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3. 15:35ㆍ카테고리 없음
【설說과 청聽이 동시同時여】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인데
적겁매진광미휴積劫埋塵光未虧로구나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헌디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에
적겁매진광미휴積劫埋塵光未虧다.
갓 없는 우주법계가 텅 비고 밝은 거울인데, 그 거울이 무량겁 동안 그 거울에 쌓이고 쌓인 티끌로 그 밝은 빛이 나타나지를 못하는구나.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인데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과 역대 조사와 모든 성현들은 그 티끌에 파묻히지 아니하고, 턱 자아를 자각해서 확철대오를 해서 해탈도를 증득했는데, 우리 중생들은 무슨 일로 무엇 때문에 그 소리와 빛깔의 티끌 속에 파묻혀서 헤어나지를 못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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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로구나.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色相, 청황적백靑黃赤白의 빛깔이나 크고 작고 짧고 길고 허는 모든 모냥이 그것이 색色이 아니여. 모든 색상色相이 색상色相이 아니여.
모든 소리를 듣되 소리가 그 소리가 소리가 아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색상色相이다. 저것은 집이요, 저것은 나무요, 저것은 바위요, 저것은 자동차다, 저것은 산이고, 저것은 들이다. 다 그것 색상으로 생...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그것이 또 그것이 푸르다, 붉다, 희다, 검다, 또 이렇게 그것에 대해서 자기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또 그렇게 생각이 자꾸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색상色相이 색상色相이 아니다 이거여.
중생은 그걸 보고 ‘색상이다’ 하고 색상이라고 보고서 온갖 색상에 대한 알음알이가 일어나는데, 그 색상이 색상이 아니다.
또 소리를 들으면 저건 애기가 우는 소리다,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기계 돌아가는 소리다, 저건 기침소리다, 다 소리를 듣고서 소리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 다 생각을 이 생각 저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소리가 아니다 이거거든.
그러면 ‘색상色相을 보되 색상이 아니고, 온갖 소리를 듣되 소리가 아니라’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온갖 색상色相, 온갖 소리에 걸리지 아니하면, 그런데 다 거기에 걸리거든. 걸려 가지고 그 놈에 끌려서, 보면 보는 대로 끌려나가 가지고 그 놈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라고 하는 그 소리의 올가미에 걸려 가지고 그 놈에 끌려 다녀.
그런데 그 놈에 걸리지 아니하면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다. 친親히 법왕法王이 계시는 곳에 도달허느니라.
우리의 눈앞에 보는 모든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것,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 생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전부가 그것이 다 제법諸法인데, 우리 눈앞에 벌려있는 삼라만상 두두물물 이것이 제법인데, 그 제법諸法은 거울 속에 나타난 형상形相이다 그거거던.
이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그 이 끝없이 넓고 넓은 이 텅- 빈 거울 속에 나타난 모냥인데, 그 모냥 그 모냥이 모냥이 아니고, 산山이 나타나되 그 산이 산이 아니고, 소가 나타나되 소가 소가 아니여.
그러면 소가 아니고 산이 아니면 무엇이냐?
‘자기의 얼굴’이여 그것이.
거울 속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서 자기의 얼굴을 보는 거여.
무슨 소리를 듣되 그 소리 쪽으로 끌려가지 말고, 그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그 소리에서 자기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무슨 형상을 보되 그 형상으로 끌려가서 끌려 다니지 말고 그 ‘보는 형상에서’ 바로 자기를 보라 이거거든.
정든 사람이 죽으면 정든 사람이 죽었다 해 가지고 울고불고 슬픔에 잠기고 그것에 다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서 일단은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고, 자기의 죽음만 생각할 게 아니라, 바로 거기서 자기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러헌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소리와 모냥을 보고서 전부 다 그리 끌려 다니고 말..., 일생을 두고 무량겁을 그렇게 내려오기 때문에 생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혀.
눈으로 보는 모든 색상, 귀로 듣는 모든 소리, 우리의 생각에 떠오르는 온갖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생각들, 이러헌... 그것을 제법諸法이라 그래.
우리가 법法 허면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법法 허면은, ‘부처님’과 ‘법’과 거룩한 ‘스님’은 삼보三寶가 일체一切다 그러는데, 부처님이 설하신 법法만 법이 아니고, 우주법계의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그것을 제법이라고 그러는데, 왜 그것을 제법이라고 하냐 그 말이여?
우리 눈으로 보면은 전부가 무상無常한 것이고,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전부가 무상하고 허망하고 믿을 수 없는 것뿐인데, 그것을 어째서 거기다가 법... 제법이라 헌냐 그 말이여?
그것이.. 바로 그것이 법이기 때문에 법이라 그러거여.
그것을 통해서 자기로 돌아올 수가 있으니 그것이 어찌 부처님의 설하신 법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모든 것을... 모든 삼라만상의... 나나,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나, 동물이나, 이런 정情이 있는 모든 동물, 또 무정물, 산천초목, 일월성진, 이러헌 것들이 그런 것들이 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이 나다.
왜 그것이 나냐? 그것은 법신불法身佛이기 때문에 그런 거여. 법신불이요, 법신불의 몸띵이요, 법신불의 설법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 자기로 돌아올 수 있어야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 아니냐 이거거든.
그래서 그 거울 속에 나타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얼굴이요, 자기의 그 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 허공이라고 하는 큰 거울 속에 나타난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자기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그것이 법왕이 계시는 곳이더라. 법왕성이다 이거거든.
진진찰찰塵塵刹刹 온... 해나 달이나, 산이나 돌이나, 한 포기에 풀 잎파리나, 우는 새소리, 이것이 다 진진찰찰인데, 이것이... 이것이 법신불의 모습이요, 법신불의 설법이여.
왜 그러냐 하면, 법신불法身佛은 무설無說이 설說인데, 설한 바 없이 설하신 것이 법신불의 설법인데, 어떻게 설하시냐?
동시에 설說하시면서 동시에 듣는 거여.
한 포기의 풀도 간단없이 법을 설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모든 설법을 듣고 있어.
한 알... 한 덩어리의 주먹만한 돌, 좁쌀 만한 모래알 하나 하나라도, 바로 그 위치에서 위없는 법을 설하면서 동시에 법을 또 듣고 계신 것이여.
설說과 설한... 설說할 때 따로 있고 들을 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설說과 청聽이 동시同時여.
이러헌 도리를 우리가 바로 깨달라야 하는 것이다.
이러헌 도리는 말이나 생각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이여.
중생의 사량분별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여.
이것은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하는 거여.
이러헌 법문은 어떻게 허면은 그러헌 도리를 깨달을 수가 있느냐?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그 소리 듣자마자 ‘이무엇고?’.
눈을 통해서 무슨 모양을 보자마자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이뭣고?’ 슬픈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기쁜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붉은 것을 보아도 ‘이뭣고?’, 파란 것을 보아도 ‘이뭣고?’, 좋은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속상한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무슨 소리를 듣든지, 무슨 모양을 보든지 그것을 듣고 봄과 동시에 그것에.. 그것을 인연해서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즉시 ’이무엇고?’. 이렇게 다잽이를 해 가면, 마침내는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설說하고 들음이 동시인 법신불法身佛의 설한 바 없이 설說한 법문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신불法身佛은 우리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오직 보신報身이나 화신化身만이 우리는 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것은 초보의 단계에서는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말을 해야 또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는, 정말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최상승법, 이 법보제자는 진진찰찰塵塵刹刹이 다 부처님이요, 새소리 닭소리 바람소리 일체 소리가 다 부처님의 설법이요, 일체 색상이 다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러니 거기에 즉即해서 참 나를 깨닫는 화두로 돌아와야 한다고 허는 철저한 신심을 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41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