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如来 마니주摩尼珠】

2021. 4. 21. 22:15카테고리 없음

【중생심衆生心 속에 마니주摩尼珠】

마니주인불식摩尼珠人不識이여.
여래장리친소득如來藏裏親收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육반신용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마니주인불식摩尼珠人不識이여.)
마니주摩尼珠.
이 마니주를 터억 지니며는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해. 육도법계六道法界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댕기되 하나도 손상을 입지를 안 해.
그 마니주를 지녔건만 사람이 알지를 못하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이여?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여.
중생심이... 중생심 그 제팔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如來藏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一切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疑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진六塵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있다 그 말이여.


(육반신용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이요)
그래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
눈을 통해서 보고(眼), 귀를 통해서 듣고(耳),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鼻),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舌),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더웁고 험을 느끼고(身),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헌다(意) 그 말이여.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摩尼珠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神妙한 신통神通이다’ 그 말이여.

그런디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여(空不空).
분명히 있으되 비어있는 것이고, 분명이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영 허건만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최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이요,


일과원광一顆圓光이 색비색色非色이로구나.
이 마니주 이 한 알갱이 구슬이 두렷하게 빛나고 있건마는, 분명히 색깔이... 빛깔이 있으되 빛깔이 없더라 그 말이여.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 차 있으되 찾으면 간 곳이 없고, 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간語默動靜間에 소소영영昭昭靈靈하건마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으니, 어찌 이것이 색상色相이 있다고 허며 색상이 없다고 헐 것인가(色非色).
있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니, 있다고 헐 수도 없고 없다고 헐 수도 없어.

중생衆生의 소견所見으로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어.
따져봤자 맞지 아니한 것을 왜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가지고서는 오십육억칠천만년(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 까지 따져도 이것은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여.
오직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忠實해서, 앞... 나아가자니 앞이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혀. 꽉 맥힌 의심으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불 속에 들어앉은 거와 같애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앞이 맥혔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왼쪽으로도 맥혔고 오른쪽으로도 맥혔어.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불이 훨훨훨 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나가자니 팔방 사방이 꽉 맥혔어.
이러헌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거냐 그 말이여.

‘이 무엇고?’


- 송담선사 법문 세등 5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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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반신통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


摩尼珠ᄂᆞᆫ、 本無瑕纇ᄒᆞ야 絕精麁ᄒᆞ니라 月白風清去年夜애 一帆飛過洞庭湖호라

마니주摩尼珠는, 본래本來 하뢰瑕纇 없어 정精과 추麁가 그치니라. 달 밝고 바람 맑은 익은 해 밤에, 한 돛으로 동정호洞庭湖를 날아 지나라. [동정호洞庭湖는 물의 이름이라. ]

【하瑕는 ‘밖의 허물’이오 뢰纇는 ‘안의 허물’이니, 정추精麁도 또 ‘안팎의 허물’이라. 이 심주心珠(마음 구슬)가 본래本來 굵으며 가는 두 혹惑이 없을새, ‘정추精麁가 긋다(그치다)’ 이르시니라. 삼사三四 구句는 맑아 요요寥寥하며 하야(하얘서) 반닥반닥(반짝반짝)하여 좋은 뜻이니, ‘구슬 얻은 곳’을 이르시니라. 】





人不識ᄒᆞᄂᆞ니、 無量劫來로 至今日이로다 放下皮囊ᄒᆞ고 子細看이언뎌ᇰ 不須向外空尋覓이어다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무량겁無量劫으로 오늘날에 이르도다. 갖나맟을(가죽 주머니를) 놓아 버리고 자세히 볼지언정, 밖을 향하여 속절없이 얻음을 모름지기 말지어다.

【둘째 구句는 사람이 비록 알지 못하나, 무량겁無量劫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잠깐도 잃지 아니한 것이라. 셋째 구句는 오온五蘊이 다 빈 줄 보면 구슬이 그 곳에 나툴지라, 밖에서 오지 아니한 뜻이라.】





如來藏裏예 親収得이니、 要識如來藏也麼아 酸酒冷茶三五盞ᄋᆞ로 長江애 風急거늘 浪花多ᄒᆞ도다

여래장如來藏 속에 친親히 얻을지니, 여래장如來藏을 알고져 하는가? 신 술(酒) · 찬 차(茶) 세 다섯 잔으로 긴 가람(강)에 바람이 빠르거늘 물결 꽃이 많도다.

【여래장如來藏이 얽힌 데 있으며(재전在纏) 얽힌 데 남이(출전出纏) 다름이 있으나, 다 이 구슬이 있어 본디 더하며 덞이 없느니라. 삼사三四 구句는 천경산千頃山에서 눈에 보이는 일이니, 고기 잡는 사람이 물의 신령제神靈祭 하는 때이니, ‘이 물의 신령제神靈祭 하는 고기 잡는 사람이 곧 이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 것이라.】


* 《여래장如來藏》
如來藏裏親收得者。此摩尼寶。非世所有。乃於如來秘密藏中。親獲此寶。所言如來藏者。有在纒如來藏。有出纒如來藏。衆生常爲三毒五陰煩惱所覆。
雖有寶藏。不得受用。謂之在纒如來藏也。若乃諸佛三德。精明湛然。圓滿包容法界種種功德。謂之出纒如來藏。

‘여래장如來藏 속에 친親히 거두어 얻는다’ 하는것은,
이 마니보摩尼寶는 세간世間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곧 여래如來의 비밀장秘密藏 가운데에서 친親히 이 보배를 얻어야 한다.
이른바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것은, ‘재전여래장在纏如來藏’이 있고 ‘출전여래장出纏如來藏’이 있다.
중생衆生은 늘 삼독三毒과 오음五陰의 번뇌煩惱에 덮인 바가 되어서, 비록 이 보장寶藏이 있으나 수용受用하지를 못한다. 그것을 일러 ‘재전여래장在纒如來藏’이라 한다.
만약 도리어 모든 부처님의 세 가지 덕德이 정미롭게 밝고 담연湛然해서, 법계法界의 갖가지 공덕功德을 원만圓滿하게 포용包容한다면, 그것을 일러 ‘출전여래장出纒如來藏’이라 한다.

- 『남명전화상송증도가사실』 南明泉和尙頌 證道歌事實卷第一





六般神用이 空不空ᄒᆞ니、 在聖在凡에 無異質ᄒᆞ니라 不二門開ᄒᆞ야 任往還이어니 何須更問維摩詰이리오.

여섯 가지의 신神한 용用이 공空하되 공空치 아니하니, 성聖에 있거나 범凡에 있음에 다른 얼굴(質) 없느니라. 불이문不二門이 열려 마음으로(마음대로)가락 오락 하거니, 무슨(무엇하러) 구태어 유마힐維摩詰께 다시 묻자오리오(물으리오).

【’여섯 가지’는, 구슬이 여섯 구멍이 있나니 ‘육근六根’을 가잘비니라(견주심이니라). 둘째 구句는 성범聖凡에 본래本來 더하며 덞이 없는 것이라. ‘불이문不二門’은 범凡과 성聖이 둘 아닌 문門이니, 문수文殊가 유마힐維摩詰께 묻자오시되, '어느 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 이닛고?' 유마維摩가 묵연墨然(침묵)하신대 문수文殊가 찬讚(찬탄)하여 이르시되, '말씀과 문자文字 없음에 이르르심이 이 보살菩薩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로소이다.' 하시니라. 】





一顆圓光이 色非色이니、 那律能觀ᄋᆞ로도 不易觀이로다 正體ᄂᆞᆫ 從來誰得見고 風高天地ᄒᆞ니 雪霜寒ᄒᆞ도다

한 낱 두렷한(원만한) 빛이 색色이로되 색色 아니니, 나율那律(아나율)의 능히 봄으로도 수이(쉽게) 보지 못하리로다. 정正한 체體는 예부터 옴에 뉘(누가) 능能히 보느뇨? 하늘과 땅에 바람이 높으니 눈과 서리가 서늘하도다.

나율那律(아나율)은 백반왕白飯王의 아들이니, 처음 출가하시어 잠 잘(너무 많이) 자시거늘 여래如來가 꾸짖으신대 울고 이레(7일)를 자오지(잠자지) 아니하시니, 천안정天眼定을 얻어 시방十方을 보되 손바닥에 과자果子 보듯 하시더라. 이삼二四 구句는 나율那律 따름 아니라 불안佛眼도 여술(엿볼) 분分이 없는 것이라. 넷째 구句는 서늘하고 싁싁하여 조그만큼의 덥듯 함도 없는 것이라.



- 『남명전화상송증도가사실』 南明泉和尙頌 證道歌事實卷第一


* 이른바 ‘여래장’이라 하는것은, 재전여래장在纏如來藏이 있고 출전여래장出纏如來藏이 있다.
중생衆生은 늘 삼독三毒과 오음五陰의 번뇌煩惱에 덮인 바가 되어서, 비록 이 보장寶藏이 있으나 수용受用하지를 못한다. 그것을 일러 ‘재전여래장在纒如來藏’이라 한다.

만약 도리어 모든 부처님의 세 가지 덕德이 정미롭게 밝고 담연湛然해서, 법계法界의 갖가지 공덕功德을 원만圓滿하게 포용包容한다면, 그것을 일러 ‘출전여래장出纒如來藏’이라 한다.

‘사슬에 얽힌 여래’와 ‘사슬의 얽힘에서 벗어난 여래’가 비록 다르기는 다르나, 다 ‘본래本來로 여래如来 마니주摩尼珠는 더하며 덜함이 없다.’


四七.
問,何名解脫心。答,心非色故,不屬色,心非非色,不屬非色。心雖照色不屬色。心雖照非色不屬非色。心非色相可見。心雖非色,非色非是空。心非色, 心不同太虛。菩薩了了照空不空,小乘雖照空,不照不空。聲聞雖得空,不得不空。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해탈심解脫心’이라 합니까?
답하되, 마음은 色이 아닌 고로 색에 속하지 않으며, 마음은 색이 아님(非色)도 아니어서 색 아님(非色)에 속하지도 않는다. 마음은 비록 색色을 비추나 색色에 속하지 않는다. 마음은 비록 색 아님(非色)을 비추나 색 아님(非色)에도 속하지 않는다. 마음은 상相으로 가히 볼 수 있는 색色이 아니다. 마음은 비록 색色이 아니지만, 색色 아님이 이 공空이라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색色이 아니지만, 마음은 태허太虛와 같지는 않다.

보살菩薩은 요요了了해서 공불공空不空(비었으되 비지 않음, 비지 않았으되 빔)을 비춘다. 소승小乘은 비록 空을 비추나 불공不空을 비추지는 못한다. 성문聲聞은 비록 공空을 얻으나(깨달으나) 불공不空을 얻지는(깨닫지는) 못한다.

——

四八. 諸種妄執
問,何名一切法非有非無。答,”心體無體,是法體。心非色故非有,用而不廢故非無。復次用而常空故非有,空而常用故非無。復次無自性故非有,從緣起故非無。凡夫住有,小乘住無,菩薩不住有無” 是自心計妄想。“色非色不染色,非色非色不染非色。復次不見見,不見不見,是名見法。不知知,不知不知,是名知法” 如是解者,亦名為妄想。即心無心,心無心故名為法心。今時行者,以此破一切惑,心如虛空,不可破壞,故名為金剛心。心不住住,不住不住,故名為般若心。心性廣大,運用無方,故名為摩訶衍心。心體開通,無障無碍,故名為菩提心。心無崖畔,亦無方所。心無相故非有邊,用而不廢故非無邊。非有際非無際,故名為實際心。心無異無不異,即心無體。不異而無不體,非不異無異不異,故名為如心。即心無變名異,隨物而變名無異,亦名真如心。心非內外中間,亦不在諸方,心無住處,是法住處,法界住處,亦名法界心。心性非有非無,古今不改,故名為法性心。心無生無滅,故名為涅槃心。若作如此解者,是妄想顛倒,不了自心現境界,名為波浪心。

묻되, 무엇을 이름하여 ‘일체법一切法은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다’라고 합니까? 답하되, “마음의 체体는 체体가 없으니, (체가 없는)이것이 법法의 체体다. 마음은 색色이 아닌고로 유有가 아니며, 작용하면서도(쓰면서도) 폐廢(못쓰게되다, 그만두다)하지 않는 고故로 무無가 아니다. 또, 작용(用)하면서도 항상 공空한 고故로 유有가 아니며, 공空하면서 항상 작용하는 고故로 무無가 아니다. 또, 자성自性이 없는 고故로 유有가 아니며, 연기緣을 좇아 일어나는 고故로 무無가 아니다. 범부凡夫는 유有에 주住하고, 소승小乘은 무無에 住하며, 보살菩薩은 유有와 무無에 주住하지(머무르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 마음의 ‘계망상計妄想’인 것이다.

“색色은 색色이 아니니 색色에 물들지 아니하고, 색은 색 아님도 아니니 색 아님에도 물들지 않는다. 또한 다시, 봄도 보지 아니하고, 보지 아니함도 보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法을 본다고 한다. 앎도 알지 아니하고, 알지 아니함도 알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法을 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해解하는 사람은, 역시 이름하여 ‘망상妄想’이라고 한다.

“마음에 즉하여(即心) 마음이 없으니(無心), 마음 없는 마음인 까닭에 법의 마음(法心)이라 한다. 금시今時(지금 이때)를 행하는 자는, 이로써 일체의 미혹을 부수어버리며,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가히 파괴하지 못하는 까닭에, 이름하여 ‘금강심金剛心’이라 한다. 마음은 머무름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머무르지 않음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반야심般若心’이라한다. 마음의 성품은 광대廣大하여 운용運用함에는 방소方所가 없으니,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마하연심摩訶衍心’이라 한다.

마음의 체體(바탕)가 열려 통하여(開通, 사무치게 깨달아) 장애가 없고 거리낌이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 마음에는 끝간데(가장자리)가 없고 또한 방소方所가 없다. 마음은 상相이 없는 고故로 갓(邊)이 있지 아니하며, 작용하여 멈추지 않는고로 갓(邊)이 없지 아니하다. 끝이 있음(有際)도 아니요 끝이 없음(無際)도 아닌 까닭에, 이름하여 ‘실제심實際心’이라 한다.

마음은, 다름이 없으며 다르지 않음’도 없으니, 마음에 즉即하여 그 체體가 없다. 다르지 아니하여서 체體 아님이 없으며, 다르지 않음도 아니어서 다름과 다르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여여심如如心’이라 한다. 마음에 즉即하여서는 변變함 없되 그 이름만이 달라지고, 물物을 따라서는 변變하되 그 이름만이 달라짐이 없으니 또한 이름하여 진여심真如心이라 한다.

마음은 안과 밖과 중간이 아니며, 또한 모든 방위에도 있지 않으며,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법法이 머무는 곳이며 법계法界의 머무는 곳이라, 또한 이름하여 법계심法界心이라 한다. 마음은 그 자성이 ‘있음’(有)도 아니요 ‘없음’(無)도 아니어서,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까닭에 이름하여 ‘법성심法性心’ 이라 한다. 마음은 생겨남도 없고(無生) 멸함도 없는(無滅) 까닭에 이름하여 ‘열반심涅槃心’이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해解(알음알이)를 짓는 자는, 이것이 바로 망상전도妄想顛倒(망상으로 전도된 것)이며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境界를 끝마치지(깨닫지) 못한 것이니, 이름하여 ‘파랑심波浪心(경계에 물결치며 끄달리는 마음)’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