도 허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하고 누워, 언제 어디서더라도 다 해야 하지만, 기본자세(基本姿勢)가 있어.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해서 그 기본자세를 허고서 새벽에, 이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양취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서 떠억 한 시간씩, 또 저녁에 자기 전에 좀 피로하고 그러더라도 한 시간씩 떠억 기본자세를 취하고 참선을 떠억 허라 그 말이여. 그렇게 해서 습관을 들이면, 아침에 한 시간을 허고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면 그날 하루의 모든 일이 참 바르게 또 보람 있게 참 하루 생활을 헐 수가 있고, 또 저녁에 침소(寢所)에 들기 전에 떠억 한 시간을 허고 나면 그날 하루가 거뜬히 풀어지고 그날 하루에 모든 일이 정리가 되면서 깨끗한, 가벼웁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깊은 잠에 들어서 또 그 이튿날 새로운 아침을 맞이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 한 시간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 시간(1시간)이 길면 처음에는 삼십 분(30분), 그것도 길면 십 분(10분)도 좋고, 십 분 부터서 시작해가지고 차츰 차츰 이십 분(20분)으로 늘리고 삼십 분(30분)으로 늘리고 사십 분(40분)으로 늘리고 나중에는 한 시간(1시간)씩 이렇게 늘려서 그렇게 해서 아침에 한 시간 떠억 헌 그 기분과 그 자세로 하루의 모든 일을 해나간다면 정말 불자(佛子)로서 참 여러 가지 면에서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루 이틀 허다가 그만둘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을 꾸준히, 한 달, 두 달, 석 달, 일년, 이태, 삼년, 십년, 일생동안 이렇게 해서 그것이 생활화(生活化)가 되고 습관(習慣)이 되면 인자 참선(參禪)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저절로 되아져. 화두(話頭)를 처음에는 ‘이 뭣고?’ 해도 헐 때만 화두가 남아있지 금방 돌아서면 없어져버리고 ‘이 뭣고?’ 허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어오고 그러지만, 자꾸 자꾸 해, 해나가면 저절로 망상(妄想)은 줄어지면서 화두(話頭)가 들리는 시간은 많아져.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망상을 없앨랴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안 들어오고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獨露)허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그래가지고 화두가 순수...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온 하루 종일이 화두(話頭) 하나로써 따악 화두가 딱 들어져서 그것이 따악 중, 중심(中心) 잡힌 상태에서 하루생활을 허게 되니까, 항상 자기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가 모든 것을 이끌어나가고 자기가 중심이 되아서 온 세계를 주재(主宰)해나가는 것이지 환경(環境)에 지배(支配)를 받지 않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헌 사람은 벌써 시작한 날부터서 모든 환경에 지배를 받고 감정(感情)에 노예(奴隸)가 되아서 끌려서 죄(罪)의 구렁텅이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참선헌 사람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헌 사람은 바로 지금부터 일분 일분, 일초 일초가 해탈도(解脫道)로 나아가는 길이고, 온 세상을 자기가 주인(主人)이 되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 보람 있고 긍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화두를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을 거기에 곁들여서 해가면 참 효과적(效果的)이다 그 말이여. 이 단전호흡에 대해서는 도시마다 단전호흡을 가리키는 도장이 있습니다. 좀 전문적으로 그런 거 알고 싶으믄 그런 디에 나가서 좀 교육을 받으면 좋, 좋을 것입니다마는, 우선 간략 허면서도 이 참선(參禪) 해나가는 데에 아주 적합(適合)한 호흡법(呼吸法)을 일러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호흡법이 있습니다. 들어마셔가지고 또 머물렀다가 그 호흡을 그냥 이리 뱉은 것이 아니라, 뒤로 돌려서 이렇게 해서 배앝고, 들어마실 때는 앞으로 이렇게 들어마셔가지고 또 뒤로 이렇게 배앝어. 그래서 들어마신 호흡과 내쉬는 호흡이 수레바퀴처럼 이렇게, 그러헌 관(觀)을 허면서 이렇게 호흡(呼吸)을 허되 들어마실 때에는 우주(宇宙)에 정기(正氣)가 있는데, ‘우주에 그 참 바른 기운을 들어마시고... 다’는 그러헌 관(觀)으로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무심코 들어... 내쉬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모든 병(病)이라든지 잡(雜)된 기운이라든지 삿된 기운 그런 것을, 다 그런 찌끄레기를 호흡을 통해서 내 뱉는다’는 그러헌 관(觀)을 허면서 그렇게 내쉬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두를 허, 화두를 가지고 참구(參究) 아니헌 사람은 그런 호흡, 그런 관을 가지고 호흡을 허면 참 그것도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화두를 가지고 화두를 참구하는 선수행자(禪修行者)는 언제 ‘우주에 바른 기운을 들어마시고, 몸에 삿된 기운을 배앝은다’는 그러헌 생각을 헐 겨를이 없고, 생각은 뭘 생각허냐 하며는 ‘이 뭣고?’ 그것만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헐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수루루, 수루, 있는... 처음에 이 단전호흡을 헐랴고 헐 때에는 준비호흡(準備呼吸)을 해야 해. 준비호흡은 가뜩 들어마시는 거여. 가슴이 미어지도록 숨을 가뜩 들어마셔. 가슴을 이렇게 버억 키우면서 가뜩 들어마셔가지고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들어마셔가지고, 더 이상 들어마실 수 없을 때까지 가뜩 들어마셔가지고 꾹 참어. 얼굴이 좀 벌거지도록 참었다가 입을 쪼끔 벌리고서 후~ 허고 다 내뿜는데, 내뿜을 때는 그 가슴을 차츰차츰차츰차츰 이렇게 조인 듯 허면서 다 내뿜어버리는 거여. 다 내 뿜었으면 또 수르르 들어마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셔. 다 들어마셨으며는 참어.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었다가 또 입으로 후~ 하고 완전히 다 내밭으게 이렇게 세 번을 떠억 허는 거여. 이것이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준비호흡’이고,
이 준비호흡이 끝난 다음에는 인자 정식(定式)으로 그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허는데, 이 정식 단전호흡은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숨을 조용허게 들어마시는데 배꼽 밑에 단전, 배꼽 밑에 한 치 서푼이 단전(丹田)인데 그 단전부위가 약간 볼록해지도록 의식적으로 허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고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셔. 팔부쯤만 들어마셔가지고, 마셨으면 잠깐 정지(停止)를 해. 약 삼초(3초)동안 정지를 했다가, 먹궜다가 조용하게 코로 내셔. 준비호흡은 입으로 내, 내 뿜었지만 단전호흡에 들어가서는 인자 코로 조용허게 내쉬되 배가 차츰차츰차츰차츰 홀쪽헌 것을 ‘느끼면서’ 조용하게 길게 호흡을, 숨을 내쉬는 거여. 들어마시는 호흡도 단전호흡은 급히 빨리 들어마시지만... 아, 준비호흡 헐 때는 그러지만, 본호흡(本呼吸)에 들어가서는 조용허게 들어마시고 약 삼초(3초) 동안에 걸쳐서 조용하게 들어마시고, 팔부만 들어마시고, 그래가지고 들어마신 다음에 약 삼초(3초)동안 정지했다가 내 쉬는 시간도 약 삼-사초, 쪼끔 길게 허는 것이 좋아요. 삼-사초 걸려서 조용허게 내쉬되, 내 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진 것을 ‘의식허면서’ 내쉬어.
왜 의식허면서, 배가 볼록해진 것을 의식하고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진 것을 의식허냐하며는, ‘의식험으로써 우리의 생각이 거기 가있게 돼.’ 생각이 거기가 있게 되며는 우리의 기운이, 우리 기(氣)라고 허는 것을 이 단전호흡 허는 디에서는 ‘기(氣)’라고 허는 말이 있는데, 그 ‘기’는 우리의 생각 따라서 삽시간에 오르기도 하고 삽시간에 내리게도 하는데, 머리로 무엇을 골똘히 생각허믄 금방 기가 위로 올라가는거고 이 단전 있는, 단전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거기다가 따악 두며는 올라갔던 기운이 밑으로 다 내려가게 되는 거여. 그래서 ‘이 뭣고?’ 이 화두를 드는데, 머리로 ‘이 뭣고?’ 허고 머리고 화두를 생각을 허면 금방 기운이 위로 올라가는데, 특히 상기(上氣)가 잘되는 체질(體質)을 가진 사람은 금방 머리로 기운이 올라가가지고 나중에는 골이 뽀개질라 그러고 눈알이 튀겨져 나올라고 그래서 이 참선을 허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어. 그래서 단전호흡을 허고, 단전호흡을 허면 ‘우리의 생각이 단전으로 가게되기 때문에’ 화두(話頭)도 단전(丹田)에다 두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이렇게 거각(擧却)해서 관조(觀照)허거든. 그러면 우리 생각이 거기에 가 있기 때문에 기운도 밑으로 내려가서 머리 골치가 안 아퍼. 상기가 안 되고 하기(下氣)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참선(參禪)을 해나가는 데에는 단전호흡(丹田呼吸)이 참 요긴(要緊)허다 그거여.
몸띵이나 우리의 모든 체질을 아주 상상(上上)으로, 상품(上品)으로 타고난 사람은 단전호흡이고 뭣이고 소용없이 화두 한번 딱 받었다 하며는 목숨을 걸어 붙이고 잠도 안자고 막 그렇게 몰아부쳐가지고는 그냥 뭐 한 일주일, 삼 일(3일)이나 일주일(7일) 안에 그냥 타악! 아주 타파(打破)해 부리는 그러헌 분도 있다고 그럽니다. ‘짧게는 칠 일(7일)이요 길어봤자 석 달(3달)이믄 판단(判斷)이 난다.’ [선요(禪要)]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 분은 아마 전생(前生)에 다 공부 다 해놓고 금생(今生)에 잠깐 몸만 바꽈 난 분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런 분이 참 더러 한 분 두 분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그런, 그렇게 헌 것은 거의 만용(蠻勇)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참선은, 이 최상승법을 닦을 수록에 지혜롭게 육체의 관리도, 건강관리(健康管理)도 지혜롭게 해나가야 됩니다. 음식도 너무 적게 먹어서 힘이 없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이 먹어가지고 과식(過食)을 해도 안 되고, 음식도 적당허니 자기의... 에 알맞도록 적당히 먹어주어야 하고, 수면(睡眠)도 너무 수면이 부족허면 그것도 퇴태(退怠)에 인연(因緣)이 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수면도 자기의 체질에 알맞큼, 여섯 시간(6시간)은 자, 재와 주어야 헐 체질은 여섯 시간을 재와주고, 다섯 시간(5시간)을 재와 줘야할 사람은 다섯 시간 재와 주고, 네 시간(4시간)만 자고도 꺼떡도 없을 만큼 몸을 잘 타고난 사람은 네 시간만 자고 허고, 또 특수하게 세 시간(3시간)만 자도 괜찮을 정도면 세 시간만 자, 자고 해도 그것은 상관이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다섯 시간(5시간) 내지 여섯 시간(6시간) 자면 수면(睡眠)은 절대 부족하다고 헐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음식과 적당한 수면, 그리고 의복(衣服)도 너무 더웁게 입지 말 것이며 너무 차웁게 입지 말고 적당허게 입어주어야 하고, 이 세 가지. 의복(衣服)과 음식(飮食)과 수면(睡眠), 이 세 가지도 우리 중하근기(中下根機)에게는 지혜롭게 섭취(攝取)를 하고 수용(受用)을 해야지, 근기는 하근기(下根機)로 태어나서 허는 일은 상근기(上根機)처럼 헌 것은 그것은 만용(蠻勇)이라 도, 도(道)의 힘은 얻기도 전에 몸만 망가트려버리고 부작용(副作用)만 나가지고 그 사람으로 인해서 ‘아 참선은 함부로 헐 것이 아니다. 아무개는 참선허다가 못쓰게 되았다.’ 이러헌, 다른 사람까지 신심(信心)이 떨어지게 허는 결과 가져오기 때문에 잘 알아서 지혜(智慧)롭게 관리(管理)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호흡(呼吸)을 헐 때에 화두(話頭)는 언제 드는 것이 좋으냐?
숨을, 준비호흡이 끝난 다음에 단전호흡을 허는데, 숨을 들어마셔가지고 잠깐 머물렀다,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 뭣고-?’ 내쉴 때는 숨을 길게 가늘게 내 쉬니까 그때 ‘이 뭣고-?’ 이렇게 속으로 길게 이렇게 내쉬고는,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들어마셔. 들어마시는 것도 약 팔십(80), 팔부(八部) 정도만 들어마시고, 내쉬는 것도 너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다 내쉬지 말고, -준비호흡을 헐 때는 완전히 뭐 한 점도 안남토록 다 내쉬어야 허지마는, 단전호흡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아- 팔부쯤만 내쉬어야지 완전히 내쉬믄 그 다음 호흡에 숨이 가뻐서 안되거든. 그래서 팔부쯤만 들어마시고 팔부쯤만 이렇게 내쉬는데, 내쉬지기 시작헐 때 ‘이 뭣고?’ 또 스르르 허니 들어마셔가지고 또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에 ‘이 뭣고?’ 이렇게 허시라 그 말이여.
처음 시작헌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 뭣고?’ 그렇게 허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차츰차츰 해나가면서 ‘이 뭣고?’ 한번 허고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따악 있고 다른 잡념(雜念)이 들어오지를 아니허면, 그 있는 그 의심(疑心)을 고대로 관조(觀照)만 허면 되는 거여. 꽈악... ‘이 뭣고’ 글자가 아니라, ‘이 뭣고-?’ 헌 뒤에 그 남은 ‘여운(餘韻)의 의심(疑心)’이 거기에 있거든. ‘이 뭣고-?’ 헌 그 의심(疑心) 그것을 따악 관(觀)하거든. 그래서 그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호흡은 몇 번을 허던지 간에 화두, 화두는 자꾸 덮치기로 안 들어도 괜찮에요. 그 의심이 없어지거나 희미해지거나 다른 망상(妄想)이 딱 들어와버리믄 그때 가서 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 뭣고?’ 가끔 한 번씩 이렇게 챙겨주게 되고, 그래서 없어지면 챙기고 안 없어지고 고대로 의심이 있으며는 자꾸 안 들어도 괜찮거든.
그러니까 공부가 많이 인자 여러 개 해서... 여러 해 해서 익숙해진 분은, 아침에 일어날 때 한번 떠억 들면 뭐 점심 먹을 때까지 고대로 있으면 한번 만 들어도 될 것이고, 점심 먹고 저녁 먹을 때까지도 그 화두가 타악 들어있으면 하루에 한번만 들어도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들었던 화두를 들은 채 떠억 잠자리를... 에 들어서 눈을 감고 누웠으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타악 있으면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잠이 들어가지고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고대로 있고,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새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엊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다면 뭐 하러 또 새로 들을 것이 뭣이 있어. 고대로. 이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이거든. 타성... 화두가 그 열심히 열심히 알뜰히 해 나가보면... 해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타성일편이 되는 것이고, 타성일편이 되며는 화두를 자꾸 ‘이 뭣고?’ ‘이 뭣고?’ 용을 쓰면서 힘을 들여서 헐 필요가 없는 거여.
이렇게 타성일편이 되아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헌 경지가 반드시 오고만 마는 것이고, 그렇게 순일무잡한 경지에 타성일편이 되면 머지안해서 툭! 터지는거여. 아까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본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에 ‘불조(佛祖)에 득인증처(得人憎處)를 간파(看破)헌다. 불조(佛祖)에 과구(窠臼)를 본다.’ 또 ‘조주(趙州)스님에 면목(面目)을 보고, 조주스님에 인증처(人憎處)를 본다, 간파(看破)헌다.’ 이런 말씀이 나왔는데, 이렇게 해서 순일무잡하고 타성일편 경계에 이르러서 거기에서 또 지각심(知覺心)을 내지 말고, 내가, ‘옳다 되았다. 인자 공부가 잘 된다.’ 하고 좋아하는 생각을 내면 찰나간(刹那間)에 뚝 떨어지거든. 절대로 공부가 순일무잡하게 되아도 좋아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되고, 공부 허다가 영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아주 답답허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정신이 산만(散漫)허고 이래도 조끔도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여. 그럴 때에도 단전호흡을 서서히 허고 또 포행(布行)을 허면서 그 고비를, 지혜롭게 그 고비를 요렇게 냄기면 또 다시 화두가 잘 들리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헌 ‘잘되다가 또 안 되다가 잘되다가 안 되다 여러 고비를 겪으면서 차츰차츰 공부가 익어가는 것’이니까, 이건 절대로 조급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용, 일상생활(日常生活), 일용(日用)을 여의지 말고 공부를, 잡두리를 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여건(與件)이 허락이 되면 선방(禪房)에다 방부(房付)를 들이고 선방에 와서 허시고, 아주 와서 허실 수 없으며는 통근, 통근(通勤)을 허면서, 출퇴근을 허면서라도 허시고, 출퇴근 헐 형편이 못되면 가정에서 가정살림 허면서, 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모시고, 또 이 직장에 나간 분은 직장에 나가면서 그 생활 속에서, 아까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생활 속에서 공부를 이렇게 해나가면, 진짜 쪼끔 하근기나 중하근기 어렵지만 어렵다고 해서 안 허면 누가 내 대신 이것을 해줄 것입니까? 어렵지마는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심으로 기초부터서 착실히 착실히 해나가면 기어코 되고만 마는 거여. 어려운 코스(course)를 가는 사람은 깨달을 때에는 정말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수월하고 편한 길을 가며는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져서 꼭 편안한 코스를 가는 것만이 꼭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는 일어나는 생각, 좋은 것을 보믄 좋아하는 생각, 빨간 꽃을 보믄 빨갛다고 허는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 그놈을 가지고 허거든. 다른 것 갖고 허는 게 아니라. 그 생각을, 무슨 일체처 일체시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가 이리저리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믄, 또 생각이 일어나가지고 또 이리저리 발전해가지고는 또 변해가지고는 또 없어지고, 또 생각 일어나고 허는데, 그러기를 일생동안을 그러면서 살아가고 무량겁(無量劫)을 그러면서 살아오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져서 업(業)을 짓고 그래가지고 그 업으로 인(因)해서 또 새로운 과보(果報)를 받고 그렇게 살아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둣째(둘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일어나자마자 화두를 떡 들어버리거든. 그러니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들기 때문에 깨달음을 향해서 한 걸음을 걸어가는 것이니 어찌 그 사람이 해탈을 얻지, 얻지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최상승법을 믿고 닦는 사람과 이 법을 믿지도 않고 닦지도 않는 사람과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살면서 완전히 생애(生涯)가 달라지는 것이여.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누구라도 올바르게 열심히만 허면 목적지에 도달 헐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문(最上乘法門)이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육두로 외우고 그놈을 다 해석헐 줄 알아도, 정말 그 경(經)도 옳게 보면 마지막에 가서 이 최상승법으로 돌아올 수 밲에는 없는 것이여.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 하셨어. 자기 마음을 관조(觀照)허는 참선(參禪)을 허지 아니하면, 팔만장경을 다 읽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여. 그 경을 읽도록 내 놓은 것은, 법(法)을 설(說)하신 것은 ‘바로 이 마음 깨닫는 데로 돌아가게 허기 위해서 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무슨 그걸 많이 외와가지고 무슨 뭐 지식을 놀... 넓히고 그러라고 그 경을 설하신 것이 아니거든. 경(經)도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고 바르게 가리키면 전부 자기 마음 깨닫는 데로 돌아올 수 밲에는 없는 것이여. 여태까지 여러 해를 경을 읽고 외우고 보면서도 참선(參禪)을... 문중(門中)으로 안 들어왔다면 그 사람은 아직 경을 옳게 배운 사람이 아니여. 옳게 본 사람이 아닌 것이여.
그래서 올바른 이 정법(正法)으로 들어오면 일체 우리의 세속생활(世俗生活)을 하나도... 그곳이 다른 곳이 아니라 일 초 일초 그 시간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시간이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깨달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길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불법(佛法)의 참 뜻을 이해한 사람은 생활, 일체 세속생활(世俗生活)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세, 그 생활을 버리고 무슨 따로 무슨 깨달음의 길이 따로 있는 줄 생각허거든. 뜻을 얻은 사람은 그 경계(境界) 속에서 막 잡어 쓰는 거여 그게.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딱 화두로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두두정묘국토(頭頭淨妙國土)요, 일체 우리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그것이 정묘국토(淨妙國土)여. 부처님의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정토(極樂淨土)여 바로. 그것이 바로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여 그게. 그리고 모든 물견들이 바로 부처님이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부처님의 진신불(眞身佛)이요,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진신불의 설법(說法)이거든. 그래서 일체성(一切聲)이 부처님의 설법(說法)이요 일체색상(一切色相)이 부처님의 몸띵이더라.
그래서 이러헌 도리(道理)를 이해한다면, 한 터럭 끄트리에서 비로자나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의 대법륜(大法輪)을 굴리는 것이고, 한 띠끌 속에서, 띠끌 속에 보왕(寶王)의 극락정토(極樂淨土),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을 한 띠끌 속에다가 건설(建設)허는 거여. 그래서 밖으로 구허지 말고 일... 모든 경계(境界)에 접(接)했을 때 바로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 이 참선법(參禪法)이다.
농계유식탕와근(籠鷄有食湯鍋近)이요
야학무량천지관(野鶴無糧天地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농계유식탕와근(籠鷄有食湯鍋近))
작... 닭 장태(닭장) 속에 있는 닭은 때 맞춰서 먹이를 주고 먹을 것이 풍족허지마는 펄펄 끓는 냄비가 가깝고,
야학(野鶴)은 무량천지관(無糧天地寬)이다.
저 들에서 날아댕이는 학(鶴)은 양식(糧食)이 없지마는, 아무도 먹이를 주지도 않고 쌓아 논(놓은) 양식이 없지마는 천지(天地)가 너그럽구나.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댄 솔바람 불고 칡넝쿨 사이로 비추는 달빛 아래 들어가서, 샘이 없는 조사선(祖師禪)을 길이 관(觀)하고자 하노라.
이 세상은 온통 부귀(富貴)와 영화(榮華), 공명(功名), 권리(權利) 그러헌 것,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온통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드뭅니다. 그러나 그러헌 세속(世俗)에 같이 살면서도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저 들에 학처럼,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발을 디디고 살면서도, 마치 저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 잎이나 꽃에는 조끔도 그 더러운 것이 묻지 않듯이, 이 오탁악세에 발을 디디고 살면서도 그런 디에 빠지지 아니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위해서 이렇게 모이셨습니다. 이것은 숙세(宿世)에 깊은 인연(因緣)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우리가 한 도량(道場)에 모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산승(山僧)은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은 세세생생에 삼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한 분도 낙오자가 없이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영원한 행복과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고 나아가서 일체쟁...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 있게 되리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 화두(話頭)와 불명(佛名)을 신청하신 분은 이 법회(法會)가 끝나자마자 여기 법당(法堂)에 남으시면 차례차례로 이름을 부르는 대로 그 수계증(受戒證)과 화두 불명의 계문(戒文)을 받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걸 받아 가시면 어디 책상서랍이나, 나중에 돌아가실 때 가지고 가신답시고 어디 무슨 수의(壽衣)상자 속에다 넣으시지 말고, 그것을 액자로 해서 떠억 갖다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오고 가며 쳐다볼 때마다 마음을 돌이키고 신심을 내서 화두를 드시도록 허신다며는 참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 송담선사 법문 413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