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甚麽시삼마】

2021. 1. 18. 05:11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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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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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叅禪하는 법, 화두법話頭法을 일러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화두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화두를 여러분에게 간택簡擇을 해 드리겠습니다.

화두話頭는 문헌상에 오른것만 해도 천 칠백 공안公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화두, 문헌상에 오른것만 해도 그렇지마는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우주 법계에 가득 차있는 모든 것이 다 공안公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초학자는 그 많은 공안을 이것 찝적거렸다 저거했다 이거했다 그래가지고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오직 ‘이뭣고’.
‘이뭣고’ 화두는 그 많은 화두話頭에 근본根本이 되는 화두고 최초의 화두고 또 여러분에게, 여러분 뿐만이 아니라 요 우주 이 세계에 태어난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사람에게 태어날 때 부터서 주어진 화두인 것입니다.

​대관절 어데서 왔으며,
무엇허러 왔으며,
어디에 가는 것인가?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게 바로 여러분이 태어날 때 부터서 타고난 화둔 것입니다.
다맛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참구叅究를 해 나가느냐 그것을 몰르고 계실 뿐, 여러분도 ‘대관절 인생人生이란게 무엇이냐?’ 헌거에 대해서 항상 마음속에 그러헌 의심을 가지고 계셨을 줄 생각합니다.

‘이 무엇고?’
대관절 이 이몸띵이 끌고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이냐?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괴롭고 슬플 때도 이뭣고, 답답헐 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이뭣고?
이 ‘이 뭣고’헌 이놈이 뭣고?
다못 그렇게만 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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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는 말은, 여기에 보일 시示잡니다. 보일 시示.
시, 요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씌여져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 계첩戒牒을 드리는데 그걸 열어보시면 요 밑에 여러분의 자신의 불명이 요 밑에 쓰여 있습니다.
김 아무개 이 아무개에게 보인다(示) 그거거든.

맨 처음에 이 원상圓相을 떠-억 그려넣고서 여러분에게 보인 것입니다.
이 원상, ○ 둥그래미
이 원상圓相은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이전, 이 우주법계가 생겨나기 이전에 부터서 이것은 있었어.
앞으로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아서 없어 져부러도 이 원상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여.

우리 몸띵이 안에도 이 ‘뜻(意)’이 들어있어.
이 몸띵이가 백번 죽고 천번 태어나도 이 원상에는 증감增減이 없어. 무엇이 불어날 것도 없고 줄어질 것도 없고 새로 태어날 것도 없고 죽는 것이 아니여.
이 한 물견이 우리에게 있다 그말이여.
이 몸띵이 속에 있어.

몸띵이 속에 있다니까 해부를 허면 어디가 들어있냐 하며는 해부해도 눈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오장 육부를 다 갈르고 보아도 이 한 물견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마는 항상 나타나 있어.

언제 나타나느냐?
​​​육체적인 모든 동작(動), 정신적인 모든 작용(用), 그 가운데에 이 한 물건이 소소영영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 나타나 있다 그말이여.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냄새 맡고 맛볼 때, 손으로 무엇을 잡을 때, 한 생각에 천리 만리도 왔다갔다하고,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를 못해,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
분명히 소소영영한 놈이 있는데 찾으면 자최가 없다 그말이여.

​대관절 이 한 ​​물건이란게 무엇이냐?
이 무엇고?

이게 무엇이냐? 그말을 경상도 말로는 ‘이뭣꼬?’거든.
여러분 가운데에는 경상도 사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팔도에 어디에 사시건 상관이 없어.
이 화두는 경상도 말을 빌려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 무엇고?
이무엇고?
이몸띵이 끌고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고?

이 무엇고? 슬플 때도 이 무엇고, 괴로울 때에도 이 무엇고, ‘이 무엇고’ 허고 있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또 다시한번 더 들어가서 다구쳐도 좋은 것입니다.
이 뭣고?
다맛 그렇게만 해 가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더듬어보고 이렇게 분석해 보고 이렇게 또 종합해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사구선死句禪이 되는 것이고 의리선義理禪이여. 그렇게 따지는 것이 아니여. 아무리 철학 공부를 했고 아무리 이 불경 공부를 많이 했어도 그것 여기에는 끌어들이면 안되아.
다 놔뻐려. 완전히 무식, 무식한 사람이 되아가지고 다못 이뭣꼬? 이렇게만 해나가는 거여.
이것이 활구참선活句叅禪이여.
그러니 해 갈수록 알 수 없음인 것 뿐이여.
해 가다보면 ‘아! 그런것인가?’‘아! 이렇구나’ 이렇게 홀연히 뭐 떠오른 것이 있어가지고 ‘틀림없이 이것이다!, 나도 깨달랐다’ 그렇게 생각허신 분이 간혹 있는데, 그렇게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지.

- 송담선사 법문 312번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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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용자動用者가 심마甚麽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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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在中】

당堂에 올라서, 설법상說法床에 올라서 대중께 물되,
- 이건 육조스님이 한거 아니여. 똑같지마는 -
석상石霜스님께서 물되,

오유일물吾有一物이다, 내게 한 물건이 있다.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인디, 항상 동용動用 가운데 있다.

동용動用이, 동용動用 가운데 있을 것 없지.
동용動用이지, 동용動用!

밥먹고, 옷 입고, 가고, 오고, 잠자고 아- 그놈이란 말이여.
잠자는 놈, 밥먹는 놈, 옷입는 놈.
아- 명두래명두타明頭來 明頭打하고, 낮이오며는 밝은 놈을 치고, 암두래 암두타暗頭來 暗頭打하고, 밤이 오면 어둔 놈을 치고.
만물萬物을, 우주 삼라만상宇宙 森羅萬象 만물의 주인공主人公이지.
그 '이뭣고' 밖에 뭐가 있냔 말이여.
이 물건 밖에 뭐가 있어. 항상 이놈! 이놈이단 말이여.
그저 그 보는 놈, 듣는 놈 그저 가고 오는 놈 이놈 뿐이여. 이 일물一物.
그 가고 오고 이놈, 뭐 별별 구백생멸장九百生滅藏 천하天下없는 도리회道理懷 다 갖다가 붙였자 그건 소용없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까장 때래, 한 물건도 없다고 때래 붙여 놓았자 안되아.
양구良久니 방棒이니 할喝이니 제일구第一句니 제삼구第三句니를 막 때려 써붙여 놨자 소용없어.

항상 이놈인디, 이놈!
이거 한 번 옳게 이를 것 같으면 바로만 네가 보아서 꼭 옳게만 이른다면 내가 대중大衆께, 옳게 이른 사람한테 참 크게 한 턱을 내고, 잘- 아주 공양供養을 내고, 공양供養을 올려. 견성見性했으니 견성見性헌 아 이러헌 큰스님한테 내가 잔치를 떠억 베풀고 한턱을 내고, '그래, 옳다'고 인가印可를 해 줄터이니 일러봐라!
무슨 물건인고 일러봐라!

.....
"조실스님! 조실스님!"

"불러서 뭣혀!!!
왜 이래!!
저를 부를 지언정 왜 나를 불러. 썩어진 놈으.
아나, 어서 가거라! (주장자로 법상을 크게 내려치심)
그 지랄 말고.
앉어!"

대오大悟로 위입문爲入門이다.
그러니 어째! 급이 참구해서 대오大悟로 위입문爲入門이여. 이 오조스님이, 이 석상石霜스님이, 이 물음!
“항상 재중在中에 있는데 무슨 물건이냐?”
천담만담千談萬談이 다 나왔어.

십년홍진객十年紅塵客이
일소청산중一笑靑山中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종명서악사鍾鳴西嶽寺허고
송죽벽운심松竹碧雲深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 전강선사 법문 47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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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한 물견이 있는데, 오유일물吾有一物이여.
내게 한 물건이.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이여, 항상 동용動用 가운데에 있어.
밥 먹는, 동용動用 가운데에 있는가?
동용動用이 시是지?

밥먹는 놈, 옷 입는 놈, 가는놈, 오는 놈, 그놈이 뭣이 가고 오는 놈이여. 송장이 가고 온가? 주인공이 가고오지?
이러고 있다가도 이놈이 턱 가자고 해야 가지? 그 까짓것 자동차와 같은 것이지? 운전대, 운전수가 턱 해야가지?
이 물견! 이 물견 동용動用이거든.
​동용자動用者가 심마甚麽냔 말이여!
가는놈 오는놈이 뭐냐 그말이여.

가는놈 오는 놈이 주인공이 가자오자 해야 가고오지 어디 송장이 가고 온가?
그 물견 하나 무엇이냐?

참 인생문제다. 인생이라는건 이 하나다.
​동용動用 주인공 심마甚麽냐? 무엇이냔 말이여 도대체.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인디, 왜 동용動用 가운, ​동용動用이 시是인디 왜 거두아 얻덜 못하냐.
왜 그놈 하나를 모르고 있냐? 깨닫질 못하냐.
세상에 이것 봐! 이 외에 더 있어?

- 전강선사 법문 17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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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用】

보일 시​ 자입니다 이게.
뭤을 보이냐?

​○
원상圓相을 딱 그려서 보여드렸어.
보여드리고.

이 원상圓相이, 원상圓相은 그냥 보면 둥근런 달처럼 그렇게 그려 놨는데, 이것은 말로써 표현 할수 없는, 설명할수 없는 진리眞理를 이렇게 원상圓相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다 그 말이여.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호되,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은 움직일 동動 자, 쓸 용用 자.

움직이는거(동動 자). 몸뚱이(肉體)를 움직이는 거.
안고 서고 눕고 일하고 밥먹고 옷 입고 하는 모든 육체肉體적인 동작을 말하는 것이고,

용用 자는 정신精神을 쓰는 거여.
과거過去 일도 생각하고 현재現在일도 생각하고 미래未來일도 생각하고, 좋은 일도 생각하고 나쁜일도 생각하고 슬픈일도 생각하고 기쁜일도 생각하고 근심 걱정하고허는 모든 정신작용精神作用을 말하는 거야.

그래서 ​육체肉體적인 모든 동작動作과 정신精神적인 모든 작용作用, 그것을 동용動用이라고 그러는데, 그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항상 그 한 물견(一物)이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수부득收不得이여. 거두어 얻지 못헌다. 분명히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그 한 물견(一物)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작용作用을 하고 있는데, 그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그것을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볼래야 볼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래야 잡을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해도 알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것이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얻을수가 없으니 시심마是甚麽오?
이것이 무엇인고?

- 송담선사 법문 435번.(보살선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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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當來世後五百歲、其有衆生、得聞是經、信解受持、是人即爲第一希有】

冶父: <行住坐臥、着衣喫飯、更有甚麼事。>
佛法、只在日用、行住坐臥處、着衣喫飯時、一切時一切處、一一呈露靡遺、旣然如是、信解受持-何難之有、雖然信解、亦何希有。


【만약 내세 오백년이 지난 후를 당해서, 그때 어떤 중생이 있어 이 경經의 설법을 듣고 이를 믿고 해득하여 받아들여 호지한다면, 이 사람은 곧 가장 희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옷 입고 밥먹는 일 이외에 다시 무슨 일이 있는가?>

불법이란 오직 일용생활의 행주좌와 하는 곳과 옷입고 밥먹고 하는 때에 있을 따름이니, 모든 시간 모든 처소에 하나하나 뚜렷히 드러나 남김이 없다.

이미 이와 같다면 이를 믿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간직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또 비록 그렇게 믿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희유한 일인가?


* 佛法、只在日用、行住坐臥處、着衣喫飯時.
불법은, 일용생활의 행주좌와 하는 곳과
옷입고 밥먹고 하는 때에 있을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