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6. 05:39ㆍ카테고리 없음
【약능어차若能於此에 선참상善叅詳】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다,
스님은 이 스님이고 속인은 이 속인이여.
희즉소혜비즉곡喜則笑兮悲則哭이라,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어.
약능어차若能於此에 선참상善叅詳하면,
만약 능히 여기에서 잘 참상叅詳을 하면,
육육六六은 종래삼십육從來三十六이라,
육六에다가 육六을 곱하면 종래從來로 삼십육三十六이 된다. 삼십육三十六이다.
.....
스님은 이 스님이요 속인은 이 속인이여.
머리깎고 먹물 옷 입은 사람은 누가 보던지 스님이고, 머리가 있고 치마를 입은 분은 그 고대로 할머니요 아주머니요 그대로 속인俗人이다 그 말이여.
기쁜 일을 당하면 웃고, 슬픈일을 당하면 울어.
너무 당연한 일이요 너무 평범한 일이여.
이 당연하고 평범한 이 일.
아침이 되면 해는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 되면 서산西山에 지는, <이 평범平凡한 이 속에서 잘 참상叅詳을 해야한다 그 말이여.>
———
월투月投고 투창백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 아미타불.
참상차중명叅詳此中明하면,
구년소림사九年少林事니라.
나무아미타불.
(월투月投고 투창백投窓白이요)
달은 창窓에 비추어서 희고,
달빛이 창窓에 비추어서 환하이 밝다 그말이여.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그리고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는 방 안에까지 들려와.
달밤에는 월색月色이 적요寂寥허고 창이 환희 밝은 것이 눈에 보이고, 비 온 뒤에는 시냇물 소리가 줄줄줄줄줄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방 안에 앉았어도 내 귀에 들려온다 그말이여.
이 달빛이 창窓에 비추어서 흰 것이 눈에 보일 때 그때!
시냇물 소리가 방 안에까지 들려온, 들려서 내 귀에 들려온, 내 귀에 시냇물 소리가 들릴 그 찰나刹那!
그 속을 향해서 잘 참상叅詳을 해라 그 말이여.
그 속을 향해서... 바로 그 찰나刹那, 눈으로 달빛이 창에 비추어서 환히 밝은 것이 보일 그 찰나刹那, 시냇물 소리가 흘러가는 그 소리가 방안에 있으면서도 귀에 들려오는 <그 찰나刹那에, 그 찰라가 바로 잘 참상叅詳할 수 있는, 바로 정진精進할 수 있는 그 요긴要緊한 대목이다 그말이여.>
어찌 비단, 눈에 달빛이 비추고 귀에 시내 흘러가는 소리 들릴 때에만 국한局限할 것이겠습니까.
달빛... 뿐만이 아니라 푸른 산 빛이며 흰 구름 빛이며 단풍 궂은 노란 이파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모든 사람과 지내가는 차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色相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여.
시냇물 소리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소리 기차소리 개 짖는 소리 애들 떠드는 소리 모든 소리가 또한 시냇물과 다르지 아니헐 것입니다.
비단 눈으로 보는 색상과 귀로 듣는 모든 소리 뿐만이 아니라, 코로 맡은 모든 냄새, 변소에 가면 구린내 창간에 가면 된장내 차를 타면 휘발유내... 모든 냄새, 화장품 냄새 좋은 향내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고약한 냄새도 또한 마찬가지여.
입으로, 혀 끝으로 맡은 모든 맛도 또한 마찬가지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나 맛 없는 음식을 먹으나, 짜고 싱겁고 매운 것을 먹으나 고소한 것을 먹으나 일체 맛이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몸에 닿는 모든 촉감,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럽고 하는 모든 촉감도 또한 마찬가지여.
육체에 와 닿는 모든것 뿐 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심의식心意識에 와 닿는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 탐진치貪瞋癡, 모든 생각도 또한 마찬가지여.
성내는 마음 기쁜마음 슬픈마음 외로운 마음 괴로운 마음,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모든 선善한 또는 악悪한 마음 또한 마찬가지여.
그 생각 생각 마다가 바로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할 수 있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는 요긴要緊하고도 묘妙한 계기契機다 이 말씀이여.
그 찰나刹那 찰나刹那를 여의고는 참나 깨달을 때(時)와 곳(處)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 찰나刹那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무량겁을 윤회輪廻를 해서 오늘 이곳에까지 왔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활구참선活句叅禪은 바로 이 평범平凡한 이 찰나 찰나에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아프게(?) 살려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갈 때 마침내는 스님은 이 스님이요 속인은 이 속인이요,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도道는, 도道를 깨닫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와 같고, 쥐었던 주먹을 피어서 손바닥을 맞는거와 같다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철대오허기가 그렇게 만만치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그 찰나를 살리지를 못해. ‘그 찰라를 바로 살아가지를 못하고 그 찰나를 놓쳐버리고 그 찰나 찰나에 내가 챙기지를 못하고 그 찰나 찰나에 내가 휩쓸려 말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 이것입니다.>
내나 할것없이 우리에게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 육경六境을 따라서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육식六識이 발동發動을 허고 있습니다.
그 좋은 계기契機, 좋은 찰나刹那, 좋은 시간時間, 좋은 공간空間을 우리는 막연漠然허게 방일放逸, 그게 바로 방일放逸이라하는데, ‘놓아 버려둔다’, 방일放逸의 반대가 정진精進이고 정진의 반댓말이 방일인데, 그 방일이라는게 무슨 선방禪房에서 참선叅禪을 안허고 공연空然하니 어디 지대방에 가서 낮잠만 자고 있는 것 그게 방일放逸이 아니여.
선방에 가 앉었건 지대방에 가 누웠건, 도량에 거닐건, 어디에서 무엇을 허건 간에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못하고 그 중대한 그 찰나 찰나를 살려가지 못하는 그것이 방일放逸이여.
- 송담선사 법문 186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