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8. 09:13ㆍ카테고리 없음
<현성공안現成公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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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를 불법佛法의 입장에서 볼 때 곧 미혹과 깨달음이 있고 수행도 있으며, 생生과 사死가 있고, 부처와 중생이 있다. ‘모든 존재와 함께 나가 없을 때’ 미혹과 깨달음도 없고,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생生과 멸滅도 없다.
불도佛道도 본래 분별分別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생멸生滅이 있고, 미혹(迷)과 깨달음(悟)이 있으며, 중생과 부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꽃은 애석하게 여겨도 떨어지고 잡초는 꺼리어 싫어해도 무성하다.
자기自己의 입장에서 만법萬法을 닦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하고, 만법萬法의 입장에서 자기自己를 닦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어리석음을 크게 깨치면 부처가 되고, 깨달음에 크게 미혹하면 중생이 된다.
또 깨달음 상上에 깨달음을 얻는 이가 있는가하면, 어리석은 가운데 더욱 어리석은 자가 있다.
부처가 확실히 부처가 되면 ‘내가 부처가 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깨달은 부처가 되며, 부처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물질을 보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소리를 들으면 친親히 알게 되겠지만, 거울이 그림자를 머금은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즉 물과 달과 같은 것은 아니다. 한편을 깨달을 때 다른 한편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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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佛道를 닦는다는 것은 자신을 닦는 것이다.
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다.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만법을 증득하는 것이다.
만법을 증득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 및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까지도 탈락脫落시키는 것이다.
깨달음의 흔적을 쉬어버리고, 쉬어버린 깨달음의 흔적을 길이 벗어난다.
사람이 처음으로 법法을 구求할 때는 아득히 멀리 법의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다. 이미 법이 자기 자신에게 전해졌을 때는 바로 본분인本分人이 된다.
사람이 배를 타고 갈 때, 눈을 돌려 해안海岸을 보면 해안이 움직인다고 착각錯覺하게 된다. 눈이 직접 배를 보게 되면 배가 앞으로 가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이 혼란한 상태에서 만법萬法을 분별分別하고자 하면 자신의 마음과 성품이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錯覺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만법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도리가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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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나무는 재가 된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서 나무로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재는 나중이고, 나무는 먼저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나무는 나무의 위치에서 선후가 있다. 전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전후는 단절된다. 재는 재로서의 위치가 있으며, 거기에도 뒤가 있고 앞이 있다.
그 나무가 재로 된 후에는 다시 나무로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은 뒤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생生이 사死로 된다고 하지 않는 것은 불법佛法에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사死가 생生이 되지 않는 것은 법륜法輪에 정해진 이치이다. 그러므로 이를 불멸不滅이라 한다.
생生도 한 때의 모습이며, 사死도 한 때의 모습이다.
예를 들면 겨울과 봄과 같은 것이다. 겨울이 봄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봄이 여름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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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마치 물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달은 물에 젖지 않고, 물도 부서지지 않는다. 달이 아무리 넓고 큰 빛일지라도 적은 물에도 비치며, 달과 하늘은 풀잎의 이슬에도 비치며 한 방울의 물에도 비친다.
깨달음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은 달이 물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람이 깨달음을 방해하지 않는 것은 한 방울의 이슬이 하늘에 뜬 달을 방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물이 깊을수록 하늘의 달은 높이 뜬다. 깨달음의 시절이 길고 짧은 것은 물이 많고 적음이나 하늘의 달이 넓고 좁은 것과 같은 이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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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에 법法이 아직 충만하지 않을 때에는 이미 법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법이 몸과 마음에 충족되어 있으면 한편으로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예컨대, 배를 타고 산이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 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다만 둥글게만 보인다. 조금도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다는 둥글지도 않고 네모나지도 않으며, 그 밖의 바다의 덕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궁전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배구슬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보는 이의 한계 내에서 일시적으로 둥글게 보일 뿐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도 마찬가지이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에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수행안목修行眼目의 힘이 미친 곳만을 보고 아는 것이다.
만법萬法의 가풍家風을 잘 알려면 모나거나 둥글게 보이는 외에, 다른 바다의 덕(海德)과 산의 덕(山德)이 존재하는 사방四方의 세계世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주변에만 이러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발밑에도, 한 방울의 물에도 이와 같은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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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가지만 그 물은 끝이 없고, 새가 하늘을 날지만 하늘도 끝이 없다.
그렇지만 물고기도 새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물이나 하늘을 떠난 적이 없다. 다만 많이 필요하면 많이 쓰고 적게 필요하면 적게 쓴다.
이와 같이 사물마다 궁극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곳곳마다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다 하더라도, 만약 새가 하늘을 떠나면 바로 죽으며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곧 죽고 만다.
물고기는 물이 생명임을 알아야 하고, 새는 허공이 생명임을 알아야 한다. 허공은 새로서 생명을 삼고, 물은 물고기를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 생명으로서 새도 되고, 또한 생명으로서 물고기도 된다.
이 외에 더욱 진보進步가 있어야 한다. 수행과 깨달음이 있으며, 수명이 있는 것은 모두 이와 같다.
그런데 물을 다 알고, 하늘을 다 알고 난 연후然後에 물에서 헤엄치고 하늘을 날겠다고 하는 새나 물고기가 있다고 한다면, 물에서도 하늘에서도 갈 길을 얻지 못하고 갈 곳을 얻지 못한다.
‘이곳’을 얻으면 자기의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뒤따라 현성공안現成公案한다. ‘이 길’을 얻으면 이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뒤따라 현성공안現成公案이 된다.
‘이 길’과 ‘이곳’은 큰 것도 아니며 작은 것도 아니고, 자기도 아니며 남도 아니다. 예로부터 있는 것도 아니요, 지금 나타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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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만약 사람이 불도佛道를 닦고 깨달음에 있어서, 한 법法을 얻으면 한 법法에 통通하고, 한 가지 행行을 만나면 한 가지 행行을 닦게 된다.
여기에 길이 있으며, 통달通達하게 되면 ‘아는 바를 여의게 된다.’ 이 아는 것이 불법의 궁극과 함께 생겨나, 함께 있기 때문이다.
터득한 것이 반드시 자기의 지견知見으로 되어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알아서는 안 된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신속하게 현성現成한다 하더라도, 묘유妙有는 반드시 현성現成하는 것만은 아니며, 견성見成은 이렇다고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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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산의 보철선사가 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에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성품은 항상 상주常住해있어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째서 화상은 부채질을 하고 있습니까?”
보철선사가 답하였다.
“그대는 단지 바람의 성품이 상주해 있는 것만 알고, 아직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도리는 모르느냐?”
스님이 말하였다.
“어디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이 때 보철선사는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스님이 예배하였다.
불법佛法의 체험적 깨달음과 바른 전법轉法의 활로活路는 이와 같다.
바람이 상주하기에 부채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던가, 부채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바람이 분다고 말하는 것은, 상주도 모르고 바람의 성품도 모르는 것이 된다.
바람의 성품이 상주常住하기에 불가佛家의 바람은 대지大地를 황금으로 현성現成시키며, 큰 강江을 제호醍醐로 숙성시킨다.
- 도원선사.
* 이것은 천복 원년(1233) 가을에 써서 진서鎭西의 속가제자인 양광수에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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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가지만 그 물은 끝이 없고, 새가 하늘을 날지만 하늘도 끝이 없다.
그렇지만 물고기도 새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물이나 하늘을 떠난 적이 없다. 다만 많이 필요하면 많이 쓰고 적게 필요하면 적게 쓴다.
이와 같이 사물마다 궁극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곳곳마다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다 하더라도, 만약 새가 하늘을 떠나면 바로 죽으며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곧 죽고 만다.
물고기는 물이 생명임을 알아야 하고, 새는 허공이 생명임을 알아야 한다. 허공은 새로서 생명을 삼고, 물은 물고기를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 생명으로서 새도 되고, 또한 생명으로서 물고기도 된다.
이 외에 더욱 진보進步가 있어야 한다. 수행과 깨달음이 있으며, 수명이 있는 것은 모두 이와 같다.
그런데 물을 다 알고, 하늘을 다 알고 난 연후然後에 물에서 헤엄치고 하늘을 날겠다고 하는 새나 물고기가 있다고 한다면, 물에서도 하늘에서도 갈 길을 얻지 못하고 갈 곳을 얻지 못한다.
‘이곳’을 얻으면 자기의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뒤따라 현성공안現成公案한다. ‘이 길’을 얻으면 이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뒤따라 현성공안現成公案이 된다.
‘이 길’과 ‘이곳’은 큰 것도 아니며 작은 것도 아니고, 자기도 아니며 남도 아니다. 예로부터 있는 것도 아니요, 지금 나타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