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生死와 열반涅槃】

2020. 7. 6. 03:54카테고리 없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오늘 조실스님 첫번째 제삿날을 맞이해서 날씨도 몹시 춥고 한데도 불구하시고 사부대중 여러분들께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참여해 주신데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법회때 오늘 생신 법회가 있다고 하는 광고 말씀을 드리지 아니한 것은 조실스님의 생존시부터 조실스님 깊이 신하고 법에 은혜를 입으신 신남 신녀와 그 문도 제자들끼리 조용하게 이날을 추모하고 추모하는 뜻으로 조실스님의 법문 한 말씀을 듣고서 조용히 추모의 날을 갖고자 해서 광고 말씀을 드리지 아니했습니다.
벌써 열반하신지 3년이라고하는 세월이 지나가고 첫번째 제삿날이 되었지만은 생존시와 똑같이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육성 고대로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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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스님의 법문은 생존시와 조끔도 다름없이 우리는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실스님의 모습을 뵐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와, 또 조실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고 오늘 또 말씀하시기를,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불법佛法은 생사生死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다.’

이렇게 말씀마다 생사없는 도리, 생사없는 이치의 말씀을 하셨고 당신도 일생을 통해서 수행을 하신 목적이 생사해탈生死解脫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실스님은 갑인년 섣달 초 이튿날 분명 이 사바娑婆의 인연을 하직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첫째 깨달음을 얻으심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셨고, 생사해탈한 그 도리를 49년을 통해서 팔만 사천의 묘법妙法을 설하셨음에도 불구하시고 80세를 일기一期로 해서 드디어 열반涅槃에 드셨습니다.

​​어째서 불법佛法이 ‘생사없는 이치를 깨닫고 생사없는 도리를 수용해서 영원히 생사해탈 한다’고 하면서 제불조사諸佛祖師가 차례 차례로 다 이 세상을 다 하직하셨겠습니까.
깨달으신 분이나 깨닫지 못하신 분이나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기어코 한 번 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럼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하는 것이 말뿐이냐, 말만 생사해탈이고 실지實際는 다 죽어가고 만다면 불법佛法의 목적目的이 과연 무엇이냐?’
이렇게 질문한 분을 가끔 만납니다.


외도外道들은 생사해탈을, 도道닦는 목적을 이 육신肉身을 가지고 100세, 200세, 300세, 중국의 팽조彭祖라고 하는 사람은 700세까지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육신을 가지고 죽지 아니하고 오래오래 살기를 바래는 그런 신선도神仙道같은 도道도 있지만은 그것은 정법正法이 아니라 외도外道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은 “생사生死속에서 생사없는 도리道理를 깨달라 수용受用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육신을 온갖 방법을 통해서 수명을 연장해 가지고 죽지 않을랴고 그러한 목적으로 도를 닦는다고 하면은 내용을 알아보시기도 전에 그것은 정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셔도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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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내가 멸도滅度에 들었다고 해도,- 멸도滅度라고 하는 것은 열반涅槃이란 말씀이고 알기 쉽게 말하면 돌아가신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의 제자가 아니고 내가 죽지 않았다고 해도 나의 제자가 아니다. 일러라!”,

또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법을 설함이 있다고 해도, 하면은 부처(佛)를 비방誹謗하는 사람이고, 설한 바 법이 없다고 하면은 경經을 비방誹謗한 것이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부처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은 부처님은, -벌써 부처는 깨달음을 성취한 분을 부처라고 하는 것인데- 부처님은 성불成佛을 못하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그러나 분명 부처님은 80세를 일기一期로 해서 열반상涅槃相, 결국 이 사바세계를 하직하셨는데 중생 눈으로 볼 때에, 돌아가시지 아니했다고 하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법을 설한 바가 있다고 하면은 부처를 비방誹謗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說하셨으되 한 법法도 설하신 바가 없기 때문에 법을 설하신 바가 있다고 하면은 그건 부처님을 비방한 것입니다.
법을 설한바가 없다고 하면은 분명 49년에 걸쳐서 장장 팔만사천의 묘법을 설說하셨는데 그건 경經을 비방誹謗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 소견으로서는 ‘설한바가 있다, 없다.’ 또는 부처님이 ‘열반하셨다, 열반하시지 아니했다.’ 중생의 사리상량邪理商量으로서는 100년을 두고 밤 잠을 안자고 따져보았자 해결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을 통해서 결론 내려질 문제가 아니고 오직 활구참선活句叅禪에 의해서 만이 사리상량을 사용하지 아니한 일체중생의 소견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활구참선, 조사선祖師禪을 통해서 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실스님께서 일 평생을 이 법을 위해서 수행을 하셨고, 수행하셔서 깨달으심을 얻으신 뒤 77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오직 이 한 법을 위해서 설하셨습니다.
생사없는 속에, ​‘생사속에서 생사없는 도리’ 를 깨닫고 ‘생사속에서 생사없는 도리’ 를 수용을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러면 생사生死없는 도리道理냐!

아까 조실스님께서 최초에 읊으신 게송,
대바람, 대나무 숲에 바람이 지내가고, 젓대 소리가 울려오는, 무술년 동짓달 열엿세날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리시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셔 가지고 77년을 사시다가 갑인년 섣달 초이튿날 열반에 드신 그 동안에 ​​​​보고, 듣고, 배고프면 잡숫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전체全體가 바로 그것이 생산生死데, 생로병산生老病死데, 그 생노병사를 여의지 아니하고 ​생노병사 고대로가 생사生死없는 열반涅槃의 경지境地인 것입니다.

이것은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사이가 백지 한장 차이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생사를 조금이라도 띄어버리고 멀리하고서 열반을 증득 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영원히 열반의 경지를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인 것입니다.

중생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라 하면은 생사에 대해서 알음알이를 내고, 열반이라 하면 열반에 대해서 알음알이 내.
그래서 그 이름 따라서 이름을 보자, 모냥을 보자 마자, 이름을 듣자 마자 바로 중생의 알음알이가 물결치기 때문에 점점 생사의 깊은 물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그 당체當體가 바로 남이 없는 도리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체當體를 여의고 찾는데에서 우리는 바로 생사없는 열반涅槃의 경지境地 속에 있으면서 열반의 경지를 모르고 열반 속에서 스스로 생사의 괴로움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앉아서 물을 찾기 때문에 그 사람은 노상 목마른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조실스님의 생신, 추모제를 맞이해서 평소에 조실스님을 친견하신분은 말할것도 없고 친견하시지는 못했지만은 조실스님의 육성을 생존시나 다름없이 언제나 들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주 자주 조실스님의 법문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듣고 명심해서 기어코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금생今生에 이 몸으로 체달體達을 해서 영원한 안락安樂을 누리고 나아가서 모든 중생을 남음없이 제도 할 때까지 우리의 수행이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돈독해지기를 모두 다같이 깊이 다짐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 송담선사 법문 59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