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28. 17:22ㆍ카테고리 없음
유식독립묘고봉(有時獨立妙高峯)타가
각래단좌염라전(却來端坐閻羅殿)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견진인간지점두(見盡人間祇點頭)허니
대비수안타방편(大悲手眼多方便)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유시독립묘고봉(有時獨立妙高峯)타가,
어느 때에는 묘고봉(妙高峯), 저 수미산 꼭대기, 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 이 수미산(須彌山)인데 그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가,
각래단좌염라전(却來端坐閻羅殿)이라.
불현 듯 염라전(閻羅殿)에, 염라대왕이 있는 염라전에 와서 떠억 단정히 앉었더라 그 말이여.
견진인간지점두(見盡人間祇點頭).
인간(人間)에 모든 것을 다 두루 다 보아 다함에... 다하고서 다못 고개만을 꺼떡꺼떡 허니 점두(點頭)를 허니,
대비수안다방편(大悲手眼多方便)이로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손이 천이나 되고 눈이 천이나 되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그 대비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方便)도 많더라.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달은, 진리(眞理)를 깨달은, 진리와 하나가 된 불보살(佛菩薩)은, 때로는 중생이 이르지 못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수긍(首肯)헐 수 없는 저 수미산 꼭대기에 가서 홀로 서있기도 하고, 때로는 육도, 생사윤회(生死輪廻) 하는 그 육도(六道) 속에서 최악의 죄를 범하고 헤어날 기약이 없는 죄 많은 악한 중생(衆生)들이 고(苦)를 받고 있는 염라국(閻羅國)에 와서 떡 앉어 있다.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있는 중생(衆生)이 너무나 가엽고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그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 중생이 그 갖인 고(苦)를 받으면서 신음을 하고 몸부림 치고 있는 그 중생의 괴로움을 자기도 같이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지옥 문전(門前)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이것이 바로 불보살(佛菩薩)에 행화(行化)인 것입니다. 불보살의 행리(行履)인 것입니다.
어째서 불보살들은 진리(眞理)의 세계(世界)에만 고요히 앉아계시지 아니하고, 때로는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저 무간지옥(無間地獄)에까지, 오늘은 무간지옥에 계시다가 내일은 수미산 꼭대기에 계시다가, 왜 그러헌 것이냐?
착한 일을 해서 그 복(福)을 닦은 공덕으로 한없는 천상락(天上樂)을 받고 있는 중생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죄(罪)를 지은 중생이나, 그 근본성품(根本性品)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불보살은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악을 멀리 하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허게 왕래(往來)하시면서 모든 중생을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인도(引導)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금방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대선사(大禪師)에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마치 전기가 나가서 상태가 좋덜 못해가지고 법문의 내용을 잘 알아듣기가 어려우셨을 줄 생각헙니다.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떠헌 분은, ‘그렇게 잘 들리지 않는 법문을 아무리 틀어보았자 그 청중(聽衆)이 알아듣지 못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차라리 그렇게 잘 들리지 아니한 법문을 틀기보다는 다믄 한마디라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겠다.’ 고 허는 의견을 여러분이 말씀허신 것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회(法會)가 열릴 때에는 꼭 조실스님의 법문(法門)을 한편씩 듣는 것은, 그럴만한 뜻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입으로 설할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심(思量心)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설할 수 있는 법, 귀로 들을 수 있는 법, 사량분별심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이라면 벌써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조실스님의 법문 내용을 우리 중생의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잘 알아듣고 고개를 꺼떡꺼떡허고 이렇게 이해를 헌다하더라도 벌써 조실스님의 참법을 옳게 알아 들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분별심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법문(法門)은 뭣 허러 들을 것이냐. 또 입으로 설할 수도 없다며는 뭣 허러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說)하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그 많은 법어(法語)를 남기시고, 또 오늘 이 송담(松潭)은 뭣허러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입을 열고 있느냐.’
이러헌 질문을 허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법은 입으로 가히 설할 수 없으되, 목... 눈썹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 도리를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어떠한 일이 있고 일이 바쁘고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다 물리치고, 백사(百事)를 다 물리치고 이 법을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說)해야 하고,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백사(百事)를 물리치고 이 법을 들어야 한 까닭은 무엇이냐?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의고 찾는 법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진리법(眞理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여지없이 여러분 앞에 확 헤쳐 놓았습니다.
중생의 분별망상(分別妄想)을 통해서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놈을 여의고도 찾아서는 아니 된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智慧)의 눈이 있는 사람이면, 이 정법(正法)에 조그마한 인연(因緣)이라도 있는 분이면 이렇게 말씀드린 이 말씀의 근본 의도를 마음속에 와 닿는 것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參禪)을 허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헐 수가 없습니다.’
이러헌 호소를 하신 분이 있는데, 망상을 여의고 찾을랴고 허는 디에서 그러헌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妄想)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妄想)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무엇고?’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망상, 일어나는 망상을 없앨랴고 허거나 누를랴고 허거나 쫓을랴고 허면 그 ‘쫓을랴고 허는 또 하나의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때문에 벌써 한 생각 딴 생각, 따른... 다른 또 하나의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공부의 길에서는 천만리(千萬里) 멀어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의 업식(業識), 업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천만가지 번뇌망상(煩惱妄想)이, 깨달은 분에게는 그 망상이 바로, 업식(業識)이 바로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망상을, 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것이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떡 화두(話頭)를 들으면 그것이 바로 망상(妄想)을 여의지도(離) 아니하고 망상에 즉(即)하지도 아니하고서 참 나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여읠랴고 그러고, 우리의 생사(生死)를 버리고서 열반(涅槃)을 찾는 등(等)은 이미 공부에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이요 이것은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진리(眞理)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 거품, 물거품을 없앨랴고 물을 따둑거린다든지 그 물거품을 미웁다고 몽둥이로 그 물거품을 친다든지 허면 또 다른 물거품이, 훨씬 더 많은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거품이라 하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요, 원래 있는 것은 물 자체인 것입니다. 물거품을 없앨랴고 하다가 더 많은 물거품이 생기는 헌 거와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망상번뇌는 원래 없는 것이건마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신령스럽고 너무 가볍고 너무 맑고 깨끗헌 것이어서, 때로는 선(善)으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악(惡)으로도 나타나고, 눈을 통해서는 보고 귀를 통해서는 듣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을 보고 말을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영롱하게, 신령스럽게 그것은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으로 메아리치고 물결이 치는 것입니다.
고요한 호수에 돌 한 개 던지면 그 조그만한 돌 한 개로 인해서 수천만 개의 파도가 일어나듯이, 똥그라미가 퍼져서 저-쪽 호수 가에까지 번져나가듯이, 우리의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애서 한 생각에 천만가지의 마음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파도를 없앨랴고 그걸 물에다가 손을 대거나 물체를 갖다가 대... 대면 거기서 또 다른 파도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파도를 통해서 물에 본질(本質), 물에 본성(本性)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 일어나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중생의 번뇌망상 속에서 그 번뇌망상이 원인이 되아서 번져가는 우리의 생사, 육도(六道) 생사윤회(生死輪廻)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
‘이 무엇고?’
.......
불법은 그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49년) 동안 설(說)하신 법문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여. 팔만대장경 그 많은 법문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지만, 우리가 그 경책을, 한문으로 된 경책을 갖다가 읽어보아도 잘 알 수가 없고 또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근자(近者)에 번역(飜譯)된 경전이 나오고 있지만 번역된 경전을 읽어보아도 읽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또 그만인 것입니다. 그 경... 많은 경전 속에 가장 핵심, 핵심적인 것. 그 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를 시킨 대도사(大導師)들. 그 대종사(大宗師)에 지도(指導)를 통해서 가장 쉬웁게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하면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어떠헌 근심이 일어나건 노여움이 있거든, 눈으로 무엇을 볼...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 다른 생각으로 변(變)하기 전(前)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무엇고?’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해서, ‘뭐 그러헌 것이 최상승법이요 그걸 뭐 불법(佛法)이라 할 것이 있느냐?’
쉬웁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무엇고?’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무서운 지옥고(地獄苦)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을 갖다가, 그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와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무엇고’ 하나를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이 무엇고’ 하나로써 팔만사천의 마군을 다 항복받을 수가 있고,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번뇌(煩惱)를 극복할 수가 있고,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무엇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많은 좋다고 허는 경전을 읽고 해석(解釋)을 헐 줄 아신 분이 계시겠습니다마는, 불법(佛法)은 많이 알고 해석 헐 줄 아는 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알고 있는 것을 비워버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많은 경전을 설하셨지만 그 경을 옳게 이해한다면 많이 머릿속에 외아서 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으로...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는 거여. 비움으로써 참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있도록 허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용화사 이 법보전(法寶殿)에서는 최상승법, 이 활구참선법을 조실스님 계실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宣揚)을 허고 있습니다.
‘이 무엇고?’
그 다음에는 ‘이 무엇고? 허는 이놈이 무엇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허는, 지금 이뭣고 헐 때에 ‘이’ 허고 있는 이 ‘이’ 허는 이놈이 무엇고?
해갈수록 알 수가 없고 해갈수록 답답헐 수 밲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고 꽉 맥힌 그 의심(疑心), 의관(疑觀), ...(녹음 끊김)
...입니다.
잠꽌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진다 그 말이여.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하루하루를 여법(如法)허게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려나가면,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해나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어나가면, 묘하게도 화두(話頭)를 헐랴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진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를 해 나가다... 해나가면 여간 걱정될만한 일을 당해도 조끔도 당황을 허지 않게 되고 그러헌 일로 해서 나의 마음이 동요(動搖)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침착해지고 아량(雅量)이 생기고, 그렇게 그전에는 미웠던 사람도 별로 미워지... 미운 생각이 없고, 마음이 담담(淡淡)허게...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복잡헌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담담해지고 아량이 있고 여유가 생긴다며는 얼마나 세상 살아가기가 좋겠습니까. 내 한 사람이 그렇게 됨으로 해서 나의 집안은 또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그러헌 마음가짐이 된 사람이 직장에 가면 그 직장에 있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동료들도 얼마나 살기가... 대하기가 좋겠느냐 그 말이여.
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헌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헌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헌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 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허다가 보면 머지 안 해서 나 자신 또는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로 전환해서 활용 헐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느냐.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묵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헌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勸獎)할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육도윤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여의고 열반(涅槃)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내 마음이 편해야 가정이 편안하고 가정이 편해야 직장에 가서도 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가 불안하고 내 마음 하나가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안정이 안 되면 그 사람 간곳마다 다 편안 털 못하고 풍파가 일어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쌀이 변질이 되아 있으면 그 쌀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이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아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허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허... 허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만히 훌륭하게 헐랴면 첫째 내 마음부터 편안허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헌다면 모든 것은 제절로 잘 되아 갈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이렇게 사회가, 문명이 발달이 되았다고 허지만,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살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여기에 대처해서 우리가 거침없이 모든 일에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고 목적을 달성 헐랴면, 그 근본인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이 세상을 살기 좋고 좋은 곳으로 맨들랴면, 이 공부 밖에는 없다고 감히 단언(斷言)을 허는 것입니다.
목탁을 세 번 치고...(녹음 끊김, 대중과 잠시 입선(入禪))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요
희즉소혜비즉곡(喜則笑兮悲則哭)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약능어차선참상(若能於此善參詳)하면
육육종래삼십육(六六從來三十六)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여.
중(僧)은 이 중이고 속인(俗人)은 이 속인이다.
어찌 스님을 갖다가 속이라 하고 또 속... 속인을 갖다가 스님이라 할 것이냐 이 말이여.
(희즉소혜비즉곡(喜則笑兮悲則哭)이니라.)
기쁘면 웃어야지 기쁜데 웃지 아니하고, 슬프면 울어야지 울지 않고 웃고, 이래서는 평등(平等)한 진리(眞理)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여.
‘오늘 내가 용화사에 가서 최상승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실천허기... 허니까 나는 부처님 제자가 되았다. 오늘부터서 인자 나는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이여. 남편도 소용없고, 가정도 소용없고,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울지도 않고, 누구 기쁜 일이 있어도 따라서 웃지도 않고, 이렇게 되아 간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산을 깎어서 못을 미우고... 미움(메움)으로써 그래가지고 산을 없애가지고 깊은 구렝이(골짜기)에다 미워(메워)가지고 평지(平地)를 만듦으로써 평등(平等)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최상승법을 옳게 이해한 사람은,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을 줄을 알아야 돼. 아내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허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각기 자기(自己)에게 주어진 책임(責任)을 충실(忠實)히 허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아져 가야 하는 것이여.
약능어차(若能於此)에 선참성... 선참상(善參詳)하면,
만약 능히 여기에서 잘 공부를 지어나갈 줄 알면,
육육(六六)은 종래삼십육(從來三十六)이니라.
육(6)에다 육(6)을 곱하면 그 삼십육(36)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에 따라서, 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常況)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규범(生活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거든. 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댁에 가실 때, 댁에 가셔서 생활 헐 때, 또 직장에 나가셔서, 이러헌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을 행해나가시면 우리는 반드시 부처님 제자로서, ‘정말 어쩌다가 금생에 이러헌 좋은 법을 만났던가’ 생각할수록 다행하고 행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15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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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誼】 古人이 道호되 莫把無心하야 云是道이라 無心이 猶隔一重關이라 하니 無心이 正是無住之義니,
要向無住中하야 繁興大用하야 圓具萬德하야사 方與大道로 相應去在하리라.
到這裏하야 見聞覺知가 依前受用家風이며 色香味觸이 元是遊戱之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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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이 이르되, “마음 없음(無心)을 잡아 이 도리道理라 이르지 말라. 마음 없음(無心)이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격關다(막혀있다)” 하니, 마음 없음(無心)이 ‘정正히 주住(머뭄) 없다’는 뜻이니,
모름지기 주住(머뭄) 없는 가운데를 향向하여 큰 용用(작용)을 번성하게 일으켜 만덕萬德이 두렷이 갖추어져야사, 비로소 큰 도道와 서로 상응相應 하리라.
이에 다다라서는, 견見(봄)과 문聞(들음)과 각지覺知(깨달아 아는)가 옛에 의지하여 받아 쓰는 가풍家風이며,
색色(모양)과 향香(향기)과 미味(맛)와 촉觸(느낌)이 본디 이 노니는 도량道場이니라.
- 함허 [금강경 삼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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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理實見分 第五>
【經】•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아 不아 不也世尊하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ㅣ어뇨 如來所說身相이 卽非身相이니이다
【說誼】 佛이 擧身相ᄒᆞ샤 問空生ᄒᆞ샤ᄆᆞᆫ 欲明妙圓無相身이어시ᄂᆞᆯ 空生ᄋᆞᆫ 本是獅子兒ㄹㅅ.ㅣ 不曾逐塊ᄒᆞ고 能咬人이로다
부처님이 신상身相을 들어 공생空生더러(수보리에게) 물으심은 미묘微妙히 두렷하여 얼굴(형상) 없는 몸을 밝히려 하시거늘, 공생空生은 본래本來 이 사자獅子의 새끼일새 잠깐도 무더기를 쫓질 아니하고 능能히 사람을 물어 뜯도다. 【개는 사람이 흙 무더기를 치거든(던지면) 흙 무더기를 물어 뜯고, 사자는 사람이 흙 무더기를 치거든(던지면) 흙 무더기를 버리고 사람을 물어 뜯나니, 공생空生이 부처님의 뜻을 알아 대답함을 비유한 것이니라.】
【說誼】 莫以無相ᄋᆞ로 云是斷이라 ᄒᆞ라 非形이 終不外於形ᄒᆞ니라
얼굴(相) 없음으로 이 단멸斷滅이라 이르지 말라. 형形(형상) 아닌 것이 나중에(마침내) 형形(형상) 밖이 아니니라.
【冶父】 且道卽今에 行住坐臥ᄂᆞᆫ 是甚麽相고 休瞌睡ᄒᆞ라
또 일러라. 곧 지금 다니며 머물며 앉으며 누움은 이 무슨 상相인고? 자올지(졸지) 말라!
【說誼】 吾今色身이 卽是常身法身이니 不得離却色身ᄒᆞ고 別求常身法身이니라
내 지금의 색신色身이 곧 이 상신법신常身法身이니, 색신色身을 여의고 각별히(따로) 상신법신常身法身을 구함이 옳지 아니하니라. 【상신법신常身法身은 진상眞常한 법신法身이라.】
【說誼】 若也離却色身ᄒᆞ고 別求常身法身ᄒᆞ면 慈氏宮中에 願生兜率ᄒᆞ며 含元殿裏예 更覓長安이니라
만약 색신色身을 여의고 각별各別히(따로) 상신법신常身法身을 구하면, 자씨慈氏(미륵보살) 궁중宮中에서 도솔兜率(도솔천)에 나고자 원願하며 함원전含元殿 속에서 다시 장안을 얻음(찾음)이니라.
【說誼】 所以道卽今行住坐臥ㅣ 是什麽相고 ᄒᆞ니 要見常身法身인댄 直須向行住坐臥處ᄒᆞ야 覰破ᄒᆞ야아 始得다
이런 까닭으로 이르되, “곧 지금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이 무슨 상相인고?” 하니, 상신법신常身法身을 보고자 할진댄 바로 모름지기 행주좌와行住坐臥 처處를 향向하여 보아야사 옳다.
【說誼】 離却日用ᄒᆞ고 別求常身法身ᄒᆞ면 便是鬼窟裏예 作活計니 所以道休瞌睡ㅣ라 ᄒᆞ니라
일용日用을 여의고 각별各別히(따로) 상신법신常身法身을 구求하면 곧 이 귀굴鬼窟 속에 살 헤아림(생각)을 지음이니, 이런 까닭으로 이르되, “자올지(졸지) 말라” 하니라. 【일용日用을 버리고 각별各別히 (따로) 법신法身을 구求함이 기운 없는 공적空寂일새 귀신의 굴을 비유하고, 자오롬(졸음)이 기운 없음을 이르니 귀굴리鬼窟裏(귀신굴속)에 작활계作活計(살 궁리를) 함이라】
【頌】 身在海中ᄒᆞ니 休覓水며 日行嶺上ᄒᆞᄂᆞ니 [嶺上一作山嶺] 莫尋山ᄒᆞ라 鶯吟燕語ㅣ 皆相似ᄒᆞ니 莫問前三與後三이니라
몸이 바다 가운데 있나니 물 얻음을 말며, 날마다 령嶺(고개) 위를 다니나니 뫼(산) 얻음을 말라. 꾀꼬리 울음과 제비 말이 다 서로 같으니, 전삼前三과 후삼後三을 묻지 말지니라. 【전후삼前後三은 일만一萬이니 육육六六이 원래元來 삼십육三十六이라 함과 같으니, 무착無着이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문수文殊를 보아 묻되, “이에(여기에) 중이 얼마나 행(수행)합니까” 문수가 이르되,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 하니라.】
【頌】 報化ᄂᆞᆫ 非眞이라 了妄緣이니 法身ᄋᆞᆫ 淸淨ᄒᆞ야 廣無邊ᄒᆞ니라 千江애 有水ᄒᆞ면 千江月이오 萬里예 無雲ᄒᆞ면 萬里天이니라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진眞(참) 아니라 망연妄緣을 알지니, 법신法身은 청정淸淨하여 넓어 갓 없느니라.
천 강에 물이 있으면 천 강엣 달이오, 만리에 구름이 없으면 만리의 하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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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암사 샌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