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의 부적(三字符)、’불원복不遠復’》

2021. 1. 23. 20:09카테고리 없음

<세상에서 가장 효험이 있고 길吉한 부적符籍>


【汝若存心不遠復

有一倭將 以大唐時 日本有大人有道而能文章 好植梅 其遺風至今存焉 本國稱此人 爲北野神立祠于冷泉之上 祀之如聖 願以此人讚贈以一絕 贈之

왜장倭將 하나가 있어, "당唐나라 때에 일본에 대인大人이 있었는데 도道가 있어서 글을 잘하고 매화 심기를 좋아해서 그 유풍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본국에서 이 사람을 칭하기를 북야신北野神이라하며 냉천冷泉 위에 사당을 세워 성인처럼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하면서 이 사람에게 찬讚 한 수를 지어주길 원하므로 이를 주다.


彼何人也汝何人
彼是先人汝後人
汝若存心不遠復
彼賢人亦汝賢人

그는 어떤 사람이며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먼저 사람이요 그대는 뒤에 사람이다.
그대가 만약 존심存心하여 멀지 않아 되돌아 오면,
그도 현인賢人이요 그대도 현인賢人이니라.

- 사명 四溟 松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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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心: 입지立志, 즉 뜻을 새우는 것.
맹자孟子에 기원起原하는 유가儒家의 실천實踐 명제命題. 욕망慾望 등等에 의依해서 본심本心을 해害치는 일 없이 항상恒常 그 본연本然의 상태狀態를 지님.

*不遠復: [周易] <復卦> 初九 효사에,
"不遠復、无祗悔、元吉. 멀지 않아서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길吉함의 으뜸이니라."
(一念回光是丈夫)

* 中和: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
희노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中이라 하고,
이미 일어나서는 모두 中으로 돌아가도록 조절하는것을 和라고 한다.

- 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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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九,不遠復,无祗悔,元吉。

【本義】一陽復生於下,復之主也。祗,抵也。又居事初,失之未遠,能復於善,不抵於悔,大善而占之道也,故其象占如此。

하나의 양陽이 아래에서 다시 났으니, 복괘復卦(䷗)의 주主(주인)이다. ‘지祗’자는 ‘이르다’는 의미이다.
또 일의 초初(처음)에 있어서 잃음이 오래되지 않아 능히 선善으로 돌아오니(돌이키니), 후회에 이르지 않아서 크게 선善하고 길吉한 도道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다.

【程傳】復者,陽反來復也。陽,君子之道,故復為反善之義。初剛陽來復,處卦之初,復之最先者也,是不遠而復也。失而後有復,不失則何復之有。惟失之不遠,而復則不至於悔,大善而吉也。

복괘復卦(䷗)는 양陽이 되돌아와서 회복되는 것이다. 양陽은 군자君子의 도道인 까닭에, 복復은 선善으로 되돌아오는 뜻이다. 초효는 굳센 양이 되돌아와서 괘의 처음에 있으니, 돌아오기를 가장 먼저 한 것이고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다. 잃어버린 뒤에야 돌아옴이 있으니,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돌아오는 것이 있겠는가? 오직 잃어버렸음에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니, 후회하지 않고 크게 선하고 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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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曰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屛山先生病時에 熹以童子로 侍疾이러니 一日에 請問平昔入道次第한대
“병산선생屛山先生(劉子翬)이 병드셨을 때에 내가 동자童子로서 선생을 모시고 병을 간호하였는데 하루는 평소 도道에 들어가는 차례를 물었더니,

先生이 欣然告曰 吾於易에 得入德之門焉호니 所謂不遠復者 乃吾之三字符也니
선생先生은 은연欣然히 말씀하기를 ‘나는 《주역周易》에서 덕德에 들어가는 문을 얻었으니, 이른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불원복不遠復]」는 것이 나의 삼자부三字符(세 글자의 부적)이다.

汝尙勉之하라하시니라
너는 장차 이것을 힘쓸지어다’하셨다.”


- 心經附註 제1권 易 5. 不遠復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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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원복(不遠復)】

유교(儒敎)에서도 수행하는 요목(要目)을 불원근이라, ‘불원복(不遠復)’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불원복. 아니 불(不)자 멀 원(遠)자 회복할 복(復)자. ‘멀지 아니해서 회복을 해라.’ ‘멀지 아니해서 돌아오라.’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허며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어떠헌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 그 생각이 두 생각, 세 생각,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로 점점점점 가지가 멀리 멀리 뻗어나가는데, 멀리 뻗어나가기 전에 바로 자기로 돌아오라 이겁니다.


그것이 유가(儒家)에서 말한 ‘불원복’이라 그 말인데, 우리 참선(參禪)하는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무슨 생각,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또는 좋지 못한 생각이건 무슨 생각이라도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 이렇게 헌다고 허며는, 그 사람은 살생(殺生)이나 도둑질이나 사음(邪淫)이나 망어(妄語)나 술 먹는 그러헌 죄(罪)를 짓지 않고 항시 계율(戒律)을 청정(淸淨)히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율을 잘 지켜서 좋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공부를 가장 충실히 성실히’ 하게 되는 까닭에,

달마(達磨)스님께서도 말씀허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하는, 마음을 관(觀)하는 이 한 법(法)이 온갖 행동을 다 포섭(包攝), 섭, 섭(攝)허게 된다. 온갖 것을 저절로 다 잘 갖추게 된다.” 이런 말씀입니다. ‘이 뭣고?’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그렇지마는, 자꾸 해갈 수록에, 해가다보며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헐랴고 안 해도 저절로 되아지는 경지에 들어서기 시작하며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에 기쁨이 항시 가슴 속에서 향로(香爐)에 향기(香氣) 퍼져 나오듯이 법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에 기쁨이요 선에 기쁨이다.’ 법희선열이라고 말씀을 허셨습니다.


- 송담선사 법문 28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