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禪, 멋】
【무엇이 멋】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단지공월낙담심但知空月落潭心하면
쟁사치원왕노형爭似痴猿枉勞形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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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그대가 함이없는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천차만별 가운데를 여의지 말지니라.
단지공월낙담심但知空月落潭心하면,
쟁사치원왕노형爭似痴猿枉勞形고,
다못 저 허공에 달이 연못 가운데 떨어진 줄만 알면 어찌 어리석은 원숭이가 몸을 헛되이 수고롭게 헌 짓과 같은 짓을 헐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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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한 원숭이가 있었는데, 숲 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무리를 지어서 놀다가 맑은 샘을 디리다(들여다) 보니 그 샘속에 아주 쟁반같은 밝은 것이 그 속에 빛나고 있다 그말이여.
‘이렇게 숲 속에 살아도 이 못 속에 저 밝고 좋은 것이 있는줄을 몰랐는데 세상에 저것을 건져내야겄다.’
그래가지고 못이 짚으니까(깊으니까) 그 무리들을 불러 모아가지고 차례 차례 나무, 나무에 꼬리를 감고 그래가지고 그 다음 원숭이는 그 원숭이의 팔을 잡고 또 그다음 원숭이는 그 팔을 잡고 해서 여러 마리가 팔에 팔을 이어서 잡고서 맨 나중에 그 원숭이의 우두머리가 마지막에 그 연못 속에 있는 밝은 것을 건지기 위해서 손을 넣으니까 그 손이 물에 닿자마자 흩으러져 없어진다 그말이여. 그 손을 빼고 또 한 참 있으니까 또 물결이 가라앉자 또 그 밝은 것이 나타나. 또 손을 넣어. 손을 넣으면 또 흩어져. 그러허기를 여러 차례 시도허다가 결국은 아무리 팔 힘이 센 원숭이라 허더라도 피로해가지고 나중에 맥이 풀려가지고는 그 한 나무를 잡고있던 원숭이의 팔이 손가락이, 손가락과 그 꽁지로 단단히 잡았지만 힘이 빠지니까 그걸 놔 버릴 수 백엔 없었다 그말이여.
여러마리가 매달려서 샘으로 요롷게 매달리니 그 여러마리의 무게가 가중이 되아가지고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손이 빠지니까 그 많은 잔나비들이 옴막 물에 빠져 가지고 허우적 거리게 되았다.
이것이 바로 어찌 어리석은 원숭이가 헛되이 몸을 수고롭게 헌 것과 같을 것인가.
그 못 속에 비친 것은 하늘에 있는 달이 그 맑은 물에 비추어서 마치 못 속에 그러헌 밝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 원숭이가 그 못 속에 있는 달이 하늘에 있는 달인 줄만 알았다면 어찌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헐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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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선예원禪藝院을 어떻게 여기에 개원開院을 해가지고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삼철년(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탄생허셔서 왕궁에 부귀를 헌 신짝처럼 버리시고 출, 출가하셔서 설산에서 육년이라고 허는 장구한 세월을 어... 삼씨 하나와 보리쌀 한 알씩을 잡수면서 그 무서운 고행을 허셧어.
마침내 보리수 하에서 대도를 성취해서 열, 팔십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 까지 사십구년 동안을 앉은 자리 더울 겨를이 없이 인도 천하를 다니시면서 어... 불법을 펴셨다 그말이여.
그 이후로 삼철년이 되는 오늘날 까지 동남아와 중국 한국 일본 지금은 서양에 까지 불법이 들어와서 활발히 불교 포교가 전개되고 있는데 대관절 그 목적이 무엇이냐.
행여나 못 속에 떨어져 있는 그 달을 건질랴고 허는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계속 하고있지는 않은가.
대부분 도道를 닦는다, 참선叅禪을 헌다 하면 - 버뇌(번뇌)망상을 다 끊어 뻐리고(버리고) 그래가지고 어... 참나를 깨닫는다 -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허지만, 세속世俗에 부귀영화富貴榮華 흥망성쇠興亡盛衰, 또 일신一身에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주宇宙에 성주괴공成住壞空, 우리 생각에 생주이멸生住異滅 이러헌 현상現狀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면서 이 계속이 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차만별중千差萬別中이다.
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을 여의고 함이없는 이치, 생사없는 도리, 영원한 이치를 찾을랴고 시도를 허고있진 않는가.
그러헌 시도는 평생 동안 되풀이하고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헐 때 까지 되풀이 헌다 해도 마침내 물 속에서 달을 건질 수 없듯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을 여의고 찾아서는 참나를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천차만별 가운데에서 그놈에 즉即해서 참 나로,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알 수 없는 나의 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선예원禪藝院이라.
이름 자체가 매우 생소生疏한 이름입니다.
선禪과 예藝가 어떻게해서 이 한 자리에서 이루어 질 수가 있는가. 한 자리에 어떻게 만나며 어떻게 그것이 공존共存할 수가 있는가.
인간人間은 누구나 참다운 것, 진실眞實한 것을 좋아하고 또 아름답고 멋진 것을 다 추구하고 바랍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莫論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 진실한 사람은 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 멋진 것은 보고 다 부러워하고 자기도 그런 것, 그것을 누리고자 합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고가옷 예쁜 신 멋있는 장난감 끝없이 그것을 바래고, 나이가 자라면서 어른이 되아서도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고 머리를 아름답게 멋있게 꾸미고 좋은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또 좋은 집도 근사하게 꾸며서 살고싶고 좋은 차도 갖고 싶고 공원이나 국가도 아름답게 꾸밀려고 모다 애를 쓰고 있습니다.
본능적本能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참다운 것을 좋아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웁다’ 하는 것, 또 ‘멋이 있다’고 하는 것, <‘멋’이라고 허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이러 이러한 것이 멋이 있다...’
이렇게 말로써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멋이라고 허는 것은 조합調合과 균형均衡이 잡히고 그 상황狀況에 잘 어울리면 그것을 멋이 있다고 그럽니다마는, 그 멋, 그렇다고 해서 갑甲이라 한 사람이 그 옷, 그러헌 빛깔과 그러헌 모냥의 옷을 입었다고, 입어서 참 멋있다고 해서 을乙이라는 사람도 덥어놓고 그렇, 그와 똑같은 것을 입으면 멋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를 못하고, 그 사람의 생김새와 얼굴 빛깔과 신체적인 구조와 또 그 사람의 연영(연령年齡)과 그 사람의 그날 그 시간과 장소에 탁 조화調和가 되아야 거기서 멋이 나오고 남들이 그걸 보고 아름답다고 그러는 것이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연영과 그런 것도 가리지 않고서 덥어놓고 그것만 입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멋’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 ‘무엇’이 결국은 그 ‘무엇’이라고 허는 것을 깨달라야, 그것을 터득해서 자유자재로 연출을 헐 수 있어야 멋을 아는 사람이고 또 자기를 멋있게 가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
그래서 예술藝術을 하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이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또 참선叅禪을 좋아하고, 창唱을 헌 사람 노래를 헌 사람 그림을 그린 사람 이... 그 예술을 헌 사람치고 옛날부터 대체적으로 이 도道를 좋아하고 도인道人을 숭배하고 그러는 것을 많이 보아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술이 찾는 그 아름다움, 그 멋이라고 허는 것이 진리, 그 ‘무엇’, ‘무엇’을 찾는 그것과 중요한 점에서 매우 아주 상통相通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위대한 예술가藝術家를 만나면 천진난만天眞爛漫하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한 그러헌 모습을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가니까 굉장히 아주 목에 힘을 주고 거만하고 그럴 것 같은데, 그런 분을 만나보먼(면) 아주 어린애처럼 천진난만天眞爛漫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예술도 어느 수준을 넘어서 훌륭한 단계에 이르면 아주 어린애가 되는 것입니다.
도인道人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도道가 깊어 갈수록 점점 천진天眞해지는 것입니다.
진리眞理라고 허는 것은 참선叅禪헌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술藝術이 되았건 어떠헌 방면에 무술武術이 되았건, 어떠헌 방면에라도 차츰차츰 높아져서 궁극窮極에 도달하면 궁극에 가서는 일맥상통一脈相通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에는 경經을 열심히 읽어서 교리敎理를 통달通達허고, 염불念佛을 열심히 해서 삼매三昧를 터득攄得하고, 주력呪力을 해가지고 즉신성불即身成佛하는 도리道理에 이르고, 기도祈禱를 해서 업장業障이 소멸消滅하고 나와 부처와 또 기도하는 것이... 그것이 에... 분별分別이 없어. 그래가지고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아가지고, 그래도 거기에서도 결국은 처음에 기도를 헐 때는 무엇인가 구하는 바가 있어서 허지만 일심으로 허다보면 구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나도 없고 또 우리가 기도하는 상대인 부처님도 잊어버리고, 그리고서 거기서 더 나아가면 결국은 업장이 소멸이 되면서 참된 경계에 돌입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經이나 염불念佛이나 주력呪力이나 기도祈禱나 그리고 어떤 육바라밀六波羅蜜 행行을 닦는다 해도 그러헌 것들은 어떠헌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적인 방편方便은 될 것입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고자 한 궁극에 말씀은 말로써 헐 수 없고 귀로써 들을 수 없는 활구참선법活句叅禪法일 것입니다.
예술도 문학文學이라든지 회화繪畫라든지 조각彫刻이라든지 또는 무용舞踊이라든지 또는 음악音樂이라든지 글씨 그 밖에 무슨 도예陶藝 그러한 갖가지 모두 이 예술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러한 여러 가지의 예술이 궁극에 무엇을 추구하느냐하면 ‘아름다움’, ‘멋’, 멋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 멋이 아까 말씀헌 대로 ‘멋’이 ‘무엇’이란 말이 줄어져서 ‘멋’이 되았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진짜 멋을 알고 싶으며는 이 ‘무엇’,
고정불변固定不變한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서 수시로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변동變動하면서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이루는 그 ‘무엇’.
그 ‘무엇’을 터득허지 않고 말로 배와가지고 이리저리 꾸며서 해봤자 그것은 참다운 멋이 거기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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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응중연수처적外應衆緣隨處寂하고,
밖으로는 뭇 인연에 응해, 응허되 곳을 따라서 적적하고,
내명일적응무휴內冥一寂應無虧다,
안으로는 적적한, 한 적적함에 명, 명합허되 뻑뻑이 이지러짐이 없이 모든 곳에 응해야 한다.
토리회회여해대肚裏恢恢如海大하야,
일임천차유여무一任千差有與無다.
우리의 가슴 속은, 뱃속은 넓고 넓고 허공과 같이 허널러서, 허널르고 바다와 같이 크다 그거거든.
일임천차유여무一任千差有與無여,
한결같이 천차만별의 이 유무의 세계, 시비의 세계, 흥망성쇠의 세계, 생로병사의 세계에 일임해뻐려. 밖으로 모든 중연衆緣에 적절히 응허되 속으로 ‘이 뭣고’... 하면 그 적적한 데에 떠나지 아니하고 안으로 항상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아서 적적寂寂한 데에 명합冥合허되 그렇다고해서 사목고해死木枯海처럼 되는 것이 아니여.
사람이 오면 사람을 상대허고, 일이 오면 일을 상대허고, 생生이 오면 생生을 상대허고 죽음이 오면 죽음을 상대허되 걸림이 없고 이지러짐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참되게 살고 여유있게 살고 멋있게 사는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은 남녀와 노소가 없습니다. 이만큼 젊었을 때에, 이만큼 덜 늙었을 때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빠를 때다’이러헌 말이 있습니다마는 당장 지금부터 –물론 여기에 참석하신 분은 벌써 다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고 아주 활구참선活句叅禪,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실천하는 그러헌 분들이 오셨으리라고 생각헙니다마는 주마가편으로 어챘튼지(어쨌든지) 열심히 정진을 해서 이 도량이 예술과 선, 선과 예가 병행 해 나가면서 참 달마를 창조헌다고 헐까, 내 자신이 참 달마가 되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 송담선사 제방 13번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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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