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수행이 아닌가에 대해서]

2020. 7. 26. 18:19카테고리 없음

<수행이 아닌 것>

 

 

 

많은 사람이 수행을 한다. 그들은 수행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서 나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무엇이 수행이 아닌가에 대해서 말이다.

 

우선 수행은 심리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지적인 능력을 동원해 수행한다면 우리에게 심리적 변화가 생겨날 것이다. 이에 대해 의문을 갖지는 않는다. 사실 이것조차도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수행의 방향이 그런 심리적 변화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수행은 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우주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물리적인 자연현상을 밝혀내는 것이 수행의 전부가 아니다. 물론 이따금 진지한 수행 속에서 그런 분야의 지식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수행은 아니다.

 

수행은 황홀경에 다다르려는 노력이 아니다.

환영을 보는 데 매달리지 않는다. 쏟아지는 하얀 빛(혹은 분홍, 혹은 파랑 등)을 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일이고, 오랫동안 좌선을 해 왔다면 맞닥뜨렸을지 모를 광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현상을 수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행은 특별한 힘을 지니거나 계발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 우리 모두 자연스레 한 가지는 내세울 것이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더 많이 갖기도 하는데, 그런 것이 내게도 한 가지 있다. 로스앤젤레스 선원에 머무를 때 늘 저녁 메뉴를 알아맞혔다. 내가 앉아 있는 곳과 부엌 사이에 문이 두 개나 있고 모두 닫혀 있는데도 맞힐 수 있었다. 그래서 싫어하는 메뉴가 나오면 식당에 가지 않았다. 신묘하긴 해도 다소 어쭙잖은 능력이다. 하지만 어쨌든 수행이 어떤 능력을 구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몇 년에 걸쳐 참선하면 조리키(조력助力)라는 힘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하지만 이를 얻고자 달려드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조리키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좌선의 부산물일 뿐 바른 길이 아니다.

 

기분을 좋게 바꾸고 행복을 느끼기 위한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나쁜 기분을 좋게 만들고자 하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어떤 특별한 상태가 되거나,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산물이나 수행의 핵심 등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수행이란 항상 고요하고 침잠해지는 상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몇 년 수행하고 나면 좀 더 그런 자세를 갖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수행의 방향은 아니다.

 

수행하면 아프지도 않고, 상처도 입지 않으며, 성가시게 병치레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좌선을 해서 건강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행하다가 몇 달씩 아파서 고생가거나 심지어 몇 년째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수행은 결코 건강을 찾으려는 길이 될 수 없다. 수행을 하다 보면 전반적으로 건강이 좋아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행으로 모든 것에 통달하는 전지전능한 상태를 획득하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옳지 않다. 수행의 목적은 모든 세속적인 문제에 권위를 갖는 위치에 도달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런 일들을 좀 더 명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을 먼저 알게 된다.

 

수행은 '영성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단어가 통용될 만한 그런 개념이 아니다. 수행이란 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자 한다면 '영성적' 상태에 목표를 둘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수행이 유혹적이면서 해로운 목적이 될 수 있다.

 

수행의 길에서는 '좋은'것만 밝게 비추고 소위 '나쁜'것이라 불리는 상태를 제거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도 좋고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좋아지려는 몸부림은 수행이 아니다. 그런 훈련은 운동 종목에 행해지는 것이다.

 

수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목록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수행자들 가운데 이런 망상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변화를 바라며, 어느 곳에 도달하고자 한다. 오류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도 욕망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을 응시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정화 작용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수행을 바탕으로 꾸려 나가는 삶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변화해 간다. 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어딘가에 도달하겠다는 날뛰는 욕망이 망상 그 자체이고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을 헤아리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 배가 희망과 환상, 야망으로 가득하다면(어딘가에 닿으려고, 정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완벽해지려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국 뒤집히고 말 것이다.

 

그럼 텅 빈 배란 무엇일까? 우리는 누구인가? 삶 속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그렇다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


참선은 어떤 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사람에 관한 문제다.
참선은 어떤 활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바로 잡으려는 것도 아니며, 무엇을 획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접근이다.

.....

사람들은 대부분은 이런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흥미는 낮아진다. 아니, 그보다는 생각에 빠지고 싶어한다. 모든 선입관을 들이대며 계속 걱정하려 든다.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가늠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인생을 알기도 전에, ‘생이 흐르는 지금 이 순간’ 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렸다.
이 순간을 날려버리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빠져든다.
이런 환상 만들기에 죄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다만 환상 속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잘못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미 잃어버렸다. 생각 속에서 헤맬 때,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꿈꾸고 있을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현실이다.
우리 삶은 우리한테서 탈출해 나가버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는 일이다.


- 샬럿 조코 백. <가만히 앉다> 중에서. 






—————————

佛告羅睺羅:「汝行詣維摩詰問疾。」
부처님께서는 라후라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도록 하라.”

羅睺羅白佛言:「世尊!我不堪任詣彼問疾。
라후라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에게 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所以者何?憶念昔時,毘耶離諸長者子來詣我所,稽首作禮,問我言:『唯,羅睺羅!汝佛之子,捨轉輪王位,出家為道。其出家者,有何等利?』我即如法為說出家功德之利。
왜냐하면 회상해 보니, 예전에 비야리성의 여러 장자의 아들들이 제가 있는 곳에 와서 저의 발에 정례하고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라후라님! 당신은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시는데, 출가에는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불법의 도리대로 출가의 공덕과 이익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時維摩詰來謂我言:『唯,羅睺羅!不應說出家功德之利。所以者何?無利無功德,是為出家;有為法者,可說有利有功德。夫出家者,為無為法,無為法中,無利無功德。
그때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보세요! 라후라님!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익이나 공덕이라는 관념이 없음이 진정한 출가이기 때문입니다. 유위법이라면 이익이나 공덕이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출가란 무위법으로서, 무위법에는 이익이나 공덕이라는 관념이 없습니다.

羅睺羅!出家者,無彼無此,亦無中間;
라후라님! 출가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으며, 그 중간도 없습니다.

離六十二見,處於涅槃;
62견을 멀리 떠났으며, 열반에 처하는 것이니,

智者所受,聖所行處;
이것은 지혜로운 이가 누리는 것이며, 성인이 행하는 경지이며,

降伏眾魔,度五道,淨五眼,得五力,立五根;
온갖 마군의 괴롭힘을 항복시켰으며, 5도를 뛰어넘어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5안을 청정하게 하였고, 5력을 얻었으며, 5근을 바르게 세웠습니다,

不惱於彼,離眾雜惡;摧諸外道,超越假名;
남을 괴롭히지 않고 온갖 잡다한 악을 떠났으며,
온갖 외도들을 꺾었으며, 가명의 속박을 초월하였으며,

出淤泥,無繫著;無我所,無所受;無擾亂,內懷喜;
진흙수렁을 벗어났고 속박을 벗어났으며, 나의 것이라는 집착이 없고, 감수도 없습니다. 어지러움이 없고 안으로는 늘 희열을 간직하고서,

護彼意,隨禪定,離眾過。
자신의 의념을 보호하며, 선정 경계에 따라 머무르며, 온갖 잘못을 떠나 버립니다.

若能如是,是真出家。』
만약 이상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출가입니다.’

於是維摩詰語諸長者子:『汝等於正法中,宜共出家。所以者何?佛世難值!』
이때에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정법 가운데에서 함께 출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기회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諸長者子言:『居士!我聞佛言,父母不聽,不得出家。』
장자의 아들들은 말하였습니다. ‘거사님! 저희들이 듣기에는 부모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만....’

維摩詰言:『然!汝等便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是即出家,是即具足。』
그러자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대들이 지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곧 진정한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은 것이 됩니다.

爾時三十二長者子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故我不任詣彼問疾。」
그때에 32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 <유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