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前生夢(전생의 꿈)을 짓지 말아라.】

2019. 12. 29. 04:27카테고리 없음


【今時, 前生夢(전생의 꿈)을 짓지 말아라.】

 

참선최이위參禪最易爲이요
지요진금시只要盡今時니라.

부작신전몽不作身前夢인디
나생절외지那生節外枝리오.


 

참선參禪은 최이위最易爲이요,
지요진금시只要盡今時다.
참선叅禪은 가장 하기가 쉬운것이여.
다맛 금시今時, 지끔.
바로 지끔只今을, 금시今時를 다함을 요要하는 것이다.


방금 조실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그 활구참선活句叅禪, 최상승선最上乘禪 허는 법法을 아주 고구정녕하게 -상근上根이 허는 참선법叅禪法, 하근下根이 허는 참선법에 대해서- 아주 간절하게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다시 이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거듭해서 더 첨가헐 아무런 말씀도 없습니다.
너무, 오늘 법문法門은 그, 이 음성音聲이 분명하고 또록또록해서 한 분도 빠짐 없이 잘 법문을 들으셨을(줄) 생각을 합니다.

참선叅禪을 항상 어렵게 생각하고, 특별特別한 사람만이 헐 수 있고,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고, 특별한 어떠헌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지, 아무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없다, 장소가 없으면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것으로 그리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참선叅禅은,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하고, 밥 먹으면서도 하고, 똥 누면서도 하고, 지혜智慧있는 사람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하고, 남녀 노소가 없습니다.

(지요진금시只要盡今時니라.)

다못 ‘있는 그 자리에서’ 금시今時를 다해.
금시今時, 지끔只今 바로 그 찰라刹那를 다한다.
찰라를 내놓고 다시 다른 때와 다른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밥먹을 때 ‘이 뭣꼬?’, 옷입을 때 ‘이 뭣꼬?’
똥눌 때 ‘이 뭣꼬?’, 걸어갈 때 ‘이 뭣꼬?’
차를탈 때 ‘이 뭣꼬?’, 속이 상할 때 ‘이 뭣꼬?’
슬플 때 ‘이 뭣꼬?’, 몸이 아플 때 ‘이 뭣꼬?’
괴로울 때 ‘이 뭣꼬?’, 심심할 때 ‘이 뭣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바로 그 찰라刹那 찰라를 놓치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 즉即해서 ‘이 뭣꼬?’

화두話頭가 잘 들리고 안들리고 헌 것도 따질것도 없고,
화두가 순일하거나 순일 안한것도 따지지 말고,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헌 것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때와 장소 그 찰라刹那 찰라 한 생각 한생각에 즉即해서 화두話頭만 들면, 그것을 누가 허기가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바로 지끔只今, 금시今時라고 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지끔’ 이라고하는 시간을 우리는 딱 지적指的을 헐 수가 없습니다. ‘지끔’ 이라고하면 이미 그 찰라가 지나서 벌써 과거過去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只今’ 이라고 하는 시간도 우리는 딱 지적指的을 할 수가 없지만, 그 지적 할 수도 없는 그 찰라刹那를 즉即해 가지고 ‘이 뭣꼬?’
그 뿐인것입니다.

 

부작신전몽不作身前夢이여.
이몸 이전의 꿈을 짓지 말아라.
전생前生, 전생에, 전생에 살았던, 전생에 자기가 꾸었던 꿈을 금생今生에 와서 꿀 필요가 없다 그말이거든.

여기서 신전身前이라 하는 것은, 지금으로, 지금이라고 할 때에 이미 일초가 지났는데, 그 일초 이전以前의 모든 시간 모든 상황은 그것이 전생前生인 것입니다.

요 몸띵이를 부모父母한테 받아나기, 받아난 때부터 금생今生이라고 보통 생각을 하지만, 이 참선叅禪 허는 사람은 이 몸띵이 받아나기 이전도 전생前生이려니와, 몸띵이 받아난 이후以後도 벌써 지끔이라고 한 이 찰라 이전刹那以前까지 전부가 다 전생前生이여.
무량억겁無量億劫으로부터 ‘지금只今’ 이라고 하는 이 찰라刹那까지가 전부가 전생前生이요 전부가 그것이 이 전생의 꿈(前生夢)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꿈을 지끔 또 지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또 미운 사람도 만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만나고 마음에 싫은 사람도 만나고, 내 마음에 순順한 일도 만나고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도 만나는데, 그... 그런 것들이 전부가 다 전생사前生事인 것입니다.

중생衆生은 항상 지나간 과거전생過去前生 일에 끄달리고 그 놈에 얽매어 가지고, 지끔이라고 허는 이 찰라刹那에 충실忠實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언짢했던 일, 밤 낮 그런 것이 속에 꽈악 얽혀가지고 그걸가지고 거기에 벗어나지를 못하고서 사람을 미워하고 감정을 품고 그래가지고 항상 그 원결이 맺혀 가지고 미워하고, 그 원결怨結이 만날 때마다 더 얽히고 더 커져 가지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衆生이 해탈解脫하지 못한, 영원히 괴로움 속에 쳐백힐 수밖에 없는 그 근원根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叅禪허는 사람은 지나간 과거過去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나생절외지那生節外枝냐.
어찌 마디 밖에 가지를 낼것인가?
앞으로도, 지나간 과거過去에 얽매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미래未來에 대해서도 무슨 쓸데없는 가지를 갖다가 뼏쳐 나갈 것이냐?

미래未來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미랫 일을 땡겨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지나간 과거,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새기면서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몸부림을 치는것입니다.

이 참선叅禪허는 사람은 이미 과거過去도 지나가 버렸고 그러니 과거에 얽매일것도 없고,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아니했으니 구태여 땡겨서 근심헐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지금인 것입니다.
이 언제나 지금이여.
일생一生동안 오직 ‘지금只今’ 밖에는 없는거여.”

생각 생각이 지금只今이지,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어.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참다운, 현실現實에 충실忠實한 수행자修行者라 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지끔只今’ 인 줄 알고 지끔只今을 충실忠實히 공부하는 사람이라야,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 이렇게 지끔에 충실헐 줄 모르는 사람은 일평생一平生을 살아도 단 일분一分 동안도 제대로 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過去에 꿈을 더듬고 몸부림치고, 아직 돌아오지않는 미래未來를 땡겨서 그놈에 스스로 얽혀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서 현실現實에 충실忠實을 못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충실허지 못한 사람은,
지나간 과거도 헛되이 지냈으려니와, 앞으로도 영겁永劫을 두고 헛되이 세월歲月을 보낼 사람인 것입니다.

 

아까 조실祖室스님께서,
“행주좌와行住坐卧 어묵동정語默動静에 언제 어디서라도 ‘이 뭐꼬?’ 이렇게 허라”고 말씀하신 그 요지要旨가, 바로 지금只今, ‘그 지금이라고 하는 그 찰라찰라刹那刹那’ 의 그 지금只今.

앉았거나, 섰거나, 누웠거나, 행하거나, 말을 할 때나, 말을 안할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뭐꼬?’

‘지금 이 뭐꼬한 바로 이놈이 뭐꼬?’
‘이 뭐꼬?’
이렇게 해나갈 따름인것입니다.

이렇게 해나간 사람은 그것이 바로 상근上根의 참선叅禪이요 최상승선最上乘禪인 것입니다.

과거過去에 얽매이고 미래未來에 얽매이고, 자기의 근기根機가 남자다 여자다 늙었다 무식하다, 별별別別 그런 쓸데없는 그 번뇌심煩惱心을 내 가지고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하고, 그래 가지고 그 허는 동안에 이미 수없이 많은 ‘지금’ 이라고 하는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뒷만을 바래본다”

바로 지금 딱 챙겨야 될텐데, 뒤를 바라봐.
나중으로 미룬다이거거든.
“다음에 허리라. 이일 끝내놓고 하리라.
아들딸 여워놓고 하리라.
그럭저럭 이 일이나 마쳐놓고, 이 문제 뭐 해결지어 놓고 차분하니 허리라.”

밤낮 지금은 바쁘고 이유를 붙여서 핑계를 대고 그래 가지고 뒤에 할려고 미루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태어난 때가 없이, 없는 무량겁無量劫 이전以前으로부터 금생今生에 까지 완, 온것입니다.

금생今生에도 정신精神을 차리지 못하고 또 뒤로 미루면 다시 언제 이 정진精進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선叅禪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허는 공부가 아니고, 무엇을 많, 배와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無 조건條件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요,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조끔도 자기가 도道를 이루고 못 이루고 헌 것에 대한 의심을 놓아 버려야 하는것입니다.
탁- 믿는 것입니다.
자기, ‘자기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여지없이 믿어버려.

믿고서,
‘여태까지 왜 본래 부처이면서 오늘날까지 미迷한 상태에서 이렇게 윤회輪廻를 해 왔는가?’
그점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을 내야 하는 것이다.
대 분심을 내서 거기서 화두話頭를 들고 화두를 타가지고 그 자기의 그 본참화두本叅話頭 ‘이 뭐꼬?’ 그 놈을 갖다가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앞도 뒤도 생각지 말고 당장 지끔 ‘이 뭐꼬?’ 이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뭐꼬?’ 해도 별별 생각이 퍼 일어나고 망상妄想과 번뇌煩惱가 퍼 일어나지만, 그 일어나는 망상 그냥 놔둬 버려.
놔둬 버리고 자꾸 나는 ‘이 뭐꼬?’
‘이 뭣꼬?’ 챙기는 것이 망상妄想을 물리치는 방법方法입니다.

망상妄想은, 아무리 그놈을 이를 악물고 내쫓을라고 헌다고 해서 쫓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쫓을라고 허며는 더 큰 망상이 먼저 앞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상은 내쫓을라고 한다고 해서 가는것이 아니고,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내가 ‘이 뭐꼬?’ 만 딱 챙기면 망상은 자췌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또 새로운 망상이 일어나면, 또 그놈 놔 둬 뻐리고 나는 ‘이 뭐꼬?’
‘이뭐꼬?’ 해도 또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놈은 그냥 놔 두고 또 ‘이 뭐꼬?’
그때 그때 ‘이 뭐꼬?’ 를 들어서 딱! 의단疑團을 일으키면 망상妄想은 자췌가 없어지는 것이여.

그래서 이 즉하即下에 무심無心이거덩.
즉하即下, 바로 지금只今, 그 자리에서 당장 마음 길이 끊어져버린거여.

무심無心이라 하는 것은, 마음길이 끊어져버리는 거여.
마음길을 끊을랴고 허며는 점점 퍼 일어나고, 화두話頭를 깨끗하게 딱 거각擧却을 해버리면 그 찰라刹那에 마음길이 끊어져 버린 것이여.

마음길이 끊어져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이 독로해야 번뇌망상煩惱妄想이 거기에 발 붙이지를 못하고, 일체一切 사량분별思量分別과 사견邪見이 거기에는 붙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叅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는거, 이론적으로 의리義理로 따져 들어가는거, 이것이 참선에 있어서 제일 해害로운 것입니다.

따져서, 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리義理로 따져가지고 그럴싸한 어떤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중생衆生이 따져서 결론을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은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이요 사견邪見인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똥 묻은 손으로 만적 거리면 음식은 못먹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금강경金剛經>도, 금강경에 있는 주옥珠玉같은 참 법문法門도 중생이 중생衆生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놓면 그 훌륭한 법문이 못된 사견邪見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맛있는 좋은 음식도, 똥이 묻었거나 무서운 병균이 묻은 손으로 짓 주물러 놓면 그 음식이 전부다 변질이 되는것이고, 그 음식을 먹으면 먹는 사람이 모두 다 식중독이 걸려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심衆生心으로 따져갖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조건하고 ‘이 뭐꼬?’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없는것입니다.

 

여러분이 <금강경>을 독송讀誦을 하고, 그놈을 어려운 한문을 그 해석하는 책을 보고 해석解釋을 듣고, 또 그 해설 헌 강의講義를 가서 부지런히 듣고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줄 읽고 외우고 해석할줄 안다고 해서 <금강경>의 참뜻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그런식해서 모든 경전을 다 알았다 하더라도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그 경전經典은 ‘마음길 끊어져서 깨달음에 이르라’ 고 설說하신 것이지, 많이 읽고 외우고 지식知識을 쌓으라고 설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경전經典은 분명 소중한 것이고, 부처님 설하신 모든 경전은 중생衆生을 위한 없어서는 안 될 참 주옥珠玉같은 보물인 것이 틀림이 없지만, 사견邪見으로 그것을 깨달아 분석을 해서 사견으로 천착穿鑿을 하면, 그 주옥같은 법문法門이 전부 마설魔說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헌 이치를 믿고 이해 하신다면, 여러분은 즉하即下에 무심無心이 되도록, ‘이 뭐꼬?’ 이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해야지, ‘아하! 이러헌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들어가면 벌써 사견邪見에 떨어져 들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견邪見에 빠져 들어가지고 정각正覺을 이루는 법法은 없습니다.차라리 모래를 져서 밥을 맨들을 지언정, 삿된 소견으로 깨달음에 이르른 법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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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이렇게 사부대중이 이렇게 많이 모이셨으니, 조실스님의 녹음법문을 충분히 잘 들으셨고, 또 산승의 말을 잘 들으셨으면, 같이 입선入禪을 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죽비 주세요. ㅇㅇㅇ

모두다 편안한 자세로 반 가부좌를하고 앉으십시오.
편안하게.
그리고 허리를 주욱 펴시고, 고개를 앞으로 숙이지도 말고 뒤로 잿히지도 말고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머리와 몸띵이가 수직이 되도록 단정하게 앉으시되 어깨게 힘을 다 빼시고, 그리고 눈을 감지 말고 눈을 평상平常으로 뜨십시오.

눈을 너무 뚝 부릎뜨면, 눈에 힘이들어가면 산란심散難心이 일어나고 또 기운이 위로 올라가니까, 눈을 뚝 부릅 떠도 안되고 그렇다고 해서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좀 고요하고 편안하고 마음이 안정이 된것 같지만, 눈을 감고하면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무기無記에 떨어지기가 쉬운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평상平常으로 뜨십시오.

그리고 아금니는 지긋이 따악 우 아래 이금니를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십시오.

죽비 치세요. ㅇㅇㅇ

십분간 입선入禪을 했습니다.
천여명 이 사부대중이 오늘 이 한자리에서 십분간을 같이 입선을 했습니다.

이 십분간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가 반 가부좌를 하고 또는 서서 동시同時에 입선入禪을 한 이 공덕功德은 영원永遠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겁永劫을 두고 우리는 다시 또 불법佛法 문중門中에서 또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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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으로써 이웃을 삼으라.】

 

참선參禪은 불고신不顧身하고
즉여사위련直與死爲隣이니라.

촌념공삼재寸念空三際하고
쌍모절육친雙眸絶六親이로다.

 

 

참선叅禪은 불고신不顧身이요.
참선은 내 몸띵이를 돌아보지 않는다.
내 몸띵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즉(직)여사위련直與死爲隣이여.
바로 죽음으로써 이웃을 삼으라.
이 몸띵이가 늙고 젊은것도 따지지 말고,
건강하고 병든것도 따지지 말고,
남과 여자고 따지지 말고, 부귀도 따지지 말고,

바로 죽음이 코 앞에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라.
죽음으로써 이웃을 삼으라.”

그렇게, 그러헌 마음가짐으로 화두를 들면,

촌념공삼재寸念空三際여.
일념에, ‘마디 생각’ 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이거든.
일념一念에 삼재三際가 공空해 뻐려.
과거 현재 미래 이 삼세三世가 끊어져 버린다 그말이여.

쌍모雙眸에 절육친絶六親이다.
두 눈에는 육친六親이 끊어져 버린다.
육친이라하며는 부모 형제 처자를 육친이라고도 하고, 친가 외가 고모가 이런걸 또 이 육친이라고도 허고 여러 가지 해설이 해설할 수가 있지만,
여기서는 이 육도세계, 공간空間, 일체一切 육도세계六道世界가 거기서 끊어, 끊어져 버린다 그거거든.

한 생각에, 한 생각 ‘이 뭐꼬?’ 허고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드는 데에서 삼세三世, 과거 현재 삼세三世가 거기서 무너져 버리고, 천당天堂 수라修羅 인간人間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이 육도六道가 거기서 무너져 버린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일분 동안 ‘이 뭐꼬?’ 를 하면 일분 동안 부처님이고,
십분 동안 ‘이 뭐꼬?’ 를 하면 십분 동안 부처님이고,
하룻 동안 참선을 하면 하룻 동안 부처님이고,
일년 동안 참선을 하면 일년 동안 부처님이요,
평생 동안 참선을 하면 평생 평생 부처님이요,
영원永遠히 참선叅禪허면 영원永遠히 부처님이거든.

자기가 부처님이 되아서 불국세佛國世에서 사느냐, 생사윤회生死輪廻에 떨어져서, 지옥, 지옥地獄에 떨어져서, 축생畜生에 떨어져서,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져서 고통苦痛을 받느냐 헌 것은, 자기 자신이 한 생각을 화話頭두를 드느냐, 그렇지 않으며는 화두를 안 들고 생각을 방자放恣히 해서 번뇌망상煩惱妄想과 명예와 권리와 이끗 이런 데에 끌려 나가느냐, 한 생각에 달려 있는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法會가 끝나면, 오계五戒를 받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불명佛名을 받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상으로써 오늘 설교說敎를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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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사효잉환석光陰乍曉仍還夕헌디
초목자춘즉도추草木纔春即到秋로구나.

재세약무호말선在世若無毫末善하면
사장하물답명후死將何物答冥侯오.

 

 

광음사효잉환석光陰乍曉仍還夕이다.
광음光陰은, 시간은 새벽이 되자마자, ‘아, 오늘 날이 밝았구나’ 허면 벌써 어느새 저녁이 되고 말아버려.

초목자춘즉도추草木纔春卽到秋여.
초목草木은, ‘아, 봄이 되아서 벌써 푸릇 푸릇 싹이 트는구나.’ 이리 느끼고 있다보면, 어느새 가을이 되아서 이파리가 단풍이 들, 든다 그말이여.

“세월이라 하는 것이 이렇게 덧없어.”

재세약무호말선在世若無毫末善이면,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만약 조그마한 선善이 없으면, 자기 마음 닦는 공부를 해 놓지 아니허면,

사장하물답명후死將何物答冥侯냐.
죽어서 무엇을 가지고 염라대왕 앞에가서 내 놓을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대가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
허고 물을 때에, 염라대왕이 그렇게 물을 때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어떻게 했습니다.”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나는 권리를 부렸습니다. 명예가 이러 이러한 명예를 가졌습니다. 이러 이러헌 재산을 많이 쌓았습니다.”
이 세상에 별별것, 이 자기딴, 모다 평생을 피땀 흘려서 노력을 허고 헌 것에 대해서 그것, 염라대왕 앞에 가서 말해 봤자 염라대왕이 그거 거들떠 보지도 않고,

“ 너 이놈! 니 명예허고 권리허고 지위 부귀 호강 허느라고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느냐?”
업경대를 그 앞에다 터-억 내 놓고 보면, 그것 버느라고 지은 죄, 쓰느라고 지은 죄, 그것 망허느라고 지은 죄가 소상허니 다 드러나버리는 것이여.

오직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꼬?’ 헌거,
그거라야 염라대왕이 터억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장을 허고 공경스럽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32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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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해(舊歲)와 새해(新年)이 포섭包攝되지 않는 곳】

 


【새해 첫날 소경공의 혼령을 위한 법어
이 새로운 날(新)과 옛 날(舊)이 교차하는 것을 당當하여 특별히 한 향로의 향香을 시설施設하고, 나아가 향香을 꽂으시고 이르시되,

"어제는 묵은 해(舊歲)이고 오늘은 새해(新年)인데,
그 가운데 있는[中有:중음中陰] 일구一句의 사람(子)은,
새로움(新)과 옛(舊) 양 쪽에 다 포섭包攝되지 않습니다.

소경공昭頃公 선가仚駕여!
신구新舊에 포섭되지 않는 一句를 알고 싶으십니까?

양구良久하고 이르시되,
새로움(新)과 옛(舊)에 포섭包攝되지 않는 곳을 알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향 연기 일어나는 곳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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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旦爲昭頃公仙駕下語
奉爲昭頃公仙駕 是當新舊之交 特設一爐之香 遂揷香云 昨日是舊歲 今朝是新年 中有一句子 新舊兩不攝昭頃公仚駕 欲識不攝新舊底一句麽良久云 欲識不攝新舊底須向香煙起處看

- 『함허당득통화상어록 涵虛堂得通和尙語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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