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8. 20:22ㆍ카테고리 없음
【백지상변白紙上邊에 서흑자書黑字】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호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호되
억천(億千)의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이 그 복(福)이 갓이 없으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어찌 항상 고교(古敎),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본 것만 같으리오.
이 옛 가르침, 고불에, 고불(古佛)에 가르침, 고불에 경전(經典). 이 고불에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항상 전(傳)하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에 인(印)’을 가리키는 말이고,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견’이여. 이것을 예 고(古)자 가르칠 교(敎)자 고교(古敎)라 하는 것이여.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공덕을 얼... 무슨 말로써 다 그 공덕(功德)을 다 표현헐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무량무변(無量無邊)이여. 그렇지마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견,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견’이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그 ‘마음에 인’을, 그것을 가져서 보는 것만 어찌 같을 것이냐.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가지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다.
그대에게 청(請)하노니, 여러분께 청하노니 눈을 떠서 눈앞에 터억 관(觀)하라.
이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물견. 먹으... 종이에다가 먹으로 쓴 글자가 아니여. 한 글자도 없건마는 그 글자를 우리 일용중(日用中)에, 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생각하고 썽 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허는, 우리 인연(因緣)따라서 수용(受用)하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항상 소소영영(昭昭靈靈)하는 바로 그것이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그, 그 가운데에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터억 거각(擧覺)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허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에 검은 글자를 써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이 경전을 읽어야 참으로 부처님께서 전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전...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傳)해내려오는 그 심인(心印)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삼세(三世)에 모든 부처님을 친견(親見)해서 거기에 공양(供養)을 올리는 공덕도 말로 할 수 없이 장하고,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이러헌 경전(經典)을 항시 손에서 놓지 않고 그것을 독송(讀誦)을 허는 거, 그것도 참 공덕이 한량이 없지마는, 우리 최상승학자(最上乘學者)는 벌써 종이로 된 경전을, 또 먹으로 된 경전을 그것을 읽는 디에 그쳐서 될 것이냐. 진짜 경전은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바로 거기에서 찾아야, 거기에서 찾아야 참 부처도 거기에서 친견(親見)헐 수 있고 참 경전도 거기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이여. 그 경전, 그 참 부처님을 친견하고 독송하게 허기 위해서 부득이 해서 서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라 하는 화신불(化身佛)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出現)을 허신 것이고, 이 문자(文字)로 된, 언어문자로 된 경전을 부득이해서 설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아까 조실(祖室)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계축년(癸丑年)에 설(說)하신, 그 계축년 해제(解制) 때 설하신 그 법문(法門), 오늘 이 용주사(龍珠寺) 중앙선원(中央禪院)에서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마치고 온 대중(大衆), 천안 광덕사(廣德寺) 태화선원(泰華禪院)에서 삼동안거를 마치고 온 대중, 그리고 이 경기도 일원(一圓)에 모다 회룡사(回龍寺)라든지, 모다 저 충청도... 옛날에 만공(滿空)스님, 보월(寶月)스님을 모시고 여기 전강(田岡)조실스님, 한국에 근대(近代)에 모다 여러 큰스님네들이 거기서 모다 정진(精進)을 허신 보덕사(報德寺) 거기 선원에서 난 대중까지도 여기에 오늘 해제에 참석(參席)을 했는데, 여기 멀,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허고 오늘 이 자리에, 이 용화사(龍華寺) 법보선원(法寶禪院)에 한자리에 모여서 해제법회(解制法會)를 갖게 되았습니다.
모두 들으니 각기 그 선원들에서 삼동 석 달 동안을 정말 여법(如法)허게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알뜰하게 모다 정진(精進)들을 하고, 모다 눈에는 정진을 해서 그 샛별같이 반짝거리는 그 참 신심(信心)과 지혜(智慧)로써 그 석 달 동안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놨으니 모다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을 허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러헌 정진 뒤끝이라 모다 몸에서는 향내가 진동을 하고 눈에서는 그 날카로운 빛이 아주 번쩍거린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49년)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삼천 년(3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참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그거거든. 전강조실스님께서 여기에 법보선원을 창설(創設)허시고, 중앙선원을 창설허시고 그러헌 뜻이,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근대(近代)에 여러 선지식(善知識)들의 그러헌 자비(慈悲)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이 말세(末世)에 우리가 참선(參禪)이라고 헌 말을 어디서 들으며, 참선을 허는 방법(方法)을 어떻게 잘 알 수가 있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걱정 없이 이렇게 정진(精進)을 헐 수가 있었겠는가! 생각해보면, 불조와 선지식들의 은혜(恩惠)를 생각허면 정말 우리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신지 삼천년(3천년)이 지낸 이 말셉니다. 온 세계는 말세(末世)의 여러 가지 현상(現狀)이 도처에서 일어나가지고 서로 죽이는 일만을 연구하고 서로 죽이고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마치 파리 목숨만도 못합니다. 이러헌 시점에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우리가 목숨 바쳐서 이 일대사를 위해서 도(道)를 닦을 수 있는 이, 과거에 우리가 무슨 숙연(宿緣)을 심어가지고 우리는 이러헌 법(法)을 만나게 되었는가. 참 뜨거운 것이 속에서 참 솟구쳐 올라올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이러헌 정법을 만나가지고 이렇게 이 중앙선원에서, 또 법보선원에서, 태화선원에서, 도처 선원에서 이렇게 옛날 부처님 때에 부터서 내려오는 이 동안거 하안거, 이 안거(安居)의 법도(法度)에 따라서 한철 한철을 겨... 지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엄격하고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겨울살림 여름살림을 이렇게 나고 있습니다.
그러헌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그 생활법도(生活法度)도 대단히 중요허지마는, 그 내부(內部)에, 대중 한 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신심(信心), 정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아무리 공부가 잘 안 되아도 끈질긴 인내력으로써,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그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헌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가 나타날 수 밲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조실스님의 계축년(癸丑年) 녹음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중국(中國)에 천목산(天目山) 고봉선사(高峰禪師). 삼년사한(三年死限)하고 그 정진(精進)허신 말씀이 잠깐 나왔습니다마는, 우리는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 할 때까지, 또 부처님과 같은 그러헌 경지에 이를 때까지, 신참(新參) 구참(舊參)을 막론하고, 남녀(男女)와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스님네나 또는 거사(居士)님이나 또는 청신녀(淸信女)를 막론하고 오직 이 고봉스님께서 도를 닦으신바와 같은 그러헌 마음가짐으로 정진(精進)을 해나간다면, 한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도 그러헌 대오(大悟)를 헐 수가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허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의라... 무오(無悟)라. 큰 의심, 크고 간절한 큰 의심을 가지고 그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며는 깨달음도 없다.’
이 말씀은 어쨌든지 우리는 큰 깨달음을 목표로 삼는데, 큰 깨달음을 얻고자하면 그 의심(疑心)이 커야한다. ‘의심이 크다’는 말은 무엇이냐? 들다가 말다가, 허다가 말다가, 환경에 끄달려서 시비(是非)에 빠지고, 이러헌 상태에서는 큰 의심이 날 수가 없습니다. 큰 의심(疑心)이 날라며는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이 일어날랴며는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아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허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 라고 허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허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다’고 허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내가 여자니까, 나는 몸이 건강털 못하니까, 또는 나는 무식허니까 등등 자꾸 부정적(否定的)인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의 근기(根機)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해봤자 어피차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까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고 이렇게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해서, 자포자기헌 마음으로 앉어서 흉내만 내고 있어봤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여자가 되았건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했건 나이가 먹었건 그럴 수록에 백배천배 더 분심(憤心)을 내서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을 잡두리를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경허(鏡虛) 큰스님께서 어려서부터 그렇게 총명(聰明)하시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그러헌 참 총명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공부를 허실 때에, 처음에 경(經)을 배우실 때 다른 사람이 열 번 읽으면... 한 번 읽으면 당신은 열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열 번을 읽으면 당신은 백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백 번을 읽으면 당신은 천 번을 읽었어. 한번만 쑤욱 보기만 해도 외아버릴 수 있었지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 한마디 한마디를 뼛속에 새기고자 해서 백 번, 천 번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허셔가지고 이십 여세의 아주 새파란 젊은 나이에 참 대강사(大講師)에 전강(傳講)을 받아가지고 팔도(八道)에서 모여든 학인(學人)들에게 경(經)을 설하시다가, 참 퇴속(退俗)한 은사(恩師) 덕택으로 자신이 이렇게 대강사가 된 것이 너무너무 고마와서 인사차 그 은사를 찾아가다가 전렴병(傳染病)이, 요새 같으면 장티부스(장티푸스) 같은, 지금은 여러 가지 예방주사도 있고 모다 치료허는 방법이 있지마는, 옛날에는 그러헌 전렴병을 방지헐 방책(方策)이 없어가지고 걸렸다 허며는 온 마을이 다 모조리 다 죽었습니다. 그러헌 무서운 전렴병이 돌아서 차례차례 죽어가는 그런 마을에서 그러헌 것을 보고서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 그래가지고 스스로 생각해보니까,
‘내가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보고 대강사가 되아서 그 경(經)을 강(講)하고 있지마는, 이것이, 이러헌 그 사람이 막 죽어가는 꼴을 보고 공포심이 난 것으로 봐서, 이것이 경을 육도로 다 외우고 종횡(縱橫)으로 설(說)헌들 이것이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헐 수가 있겠는가!’ 대발심(大發心)을 해가지고 동학사(東鶴寺)로 돌아가서 학인들을 다 흩어버렸어. “각자 너희들 인연(因緣)따라서 다 흩어져라” 보내버리고서, 그 동학사 실상사(實相寺, [현(現) 동학사 내(內) 실상선원(實相禪院)]) 그 지금 암자(庵子)는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는데 그때는 거기에 암자가 있었어. 그 암자에서 문을 쳐닫고 그 구멍으로 밥을 넣어달라고 해가지고는 아주 죽기로 각오를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우리나라 이조(李朝)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얼마동안 침체(沈滯)를 하고 경(經)을 숭상(崇尙)하는 시대가 있었는데, 이 경허스님께서는 그러헌 침체된 선풍(禪風)을 갖다가 부흥(復興)을 했어. 그래가지고 한국에 그 침체했던 선풍을 갖다가 이렇게 진작(振作)을 해가지고 오늘날에 참 이 최상승법이 이렇게 참 다시 일어나게 되았습니다. 경허스님 밑에 모다 육대선지식(六大善知識)이 모다 나오시고, 그 선지식 밑에 오늘날 이렇게 전국에 선풍(禪風)이 이렇게 진작(振作)허게 된 것은 경허 큰스님의 그러한 참 출현(出現)으로 말미암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到處)에 참선법(參禪法)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일본에서 모다 소개가 된 탓으로 모다 의리선(義理禪), 의리로 따지는, 의리로 따져서 공안(公案)을 통과(通過)하는 그러헌 참선법이 모다 소개가 되아 있지마는, 우리 한국(韓國)에 남아있는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이 경허(鏡虛)스님, 만공(滿空)스님으로 해서 이렇게 내려오는 이 법이 아직 남아있는 한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을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다시 진작을 시켜서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이 활구참선법을 선양(宣揚)을 해서 불일(佛日)이 재휘(再輝)허도록 헐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부대중(四部大衆) 한 사람 한사람이 그러헌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띵이 있을 때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해가지고 확철대오 해서 고인전지(古人田地)에 이르러서 스스로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이 정법(正法)을 세계(世界)에 선양(宣揚)을 험으로써 우리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을 실천을 해야 헐 때가 바야흐로 온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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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허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백육순장요요(三百六旬長擾擾)호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
봄에는 동해(東海)로 좇아 남(南)으로 주장자(拄杖子)를 날리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가을에는 서산(西山)을 향하다가 또한 북방(北方)으로 가는구나.
저 남방(南方)에서 해제를 하고 북방(北方)으로 가고, 북방에서 해제를 하고 저 남방으로 가고, 철철이 여기서 해제(解制)했다 저리 가서 결제하고, 저기서 결제(結制)했다 이리오고 오고가고, 동서사방(東西四方)으로 춘하추동(春夏秋冬) 계절 따라서 걸망을 짊어지고 왔다 갔다 한다 그 말이여.
삼백육순(三百六旬)을 장요요(長擾擾)허되
삼백육십 일(360일)을 마냥 부산허게 왔다갔다 허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여.
어느 날에 고향에 이르를까 알 수가 없구나.
인생(人生)으로 태어나서 인생에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청춘(靑春)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禪房)으로 이렇게 돌아 댕여. 주지(住持)도 버려 안 허고, 무슨 일체 것을 다 버려버리고 이렇게 걸망을 지고 선방에 나온 것만 해도 참 장하고 기특하고 훌륭하지. 그러나 결제(結制)허고 해제(解制)하고 걸망을 지고 동쪽 서쪽으로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보면 장하고 또한 멋진 인생이라 할 수가 있지마는, 어찌 그것만으로써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헐 수가 있겠느냐? 정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인생의 오욕락까지 다 버려버리고 출가해가지고도 명예와 이익, 명리(名利)를 다 버려버리고 탁 걸망을 짊어지고 나왔다면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더라. 정말 아까 고봉,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 나오는 천목산 고봉스님처럼 정말 한번 목숨 바쳐서 한바탕 해봐야 할 것이다 그거거든.
여기서 한철 지내보고는 또 그저 또 저리 걸망지고 가고, 또 다른 선방에 가서 쪼끔 해보다가 또 해제허면 이 선방에 오고, 철새처럼, 저 갈매... 저 오리, 기러기나 저 두루미 또 황새처럼 그냥 무의미허게, 철 따라서 저 시베리아(Siberia)로 갔다가 저 한강(漢江)으로 왔다가 낙동강(洛東江)으로 갔다가 저 중국 양자강(揚子江)으로 갔다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 하나의 일반사람들이 볼 때에는 멋지게 사는 납자(衲子)일런지는 모르나 그렇게 멋, 그렇게 참 철새처럼 살아서 또 뭣 헐 것이여. 그렇게 살다보면 내생(來生)에는 그런 황새 같은 것이 되아가지고 또 세계를 계절 따라서 날아댕이는 황새 밲에는 더될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출가(出家)한 목적(目的), 부처님께서 이 출가제도를 맨들아 논 이, 이 목적은 황새처럼 떠돌아댕이라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여. 정말 진발심을 해야겄더라. 어느 곳이고 한 곳에서, 기왕 이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왔으면 이 법보선원에서 그 간절한 녹음법문일망정, ‘조실(祖室)스님의 법문(法門)을 살아계신 조사(祖師)의 법문(法門)으로 알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정말 한바탕 아주 뿌리를 뽑, 뽑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허리라 하는 이러헌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닦아주었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허지만, 이 송담(松潭)이 원력(願力)을 세우고 참 잘 외호(外護)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한철 겨우 나고 또 걸망지고 갔다가 이럴 것이 아니거든. 한번 들어왔다 하며는 여기서 아주 뿌리를 뽑아버려야 돼 아주. 죽어서 송장으로 나갈지언정 이 자리를 뜨지 아니 허리라. 부처님께서도 정각산(正覺山)에 들어가서 ‘내가 여기서 성불(成佛)을 허지 아니하면 이 자리에 뜨지 않으리라. 일어서지 아니하리라.’ 고봉스님도 ‘내가 여기에서 확철대오를 못허며는 여기서 내가 살아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는 이런 삼년사한(三年死限)을 하고 이러헌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이 아니고서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석달을... 삼년(3년)을 사한을 하고 그 자나 깨나 화두(話頭)를 들고 했지만 조끔도 화두가 순일(純一)허게 들어지지도 않고 망상(妄想) 아니면 혼침(昏沈), 혼침 아니면 망상으로 삼년을 그렇게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안된다고 한탄을 하고 다른 데로 떠날 생각을 허시지 안했습니다. 고봉스님이 만약에 한철 해보고 안 되아서 다른 절로 가고, 또 거기서 안 된다고 이리 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떠돌아댕이고 말았다면 그러헌 대각(大覺)을 성취(成就)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보살선방(菩薩禪房)에 여러 보살님네들도, 이 정묘년(丁卯年) 삼동안거(三冬安居)에 백삼십삼 명(133명)이라고 허는 많은 대중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이렇게 정진(精進)을 했습니다. 방이 상당히 큰, 크고 저쪽 별당까지 모다 선실(禪室)을 했지마는, 그래도 모다 중좌(重座)를 하고 빡빡허니, 그 공기도 나쁘고, 이 자동차 소음소리는 밤낮을 끊이지 않고 그렇게 소란스럽고, 여러 가지가 시설도 불충분하고 허지마는, 그러헌 불평한마디 없이 참 애써서 모다 정진들을 허셔서 원장(院長)으로서 참 감사허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았다’헌 그러헌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화두를,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들린다 해도, ‘하- 참 공부가 잘 된다. 참 기쁘다.’ 그 생각 내면 벌써 정진이 아닌데, 어떻게 되아야 ‘이만했으면 공부가 잘 된다.’고 만족을 헐 수가 있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 사다함...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多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 이런 사과(四果)에 성현(聖賢)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한 생각을 내면 수다원이 아니요,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하면 아라한이 아니요, 내가 보살과(菩薩果)를 증득(證得)했다하면 보살이 아니라.’ 고 허는 그 법문(法門)이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씌여 있습니다.
정진을 허다가 좀 화두가 순일하고 성성헌 경계(境界)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찌 그까짓 경계를 가지고 족(足)한 마음을 내서야 어찌 그것을 참 납자(衲子)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면 그만한 경계쯤이야. 무슨,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그 경계요,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봐도 하나도 의심헐 것이 없고 모두다 그 소식(消息) 같지마는, 그까짓 것을 어찌 이사(理事)에 맥힘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境地)라 헐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거든, 정진허다가 쪼끔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까짓 것을 족(足)한 줄을 알고. 췌~ 한 생각에 천만 길 지옥구뎅이로 떨어지는 결과 밲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가 잘 된다고 좋아허는 생각도 내서는 안 되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허지를 않고, 들을 때뿐이지 돌아, 금방 일 분도 안 되아서 딴 생각이 일어나고, 딴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그런다고 해서 아 이거... 퇴태심(退怠心)을 내고 자포자기를 헐 수야 더군다나 없는 일이여. 그럴 수록에 악착같이 대들어야 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자가 새끼를 낳아가지고 그놈을 따뜻하게 품안에 안고 젖을 맥이고(먹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려서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 떨어트려버리면 그놈이 떨어져 내려가지고 죽지 않고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에 한해서 젖을 믹여서 키운다 그 말이여. 그 떨어져갖고 맥을 못 추리고 죽어부린 것은 버려부린 거고, 올라오지도 못허고 뻐르적거린 것도 그런 것도 돌아보지도 안 해. 그놈이 애미 있는 디를 찾아서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이라야 되거든.
옛날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선방(禪房)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먹는 거 ‧ 입는 거 ‧ 처소(處所)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만한 그렇게 박(薄)한 상태에서, 그래도 거기에서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해가지고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를 헌 것입니다. 아무리 용화사가 공기가 나쁘고, 주변이 시끄럽고, 공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용(受用)이 박하다 해도, 부처님께서 겪으신 그런 고행정진(苦行精進)에다 비유허면... 비교허면 이것은 만 분에 일(1/10000)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도 참 무던히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여건에서 참 정진허니라고 애들 쓰셨지만, 앞으로는 여건이 나쁠 수록에, 수용이 박할 수록에 더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서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를 해서 여러 단월(檀越)들에 은혜(恩惠)에 보답하고, 우리의 몸띵이를 낳아주신 부모(父母)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방과 전통을 남겨주신 우리의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부처님에 은혜를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解制)를 하고 계속해서 눌러서 정진(精進)을 허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부득이한 인연(因緣)으로 다른 처소(處所)로 가시더라도, 어쨌든지 오늘 조실스님의 말씀과 산승(山僧)에 이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시고 정말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주시기를 거듭 부탁을 합니다. 게송 한마디를 읊고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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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뚧어버리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비로소 산하대지(山河大地) 너그러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상두관(上頭關), 우리의 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철(了徹)해버리면 이것이 상두관을 투득(透得)하는 것이여. 그래버려야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너그러운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불락인간, 불락인간(不落人間) 불... 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ㄴ대,
인간에 모든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헌다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
어찌 녹수청산(綠水靑山)에 걸릴 것이 있느냐? 인간의 시비와 분별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녹수청산에 걸리게 된다 이거거든.
여기 이 법보선원이 공기가 좀 나쁘고, 자동차 공장 모다 소음이 있고, 또 공양 모다 그런 수용이 박하고, 여러 가지 시설이 불충분하다고 한들,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분별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헌다면, 차라리 좀 시끄러운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좀 박한 것이 오히려 도업(道業)을 성취(成就)허는데 좋은 채찍이 될 수도 있고, 여기에 모인 대중가운데 발심(發心)헌 사람도 있고 발심이 덜 되안 사람도 있고, 또 괴객(乖客, 괴각(乖角))이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이 있고, 그러헌 것들이 발심만 제대로 허고 보며는 그러헌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恨歎)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자기 밖에의 어떠헌 경계(境界)에, 다른 사람에 그런 허물을 돌리고 그러헌 마음을 가지는 한은,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坊坊曲曲) 어디를 간들 어찌 내게 맞는 도업 성취할 수 있는 도량(道場)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허물을 밖에서 찾는 한은 천당(天堂)에다 갖다놔도 그 사람은 행복허지를 못할 것이여.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다 갖다놔도 그 사람은 흡족(洽足)허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허는 디에서 해결을 헌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님여러분들도 해제(解制)를 허고 오늘 다 댁으로 모다 돌아가시게 되는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이 선방(禪房)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허시지 말고, 바로 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시끄럽게 떠들고 모든 것이 내 마음과 같지 못허지만, 바로 거기에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허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나간다면, 그 복잡한 세속(世俗), 근심걱정이 떠나지 않는 세속, 가정, 사회가 온통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남편은 부처님이요, 아들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며느리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손자손녀는 남순동자(南巡童子)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을 지내다가 다음 또 여름철에 오셔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정진(精進)허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법상(法床)을 내려가고자 합니다.
- 송담선사 법문 35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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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내용]
*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
이 고불(古佛)의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서로서로 전(傳)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의 인(印)’을 가리키는 말이고,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견’이여. 이것을 ‘고교(古敎)’라 하는 것이여.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이여. 그렇지마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이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그 ‘마음에 인(印)’을, 그것을 가져서 보는 것만 어찌 같을 것이냐. 이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물건. 한 글자도 없건마는 그 글자를 우리 일용중(日用中)에 인연(因緣)따라서 수용(受用)하는 바로 그것이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그 가운데에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覺)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에 검은 글자를 써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는것’이다. 이 경전을 읽어야 참으로 부처님께서 전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傳)해내려오는 그 심인(心印)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3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근대(近代)에 여러 선지식(善知識)들의 그러한 자비(慈悲)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이 말세(末世)에 우리가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을 어디서 들으며, 참선을 하는 방법(方法)을 어떻게 잘 알 수가 있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걱정 없이 이렇게 정진(精進)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불조와 선지식들의 은혜(恩惠)를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오(無悟)라.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며는 깨달음도 없다.’
*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어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다’ 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 경허(鏡虛) 큰스님께서 어려서부터 그렇게 총명(聰明)하시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그러한 참 총명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공부를 하실 때에, 처음에 경(經)을 배우실 때 다른 사람이 한 번 읽으면 당신은 열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열 번을 읽으면 당신은 백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백 번을 읽으면 당신은 천 번을 읽었어. 한번만 쑤욱 보기만 해도 외워버릴 수 있었지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 한마디 한마디를 뼛속에 새기고자 해서 백 번, 천 번을 읽었습니다.
* 인생(人生)으로 태어나서 인생에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청춘(靑春)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결제(結制)하고 해제(解制)하고 걸망을 지고 동쪽 서쪽으로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보면 장하고 또한 멋진 인생이라 할 수가 있지마는, 어찌 그것만으로써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정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인생의 오욕락까지 다 버려버리고 출가해가지고도 명리(名利)를 다 버려버리고 탁 걸망을 짊어지고 나왔다면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겠더라.
* 여기서 한철 지내보고는 또 그저 저리 걸망지고 가고 철새처럼 그냥 무의미하게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 하나의 일반사람들이 볼 때에는 멋지게 사는 납자(衲子)일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참 철새처럼 살아서 또 뭣 할 것이여. 그렇게 살다보면 내생(來生)에는 그런 황새 같은 것이 되어가지고 또 세계를 계절 따라서 날아다니는 황새 밖에는 더될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출가(出家)한 목적(目的), 부처님께서 이 출가제도를 만들어 놓은 이 목적은 황새처럼 떠돌아댕이라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여. 정말 진발심을 해야겠더라.
* 이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왔으면, 이 법보선원에서 그 간절한 조실(祖室)스님의 법문(法門)을 살아계신 조사(祖師)의 법문(法門)으로 알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정말 한바탕 아주 뿌리를 뽑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닦아주었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이 송담(松潭)이 원력(願力)을 세우고 참 잘 외호(外護)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았다’하는 그러한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金剛經)>에,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多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 이런 사과(四果)에 성현(聖賢)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하는 생각을 내면 수다원이 아니요,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하면 아라한이 아니요, 내가 보살과(菩薩果)를 증득(證得)했다하면 보살이 아니다’고 하는 그 법문(法門)이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씌여 있습니다.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거든, 정진하다가 쪼끔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까짓 것을 족(足)한 줄을 알고. 췌~ 한 생각에 천만 길 지옥 구뎅이로 떨어지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 공부가 잘 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서는 안 되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지를 않고, 금방 딴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그런다고 해서 퇴태심(退怠心)을 내고 자포자기를 할 수야 더군다나 없는 일이여. 그럴 수록에 악착같이 대들어야 허는 것이다 그 말이여.
* 사자가 새끼를 낳아가지고 그놈을 따뜻하게 품안에 안고 젖을 먹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려서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려버리면 그놈이 떨어져 내려가지고 죽지 않고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에 한해서 젖을 먹여서 키운다 그 말이여. 그 떨어져갖고 맥을 못 추리고 죽어버린 것은 버려버린 거고, 올라오지도 못하고 뻐르적거린 것도 그런 것도 돌아보지도 안 해. 그놈이 애미 있는 데를 찾아서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이라야 되거든.
*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
인간에 모든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어찌 녹수청산(綠水靑山)에 걸릴 것이 있느냐? 인간의 시비와 분별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녹수청산에 걸리게 된다 이거거든.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恨歎)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자기 밖의 어떠한 경계(境界)와 다른 사람에게 그런 허물을 돌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한은,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坊坊曲曲) 어디를 간들 어찌 내게 맞는 도업 성취할 수 있는 도량(道場)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허물을 밖에서 찾는 한은 천당(天堂)에다 갖다놔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를 못할 것이여.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다 갖다놔도 그 사람은 흡족(洽足)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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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中閑詠
掃地焚香書掩關
此身孤寂此心閑
秋風葉落山窓下
無事常將古敎看
【산중의 한가로움을 읊다
마당 쓸고 향 피우고 낮에 문을 걸으니
이 몸이 고적孤寂해서 이 마음도 한가롭네.
가을바람 낙옆 지는 산창山窓의 아래에서
일없이 옛 가르침 항상 가져 보노라.
- 부휴선수.
* 고적孤寂: 외로이 적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