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5. 21:32ㆍ카테고리 없음
【좋은 도반을 만날 수가 없다.】
원제상야월(猿啼霜夜月)하고
화소심원춘(花笑沁園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호호홍진리(浩浩紅塵裏)에
두두시고인(頭頭是故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원제상야월(猿啼霜夜月)이요,
원숭이는 서리 친 달밤에 울고,
화소심원춘(花笑沁園春)이로구나.
꽃은 깊은 동산에 웃는구나. 꽃은 봄 동산에서 웃는... 웃는구나.
호호홍진리(浩浩紅塵裏)에
넓고 넓은 이 띠끌 속에
두두시고인(頭頭是故人)이다.
낱낱이 이 모두가 이 고향사람이더라.
원숭이는 서리 친 달밤에 울고, 꽃은 봄 동산에서 웃어.
이 넓고 넓은 이 홍진(紅塵) 속에, 붉은 띠끌 속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속에,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고향... 고향사람이요 고향소식(故鄕消息)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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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존자와 또 부처님과의 전생(前生)은 어떻게 되았느냐 하면, 저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 전에는 아란존자와 부처님과는 도반(道伴)이었습니다. 함께 도(道) 닦는 아주 다정한 도반이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정말 아주 철저하게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허셔서 온전히 아주 활구참선만을 하셨는데, 아란존자는 자꾸 경(經)을 좋아했습니다. 경 보기를 좋아하고 경 외우기를 좋아하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이랬습니다. 그것이 생(生)을 거듭허면서도 계속 아란존자와 부처님은, 부처님 태어나실 때마다 아란존자도 항시 같이 이렇게 태어나서 또 도를 닦고 그렇게 여러 생을 그렇게 내려오셨는데,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허시게 되았는데 아란존자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설법(說法)허신 것을 기억을 해가지고 결집(結集)을 허는 그러헌 소임(所任)을 맡으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크게 보면 십대제자(十大弟子)와 삽삼조사(卅三祖師)가 전부다 과거(過去)에 다 불보살(佛菩薩)이 부처님의 불법(佛法)을 갖다가 조불양화(助佛揚化)허기 위해서 짐짓 그 제자(弟子)의 탈을 쓰고 제자로서 나타나서 부처님의 법(法)을 전통(傳通)허신 것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지마는, 같은 도반으로서 같이 공부를 시작했어도 ‘그 사람이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을 허느냐, 활구참선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치고 철저히 허느냐’,
-여기 가서 이 법문 듣고 저기 가서 저 법문 듣고, <금강경(金剛經)>이 좋다하면 <금강경>을 독송(讀誦)하고 <법화경(法華經)>이 좋다하면 <법화경>을 독송하고 <유마경(維摩經)>이 좋다하면 <유마경>을 독송하고, 무엇이 좋다하면 이것도 저것도 허니까, 이 고루고루 허면 다 참 좋은 걸로 그렇게 생각을 허지만, 이 도(道)는, 특히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이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는 외곬으로 한 길만을 위해서 몸과 목숨을 옴막 다 바쳐서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열한 근기로 짧은 인생에 있어서 도업(道業)을 성취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들었습니다마는,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다, 큰 의심 아래에 크게 깨닫는다. 적게 의심허면,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큰 의심을 가지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을 전혀 아니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러헌 법문이 있습니다. 지끔 참선이 매우 널리 그 관심을 받게 되아서 승속간(僧俗間)에 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모다 관심을 갖고 모다 헐랴고 허고 있고 거기에 따른 많은 책도 나오고 그랬습니다마는, 이 활구참선은 정말 제일 간단하고 허기가 쉬운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허게 허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천칠백 공안(1700공안)을 전부다, 이 공안(公案)이 생겨날 때에는 부처님과 조사(祖師)간에 그 법(法)을 거량(擧揚)해서 그 법아... 법을 거량하는 그 기연(機緣)이, 어떠헌 기회(機會)에 그 공안(公案)이 생겨났으므로, 그러헌 기연을 잘 알고 또 그 공안을 이리저리 따지... 따지고 그렇게 해서 그럴싸헌 어떤 해답을 얻으면 썩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재미에 팔려서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수수께끼 풀 듯이 그것을 풀고, 그것을 뭐라고 대답허면 ‘옳다’ 하고 일러주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주어서 그 공안을 가지고 몇 일이고 몇 달이고 그 애를 써서 궁리를 하고 따져서 그럴싸한 답을 얻어서 ‘이것이다’허고 그러면 ‘그 옳다’ 그렇게 해서 또 한 공안을 통과(通過)를 하고, 또 그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해서 열 개, 수무 개, 오십 개, 백 개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참 ‘누구는 오십 개가 통과했다, 누구는 백 개가 통과했다’ 이래가지고 그것 많이 통과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그걸 많이 통과함으로써 많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본인도 착각(錯覺)을 하고 남에게 과시(誇示)를 하고, 이러헌 참선이 일본에 진즉(趁即)부터서 수십 년, 백여 년, 몇 백 년 전부터서 일본에서는 그러헌 참선이 유행을 해가지고 헌디, 그러헌 참선이 우리나라로 역수입(逆輸入)이 되아가지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헌 참선을 가리키고 배우고 허는 그러헌 경향이 지금 유행을 허고 있는데, 이 임제종(臨濟宗) 조사문중(祖師門中)에 있어서는 차라리 아니헐지언정 그러헌 참선은 해서는 아니 되고, 차라리 깨닫지 아니헐지언정 그러헌 식에 깨달음을 요구(要求)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왜그러냐?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리(義理)로 따지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다’하고 아는 것이라면, 구태여 애써서 알 것이 없고 수십 명 수백 명을 모아놓고 계속 공안(公案)을 해설하는 강의(講義)를 헌다면 그 강의를 들은 사람은 전부가 다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헌 것이라면 뭣 허러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49년)을 설하시며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떻게, 조사 밑에 이미 다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전부다 깨달라 마쳐버렸을 것입니다. 근데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여. 배와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나 조사가 깨달음을 그런 식으로 가리켜서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 도가 어렵다고 허며 깨달음이 귀하다고 하겠습니까? 깨달음은 가리킬 수 없는 것이고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여.
그러면 부처님과 조사는 무엇을 허셨냐 하면, 깨닫는 방법, ‘어떻게 어떻게 허면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렇게 도를 닦아라.’
깨닫는 것은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가지고 스스로 깨달을 수밲에 없는 것이지, 육신통(六神通)이 자재(自在)하신 부처님의 힘으로도 중생에게 가리켜서 깨닫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고 깨달음을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조실스님의 법문을 많이 들으셨고 또 이 용화(龍華) 이 법보전(法寶殿)에서 많은 법문을 들으신 분은 이미 그러헌 사상(思想)이 철저해서 누가 뭐라 해도 그런 디에 흔들림을 받으시지는 않겠지만, 행여나 누가 그러헌 말로써 유혹을 헌다하더라도 그런 디에 현혹되지 말고 한 생각이라도 바로 돌이켜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거각(擧却)해나가도록. 거기에서 업장(業障)이 저절로 소멸(消滅)이 되고 거기에서 확철대오헐 수 있는 인연(因緣)이 성숙(成熟)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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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는 어쨌든지 평등심(平等心)을 가져야 도에 들어갈 수가 있다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도 좋고, 좋게 하고, 내 마음에 안 맞은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도 좋게 하고, 그래서 모두 평등한 마음, 미워하고 이뻐하고 허는 그러헌 차별심(差別心)을 갖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마음으로 서로 도반을 상대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심(合心)이 되고 화합(和合)이 되고 자연히 한 대중이 견성성불헌, 한 사람도 낙오자(落伍者)가 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는, 그래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그래서 도업(道業)을 성취할 그러헌 도반(道伴)이 되고 그러헌 도량(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도반(道伴)’은, 내가 좋은 도반이, 좋은 수행인이 되아야 자연히 좋은 도반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투철허지 못하고서 그리고서 맨 ‘도반, 좋은 도반이 없다. 좋은 도반을 만날 수가 없다.’ 좋은 도반 만나지 못한 것을 그렇게 한탄(恨歎)을 해봤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헐 때까지 지내도 좋은 도반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신심(信心)이 철저하고 자기가 분심(憤心)이 철저하고 자기가 의단(疑團)이 독로해서 여법(如法)허게 수행(修行)을 헌다면 간곳마다 좋은 도반이 전후좌우(前後左右)로 모다 모이게 될 것입니다.
좋은 도반을 만나야 공부는 자연히 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습기(習氣)가 동(動)해서 타락(墮落)을 허거나 해태굴(懈怠窟)에 빠질 뻔, 그러헌 헌 위기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좋은 도반이 앞에 뒤에 옆에 많이 있으면 그 도반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대번에 충고해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끌고 가지 나를 버리고 가겠습니까?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아란존자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좋은 도반(道伴)을 만나서 공부헌 것은 도(道) 절반(折半)은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그것을 여쭈어서 그것을 확실히 확인허고 싶었습니다.
부처님께 가서 여쭈어보니,
“니 생각이 잘못이다.”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래 아란존자는 깜짝 놀랬습니다.
‘좋은 도반을 얻어서 같이 수행한 것은 절반은 도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헌다는 것은 너무 과했구나’ 그리 생각했는데, 부처님께서는,
“너의 생각이 잘못이다. 좋은 도반을 얻은 것은, 좋은 도반을 만나서 같이 도를 닦은 것은, 절반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도(道) 전부(全部)를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시고서 대중(大衆)을 운집(雲集)을 해서 그 ‘좋은 도반(道伴)에 대한 법문(法門)’을 허시면서,
“너희들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나와 같은 도반을 가졌으니 너희들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이러헌 법문을 허셨습니다.
좋은 도반은 자기한테 있습니다. 좋은 도반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며, 언제라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발심(發心)을 못하고 자기가 여법(如法)허게 수행(修行)을 못하기 때문에 자기 눈에 도반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발심허고 분심을 내서 공부를 헌다면, 도반은 도처(到處)에 있는 것이고 선지식(善知識)도 도처에 계시는 것입니다.
서리치는 달밤에 우는 잔나비소리나, 봄 동산에 피는 울긋불긋한 꽃이 전부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이요 보살화현(菩薩化現)이며, 온 사바세계에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에 이 무상(無常)한 모든 기멸현상(起滅現象)이 전부(全部)가 다 나에 도반이요 나에 선지식이요 나에 살아계신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헌 마음가짐으로 병인년 이 석 달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허셔서 다른 도반들을 위해서 내 자신이 좋은 도반이 되어주고, 그러헌 마음을 가지고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말 내 마음을 비우고서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고 대중을 위해서 항상 이 봉사(奉仕)하는 마음, 보시(布施)하는 마음, 불공(佛供)디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시봉(侍奉)하는 마음으로 정진을 해나간다면, 정말 금년(今年) 이 병인년 여름 안거야말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헐 수 있는 그러헌 뜻 깊은 한철이 되어 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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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學者)가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허되, 활구(活句),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더듬아 알아들어갈 것이 끊어져서, 그 공안(公案)을 마치 불덩어리와 같이 생각을 해. 큰 불덩어리는 가까이 가며는 내 몸이 순식간에 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덩어리라 하는 것은, 큰 무서운 큰 불덩어리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어. 가까이만 갔다 하며는 찰나(刹那) 간에 옷에 불이 붙고 얼굴이 확 타버릴 테니까. 그래서 이 공안 앞에는 무불법조착지(無佛法措着之...) 부처다 법이다 그러헌 소견(所見)을 거기다 갖다가 붙일 수가 없는 것이여. 다만 알 수 없는 큰 의심,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심이 어떻게 간절(懇切)하던지 하늘에 뻗질러요.
이렇게 하루하루를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해나가면, 그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허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그렇게 간절하게 간절하게 단속을 해나가면,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저절로 떠억 현전(現前)하게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을 헐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헌 경지(境地)가 온다하더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간... 중단함이 없이 딴생각 내지 말고 계속해서 알뜰히 잘 단속(團束)을 해나가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헐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통 밑구녘 빠진 것처럼 의단을 타파허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구(求)허지 아니해도 일찰나(一刹那) 간에 확연(廓然) 터득(攄得)을 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그렇게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허신 증거(證據)가 낱낱이 다 분명(分明)한 것이니, 급... 조급한 생각을 먹지 말고, 두려운, 지루한 생각도 먹지 말고, 공부가 잘된다 못 된다 이러헌 생각도 내지 말고, 조끔 잘된다고 좋아허는 마음도 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답답허고 영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그렇다하더라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단속을 해나가서 석 달 동안이 아주 하루같이 이렇게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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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남(함)외일성천(檻外一聲川)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ㄴ댄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운변천첩장(雲邊千疊嶂)이요
남(함)외일성천(檻外一聲川)이다.
구름 가에는 천첩(千疊)이, 천 겹이나 쌓인 산이요, 울타리 밖에는 한 소리 시냇물이더라.
구름이, 구름이 자욱이 낀 밖에는 천첩(千疊)이나 쌓이고 쌓인 산이 둘러싸여있고, 담장, 울타리 담장 밖에는 한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더라.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하면,
만약 열흘이 넘도록, 열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아니했다면,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오.
어찌 비개인 뒤에 저 새파란 하늘을 볼 수가 있겠는가?
열흘 동안이나 지루한 장마가 계속이 되아서 비가 와서 구름이 꽉 끼었다가 그 구름이 쏵 벗거지니까 정말 새-파랗게 트인 하늘을 이렇게 감상 깊게 볼 수가 있더라.
더운 여름, 정말 애써서 정진을 허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정말 알뜰히 알뜰히 정진을 하면, 석 달이 지난 뒤 칠월(7월) 해제(解制)가 되아서 정말 새파란 고운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301번.
* 앞에 있는 도반을 통해서 나 자신을 비추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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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기용함에는 많아야 하지만, 친구를 고름에는 적어야 한다.”
“用人宜多, 擇友宜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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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擇友辨證說택우변증설]
惟願擇一益友、以爲修身之補。而修身必有須擇友、而擇友必須修身。如不修身、則益友不來而損友自至、可不難哉。
“다만 보탬이 될 벗을 골라 수신修身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지만, 수신修身은 반드시 벗을 모름지기 고르는 데에 있고, 벗을 고르는 데에는 반드시 모름지기 수신修身이 필요하다. 수신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보탬이 되는 벗은 오지 않고 손해되는 벗은 절로 이르니, 가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噫、士君子處世、而無一二知己之人、可托死生急難者、則又安用此生爲矣。故欲全友道、須先擇交於等輩之中、觀其行事心術灼然無疑者、而後以心許之。勿爲形跡所拘、勿爲讒毁所敓、勿爲富貴貧賤所移、則庶乎古人之所謂友矣。
아! 사군자士君子가 처세處世하면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한두 명이나, 생사死生의 급박한 어려움을 가히 맡길만한 자가 없다면, 또 어찌 이 삶을 살만하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벗의 도리를 온전히 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먼저 같은 벗들 가운데에 그 사귐을 가리고, 그 행한 일과 마음 씀씀이가 환하여 의혹이 없는 자를 살펴서 그 후에 마음으로써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습과 공적에 구애받지 말고, 참소하고 비방하여 억지로 빼앗지 말며, 부귀와 빈천에 따라 바뀌지 않으면, 옛사람이 이르는 바의 벗에 가까울 것이다.
不能擇友、友愈雜而身愈下矣。故曰、聽其言也、 觀其眸子。又曰、不知其人、視其所與遊。此擇友之至訣也。.......
벗을 고를 수 없으면, 벗들이 뒤섞일 수록에 몸은 더 하열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듣고 그 눈동자를 살펴라’라고 하였고, 또 ‘그 사람을 모르겠으면 그와 더불어 교유하는 사람들을 보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벗을 고르는 지극한 비결이다. ……
友者、雙又耳、彼又我、我又彼。小人交友如放帳、惟計利幾何。友字、古篆作爻、即兩手也。朋字、古篆作羽、即兩羽也。人無兩手、則不得爲全身。鳥無雙翼、則不可爲飛禽。
벗은 둘이면서 하나요, 그이면서 나이고, 나이면서 그이다. 소인小人의 교우交友는 장부를 펴는 것과 같아서 이익이 얼마인지를 헤아린다. ‘우(友)’자는 옛 전서로 ‘효(爻)’, 곧 ‘두 손’이다. ‘붕(朋)’자는 옛 전서로 ‘우(羽)’, 즉 ‘두 깃털’이다. 사람에게 두 손이 없으면 온전한 몸이 될 수 없고, 새에게 양 날개가 없으면 날으는 새가 될 수 없다.”
- 五洲衍文長箋散稿、人事篇、儒行。
고 했습니다. 벗을 어떻게 골라 어떻게 사귈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벗을 사귀는 것은 자신의 수양에 있고, 수양이 없으면 벗을 고를 수 없다는 말은 교우관계에서 자신의 수양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안득장자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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