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3. 12:25ㆍ카테고리 없음
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헌데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멱시무물우무종覓時無物又無蹤허되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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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
이 구슬,
반야般若의 신령스러운 구슬이 묘妙해서 칙량測量을 할 수가 없어. 그런데 이 반야의 영주靈珠는 크다고 헐 수도 없고, 작다고 헐 수도 없어.
크기로 말하면은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다 싸고도 남고, 작다고 하면은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을 만큼 작을 수도 있는 것이여.
이 구슬은 어디서 나왔냐?
법성해法性海 가운데에서 얻은 거여.
법성해는,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무한대로 끝이 없는 대법성大法性의 바다에서 친親히 얻은 것이다 그말이여.
금생에 그 반야영주般若靈珠를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아날 때, 같이 이 몸뚱이 속에 그 반야영주般若靈珠가 따라왔어. 그러면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以前에는 없었느냐 하면은,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 반야영주는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꽉 차있는 거여.
무량억겁無量億劫 전 태어난 때가 없어.
생겨난 때가 없이 그 반야영주는 온 법성法性 바다 가운데 가뜩 차서 빛나고 있는 것이거든.
그런데 당장 이 몸띵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띵이 속에 그 반야영주가 들어있다 그말이여.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다.
태양이 아무리 밝다 해도 낮에만 빛나고 밤에는 태양빛을 볼 수가 없지마는, 이 반야영주는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항상 빛나고 있다 그말이여.
멱시무물우무종覓時無物又無蹤이다.
그런데 그 반야영주, 어떻게 신통이 자재自在하고 묘妙하던지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어.
태양빛이 아무리 밝아도 저 땅속 깊이 들어가면은 태양빛이 거기에는 미치지를 못하고 무엇이 가로막으면 거기에는 비추지를 못하는데, 이 반야영주는 시간과 공간에도 걸리지 않고 언제나 빛나고 있건마는, 찾아보면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어. 또 자최도 없다 그말이여.
그런데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항상 따라댕겨.
그래가지고 항상 요요명명了了明明하다 그말이여.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무슨 소리가 나면 들을 줄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헐 줄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알고.
신통묘용神通妙用이 자유자재自由自在허다 그말이여.
그러헌 그놈을 우리가 낱낱이 다 가지고 있거든.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지 못하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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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조실 스님 법문은 조실 스님께서 73세, 열반허시기 77세에 열반하셨는데 4년 전에, 열반허시기 4년 전 73세 때 설하신 법문인데 그 법문 가운데에,
“안 헐라야 안 헐 수가 없다. 의심을 안 할라야 안 헐 수 없고, 참선을 안 할래야 안 헐 수가 없고.
'안 된다’ 소리가 무슨 말이냐?”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 참선參禪이라고 허는 그 본질本質을 잘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신 것이거든.
그놈이 어디로 깊이 깊이 숨어있는 것도 아니고, 먼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 공간에 가로맥힌 것도 아니여.
우리가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낄 때,
배고프고 아프고 육체적肉體的인 모든 감각과,
정신적精神的으로 근심 걱정, 슬픔과 괴로움, 외로움, 원망스러움, 두려운 생각, 미운 생각, 일체 정신작용 하는 것이,
바로 이 신령스러운 구슬의... 구슬로부터 그러한 작용作用이 나온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러한 작용作用이 일어날 때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우리는 그놈을 찾어야 헌다 그말이여.
우리가 고양이를 찾을라면 고양이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고, 더러운 오물을 치울라면은 더러운 냄새나는 곳을 찾아가면 거기에 우리가 치워야 할 것들이, 쓰레기가 있다 그말이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신령스러운 구슬, 우리 참나를 찾을 수 있는 ‘곳’이요, 바로 그 ‘때’다 그말이여.
잊어버리기가 더 어려워. 안 하기가 더 어렵다 그말이여.
완전히 죽어서 의식이 없어진 상태라면 모르지만, 살아서 숨쉬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허는 방법을 잘 몰라서 못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방법만을 바로 안다면 이 공부는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여.
하나도 어려웁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
누워서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속이 상할 때도 하고, 배고플 때도 하고, 아플 때도 하고, 근심 걱정 있을 때도 허라, ‘이뭣고?’ 하라 그말이여.
속이 상할 때 계속 속상하는 일만 이리 생각 저리 생각 해봤자 그 속상하는 것이 점점 커질지언정 해결이 안 되거든.
속상할 때 바로 ‘이뭣고?’ 해 보라 그말이여.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 쉬면서 ‘이뭣고?’
주먹탱이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스르르르 가라앉거든.
근심 걱정을 없애는 방법도 이것밖에는 없고, 슬픔과 외로움을 없... 없애는 방법도 이것밲에는 없고.
처음에는 별로 잘된 것 같지 않고 별 재미도 없지만 자꾸 허다 보면, 헐랴고 안 해도 저절로 되아.
‘이뭣고?’ 한 번에 시커먼 가슴속에 먹구름이 흩어지게 된다 그말이여.
아무리 달이 밝아도 먹구름이 끼어 가지고 있으면은 껌껌한데 구름만 치워버리면 환히 밝아지듯이, 우리는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의 먹구름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먹구름을 찰나刹那 간에 날려 버리는 방법이 바로 ‘이뭣고?’다 그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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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 생로병사, 빈부귀천, 일체시비一切是非와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서도 오직 이 ‘이뭣고?’ 하나라... 이것으로써만이 거기에서 나의 중심中心을 잡아가고, 나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지혜로써 자비로써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이 길 밖에는 없는 것이여.
병病을 앓고 있을 때도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사람이 코앞에서 곧 죽어갈 때도, 자기가 죽게 되었을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야, 그러한 굳은 신념信念이 있다면 ‘공부가 안 된다, 의심疑心이 안 난다’ 그러헌 걱정을 헐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따라다니거든.
우리의 주인공主人公을 여의고는 우리는 단 1분 1초도 살 수가 없는 것이고, 이 살고 있다고 하는 이 자체가 이 신령스러운 이 ‘한 물건의 뿌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말이여.
- 송담선사 법문 53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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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此珠】
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
주야광음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
멱사무물우무종覓時無物又無蹤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
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한데
주야광음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로구나.
우리에게는 이 몸, 이 몸을 부모한테 의탁依托해서 이 몸띠이를 타고 났는데, 이 몸띠이 속에는 해보다도 더 밝고 달 보다도 더 밝은 그러한 묘-한 보배 구슬이 들어있다 그말이여.
그러나 그 보배 구슬은 해부解剖를 해도 오장육부 속에 찾어볼 수는 없어. 이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가 없으나 그 보배 구슬은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설사 이 몸이 죽어서 썩어 문드러 진다 해도 이 몸띵이 속에 들어있던 그 보배 구슬은 썩는 법도 없고, 이 몸띵이가 죽은 뒤에도 그 보배 구슬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여.
그러한 묘한 보배 구슬은 크기로는 우주 보다도 더 큰데 그래서 클 것도 없고, 바늘로 찌를랴고 해도 찌를 수가 없을 만큼 더 작어. 보일 수가 없어. 원자 현미경을 놓고 보아도 보이지를 않기 때문에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여.
밤과 낮이 없이 그 광명은 온 우주 법계를 환-히 다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배 구슬은,
멱시무물覓時無物이요 우무종又無蹤이여.
아무리 찾아봐도 한 물견도 없어.
아무리 찾어봐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것을 알랴고 해도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자최도 없다 그말이여.
형상도 없고 자최도 없어.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다.
그런데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고 앉을 때는 같이 앉고 누워도 같이 눕고 일을 해도 같이 일허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항-상 요요了了하고 명명明明하다 그말이여.
그게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고 생각해도 알 수도 없는 그러한 건데,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볼 수도 있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들을 수도 있고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을 수가 있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도 볼 줄도 안다 그말이여.
부르면 대답 할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정든 사람이 죽으면 슬퍼할 줄도 알고 그러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묘한 보배 구슬이더라.
- 송담선사 법문 복전암 33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